관동 대지진

덤프버전 :

大正(たいしょう12(ねん 関東大震災(かんとうたいしんさい
다이쇼 12년 관동 대지진

발생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UTC+9)
진앙
일본 제국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1][2]
(現 일본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
진원 깊이
23km
규모
Mj 8.1 / Mw 8.2 / Ms 8.3
진도
6[3]
간토[4], 야마나시
XI(Extreme)[5]
지진
지속 시간

약 7-8분[6]
분류
해구형 지진, 수도직하지진
해일
대해일경보
시즈오카현 최고 12m
(시즈오카현 다카타군 아타미마치)[7]
여진
최대여진:M 7.3, 진도 6
M7급 여진 6회
인명
피해

최소 105,385명 사망/실종
최소 수십만 부상
재산 피해
약 45억 엔
가옥 11만 채 완파/10만 채 반파
일부 군함 파손
대피
수십만 명
각 도도부현의 최대진도 목록
6
사이타마, 치바, 도쿄, 가나가와, 야마나시
5
도치기, 나가노, 시즈오카
4
후쿠시마, 이바라키, 군마, 도야마, 후쿠이, 아이치, 시가, 오사카, 도쿠시마
3
미야기, 니가타, 이시카와, 기후, 미에, 나라, 와카야마, 에히메, 구마모토
2
홋카이도 남부, 아키타, 야마가타, 교토, 효고, 오카야마, 히로시마
1
시마네, 카가와
각 도도부현의 최대진도 목록(심플)
6
간토[8], 야마나시
5 이상
도치기, 나가노, 시즈오카
1 이상
홋카이도, 도호쿠[9], 이바라키, 군마, 주부[10], 간사이[11], 주고쿠[12], 시코쿠[13], 구마모토

1. 개요
2. 경과
3. 피해
4. 복구
5. 영향
7. 대중매체에서
8. 기타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지진 직후와 이후의 구호 활동을 촬영한 영상.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에 일본 제국 사가미 만을 진앙지로 발생했던 사가미 해곡 대지진. 직전인 1922년에도 큰 지진이 있었고 1894년 메이지 도쿄 지진과 1855년 안세이 에도 지진도 있었으며 이전에도 칸토 남부 지방(미나미칸토)을 진앙으로 하는 지진은 여러 번 있었지만 보통 '관동대지진'이라고 하면 1923년에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2023년 9월 1일 일어난 지 100년이 되었다.


2. 경과[편집]


관동대지진은 5분 간격으로 세 차례 일어난 해구형 지진이다. 최초에 발생한 M 8.1의 진원은 11시 58분 경 수 초 간격으로 오다와라와 미우라 반도의 지하에서 약 십수 초 동안 일어났다. 계속해서 M 7.2의 첫 번째 여진이 도쿄만에서 12시 1분에 일어나고 2번째 M 7.3의 여진이 야마나시현에서 12시 3분에 발생하였다. 이 세 지진은 모두 약 5분 이상 계속되었다.

이후에도 12시 7분 이즈반도 근해에서 규모 6.0, 11분 규모 5.6, 17분 규모 6.4, 13시 20분 규모 6.2의 여진이 일어났다. 사가미 만에서도 12시 23분과 40분에 규모 6.5의 여진이 두 차례 일어났으며 12시 48분에는 야마나시현에서 규모 6.8의 여진이 도쿄만 남동부에서 규모 7.1의 여진이 관측되었다.

13시 31분, 14시 22분, 16시 38분 시즈오카현에서는 각각 규모 6.1, 6.6, 6.6의 여진이 관측되었다. 15시 19분 이바라키현에서는 규모 6.3의 지진이 관측되었다. 17시에는 가나가와현에서 규모 4.3의 여진이 관측되었다.

지진 다음날에도 강력한 여진은 계속되었다. 3시 4분 야마나시현에서는 규모 불명, 진도 5의 여진이 관측되었고 4시 13분에는 후지 5호 근방에서 규모 4.6의 지진이 관측되었다. 11시 46분에는 치바현 남동부에서 무려 규모 7.6의 여진이 관측되었고 18시 27분에는 같은 곳에서 규모 7.1의 지진이 관측되었다. 22시 9분에는 시즈오카현 이즈 반도 부근에서 규모 6.5의 여진이 관측되었다. TV아사히 보도

이틀만에 규모 6 이상의 여진이 간토지방에서만 무려 15번[14]이나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패닉에 빠졌다.[15] 정부 조직이 마비되었으며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시간인 오전 11시 58분은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이날 도쿄를 비롯한 지진 피해 지역에서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각 가정집과 요식업소에서 불을 사용하였는데 지진이 발생하면서 불이 대부분 목재 건물이었던 피해 지역의 건물들을 불태우면서 널리 퍼져나간 것이다. 지진 사망자의 90%가 화재로 인한 사망자다. 첫 지진이 일어났을 때 도쿄에서 발생한 화재가 134건이었다.[16] 물론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지진이 발생한 시점이 오전 11시 58분이었기 때문에 가장 대처하기 용이한 시간대였다는 점이었다. 만약 1976년 탕산 대지진마냥 새벽 시간대에 일어났다면 최대 20만 명은 사망했을 수 있다. 최초 시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재가 곳곳에서 일어났음에도 불이 났으면 그곳을 피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큰 위기 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진으로 인해 소화전들이 파괴되었고 성의 해자 물을 끌어서 소화 작업을 할 정도로 소화 작업은 열악했다. 이미 초기 시점부터 화재가 도쿄의 방재 능력을 넘어서고 있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기상여건도 화재 확산을 더욱 빠르게 했는데 지진 전날인 8월 31일 일본 큐슈 지방에 태풍이 상륙했고 지진 발생 당일인 9월 1일 오전에는 동해로 빠져나가 있었다. 이 태풍이 일본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고 도쿄를 비롯한 칸토 지방에 거센 남풍이 불고 있었다.[17] 목재 건물들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선 도시구조에 지진이 발생해 지붕을 덮고 있던 기와들이 벗겨진 틈으로 강풍까지 부는 바람에 불티들이 사방으로 날려 화재는 순식간에 확산되어 화염 소용돌이까지 발생했다. 이에 대한 삽화 이로 인해 도쿄에서 발생한 화재가 약 240여건[18]이었고 스미다 강변 양쪽 모두 화재가 확산되었으며 가재를 챙기느라 피난이 늦어진 사람들이 미처 적절한 장소로 피하지 못하고 스미다 강 쪽으로 몰리게 되었고 그 중 6개의 다리에 갇힌 사람들은 강 양편에서 화재가 밀려오는 걸 쳐다볼 수밖에 없어서 다리 위에서는 아수라장이 펼쳐졌고 이로 인해 압사나 화재로 인한 사망자를 제외한 익사한 사람만 5000명 이상이었다. 한편 4만여 명의 피난민이 몰렸던 스미다 강 바로 근처에 있던 육군 피복소 창고에서는 거대한 화염 소용돌이가 발생해[19] 단 15분 만에 3만 8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20]

3일간의 화재로 도쿄의 약 40퍼센트가 전소되었다.


3. 피해[편집]


리히터 규모 7.9에서 8.3 사이로 추정되며 7분 정도 지속되었다. 도쿄 지역과 요코하마 지역, 치바현, 가나가와현, 시즈오카현 등에서 10만 명에서 14만 2천 명 이상이 사망했고[21] 3만 7천 명이 실종되었다. 10만 9천여 채의 건물이 전부 파괴되었고 10만 2천여 채는 반파되었다. 이로 인한 사상자와 실종자는 동일본 대지진의 6배, 고베 대지진의 16배다. 피해액은 지진 발생 전년도 국민총생산액의 1/3에 이르렀다.

그리고 요코스카 등 관동 지역에 있던 군항의 일부 함들이 피해를 입었다. 대표적으로 항공모함으로 개장하던 아마기급 순양전함 1번함 아마기가 대파되었고[22] 미카사가 부두에 부딪혀 침수되는가 하면 도쿄의 빽빽히 밀집된 목조 건물로 인해 화재선풍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화재가 매우 빠르게 번져나갔다. 이러한 화재로 인해서 지진 이틀 후 도쿄의 기온은 무려 46도까지 올랐다.

또 도쿄 혼조 육군 피복창 광장에선 수많은 인파가 피난 갔는데 그새 스미다강에서 분 세찬 바람 때문에 피난 보따리에 불이 붙어 3만 8천명이 타 죽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강에 시신이 너무 많아 시신을 밟고 강을 건널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4. 복구[편집]


지진 이후 복구하는 과정에서 혼란이 컸던 이유는 당시 일본 내각총리대신 자리가 공석이라 내각이 어수선했던 점도 작용했다. 가토 도모사부로 총리가 지진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 대장암이 악화되어 갑자기 사망해서 우치다 고사이 외무대신이 총리 권한대행 중이었다.

지진 직후 참모본부에서는 도쿄에서 다른 곳으로 천도를 검토하였다. 그러나 지진 발생 11일 후 발령된 조서에 따라 도쿄를 계속 수도로 삼기로 결정되자 천도설은 흐지부지되었고 이후 복구 과정에서 현대 도쿄의 기틀을 구성하는 도로철도, 그리고 공원 등이 계획되어 더욱 근대적 모습으로 도시가 재건되었다. 특히 공원은 이후 있을지 모르는 대지진의 피난처 구실을 하게끔 만들어졌다. 그러나 애써 재건한 도쿄는 제2차 세계 대전도쿄 대공습을 거치면서 다시 파괴되었다.

참고로 일각(특히 미국 쪽 학계)에서는 이 지진 후 복구를 도시공학적 측면에서는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는데 대지진으로 인프라가 대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설계가 기존의 구조를 답습했기 때문이다. 특히 도로망의 개척이 미비하여 이 점은 현대까지도 도쿄 도심이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게 하는 중요한 한 가지 원인으로 지목된다. 반면 요코하마는 이 지진으로 항구 수심이 더욱 깊어지고 인프라도 도쿄보다는 더 정비되어서 현대적인 항구로 거듭났다.


5. 영향[편집]


국가적 차원의 재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주었기 때문에 이후 일본이 근대에서 현대로 변화하는 데 긍정적 영향을 준 측면도 있다.

이재민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간사이 지역에 피난민들이 자리잡으면서 오사카의 인구가 폭증해 잠시 일본 최다 인구의 도시가 되는 일도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간토와 간사이 지방의 인적 교류가 많아지면서 요리 문화나 대중문화 등 문화적 교류가 증가했다.

내진, 내연에 관심을 갖게 되어 건축 분야에서도 발전이 있었다. 간토 평야라는 넓은 평지 위에 도시가 위치했기 때문에 당시부터 도시권이 무분별하게 확장되는 중이었는데 지진과 그에 동반한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은 게 계기가 되어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도시정비 및 도시계획이 자리잡았다.[23] 스미다 강 위를 지나는 여러 교각들이 내진 설계에 기반하여 지어진 것도 이 시점부터이며 일본 최초의 아파트도 세워졌다.[24] 1924년 5월 내무성에 의해 현재 도시정비 사업을 담당하는 UR의 전신격인 '도준카이'(同潤会) 재단이 설립되었으며 이 재단의 주도로 1933년까지 도쿄와 요코하마 곳곳에 이재민들을 위한 아파트가 건립되었다. 워낙 튼튼하게 지었기 때문에 몇몇 아파트들은 2000년대 초까지 남아 있었는데 가장 유명한 건물이 오모테산도에 있는 '아오야마 아파트'였다. 2003년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오모테산도 힐즈'란 상가 건물로 재건축되었으나 딱 한 동이 그대로 보존되어 카페건물로 쓰인다.

반면 부정적인 방향으로는 경제적 피해 규모가 당시 국민총생산(GDP)의 약 37%에 달했고 일본인들이 자국이 안전한 땅이 아니라는 인식을 확실히 숙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때문에 경제 불안을 야기하게 되었다.[25] 이듬해 금 수출이 금지되고 일본 군부의 폭주에 힘을 실어준 일련의 불황이 시작되는 등 사실상 일본 패망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도 할 수 있다.

본래 히로히토 황태자(쇼와 덴노)는 1923년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대지진의 참상을 본 그는 결혼식을 미루었다. 히로히토 황태자의 약혼녀 구니노미야 나가코 태자비는 대지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위로하는 와카를 지었으며 사다코 황후도 이재민들을 위로하는 활동을 펼쳤다.

1925년에 건축물법 시행규칙의 구조물 강도 규정이 개정됐고 이에 맞춰 지진 관련 규정이 세계 최초로 제정됐다. 도쿄대학에는 지진연구소가 설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방재의 날'도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9월 1일에 맞춰 정해져 있다. 이날을 낀 8월 30일부터 9월 5일은 방재 주간으로 중앙정부를 비롯해 곳곳에서 방재훈련과 행사 등을 치른다.

6. 관동대학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관동대학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대중매체에서[편집]


  •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소타가 도쿄에서 일어났던 100년 전의 대지진도 미미즈가 일으켰다고 말하는데 관동대지진을 의미하는 것이다. 1923년의 정확히 100년 후인 2023년이 작중 시점이다.
  • 데빌 서머너 쿠즈노하 라이도우 대 아바돈왕》에서는 해당 대지진이 없는 다이쇼 20년이라는 가상의 세계가 만들어졌다.
  • 일본인 소설가 나카지마 아츠시의 《순사가 있는 풍경》은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을 조선인의 시각으로 서술한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 피타텐의 배경 스토리에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온다.[26]
  • 상주전신관학원 팔명진에서는 일본 최대 최악의 흉령 나키리 쿠보가 관동대지진을 일으킨 원흉으로 등장한다.
  • 다이쇼 소녀 전래동화에도 등장했지만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고 그냥 이름만 나오고 강도가 심한 지진 정도로만 끝났다.
  • 가상역사물 재벌강점기에서는 주인공 어진이 관동대지진을 대비해 일본에 거대한 돔을 지어서 대피소를 만들고 구호물자도 구비했으며 오세창과 전형필이 모아온 문화재들까지 보관했다. 그리고 지진이 일어나자 구호물자들과 의료용품들을 풀고 조선인 구조대원들과 의사들, 러시아에서 망명해 온 의사, 간호사들의 활약으로 조선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져서 자경단이 오히려 미즈노 렌타로가 쓴 공문[27]에 분노했다.
  • 라이트 노벨유녀전기》에서는 주인공인 타냐 데그레챠프가 관동대지진 당시 일어난 화재와 상승기류로 인한 화염 회오리를 모티브로 한 술식이론을 내놓아 알렌시 학살에서 민간인 학살에 사용한다. 전생에 일본인이었던 주인공이 그 사건을 악의적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주인공의 악한 성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 환상게임 백호선기에서는 1권에서 줄에 묶인 사신천지서가 풀린 순간 이 대지진이 일어난 것으로 묘사된다. 불이 붙은 지붕이 떨어지기 직전의 위험한 상황에서 사신천지서를 연 오스기 스즈노는 잠시 책 속의 세계로 들어왔다 나오게 되는데 나왔을 땐 이미 도쿄는 잿더미가 된 상태였다. 이후 스즈노는 인신매매단에게 위협당하다가 스즈노의 아버지의 지인인 오이카와에게 구출된다.
  • 대체역사물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한일합방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일본에 많지 않아 관동대학살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주인공 조지원이완용을 시켜서 콜레라를 퍼뜨려 생화학 테러를 저질러 피해를 더 키웠고 집권하던 일본 해군 세력에 부담을 주고 결국 일본은 내전에 빠진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역사 변화로 주인공이 미리 한국인을 대피시키고 한국인들이 일본에 건너가지 않아서 일본에 건나가서 일하는 대만인, 중국인들이 학살당한다. 원래 역사의 한국과 다르게 일단 주권 국가의 국민인 중국인을 학살한 덕분에 중일관계는 더 악화된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원더풀 라이프에 관동대지진을 경험한 할머니의 영혼이 조선인들이 억울하게 학살된 것을 봤다고 증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 Apple TV+에서 제작한 파친코 7화에서 주인공 한수가 관동대지진으로 아버지를 잃고 가정교사를 맡았던 미국인 가정과 같이 미국으로 피난가려는 와중에 지진으로 인해 미국인 가족을 잃는 장면이 묘사된다. 더불어 자기 집안을 보듬어 주었던 야쿠자 덕에 자경단에게 살해당할 뻔한 위기를 넘기고 다른 한국인들이 자경단에 의해 헛간에서 불타죽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공포에 떠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드라마 말미에 지진이 일어난 날짜와 지진에 의해 희생당한 희생자 수, "무고하게 살해당한 한국인들이 있었으며 그 수는 알 수 없지만 역사학자들은 수천에 이를것이다.”라고 표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 YOASOBI의 노래 大正浪漫의 원작 소설인 NATSUMI의 소설 다이쇼 로맨스에서는 1923년 다이쇼 시대를 살아가는 여학생 치요코와 2023년 현재를 살아가는 남학생 토키토가 서로 편지를 주고받던 어느 날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는 결정적 사건이 뉴스에 나오는데 그 사건이 바로 관동대지진으로, 2023년을 살아가는 토키토의 시대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날로부터 1세기가 지났다는 뉴스가 나온다. 소설 뒷부분에 따르면 치요코는 지진에서 살아남아 2000년대까지 살았다.


8. 기타[편집]


일본 제국 폭주의 시작을 알린 대재해로 평가된다. 가뜩이나 피해를 복구하는 데 엄청난 예산을 썼던 일본은 이후 1927년 쇼와금융공황과 30년의 쇼와공황, 그리고 대공황을 맞아 경제는 수직으로 추락했고 불만이 가득 쌓인 군부가 폭주하기 시작해 5.15 사건2.26 사건으로 난리를 벌이더니 기어이 일본 정부는 군부에 굴복하고 미쳐돌아가는 군부는 만주 사변을 일으키고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패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지진 직후 미국에서는 일본을 돕자는 모금운동을 벌였다. 이미 제1차 세계 대전 때 동맹국으로써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우호관계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1940년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을 체결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파일:attachment/관동 대지진/관동대지진.jpg

대지진으로부터 1주일 뒤인 9월 8일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미 해군의 클렘슨급 구축함 수 척이 집단 좌초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의 주된 원인은 궂은 날씨로 인한 시계 악화였지만 지진으로 인해 거칠어진 해류와 파도 역시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당시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에는 일본이 반출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 지진으로 인해 모두 소실되었고 대출본 47권만 살아남았다. 이 대출본 47권은 2006년에 한국에 반환되었다. 심지어 오쿠라호텔 조선관으로 쓰인 경복궁 자선당도 대지진 때문에 불타 기단만 남아 방치됐고 결국 1999년 삼성문화재단이 기증 형식으로 반환할 당시 파손된 기단 위에 복원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새로 지어야 했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당시도 나카무라 에이치 참의원이 "사건 이후 일어난 화재가 재일 한국인의 방화일 수도 있다"는 식의 헛소리를 했다가 민단에 사과해야 했다. 그리고 2011년 초 관동대지진에 맞먹는 규모의 대지진이 도호쿠에서 일어났는데 트위터에서는 "재일 조선인(한국인)과 지나인(중국인)이 우물 물에 독을 타고 혼잡한 틈을 타서 부녀자강간하기 쉽습니다. 조심하세요."라는 투로 자아비판 개드립을 치기도 했다. 혐한 우익들의 선동이 아니라 자아비판성 드립이니 절대 혼동하지 말 것. 21세기에 우물 드립을 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처음 트윗한 사람도 언급한 부분.

일본 영화계의 거장인 구로사와 아키라는 어린 시절 이 지진을 목격한 적이 있다. 한번은 군중들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 이 낙서가 증거다!'라고 선동했는데 정작 그 우물의 낙서는 아키라가 장난 삼아 의미 없이 그린 것뿐이었다. 또 아키라의 아버지가 조선인이라는 오해를 받아서 집을 자경단이 포위했는데 아버지가 당당하게 호통을 치자 자경단은 스스로 물러났다고 한다.

도쿄제국대학 출신 작가 나카지마 아츠시는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순사가 있는 풍경》 이나 《호랑이 사냥》 과 같은 작품을 쓰기도 했는데 일본인들이 느낀 정체불명의 공포감과 당시 조선인들의 삶이 어떻게 어우러져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지는지 잘 보여준다.

다이쇼 시대의 대표 작가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지진이 발생한 후 자경단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러나 첫날부터 그 참상을 목격한 뒤 바로 집으로 돌아와 버렸고 평생 자경단 참가 경험을 후회했다고 한다. 당시 태동기였던 일본 애니메이션의 인프라도 해당 지진으로 인해 사실상 쑥대밭이 되었고 이에 따라 '아니메 원년 3인방'[28]이기도 했던 기타야마 세이타로(北山清太郎)가 조기 은퇴 수순을 밟았다.

카이세이 중학교는 이 지진의 여파로 교사가 완파되어 간다아와지초에서 현재의 니시닛포리 교사로 이전했다.

매년 9월 1일마다 도쿄도 요코아미쵸 공원에서 추모식을 열고 있으며 1970년대 이후 도쿄도지사들이 조선인 피학살자들에게도 추도문을 보내지만 당시를 기억하는 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고령 등으로 사망했고 오래된 사건이라 대중들 뇌리에도 희석된 터라 크게 치르지도 못하고 조용히 지나가는 수준으로 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나마 일본공산당이 추모식에 당대표부터 중의원, 참의원, 지방의원들까지 참석할 정도로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입헌민주당에서도 개인 자격으로 오기도 한다. 2017년 들어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자민당 측의 역사 왜곡 발언을 의식하여 주최 측에 조선인 피학살자 추도문을 보내지 않기 시작하자 파문이 일었다.

추도비도 있는데 케이세이 전철 오시아게선 야히로역에서 아라카와 강 방향으로 주택가 골목길을 걷다보면 있다. 이 추도비는 일본인들이 관리해 왔으며 무궁화도 심어져 있다.#

가끔 당시의 선동 문구였던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가 현대 일본에서는 패러디의 대상이 되곤 하는데 역으로 한국에서 이걸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주로 한국이 진짜로 일본에 빅엿을 먹이는 상황에서 통쾌함을 담아 쓰거나 더 나아가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에 의해 피해를 입었을 때, 이상한 걸 보고 배웠을 때, 얼토당토않은 남탓을 할 때, 트롤링을 저지를 때 ○○가 ●●에게 ☆☆을 풀었다는 식으로 밈화된다. 아무리 용도가 그렇다고 해도 역사와 관련된 경우 민감해질 수 있으니 있으니 가급적이면 쓰지 말자.

2020년에 도쿄도는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는 단체들을 헤이트스피치로 인증하였다.#

2021년 2월 13일 동일본 대지진의 여진 발생 후 일본의 SNS 등에서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인종차별가짜 뉴스가 확산됐다고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14일 보도했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후쿠시마현과 미야기현에서 발생한 강진을 둘러싸고 또다시 차별적인 발언, 루머, 불확실한 정보가 트위터, 유튜브 등에 난무했다.", "재해 때마다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전했다.("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日 지진 후 퍼지는 가짜뉴스, "조선인이 우물에 독 풀었다" 日 지진뒤 SNS 퍼진 루머)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우물을...

일본군 위안부를 매춘부로 규정하는 논문을 발표해 논란을 불러일으킨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 교수 존 마크 램지어가 2021년 8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출간될 논문에 관동대학살을 부정하는 내용을 실었다.# 그것도 단순히 조선인 희생자들의 숫자가 과장되었다는 수준을 넘어서서 다수의 재일 조선인이 실제로 범죄자였고 진짜로 우물에 독을 풀었기에 자경단에게 처단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참고로 이 주장들은 모두 조선총독부발 보고서를 근거로 한 것이다.

신주쿠, 시부야 일대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도쿄의 다른 지역에 비해 고지대인 이 일대의 피해가 적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쿄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으로 인식된 이 일대에 도쿄 부도심이 형성되었다. 현재에도 다른 도쿄도 구부에 비해 이 지역을 비롯한 도쿄 서부 지역이 지질학적으로 안전하다고 평가받는다. 반면 스미다구, 에도가와구 등 동부 지역은 강을 중심으로 충적층이 형성된지라 무척 위험하다.


9.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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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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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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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
발생일
규모
지진명

1906. 4. 18.

M8.3
샌프란시스코 지진

1909. 6. 11.

M6.2
1909년 프로방스 지진

1920. 12. 16.

M8.7
1920년 간쑤성 대지진

1921. 3. 20.

M4.2
1921년 경주 지진

1923. 9. 1.

M8.3
1923년 관동대지진

1925. 12. 9.

M4.4
1925년 홍성 지진

1936. 7. 4.

M5.3
지리산 쌍계사 지진

1939. 1. 24.

M8.3
1939년 치얀 지진

1939. 12. 26.

M7.8
에르진잔 대지진

1944. 12. 7.

M7.9
1944년 도난카이 대지진

1944. 12. 19.

M6.8
조선-중국 국경 지진

1946. 4. 1.

M8.6
1946년 알류샨 열도 지진

1946. 12. 21.

M8.0
1946년 난카이 대지진

1948. 6. 28.

M7.1
1948년 후쿠이 지진

1950. 8. 15.

M8.7
1950년 아삼 지진

1952. 3. 19.

M6.4
1952년 강서 지진

1952. 4. 24.

M5.6
1952년 은천 지진

1952. 11. 5.

M9.0
세베로쿠릴스크 지진

1959. 5. 4.

M8.3
1959년 캄차카 지진


[ 1960년대~ ]
발생일
규모
지진명

1960. 2. 29.

M5.8
1960년 아가디르 지진

1960. 5. 2.

M9.5
칠레 대지진

1960. 10. 8.

M6.8
1960년 길주 해역 지진

1963. 9. 6.

M6.3
1963년 영덕-포항 해역 지진

1963. 9. 7.

M6.6

1964. 3. 27.

M9.2
알래스카 지진

1964. 6. 16.

M7.5
1964년 니가타 지진

1965. 8. 3.
~1970. 6. 5.

M6.4
마츠시로 군발지진

1973. 9. 29.

M7.8
1973년 나진 해역 지진

1975. 2. 4.

M7.0
1975년 하이청 지진

1975. 6. 29.

M7.3
1975년 속초 해역 지진

1976. 7. 27.

M7.8
1976년 탕산 대지진

1976. 7. 28.

M7.4

1976. 8. 16.

M8.0
1976년 필리핀 모로 만 지진

1978. 9. 16.

M5.2
속리산 지진

1978. 10. 7.

M5.0
홍성 지진

1980. 1. 8.

M5.3
의주 지진

1982. 2. 14.

M5.6
1982년 사리원 지진

1983. 5. 26.

M8.1
1983년 아키타 지진

1985. 9. 19.

M8.0
멕시코시티 대지진

1988. 12. 7.

M6.8
아르메니아 대지진

1989. 10. 17.

M7.2
샌프란시스코 지진

1990. 6. 21.

M7.4
1990년 이란 지진

1990. 7. 16.

M7.8
1990년 필리핀 루손 지진

1992. 4. 13.

M5.8
1992년 루르몬트 지진

1993. 7. 12.

M7.8
1993년 홋카이도 해역 지진

1994. 4. 22.

M5.3
1994년 울산 해역 지진

1994. 7. 26.

M5.9
1994년 홍도 해역 지진

1995. 1. 17.

M7.3
효고현 남부 지진

1996. 12. 13.

M5.6
1996년 영월 지진

1997. 6. 26.

M5.0
1997년 경주 지진

1999. 8. 17.

M7.6
1999년 이즈미트 대지진

1999. 9. 21.

M7.7
921 대지진

2000. 6. 17.
~21.

M6.5
아이슬란드 지진

2000. 6. 6.
~9. 28.

~ M6.5
이즈 제도 군발지진(2000년 7월)A

2000. 10. 6.

M7.3
2000년 돗토리 지진
A:해당 군발지진의 시작일은 위의 아이슬란드 지진보다 먼저이지만, 가장 큰 지진인 이 문서에 집중적으로 서술된 규모 6.5의 지진은 2000년 7월 1일에 발생함을 고려하여 2000년 7월 1일 지진을 본진으로 분류하여 위의 문서인 아이슬란드 지진 뒤에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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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혹은 아시가라카미군 가이세이정 요시다지마, 사가미 만 등.[2] 여진은 사가미 만, 치바현 보소반도, 야마나시현, 이바라키현, 시즈오카현, 카나가와현 등.[3] 진도 7이 생긴 것은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해로부터 26년이나 지난 1949년이며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1923년의 최대 진도 등급은 6이었다.[4] 사이타마, 치바, 도쿄, 가나가와[5] MMI XI는 진도 8에 맞먹는 수준이다. 굳이 찾아보면 진도 8에 해당하는 지진은 칠레 대지진(1960), 921 대지진(1999), 쓰촨성 대지진(2008) 등이 있다.[6] 일반적인 지진은 1분 이내, 좀 큰 지진의 경우 2분 내외로 흔들림이 진정된다. 관동대지진으로부터 약 88년 후 일어난 도호쿠 대지진조차 6분 정도의 흔들림이 이어졌을 뿐이니 이 지진이 얼마나 맹렬하게 요동쳤는지 알 수 있다.[7]시즈오카현 아타미시[8] 사이타마, 치바, 도쿄, 가나가와[9] 아키타, 야마가타, 미야기, 후쿠시마[10] 니가타, 도야마, 후쿠이, 이시카와, 아이치, 기후[11] 미에, 나라, 와카야마, 시가, 교토, 오사카, 효고 [12] 오카야마, 히로시마, 시마네[13] 카가와, 도쿠시마, 에히메[14] 여진의 총 횟수는 수천번 이상[15] 심지어 규모 7 이상도 3번 일어났다.[16] NHK 스페셜 영상기록 관동대지진[17] 초속 10m[18] NHK 스페셜 영상기록 관동대지진[19] NHK 스페셜에서는 실험을 통해서 피복창 세 곳에서 다가오던 화재와 스미다강에 불던 강한 남풍이 맞물려 상승 기류가 발생한 것이라고 추정했다.[20] 부지가 상당히 넓은 편이었으나 약 1만 명 가량 수용 가능했는데 4만명이 몰려들었고 이것 때문에 피난민들의 사이가 조밀할 수밖에 없었으며 피난 올 때 가져온 가재도구에 쉽게 화재가 발생해 피해를 키웠다. 현지 주민 사이에서는 무슨 일이 생긴다면 피복소로 피하라는 말이 퍼졌다고 한다. <NHK 스페셜 영상기록 관동대지진에서>[21] NHK 스페셜에서는 10만 5천명 이상으로 추정했다.[22] 배의 척추나 다름없는 용골이 부서져서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폐기가 예정되어 있던 카가급 전함 1번함 카가와 항공모함이 될 예정이었던 아마기의 운명이 뒤바뀌었다. 이로써 1항전인 아마기급 2번함 아카기와 카가급 1번함 카가가 유일하게 함급이 다른 항전이다.[23] 허나 성과는 미미하여 2차 대전의 공습 당시도 대화재로 큰 피해가 있었고 이후에도 각종 재난 대책이 미비한 주택이 허다하다.[24] 당시 일본에서는 공동주택 전반을 아파트라고 불렀다.[25] 사실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말년의 공황 분위기가 미증유의 국난으로 촉발되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고메이, 메이지 시절에도 지진은 있었지만 1923년 지진은 근대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도쿄에서 큰 규모의 여진과 화재로 인한 건물 피해가 워낙 컸기 때문에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26] 시아는 당시 도쿄의 요정으로 팔려가 일하고 있었는데 이 지진으로 다 개박살나면서 타로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와 결혼한다.[27] 조선인이 폭행을 저지르고 우물에 독을 풀었으니 조선인들을 학살하여 애국을 보이라는 개소리.[28] 기타야마 세이타로, 시모카와 오텐, 고우치 준이치를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