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베클리 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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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1985년

이스탄불 역사지구
İstanbul'un Tarihi Alanları

1985년

디브리이의 대 모스크와 병원
Divriği Ulu Camii ve Darüşşifası

1986년

하투샤
: 히타이트의 수도

Hattuşa: Hitit Başkenti

1987년

넴루트 산
Nemrut Dağı

1988년

크산토스 ・ 레툰
Xanthos - Letoon

1994년

사프란볼루
Safranbolu Şehri

1998년

트로이의 고고 유적
Truva Arkeolojik Alanı

2011년

셀리미예 사원 복합 유적
Edirne Selimiye Camii ve Külliyesi

2012년

차탈회위크 신석기 유적지
Çatalhöyük Neolitik Alanı

2014년

부르사와 주말르크즈크
: 오스만 제국의 탄생

Bursa ve Cumalıkızık
: Osmanlı İmparatorluğunun Doğuşu


2014년

페르가몬과 다층적 문화경관
Bergama Çok Katmanlı
Kültürel Peyzaj Alanı


2015년

디야르바크르 요새 및 헤브셀 정원 문화경관
Diyarbakır Kalesi ve Hevsel Bahçeleri Kültürel Peyzajı

2015년

에페수스
Efes

2016년

아니 고고학 유적지
Ani Arkeolojik Alanı

2017년

아프로디시아스
Aphrodisias

2018년

괴베클리 테페
Göbekli Tepe

2021년

아르슬란테페
Arslantepe Höyüğü

2023년

고르디온
Gordion
복합유산

1985년

괴레메 국립공원과 카파도키아 바위 유적
Göreme Millî Parkı ve Kapadokya

1988년

히에라폴리스 ・ 파묵칼레
Hieropolis - Pamukkale




파일:external/arkeolojihaber.net/gobekli-tepede-koruma-catisinin-alt-yapi-calismalari-tamamlandi.jpg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괴베클리 테페
영어
Göbekli Tepe
프랑스어
Göbekli Tepe
국가·위치
튀르키예 샨르우르파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18년
등재기준
(i)[1], (ii)[2], (iv)[3]
지정번호
1572
1. 개요
2. 언어별 표기
3. 조성된 시기
4. 유적지의 건설
5. 몰락
6. 해석
6.1. 천문 현상과의 연관성?
7. 슈미트 교수
8. 기타
8.1. 아르메니아의 반발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www.bibliotecapleyades.net/gobekli_tepe08_01.jpg
파일:external/thumbs.media.smithsonianmag.com/gobeklitepe_nov08_11.jpg__600x0_q85_upscale.jpg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는 튀르키예어로 '배불뚝이 언덕'이라는 이름의 지명으로, 튀르키예 남동쪽 샨르우르파(Şanlıurfa)도 외렌직(Örencik)군에 있는 석기 시대의 유적을 가리킨다.

이 유적은 해발 760미터에 위치한 언덕 정상에 묻혀 있었는데 현지인이 우연히 찾아서 몰래 파내려가다 발견되었다. 이후 1963년에 미국 시카고 대학교와 튀르키예 이스탄불 대학교가 공동조사를 하여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였던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Klaus Schmidt)[4]를 단장으로 한 조사단이 1994년부터 2014년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하였다. T자 형태 돌기둥 2백 개 이상이 늘어서 스무 겹으로 원을 이루는 형태가 특징인데, 기둥 중 가장 높은 것은 5.5 m에 달한다.

2018년 6월, 바레인 마나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튀르키예의 18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언어별 표기[편집]


【언어별 명칭】
한국어
괴베클리 테페
튀르키예어
Göbekli Tepe
아르메니아어
Պորտասար (Portasar)
쿠르드어
Girê Mirazan
중국어
哥贝克力石阵
일본어
ギョベクリ・テペ


3. 조성된 시기[편집]


2010년 발표된 결과로는 가장 오래된 부분이 기원전 9675년 무렵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 구조물은 약 1만 1700년 전에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토기 없는 신석기 시대(PPNA)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5] 이 정도 크기의 인공 구조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6] 대표적인 대규모 고(古)유적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이기도 한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대략 기원전 2000-2700년 무렵 건설된 유적인데 괴베클리 테페는 이 시기를 아득히 뛰어 넘는다. 단순 계산으로 따져도 피라미드가 지어진 시기와 현대까지의 기간(4천 년)보다, 괴베클리 테페가 지어지고 피라미드가 지어지기까지의 기간(7천 년)이 3천 년이나 더 길다. 심지어 최초의 문명도시라고 하는 수메르 문명보다도 앞선 것이다.

슈미트 교수에 따르면 기둥에 새겨진 부조나 주변에 나타난 흔적 등을 토대로 보건대 수렵채집인들이 건축한 듯하지만[7], 일 년 중 일정기간은 마을에서 거주했을 듯하다.#

유적이 위치한 아나톨리아 지역은 현재까지 발견된 도시 중 가장 오래되고 초기 밀농사를 했다고 추정되는 유적들도 발견되므로, 수렵인들이 이런 종교시설을 건축하며 모여 살다가 농사를 지으며 정착민으로 변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새로운 학설이 제시되었다. 아래 항목 참조

물론 존재 자체로도 놀라운 유적이지만, 현재는 연구가 막 시작된 단계라 아직 모르는 부분들이 많다. 인터넷상에서는 설레발이 심하지만, 아직은 딱히 이렇다 저렇다 할 만한 명확한 성과가 나오진 않았기 때문에 좀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레이엄 핸콕 같은 사람들은 초고대문명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 시점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류가 원시 생활에서 벗어나 일정 규모의 인구가 모여 연대를 붙이는 것이 의미 있는, 즉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최초의 고고학적 업적을 만든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베클리 테페를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1993년 이탈리아계 미국인 지질학자 체사레 에밀리아니(Cesare Emiliani)는 서력기원의 연대에 1만을 더해 홀로세기원(Holocene era), 또는 인류기원(Human Era)이라고 이름지어 약칭 HE라고 쓰자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서기 2022년은 12022 HE라고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2019년, 괴베클리 테페에서 38 km 떨어진 카라한 테페(Karahan Tepe)에서 T자형 기둥이 250개나 발견되는 등 괴베클리 테페보다 더 거대한 신전이 있었고, 괴베클리 테페와 카라한 테페 이외에도 주변지역 각지에서 T자형 기둥 신전이 잇따라 발견되어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집단으로 드러났다. 신전 주변에서도 곡식을 빻기 위해 필요한 맷돌과 탄화된 곡물 또한 대량으로 발굴되어 구석기 시대라 여기던 시절에 초기 농업 사회가 탄생했음이 밝혀졌다.


4. 유적지의 건설[편집]


파일:external/images.nationalgeographic.com/gobekli-full_35417_600x450.jpg
괴베클리 테페는 언덕 위에 스톤헨지처럼 원 모양으로 세운 돌기둥이 특징인데, 기둥들에는 여러 가지 곤충동물 형상이 양각되어 있다. 돌기둥들은 T자 형상을 하였는데 사람을 나타낸 듯하다. T자형 돌기둥의 몸통 부분(ㅣ부분)에는 손과 인체형상이 조각되었지만 얼굴 부분(ㅡ부분)에는 아무 조각도 없다. T자형 유물은 한국의 솟대에서도 볼 수 있는데, 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새가 앉는 횃대를 형상화한 것이다. 다른 유적에는 사람 얼굴을 새겼으므로, 여기서는 얼굴을 조각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이곳이 일상생활을 위한 장소가 아님이 유력하다. 굳이 중간에 T자형 돌기둥을 세워 몸통 부분에 손 모양을 조각한 점을 보건대 신앙을 위해 신을 형상화했지만 얼굴은 조각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유적지 주변에서는 농사를 짓거나 사람이 거주했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수렵채집에 의존했을 건립집단이 이곳에서 연중 어느 정도는 머무르며 종교적 행사를 치렀으리라 본다. 이는 주변에서 잡아서 이곳으로 가져와 먹고 묻은 야생동물들의 뼈가 대량으로 발견된 점에서 유추하였다.

돌기둥을 세우고자 인근에 위치한 석회암 언덕에서 바위를 떼어내 운반했는데, 기둥 하나의 무게가 10-20톤에 달하기 때문에 운반과 조각, 건설에 적어도 5백 명 이상 대규모 인력이 필요했으리라 보인다. 이 시기는 겨우 원시적인 농업이 시작되려던 신석기 시대 초기로 추정한다. 고고학계의 기존학설에 따르면, 인류가 이러한 거대유적을 조성하려면 체계적으로 토목활동이 가능한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하고, 이를 뒷받침하려면 농경생활에 따른 체계화된 사회조직이 등장해야 한다. 그런데 괴베클리 테페에서 문자[8]바퀴, 토기, 청동기의 사용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 그리고 농업이나 가축 사용을 짐작하게 할 만한 유물도 발견되지 않은 점이 기존 신석기 혁명과 농업발전을 통한 인류의 집단사회 구조형성[9]과 충돌한다.

사실 집단사회 형성이 농경보다 앞설 수 있음은 학계에서는 이미 1990년대부터 논의되어 충분히 받아들여진 내용이므로 그 자체가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것은 아니다.[10] 하지만 이는 학계 수준에서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로 논의 된 것이었지, 이를 뒷받침할 만한 특별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설은 수렵채집 → 농경생활(집단 사회 형성) → 국가/종교의 출현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것이 전세계 역사 교과서에 실리며 보급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농경 이전의 집단사회가 이러한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체계적이고 대규모일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놀랍다.


5. 몰락[편집]


괴베클리 테페는 세워진 뒤 자그마치 약 2천 년간[11] 신전으로 사용된 듯하다. 이곳에 세웠던 기둥들을 고의로 땅에 묻은 뒤 새로운 기둥을 다시 세우는 등 몇 번 변화가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후기로 갈수록 기둥을 제작하는 방식은 단순해지고 조잡해지는 경향이 있었고, 결국 기원전 8천 년쯤 괴베클리 테페는 버려져 땅속에 묻혔다. 특이한 점은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땅을 파 기둥을 메운 뒤, 그 위에 석회 자갈과 석기도구들, 동물과 인간의 뼈를 묻고 버렸다는 사실이다. 보통은 사람들의 왕래가 끊기며 자연스럽게 신전은 묻힐 텐데 말이다.

이 때문에 고의적으로 신전을 매장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종교/정치적인 분쟁이나, 지배계급에 맞선 반란 등에 휘말렸으리라는 시각이 있다. 예를 들면 새로운 종교를 믿는 무리가 신전 일대를 지배하여 괴베클리 테페를 이교도의 건축물로 규정하고 묻어버렸거나, 혹은 그 이전에 누군가가 돌기둥들을 숨기거나 보존하기 위해 묻었다는 것. 후자의 주장은 돌기둥들이 파괴되지 않고 비교적 '온전하게' 묻혔다는 사실로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조사로는 인위적으로 묻힌 게 아니라 자연적으로 묻힌 것으로 보고 있다. 이유는 인위적으로 묻었다면 상대적으로 고르게 묻혔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 괴베클리 테페와 그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신전들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퇴적된 것으로 보인다.


6. 해석[편집]


이처럼 괴베클리 테페는 학계에 큰 혼란을 야기하면서도 동시에 향후 인류 발전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유적으로 주목받는다. 다만 문제는 유적의 극히 일부만이 출토된 상황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연구가 나오려면 발굴기술의 발전 등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아직 겨우 10% 남짓 발굴되었는데, 이희수 교수의 글에 의하면 적어도 60~70년은 걸릴 것이라고.

현재까지 발굴 성과에서 유추된 가설들은 대부분 발굴을 진행한 독일고고학연구소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가 제기하였다. 교수는 돌기둥의 동물 형상들이 수렵의 사냥감이 아니라 신격화된 사자나 거미, 뱀, 전갈 형상이라는 점에 근거하여, 이곳을 사냥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시설이 아니라 죽은 자들을 보호하는 신들을 모시는 장소로 보았다. 또한 새들, 특히 독수리 형상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차탈회위크(Çatal höyük)와 예리코에서 많이 보이는 독수리 이미지와 비슷하여 괴베클리 테페를 비롯한 고대 아나톨리아와 중동권에서도 조장 풍습이 존재했으리라 추측된다.

가 인간과 하늘을 연결하는 매개체라고 보는 풍습은 한국의 솟대에서도 볼 수 있다. 아마도 고대의 조장 풍습을 행했던 사람들은 인간이 죽으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시신을 먹어 그 영혼을 하늘로 인도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실제로 유적지에서는 인골들이 출토되어 이곳이 당시 사람들의 사후 세계관과 연관된 장소라고 추측할 수 있다.

돌기둥들의 T자 형태를 두고 교수는 앞의 가설과 더불어 동물신들이 보호하는 죽은 자들, 즉 당시 사람들의 조상들을 형상화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교수는 이러한 괴베클리 테페의 언덕 위 신들의 이미지가 고대 기억으로 남아 수메르인들에게 이어져 메소포타미아 신화 속 에쿠르 신전 이야기로 전해내려왔다는 가설도 제기했다.

파일:external/taboodada.files.wordpress.com/gc3b6bekli-tepe-5.jpg

괴베클리 테페를 해석하는 데 가장 관건이 되는 것은, 농경사회가 등장하기 전인 토기없는 신석기 시대에 어떻게 조직 노동력과 문화가 등장했느냐는 점이다.

아직까지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농경지나 거주지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인근에 위치한 후대 유적인 네발르 초리(Nevalı Çori)에서 괴베클리 테페와 비슷한 양식의 돌기둥과 조각들이 발견되고 또한 괴베클리 테페와는 달리 집터들과 원시적인 농사 흔적이 밝혀졌다. 네발르 초리(Nevalı Çori)는 1983년부터 1991년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초기 신석기 거주지 유적으로 농업의 흔적과 매장의 흔적도 발견된 곳이다. 약 기원전 8400년에 세워져 8100년에 몰락했다고 추정한다.

두 유적이 위치한 지역은 현대 밀 재배종의 원산지인데, 네발르 초리에서 발견된 밀 농사 흔적은 아마도 인류최초의 밀 재배였던 듯하다. 슈미트는 야생 곡물을 채집하여 식량원으로 삼던 이곳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집단적으로 곡식을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추정했다. 집단사회체계를 농경 정주생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기존 학설과 정반대로 수렵 채집민들에게서도 집단 체계가 나타날 수 있고, 농업 또한 이들이 조직적으로 할 수 있다는 이야기라, 기존의 상식과는 반대된다. 이 때문에 슈미트 교수는 이 유적이 샤머니즘적인 수메르 신화의 조상 격에 해당하는 원시신앙을 믿던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즉, 사냥 및 채집을 하는 수렵생활 → 원시적인 농업활동으로 먹을거리를 충분히 확보 → 사람들이 신을 섬기는 유적을 만드는 여력이 되는 것이 인류 역사의 흐름이라고 생각하였는데,[12] 이 당시 농업을 했다는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에 먼저 종교가 있었고, 종교적 제단을 만들기 위해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 인력을 유지할 수단으로 농업이 발달했다는 충격적인 가설이 나온 것이다.

사실 그동안에도 기존 이론을 두고 문제를 제기한 이들이 있었다. 단순히 놓고 봤을 때 원시적인 농업[13]은 결코 수렵채취보다 식량을 많이 얻기 힘들었고, 영양학적으로도 수렵채취 쪽이 더 나았다는 것이다.[14] 하지만 만약 어떠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다수 모였다면, 일정지역 내에 제한적인 식량만이 생산되는 수렵채취보다 인위적으로 식량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는 농업이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즉 위의 가설이 맞는다면 인류가 농업을 시작한 이유라는 미스테리가 어느 정도 풀린다. 확실한 내용은 발굴이 더 진척돼야 알 수 있겠지만 기존 학설을 뒤엎을 수 있는 괴베클리 테페의 고고학적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15]

즉, 인류가 체질에 맞지도 않는 정착생활을 시작한 것은, 일군 논밭을 지키려는 속지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자기 무리들 간의 정서적 유대를 가능케 해주고, 대자연의 가혹한 생존환경에서 무한한 정신적 안식을 제공해주는 소중한 종교 건축물들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해석으로 이어진다.[16]


6.1. 천문 현상과의 연관성?[편집]


파일:external/thehiddenrecords.com/taurus-lascaux-gobekli-tepi.jpg
마치 황소자리플레이아데스 성단과 비슷하여 천문학적인 요소가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괴베클리 테페가 시리우스의 위치를 기록하는 천문대의 역할을 해왔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현재 시리우스는 북반구 대부분의 위치에서 볼 수 있는 밝은 별이지만, 기원전 1만 년 전에는 1년 내내 지평선 아래에 있는 전몰성, 즉 관측이 불가능한 별이었다.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적위가 증가하여 기원전 9300년 무렵 시리우스는 터키에서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해당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못 보던 밝은 별이 남쪽 지평선 부근에서 나타난 듯이 보였을 것이다. 이 시기는 괴베클리 테페의 건립연도와 맞아떨어진다.

또한 시리우스가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위치는 지구가 세차운동을 함에 따라 수백 년 단위로 변화하는데, 이들이 돌기둥들이 배치된 방향을 연장한 선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만일 정말로 시리우스 출현이 괴베클리 테페를 건립하는 동기가 되었다면, 시리우스 숭배는 고대 이집트보다도 더 과거부터 전해져 내려온 유서 깊은 종교적 믿음이다. 하지만 수렵채집 활동으로 살아가던 원시부족이 문자도 없이 천문 관측기록을 어떻게 후세에 전할 수 있었냐는 의문이 남는다.

'떠돌아다니던 수렵민들이 갑자기 어떤 계기로 모여서 신전을 건축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에 대답하고자 '혜성 소나기'를 거론하기도 한다. 그린란드의 아이스 코어, 지구 궤도 이심률 변화, 북아메리카 지질 역사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기원전 1만 1천 년 무렵에 지구는 황소자리 유성우의 극대기에 돌입했고, 이때 대규모 혜성 충돌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혀졌는데, 이 사건이 괴베클리 테페의 건립 동기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 이 주장은 넷플릭스고대의 아포칼립스 다큐멘터리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다만 이 다큐멘터리의 제작자는 유사역사학으로 악명높은 그레이엄 핸콕이다.

한 발 더 나가자면, 혜성 충돌로 인해 전 지구적인 재앙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에 종교적인 영감을 얻은 한 무리가 이를 기록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한곳에 정착하여 모여 살게 되었고, 자연히 농업을 터득하게 되었다는 것. 앞의 황소자리의 예와 비슷하게 돌기둥에 새겨진 동물들의 형상과 배치는 별자리와 관련이 깊으리란 추측이 많다.


7. 슈미트 교수[편집]


파일:external/www.hurriyetdailynews.com/n_69418_1.jpg
클라우스 슈미트 Klaus Schmidt 1953.12.11-2014.07.20

이 유적의 발굴 시작부터 모든 것을 관리했던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 에를랑겐-뉘른베르크의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는 2014년 7월 20일 수영 중 심장마비로 만 60세 나이에 급사했다. 이후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의 튀르키예인 아내이자 튀르키예 고고학자 치으뎀 쾩살 교수가 유적을 관리한다.

파일:external/media.licdn.com/1a9e2e0.jpg
치으뎀 쾩살 Çiğdem Köksal

치으뎀 교수의 페이스북에 발굴 관련상황과 더불어 남편 클라우스 교수의 일화를 터키어로 설명했다. 꽤나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8. 기타[편집]


  • 1997년에 발견되어 2019년경부터 발굴이 시작된 인근의 카라한 테페(Karahan Tepe)의 경우 괴베클리 테페보다도 더 이전의 유물들로 추정되는 것들이 하나하나씩 발견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 스톤헨지를 세운 사람들이 이 유적에 살던 사람들의 후손일 수도 있다. 기원전 1만 년 전 아나톨리아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흘러흘러 현재의 영국까지 넘어간 것으로 DNA 검사 결과 확인되었다는 것인데, 괴베클리 테페와 직접 관련이 있지야 않지만 아나톨리아 출신이고 비슷한 돌유적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이 모였다.

  • 이 지역이 시리아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시리아 국경 접경 지역이라 발굴에 애로사항이 생길 우려도 있었다. 2014년 8월 이스탄불 대학의 이희수 교수가 이곳을 방문할 때 난민 수용지 근처라 검문을 받았다고 한다.

  • 그래도 튀르키예에서는 세계적인 유적지가 될 전망을 안고 기대하고 있으며 열심히 발굴 및 연구를 지원한다. T자 돌탑들도 2016년 중순에 개장될 우르파 고대 박물관에 보관 중이고, 중무장한 군을 배치하여 학자들을 경호한다. 이희수 교수는 이 돌탑들을 보고 싶어했으나 박물관에 이동하여 개장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조금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해서 박물관에 갔지만, 당연히 개장하려면 한참 남았다고 거절당했다. 그래도 튀르키예 내 인맥을 동원하고 외국인으로서 보고 싶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애원하여 마침내 부관장에게 특별히 개인관람을 허락받았다. 정해진 시간이나마 직접 보았는데 겨우 10% 수준 발굴되었음에도 상당수 유적이 출토되어, 일부만 봤는데도 감명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고도 남을 것 같다는 소감을 적었다. 다만 인근 동네들이 정국이 좋지 않은 터라 문제이다.

  • 만약 당신이 튀르키예를 간다해도 이곳 여행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현재 이 주변은 바로 옆의 시리아 내전 때문에 대한민국 외교부의 출국권고 지역이다. 2019년 무렵에는 시리아 상황이 많이 정리되었는지 유럽에서는 괴베클리 테페의 여행광고가 시내의 광고판 등지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 2020년 기준으로 유적 위에 돔 형 지붕을 설치해놓고, 관광안내소와 각종 편의시설까지 설치해놓은걸로 보아 적극적으로 관광객 유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홍보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영어 안내도 잘 갖추어 놓은 것과는 별개로, 관리 직원들에게는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다. 코로나19로 인해 한 번에 5명밖에 관람을 하지 못한다. 2022년 기준으로는 규제가 완화되어, 티켓만 구매하면 인원 제한 없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파일:괴베클리 테페 터키1.jpg
파일:괴베클리 테페 터키2.jpg
  • 2017년 9월 28일, 튀르키예언론에 따르면 괴베클리 테페와 동시대의 유적이 티그리스강 근처 하산케이프 지역에서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연합뉴스 다음 뉴스 네이버 뉴스 놀랍게도 괴베클리 테페를 세운 수렵, 채집생활을 하던 수준의 사람들이 천 년간 거주하다 떠나간 도시 유적이다. 튀르키예 정부의 아나톨리아 지역 개발계획에 의해 댐 예정지 조사를 진행하다 발견된 곳이라 몇 년 뒤 해당 지역이 수몰될 예정인 것이 문제다.


8.1. 아르메니아의 반발[편집]


아르메니아는 이 지역이 원래 고대 아르메니아 시절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이 살던 영토라고 주장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방주를 만들었다고 기록된 노아의 5대손 하이크(Hayk)를 민족의 시조로 보며, 대홍수 직후 처음 땅을 밟은 노아가 야훼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알려진 아라라트 산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고, 고대 아르메니아 시절에는 그 유명한 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일 정도로 깊은 역사를 가졌다. 그러다 1915년부터 1918년에 걸친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후 튀르키예에 여러 영토를 빼앗긴 채 아라라트 산 바깥쪽 작은 땅으로 내몰렸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들의 긍지가 담긴 이 유적지를 원래부터 자신들의 역사인 것마냥 광고하는 튀르키예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있다. 반면 지금의 튀르키예인들의 정체성은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으로, 중세에 동양에서 이주해 온 자들의 후손이다. 민족적 자부심이 담긴 주장을 다 논외로 하더라도, 이 지역 원주민이 아르메니아인이라는 건 성경에도 나올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고, 터키인들은 이주민이라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들은 튀르키예 이름인 괴베클리 테페 대신 예전 아르메니아 이름인 '포르타사르(Portasar)'로 불러주길 희망한다. 그래서 포르타사르라는 알파벳으로 구글 검색하면 뜨는 사이트들도 죄다 아르메니아 관련 사이트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국제적으로는 딱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이며, 영어나 프랑스어 등 위키피디아를 봐도 괴베클리 테페를 아르메니아어 명칭으로 설명하진 않는다. 다만 본문에 '아르메니아에서는 포르타사르라고 불린다.' 정도로만 언급할 뿐이다. 단순히 정치적인 논리 때문만이 아니라, 이 유적을 만든 이들이 아르메니아인이라는 증거 또한 없기 때문이다.

괴베클리 테페가 발굴된 지역은 전통적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자 문명권이었던 지역인데, 이 지역은 역사가 너무나 오래되고 문명 간 교류도 많이 오고 갔던지라 진짜 토착민족이 누구인가를 전 세계에서 가장 찾기 힘든 곳이다. 현재 괴베클리 테페 유적의 정착 시기는 1만 2천 년 전 쯤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아르메니아인이 이 지역에 이주해 온 시기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기원전 4천 년 전 즈음으로 추정되고 다수 민족이 된 것은 이슬람 발흥 이후인 7세기 즈음부터다.[17] 그리고 설령 아르메니아인들이 그 이전부터 여기 살았다 하더라도, 1만 년 전 선조들이면 민족이 아닌 생물학적 분류로 넘어갈 정도의 시간이다. 이 정도 시간이면 혈통이 전부 뒤섞였거나 이 지역 근방 토착민족 모두의 공통조상이라고 보는 편이 맞지, 현재의 민족분류를 대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괴베클리 테페를 지은 사람들이 튀르키예인들의 조상이 아님은 확실하지만, 아르메니아의 주장처럼 꼭 아르메니아의 조상들이 지은 것도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 결국 괴베클리 테페는 튀르키예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2018년부터 관광객들도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9.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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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이후 독일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 에를랑겐-뉘른베르크로 이직했다가 2014년 작고했다.[5] Dietrich, Oliver & Schmidt, Klaus. (2010). A Radiocarbon Date from the Wall Plaster of Enclosure D of Göbekli Tepe.. Neo-Lithics. 2/2010. 82-83.[6] 어디까지나 이 정도 대규모 유적으로 한정했을 경우다. 소규모 유적이나 사람의 손길이 덜 들어간 유적들 중에는 그보다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의 테오페트라 동굴(Theopetra Cave) 같은 것들이 있다.[7] 만약 사실이라면 기존의 가설과는 달리 수렵채집인들도 대규모 시설을 만들 만한 사회적 역량이 있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8] 유적의 기둥에서 문자로 추정되는 기호는 발견되었다.[9] 수렵생활 → 농경&정착생활 → 국가 및 종교의 출현이 일반 상식[10] 괴베클리 테페가 발굴되기 전인 1997년에 나온 총, 균, 쇠에 관련 언급이 나온다. 하단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농학도 없고 체계도 제대로 잡혀있지 않았던 시대에 원시 농업을 하는 것이 수렵채집을 하는 것보다 실패 가능성도 높고 오히려 투자 시간 대비 비효율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11] 2천 년이란 시간이 실감이 안 오는 사람을 위해 말하자면, 고구려가 건국될 때 세워진 사찰을 지금까지 그 건물 그대로 사용한다고 보면 된다.[12] 먹을 것이 충분히 확보 된 후에나 죽은 뒤의 삶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생기고, 문화와 함께 종교가 탄생했다고 보았다. 오늘 짐승한테 잡아 먹힐 지 내일 굶어 죽을 지 모르던 수렵채집 시대에는 이정도 수준의 대규모 종교 제단이 탄생할 수 없다고 본 것. 실제로 현대에도 전쟁이 난다든지 기근이 닥치면 예체능을 비롯한 문화예술산업이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하게 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도 이러한 정설을 바탕으로, 구석기(수렵채집) → 신석기(농경) → 청동기(청동거울 등을 이용한 제사, 샤머니즘의 출현)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13] 원시적인 농업에서는 현대 농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량된 품종, 화학 비료, 체계적인 생물학·농학 이론, 전문적인 농기구, 가뭄과 홍수 대비 시설, 그 외에 여러 농사 노하우 따위가 당연히 없었다. 따라서 농작물의 수확량이 현대보다 매우 적은것은 둘째치고 농사가 망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거기에 우리나라에서도 근현대 시기까지 보릿고개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작물은 수확하기에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는 문제점도 있다.[14] 일반적으로 수렵채취를 하는 쪽이 영양학적으로 낫다. 그 쪽이 탄수화물을 훨씬 적게 먹으면서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영양학적으로 균형된 섭취를 하게 되고 비타민 부족도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원시적인 농업으로만 먹고살려고 할 경우, 적은 품종만을 많이 먹게 되면서 탄수화물만 많이 먹게 되고 비타민 등 무기질 부족 현상을 겪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2020년대인 현대에는 생물학과 식품학의 발전으로 비타민 알약 등을 먹거나 영양소의 균형적인 섭취를 행하는 등, 원시적인 농업에서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상태이다.[15] 농경은 모종의 이유(종교)로 무리를 이룬 수렵집단이 좁은 지역에서 집단의 유지를 위해 불가피하게 시작하게 되었다는 새로운 가설.[16] 고대 그리스 아테네 시민들이 자신들의 집과 세간보다 신전을 호화롭게 꾸미는데 더 많은 노동력과 비용을 지불했다는 정서적 메커니즘의 조상격으로 보인다.[17] 이 지역이 동로마와 이슬람의 분쟁지대가 된 이후 기존 원주민인 셈계열 아람-아시리아인들이 떠나기 시작했고, 이슬람의 위협을 피해 동로마 쪽으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이 그 공백을 채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