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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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관련 기사
3.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교복부활(校服復活)은 1986년 ~ 1992년 경까지 중고등학생들이 다시 사복 아닌 교복을 착용하도록 한 조치다. 두발규제 강화와 함께 재개되었다. 대한민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교복 착용 및 두발 제한이 있었다가 1982년에 두발자유화[1], 1983년에 교복자율화가 시작된 바 있다.

이후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의 탈선 및 가계부담 증가, 생활지도의 어려움이 지속되자 1985년 문교부에서는 1986년 2학기부터 학교장의 재량에 따라 교복을 착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복을 재착용할수있게 되었다고 해도 1990년을 전후한 시기까지는 대다수 중고등학교에서는 여전히 사복차림으로 학교를 다녔다. 부산광역시의 경우는 대도시 중에서 교복부활이 가장 빨리 확산되어서 1990년에 이미 60%의 학교에서 교복이 부활했으며 특히 부산 4학군 지역의 사립 고등학교들은 1986년 2학기부터 대부분 교복이 부활하였다. 재미있게도 교복이 희소품이었던 시절에는 교복이 있으면 멋지다고 하던 학생들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교복이 폐지된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였기도 했고 만화나 애니, 게임 같이 당대에도 흔히 접할 수 있던[2] 일본 쪽 매체에서 교복이 멋들어지게 등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교복이 부활하고 나서는 디자인이 생각보다 촌스럽다든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등의 불편함 때문에 환상이 깨졌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1992년 이후 대부분의 중,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사복 아닌 교복을 착용하게 된다.[3] 대략 1990년대 후반이 되면 교복 착용률이 90%대에 달하게 되었고 이러한 추세는 2000년대까지 유지되었다가 2010년 지방선거에서 진보교육감이 집권한 이래 다시 교복을 폐지하는 학교가 늘어나서 교복 착용률이 점차 줄고 있는 추세지만 여전히 1991년 수준을 넘는 수치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일부 학교는 지금도 사복 착용을 유지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1980년대 말에는 지지부진했던 교복부활이 1990년대 초반에 단박에 진행된 이유로는 1990년에 경상수지가 다시 적자로 돌아섰고 이에 당국과 언론에서는 당장 산업구조를 재편하는 것은 어려우니[4] 과소비는 안 된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면서 소비억제 캠페인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억누르려고 했기 때문에 당대의 기성세대에서 그 영향을 받은 측면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5] 그러나 교복이 부활되었다고 해도 당시는 에어컨을 여름에 잘 틀어 주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기껏 부활시킨 교복이 오히려 더 불편한데다가 안 그래도 체벌이 일반적인 시대인데 거기에 더해서 학생들 옷차림 가지고도 체벌을 하니까,[6] 학생들의 원성이 자자하기도 했고[7] 청소년층에서 교복부활에 대한 반발 여론이 만만치 않아서 교실 이데아DOC와 춤을...이라는 노래가 대히트를 치기도 했다.

그러나 재미있는것은 교복부활이 되었다고 해서 학부모들의 부담이 완전히 경감되었던것은 아니었다는것이다. 우선 일선 학교에서 교복점과의 유착과 담합과 리베이트를 통해서 교복값을 비싸게 청구하는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도 교복시장을 대기업들이 주도하게 되면서 이들 대기업제 교복이 광고비를 대규모로 써재끼고, 교복의 고급화를 명분삼아 교복값을 비싸게 책정했기 때문이었으며, 학교내에서 사복으로 멋을 부릴수 없게 된 학생들이 대안으로 대기업제 브랜드 교복을 선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이미 1990년대 중후반부터 교복의 가격이 성인 정장보다 훨씬 비싸지는 부조리가 발생했던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교복값이 비싸다는 학부모들의 원성이 자자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진것은 교복 부활을 문교부에서 권장은 했지만, 교복 채택여부는 일선학교에서 알아서 하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에 책임소재가 분산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교육부나 교육청, 일선학교에서 교복업체 및 교복점과 유착관게를 맺은 경우가 비일비재하여서 교복값 단속을 설렁설렁하는 경우도 허다했고, 이것이 교복값 인상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요인이었다, 그래서 학부모의 반발로 사복을 다시 착용하게 된 몇몇 학교도 있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이러한 학생과 학부모들의 불평불만에도 어영부영하는 식으로 교복을 착용하였다가, 2010년대 중반부터는 생활복으로 변경되어가고 있는 추세이고, 2010년대 중반 이후로 복지확대 명목으로 교복비 지원이 확대되면서 이전보다는 교복비 부담이 줄어들기는 했다. 다만 교복 자체가 생활복으로 대체되어가는 추세인데도 생활복 지원은 법제도의 허점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다만 교복점이나 업체에서 뒷돈 쳐먹는것은 여전하지만

교복부활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두발규제도 강화되어[8] 상당수 학교에서 여학생은 단발, 남학생은 스포츠머리로 확일화시키기도 했으며, 몇몇 학교는 아예 신발, 양말, 악세사리, 속옷 같은 개인 소지품까지도 규제하였다. 당시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히트를 치면서 음악시장이 트르트 위주에서 청소년 위주로 재편되고 있던 시점이었는데 이 상황에서 최신 헤어스타일을 향유하고 싶었던 청소년과 1980년대 중반 이전식의 빡빡머리를 선호했던 당대의 학부모 세대와[9]의 세대갈등이 큰 이슈가 되었다. 이런 사회적 갈등에다가 사회 전반이 자유화, 문민화되어가고 있는데 유독 학생들의 복장을 구시대로 돌려보내는건 부당하다는 청소년들의 반발 여론도 만만한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쟁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대까지도 이러한 논의가 학력논쟁에 밀려서 지그재그로 맴돌기만 했었고, 이 당시에 학생회장 선거에서 교복 폐지랑 두발자유화 공약을 내걸어도 교장의 권위가 너무 강해서 좌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10] 당시의 청소년들이 학부모가 되고 2010년과 2014년 지방선거에서 진보교육감이 대거 당선되고 민주당과 진보정당이 광역의회 과반을 차지한 지자체에서 학생인권조례안이 통과되면서 학생들의 두발과 복장에 대한 단속이 줄거나 폐지되기 시작하기 전까지 이러한 추세는 지속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이때의 교복부활 및 두발규제 강화를 겪은 세대들이 학부모가 되면서 교사들의 지위가 낮아졌다는 것이다. 즉, 당시 교사의 권위를 강화하겠다고 두발규제 강화 및 교복부활을 시킨 것이 오히려 학생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주면서 학부모의 고학력화와 함께 장기적으로 교사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역설적인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2. 관련 기사[편집]



3. 같이 보기[편집]


  • 교복
  • 영심이 - 교복자율화 시절이 무대인 애니메이션
  • 응답하라 1988 - 작중 배경인 쌍문고등학교가 교복을 착용하였지만, 쌍문여자고등학교는 사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교복이 부활하는 과도기를 잘 표현하고 있는 셈.
  • X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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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두발자유화였다고는 해도 규제가 아예 안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예를 들면 여학생은 파마와 염색 불가, 남학생은 장발 불가) 상당수 학교에서는 바리캉이 여전히 잘만 돌아다니기는 했다. 1990년대에 대다수 학교에서 여기에서 염색 금지가 추가되었고 이 상태가 대략 2000년대까지 이어졌다.[2] 한국산 TV 애니메이션이 나온 게 1987년의 일로 이전이나 이후나 일본 애니는 아동용 위주지만 잘만 방송되었고 일본 만화나 일본 게임도 해적판으로 많이 들어왔다. [3] 단, 위의 설명대로 교복부활은 각 학교마다 결정하도록 했고 특히 주요 명문학교들도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교복을 착용하면서 이를 타 학교에서 따라한 데다가 1992년은 교복 착용을 허용하는 수준에서 권장하는 쪽으로 바뀐 것이었기 때문에 같은 지역임에도 학교별로 교복부활 시점은 다른 경우도 많았다. 대체로 1992년 정도면 상당수의 학교에서 부활했지만 몇몇 학교는 1995, 6년까지도 사복 착용을 유지하다가 이후에 바뀌기도 하였다.[4] 당시 한국의 산업구조를 보면 기초기술력이 허약했던 시절인지라 원자재와 부품을 외국에서 사들인 다음에 한국에서 조립해서 해외에 수출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이 당시 한국이 수출을 늘리는 방식으로 경제성장을 했음에도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면치 못한 원인이었다. 이러한 경제구조는 1997년 외환 위기로 경제구조가 개편되기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5] 물론 과소비 억제 캠페인을 했다고 해서 경상수지 적자 문제가 단박에 해결된 것은 아니었기는 했고 경상수지 적자 문제가 해결된 것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의 일이었다. 이러한 과소비 억제 캠페인은 금모으기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2000년대 초반까지는 잘 먹혀들었다. 하지만 경상수지 흑자가 장기화되어 외환보유고가 크게 불어났음에도 경제성장률과 직장안정성이 그 이전 시대에도 못미치는 현상이 발생했고 결국 1997년 외환 위기 당시의 경제관료들의 무능한 대처와 외환위기가 닥쳐오는데도 눈 가리고 아웅했다가 외환위기가 와서도 반성은 회피한 채로 과소비 타령에 집중했던 언론의 태도가 재조명되면서 과소비 방지 캠페인이 이 당시 경제관료들이 자기들의 무능을 눈 가리고 아웅하면서 회피하는 정책으로 재평가받게 되었다. [6] 사실 교복자율화 시대에도 교문검사는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에 당대에 만들어진 달려라 하니, 천방지축 하니 등의 작품에서도 교문검사 장면이 멀쩡히 나오지만, 그래도 고가 의류나 튀는옷을 입고다니지 않으면 빡빡하게 굴지는 않았다. 다만 두발검사는 명색이 두발자유화 시대였음에도 빡빡하게 진행하는 경우는 많아서, 머리가 좀 길다싶은 학생들의 머리카락은 가위와 바리캉으로 밀어대는 경우는 많았다.[7] 1992년 YMCA에서 시행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교복착용에 불만을 표한 경우가 대다수로 나왔을 정도로 이미 당시 청소년들 사이에서 교복부활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국민학교에서도 교복을 착용한 학생들이 편의성이 좋지 않다며 불만을 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국민학교는 교복 착용이 정착되지는 못했지만 중, 고등학교는 교복착용이 정착된것이 중대한 차이점으로 작용했다. [8] 사실 명목상 두발자유화가 이루어진 1982년~1985년에도 길이와 파마, 염색 단속은 할수있게끔되어있기 대문에 이를 빌미삼아서 머리가 길다 싶거나 파마, 염색을 한 학생들에게 바리깡을 휘두르는 학교는 많았었고, 1985년부터는 학교에서 아예 머리모양 자체도 단속할수있게 지침을 내렸다. 그래서 1980년대 중반~90년대 중반의 상문고등학교처럼 옷은 사복이지만 머리는 반삭으로 다니던 사례들도 있었다.[9] 재미있던 사실은 당시의 학부모 세대들(1940년대~1950년대생) 가운데서 적지 않은 수가 젊은 시절에는 당국의 단속을 피해서 장발을 했던 경우가 비일비재했다는 것이다. 돈이 든다는 이유로 두발규제 찬성 쪽으로 기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낀 돈을 과외와 학원비로 쓰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과도한 사교육비가 대물림되면서 결국 애를 안 낳아서 연금을 받는 것조차도 불안해지니 이것도 희대의 돈낭비가 된 셈이다.[10] 당시 2001년, 2002년 수능과 수능등급제로 아직 영향력이 강했던 조중동을 비롯한 주요 언론에서 교육부를 물어뜯어서 이해찬 세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교육부의 권위가 반복적으로 실추되는 상황이었다. 그러하니 국민의 정부참여정부가 탈권위주의를 지향했다 한들 교육부 차원에서 교복폐지 및 두발자유화를 자신감 있게 추진할 수 있던 상황은 아니었고 이 때문에 교육현장에서 교복부뢀을 재추진했던 인사들의 입김이 여전히 강하게 발휘되었다. 2000년에 두발자유화 시위가 크게 일어나자 두발규제 완화를 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 단순히 길이 규제가 완화되는 선에 머물렀고, 이마저도 흐지부지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박정희 때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을 시행하거나 전두환 때 교복이 폐지되었어도 반발이 적었던 것은 이들의 성향이 이때 진보적이라기보다는(사실 젊은 시절에 신민당과 신한민주당, 통일민주당 등 민주당계 정당을 지지하는 사례는 많았는데 3당 합당 이후 1960년대 이전 생이나 강남과 PK지역은 점차적으로 보수정당 지지층으로 흡수되는 양상이었다.) 어디까지나 독재정권 때라 잘못 보이면 찍힐 수 있었기 대문에 마음에 안 들어도 교육계 인사들이 당국에게 굽신거릴 수밖에 없던 상황이라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