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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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東別曲
고려 중기~말기의 문인인 안축의 작품으로 《근재집》에 실려 있다. 2와 마찬가지로 관동의 경치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2에 비해선 유명하지 않아 일반적으로 국문학을 대학에서 전공한 사람이 아니면 이 경기체가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1] 경기체가 형식에 대해 '고려 시대 문인들은 이렇게 시 쓰면서 놀았대요'라는 문학사적 의미 말고는 작품으로서의 문학적 의미는 희박하다고 보는 입장이 학계 내에 적지 않다. 한편 이황은 경기체가의 대표격인 한림별곡을 언급하며 '한림별곡 부류'를 대차게 비판했는데 이황의 비판 이유와 현대 문학자들의 비판 이유는 좀 다르다.
국문학자들이 경기체가를 낮게 평가하는 것은 대략 아래의 2가지 이유 때문이다.
반면 이황이 '한림별곡 부류'라며 경기체가 전반을 비판한 이유는, 유학자답게 겸손하고 절제하며 자기수양에 힘쓰는 모습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술 마시고 풍류 즐기며 노는 내용, 서로서로 글솜씨가 뛰어나다고 칭찬하는 내용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해당 내용은 이황이 <도산십이곡>을 지으면서 남긴 발문 <도산십이곡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 정철이 남긴 가사. 이상과 현실의 대립에서 현실적 가치를 택해 관찰사를 하겠다는 뜻이다. 주 내용은 만물을 관찰하며 임금을 찬양하고 임금에 충성하는 뉘앙스가 대부분. 하지만 이걸 공부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한 점은 상당수가 인정한다.
백광홍이 지은 '관서별곡'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서 '송강가사'에 전한다.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된 저자가 관동팔경을 유람하면서 그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하고 올바른 정치를 할 것이라 다짐하는 내용의 장편 가사다.
정철을 옹호하는 측은 실제로 정철은 강원도와 그 뒤에 간 전라도에서 선정으로 이름이 높았다며 옹호한다. 당시 교통이 발전하지 않고, 해발 1,500m가 넘어가는 백두대간 산을 넘어다녀야 하는 강원도의 지형을 생각해보자. 지금도 쉽지 않은 게 강원도 순행인데, 조선시대에 강원도지사(관찰사)가 산을 넘어다니며 각 지방을 순회하고 그것을 노래로 남긴 것이다. 일단 당시 도민들은 "우리 마을에 도지사님 오신다!"는 것만으로 정철에 대한 인기가 높았을 것이다. 살면서 한 번 보기 힘든 높으신 분이 마을에 직접 방문하는 것이니까.
관동별곡을 보면 진짜 강원도의 모든 지방을 순회했고, 지방의 명물이나 관광지들도 모조리 방문하면서, 도민들의 민심 청취 및 민원 처리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 정철의 이런 행보는 이전까지의 강원도 관찰사(도지사)들과 분명히 달랐다. 그래서 당시 강원도민들의 정철 지지율이 매우 높았던 것이다. 대신에 도지사가 방문하지 않는 동안 지역에서 왕 노릇하던 동네 아전들과, 안 그래도 불편한 교통에도 불구하고 전 지방 순회를 강행하는 정철을 수행해야 할 비서진들은 죽어나갔지만 말이다.
그러나 반론도 많은데 당시 정철이 부임하던 강원도의 상황을 몰라서 하는 소리로, 정철이 부임한 선조 13년에 강원도는 초여름에 냉해피해를 입었고 바로 다음 달에는 홍수피해에 시달린 탓에 도 전체가 흉작, 기근에 시달리며 한양에서 구휼과 면세를 해야 할 정도의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정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금강산 같은 유람지까지 가서 논 행태가 결코 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장 작중에서 5월에 동해로 놀러간 걸 묘사하고 있는데 바로 전달인 4월달에 회양·평창에서 심각한 냉해 피해가 심각하다고 정철 본인 입으로 보고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3월의 금강산 유람은 사정을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의 여지라도 있지만 동해 유람은 변명의 여지도 없다.
거기에 잘했다던 전라감사 시절에도 전라감사직을 마치고 도승지로 승진하자마자 사헌부에서 바로 탄핵에 들어갔고 결국 정철은 사직하고 다시 함경감사 외직을 돌아야했다. 정철의 이시기 업적으로 불리는 훈민가도 내막을 들여다 보면 정철이 살아있던 시기나 정철이 죽고 서인이 집권한 인조시기에도 별 두각을 안보이고 완전히 잊혀졌다가 정철이 죽은지 100년 가까이 지난 효종때까지 잊혀지다가 이후원이 발굴해서 알려진 경우다. 결국 옹호측이 말하는 정철의 선정은 아무리 좋게 바줘도 추측의 영역이고 당시 기록을 보면 적어도 정철이 부임할 때 강원도 상황이 유람하면서 노닥거릴 정도로 녹녹한 건 아닌 게 드러나며, 이후 승진도 막히고 제법 오랜기간 외직에서 돈 것을 생각하면 적어도 강원감사 시절에 특별한 두각을 보이지 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매년 대학수학능력시험 직전 기간이 되면 출제 우선 순위에 꼽히는 고전 문학이다. 그래서 1998년도[2] , 2015학년도 수능에 2번이나 출제되었고, 평가원 및 교육청 모의고사에도 수시로 출제된다. 평가원 모의고사 및 수능에 4번 이상 출제된 유일한 고전 문학 작품이다.[3][4]
2010년 6월 모의평가에서도 관동별곡이 출제되었는데, 고전이 참 오래간만에 원문으로 출제되어 학생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2014년 11월 모의평가에서도 출제되어 역시 학생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참고로, 약간 다르지만 1997년도 수능에서는 수리탐구 2 영역의 지문에 언급된 적[5] 이 있다고 한다. 수능 출제 성향으로 봤을 때 약간 특이한 편.
그리고 2015학년도 수능에 마침내 국어 B형의 고전문학 지문으로 나왔다.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대비 수능완성에 실리면서 출제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지만 결국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인 2021학년도 6월 평가원 모의고사에 출제되었다. 수특 직접연계가 아니라 작가 연계인것으로 확인되며 고어 원문으로 출제되지는 않아서 해석에 크게 어려운 부분은 없었고 문제 난이도 역시 그렇게 높지 않았다. 다만 관동별곡을 처음 본 수험생들은 잘 해석이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여러 재외국민특별전형 준비학원 국어선생님들의 공통된 의견으로는 '매년 인서울 대학 중 어딘가는 반드시 나온다'라고 하며 격년 정도로 다른 대학들에서 나온다고 한다. 결국 2007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지역균형선발전형 면접에서 암송하라는 질문을 했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만 해도 거의 외우는 게 당연한 분위기였다고. 아직도 암송하는 노인 분들이 계시고, 40대 이상 중에서도 암송 가능한 사람들이 꽤 된다. 시험에 너무 자주 나오니 통째로 외우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특히 강원도 내 상당수 고등학교에서는 작품의 배경 탓인지 중간, 기말고사에도 출제 빈도가 높다.
많은 이들에게 노력을 요하는 작품인 것은 맞지만 국어 변천사 연구에서 절대 지나칠 수 없는 작품임은 틀림없다. 당시 사림의 신분을 가진 이가 한글(당시의 경우 언문)을 사용하여 완결시킨 몇 안 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출사표가 중등교육에서 한국의 관동별곡과 대등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7차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상)에 수록되었다. 당시에 국어 교과서가 국정 교과서였기에, 어느 학교에서든 고등학교 1학년에 관동별곡을 배웠다.
2015개정 신사고 고1 국어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해석본도 없이 그대로 나와[6] 학생들의 혼을 탈출시키게 만들었으며,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였다.게다가 시험 범위로 출제까지 되니... 선생님들이 문제의 난이도 조절을 잘 해야 할 것이다.
[출처]
조선의 대표적인 기행가사로, 강원도 관찰사가 된 저자 정철이 관동의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하고 올바른 정치를 하리라 다짐하는 내용을 매우 아름다운 한국어 문체로 풀어서 문학의 정수를 보여줬다는 평을 받는다. 유교 문화, 도교 문화의 영향이 나타나 있는 것이 특징이며 섬세하고 화려한 기교가 인정되는 작품이다. 사실 입시위주 교육에서 맞아 가면서 외워서 그렇지, 시험을 떠나서 음미하면서 감상하고 분석해 보면 명문장도 이런 명문장이 없다. 기본 뼈대는 4음 4보격의 문체를 따르며 시조처럼 마지막 행에서 3,5,4,3으로 꼬아주는 센스는 잊지 않는다.[67] [68]
시상이 4단으로 나뉘면서 진행되는데, 1단에서는 자연 속에서 은거하다 자리가 떨어지자마자 발벗고 나와 경쾌하게 부임하는 모습이 나왔고 (전개가 빠른 편이다) 2단에서는 내금강의 절경, 3단에서는 외금강과 해금강과 동해안의 관동팔경[69] 유람으로 정리된다. 4단은 신선을 만나 풍류와 속세 사이에 갈등하는 작품 속의 또 다른 주제의 클라이맥스가 나온다.
특히 4단에서 '나 사실 전생에 신선이었음' 이라고 드립치는 가사를 임금(당시 선조)에게 주고도 '건저의 사건' 전까지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 배짱이 매우 큼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자기가 신선에서 인간이 된 이유가 황정경이라는 경전의 글자를 잘못 읽어서 인간세계로 유배왔다고 썼는데, 정철이 말년에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정부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일본군이 전부 철수했다는 거짓정보를 올린 점 때문에 파멸하고 비참하게 객사한 사실을 생각해보면, 어찌보면 자기예언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사실 2단 3단에서도 신선과 동일시하는 드립을 쳤다. 연산군이나 숙종 때 이 글을 써서 줬으면 참수당해서 남대문 앞에 걸려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술 먹고 직무유기해서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며 지은 시"라는 논란이 있는데, 옹호 측은 "정철은 주민들에게 선정을 펼쳐 꽤 평가가 좋았으며, 이 시 역시 강원도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민심을 살피고 여러 명소들을 방문하는 하나의 의전 중에 지은 시라고 봐야 한다"는 주장을 펴며, 반대 측은 "정철 부임 당시 강원도는 각종 자연재해로 심각한 기근을 겪는 상황이라 적어도 금강산 같은 유람지에서 노닥거릴 상황은 아니었으며 정철은 강원감사 이후로 승진이 막혀 전라감사와 함경감사 같은 외직을 돌아야 했다"는 사실을 들며 정철을 비판한다.
관동별곡은 기행가사이므로, 연군지정을 중심으로 외울 경우 기행문의 원관념을 해석하지 못해 틀리는 경우가 많다. 즉 비유적 표현이 많이 쓰였다는 의미이다. 먼저 전체 체계(서사-본사1-본사2-결사)의 구조를 이해해야한다.
가장 복잡한 2단과 3단의 여행기정은 다음과 같다.
2단은 만폭동 → 금강대 → 진헐대 → 개심대 → 화룡소 → (마하연, 묘길상, 안문재) 불정대
로 산에 오르다 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해당 부분은 등산시 보이는 폭포와 산이 주로 용 등으로 비유된다.
3단은 산영루 → 총석정 → 삼일포(고성) → 의상대(낙산) → 경포대(강릉) → 진주관 죽서루 → 망양정 순서로 왕명에 따라 동해안을 따라가고 있다. 당연히 보이는 것은 바다의 파도가 고래나 은산 등으로 비유된다.
중간에 노룡이나 취선(취한 신선) 등 정철 자신의 원관념도 체크 해야한다. 선정의 포부나 임금바라기 등은 출제하면 바로 맞출수 있다. 대구법, 연쇄법, 은유법 등 관동별곡에는 수많은 표현법이 담겨있다.
관동별곡은 문학과 수능까지 갈래와 표현법 등에서 연관되는 내용이 굉장히 많은 작품이다. EBSi 장동준의 관동별곡 강의가 무료인만큼 강의를 들으면서 꼼꼼히 공부해두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테니 잘 해보자!
1. 고려의 경기체가[편집]
고려 중기~말기의 문인인 안축의 작품으로 《근재집》에 실려 있다. 2와 마찬가지로 관동의 경치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2에 비해선 유명하지 않아 일반적으로 국문학을 대학에서 전공한 사람이 아니면 이 경기체가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1] 경기체가 형식에 대해 '고려 시대 문인들은 이렇게 시 쓰면서 놀았대요'라는 문학사적 의미 말고는 작품으로서의 문학적 의미는 희박하다고 보는 입장이 학계 내에 적지 않다. 한편 이황은 경기체가의 대표격인 한림별곡을 언급하며 '한림별곡 부류'를 대차게 비판했는데 이황의 비판 이유와 현대 문학자들의 비판 이유는 좀 다르다.
국문학자들이 경기체가를 낮게 평가하는 것은 대략 아래의 2가지 이유 때문이다.
- 국문(한글/한국어)으로 지었음에도 한자어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여 자국어문학/민족문학으로서 가치가 높지 않다.
- 시가 문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서정성'이 약하고 지나치게 교훈적, 교술적인 내용이 많다.
반면 이황이 '한림별곡 부류'라며 경기체가 전반을 비판한 이유는, 유학자답게 겸손하고 절제하며 자기수양에 힘쓰는 모습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술 마시고 풍류 즐기며 노는 내용, 서로서로 글솜씨가 뛰어나다고 칭찬하는 내용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해당 내용은 이황이 <도산십이곡>을 지으면서 남긴 발문 <도산십이곡발>에 자세히 나와 있다.
2. 정철의 가사[편집]
조선 중기의 문인 정철이 남긴 가사. 이상과 현실의 대립에서 현실적 가치를 택해 관찰사를 하겠다는 뜻이다. 주 내용은 만물을 관찰하며 임금을 찬양하고 임금에 충성하는 뉘앙스가 대부분. 하지만 이걸 공부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한 점은 상당수가 인정한다.
백광홍이 지은 '관서별곡'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서 '송강가사'에 전한다.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된 저자가 관동팔경을 유람하면서 그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하고 올바른 정치를 할 것이라 다짐하는 내용의 장편 가사다.
정철을 옹호하는 측은 실제로 정철은 강원도와 그 뒤에 간 전라도에서 선정으로 이름이 높았다며 옹호한다. 당시 교통이 발전하지 않고, 해발 1,500m가 넘어가는 백두대간 산을 넘어다녀야 하는 강원도의 지형을 생각해보자. 지금도 쉽지 않은 게 강원도 순행인데, 조선시대에 강원도지사(관찰사)가 산을 넘어다니며 각 지방을 순회하고 그것을 노래로 남긴 것이다. 일단 당시 도민들은 "우리 마을에 도지사님 오신다!"는 것만으로 정철에 대한 인기가 높았을 것이다. 살면서 한 번 보기 힘든 높으신 분이 마을에 직접 방문하는 것이니까.
관동별곡을 보면 진짜 강원도의 모든 지방을 순회했고, 지방의 명물이나 관광지들도 모조리 방문하면서, 도민들의 민심 청취 및 민원 처리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 정철의 이런 행보는 이전까지의 강원도 관찰사(도지사)들과 분명히 달랐다. 그래서 당시 강원도민들의 정철 지지율이 매우 높았던 것이다. 대신에 도지사가 방문하지 않는 동안 지역에서 왕 노릇하던 동네 아전들과, 안 그래도 불편한 교통에도 불구하고 전 지방 순회를 강행하는 정철을 수행해야 할 비서진들은 죽어나갔지만 말이다.
그러나 반론도 많은데 당시 정철이 부임하던 강원도의 상황을 몰라서 하는 소리로, 정철이 부임한 선조 13년에 강원도는 초여름에 냉해피해를 입었고 바로 다음 달에는 홍수피해에 시달린 탓에 도 전체가 흉작, 기근에 시달리며 한양에서 구휼과 면세를 해야 할 정도의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정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금강산 같은 유람지까지 가서 논 행태가 결코 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장 작중에서 5월에 동해로 놀러간 걸 묘사하고 있는데 바로 전달인 4월달에 회양·평창에서 심각한 냉해 피해가 심각하다고 정철 본인 입으로 보고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3월의 금강산 유람은 사정을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의 여지라도 있지만 동해 유람은 변명의 여지도 없다.
거기에 잘했다던 전라감사 시절에도 전라감사직을 마치고 도승지로 승진하자마자 사헌부에서 바로 탄핵에 들어갔고 결국 정철은 사직하고 다시 함경감사 외직을 돌아야했다. 정철의 이시기 업적으로 불리는 훈민가도 내막을 들여다 보면 정철이 살아있던 시기나 정철이 죽고 서인이 집권한 인조시기에도 별 두각을 안보이고 완전히 잊혀졌다가 정철이 죽은지 100년 가까이 지난 효종때까지 잊혀지다가 이후원이 발굴해서 알려진 경우다. 결국 옹호측이 말하는 정철의 선정은 아무리 좋게 바줘도 추측의 영역이고 당시 기록을 보면 적어도 정철이 부임할 때 강원도 상황이 유람하면서 노닥거릴 정도로 녹녹한 건 아닌 게 드러나며, 이후 승진도 막히고 제법 오랜기간 외직에서 돈 것을 생각하면 적어도 강원감사 시절에 특별한 두각을 보이지 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매년 대학수학능력시험 직전 기간이 되면 출제 우선 순위에 꼽히는 고전 문학이다. 그래서 1998년도[2] , 2015학년도 수능에 2번이나 출제되었고, 평가원 및 교육청 모의고사에도 수시로 출제된다. 평가원 모의고사 및 수능에 4번 이상 출제된 유일한 고전 문학 작품이다.[3][4]
2010년 6월 모의평가에서도 관동별곡이 출제되었는데, 고전이 참 오래간만에 원문으로 출제되어 학생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2014년 11월 모의평가에서도 출제되어 역시 학생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참고로, 약간 다르지만 1997년도 수능에서는 수리탐구 2 영역의 지문에 언급된 적[5] 이 있다고 한다. 수능 출제 성향으로 봤을 때 약간 특이한 편.
그리고 2015학년도 수능에 마침내 국어 B형의 고전문학 지문으로 나왔다.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대비 수능완성에 실리면서 출제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지만 결국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인 2021학년도 6월 평가원 모의고사에 출제되었다. 수특 직접연계가 아니라 작가 연계인것으로 확인되며 고어 원문으로 출제되지는 않아서 해석에 크게 어려운 부분은 없었고 문제 난이도 역시 그렇게 높지 않았다. 다만 관동별곡을 처음 본 수험생들은 잘 해석이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여러 재외국민특별전형 준비학원 국어선생님들의 공통된 의견으로는 '매년 인서울 대학 중 어딘가는 반드시 나온다'라고 하며 격년 정도로 다른 대학들에서 나온다고 한다. 결국 2007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지역균형선발전형 면접에서 암송하라는 질문을 했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만 해도 거의 외우는 게 당연한 분위기였다고. 아직도 암송하는 노인 분들이 계시고, 40대 이상 중에서도 암송 가능한 사람들이 꽤 된다. 시험에 너무 자주 나오니 통째로 외우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특히 강원도 내 상당수 고등학교에서는 작품의 배경 탓인지 중간, 기말고사에도 출제 빈도가 높다.
많은 이들에게 노력을 요하는 작품인 것은 맞지만 국어 변천사 연구에서 절대 지나칠 수 없는 작품임은 틀림없다. 당시 사림의 신분을 가진 이가 한글(당시의 경우 언문)을 사용하여 완결시킨 몇 안 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출사표가 중등교육에서 한국의 관동별곡과 대등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7차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상)에 수록되었다. 당시에 국어 교과서가 국정 교과서였기에, 어느 학교에서든 고등학교 1학년에 관동별곡을 배웠다.
2015개정 신사고 고1 국어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해석본도 없이 그대로 나와[6] 학생들의 혼을 탈출시키게 만들었으며,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였다.
2.1. 관동별곡 전문 및 현대어 풀이[편집]
[출처]
2.2. 이해[편집]
조선의 대표적인 기행가사로, 강원도 관찰사가 된 저자 정철이 관동의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하고 올바른 정치를 하리라 다짐하는 내용을 매우 아름다운 한국어 문체로 풀어서 문학의 정수를 보여줬다는 평을 받는다. 유교 문화, 도교 문화의 영향이 나타나 있는 것이 특징이며 섬세하고 화려한 기교가 인정되는 작품이다. 사실 입시위주 교육에서 맞아 가면서 외워서 그렇지, 시험을 떠나서 음미하면서 감상하고 분석해 보면 명문장도 이런 명문장이 없다. 기본 뼈대는 4음 4보격의 문체를 따르며 시조처럼 마지막 행에서 3,5,4,3으로 꼬아주는 센스는 잊지 않는다.[67] [68]
시상이 4단으로 나뉘면서 진행되는데, 1단에서는 자연 속에서 은거하다 자리가 떨어지자마자 발벗고 나와 경쾌하게 부임하는 모습이 나왔고 (전개가 빠른 편이다) 2단에서는 내금강의 절경, 3단에서는 외금강과 해금강과 동해안의 관동팔경[69] 유람으로 정리된다. 4단은 신선을 만나 풍류와 속세 사이에 갈등하는 작품 속의 또 다른 주제의 클라이맥스가 나온다.
특히 4단에서 '나 사실 전생에 신선이었음' 이라고 드립치는 가사를 임금(당시 선조)에게 주고도 '건저의 사건' 전까지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 배짱이 매우 큼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자기가 신선에서 인간이 된 이유가 황정경이라는 경전의 글자를 잘못 읽어서 인간세계로 유배왔다고 썼는데, 정철이 말년에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정부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일본군이 전부 철수했다는 거짓정보를 올린 점 때문에 파멸하고 비참하게 객사한 사실을 생각해보면, 어찌보면 자기예언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사실 2단 3단에서도 신선과 동일시하는 드립을 쳤다. 연산군이나 숙종 때 이 글을 써서 줬으면 참수당해서 남대문 앞에 걸려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술 먹고 직무유기해서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며 지은 시"라는 논란이 있는데, 옹호 측은 "정철은 주민들에게 선정을 펼쳐 꽤 평가가 좋았으며, 이 시 역시 강원도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민심을 살피고 여러 명소들을 방문하는 하나의 의전 중에 지은 시라고 봐야 한다"는 주장을 펴며, 반대 측은 "정철 부임 당시 강원도는 각종 자연재해로 심각한 기근을 겪는 상황이라 적어도 금강산 같은 유람지에서 노닥거릴 상황은 아니었으며 정철은 강원감사 이후로 승진이 막혀 전라감사와 함경감사 같은 외직을 돌아야 했다"는 사실을 들며 정철을 비판한다.
2.3. 배우는 사람을 위한 팁[편집]
관동별곡은 기행가사이므로, 연군지정을 중심으로 외울 경우 기행문의 원관념을 해석하지 못해 틀리는 경우가 많다. 즉 비유적 표현이 많이 쓰였다는 의미이다. 먼저 전체 체계(서사-본사1-본사2-결사)의 구조를 이해해야한다.
가장 복잡한 2단과 3단의 여행기정은 다음과 같다.
2단은 만폭동 → 금강대 → 진헐대 → 개심대 → 화룡소 → (마하연, 묘길상, 안문재) 불정대
로 산에 오르다 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해당 부분은 등산시 보이는 폭포와 산이 주로 용 등으로 비유된다.
3단은 산영루 → 총석정 → 삼일포(고성) → 의상대(낙산) → 경포대(강릉) → 진주관 죽서루 → 망양정 순서로 왕명에 따라 동해안을 따라가고 있다. 당연히 보이는 것은 바다의 파도가 고래나 은산 등으로 비유된다.
중간에 노룡이나 취선(취한 신선) 등 정철 자신의 원관념도 체크 해야한다. 선정의 포부나 임금바라기 등은 출제하면 바로 맞출수 있다. 대구법, 연쇄법, 은유법 등 관동별곡에는 수많은 표현법이 담겨있다.
관동별곡은 문학과 수능까지 갈래와 표현법 등에서 연관되는 내용이 굉장히 많은 작품이다. EBSi 장동준의 관동별곡 강의가 무료인만큼 강의를 들으면서 꼼꼼히 공부해두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테니 잘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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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문학 교과서에 지나가듯이 실려있고, EBS 올림포스 고전문학에 경기체가가 2편 정도 실려있어 고등학생 때 공부해본 사람도 있다.[2] 당시 출제된 문항을 살펴보면, 관동별곡에 빈칸에 들어가기에 가장 적절한 시구는? 으로 물어보기도 하였다.[3] 1998수능, 2010 6평, 2015 수능, 2021 6평[4] 현대 문학 작품 중에는 관촌수필이 4번 출제되었는데, 이건 수능에 무려 3번 출제된 작품이다.[5] 당시 한국지리 문항에 언급됨.[6] 하술할 현대어로써의 해석과 풀이가 없다는 뜻이지 그래도 특정 단어에 각주를 달아 의미를 써놓긴 했다. (예시 - 뉴하쥬: 신선이 먹는다는 술 등.) 그러나 일부도 아니고 전문이 수록되어 있으니 망정이다.[출처] 장동준의 관동별곡 강의를 참조.[7] '천석고황', '연하고질'이라고 한다.[8] 반론 : 강호=인간세상/속세, 죽림=은거지 속세에 시달리다 은거해서 편안하게 지내는데 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9] 이 뒤로도 종종 임금의 은혜를 예찬하는 부분이 나오곤 하는데, 이를 한자성어로 '연군지정(戀君之情)'이라고 한다. [10] 광화문[11] 임금님께 작별을 고함.[12] 쉽게 임명장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13] '생략법'으로 관찰사를 부임하는 과정이 속도감있게 전개[14]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인근. 양정역 부근이다.[15] 하류 지역에 한하여 여주 개군면에 속했으나, 1963년 개군면이 양평군에 편입된 이후로는 완전한 양평군 소속 하천이다. 용문역 인근으로 건넜다.[16] 소양강은 북한강에 합류하여 한강 상류로 흐른다. 즉 '소양강은 흘러흘러 임금이 계신 한양으로 흐르는구나' 라는 의미.[17] 나라를 걱정한다는 뜻. 한자성어로 '우국지정'이라고 한다.[18] 동주는 고려시대 철원 및 주변을 이르는 말이다.[19] 최영의 본관인 철원 최씨를 동주 최씨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20] 지금의 북한산. 임금이 계신 한양을 상징한다.[21] 절대 본 것이 아니다. ‘보이겠구나’이므로 실제로 보지는 못하고, 말 그대로 보였으면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22] '인생무상', '맥수지탄'[23] 중국 한나라의 지명.[24] 과거 중국 회양에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을 잘 돌보았다고 전해지는 관리.[25] 그의 모습을 이 땅 회양에서 다시 보여주리라는 뜻이다.[26] 강원도 화천군과는 한자가 다르다. 원문의 화천은 꽃 화(花)자를 쓰며, 강원도 화천군은 빛날 화(華)자를 쓴다. 현재 북한의 금강군 일대로 추정된다(이북 5도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회양군 안풍면). 결정적으로 지금의 화천군은 당시에는 낭천(浪川 또는 狼川)으로 불렸으며, 지금의 명칭으로 바뀐 것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2년이다.[27] 가을의 금강산.[28] 폭포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29] '대구법'이 사용되었다.[30] 폭포 물이 천둥처럼 우렁찬 소리를 내며 흰 눈처럼 흩날린다는 뜻이다.[31] 자연을 아내로, 학을 아들로 삼아 함께 살았다는 옛 중국의 시인 임포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32] 금강산이 중국의 여산처럼 아름답다는 뜻이다.[33] 금강산의 수많은 봉우리들을 일컫는다.[34] 여기서 말하는 북극은 북극곰이 사는 그 북극이 아니라, 북극성을 말하는 것이다.[35] 굳건히 지조를 지키는 이는 망고대, 혈망봉 뿐이라는 뜻이다.[36] 만 이천 봉이 전부 맑고 깨끗함을 의미한다.[37] 비로봉 정상에 오르니, '동산에 올라 노나라가 작고,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다'고 한 공자의 어록 인용.[38] 화룡소 물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39] 헐벗고 굶주린 백성.[40] 선정의 포부를 드러내는 대목.[41] 조물주가[42] 화자 자신을 일컫는다.[43] 자신을 신선과 동일시하고 있는 거다(...)[44] 옥황상제가 사는 곳.[45] 중국의 명장.[46] 이는 주상절리를 관찰한 것이다. 지구과학1 과목에서 이 지질구조가 무엇인지 물어보기도 한다.[47] 신라 시대의 화랑도였던 영랑과 그 동무들이 곳곳을 여행하다 삼일포 남쪽 절벽에 붉은 글씨로 자신들의 이름을 써 놓았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48] 간신의 무리가 임금의 총명을 가릴까 두렵다. 이태백의 시구 인용.[49] 남긴 말을 일컫는다.[50] 호수의 맑고 잔잔함을 빗대어 표현했다.[51] 경포 호수의 기상.[52] 동해 바다의 경계.[53] 고려 말 우왕 때 인물인 강원 감사 박신과 강릉 기생 홍장의 사랑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다.[54]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고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붉은 문이다.[55] 비옥가봉이라는 이 고사성어는 요순시대의 태평성대를 언급하는 데에도 쓰인다.[56] 망양정이 위치한 울진군은 현재 경상북도에 속해 있지만 1962년까지는 강원도 관할이었다.[57] 파도를 의미한다.[58] 흰 물결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59] 밝은 달을[60] 달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61] 온 백성에게 고루고루 은혜를 베풀고 싶다는 선정의 포부.[62] 도가의 경문. 천국의 신선은 황정경을 한글자라도 잘못 읽으면 인간 세상으로 유배를 간다는 전설이 있다.[63] 국자를 표현한 것이다.[64] 술을 표현한 것이다.[65] 춤을 추는 모습을 에둘러서 표현했다고 해석된다.[66] 보통 고전시가에서 빛나는 무언가는 임금인데, 임금의 선정이 온 세상을 비춘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67] 이 때문에 정격 가사로 분류된다.[68] 3,5,2,5로 가르치기도 한다.[69] 가장 남쪽에 위치한 월송정을 제외한 7곳이 언급되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낙산사와 월송정 대신 청초호와 시중대가 언급된 것을 보면 팔경에 확실히 들어가는건 6곳이며 나머지 둘은 사람에 따라 왔다갔다 했다고 보면 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