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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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의 왕자
광평대군 | 廣平大君


파일:전주_이씨_광평대군파_묘역_원경1_(촬영년도___2015년).jpg

광평대군묘역 전경
출생
1425년 5월 28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사망
1445년 1월 23일 (향년 19세)
조선 한성부 광평대군 사저
(現 서울특별시)
묘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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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여(璵)[1]
부모
부왕 세종
모후 소헌왕후
형제자매
18남 4녀 중 5남
배우자
영가부부인 평산 신씨
(永嘉府夫人 平山 申氏)[2]
자녀
슬하 1남
장남 - 영순군 이부(永順君 李溥)
종교
유교 (성리학)

환지(煥之)

명성당(明誠堂)
군호
광평대군(廣平大君)[3]
시호
장의공(章懿公)

1. 개요
2. 생애
3. 가족과 후손
4. 광평대군 묘역
5.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세종과 소헌왕후의 5남.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의 시조로 20세의 어린 나이에 창진으로 사망하였다. 아들 영순군이 태어나고 겨우 5개월이 지난 무렵인데 짧은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인물. 하지만 사후에 후손들이 많이 번창하였다.


2. 생애[편집]


1425년 5월 2일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5남으로 태어난다. 7세이던 1432년 1월 16일에 광평대군으로 봉해지고 1436년에 1차 왕자의 난으로 사망하여 후사가 끊어진 무안대군의 양손자로 입적되었다. 혈연상으로 무안대군과 광평대군은 작은할아버지와 조카손자의 관계이므로 사후에 입적된 양자로 인정될 수 없어서 시양손이나 봉사손으로 인정해야 정답이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도 광평대군을 무안대군의 봉사손으로 인정한다.

1437년에는 처조부 신효창(申孝昌, ? ~ 1440)이 자신의 비첩(婢妾:여자 종으로서 첩이 된 자) 소생의 얼자인 신근지(申謹之, ? ~ 1455)[1]를 벼슬길에 오르도록 도와달라는 청탁을 받고 임영대군과 함께 세종에게 '신근지는 활쏘는 재주가 능하여 마땅히 쓸 만하다'며 청탁을 했다. 이에 세종이 병조로 신근지를 보내어 시험을 치르게 하니 걷거나 달리면서 활글 쏘는 보사와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기사에 모두 능숙하였다.

그러나 신효창은 1418년에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에 제수되었을 당시에 1402년 승녕부윤(承寧府尹)으로서 조사의의 난에 가담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는 그해 형조·사헌부·사간원 등을 비롯해 좌의정 박은 등 여러 고위 관료들에게 지속적으로 탄핵을 받고 결국 세종이 즉위한 후 관직 임명장과 원종 공신 녹권을 빼앗기고 전라도 무주현유배당했다. 유배지에서 군역에 종사하던 그는 1425년에 석방되었으나 1437년에도 관직 임명장과 원종 공신 녹권은 돌려받지 못해 여전히 평민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광평대군과 임영대군이 그에게 관직 임명장을 돌려줄 것을 세종에게 간청하여 신효창은 18년 만에 좌군 도총제의 직임에 복귀할 수 있었고 신근지도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다. 이듬해인 1437년에는 원종 공신 녹권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왕자가 청탁을 받는 사건은 조선 초기에 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창진을 앓던 광평대군은 1445년 1월 23일에 20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였다. 세종은 광평대군의 사망을 알고 너무 놀라서 슬픔에 잠겨 수라를 끊고 3일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저자는 모든 점포들이 문을 닫는 등 조야가 모두 슬퍼하였다. 하지만 광평대군이 사망하고 1개월이 지나서 동생인 평원대군마저 사망하여 세종과 소헌왕후의 상심은 더욱 늘었다.

광평대군의 다른 사인으로 생선 가시가 전해진다. 이야기에 따르면 세종이 관상가를 불러서 여덟 대군들의 관상을 보았는데 관상가는 광평대군의 관상을 보고 "귀골로 뛰어난 재질과 복록을 갖추었으나 안타깝게도 오래 살지 못하고 굶어서 돌아가실 상이옵니다."라고 말했다. 세종은 그 말에 웃으면서 "어찌 왕자가 굶어서 죽을 리가 있단 말이오?"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되어 광평대군에게 경기도 광주목의 넓은 땅을 사패지로 주었다고 한다.[2] 하지만 광평대군은 준치를 먹던 도중 가시가 목에 깊숙히 걸려 빼지 못하여[3] 병이 도지고 창진마저 겹쳐 식사도 더는 하지 못하다가 결국 숨졌다. 이는 야사집인 용재총화에 기록되어 있다.


3. 가족과 후손[편집]


20세의 어린 나이에 사망한 광평대군이지만 사망한 무렵에 태어난 아들인 영순군을 통해 가계가 이어지게 된다.

광평대군의 아들인 영순군은 할아버지인 세종의 특별한 당부를 받아 문종 치세에 사촌인 단종과 같이 궁궐에서 성장하였다. 큰아버지인 세조에게도 총애를 받고 종친부의 가장 높은 품계인 현록대부에 제수되었다. 주특기는 회계. 27살의 나이로 요절했으나 슬하에 3형제를 두어 자손 번영에는 무리가 없었다. 청상과부가 된 광평대군의 정실부인인 신 씨는 불교에 뜻을 두어 신하들의 탄핵을 받았으며, 영순군의 정실인 최 씨도 남편의 사후 시어머니와 함께 쌍과부가 되어 석가모니를 모시는데 열심이어서 구설수에 올랐다.

영순군 본인은 조선 역사상 최연소 영의정인 구성군 이준과 함께 종친 중의 인재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더구나 성종이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병사했기 때문에, 구성군처럼 화를 당하지 않았다. 예종 시기 때 궁을 지키던 무사들이 "주상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후사는 영순군이 뒤를 이을 것이다"라고 대화를 하다가 적발당해 참형을 당한 적이 있었다. 당시 신하들이 영순군에게도 처벌을 가할 것을 주장했으나 예종이 영순군을 변호해서 처벌을 면했다.

자손이 아주 풍성하지는 않지만 제법 번성하여 훗날 이백연(李白淵)[4]예종의 장남이자 요절한 인성대군의 봉사손이 되었다.

뒷날 낙동염라로 유명한 이경하[5]와 그의 아들들인 대한제국 때의 관료 이범진과 이범윤, 그의 손자이자 헤이그 특사의 한 사람인 이위종, 독립군 장군이자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 소설가 이범선, 독립유공자 이범교,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이원종, 아주대학교병원의 의사 이국종이 모두 광평대군의 후손이다. 이범진, 이범석, 이범선은 광평대군의 17대손이고 이위종, 이원종, 이국종은 광평대군의 18대손이다. 또한 서애 류성룡의 아내 역시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이 광평대군파에 관련해서 적장남으로만 이어져 온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광평대군 이여-영순군 이부-남천군 이쟁-곤명군 이영-이인번까지는 직계로 이어지다가 이인번이 후사가 없어 차남 이의번의 후손으로 후계가 이어지며, 이의번계는 이의번-이탄-이성장-이극선-이후-이국영으로 직계가 끊어진다. 숙부 이익(이극선의 5남)의 양자로 간 삼남 춘영[6]의 장남 이성을 양자로 들였으나 이성 역시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고, 춘영의 차남 이연을 다시 양자로 들였다. 이연의 대 또한 손자 득수의 대에서 끊어져 굉수(이시욱의 5남[7])의 아들 이상우가 양자로 들어갔으며 이상우-이인형-이주하-이범교로 대가 이어진다. 고로 광평대군이 직계로만 이어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8]

특이하게 조선 후기 들어 광평대군의 자손 일부가 왕실의 종친으로 입양간 경우가 더러 있다. 대표적으로 선조의 13남이자 막내아들[9] 영성군 이계의 독자 회원군 이윤이 아들을 두지 못해 광평대군의 8대손 이홍[10]이 양자가 되어 함평군에 봉해졌다. 영성군부터 회원군까지 독자로 이어져왔기에 현재 전주 이씨 영성군파는 실제로는 대부분 광평대군의 후손이다. 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 흥인군 이최응의 외아들 완영군 이재긍 또한 아들이 없어 광평대군의 17대손 이지용[11]을 입양했고, 이지용 또한 자신의 장손을 다른 광평대군의 19대손에서 들였다.


4. 광평대군 묘역[편집]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43호[12]

48호

49호
연령군 이훤 신도비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 묘역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8호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 묘역
全州 李氏 廣平大君派 墓域


소재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광평로31길 20
(수서동 산10-6, 산10-8, 산10-9, 산10-14)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기타
수량 / 면적
412,593㎡
지정연도
1981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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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주_이씨_광평대군파_묘역_일원2_(촬영년도___2015년).jpg}}}
광평대군 묘역[13]


광평대군묘와 종가는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에 있으며, 이 곳이 광평대군이 사패지로 받았던 옛 광주 땅이다. 여기에는 광평대군 묘만 아니라 광평대군 후손들의 묘들도 있으며 무안대군 방번의 후사를 이었기 때문에 광평대군 묘역에는 무안대군의 묘도 있다. 강남구 일원동, 수서동 일대를 지나는 도로명으로 그의 봉호를 딴 '광평로'가 있으며, 수서동과 송파구 가락동을 잇는 다리인 '광평교' 이름 역시 그의 봉호에서 유래한 것이다. 서울 근교에 남아있는 왕가의 묘역 중 가장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1981년 2월 5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받았다.

근방에는 광평대군 종택이 있는데, 원래 광평대군 종가는 동대문 부근에서 500년 넘도록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나 한국전쟁 당시 18대 종손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고, 광평대군파 묘역에 도굴꾼들이 창궐하자 이를 막기 위해 19세 종손 이규명 씨가 묘역 근처로 종택을 옮긴 것이다. 다만, 강남 개발을 계기로 광평대군파 묘역과 대대로 물려받은 사패지가 전부 금싸라기 땅이 되어버려 개발압력이 많다고 한다.[14]

묘역 옆에는 필경재(必敬齋)라는 고급 한식당(코스요리)이 있다. 천주교 수서동 성당 오른편에 보이는 한옥이다. 성종 때 광평대군의 증손인 이천수가 건립한 99칸짜리 집이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많이 손상되었는데, 1994년 복원하여 한식당으로 개조했다. 아무 때나 먹는 일상 식사류를 파는 집은 아니고, 상견례, 어른의 생신, 돌잔치, 중요한 손님의 접대 등에 이용할 만한 음식점이다. 값도 무척 비싸고 예약이 필수이니 헛걸음하지 않도록 주의. 근데 저 음식점이 종가집 행세[15]를 한다고 해서 종중에서 싫어한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 2009년 5월 11일에 위기탈출 넘버원에서 생선가시의 위험성에 대해 설명할 때 나왔는데, 고증에 맞지 않게 조선 후기 세자 복장으로 나왔다.#

파일:attachment/광평대군/광평대군.jpg}}}
〈뿌리깊은 나무〉의 광평대군

"어떠하냐, 괜찮은 글자 아니더냐? 너라면 그걸 포기할 수 있겠느냐?"

"세상은 아바마마께 성군이라 하지. 헌데 아느냐? 아바마마께도 태종대왕의 피가 흐르고 있다. 태종대왕의 피는 여기에도 흐르고 있으니까!"

"스물 여덟 자."[16]

  • 2011년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배우 서준영[17]이 연기했다. 극 중에서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의 쟁쟁한 형들을 제치고 세종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등장했다. 부왕 세종의 계획을 은밀하게 돕고 있으며 세종의 이상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믿고 따르고 있다. 사실 드라마가 정도전 사후 48년(1446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1444년에 사망한 광평대군은 나올 수 없어야 정상이다.[18] 14회 말미에 밀본[19]에게 소이와 보쌈당하는 도중 몸에 상처가 나 고통에 시달리지만 똘복이가리온을 불러와 치료를 받은 덕분에 무사히 살아남았다. 똘복이는 광평대군을 무시하고 소이랑만 얘기하려다가 광평대군이 칼을 들자 겨우 상대해줬는데 세종의 원대한 뜻과 각오를 말하고 똘복이를 설득해주는 어마어마한 역할로 커졌다.[20] 자신과 세종의 설득에 마음이 움직인 똘복이의 도움으로 무사히 에 돌아오지만 19회에서 한글을 배포하기 위해 활자소에 있다가 정기준에게 그 사실이 알려지고 윤평에게 납치당하고 만다. 역병과도 같은 이 글자를 막기 위해 정기준은 "이 글자를 아는 모두를 죽이고 자신도 그 뒤를 따른다"고 했으며 굳건한 세종을 동요시키기 위해 결국 광평대군을 살해해버리고 그 시신을 궁으로 보냈다. 참고로 2011년 12월 7일 20화에서 광평대군이 사망했는데 실제 역사 속 광평대군은 1444년 12월 7일 향년 20세로 사망했다.[21] 비록 양력음력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날짜를 맞춘 것일 수도 있다. 이미 1446년이 배경이라면 이미 2년 전에 죽은 사람이 이리저리 돌아다닌 것인데 2011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의 온녕군이 그랬듯 죽은 사람이니까 부담없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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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평대군에겐 "처얼(孼)숙부"이 된다. 1455년 6월 11일 금성대군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관직 임명장을 빼앗기고 변방에 충군(充軍)되었다. 5개월 뒤인 11월 9일에는 형벌이 가중되어 교수형선고되어 얼마 뒤 처형당했다. 한성부 동부에 있던 그의 저택은 사직(司直) 이몽가(李蒙哥)에게 하사되었고, 충청도 이산현(尼山縣)·경기도 광주목, 한성부 동부 왕심역(往心驛) 앞 등에 있던 토지들은 모두 판내시부사 전균(田畇)에 하사되었다. 1791년(정조 15) 장릉 배식단에 배향되었다.[2] 여기에는 세종이 혹시 몰라서 준 것으로도 살이 붙여지기도 한다. 광평대군이 절대 굶어죽을 일이 없도록 아예 땅을 넉넉하게 주어 액운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의도였다는 것.[3] 실제로 준치는 가시가 많은 물고기다.[4] 영순군의 손자인 서성군(瑞城君) 이옹(李滃)의 11대손[5] 영순군의 손자인 안정부정 이천수(安定副正 李千壽, 《광평대군파보》에는 정안부정(定安副正)으로 적혀 있다.)의 13대손.[6] 차남 문영의 경우 외동아들 신(紳)뿐이라 양자로 보낼 수 없었다.[7] 2남 익수는 무후라 양자를 들였고, 3남 필수,4남 채수에게는 각각 외동아들인 상억과 상천밖에 없었기 때문에 양자로 보낼 수 없었다.[8] 다만 핏줄로만 따지면 아무리 멀어도 숙질을 벗어나지 않았다. 족보상으로는 국영과 연이 5촌지간이다.[9] 흔히 영창대군이 막내 아들로 알려져 있는데 영성군이 막내다. 영창대군과 동갑이긴 하지만 생일이 느리다.[10] 영순군의 손자인 임정부정 이수정(臨汀副正 李壽定)의 5대손.[11] 안정부정 이천수(安定副正 李千壽)의 14대손이며, 앞서 언급한 이경하하고 계보상으로 13촌 조카 관계에 있다.[12] 44호 상봉동오층석탑부터 47호 상봉동전수덕사사리탑까지는 충청북도 음성군 한독약품박물관으로 이전되어 1993년 4월 3일에 일괄적으로 해제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1~100호 문서 참조.[13]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14] 광평대군파는 강남에 무려 27만평의 땅을 보유하고 있다. 그린벨트로 지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개발요구가 들어오고 있으나 종중에서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고 광평대군파 파종회 이사장이 언급한 바 있다.[15] 진짜 종가집은 광평대군 묘 옆에 있다.[16] 강채윤의 '새 글은 몇 자냐.'라는 질문, 아니 비웃음에 관한 대답.[17]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둘째 형인 수양대군 역.[18] 그런데 중반 심종수의 대사에서는 정도전 사후 45년이라고 한다? 작가가 뒤늦게 수정을 한 것인지, 그저 실수인지 모르겠다.[19] 근데 인물 분류상 세종 일가로 들어가야 되는데 공식 사이트의 인물 소개란에도 세종 일가가 아니라 비밀 조직에 들어가 있다.[20] 세종을 아직까지도 믿지 못하고 자신을 인질로 삼은 똘복이에게 세종의 진심과 새로운 문자의 필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서 "새로운 문자 28자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줘 강채윤을 세종의 사람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21] 세종 26년(1444년) 12월 7일에 광평대군 이여(李璵)가 졸(卒)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