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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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도입 배경
3. 고등학교 교련
3.1. 교과 내용
3.2. 교련복 및 장구
3.3. 교육용 소총
3.3.1. 실총
3.3.2. 목총
3.4. 교련교사
3.5. 수업 분위기
4. 비판
4.1. 병영국가화와 정권안보교육
4.2. 교련교사의 자질
4.3. 필요 이상의 가혹함
4.4. 교과 내용과 수업의 부적절성
4.5. 군사적 가치 전무
5. 대학 교련
5.1. 문무대 훈련
5.2. 전방입소훈련
5.3. 복무단축 혜택
5.4. 전방입소 거부투쟁
6. 폐지
7. 외국의 교련


1. 개요[편집]


교련 수업을 받는 모습[1]
교련(敎鍊)은 일본 제국에서 시작되어 한때 한국에서도 도입했던 교과이다.

대한민국에는 1.21 사태 이후 도입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 징발 및 훈련이 교련 과목의 모체에 해당되며 전후에도 유사시에 고등학생들을 병력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학 교육 과목이다. 때문에 교련 교사는 다른 과목과는 달리 전직 위관급 및 영관급 장교였다.

1994년부터 군사훈련이 공식적으로 전면 폐지되고 응급처치와 안보 및 인성교육 등으로 바뀌었다. 2002년부터 시행된 7차 교육과정부터는 필수과목에서 선택과목으로 변경됨에 따라 교련을 가르치는 학교는 점점 줄어 2006년에는 전국 고등학교의 4.2%[2]에 불과하였다. 2011년부터 교련 과목이 '안전과 건강'으로 변경되면서 완전히 폐지되었고, '안전과 건강' 과목도 극소수 고등학교에서만 시행되었다. 2014년부터 시행된 새 교육과정에는 '안전과 건강' 과목도 폐지되고 교과 이외의 활동인 창의적 체험활동에 '안전한 생활'로 포함되어 있다.


2. 도입 배경[편집]


교련교육을 비롯한 학원 병영화의 시초는 1949년 자유당 정권이 학원통제와 학생 동원을 위해 만든 학도호국단이었다. 그리고 1960년, 4.19 혁명으로 인해 폐지되었는데, 당시 고등학생들이 4.19 혁명의 주축인 걸 생각하면 교련 폐지는 당연한 수순인 셈이었다. 단, 학도호국단은 10월 유신 이후 부활하였다가 1986년에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러던 것이, 1968년 수도 서울특별시에 대규모 무장공비가 출현해 군경과 대대적 교전을 벌인 전무후무한 사건, 즉 1.21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당장 전면전이 터져도 이상할 것 없는 극도로 긴장된 정세[3] 속에, 현역병들은 군생활이 자동으로 최대 6개월 연장[4]되었고...[5]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에게도 군사교육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1969년부터 고교 필수 과목[6]으로 부활한다. 그리고 1975년에는 학생회가 없어지고 학도호국단이 부활하였다.

3. 고등학교 교련[편집]



3.1. 교과 내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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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교련 실습 장면

과거 고등학교에서 1주일에 2시간의 시간이 배정되어 있었으며, 국방부에서 제작한 국정교과서로 수업을 진행했다.

  • 남자고등학교
    • 국방과 우리의 책임 - 전쟁론, 반공교육, 국방론, 대남남침사
    • 제식 훈련 및 의식 - 도수 각개 훈련, 집총 각개 훈련, 부대 훈련, 의식과 사열
    • 군대예절 - 경례법, 국가·국기·상급자에 대한 경례
    • 총검술 - 기본동작, 연무형 17개 동작, 대련
    • 독도(讀圖)법 - 지도 읽는 법
    • 화생방 - 화생방전 개요 및 방독면 착용법[7]
    • 화기학 - M1 분해결합, M16소총 분해결합, 사격술 예비 훈련
    • 전술학 - 각개전투, 경계, 수류탄, 기본전술
    • 야전 위생 및 구급법
    • 생존 - 취수, 취식, 불 피우기 등. 생존주의 관련 교양서에 나오는 내용이 많다. 교련이 폐지되기 직전의 시점에서는 이것과 구급법만 남고 전부 없어졌다.

  • 여자고등학교
    • 국방과 우리의 책임 - 남자고등학교와 같다.
    • 독도(讀圖)법
    • 구급법 - 지혈, 붕대 감기 등의 간호술

이상이 주 내용이다. 그리고 세대에 따라서 제식훈련(여자용 교과서에서는 질서훈련이란 단어를 사용)도 했다. 집총은 아닌 맨손에 한해 실시했다. 남자고등학교와의 차이점은 총검술이 없고 그 대신 구급법이 좀 더 전문화되어 있다는 정도밖에 없다.

대체로 실습과 이론으로 되어 있었는데, 남자고등학교의 경우에는, 예비역 중위에서 소령 출신[8] 중 해당 과목 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한 이들이 교사로 배정되었다. 교과서에는 이런 실습 내용의 설명과 함께 M-1 소총 사격 및 분해법이나 화생방전의 대처방법, 그리고 주요 전사(戰史)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심지어는 포로가 되었을 때 굴복하지 않고 버티는 방법까지 실려 있었을 정도였다. 여름에 뙤약볕 아래에서 목총들고 학교 운동장을 박박 기다보면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향하게 되었다.

반면에 여자고등학교의 교련수업은 여고생의 체력에 맞게 주로 비전투 보조원으로서의 역할을 가르쳤다. 응급처치법이나 부상자 이송 같은 것을 배우고 시험을 쳤는데, 손재주가 없는 사람들은 붕대 감는 여러가지 매듭법을 익히는게 고역이었다고 한다. 응급 처치 키트도 준비물로 구매해야 했다.


3.2. 교련복 및 장구[편집]


야외 실습 시간에는 반드시 준 군복교련복이 필수였다. 가끔 1960~80년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를 보면 남자 배우들이 흰 바탕에 검은 얼룩무늬가 있는 상하의를 입은 게 보일 것이다. 또한, 개그 콘서트의 옛 코너 청년백서에서도 출연자들이 흑백 얼룩무늬 제복 같은 것을 입기도 했는데, 이게 교련복이다. 또한 교내에 있을 때도 교복 대신 교련복을 입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선생들이 교내에서 체육시간 외에 체육복 입는 건 아니꼽게 보면서도 교련복은 그냥 교복처럼 입어도 뭐라하지 않았다. 모르고 보면 교복 같다 교복이 불편하다고 아예 거의 교련복만 입고 다니는 학생도 있었다. 당시 교복은 대부분 차이나 칼라에 훅을 걸어 목을 조이는, 구 일본 해군 하사관근무복을 닮은 가쿠란이었으니, 현대식 전투복을 본뜬 모양새에 구김도 적고 품도 넉넉한 교련복이 월등 편한 것은 당연하다. 물론 조회, 졸업식, 입학식, 소풍 같은 때에는 당연히 무조건 교복이 필수였지만. 1983년부터 198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대부분의 학교에서 교복이 잠깐 폐지되어서 다들 알아서 사복을 입고 다니라고 했을 때에도 교련수업은 여전히 현역이라서 이때에도 교련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은 종종 볼수있었다.

  • 대중적으로 흔히들 알려 진 무늬는 이러한 소위 얼룩말 무늬지만, 위의 여학생 실습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 멀쩡하게 생긴, 패턴에 색상이 들어가서 현용 군복으로 써도 될 만한 위장 무늬를 가진 교련복도 있었다. 그런데 여학생은 각개 전투 등 구르는 과목은 없어서 교련복을 잘 입지 않았다. 아예 없는 학교도 많았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교련복을 입는 여학교는 없었다. 대신 삼각건 등이 든 구급낭은 다 사야 했다. 눈으로 보기엔 같은 얼룩말 무늬라고 해도 학교나 교복 메이커에 따라서 패턴이 정말 무궁무진하게 많다. 새마을운동 표식이나, 책 혹은 낙하산이 그려진 검은 점 무늬와 "선진조국창조"[9]라는 한글 등등. 이상하게 이웃한 학교끼리는 패턴이 같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구분하기 위해서인 듯. 바탕색은 완전 백색, 탁한 백색, 연한 회색 등 여러 가지였고, 패턴은 물론 옷감 소재나 질감도 학교마다 조금씩 달랐다. 학교마다 다른 무늬 때문에, 타 학교 전학생들은 교련복을 새로 구입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전학이나 물려 받은 옷이라 패턴이 다른 경우, 각종 패치와 배지만 바꾸면 봐 주는 학교도 꽤 있었다.

  • 학년별로 옷깃 부분에 길쭉한 백색 네모 모양의 계급장 표지(2차대전-한국전쟁시의 미군 및/한국 육군 위관급 계급장과 비슷했다)을 달며, 총학생회장, 및 각 학급 반장, 부반장 등은 편제[10]에 따라 보직이 있었으며, 이를 명찰 부분에 오바로크로 박는 경우도 있었다. 부대마크처럼 학교 교표를 어깨 또는 왼편 가슴 주머니 위에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오른편 가슴에는 보통 백색 바탕에 검정색으로 이름을 쓴 이름표를 오바로크 쳐서 박았는데, 아크릴 명찰로 달거나 아예 안 다는 학교도 있었다.

  • 부속 장구로 요대(벨트), 각반, 교련모, 앞 가리개 등이 있었다. 각반의 경우에는 일제강점기처럼 붕대 각반을 쓴 것이 아니라, 학교 앞 문구점이나 동네 가게에서 미군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착용했던 것과 비슷한, 군화끈으로 묶어주거나 쇠 클립으로 고정하고 끈 매는 천으로 된 각반을 팔았는데, 전투화 맨 위 부분에 붙이는 것과 같은 쇠 클립에 끈을 걸어 조이는 방식일 경우, 각반 끈을 검정색 고무줄로 바꾸면 몇 초만에 각반을 찰 수 있었다. 각반 모자 벨트 앞가리개 세트 중 하나라도 빠지면 엉덩이에서 불이 났기에, 교련 수업 시간이 다른 반끼리 서로 자주 빌려주곤 했다. 앞가리개는 전투복에 달려있는 군대 전투복과 달리 별도의 부품으로 스카프 매듯 따로 차야 했다. 하절기에는 교련 검열 등 행사 때 아니면 잘 쓰지 않았으며, 보기보다 불편하여 교련 수업 때만 차고 평소에는 안 매고 다녔다. 그리고 간혹가다 각반 대신에 전투화를 신고 오면 봐주는 학교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형이나 삼촌의 예비군 워커를 빌려 신고 등교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학도호국단 학생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은 거의 예외 없이 군악대에서 따온 흰 끈을 끼운 군용 전투화를 신었다. 그게 더 키 커 보이고 멋이 있었으니까. 일반 학생은 각반을 찼지만 군화를 신는 간부 학생 경우에는 고무링을 썼고, 대대장 이상쯤 되면 심지어 헌병/군악/의장대가 쓰는 금속 링을 차는 경우까지 있었다. 교련모의 경우에는 학교에 따라 달랐던 모양인데, 따로 별도의 교련 전용 모자를 착용하지 않고 그냥 검은 교모를 그대로 쓰는 경우도 있었고, 혹은 더 진지하게(?) 학교 상징이 새겨진 교련용 베레모 혹은 교련복 위장무늬 전투모(...)[11]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교련 위장무늬 전투모 타입의 교련모, #2, 교련 위장무늬 전투모 타입의 교련모를 쓰고 교련 수업을 받는 고등학생들)

  • 교련 수업 당시 깨어 있는 일부 교련교사들로부터 학생들에게 대학 들어가서 데모하러 다니는 것을 굳이 막지는 않겠다고 하면서도 제발 교련복은 입고 나가지 말라는 훈시를 들었다는 회상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유인즉, 시위진압을 위해 투입되는 전투경찰에게 교련복 착용자는 극렬분자(?)라는 선입견이 있어 체포대상 1순위라는 것이다. 거기에 화염병까지 소지하고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화염병 잘 던질 것 같은 포스...

  • 1994년도에 교련복은 폐지되었지만 기존에 입던 학생들은 그냥 입게 하는 바람에 정확히는 1993년 입학생까지 교련복을 입었고, 1994년 입학생부터는 베레모만 착용하고 복장은 체육복으로 대체하는 식으로 간소화되었다.[12] 2042년경 교련복 착용 세대가 모두 노인으로 편입된다.

  • 군사훈련식 교련이 폐지된 시기가 1990년대였던 만큼 당시 학교들 중에서 상당수가 조개탄, 왕겨탄 따위를 땔감으로 난로를 사용하던 시기였는데 마지막 교련수업[13]이 끝난 후 쓸모가 없어진 나무를 소재로 만든 교구들을 땔감삼아 난로에 넣어 소각시킨 경우도 있었다. 이유인 즉 교련창고를 비우고 왕겨탄 등도 절약하기 위해서였는데 아래에 소개될 부러진 목총[14]과 총검술 과녁으로 쓰던 북한군 목형으로 화형식을 치르기도... 북한의 도발로 수틀리는 시기마다 김일성, 김정일 사진으로 화형식 하는 걸 보고 자란 세대다.


3.3. 교육용 소총[편집]



3.3.1. 실총[편집]


총기 분해 실습을 위해서는 공이가 제거된 M1 개런드 실총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학교마다 무기고가 있었다. 보유 무기는 학교별로 몇 정 되지 않았고 공이도 제거했으며 탄약도 없지만 하여간 실총이긴 하니까 해당 지역 예비군 부대에서 관리했다.

교육 내용은 별 거 없다. 교련 교사가 일반 분해 했다가 조립하는 거 보여주고, 학생 중 한두 명이 해 보고 끝. 그것도 귀찮으면 방아쇠 뭉치 빠지는 데까지만 하고 끝내기도 했다. 다만 M1 개런드의 특징인 탄창 삽입시 노리쇠 덮개에 손이 씹히기 쉽다는 것을 반드시 보여 줬다.

총검술에는 사용하지 않고, M-1 소총 분해 결합에만 사용하였다. 교련 교육 시기에도 30년이 넘어가 이미 골동품 수준이던 2차 대전 때 쓰던 물건이지만, 나름 비중 있게 다룬 무기이다.


3.3.2. 목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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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 목총
M16 목총(합성수지제)

1970년대의 경우, 나무로 만든 M1소총, 즉 진짜 목총(木銃)이 사용되었던 적도 있다.

1980년대에는 그 재료가 변하여 고무플라스틱으로 만든 M1 개런드M16 소총 모형이 사용되었다. 실제로 시커먼 플라스틱 덩어리에 무게를 맞추고 강성을 확보하기 위한 철근이 총열부터 개머리판까지 박혀 있었다. 그래서 실총보다 더 무겁게 느껴질 만큼 무거운 것도 있었다. 개런드 목총은 고무에 가까운 재질이라, 안 그래도 무거운 원형만큼 무거워서 총검술 할 때 힘이 많이 들었다.[15] 80년대 후반에 나온 모형 M16은 장전과 모의 사격 연습도 가능한 신 모델이었다고 한다.

고무 목총, 플라스틱 목총[16]이 섞여서 존재했는데, 이 중에 플라스틱 총이 훨씬 편하고 가볍기 때문에, 양 쪽 모델이 섞여 있는 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 더 가벼운 모형총을 쟁탈하려는 선착순, 제비뽑기, 가위바위보, 주먹다짐 등 각종 병림픽이 벌어졌다. 특히 본 수업의 내용이 총검술일 때. 심한 경우는 아예 쉬는 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남학생들이 교련복을 옷 속에 입고 다른 과목 수업을 받다가, 쉬는 시간 종이 치기가 무섭게 화장실조차 포기하고 우르르 달려나가 가벼운 플라스틱 목총부터 확보한 후에(...) 운동장에서 주섬주섬 옷을 챙기거나 다시 죽어라 달려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무리들도 있었다. 다만 내구성은 플라스틱 총이 약했다.

어떤 학생은 아예 아카데미과학제 1:1 스케일 M16 프라모델을 사다가 조립해서 그걸 자신의 전용 목총으로 삼고 들고 다니기도 했다.[17] 다만 그 아카데미제 M16소총은 1980년대 기준으로 18,000원이라는 전혀 만만치 않은 가격이라서[18] 아무나 들고 다니지는 못했다. 비록 이 물건이 프라모델이긴 하지만, 다른 프라모델과는 달리 교련수업에 전투화를 신고 가면 각반을 찬 것으로 인정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서 교련 시간에 목총으로 사용한다고 갖고 다닌다고 말하면 일부 학교에 이걸 들고 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모든 학교가 그랬던 것은 아니고, 대부분의 학교가 교련용 목총의 상태가 좋지 못해서, 일부 학생은 수업 때 망가지거나 부러진 걸 들고 해야 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제식 교련수업을 거의 마지막으로 받은 1970년대 중후반 출생한 세대는 목총의 교체가 교육예산이 잘릴 수밖에 없는 무의미한 시기였기에 아예 학교차원에서 프라모델 소총의 공동구매를 추진한 경우도 있었다. 이걸 하면서 프라모델 조립 연습도 할 수 있고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

아울러 시골 학교의 경우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도 목총을 학교 창고 등지에서 볼 수 있는 학교도 있었다.

교육용으로 사용했다고 보기는 애매하나 학도호국단 간부들의 경우 주물로 된 M1911를 패용하기도 하였다.

3.4. 교련교사[편집]


한 마디로 학교의 똥군기 반장 -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근엄한 표정으로 등교시간에 학교 정문을 지키고 있는 무리. 이 때문에 학생주임 담당교사와 함께 학교마다 학생들끼리 부르는 별명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19]

남고의 교련교사들 중에는 사범대학 출신이 아닌 대한민국 육군해병대 예비역 장교 출신[20][21]들이 많았다. 정규 대학 졸업장을 가진 ROTC 출신이라든가, 아니면 그 외의 여러 방법으로 정규 대학을 나온 장교로서 교련과 일반 과목을 겸임하던 교련교사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당시에 장교들 중에 3사 출신 장교들은 정식 교사 자격증이 있는 대학졸업자가 아니었다. 당시 육군3사관학교는 현재처럼 전문학사 학위 취득자 및 4년제 대학 2학년 수료자를 편입학시켜 3, 4학년 과정을 교육하는 정식 대학이 아니라, 고졸자를 모집해 1년 6개월 간 훈련시켜 내보내는 과정이었다. 그러다가 1983년부터는 전문학사 취득자 및 4년제 2년 수료자를 40주간 훈련시키는 비학위 과정으로 바뀌었으며 현재의 학제로 바뀐 것은 교련 쇠퇴기이던 1996년이었다. 즉, 3사 출신 장교들은 갑종장교 등과 같이 최종 학력이 고졸, 나중에 과정이 개편돼서 대졸이었다. 인터넷 상에 학창 시절의 추억을 떠 올리는 글 중에, 개념 교련교사의 글이 간간히 보이긴 한다. 계속 공부를 해서 정식 대학을 졸업하고, 아이들을 의리로 보살핀 교련교사가 가뭄에 콩 나듯 있었던 모양.[22]

여고남녀공학 여자반을 담당한 교련교사의 경우 거의 100%의 확률로 국군간호사관학교 출신에 교직과정을 이수한 경우였으며 보건(당시 명칭은 양호)을 겸임하였다.

남녀공학일 경우[23]에는 남교사와 여교사를 모두 배치했으며 남교사는 남자 반만, 여교사는 여자 반만 담당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경우에 따라 혼성수업[24]이 진행되기도 했다. 이것은 어찌보면 남녀공학의 장점이라 할 수 있었는데 간호장교 출신의 여교사가 남학생들에게 아트로핀 투약방법 같은 화생방 대응요령에 대해 보다 전문적인 지도를 하거나 야전장교 출신의 남교사가 여학생들에게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대피요령(엄폐, 은폐, 대피소 내부 환경유지 방법 등)을 가르치는 등 나름 수업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예비역 장교이기만 하면 교련을 가르칠 수 있었으므로 교사 TO가 적은 지방 고등학교나 인사권이 재단에 있는 사립학교에서는 일반 교과 교사 중 ROTC학사사관 경력이 있는 교사에게 교련교사를 겸임하게 하기도 했다. 모두는 아니었지만 교련을 겸임하는 그 일반 교과 교사들이란 대부분 체육이었다.

교련교사들이 워낙 억세고 싸움을 잘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항의하는 다른 교사나 학부모들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른 사례들도 무수히 많다. 그러나 잘린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타 학교 전근이라는 경징계에 그쳤으므로 이런 면에선 굉장히 꿀보직이었다. 다른 정식 교사들, 심지어 당시 교사들 사이에서도 힘만 세고 무식한 것들이라며 무시당하던 체육교사[25]조차 무자격으로 교단에 서던 교련교사를 무시했다. 교련 과목이 존재하던 시절의 기사만 살펴봐도, 교사체벌로 인해 일으킨 사고사례 중 다른 과목에 비교해서 교련과목 교사들이 전반적으로 많은 편이다. 비하의 의미는 아니나, 진급에서 탈락한 초급장교(잘해야 소령 전역) 출신이다보니 행실이 좋을래야 좋을 수 없었기 때문. 실습 시간에는 예비군 전투복을 입었으며 취향(?)에 따라 이론 수업이나 사무실 등에는 일반 정장과 예비군복 차림이 갈렸다. 드물게 정복이나 근무복을 입고 오는 이들도 있었다.

교련교사들의 폭력성에, 참다못한 학생 몇 명이 한 밤중에 얼굴 가리고 교련교사 집 앞에 매복하고 있다가, 잠깐 바람쐬러 나온 교련교사를 집단폭행하고 도망친 사례도 종종 있었다. 졸업식날엔 학주 등과 함께 졸업생들의 차량 테러를 걱정해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교련교사들도 돈과 권세 있는 집안 자녀는 잘 대해주었다. 이 당시에는 학교예산 부족으로 학교 기자재 상당수를 학부모 후원회의 후원으로 마련했던 경우가 많아 잘못 건들면 후폭풍을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교련 교사들도 이들한테는 극진대우. 1978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면 장군의 아들은 박성춘이 있다.[26] 소지품 검사 때 순한 처럼 아버님은 잘 계시지 하면서 굽신굽신 거리고 박성춘이 찍새랑 도박해서 돈을 잃었는데 이때도 당연히 박성춘의 편. 간혹 교련교사가 특정인만 티나게 편애하기 부담스러워 하거나, 빽있는 학생이 자기 절친이나 급우, 아예 학년 전체를 커버쳐줘 교련 교사의 폭압질이 전반적으로 완화 혹은 없다시피하게 되어 친구 덕에 교련 편하게 받는 일도 드물게 있었다.

물론 위 서술에서 교련교사가 문제투성이였다고는 하지만, 어떤 부류의 학생들에게는 결정적인 때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바로 육, 해, 공, 간호 등 사관학교의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에게는 별도의 입학전형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교련교사와의 입시상담이 절대적인 도움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체력검정의 당락 기준과 별도의 본고사에서 신경쓸 과목, 진학 이후의 학교생활과 임관 후 진로 등에서는 3사 출신 교련교사의 그 경험과 짬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간호사관학교의 경우는 더욱 그러한 면이 두드러진게 양호/교련을 겸임하는 여교사의 절대 다수가 간사 출신이고 더욱이 퇴역 후 자신이 졸업한 고등학교에 부임해서 근무하는게 심적 안정성을 주는 상황에서 간사 입시를 준비하는 후배학생들이 아무래도 마음이 더 가는게 현실이기 때문이었다.


3.5. 수업 분위기[편집]


노태우 정부의 군정 종식 노력으로 분위기가 풀리면서 교련이 실용 교육으로 바뀔 때에는 그래도 재미를 느끼던 학생들이 없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지만, 한창 빡세게 훈련 시키던 1970년대에는 교련 좋아하는 학생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앞서 서술했다시피, 교련교사들의 자질 문제로 말미암아, 야외 실습 수업 시간에 그 정도가 극에 달했다. 공포분위기 속에서 완전 군대식으로 정렬해, 교사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곳이 태반이었고, 참조 조금만 줄이 틀어지거나 늦으면 무자비한 구타단체기합이 떨어지는 경우들도 많았다. 제식훈련, 포복, 총검술, 사격술 예비훈련 등의 동작이 틀리면 욕설은 애교이며, 반복해서 실수하는 학생들에겐 얼차려는 물론 무자비한 체벌구타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실외에서 하던 교련수업이 있던 시절의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상당수가 치를 떤다. 하루에 교련과 체육 두 과목이 동시에 들어있는 날은 피곤해서 수업을 못 들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따금 수업시간을 조정해서 아예 두 시간 연속 교련 또는 체육으로 가기도 했다. 정말 오뉴월 땡볕에 육군 도수체조와 PT를 두 시간 동안 하는 것도 모자라 그 다음 주에 바로 실기 시험 보기도 했으니. 특히 무더운 여름날 5~6교시에 체육+교련 이렇게 수업을 받는다면 그것이 극에 달한다.

1980년대 들어서 원산폭격이나 엎드려뻗쳐 등 고통 주기를 목적으로 하는 심한 가혹행위와 구타는 많이 사라졌지만, 몸을 고달프게 하는 훈련은 그대로였다. 선착순, 무릎걷기, 쪼그려 뛰기 등은 일상이었다.

여기에 더 병맛인 건 대부분의 학교에서 고3이라도 교련만큼은 열외가 없었다. 고3을 위해 교양과목 시간을 자율학습으로 대체시켜도 교련만큼은 시켰다. 여차하면 우리도 근처 부대에서 실총 받아 싸워야 한다는 취지로 교련시간을 우직하게 준수하게 했는데, 실제로 이루어지면 이거 그냥 소년병이다. 다만, 교육열이 슬슬 오르던 1980년대 중반부터는 어지간한 고등학교들은 고3이 되면 교련, 체육은 교실에서 자습하거나 놀라고 축구공과 농구공 주고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음악, 미술은 당연히 자습. 해당 지역 예비군 부대에서 엄하게 관리하던 것이 1980년대부터는 많이 이완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1세기 관점에서 보면 미개와 야만 그 자체. 성인도 아닌 미성년 남학생들에게 군대식 문화와 심한 폭력을 가하는 걸(물론 성인에게도 하면 안된다) 보다 못한 학부모들의 반발이 있을 경우, 한 술 더 떠서 군대 가면 이보다 더 심하게 다루는데 이것도 못 참으면 어떻게 한국에서 살아가냐고 오히려 불러놓고 훈계까지 한 경우도 많다. 그리고 그런 소리가 먹히던 시절이다. 결국 이러한 정신력 드립이 곪아서 터진 것이 태안 사설 해병대 캠프 참사이다.

선천적으로 몸이 불편하거나, 보충역 또는 면제를 받아 군대에 안 갈 학생들에게도 항상 휠체어를 타고 등교하거나 한 팔이 없다든지 할 정도가 아니면 예외 없이 이런 짓거리를 했었다(...). 몸이 아파도 교련복 다 갖춰 입고 운동장까지는 나와서 다른 애들 훈련받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27] 정말 경악을 금치 못할 사실은 현역병이 받는 모든 훈련 중 실총사격 이외의 모든 훈련을 받는 고등학교까지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아니, 기본적으로 커리큘럼에 실제 현역병이 받는 기초군사훈련 대부분이 들어있었다. 그래서 좀 심하게 굴리는 학교는 뙤약볕 밑에서 교련복 입은 학생들에게 낮은 포복을 시키기도 했고, 동네 뒷산(또는 지역 예비군 훈련장, 교내 간이 예비군 훈련장)에서 각개전투를 시키기도 했다. 실총 무게의 모의 M1이나 M16 고무총으로 집총 16개 동작은 기본이고 총검술도 한 번은 했다. 수류탄 투척도 했고 국군도수체조도 필수. 교련 교과서 자체가 육군의 야전교범(FM)을 모아 만든 것이다. 국정 교과서 시대에는 당연하고, 검인정 교과서를 쓸 때에도 교련만은 모든 학교가 같은 교과서를 썼다. 웃기는 건 교과서의 그림은 교련복이 아니라 가쿠란을 입고 각반과 요대(이름은 요대인데 실은 탄띠다. 교련복에는 육군용 허리띠 비슷한 검은 포제 띠에 금속 버클이 달린 허리띠를 찼는데, 학군단 간부들만은 육군용을 색깔만 바꾼 형상의 탄띠를 그 위에 찼다.)를 찬 왜정시대부터 육이오 전쟁까지의 학도병 같은 모습이었다는 거.

웃지 못할 사실은 이렇게 학교에서 무진장 구르다 보니 정작 군대 가서 훈련소 입소 후에는 몸이 기억하고 있어서 그나마 적응은 편했다는 것. 진짜 거짓말 한 마디도 보탬 없이, 구 일본군이나 현재 북한 인민군들이 이런 식으로 귀중한 인적 자원을 낭비한다.

교과 과정상 학생들도 군인들처럼 일종의 검열을 받는다. 그것도 분열 검열을 하는 일이 있었다. 이사장이 장교 출신인 경우에는 이러한 행사를 매우 좋아하기까지 했다! 1970~80년대에는 사열대에 교장과 교련 교사가 서 있으면, 학생들이 학급마다 줄을 지어 행진하고 우로 봣!하는 구령에 맞춰 교장과 교련 교사는 이를 보며 경례를 하고 지나가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더 심하면 군용 지프차를 동원하기도 했다. 참조[28] 1980년대까지의 교련 검열이 어느 정도 수준이냐 하면, 군 입대해서 훈련소 퇴소 열병식 연습을 하는데 '교련 검열 연습 할 때보다 쉽다'라고 느꼈을 정도.

그 때문인지 교련 수업을 받지 않은 세대가 본격적으로 군에 입대하기 시작한 2000년대에 접어들어서부터는 기본 제식을 안 배운 이 신병들을 하나하나 세세히 가르치느라 각군 훈련소의 교관, 조교들의 근무 난도가 높아지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정상이다.


4. 비판[편집]


학생을 가지고 군인으로 만드는 전근대적 행위를 현대에 20년 넘게 시행했다. 원천적으로는 6.25 전쟁의 아픔이 남긴 잔재이기도 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군사 독재를 용이하게 하는데 이용되었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그 군인 만드는 짓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교련 과목이다.


4.1. 병영국가화와 정권안보교육[편집]


배움을 목적으로 하는 고등학교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한다는 발상 자체가 전 국가를 군대식으로 통제하는 병영국가를 목표로 한 것으로, 매우 전체주의적이며 군국주의적인 것이었다. 바로 일본 제국주의막장으로 치달을 때 한 짓. 고등학생들이 정부를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려는 의도도 없지 않았으리란 시각도 있다.

일부 중/고교 과정에 군사훈련과정이 포함된 나라들이 없지는 않다. 한국에선 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가 기본적인 도수제식 수준을 유지하며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29] 미국에는 사관학교식 시스템을 가진 사립 군사고등학교들이 나름 명문고 행세를 하고 있고 JROTC 과정도 있으며, 영연방 국가들에는 cadet과정이 있다. 일본만 해도 과거에 자위대생도라고 부사관후보생 양성 과정을 뒀으며 육자대의 기술부사관을 양성하는 고등공과학교를 여전히 운영 중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해당 과정을 선택한 학생에 한하는 것이고, 총기 관련 훈련도 사격체험 이상의 것은 시키지 않는다. 미국의 유년사관학교도 불량 학생들을 재교육 시키는 유사 군대[30]라는 인식으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으며 영화 생도의 분노나 미국 드라마 NCIS 시즌 12 에피소드 14를 보면 얼마나 막장인지 잘 알수 있다. 국가에서 의무적으로 모든 학생이 육군 훈련병 수준의 군사 훈련을 이수하게 하였던 것은 전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다.

참고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미성년자에게 군사훈련을 의무적으로 실시하는 대표적 집단은 바로 북한이다. 중국은 학교마다 다르고 의무가 아니다. 그리고 중국 대학생들이 남녀 구분 없이 입학 전 약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이수하지만, 이들은 이미 성인이다. 이란은 현지 중학교 3학년[31] 때 교련을 받기는 하는데 남학생만 받는다.


4.2. 교련교사의 자질[편집]


앞에서 밝혔듯이, 일부 교련교사들은 사범대학이나 일반대학 교직과정을 졸업하지 않아 교사 자격증 없이 예비역 장교 출신으로 고등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이들이 1960~70년대의 한국의 군사문화를 그대로 여과없이 고등학교로 가지고 온 것이다.

당시 교육자로서의 자질 문제가 가장 크게 대두되던 교련교사들은 단연 육군3사관학교 출신의 고졸 내지는 초대졸 예비역 장교들로, 학사 학위가 나오는 지금과 달리 1970년대의 3사는 고졸 장교, 1983년부터 1995년까지는 초대졸 장교를 양성하였던 곳[32]이라 그들은 교직과정은커녕 학사 학위조차 없었다. 이들은 모두 남자들이다. 여자 교련교사들은 대부분 국군간호사관학교 출신의 학사 학위 소지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2014년 이전까지는 여성의 3사 입학이 불가했다.

그러나 케바케에 따라, 그러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여 야간이나 통신 과정으로라도 정규 대학 과정을 졸업하고 학생들을 의리로 훈육하던 훌륭한 교련교사가 없지는 않았다고 한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깨어 있는 교련교사들은 '이 과목은 언젠가는 폐지될 것이다'라고 예측하여 기존 과목으로 돌아가거나 새 과목으로 갈아탈 준비를 하였다. 웹툰 스쿨홀릭에서도 교련이 폐지되면서 수학교사로 전향한 전직 교련교사의 이야기가 나온다.[33] 단, 수학의 진입 장벽 특성상 본 전공 자체가 수학이 아닌 이상 전환이 사실상 불가하며 애초에 이공계 출신 예비역 장교가 교련교사를 택할 이유도 없다. 대기업 취업이 보장되는데 왜 거길 가겠는가? 수학교사가 된 교련교사는 사실상 전무했다. ROTC, 학사장교 등 일반대학 출신 중 기존의 일반 교과 교사 자격이 있는 교련교사들은 당연히 교련을 버리고 원래 전공 과목으로 바로 돌아갔다.

학사 학위만 있고 기존의 일반 교과 교사 자격은 없는 교련교사는 그 전공의 교사 자격을 취득할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어 육사 군사영어과 출신 교련교사라든가, 일반대학에서 교직과정 없이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학사장교 및 ROTC 출신 교련교사는 교육대학원의 교원 양성 과정에 들어가 영어교사 자격을 취득하고 전공 과목으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말이다. 아무리 확실한 전공의 학사 학위가 있어도 기존의 교사 자격이 없는 사람은 원칙적으로 교사 자격이 반드시 필요하며 자격 없이 수업하면 문자 그대로 무면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유형, 즉 무자격이지만 정규 학위는 있는 교련교사들은 교육대학원까지 다니면서 교사 자격을 딸 여력이 현실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대부분 별도 취득 과정 없이 간단한 연수만 받고 그 과목을 가르쳤다. 물론 본인의 부족함을 느끼고 더 많이 배워 교단에 떳떳하게 돌아가는 성실한 교련교사들도 없지는 않았다.

고졸 및 초대졸 교련교사는 상술한 무자격 학사 교련교사와 달리 학사 학위조차 없었기 때문에 만학도로나마 사범대학에 다시 들어가 교원 자격증을 따와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사대에 들어가는 것부터 배워서 나오는 과정까지 모든 것이 사실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전환할 과목과 유사한 학과의 학사 학위를 임시방편으로 야간대나 방통대에서나마 따오고 연수를 받아, 학위는 어째어째 생겼으나 교사 자격은 없이 그 과목을 가르쳤다. 그나마도 체육으로 전환한 교련교사는 남자이면서 군인에다가 전공 지식도 사실 그다지 필요없어 진입 장벽이 가장 낮았기 때문에 대학에 가지 않고 계속 고졸 및 초대졸인 채로 체육을 가르쳤다. 그리고 역시나 진입 장벽이 낮은 진로상담, 사서교사가 되는 교련교사가 많았으며 당연히 이러한 경우가 월등히 많았다. 그 외에는 도덕, 역사로 갈아타는 사람이 일부 있었다. 영어, 수학, 과학만큼은 아니지만 요즘 수험생들도 가장 많이 기피하는 경제자연지리 때문에 장벽이 높은 편인 지리일반사회로 전환하는 사람은 비교적 적었으나 일단 선택한 사람들은 대부분 열심히 배워 잘 가르치고자 노력하였다.

영어, 수학, 과학은 진입 장벽 자체가 매우 높아서 전공자가 아닌 이상 택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 과목 전공자들을 제외한 교련교사들에게 영어는 맨땅에 헤딩이었을 것이며 수학, 과학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애초에 육사든 일반대학이든 이학 전공 장교는 제대 후에 대기업 취업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교련교사로 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연로하여 과목을 전환할 여력이 안 되는 교사들은 행정실 직원이나 학교 도서관 사서교사가 되어 잔여 기간 근무하였다.

이렇게 '급조'된 비전문 교사들은 당연히 잘 가르칠 실력이 되지 않는다. 학사장교 및 ROTC 출신이라도 대부분 지방대에 비인기과였으므로 처음부터 일반 교과 교사 자격을 지니고 있던 교사에 비하면 당연히 수업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중학교에 정보 교과가 신설될 때에 몇 개월 연수만 거쳐 컴퓨터교사가 된 교련교사는 심하게 컴맹이어서 보조 강사가 붙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자 교련교사들은 대다수가 간사 출신들이다보니 보건교사가 된 경우가 많았으며 여성에게 진입 장벽이 낮은 가정으로 전환한 교사들도 제법 있었다. 국어도 학문 자체로 보면 진입 장벽이 조금 있는 편이지만 여성에게는 상대적으로 난도가 낮았기 때문에 여교사들이 많이 선택하였다. 국어로 전환한 남자 교련교사들이 있었으나 거의 대부분 기존에 국어교사 자격을 가지고 있던 전공자들이었다.

한편, 매우 적은 케이스이겠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경험을 가진 일부 교련교사가 있었으며 그들이 학생들에게 증언한 당시 상황은 예상하다시피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


4.3. 필요 이상의 가혹함[편집]


본디 교련의 목적이라 함은 중 고등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는 데에 있다. 그런 즉, 유사시에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에게도 총을 쥐어주고 전쟁터에 투입해서 병력으로 활용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정말 교련을 해야 할 것 같으면 체계적인 군사훈련과 체력단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에서 자행된 교련 수업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질적 수준이 최악이었다. 학생들의 체력을 단련시켜야 하지만 그 반대의 행동인 구타를 일삼아 학생들의 체력을 심하게 저하시켰으며 이에 대한 핑계라는 것이 맷집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지만 이는 개소리로 포탄이나 총알, 하다못해 냉병기에는 제아무리 맷집을 기른 들 한 방에 훅 간다. 한 방에 팔과 다리가 썰려서 외팔이, 외다리가 되는 곳이 전쟁터인데 팔 잃고 다리를 잃은 후에 맷집이 있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결국은 박정희의 군사독재정권에서 전국민 모두를 박정희의 부하로 만드는 과정에서 일부러 난폭한 사람을 교련 교사로 임명해, 학생들이 쉽게 반항하지 못하게 만들고 무조건 국가의 말을 잘듣는 국민으로 육성시키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구타와 가혹행위를 자행했던 것이다. 학생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공포심을 심어줌으로 인해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그런 군복입은 비민주적인 시민을 육성하기 위해 교련이 이토록 가혹했던 것이다.


4.4. 교과 내용과 수업의 부적절성[편집]


고등학생들에게 총검술을 가르치고, 대공사격 요령, 소총탄의 종류 등을 외우게 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정말로 잘 생각해 보자. 물론 교과서에 적의 목을 벤다 라는 문장이 있을 정도였으니... 애당초 해당과목의 설립동기가 독재자의 신변위협에 따른 정권유지용 예비전력 양성이다.

한편, 당시 고등학생들은 내신 한 등급과 학력고사 1~2점에 대학이 갈리는데, 다른 과목은 잘 하는데 교련수업을 못 따라가 내신등급이 깎여 개피를 본 상위권 학생들도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명문대를 가고 싶어서 내신을 완벽하게 하려면, 교사의 폭력을 감수하며 구령에 따라 동작 맞추는 제식훈련 잘 하고, 사람 죽이는 총검을 잘 휘두르며, 땅개처럼 구르는 포복과 각개전투를 잘 해서 점수를 따는 것을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무시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모든 남학생이 군인이 될 것도 아닌데[34] 저런 걸 잘 하는게 명문대생, 나아가 대학생의 자질과 무슨 연관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또한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거나 몸에 문제가 있는 학생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모든 학생이 현역병으로 입영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35]

여호와의 증인을 믿는 학생들은 문제가 더 심각해서, 모의 총기건 뭐건 간에 어쨌든 집총을 하는 교련수업을 거부해 마찰이 많았으며, 보통 이 경우 실기 점수를 0점 처리하거나, 심한 경우는 자퇴를, 더 나아가 아예 퇴학마저 당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다.

거기에, 실습에 앞서 충실해야 할 이론 수업도 매우 부실했다. 교실 수업은 야외 수업 못 하는 비오는 날을 골라 한두번으로 끝낸다. 그것도 비오는 날이 없으면 아예 안 보기도 한다. 의외로, 교련 교과서 내용을 가만히 뜯어보면 화생방, 생존술에 관한 부분 자체는 알아두면 상당히 괜찮고 군대에서 보조교재로 사용해도 손색없는 수준이다. (야전교범에서 필요 부분만 모아 편집한 수준이었으니 당연하다) 전시나 재난시 민간인들도 익혀두면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 많았다. 정작 이런 유용한 부분들이 전부 혹은 일부 생략됐다.

이스라엘에 무척 우호적이었던 아랍인들은 중동전쟁 당시 해외 유학생들은 달아났고, 이스라엘 유태인 유학생은 무조건 조국을 위하여 싸우고자 귀국했다는 것만 썼다. 이 내용은 이스라엘 항목에서도 나오는데, 유태인들이 전부 그런 게 아니였으며, 아랍인들도 조국을 위하여 싸우고자 귀국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장 이스라엘의 영화배우인 바 라파엘리는 병역기피성 결혼 후 면제 판정을 받자마자 이혼한 이스라엘 여자다. 이스라엘은 여자도 징집 대상이지만 결혼을 일찍하면 병역이 면제된다. 하레디들 역시 병역을 면제받는다고.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서도, 비록 우리의 동맹 미국도 여차하면 언제라도 뒤통수를 친다고 교과서에 나오기도 했다. 해당 과목이 신설된 박정희 정권 시대 후반기인 리처드 닉슨 때와 지미 카터 때에는 미국에서 미군 철수를 검토했을 정도로 한미관계가 썩 안 좋았던 영향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반도 통일에 대하여 미국이 어느 정도 도울 수 있지만 영원한 우방이 아니라고 나온 것. 더불어 일본이 가장 통일을 반대한다고 서술되었는데 90년 초반에 구로다 가쓰히로는 이 점을 거론하며 교련이 반일이라고 발악하며 비난한 글을 쓰기도 했다. 캄보디아 수상이던 마타크[36]의 편지를 일부 싣으면서, 미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만 믿다가, 이 꼴 난다고 강조하던 바 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의 교육들이 줄어들면서 교련이 폐지되기 직전에는, 군부 독재 하의 정훈교육은 훨씬 건전한 통일 안보 교육으로 순화되었고, 교련교사들은 베어 그릴스로 변모하여 등산 계획, 조난 시 생존 방법, 화생방 대비, 구급법, 캠핑 같은 훨씬 현실적이고 유용한 정보들을 가르쳤다. 심지어 학기 내내(혹은 수능 끝난 고3들 대상으로) 운전면허 필기시험의 내용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 필기시험이 많이 쉬워진 지금은 "한 일주일 훑어보는 걸로 충분할 텐데?"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2000년대 이전의 운전면허 필기시험은 교통 법령 및 자동차 공학에 관한 지식을 묻는 문제가 대다수라 상상 이상으로 어려웠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항목을 참조하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설명을 붙일 필요가 있어 덧붙인다.

  1. 친이스라엘적인 논조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개신교계에 이스라엘 민족과 한민족을 "고난"과 "구원" 관점에서 오버랩해 보는 목사가 많았던 점도 있다. 그리고 소수가 다수를 당해 내야 하는 환경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고, 그래서 이긴 좋은 사례가 이스라엘이므로. "다윗과 골리앗"이란 비유가 뜻하는 것은 1980년대까지는 교련교과서만이 아니라 사회 일반에서도 통해서, 교련 교과서가 아니라도 출처는 많았다. 물론 2000년대 군사 정훈교육에서도 쓰이면서 비난받지만.
  2. 미국에만 기대지 말자는 논조는 이 당시에는 운동권 주류가 오히려 친미성향에 가까웠고,[37] 오히려 시민사회가 미국이 어떻게 해주길 바랐고 당시 정부가 10월 유신, 주한미군 철수 반대, 한국군 전력 강화를 두고, 당시 월남 상실 이후에 중국과 화해 외교를 하던 미국 정부와 갈등이 있었다는 점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4.5. 군사적 가치 전무[편집]


대한민국북한, 중국전쟁을 수행한다고 가정할 때, 미성년자가 동원 되는 사태가 오면 정말 대한민국은 벼랑 끝까지 몰린 상황이다. 당장 구 일본군, 6.25 당시 국군만 해도 소년병은 최후의 최후에 몰렸을 때나 제한적으로 운용했다. 전방의 현역병의 전력이 모조리 전멸하고, 동원예비군은 물론이거니와, 향토예비군까지 싸그리 박살나야 미성년자를 군인으로 징집할 텐데, 이들만 합쳐도 500만이다. 물론 전쟁이 길어질 경우 고등학생들이 징집연령이 될 수는 있다. 단적인 예로, 6.25 전쟁만 해도 3년을 했다. 고등학교 1학년이 성인이 될 기간이다.

예비군+현역 총 병력은 인구감소와 군병력 감축에 따라 현재로서는 400만 명 아래고, 십여 년 안에 200만 명대 중반까지 떨어지게 된다. 또한 예비군이 아무리 많더라도 예비군은 전시에 모두 동원되지 않는데, 당연히 그 사람들이 평시에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영국이나 일본처럼 전장과 이격된 나라가 아닌 이상, 남성 민방위까지 전투병력으로 편성해 내보내고 여성만으로 군수공장과 본토 지원부대를 돌릴 수는 없다.

2010년대에는 아무나 대학생이고 거의 누구나 군전역 직후에 대학생활로 복귀하니까 좀 다르지만, 학생예비군 동원은 정책적으로 후순위다. 그런 점에서 군필자가 오백만이든 몇백만이든 군미필 고졸자 징집이 아주 불가능하진 않지만, 어쨌든 현역 고등학생까지 동원할 일은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을 국가막장상황이다. 다만, 과거를 보면, 6.25 때는 첫 반 년 동안 만 16세 이상 고등학생을 징집했다 소집해제한 적 있다. 하지만 이 때는 해방되고 창군과 정부수립한 지 몇년 안 되어 기틀이 다 안 잡혔을 때 국가적 위기를 맞이한 상황이었고, 이미 나라의 기틀이 잡힌 시점에선 역시 고등학생의 전시 동원의 마지막의 마지막에나 할 일이다.

대한민국은 UN 아동권리협약을 비준한 국가이다.

UN 아동권리협약 제38조 ① 당사국은 아동과 관련이 있는 무력분쟁에 있어서, 당사국에 적용 가능한 국제인도법의 규칙을 존중하고 동 존중을 보장할 의무를 진다.

② 당사국은 15세에 달하지 아니한 자가 적대행위에 직접 참여하지 아니할 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실행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③ 당사국은 15세에 달하지 아니한 자의 징병을 삼가야 한다. 15세에 달하였으나 18세에 달하지 아니한 자 중에서 징병하는 경우, 당사국은 최연장자에게 우선순위를 두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④ 무력분쟁에 있어서 민간인 보호를 위한 국제인도법상의 의무에 따라서, 당사국은 무력분쟁의 영향을 받는 아동의 보호 및 배려를 확보하기 위하여 실행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아동권리협약 38조 조항을 보면, 사실상 15세(중3)는 정말 나라가 고꾸라져서 다 죽을 상황 아니면 절대 징병하지 말라는 말이고, 18세(고3) 미만도 '성인 인적자원이 고갈나지 않는 한' 거의 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한국의 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와 같은 유년군사학교 같은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15세를 초과한 후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고, 일반적으로 징집당해 소모되는 소년병과는 달리 못해도 미래의 고급 부사관, 장교를 양성하는 엘리트 코스라 (교련이 상정하는) 일반적 징병과는 차원이 다르다.

되려 외국과의 관계라는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독이 될 제도이다. 예를 들어, 북한의 아동들이 김정은을 찬양하고 핵불꽃으로 미제를 단매에 짓부신다고 하는 꼴이 어떻게 보이던가? 그걸 강인하고 멋지며 참된 국가의 아동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으며, 저딴 소리를 하며 연명해야 하는 북한 아동들에 대한 동정심과 아동에게조차 막장 교육관과 대적관을 세뇌하는 북한 정권에 대한 적개심을 더 키울 뿐이다. 교련도 마찬가지이다. 세계 수위권의 육군 군사력을 가진 국가에서 학생들에게 교련을 해 봐야 보호받아야 할 미성년자에게조차 전쟁과 투쟁을 교육하는 군국주의 전쟁광 국가로 보일 뿐이며, 조금 온정적으로 보는 시각이래봐야 한국은 미성년자에게 체계적 군사교육을 해야 할 정도로 불안정하고 위험한 처지에 놓인 국가로 보일 뿐이다. 어떤 시각이든 전략적 측면에서 한국에게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현대전 양상으로 가는 과정에서 100만 명 이상의 병력은 사실상 쓸데없이 많은 병력이다. 식비와 피복비는 엄청난 반면 그만큼의 효율이 없다. 그래서 현재 대한민국 육군의 병력이 42만 명인 이유가 그 이상은 필요없기 때문이지 사람이 모자라서가 결코 아니다.[38] 같은 원리로 미합중국 육군이 해외에서 활약하는 정규군 47만 명과 국토방위로 남겨놓은 주방위군 34만 명만 놓고 그 이상은 선발하지 않으며 중국 인민해방군이 230만 명만 운영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 인구 문제로 인해 500만 명 ~ 1,000만 명으로 즉, 최대 천만대군까지 뽑는 게 가능함에도 왜 그 정도까지 인원을 늘리지 않는지 생각해보자. 바로 알보병의 힘에는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스타크래프트에 비유해서 설명해 보자면, 두 사람이 1:1로 테란 대 테란전을 하는데 한 명은 마린만 줄창 뽑아 인구수를 채웠고 상대는 마린 뿐만 아니라 벌처와 시즈탱크, 레이스와 배틀크루저 등의 메카닉도 적절히 뽑았다고 했을 때 이 둘이 격돌한다면 과연 어느 쪽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을까? 물론 게임과 현실은 차이가 있지만, 무조건 머릿수를 늘린다고 좋은 것은 아니라는 점 하나만큼은 명확하다. 러시아 육군이 28만명이지만 그 대신 기갑기계화보병 편제이기 때문에 일반 보병으로 구성된 인민해방군 육군이 저 많은 병력으로 러시아 육군과 맞붙는다 하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다. 실제로도 대한민국 육군 역시 바보 멍청이가 아니기 때문에 머릿수 싸움의 한계가 명확함을 이미 인지하고 있으며 그래서 여러개의 일반보병사단을 기계화보병사단으로 바꿔놓았는데 8사단, 11사단, 26사단, 30사단은 전원 일반보병사단에서 순차적으로 기계화보병사단으로 편제가 변경된 사단이다. 또한 이에 따라 기갑 병과에서도 대장을 배출했다.

이렇게 현재 존재하는 부대도 인력 위주에서 장비 위주로 가는 상황이기 때문에 중고등학생들까지 전선에 투입할 필요가 갈수록 없어진다. 이는 학생들의 인권 문제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 아니며, 인구감소문제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것도 아닌, 순수하게 군사학적 관점에서만 접근한 결과가 이렇다. 일반보병과 기계화보병을 비교해봤을 때 인원은 기계화보병이 더 적지만 전투력은 기계화보병이 훨씬 강력하다. 특히나 대한민국 육군이 무시무시한 점이 있다면 바로 제7기동군단의 존재인데 제7기동군단은 아시아의 모든 육군 군단 중 전투력 최강인 군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군 vs 중국군으로 맞붙을 경우 중국이 이긴다 하더라도 무시못할 피해를 입는다. 그런데 쓸데없이 인력만 많이 들어가는 주제에 기계화보병에 비해 전투력이 훨씬 약한 일반보병을 고집할 이유가 더는 없기 때문에 학생들까지 병력으로 끌어들이는 교련 과목은 전혀 필요가 없게 됐다.


5. 대학 교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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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문무대(文武臺)전방입소 훈련. 훈련을 받는 육군학생군사학교[39]의 별칭이 문무대였던 탓에, 대학 교련이란 말보다 문무대 훈련이란 말로 더 유명하다. 대학에서도 3학점이었으며, 1970년대엔 군필자 포함, 이후엔 군입대 예정자에 한해 필수과목이었다. 즉 신체검사에서 제2국민역이나 면제 판정을 받았다든지, 여자라든지,[40] 이미 군대 갔다 왔다든지 하는 경우[41]는 교련 이수 대상자가 아니었다.

대학 때 교련수업에 참여하지 않아 교련학점을 이수하지 못하면, 강제 입영되기도 했다. 특히 운동권에서는 교련을 독재정권의 학생통제수단으로 비판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거부하다가 단체로 강제 입영된 경우도 많았다. 전두환 정권에선 이렇게 끌려들어간 대학생들 일부가 보안사녹화사업 대상이 되었다가, 의문사하는 일이 벌어진다. 검색엔진에 "전방입소 거부"를 치면 꽤 많이 나오는데, 시대에 따라 입장 변화가 약간 있다. 1970년대에는 학생인데 무신 군사훈련이냐!하는 입장이 많았고, 1980년대에는 반미 사상이 많이 퍼져서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거부!가 슬로건이 되었다. 1986년에는 서울대생 김세진, 이재호가 전방입소반대 시위 도중에 분신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유신 정권 시절에는 여자들의 대학 진학률이 높지 않아 많은 학과의 절대 다수가 남자였는데,[42] 이런 식으로 교련을 거부하다가 한 학과의 한 학번 전체가 강제입영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특정 학과 특정 학번 사람들이 아예 사라져 학사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문무대나 전방입소 훈련을 받는 학생들을 위로하기 위해 대학 총장이 해당 육군 부대를 방문하곤 했다. 특히 지거국 총장의 경우 사단본부에 4성기가 게양되고, 군악대장성에 대한 경례를 육군 4성장군에 맞게 연주했다. 그리고 진짜 4성장군처럼, 대학 총장은 참모총장마냥 사단장의 영접을 받으며 의장대를 사열했다고 한다.(...) 지방 거점 국립대 및 종합 국립대 총장의 의전은 무려 장관급, 즉 군인에 대응하면 실제 대장 계급에 상당하기에 저런 대접을 한 것이다.

교련 수업은 주로 토요일에 했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에는 데모에 참가하느라 1번만 출석해도 학점을 받은 사례가 있을 정도이다.


5.1. 문무대 훈련[편집]




대학에 입학하는 1학년 남학생들은, 성남에 있는 육군학생중앙군사학교에 70년대에는 9박 10일, 80년대에는 5박 6일 동안 소집되어 군사 훈련을 받았다. 입소하는 남학생들을 위해서 여학생들이 초콜릿, 사탕, 담배 등을 선물로 주곤 했다. 교련복을 입고 입소하여, B급 군복으로 갈아 입고 얼차려부터 시작해 짧은 기간 내에 유격, 총검술, 화생방 각개전투 사격술등, 육군 훈련소에서 하는 것을 단축한 듯한 군사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일과시간이 무척 빡빡했다. 힘든 주간 교육이 끝나면 밥 먹이고 그냥 재웠냐 하면 그렇지 않고 식후에 따로 모여 정신교육과 이론 교육을 또 받았다. 정신교육이 없는 날은 퇴소 전날 뿐.

주로 이 마지막 날 밤에 학교에서 보내 온 여학우들의 편지와 위문품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실은 입소할 때 같이 가져왔다가 이 날 나눠 주는 것. 가끔 진짜로 수신처를 문무대 앞으로 해서 교내 우체국에서 우편으로 보내는 학교도 있긴 했다. 이 때 특정 상대에게 연심을 품은 편지를 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여학우가 적은 공대 같은 데서는 여학생들이 나누어서 한 사람이 여러 사람에게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써 보내기도 하였다. 타 과 여학생이 해당 학과 여학생을 통해 맘애 들었던 남학생에게 자기 편지를 전해 주는 일도 있었고. 어쨌든 학과에 여학생이 만든 적든간에 할당해 형식적인 내용이라도 편지를 써 주어 위문 편지 못 받는 남학생은 없도록 하는 습속이 당시에 있었다.

사격술 과목이 있기에 대부분 여기서 처음 실총 사격을 경험하게 된다. K-1, K-2 소총 보급과 일부 기간이 겹치지만 사용 총기는 M16이었는데, 월남전 때 쓰던 초기형이 다소 섞여 있었다. 군대에서 하는 먼 거리는 아니고, 30미터 이내에 종이 표적 놓고 보통탄 3-5발을 사격했다. 사격 성적이 좋은 학생은 군 훈련에서 그렇듯 한동안 열외해 쉬게 해 주기도. 당연히 못 쏘면 굴렀다.

사고가 난 이후에는 군대에서까지 사라진 훈련이지만, 대학생 입소 훈련이 있을 당시는 사고가 나기 전이라 공수 막타워 모의 강하 훈련도 했다. 층마다 PT체조를 하고, 꼭대기에서는 "이 10m 높이가 인간이 공포를 가장 크게 느끼는 높이 어쩌구.." 하는 교관의 개드립을 듣고, "애인 있냐? 애인 이름 불러라, 애인 없으면 엄마라도 소리쳐라." 말을 들으며 조교에게 엉덩이를 차이며 악을 쓰고 뛰어내려야 했다. 대부분 학생들은 그나마 훈련 강도가 약하고 대기 시간이 긴 막타워 훈련을 재미있어 했지만, 고소 공포증이 있더라도 얄짤없이 뛰어내려야 했으니 해당 학생은 고역이었다.

각개 전투 훈련은 경사가 심한 훈련소 뒷산에서 했는데, 참호에 들어갔다 나오고 비탈길 뛰어오르고 총 들고 낮은 포복으로 엎어져서 기고 누워서 철조망 통과, 돌격해서 찌르기까지 다 했다. 즉 군대에서 하는 것과 강도가 다르지 않았다.

학교 분위기에 따라 또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그 훈련의 강도는 점점 약해졌다.

문무대 내에서도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5.2. 전방입소훈련[편집]


대학 2학년 남학생들이 전방의 육군 부대로 5박 6일 간 입영하여 군사훈련을 받는 제도. 1988년을 마지막으로 없어졌다. 기간상으로 미루어보면 정확히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만들고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폐지했다. 즉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만 전방입소훈련을 실시했다. 대체로 해당 훈련은 5~6월 경에 실시했다.

이 쪽도 전자와 마찬가지로 군필자나 면제자, 반수나 편입 등으로 이미 받은 동 훈련 이수자는 해당되지 않았다.


5.3. 복무단축 혜택[편집]


1, 2학년 교련과목을 이수하면, 무시못할 혜택이 있었다. 바로, 현역병인 경우 문무대 훈련과 전방입소 훈련을 다 마치면, 복무기간이 무려 3개월 단축되는 것이다. 1970년대에는 6개월이나 되었다가 줄어든 것이다. 이는 문무대 훈련을 거부한 운동권 간부들이 막상 문무대 훈련장에 떡하니 나타나 군복무 단축혜택을 받는 것을 목격하고 운동권에 대한 회의감이 폭발했다는 증언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혜택이었다. 80년대 당시, 육군 현역병의 복무기간이 30개월이였는데, 3개월 혜택을 받으면 27개월만 복무하고 전역하였다. 문무대 1 주일 + 전방입소 1주일과 말년 3개월의 등가교환(?). 실감이 나지 않는가? 2개월 고참보다 1개월 먼저 전역한다고 생각해보자. 이 때문에 고졸 이하 학력으로 그 혜택을 못 보는 이들의 말년 히스테리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이 당시에 현역판정률이 50% 초반대라서 현역에 가는것 자체가 복불복이었던데다가, 막상 현역병이 되어도 혜택이 더 있는것도 아니라서,[43] 동급생이나 친구들 태반이 방위병으로 주말마다 젊음을 누리는건 물론, 복무기간도 짧아서 사회생활도 빨리 시작하는데 자신은 군대에서 뺑이나 치는 상황에서 박탈감이 들고, 거기에 더해 교련수업 받았다고 복무단축을 받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치면 배가 아플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만땅 병장과 혜택 병장이 한 내무반에 섞여 있는 경우,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전역 일자만이 아니라, 그 2개월 안에 육군에 갔다면 유격훈련, 혹한기 훈련 등이 있을 수도 있으며, 복무기간이 좀 더 긴 해공군 입대자의 경우 거의 육군 입대자와 엇비슷하게 전역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이 때문에, 대학 다니다 온 현역병들은 입대 직후 대학생 출신임을 가급적 숨기다 행정병 등이 알아내고 퍼뜨려 되려 선임들에게 피보는 경우도 있었다.

1학년 문무대 훈련만 마치고 입대할 경우 절반인 45일 단축 혜택이 주어졌다. 또한 보충역 판정을 받아 방위병소집 대상인 경우, 1학년 문무대 훈련을 마치면 10일, 2학년 전방입소훈련을 마치면 20일 단축혜택이 주어졌다. 1986년 중반에 방위병 복무 기간이 14개월에서 18개월로 늘어난 이후에는 문무대는 10일 그대로였지만 2년차에 받는 전방입소까지 마치면 30일 단축 혜택이 주어졌다. 방위병은 한 달에 한 번 소집하므로, 전 기수와 같이 소집해제 하게 되는 것.

복무단축 혜택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역병
방위병
문무대
45일
10일
전방입소
90일
20/30일

대학 87 학번은 87년대 문무대, 88년도 전방입소 교육을 받아야 했고, 이에 따라 총 90일 혜택을 받을수 있었으나, 88 학번인 경우에는 88년도에는 문무대 입소를 하였으나, 89년 전방입소교육이 폐지됨에 따라, 45일만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간혹 8X학번임에도 불구하고, 문무대 입소를 거부하여, 혜택을 못 받는 이들도 있었는데, 자대에서 심히 바보취급을 받았다. 입소 갔다와서 단축 혜택 받으면 일찍 전역한다고 갈구고, 안 갔다오면 줘도 못 먹는다고 갈구고...

이러한 복무단축 혜택으로 인해서, 당시 대학생들은 2학년을 마치고 군 입대 하는 보편적인 경향이 있었다. 1학년만 마치고 입대하는 경우엔 전방입소훈련을 받지 못했다. (4개월 방위 시절엔 별 차이가 없어 보충역 소집 대상자는 1학년 마치고 군대 가는 일이 있었지만, 18개월로 늘어난 다음엔 보충역 대상자도 전방 입소 훈련까지 다 마치고 갔다. 현재처럼 그냥 빨리 갔다오고 치우려고 가급적 1학년 1~2학기 마치고 군휴학 내는 분위기는 이 두 훈련이 폐지된 이후 생긴 것이다.

KBS2 유머 1번지의 대표 코너 동작그만에서도 관련 에피소드를 다뤘다. 설정상 대학 재학 도중 입대한 정우진, 최형만, 김한국, 한정호가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들이다.


5.4. 전방입소 거부투쟁[편집]


당시 대학 내에서 전방 입소는 반공 교육을 통해, 사회 비판적인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로 인식되었고, 운동권에서는 교련을 미제용병훈련으로 인식하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 이미 1971년 대학가 교련반대투쟁이 있었고. 1986년 4월 전국의 대학에서 전방입소 거부 투쟁이 일어났다. 그 해 4월 28일 서울대학교에서 김세진, 이재호 두명이 분신하면서 이러한 투쟁은 정점에 달하였다. 당시 군사독제체제 하에서, 모든 남자대학생들의 문제였기 때문에, 일반 학생들의 참여도 상당하였다.

결국 1987학년도부터 전방입소가 선택과목으로 변경되었다.(KBS, MBC) 그러나 말로만 선택이었지 일단 전방입소를 거부하면 병역특례 편입이나 복무단축도 불가능하고 입영연기도 취소하고 당시 졸업예정연도까지 연기되던 신검의 연기 혜택도 취소되어 입영해야 하는 일종의, 군사독재의 말기 발악적 눈속임이었다. 87년 초 당시 전방입소에 많은 학생들이 전방입소를 거부하고 다만 교련 간부 학생들만 대다수 학생들의 거부 사실과 사유 등을 해당 전방 부대에 전달하는 차원에서 입소했지만 전경을 동원한 검문 수색 등으로 인해 거의 전부 당일 0시 이전에 입소 부대로 끌려 갔다. 그리고 연병장에 라이트 켜놓고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원산폭격 등의 기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직후 6월 항쟁이 성공하고 교련 폐지가 결정되었고, 군사교육 거부자들은 같은 학점의 교양과목을 이수하면 구제되는 것으로 방침이 정해졌다. 교련 1(학과 및 교내 실습 교육), 교련 2(문무대 입소), 교련 3(전방입소) 모두 한학기에 1학점 씩이었으며 2회 이상 무단결석 교관에 대놓고 반항 등 F학점 사유시에는 군사교육 거부자(학적부에 기재) 및 학변자 처리, 다음 연도에 단축혜택 없이 입영되었다. 현재 각 기업체 중견임원이나 CEO급으로 있는 당시 대학생들은 따라서 군경에 대한 거부감이 상상을 초월한다.


6. 폐지[편집]


대학 교련은 제5공화국이 막을 내린 후, 1988년 11월 25일 폐지가 결정되었다. 관련 자료 이에 따라 복무기간 단축 혜택도 없어져서, 대학생들이 2학년을 마치기 전에 입대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다. 1~2학년에 교련 과목을 이수하면 복무기간 단축 혜택이 있었으므로, 대부분 2학년까지는 다닌 후 입대했다. 심지어 의대생이 복무기간 단축을 위해 군의관 대신 의무병으로 입대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교련은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단계적으로 사라져갔다. 이전까지 국방부가 출판하던 교련 교과서는 문민정부 원년인 1993년부터 출판처가 교육부로 이관되었다. 문민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교련 교육과정 개편에 착수하여 1994년부터 군사훈련 부분을 교과서에서 완전히 삭제하였고, 실습 내용은 구급법 등으로 대체되었는데, 남학생은 1977년생까지 교련복을 입어야 했다고 하지만 당시 분위기가 교련의 폐지로 가는 단계였기 때문에 교련복 착용 없이 수업을 진행한 학교가 많았다.

또한 이 때 교련복도 바뀌어 교련복 대신 체육복에 베레모만 쓰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교사의 복장도 군복류에서 학교 체육복이나 사복으로 변경되었으며 전투화나 각반 등 발에 차는 것도 운동화로 대체되었다. 7차 교육과정에서 선택과목으로 변경,[44] 이때부터는 고3에 교련이 잡히는 경우 최소한의 실습 정도만 하고 다른 교양 과목들처럼 대부분의 시간을 자습으로 보냈다. 3학년에 잡히지 않았더라도 독도법, 즉 지도 읽는 방법이라든지, 앞서 언급한 구급법, 텐트 치고 야생에서 야영하는 방법, 야생에서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 취해야 할 조치 등 실용적인 내용을 다루는 경우가 늘어났으며, 정훈 교육도 전에 비하면 이념 대립의 색채가 많이 탈피된 통일 안보 교육으로 순화되면서 수업 분위기가 전보다 훨씬 건전하게 바뀌었다. 아무래도 군인 출신이라는 교련교사 특성상 이 정도 내용은 강의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45] 그리고 2011년에 이명박 정부2009 개정 교육과정[46]을 적용함으로써 교련을 완전히 폐지하였다.

한 번에 모두 없애지 못하고 단계적으로 없앤 이유로는 교련교사들의 고용 문제 때문도 있었다. 교련교사는 주로 영내에 근무하는 군무원을 제외하면 예비군 동대장과 더불어 퇴역 군인의 일자리로써 매우 큰 부분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한 번에 없애버리면, 특히 인사권이 재단에 있는 사립학교에서는 교련교사들 고용이 심히 위협받기 때문이다. 상술하였듯 교련교사 중에는 일반 교사직을 수행하기에 학력 등 자질이 부족한 경우도 많아 타 과목으로 바로 전환하기 어려웠던 것도 이유로써 한몫했다. 그렇다고 군대에서 군무원이나 동대장으로 받아줄 여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정년 퇴직이나 자진 조기 명예퇴직으로 인한 자연 감소와 맞추어가며 서서히 줄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교련을 가르치던 교사들은 상황에 따라 여러 길을 걸었다.

  • 일반 교과 교사 자격을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교련교사들은 교련을 버리고 해당 교과로 돌아갔다. 사실 일반 교과 교사 자격이 있는 교사들은 처음부터 교련과 그 교과를 겸임하였으므로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 교사 자격증은 없지만 관련 전공 학위가 있는 교련교사는 원칙대로라면 교육대학원에 들어가 그 과목의 교사 자격증을 취득할 필요가 있었다. 예컨대 교직이수 안 한 영문과 출신 ROTC학사장교, 육군사관학교 군사영어과 출신은 교육대학원의 교원 양성 과정에 들어가 영어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영어를 가르치는 식이다. 아무리 학사 학위가 있어도 그냥 가르치면 당연히 무면허이다. 그러나 실제 무자격 학사 출신 교련교사들은 별도의 재취득 과정 없이 연수만 받고 계속 무면허로 가르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본인의 부족함을 느끼고 더 깊은 배움을 위하여 교육대학원에서 교사 자격을 따와 떳떳이 교단에 돌아온 성실한 교련교사도 있었다. 또한 이 대목을 읽을 시 주의할 점으로, 육사 출신은 동대장과 군무원에도 우선 임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육사 출신 교련교사 자체가 매우 희박하였으며, 영어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였지만 육사든 일반대학이든 이공계 출신 장교는 갈 데가 많아서 이공계 출신 교련교사는 없었다. 또한 ROTC 및 학사장교 등 일반대학 출신이라도, 전역 후 취업이 어려운 지방대 비인기과 출신들이나 여기에 왔지 명문대 출신 장교들은 당연히 교련교사가 되지 않았다.

  • 나이가 많아 정년 퇴직을 목전에 둔 교련교사들은 과목을 전환할 여력이 없어 진로상담교사, 학교 도서관의 사서교사나 행정실 직원 등으로 전직하여 잔여 기간 근무하였다.

  • 이제 이들이 가장 문제의 소지가 많은 사람들이다. 3사 출신의 고졸 내지는 초대졸[47] 교련교사이면서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남자 교련교사들은 상술한 학사 출신 무자격자들과 달리 학사 학위조차 없었으므로 교사 자격 없이 가르친다는 것은 말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뒤늦게 사대를 들어갈 여력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환할 과목을 야간대학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만 따고 연수를 받는 식으로 전환하였다. 정말 성실한 교사가 아닌 이상 그렇게 떳떳이 자격증을 가지고 교단에 서는 경우는 드물었으며 그마저도 진로상담, 사서 등 비교과나 체육으로 전환한 교사는 대부분 그냥 고졸이나 초대졸 상태로 계속 가르쳤다. 특별한 전문 지식이 그다지 필요없어서, 그리고 체육 같으면 남자에 군인이어서 더더욱 진입 장벽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이쪽으로의 전환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외에 가끔 도덕, 역사 등으로 전환한 교사는 야간대나 방통대에서 유사 학과를 이수하고 해당 과목의 연수를 받은 뒤 가르쳤다. 실력이 부족하다 보니 대부분 1학년만 가르치거나 중학교로 자리를 옮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 여자 교련교사들은 보건교사로 남는 경우가 가장 많았으며 국어나 가정으로 전환하는 여교사들도 제법 있었다. 국어, 가정이 여성에게는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았으며 보건의 경우 여자 교련교사 대부분이 국군간호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했다가 의무 복무를 마치고 퇴역한 예비역 간호장교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실제로 여고의 교련 커리큘럼은 (제식 훈련이 포함되기는 하였지만) 대부분 구급법 위주였으며 교련이 없어지기 전부터 여자 교련교사들은 이미 그 학교의 보건교사를 겸임하였다. 그래서 보건교사 채용에 정규직 교사를 거의 안 뽑는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보건교사도 정규직 비율이 높았다. 정규직 보건교사 TO가 급락한 것도 교련이 사라진 후부터이다.


7. 외국의 교련[편집]


중국도 교련 수업이 있다. 현지어로는 군훈(军训)이라고 부르며, "쥔쉰"이라고 읽는다. 현재도 교과과정에 포함되어있으며 중고대학교 신입생들이 입학식전에 받는다. 교육기간은 중, 고등학생은 5일, 대학생들은 2주씩 받지만 학교장 재량으로 수업기간을 늘리는 경우도 있어서 빡센 대학교는 최대 1달까지 훈련받는 경우도 있다. 중국에서 징병제를 시행하지 않기 때문에 기초군사훈련의 성격도 지닌다. 그러나 교육기간이 짧다는 점때문에 실전훈련보다는 제식훈련과 체력단련에 집중되어 수박 겉 핥기 식 교육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교련 교사들의 자질 문제까지 대두되며 폐지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심지어 2014년에는 교련교사가 만취 상태로 수업 중에 여학생들을 희롱하다가 교사와 남학생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지는 등 사건사고가 종종벌어지고, 교련 수업을 보통 8월 하순 ~ 9월 초에 진행하지는지라 교련수업을 받다가 무더위로 쓰러지는 사건사고도 종종 벌어지는데. 당시 학부모들이 교련 수업을 폐지하여야 하는 근거로 든 이유들을 보면 우리나라 교련과 매우 비슷한 형태로 수업이 행해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사 그래도 법적으로 교육기간은 지정되다보니 좀 생각있는 학교에서는 VR체험을 통해 모의전투를 진행하는 식으로 수업을 흥미롭게 진행하려 애쓰기는 한다. 물론 대다수에서는 전자의 경우가 더 많지만.

북한은 의외로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훈련이 학교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북한 남녀 학생들은 아예 고등중학교 4학년(15세) 때부터 붉은청년근위대라는 군대에 편입되어 일년에 일주일씩 군사훈련을 받으며 대학에 가면 교도대로 편입되어 6개월간 군생활을 해야 하므로 따로 학교에서 교련을 가르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왜 있는 것인지 알기 힘든 대한민국이나 중국의 교련과는 달리 북한의 학생 군사훈련은 상당히 본격적이어서 산악행군, 사격, 총기수입 등 실용호전적인 프로그램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란에서는 남학생들만 교련 수업을 받는다. 8학년부터 주당 1시간.

2019년 2월 26일에 세르비아 국방부가 30년만에 고교과정에 교련을 부활시켰다. #

미국에서는 지원자를 받아서 실시하는 JROTC에서만 교련 수업이 있다. 애초에 이들은 직업군인이 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훈련을 받는 인원들이다.

대만에서도 고급중학교와 대학교에 군훈교관이라는 이름으로 현역 군 장교가 배치되었다. 1912년에 제도가 갖춰졌고 과거에는 한국의 교련 교사에 해당했으며 중국국민당을 선전하고 학생들을 감시하거나 당에 영입하기도 했다. 민주진보당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으로 역할이 변했다. 교관의 지위와 역할을 규정하고 있는 고급중등교육법이 2013년에 개정되면서 2023년 8월 1일에는 111년 만에 모든 학교에서 전원 철수했다.

미성년자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는 나라는 이게 전부다. 이 밖에도 청소년, 심지어 어린이를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시켜 소년병으로 써먹는 막장 사회도 많지만, 그걸 교련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스위스이스라엘처럼 징병제가 있으며 안보에 신경쓰는 나라들도 군사 훈련은 성인에게만 실시한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은 일찍 결혼하면 아예 군대와의 인연이 없어진다. 기혼자가 병역면제 대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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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상을 보면 구(舊) 일본군 제식의 영향을 받아 정모 끈을 입술에 걸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일본군 제식은 영국군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현재도 일본 자위대 열병식 사진을 보면 정모 끈을 입술에 걸친 것을 볼 수 있다.[2] 전국 2,144개 국공립 및 사립 고교 가운데 91개 고교.[3] 1968년에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푸에블로호 피랍사건까지 터진다.[4] 당시 복무하던 병장들은 하사로 진급 후 전역했다.[5] 1.21 사태 당시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의 회고에 따르면, 이 시기 군복무를 했던 예비역들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신조도 어쨌든 전직 군인이었든 만큼, 군말없이 폭행을 감수했다고 한다(...). [6] 체육 시간을 기존 주 4시간에서 3시간으로 줄이고, 교련을 주 2시간으로 신설하였다. 당시 체육 시간이 4~5시간이었던 이유는 기초체력 향상을 위한 것도 있었지만, 학력고사 체력장 시험이 있어 체력장 연습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체육대학 및 체육교육과를 가지 않는 이상 대학입시에서 체육은 아웃 오브 안중인 21세기와 달리 당시에는 체육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다만 이 체력장이라는 게 20점 만점에 기본점수가 15점에 응시만 해도 1점이 가산되어 16점이 되고 체력장 점수에 따라 17~20점이 되는 구조라 세간에 '필수과목' 운운하며 알려진 건 다소 과장적인 부분도 있다. 물론 최상위 명문대는 1점차로 당락이 결정될 정도로 성적대가 촘촘하기 때문에 아무리 기본 응시만 하고 16점만 받더라도 4점차가 무시할 수는 없을 정도였다.[7] 학교에 방독면이 없어서 눈으로 입으로만 방독면을 착용했다. 지역예비군 치장물자 일부를 학교에 보관해서 실습용으로 사용했다. 단, 보유수량은 형편없어서 10개가 넘지 않아 착용실습은 순차적으로 했으며 치장물자인 만큼 정화통에서 악취가 진동했었다.[8] 육해공군 어디든 상관은 없었다. 단 해군 장교와 공군 장교는 전역 후 각각 민간 해운 회사에 들어가 뱃사람이 되거나 민간 항공사에 들어가 비행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거의 다 육군에서만 왔다.[9] 제5공화국 당시 표어.[10]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하는 군 편제를 그대로 따랐다. 반장은 소대장. 다만 분대장 보직은 없다.[11] 패트롤 캡, 리지웨이 캡형태 혹은 팔각모 형태[12] 여기에도 예외는 있어 교련 교과서가 완전히 개정되기 전 5차 교육과정 마지막 세대인 1995년 입학생(1979년생)까지 교련복을 착용한 경우도 있었다. 이는 세월이 많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추측할 때, 교복판매점이 비축한 교련복재고 소진을 목적으로 교련복 착용 수업을 강행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13] 1993~1995년 입학생.(1977~1979년생)[14] 목총의 소각은 사실 쉽지 않다. 어렵사리 원형을 유지한 경우 크기가 난로에 한번에 들어가지 않아 별도의 절단작업이 필요하기도 했고 100%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무게를 늘리기 위한 금속이 박혀있기도 했다.[15] 이런 목총은 아직까지 영화 소품으로 가끔 보이기도 한다. 각시탈 같은 작품이 그 예시이다.[16] 여기서 목총은 Mock총이다. 여기에서 Mock의 뜻은 모형을 뜻한다. 한마디로 모형총. 이외에 Mock을 쓰는 용어로는 목버스터, 목업 등이 있다.[17] 목총에는 탄창이 없기에 탄창은 학교에 가져오지 않았으며, 애초에 조립할 때부터 순정 무게추는 부착하지 않고 그냥 순수 플라스틱 부품으로만 조립했으며 당시에는 총신 등 눈에 잘 뜨이는 파트 색깔을 실총과 다르게 해야 하는 규정이 없어서 모형 총기도 실총과 거의 같은 모양이었다.[18] 아카데미 M16은 1987년 출시되었다. 이 시기에 서울 중산층 고교생의 한 달 용돈이 2~3만 원 정도였고, 소형차는 450만 원 정도였다. 대폿집에서 소주가 500원대이던 시절이다.[19] 교련교사들은 비 오는 날 실내수업을 진행할 때 자신의 출신부대에 대한 썰을 풀기도 했는데 이 때, 특전사 또는 메이커 사단 출신임이 드러나게 된 경우 해당 부대와 관련된 별명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황금박쥐파란해골[20] 보통 대위 혹은 소령.[21] 일제의 경우, 사범학교에 배속된 교련교사는 대개 현역 일본 육군 소좌였다. 예비역도 아니고 현역을 학교에 박아놓은 것이다.[22] 실제로 학생들이 이런 모습으로 기억한 교련교사들은 일명 똥군기를 부리기보다, 고등학교 졸업 후 길어야 5년 남짓 이내에 입영 대상자인 제자들에게 최대한 군대에 적응할 수 있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많이 가르쳐주고 사람 좋은 선생이었다는 기억으로 남아있는 편이다.[23] 당시에는 남녀공학이 국립 사대부고(서울사대부고, 부산사대부고 등등) 외에는 극히 드물었으며 남녀합반은 사막에서 바늘 찾는 수준이었다.[24] 남교사 & 여학생, 여교사 & 남학생, 그리고 남학생 부상병 & 여학생 간호병 역할 조합 등[25] 높으신 분들부터 학생, 일반인들까지 다수의 편견으로 은근히 무시받지만 임용 경쟁률도 높으니 임용까지 된 체육교사를 너무 비하하지는 말자. 정작 진짜로 질 떨어지기로는 공업고등학교 전문교과교사가 더했다. 학교가 학교다보니.[26] 이때 교련교사를 맡았던 배우가 김병춘이며 실제와 비슷한 싱크로율을 보여주었다.[27] 교련복, 각반(전투화 신으면 없어도 됨), 베레모(또는 교모/교복 세대), 칼라(목 아래를 옷기스열린 부분을 가리는 흰색 또는 학교별 지정색의 삼각형 천), 버클 달린 허리띠를 모두 착용해야 했으며 하나라도 빠지면 감점 또는 얼차려[28] 해당 지역 예비군 간부들도 배석한다.[29] 원래 사관학교와 비슷하게 군사훈련을 시행했었으나, 소년병을 금지하는 유엔협약에 따라 폐지한 것이 겨우 20년 전의 일이다. 단, 애초 해당 협약에도 만 15세 이상은 징병이 아닌 자원 입대했다면 소년병으로 분류하지 않으므로, 그냥 둬도 문제는 없었다.[30] 가령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공부 못 하면 군사학교로 전학간다'라는 식의 내용이 가끔 나온다. 실제로 미국 45대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가 뉴욕군사학교 출신이었다.[31] 한국으로 치면 중학교 2학년[32] 1998년부터 4년제 학사학위가 수여되었다.[33] 이는 학교대사전에서도 과목 바꾸기 항목에 잘 설명되어 있는데, 교련 교사가 수학 교사로 바뀌는 것처럼 극과 극을 달리는 경우가 있어 매우 우려되어, 이런 분들은 다시 임용고사를 보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의견도 있었다. 책에서는 아예 3cf가 그린 삽화까지 묘사되었다.[34] 징병제긴 해도 몸에 하자가 있어 방위병으로 빠지거나 아예 면제받을 학생도 반드시 존재한다.[35] 게다가 전후 베이비붐, 60년 이후 인구 급증으로 63~77년생은 인구가 너무 많아 현역 판정률이 상당히 낮았다. 80년대 초반부터 교련 폐지 시기까지는 고교중퇴 이하는 체력 무관하게 거의 보충역으로 판정되던 때다. 2대독자 보충역, 3대독자 면제이던 시절. 실제로 정준하가 4대 독자라는 이유로 면제를 받았다.[36] 미국으로 망명할 수도 있었으나 거부하고 남아 크메르 루주에게 끔살당했다. 이 편지 내용은 죽어도 내 사랑하는 조국에서 죽겠다면서 당신 미국만 믿던 멍청한 나를 영원히 혐오하면서 죽는다는 후회가 잘 나와있었다.[37] 운동권 주류가 반미로 이동하게 된것은 미국이 전두환 정권을 승인한 이후의 일이었다.[38] 사람이 모자랄 거 같으면 의무복무기간을 줄이는 짓을 하는 게 말이 안 된다. 60~70년대에 3년이었던 게 2020년까지 육군 기준으로 1년 6개월, 즉 절반으로 줄어들었다.[39] 당시에는 성남시에 위치해 있었으며, 현재 이 자리는 위례신도시가 조성되었다. 2011년 현재의 괴산군으로 이전.[40] 1970년대에는 전문대학의 여학생도 교련을 받았다.[41] 이런 케이스는 반수나 편입생 중에서 많이 보인다.[42] 특히 경영학과공대는 여학생이 잘 해야 한 명 있는 수준이었다.[43] 혜택이라고 해봐야 공무원과 공기업 시험볼 때 군 가산점 조금 더 주는 수준이었다.[44] 교련을 선택하는 학생이 있을 리는 없었지만, 교양 선택과목은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정하는 경우가 많아 은근히 오래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예로, [45] 수능 끝난 고3들에게 교련교사가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가르쳐주는 학교도 일부 있었다. 시험 며칠 전에 문제 풀이를 스마트폰 어플로만 연습해도 1종 보통 70컷은 일도 아닌 지금의 시험과 달리 교련 쇠퇴기인 1990년대의 운전면허 필기시험은 자동차공학과 도로교통 관련 법학 문제가 주를 이루는 상당히 본격적인 시험이었기 때문에 설렁설렁 공부했다가는 누구나 피를 볼 수 있는 난이도로 악명이 높았었다.[46] 정확히는 참여정부 시절에 발표한 2007 개정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과정부터 교련이 삭제되었으나, 이 교육과정이 적용되기도 전에 2009 개정 교육과정으로 개편되는 바람에 앞서 적용된 수학과 영어를 빼고는 실현되지 못했다.[47] 초급대학의 약자로, 오늘날 전문대학의 전신이 되는 교육기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