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제장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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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제장의 난
關中諸將之亂

시기
211년 3월 ~ 211년 10월[1]; 혹은 215년까지[2]
장소
양주, 옹주 일대
원인
조조의 한중 정벌을 위한 군사적 행동에 자극 받은 관중제장들의 연합 및 반란
교전
관서군
조조군
황제
황제 유협
군주
관서군[3]
승상 조조
지휘관
마초
한수
양흥
양추
후선
정은
이감
장횡
성의
마완
승상 조조
장수
방덕
성공영
염행
참모 가후
행 안서장군 조인
하후연
장합
허저
종요
누규
우금
주령
노초
장기

병력
약 100,000 명[4]
불명[5]
피해
피해 규모 불명[6]
약 10,000명[7]
결과
관서 연합군의 대패, 조조군의 승리
영향
관중제장 대부분의 몰락, 조조군의 관서 공략

1. 개요
2. 정사
2.1. 발단
2.2. 동관전투
2.3. 이간책과 위수 전투
3. 결과
4. 평가
5. 여담
6. 연의
7. 번외편: 마초의 재기와 몰락
8. 기타 창작물


1. 개요[편집]


건안 16년, 마초관중제장 후선, 정은, 이감, 장횡, 양흥, 성의, 마완, 양추, 한수 등과 함께 도합 10부(部)로 함께 반란을 일으키니 그 군사가 10만으로 하수, 동수 일대를 점거하고 영진(營陳)을 벌여 세웠다.

建安十六年,超與關中諸將侯選, 程銀, 李堪, 張橫, 梁興, 成宜, 馬玩, 楊秋, 韓遂等,凡十部, 俱反, 其衆十萬,同據河, 潼,建列營陳。

《마초전》주석 전략


후한 말인 211년에 관중제장들이 연합, 조조에게 대항하여 조조군과 겨룬 전쟁. 연의에서는 마초한수가 대장이고 나머지들은 수하팔기, 기본팔기라 불리는 부하로 취급되지만, 정사에서 이들은 명성의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명목상 대등한 관계였다.


2. 정사[편집]



2.1. 발단[편집]


211년 3월, 조조가 종요와 하후연을 파견하여 장로를 토벌하고자 했다. 고유는 이 군사적 행동이 한수, 마초 등 관서 군벌들을 자극하여 모반을 일으키게 할 우려가 있다고 반대했지만, 조조는 듣지 않았다. 결국 고유의 우려대로 한수, 마초, 양흥, 양추, 이감, 후선, 장횡, 성의, 마완, 정은 등 관서 군벌들은 연합하여 거병하게 된다. 이들 10인은 각 부곡에서 1만씩의 병사를 징집하여 총 10만이라는 당시의 조조조차 당황할 대군을 이루었다.

관서군은 위수(渭水) 북단을 단숨에 가로질러 관중 지역 최고의 요새인 장안성을 그대로 통과, 그 동쪽에 있는 동관(潼關)을 점거하게 된다. 이들은 하수, 동수 일대를 점거하고 진영을 벌여 세웠는데, 이에 홍농 및 풍익에서는 많은 현읍이 거병하여 그들에게 호응하였다고 한다[8]. 조조는 강릉에서 돌아온 뒤 대기 중이던 조인을 안서장군(安西將軍)에 임명하여 선발대로 출진시키되, 후속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절대로 마초와 함부로 교전하지 말고 수비에만 힘쓰라는 엄명을 내렸다. 아울러 자신의 아들이자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으로 있던 조비로 하여금 업성을 지키게 하고, 분무장군(奮武將軍) 정욱을 보좌역으로 남겼다. 그 외 좌호군(左護軍) 서선(徐宣)에게는 군무를, 거부장사(居府長史) 국연(國淵)에게는 행정을 맡겼다. 이와 같이 후방의 인사를 마무리한 조조는 가후를 종군 참모로 삼고 장합, 서황, 우금, 허저, 주령 등 쟁쟁한 장수들을 참전시켜 동관으로 출진했다.



2.2. 동관전투[편집]


211년 7월, 조조가 본대를 이끌고 동관으로 향했다. 당시 관서군의 예기는 매우 날카로워 자치통감에 주를 단 호삼성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때 관서 지역의 군대는 (천하에서) 가장 날카롭고 강하였다

이민족들과의 잦은 전투로 단련된 경험 많은 관서군의 전투력은 실로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조는 이런 관서군을 상대로 회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조조는 별동대를 파견해 적을 고립무원의 처지로 떨어뜨릴 수 있는 전략을 구사했는데, 부장 서황은 그런 조조의 생각과 꼭 들어맞는 대책을 제시했다. 조조가 동관에 도착한 뒤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 서황을 불러 물었다. 이에 서황이 말했다.

"공의 성대한 군세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적이 포판(蒲阪)을 수비하지 않으니, 그들이 무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저에게 정예병을 빌려주시면 포판진蒲坂津을 건너 병력을 배치한 뒤 그들의 내부를 끊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능히 적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삼국지 위서 서황전

조조는 서황의 말에 따라 본인은 관서군과 대치하면서 서황과 주령에게 병사 4,000명을 주어 몰래 도하하여 황하 입구인 포판을 건너 황하 서쪽을 점거하게 했다. 관서군도 이를 예측하고 있었기에 양흥이 밤중에 보기 5,000명을 이끌고 기습을 가했으나, 조조군의 명장 서황의 침착한 대응에 패퇴하고 만다. 이렇게 북안은 조조군에게 떨어진다.

조조군의 동향을 주시하던 마초는 즉시 조조가 어떤 주전략을 세우고 있는지를 직감했다. 마초는 한수를 찾아가 위수 북안에 방어선을 마련하고 조조군의 도하를 막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조조군은 20일도 되지 않아 군량 부족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는데, 한수는 오히려 조조군의 도하를 방치하여 조조군이 강을 건너면 그대로 궤멸시키자는 낙관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마초에 말이 옳아 훗날 이 대화를 입수한 조조가 크게 탄식했다고 한다.

“마초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도 묻힐 땅이 없겠구나”

삼국지 위서 무제기

8월, 일부 병력만 남기고서 조조가 인솔하는 대군이 황하를 도하하기 시작했다. 당시 조조는 병력과 물자를 먼저 도하하게 하고 자신은 허저와 그 휘하의 100여 명의 호위병을 곁에 둔 채 후미에 남았다. 그러나 미처 도하 작전이 다 끝나기도 전에 조조군의 움직임을 포착한 마초가 보기 1만여명을 이끌고 불시에 용맹하게 돌격하여 들이닥침으로써 그 자리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조조는 호상(胡床)에 앉아 일어서지 않았다. 장합 등이 사태가 급박한 것을 보고 함께 조조를 이끌어 배에 타게 했다. 이때 허저전에 따르면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허저는 조조에게 적군이 너무 많이 오고, 지금 병사들은 이미 다 건넜으니 떠나야만 한다고 말하고는 조조를 부축하여 배에 태웠다. 적군은 더욱 빨리 추격하였고 군사들은 배에 오르려는 자들을 죽이고 왼손으로 말 안장을 들어 조조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다. 사공에게 빨리 노를 저으라 재촉했는데, 설상가상으로 노를 저어야 할 사공이 그만 마초군의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이에 다급해진 허저는 말안장을 들어 조조를 가리는 방패로 삼고서는 반대쪽 손으로 직접 노를 저어 가까스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진수는 허저전에서 "이날 허저가 없었다면 (조조는) 큰 위태로움에 빠졌을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허저 말고도 조조군의 교위로 있던 정비(丁斐)가 마초군의 추격이 급박한 것을 보고는 자신의 관리하에 있던 소와 말을 한꺼번에 들판에 풀어놓았다. 이에 마초군 일부가 추격을 놓아둔 채 가축을 포획하느라 정신이 없게 되었다고 한다. 허저의 용맹과 정비의 기지로 인해 조조는 무사히 강 반대편에 진지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제장들이 군이 패하는 것을 보았는 데다 또한 조조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해 모두 황망하고 두려워했는데, 조조를 만나보고는 슬퍼하고 또 기뻐하며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조조가 크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하마터면 좀도둑들에게 곤란을 당할 뻔 했구나!"

조조는 이후 황하를 따라 용도를 건설하며 차근차근 남하한다. 마초군은 물러나 위수가 황하로 유입되는 입구(渭口)를 지켰다. 조조가 이미 도하에 성공하여 하서 일대를 장악한 이상 동관 방면에서의 교전은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조조는 이제 전략적 우위를 점하여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입장에 섰다. 이에 조조가 속이는 군사(疑兵)를 여럿 두고는, 배에 군사들을 태워 몰래 위수로 들어가 부교를 만들고, 밤중에 군사를 나누어 위수 남쪽에 둔영을 세웠다.



2.3. 이간책과 위수 전투[편집]


이렇게 관서군과 직접 대적하는 위치에 서는 것은 본래 백병전에 능한 관서군을 상대로 정면 회전은 피한다는 조조의 방침에 비추어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었을 테지만, 당시 조조에게는 참모 누규의 책략에 따라 준비한 대비책이 있었다. 강 남안이 모래밭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누규는 당시 날씨가 점차 추워지는 절기에 접어들었음에 착안, 모래로 벽을 쌓은 뒤 물을 뿌려 얼림으로써 임시로 방벽을 구축하는 책략을 내놓았던 것이다. 조조가 탐색전을 겸해 파견했던 소수 부대는 도하하는 족족 마초의 기병대에 의해 격퇴당했지만, 밤을 틈타 일제히 결행한 대규모 도하와 누규의 책략을 이용한 성채 급조에 대해서는 마초는 물론이고 관중제장들 중 누구도 방비하지 못했다. 물론 마초라고 조조가 이러는 것을 모를 리는 없어서 조조가 이렇게 나온 후에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밤중에 둔영을 공격했으나 조조는 급조한 성채와 복병으로 이를 격파했다.

이렇게 되자, 관서 군벌들의 선택지는 피해를 최소화하여 근거지 양주로 퇴각하는 것 뿐으로, 사실상 전세는 완전히 기울게 된 것이었다. 결국 화친 제의를 하게 되는데, 조조는 이들을 곱게 돌려보낼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 가후의 이간책을 채택하여 관서군을 와해시킬 작전을 세운다. 양측의 회담에서 조조는 한수와의 친근감을 과시하여 이간책을 걸기 시작했고, 마초는 나름대로 본인의 무력에 의지해 회담장에서 조조를 사로잡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허저의 존재감에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이후, 조조는 한수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여러 곳의 글자를 첨삭해 마치 한수가 고친 것처럼 보이게 하니, 이로 인해 마초 등은 결정적으로 한수가 조조와 내통 중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마초와 한수를 이간시키니 다시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게 되었고 군이 대패하는 원인이 되었다. 다수의 제장들에 의해 운영되는 관서군의 지휘 체계상 이러한 의심은 연합 자체를 와해시킬 수 있는 치명타였음에 틀림없다.

이제 조조는 오히려 처음에는 피했던 회전을 벌이기 위해 날짜를 정했고, 관서군과 조조군은 회전을 벌이게 된다. 정사에서는 매우 간략한 나머지 어떤 전술을 썼고 어떤 식으로 포진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는다. 다만 '먼저 경병(輕兵)으로 싸움을 걸고 싸움이 매우 오래 지속된 후 호기(虎騎)를 풀어 협격(夾擊)하여 대파했다.'라고 당시에 활용된 전술에 관한 기록이 간략하게 남겨져 있다. 일종의 망치와 모루 전술을 사용한 듯하다. 회전만큼은 자신있었던 관서군이었지만,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된 연합군은 조조의 정예병 앞에서 무너지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주동자격인 한수, 마초 등은 양주로 도주하고 양추는 안정으로 달아나니 관중이 평정되었다.



3. 결과[편집]


이 전투로 관서군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와해되었으며, 관중제장 역시 대다수가 몰락하게 된다. 이감은 전사했고, 성의는 붙잡혀 처형당했으며, 장횡, 마완은 사서에서 증발했다. 후선과 정은은 장로에게 의탁했다가 215년에 장로가 항복할 때 같이 항복하여 원래 직위와 관직을 유지했다. 양추는 안정으로 퇴각하였으나 211년 10월에 추격해온 조조, 하후연, 장합에게 포위당하자 항복하여 관군장군으로 승진하고, 그대로 안정을 다스리게 된다.
이 회전 한 번으로 관중제장의 난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직 마초, 한수, 양흥만이 군세를 유지하며 저항을 이어갔다. 그마저도 양흥은 212년 좌빙익 아현 부성에서 장합, 서황, 주령 등을 거느린 하후연과 빙익태수 정혼의 합공에 패사하게 된다. 그리고 211년 12월에 조조는 중앙으로 복귀하여 212년 5월에 마등을 비롯한 마초의 일가들을 모조리 처형시켰다.


4. 평가[편집]


관중제장의 난은 반동탁 연합과 유사하게 중국 역사적으로 볼 때 특이한 케이스이다. 지방의 관리들이 사병을 조직하고 서로 연합하여 중앙 정부를 공격한 것 부터가 중국 역사상 드물기 때문이다. 물론, 반동탁 연합과는 다르게 애초에 관서 지역의 군벌들은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이전부터 심심찮게 중앙 정부에 반란과 충성을 반복해온 집단이라 동일 선상에 두고 비교할 수는 없다.

어쨋든 이런 상황은 둘째치고 냉정하게 보면 연합 상태는 매우 좋지 못했다. 우선 맹주격인 마초가 모든 군벌을 아우를 실권이 없었는데, 발언권이 높았던 한수는 정치적 감각이나 군사 경영능력은 몰라도 군사적 식견이 부족하여 마초가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게 했다. 실제로 마초의 의견대로만 관서군이 움직였다면 전투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오랜 세월 이합집산을 반복해온 집단인 만큼, 서로에 대한 신뢰도 역시 부족하여 결국 가후의 이간책에 쉽사리 넘어가게 된다.


5. 여담[편집]


조조 토벌전, 반조조 연합 등으로 불릴 수 있을 정도로 반동탁 연합(동탁 토벌전)과 많은 유사점을 지닌다. 유력인 1, 2명이 맹주 역할을 했다는 점[9], 군소 군벌들이 연합하여 황제를 옹립한 강력한 중앙정부에 대항했다는 점, 초기에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결국 와해되어 해체됐다는 점까지 동일하다. 이는 연합군의 특성상 결성 초반의 예기는 강력하지만, 모두가 비슷하거나 동등한 위치에서 제각기 군사들을 이끌고 있다 보니 반목이 일기 쉽고, 의견통일이 어렵다는 약점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장기전에선 불리하게 작용하여 연합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다만 물리적 위치는 완전히 역전되어 반동탁 연합때는 관동(중원)의 제후들이 관중의 중앙 정부를 공격한 모양새인데, 관중제장의 난은 관서(관중)의 군벌들이 중원(관동)의 중앙 정부를 공격한 형세라는 점이다.

6. 연의[편집]


연의에서도 정사와 비슷한 노선을 취하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마등이 먼저 죽어 마초가 반란을 일으킨다는 점과 마초가 우두머리이며, 한수는 참모격이고 다른 관중제장들이 마초와 한수의 부하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조의 굴욕적인 장면이 추가되었는데, 전투가 불리해자지 붉은 전포를 입은 조조를 보고 마초군이 붉은 전포를 입은 자가 조조니까 그를 사로잡으라고 외치자, 조조가 전포를 벗어던졌고, 이어서 수염 긴 놈이 조조라는 말에 조조가 단도로 수염을 잘라버린다. 근데 또 그 꼴을 본 마초군이 수염 짧은 놈이 조조라고 외치자, 이번엔 천을 찢어 자신의 턱을 싸매고 천방지축 달아나는 장면이 삽입되었다. 악역인 조조의 도망가는 모습이 굴욕적이라서 보는 이로 하여금 통쾌함을 자아내고 훗날 오호대장군이 되는 마초의 위세를 보여주려는 의도로 넣은 장면인 듯 하다. 마등이 죽은 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설정도 마초의 패륜아적 이미지를 지우고 효자, 충의지사의 모습을 부여하기 위함으로 나관중의 편애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조홍은 뜬금없이 이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되어 초반에는 명을 어기고 성을 거점을 빼앗겨 군법에 따라 조조에게 처형당할 뻔 하지만, 위의 장면에서 마초로부터 조조를 구해내어 조조가 지난날 조홍을 죽였다면 자신도 오늘 죽었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용서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조홍이 형양 전투 때 서영에게 대패해 죽을 뻔한 조조를 목숨결고 살린 대목에서 착안한 듯 하다.

이 외에도 마초가 한수의 팔을 자르고 수하팔기를 죽이는 등 관중제장의 내분을 더욱 심각하게 묘사하여 마초의 패배가 어쩔 수 없던 것처럼 포장해주었다.


7. 번외편: 마초의 재기와 몰락[편집]


관중제장이 와해된 이후에도 마초는 재기를 이어나가 212년 1월부터 214년까지 양주 지역을 뒤흔들었다. 특히 213년에는 여러 융족들을 이끌고 다시 일어나 기성을 제외한 농상의 군현들을 모두 손에 넣었고, 이후 공성전으로 기성을 장악한 마초는 정서장군(征西將軍) 병주목(幷州牧) 독양주군사(督涼州軍事)를 자칭하며 자신의 재기를 요란하게 선전했다. 그리고 조조군의 명장이자 서부 전선 사령관인 하후연을 야전에서 격파하며 위세를 떨치게 된다. 그러나 마초는 숙적 왕이, 양부의 계책으로 마침내 세력을 잃고 한중에 틀어박히게 된다. 마초는 훗날 장로의 지원을 받아 다시 기산으로 나아갔으나 남편과 함께 출진한 왕이에게 30일 동안 막혀 장합의 지원군이 당도하자 달아나버렸다.


8. 기타 창작물[편집]



8.1. 삼국지 시리즈[편집]


삼국지 11에서는 본편 시나리오 중에서 유비입촉 시나리오가 사실상 동관 전투를 겸하고 있다. 정사와는 달리, 마초는 장안까지 점거한 강대한 세력으로 나오는데, 초반부터 군사와 군마가 갖춰져 있으며, 기사 업그레이드까지 되어있어 그 예기가 실로 날카롭다. 그리고 각기 독자적인 세력으로 나오는 반동탁 연합의 18로 제후와 달리, 연의에서처럼 마초가 단일 군주로 나오기 때문에 부하들 충성도 관리 문제야 있겠지만, 훨씬 더 응집력이 강한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처럼 장기전에 약해서 초반의 날카로운 공격만 어느 정도 막아내면, 이후 내정에서 심각한 곤란을 겪어 빈곤한 세력으로 전락해버린다. 그래서 마초군으로 플레이 할 경우, 조조군의 인재를 반드시 포획 및 습득해야 한다. 한중의 장로를 병탄하여 내정요원을 확보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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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수전투의 회전으로 관서군이 궤멸하기 까지로 한정했을 경우[2] 마초의 완전한 몰락과 한수의 죽음까지로 확장해서 본다면 한수가 죽는 215년까지로 볼 수 있다 [3] 연합군의 특성상 모든 관중제장들이 동등한 지위에 있었다[4] 배송지 주 전략[5] 피해 규모를 참고하면 역시 수만의 대군이었을 것이다[6] 관서군 와해[7] 삼국지 위서 위기전 주석 위서[8] 삼국지 위서 두기전[9] 반동탁 연합은 원소, 조조/반조조 연합은 한수, 마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