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 제7번(쇼스타코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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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작곡 과정
3. 악기 편성
4. 곡의 형태
4.1. 1악장
4.2. 2악장
4.3. 3,4악장
5. 초연과 출판
6. 평가
7. 여담



1. 개요[편집]


정식 명칭: 교향곡 제7번 C장조 작품 60 ('레닌그라드')
(Sinfonie Nr.7 C-dur op.60 ("Leningrader")/Symphony no.7 in C major, op.60 ('Leningrad'))


"내 생각에 비평가들은 내가 라벨의 《볼레로》를 베꼈다고 헐뜯을 것이다. 뭐 그러라고 하지. 전쟁이 내 귀에는 이렇게 들리는 걸."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의 일곱 번째 교향곡으로 그의 교향곡 중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이다.

작곡 시기가 독소전쟁의 발발과 레닌그라드포위, 모스크바함락 위기 등 독일이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종종 '반파시즘 의사를 강하게 내비친 교향곡'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쇼스타코비치 자신은 이 곡에 '레닌그라드' 라는 이름을직접 붙이지는 않았는데, 그럼에도 워낙 유명해진 탓에 암묵적으로 '레닌그라드 교향곡'으로 통용되고 있다.


2. 작곡 과정[편집]


레닌그라드는 쇼스타코비치의 고향으로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를 포위하던 초기에도 아직 이 도시에 살고 있었다. 전쟁 초반 소련군의 전황은 매우 어려웠지만 쇼스타코비치는 군인으로 징집되는 대신 방공 감시원 겸 의용 소방대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1]

원래 쇼스타코비치는 독소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블라디미르 레닌을 주제로 한 교향곡을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면서 작곡 방향을 바꾸어야 했다. 곡의 전체적인 초안은 1941년 7월에 마무리되었고 기록에 의하면 1941년 8월 29일 1악장을 완성했고 9월 17일에 2악장을 그리고 3악장을 10월에 마무리했다. 4악장 작곡을 착수하려던 와중에 쇼스타코비치의 가족은 소련당국의 명령으로 레닌그라드를 떠나 모스크바로 떠났다.[2] 하지만 전쟁의 와중이었기 때문에 모스크바에 바로 도착하지는 못했고 10월 22일 쿠이비셰프(현재 사마라)에서 다섯 달 정도 머물러야 했다. 이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은 이 쿠이비셰프에서 12월말 경에 완성되었다.

다만 출처와 신빙성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솔로몬 볼코프가 구술했다는 '증언' 에서는 공식기록과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데, 독소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 곡에 대한 구상이 이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되어 있다. 덧붙여 증언에는 쇼스타코비치가 `히틀러는 분명 악질 범죄자이지만 스탈린이라고 해서 딱히 다를 바가 없다. 이 곡을 레닌그라드'라고 부르는 데는 동의하지만 `히틀러에게 점령된 레닌그라드'가 아니라 `스탈린이 이미 철저히 파괴한 것을 히틀러가 재차 타격한 레닌그라드를 애도하고자 한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되어 있다. 즉 증언에 따르면 이 곡은 히틀러와 독일군뿐만 아니라 스탈린도 마찬가지로 비판하고 있는 셈인데, 소련 붕괴 직전까지 서방에서 이 곡을 연주하기 위한 일종의 명분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한편 쇼스타코비치는 처음에는 이 교향곡에 악장마다 부제를 붙였는데, 제 1악장은‘전쟁’, 제 2악장은 ‘회상’, 제 3악장은 ‘조국의 광야’, 제 4악장은 ‘승리’로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곡 해석에 선입견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후에 이 부제를 삭제해 버렸다. 다만 교향곡을 완성한 후 악보의 첫 장에 "이 교향곡을 레닌그라드 시에 헌정한다" 라고 기록했다. 소련 당국은 쇼스타코비치를 라디오방송에 직접 출연시켜 육성으로 교향곡을 작곡중이라는 사실을 발표하게 했는데, 당시 쇼스타코비치가 직접 이 교향곡을 레닌그라드에 바친다고 이야기하면서 피아노로 교향곡 일부를 연주하는 영상이 남아 있다.[3]

교향곡 자체는 12월 말에 완성되었으나 전쟁으로 연주회 준비가 원활하지 못했던 탓에 초연은 석달이 지난 1942년 3월 5일, 쿠이비셰프의 문화궁전 강당에서 사무일 사모수드가 지휘하는 볼쇼이 극장 관현악단의 연주로 이루어졌다. 당시 사모수트는 교향곡에 스탈린 찬가를 추가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쇼스타코비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3. 악기 편성[편집]


악기 편성은 4번과 쌍벽을 이룰 정도의 대편성인데, 다음과 같다:

플루트 3(2번 주자는 알토플루트를, 3번 주자는 피콜로를 겸함)/오보에 2/코랑글레//클라리넷 3(3번 주자는 E♭클라리넷을 겸함)/베이스클라리넷/바순 2/콘트라바순/호른 8/트럼펫 6/트롬본 6/튜바/팀파니/심벌즈/스네어드럼(1악장에서는 가능하면 세 대)/베이스드럼/탐탐/트라이앵글/탬버린/실로폰/하프 2/피아노/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여기에 현 파트는 최소 16-14-12-10-8 스펙, 최대 20-18-16-14-12 스펙으로 인원 지정이 되어 있다.


4. 곡의 형태[편집]


5번에서처럼 다시 고전적인 형태의 4악장 형식으로 회귀한 모습인데, 느린 악장이 3악장에 간 것도 꽤 비슷하다. 하지만 3악장과 4악장은 끊이지 않고 계속 연주되며, 1악장이 굉장히 거대한 표제음악 스타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4.1. 1악장[편집]




1악장은 현악기들이 동음(유니즌)으로 연주하는 주제로 바로 시작되고, 이 주제를 변형하고 확장시키며 진행한 뒤 약간 템포를 당겨서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서정적인 두 번째 주제로 이어진다. 이 주제는 수시로 바뀌는 박자와 함께 오보에 솔로나 첼로와 콘트라베이스 합주, 피콜로 독주, 바이올린 독주 등으로 이어지면서 조금씩 변형되고 확장된다.

두 주제의 제시가 마무리되면 스네어드럼이 매우 여리게 행진곡 스타일 리듬을 연주하기 시작하는데, 이 리듬을 배경으로 현악기들이 일반적인 활긋기(아르코)와 피치카토(현을 손가락으로 뜯기), 콜레뇨(나무활대로 현을 긋거나 치기)로 나뉘어 새로운 주제를 슬그머니 도입한다. 이 주제는 소련 측 해석으로 '전쟁의 주제' 라고 하며, 독일군이 서서히 소련 땅으로 침입하는 모습을 묘사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악보에는 이러한 해석이 쓰여져 있지 않으니 주의.[4]

이 주제는 피콜로와 플루트, 오보에, 바순, 코랑글레, 트럼펫과 트롬본, 피콜로클라리넷과 코랑글레, 바이올린과 비올라,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첼로+콘트라베이스+호른 식으로 악기 편성을 달리하며 끈덕지게 이어지는데, 라벨볼레로를 벤치마킹한 대목이다. 물론 스네어드럼의 기본 리듬은 변하지 않은 채로 음량만 서서히 크게 하며 이어지고, 현악기가 넘겨받을 즈음부터 전체적인 음량도 계속 커지도록 되어 있다.

해당 주제를 첼로+콘트라베이스+호른으로 이어받고 나면 다른 타악기까지 가세하면서 전체 관현악이 장대한 음향으로 연주하는데, 여기서부터는 스네어드럼 주자를 두 명씩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관현악의 금관 주자들 외에 별도 편성된 금관 주자들까지 더해지고, '전쟁의 주제' 를 다소 희화화하는 불협화음이나 반음계 진행으로 구성된 부가 선율이 덧붙는다.

이 주제가 계속 반복되나 싶을 즈음 단조로 분위기가 급변하는데, 스네어드럼의 리듬은 여전히 변화 없이 계속 이어진다. (이 대목부터는 악보에 가급적 세 대로 연주하라고 지시되어 있다.) 별도 편성된 금관 중 트럼펫이 연주하는 새로운 주제는 소련측 해석으로 '저항의 주제' 라고 하며, 독일군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소련군을 상징한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침공의 주제' 의 단편이 계속 끼어들면서 방해를 받고, 스네어드럼의 끈질긴 리듬이 멎은 뒤에는 곧이어 저음 현악기와 관악기, 베이스드럼의 묵직한 리듬과 함께 장송행진곡 스타일의 비장한 대목으로 넘어간다. 현악기들이 악장 첫머리의 주제를 상당히 변형시켜서 강하게 연주하며, 모든 금관악기들까지 가세하면서 매우 처절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저항의 주제' 가 심벌즈의 강타를 곁들여 마지막으로 강하게 연주된 뒤 텐션이 급격히 떨어지고, 첫 두 주제를 변형시킨 경과구에 이어 바순 독주가 두 번째 주제를 상당히 확장시켜서 연주한다. 뒤이어 첫머리의 주제가 다시 현악기에 의해 연주되는데, 다소 강직하게 연주된 초반과 달리 훨씬 부드럽게 연주된다. 제시부의 주제를 역으로 뒤집고 느낌을 달리 한 구성인데, 이어지는 종결부에서는 다시 '전쟁의 주제' 단편이 스네어드럼의 리듬을 타고 트럼펫으로 여리게 연주되면서 전투는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며 끝난다.


4.2. 2악장[편집]




2악장은 표준적인 템포의 ABA' 아치형 3부 형식 스케르초로, 다소 비대칭적이고 거대한 1악장과 확연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초반부에서는 바이올린이 중저음역 위주로 연주하는 약간 경쾌한 주제와 오보에의 부드러운 연주로 이어지는 두 번째 주제가 중심이 되며, 중간부에서는 박자가 3/8박자로 바뀌면서 피콜로클라리넷이 악기 특유의 빽빽 부는 고음역으로 연주하는 주선율과 이를 수식하는 저음 관악기/현악기의 선율이 위주가 된다.

하지만 중간부의 박자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수시로 바뀌며, 다소 단조로운 악기 편성을 보여주는 초반부와 후반부보다는 기복이 상당히 심한 편이다. 물론 1악장에서 보여준 엄청난 장대함과 폭발력을 보여주지는 않고 있고, 이내 초반부의 재현 격인 후반부로 이어진다.

여기서는 이전 교향곡들과 비교하면 이례적으로 초반부를 비교적 충실히 반복하고 있지만, 그대로 동어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주제에서 현악기의 반주 역할을 플루트와 알토플루트에게 주고 오보에가 연주했던 주선율은 베이스클라리넷 독주에 맡기는 등 악기 편성 변경으로 인한 음색의 변화 효과를 노리고 있다.




4.3. 3,4악장[편집]


고전 교향곡의 느린 악장에 해당하는 3악장은 목관악기들과 호른, 하프 두 대가 강하게 연주하는 코랄 스타일의 첫 주제와, 바로 이어지는 바이올린의 호소력 강한 러시아 정교회 성가풍 선율 위주로 구성된다. 상당히 강한 공간감을 느끼게 만드는 대목인데, 그래서인지 곡이 발표된 뒤 소련 정부가 '어머니 조국 러시아의 광활한 황야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라고 꽤나 민족주의적인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 두 주요 주제 외에도 플루트가 잠시 연주하는 서정적인 부주제도 활용되며, 바이올린이 부점 리듬을 계속 반복하는 이행부를 거쳐 중간부로 이어진다. 중간부에서는 템포가 보통 속도로 당겨지고 억센 행진곡조를 띄며 진행된다. 모든 금관악기들과 스네어드럼, 심벌즈, 팀파니도 더해지며 격렬한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흥분이 진정된 뒤에는 다시 바이올린의 민요풍 선율이 나오며 후반부로 진입한다.

이어 코랄 스타일의 첫 주제가 이번에는 상당히 약하게 재현되며, 비교적 긴 이행부를 거쳐 다시 민요풍 선율-코랄풍 주제로 역진행되는 두 번째 재현부가 나온다. 하지만 여기서도 코랄풍 주제는 관악기가 아니라 현악기로 넘어가 연주되고, 이 대목이 끝나면 클라리넷 등의 짤막한 경과구를 거쳐 팀파니의 조용한 트레몰로를 그대로 유지한 채 4악장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악장은 현악기들의 다소 막연한 주고받기로 시작되는데, 이후 본격적으로 나올 주제들을 파편화시킨 악상들이다. 여기에 오보에와 호른 등의 관악기가 단편적인 팡파르풍 악상을 조용히 연주해 긴장감을 조성하며, 팀파니 트레몰로가 끝나면 저음 현악기들이 단호한 느낌의 첫 주제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이 주제가 중심이 되어 점점 격하게 전개되기 시작하고, 팡파르 단편도 트럼펫과 스네어드럼 등에 의해 격렬하게 전면에 나오면서 본격적인 투쟁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텐션이 가라앉으면 7박 단위의 경과구가 이어지는데,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는 현을 수직으로 들었다가 지판에 세게 튕기는 슬랩 피치카토(slap pizzicato)를 보여주기도 한다.

중간부에서는 보통 템포로 속도가 떨어지고 호른과 바이올린이 다소 근엄한 느낌의 새 주제를 제시한다. 이 주제는 이전의 발전부에서 추진력 있게 제시된 부주제를 변형시킨 것으로, 여기서도 또 파생되는 부주제를 가지고 아주 서서히 긴장감을 올리기 시작한다. 1악장의 스네어드럼 아이디어처럼 여기서도 같은 음형을 끈질기게 반복하며 음량을 키우는 아이디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1악장의 첫 주제가 금관악기들로 강하게 재현되기 시작하면서 매우 긴 종결부로 진입한다. 조성도 이 곡의 기본 조인 C장조로 확립되고, 감화음과 장화음 사이의 긴장감을 계속 밀어붙이면서 전체 관현악의 장대한 합주로 끝을 맺는다.

그 동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에서는 쓰이지 않았던 알토플루트가 들어간 것과, 무대 양 옆 또는 콘서트홀의 합창석에서 연주하는 추가 금관악기들이 편성되어 있는 것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 양상이다. 특히 이 곡에 추가되어 있는 금관악기들은 차이콥스키1812년 서곡이나 쇼스타코비치 자신이 훗날 작곡한 축전 서곡에서처럼 기존 금관악기 파트들을 강화하기 위해 보충된 것이 아니고, 관현악단의 금관 파트와 연주하는 악보도 대부분 달라서 생략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 때문에 몇몇 공연에서는 이 추가 금관악기들을 무대 밖으로 떼놓지 않고 무대 위에 그대로 배치하기도 한다.[5]

이 곡을 연주 스케줄에 올린 관현악단으로서는 웬만큼 대규모가 아닌 이상 별도로 기용해야 하는 연주자들 때문에 굉장한 예산 부담을 질 수밖에 없는데, 별도 지시는 없지만 목관도 금관이 상대적으로 비대하게 불어난 탓에 종래의 3관에서 5관으로 확대해 편성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탓에 작품성이나 유명세에 비해 연주 빈도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며, 러시아에서도 독소전쟁 승전 기념일이나 쇼스타코비치 탄생/사망 기념 무대 같은 이벤트성 연주회에서 주로 올리고 있다.


5. 초연과 출판[편집]


1942년 3월 5일에 쿠이비셰프에서 사무일 사모수드 지휘의 모스크바 볼쇼이극장 관현악단 연주로 초연되었는데, 이례적으로 소련 전역에 공연 실황이 라디오로 생중계되었다. 초연과 동시에 소련 언론들에서는 이 곡을 "파시즘에 대한 강한 저항승리의지를 담은 역작" 이라고 대서특필하는 논설들이 실렸고, 총보와 파트보는 초연 직후 소련 국립음악출판소에서 간행되었다. 출판 직후 이 악보들은 당시로서는 최신 소재였던 마이크로필름에 옮겨졌고, 이란을 경유해 영국미국 등 연합국에 전해졌다.

파일:Shostakovich(NYT).jpg
타임 표지에 실린 쇼스타코비치(1942년 7월 20일)

해외 공연은 같은 해 6월 29일에 런던에서 헨리 우드의 지휘로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BC의 프롬나드 콘서트(약칭 프롬스)에서 연주한 것이 처음이었고, 이어 7월 19일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지휘의 NBC 교향악단이 방송 연주회를 통해 미국 초연을 진행했다.[6] 이후 미국과 영국에서는 소련의 해석대로 '추축국에 대항하는 의미의 대작' 으로 여겨 엄청나게 자주 연주되고 방송되어 쇼스타코비치의 최대 인기작 지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타임(주간지)은 1942년 7월 20일 판에 쇼스타코비치를 표지에 실었다.

소련에서도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이 곡을 공연한다는 다소 무모한 아이디어를 짜냈는데, 8월 9일에 칼 엘리아스베르크의 지휘로 연주회가 열렸다. 엘리아스베르크는 당시 레닌그라드 방송 관현악단(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 교향악단)의 단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연주 가능 여부를 수소문했지만, 살아 남은 단원들은 불과 스무 명 남짓이라 이 대교향곡을 연주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에서는 군인으로 징집되어 전투에 참가하고 있던 이런저런 연주자들을 차출해 임시 휴가와 (당시로서는 매우 귀했던) 추가 식량을 미끼로 지급하면서 이 공연에 동원했다.

하지만 연주자들은 대부분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악기 연주가 매우 힘든 상태였고, 이미 아사 직전에 있던 몇몇 연주자들은 리허설 도중 쓰러져 숨을 거두기도 했다. 그나마 건강 상태가 좋았던 몇몇 연주자들도 곡이 너무 길고 어렵다며 연주를 거부하기도 했다. 엘리아스베르크는 레닌그라드 시에 '연주에 불성실하게 임하는 단원들에게 추가 식량 보급을 중단하라' 고 통지하는 등 강경하게 나갔고, 결국 이 곡의 연주를 반대하는 연주자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음악인들 외에 군인들도 여러 작전을 통해 지원을 벌였는데, 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이었던 레오니드 고보로프는 공연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레닌그라드 방어군의 화포 사격을 중단시켰다. 동시에 불이 환하게 켜지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홀이 표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공연 직전까지 대규모의 화력을 집중시켜 독일군의 폭격과 공격을 방지했다. 또 독일군 주둔지 방향으로 여러 대의 확성기를 설치해 공연 실황을 방송하는 심리전을 벌였고, 공연 직전에 특임대를 독일군 포병 진지에 잠입시켜 약 300문의 화포를 망가뜨리거나 훔쳐오게 했다. 공연은 비록 음악적으로는 매우 조야했지만, 맥없이 죽어가고 있던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는 생존과 승리의 의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기회였고 공연 후 1시간이나 박수가 이어지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종전 후인 1964년과 1992년에는 레닌그라드 초연에 참가했던 생존 연주자들이 이 곡을 리바이벌하는 무대가 마련되기도 했다.

종전 후에는 추축국이었던 독일일본에서도 공연되었는데, 독일에서는 세르주 첼리비다케 지휘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1946년 12월 21일에, 일본에서는 우에다 마사시 지휘의 도호 교향악단(현 도쿄 교향악단)이 1950년 5월 17일에 각각 처음 공연했다.

또 독일에서는 1990년 동서독이 통일한 지 8개월 여 지난 1991년 6월 22일에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에서 이 곡이 역사적 의미로 연주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독일의 청소년 관현악단인 융에 도이체 필하모니에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현악 단원들이 가세한 형태의 악단이 구 소련 출신 지휘자 루돌프 바르샤이의 지휘로 공연했는데, 독일군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시작된 독소전쟁 개전 50주년을 맞이해 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연주회 형태로 개최되었다. 공연 전에 청중들에게 전곡이 끝나더라도 바로 박수를 치지 말고 희생자들을 위한 묵상의 시간을 잠시 갖자는 안내 방송이 나왔고, 실제로 4악장 종료 후 약 10여 초 가량 묵상이 이루어진 뒤에 박수가 이어졌다. 이 실황은 스웨덴 음반사인 비스(BIS)에서 CD로 출반되었다.

한국에서는 훨씬 늦게 소개되었는데, 2000년 8월 31일에 드미트리 키타옌코가 지휘한 KBS 교향악단이 쇼스타코비치 사망 25주기 추모를 위해 무대에 올린 것이 첫 공연으로 기록되었다.


6. 평가[편집]


전쟁 당시부터 이 곡의 인기에 반감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미국의 작곡가이자 음악 평론가였던 버질 톰슨(Virgil Thomson, 1896 – 1989)은 이 곡에 대해 "방대한 규모에 비해 지루하고 음악성이 떨어지고 산만하다'라고 혹평했으며 "쇼스타코비치가 계속 이런 선전 음악을 만든다면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 그가 갖고 있던 위상도 추락할 것'이라는 후속타까지 날렸다. 한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도 지인들과 미국 초연을 라디오로 들은 후 '자, 그럼 차나 마십시다' 라고 하면서 무시했다. 당시 미국에 망명해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던 헝가리 작곡가인 벨라 바르톡도 이 곡을 소련 체제에 대한 아첨을 일삼는 곡으로 여겨 싫어했다고 한다. 심지어 만년의 대표작인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4악장에서 '전쟁의 주제' 를 야유하듯 변형시켜 인용했을 정도.[7]

칭찬이건 비난이건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은 일단 발표된 후 전쟁의 분위기를 타고 큰 인기와 관심을 끌었지만 작품의 이미지가 너무 전쟁에 맞춰진 탓에 종전 후에는 관심도가 많이 떨어졌다. 종전 후 공산국가와 자유진영간의 냉전이 이어지면서 서방 측에서는 이 곡에 대한 열광이 사그라들었고, 소련에서도 그의 9번 교향곡이 소련 집권층의 기대를 폭삭 무너뜨리면서 다시 탄압받는 신세가 되는 바람에 그의 많은 곡이 금지곡으로 묶였다. 그나마 이 7번 교향곡은 워낙 대내외적으로 걸작이라고 선전한 작품인 만큼 연주 금지까지 되지는 않았다.

그나마 쇼스타코비치에 특별한 애정이 있었던 레너드 번스타인이 1960년대 초반에 이 곡을 연주해서 음반으로 남기기도 했다. 번스타인/시카고 교향악단의 교향곡 7번 연주[8] 1992년 소련체제가 붕괴된 이후 2차대전 당시 만큼은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다시 관심을 받기 시작했으며 2005년에는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의 기록 영화들에 이 곡의 연주를 더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되어 상영되기도 했다. 21세기 현재 이 교향곡은 2차대전 당시 희생당한 소련인들을 상징하는 일종의 진혼곡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2차대전과 관련된 러시아 내의 각종 기념/추모행사에서 종종 연주되고 있다.

다만 전술한 것처럼 쇼스타코비치 사후인 1979년에 간행된 '증언'으로 인해 이 곡에 대한 기존의 친소비에트적인 해석 대신 반 스탈린 및 반 체제적인 작품이라는 해석도 대두되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 '증언'의 내용도 이런저런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증언의 이야기를 그대로 신뢰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현재는 작품 외적인 논란을 배제하고 좀더 순음악적으로 접근하거나 '특정 체제나 이념을 넘어 전쟁 자체의 참상을 표현한 작품'과 같은 절충적인 해석을 내놓고 있다.

작품의 화제성과 별도로 음악적인 관점에서만 봤을 때 이 교향곡은 대중들을 향한 프로파간다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인만큼 특유의 의외성이나 실험적인 수법을 자제하는 대신 통상적이고 무난한 작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또한 연주시간이 상당히 길지만 복잡하고 난해한 전개보다는 반복과 강조를 통해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때문에 7번 교향곡은 스탈린 시기에 작곡된 다른 교향곡과 비교해서 작품성 측면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런 평가들은 어디까지나 기법적인 측면만 주목해서 나온 것으로 이 교향곡이 딱히 주목할 요소가 없는 평작은 결코 아니다.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현란한 관현악법과 신랄함은 이 작품에서도 여전하며, 특히 각 악장에 등장하는 주제들이 상당히 직관적이고 인상적이어서 귀에 착 감기는 매력이 있다. 이 때문인지 대편성 관현악 구성이 용이해진 21세기부터 다시 이 교향곡의 연주빈도가 늘어나고 있다.

7. 여담[편집]


  • 상대적으로 다른 음악 장르보다 어렵고 난해해 보이는 클래식과는 담쌓고 지낼 만한 덕후들에게도 본의아니게(?) 이 곡이 친숙해질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다. 바로 애니화된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중 '사수자리의 날' 편에서 1악장이 자주 인용되면서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인데, 덕분에 크로스오버 콘서트였던 '스즈미야 하루히의 현주' 에서도 1악장의 '전쟁의 주제' 대목을 편집한 축약판이 무대에 올랐다.

  • 폐쇄적인 북한에서도 이 곡은 꽤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특히 2005~06년 사이 로동신문 등을 통해 북한 유일의 서양식 관현악단인 조선국립교향악단이 이 곡의 1악장을 연주했다는 기사가 꽤 많이 떴고, 결국 2005년에 김호윤 지휘의 같은 악단이 이 교향곡의 전곡을 녹음한 CD가 나왔다. 북한에서 외국 클래식 작품만 담은 CD로는 최초라고 하는데, 다만 북한 한정이나 마찬가지고 외국에서는 일본이나 중국 외에는 정식 구입도 힘든 상태라고 한다. 일본 쇼빠들의 평으로는 연주와 녹음 상태도 그리 좋지는 않은 모양. 참조

  • 4악장의 일부분을 샘플링한 곡 중 독일 가수 Peter Fox의 Alles neu가 현대카드 CF BGM으로 사용되었고, 브라운아이드걸스의 Sixth Sense, 폴 아웃 보이의 The Phoenix에도 같은 부분이 샘플링되면서 국내 대중들에게도 인지도가 높아졌다.

  • 심야괴담회의 에피소드에서도 레닌그라드 교향곡이 망자의 벨소리로 등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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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시사 주간지인 타임의 표지로 실려 유명한 쇼스타코비치의 그림은 이 시기의 것으로, 의용 소방대원 헬멧을 쓴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2] 레닌그라드의 독일군 포위망이 일시적으로 뚫렸을 때, 소련 정부는 레닌그라드에 남아 있던 고위층과 주요 인사들에게 피난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인지도 가 낮은 이들은 여전히 도시를 지켜야 했는데, 쇼스타코비치의 애제자였던 벤야민 플라이쉬만은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전사하고 말았다.[3] 당시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소련인들을 독려하기 위한 선전 영상이라는걸 감안해야 된다. 쇼스타코비치가 라디오에 출연했을 당시에는 아직 2악장까지만 완성된 상황이었다.[4] 순음악적으로는 당시 독일에서 인기가 있었던 프란츠 레하르의 오페레타 '유쾌한 미망인' 에 나오는 선율과 비슷하다는 분석도 있다.[5] 서울시립교향악단이 2010년 2월에 예술의 전당에서 스테픈 애즈버리 지휘로 이 곡을 연주했을 때 이러한 방식으로 공연한 바 있고, 위에 링크된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마찬가지다.[6]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토스카니니가 자신의 곡을 멋대로 주물러댔다며 그의 연주를 매우 싫어했고, 토스카니니도 말년에 이 곡이 어땠냐는 질문에 '그 땐 내가 미쳤던 것 같다'고 부정적으로 답했다. 실은 연습 시간도 부족해 지휘자와 연주자 모두 곡에 대해 완벽히 파악하지 못한 채 연주해야 했다. 이 연주는 음반으로도 출시되었지만, 좋은 평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7] 다만 바르톡과 친분이 있었던 피아니스트 샨도르 죄르지의 증언에 따르면, '전쟁의 주제' 자체가 아닌 그 주제와 유사한 레하르의 오페레타 멜로디를 패러디하는 과정에서 와전된 이야기라고도 한다. 바르톡의 아들 페테르 역시 이 대목은 (히틀러가 좋아한 작곡가인) 레하르의 멜로디를 비틀은 것이었으며, 바르톡은 쇼스타코비치의 작품들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8] 들어보면 알겠지만 일반적인 7번 교향곡 연주에 비해 템포가 다소 느리고 분위기도 좀더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