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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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우성센터 소장, (전)푸른 아우성 대표
구성애
具聖愛 | Koo Sung-Ae


출생
1956년 2월 20일 (68세)
서울특별시
본관
능성 구씨[1]
가족
종조부 구용칠(1890~1924)
아버지 구광서(1911~1994)
배우자 송세경
슬하 1남
학력
연세대학교 (간호학 / 학사)
상명대학교 복지상담대학원 (아동·청소년상담학 / 석사)
종교
그리스도의 교회
직업
사회운동가, 성교육 강사, 기업인
링크
푸른 아우성 홈페이지

1. 소개
2. 생애와 사회활동가로서의 이력
3. 성교육 활동가로서의 활동
4. 이후의 활동



1. 소개[편집]


대한민국간호사 출신 사회운동가이자 성교육 강사, (현)아우성센터 소장, (전)사단법인 푸른 아우성 대표이다. 연세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하였다. 1998년 문화방송에서 <구성애의 아우성> 강의를 진행한 이후 네임드 성교육 강사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덕분에 세대를 불문하고 성교육=구성애라는 인식이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다.


2. 생애와 사회활동가로서의 이력[편집]


구성애의 아버지독립운동가이자 목회자인 구광서(具光書, 1911~1994)[2]이며, 외조부도 독립운동가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항렬자가 능성 구씨 25세 서(書) 항렬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마도 구성애는 능성 구씨 26세로 추정된다. 어린시절 초등학교 3학년 때 친하게 따르던 옆집 오빠(고교 2학년생)에게 성폭행을 당한 성폭력 피해자이기도 하다. 관련 인터뷰 기사

보통 성폭행 피해자들은 성에 관련된 것에 대해 혐오, 공포 반응을 일으키기 쉬운데 구성애 본인은 성에 대해 당당하고 객관적으로 마주하여 관련 사회적 문제에 대한 적극적 활동까지 보여주고 있다. 본인에게 가해진 불합리한 폭력을 이겨낸 인간승리 케이스.

이렇게 그녀가 과거 성에 대해 폐쇄적이고 잘못된 관념이 난무하던 시절에도 성폭력 피해를 극복하고 성교육 강사로까지 활동할 수 있었던 데는 그녀의 어머니의 영향이 대단히 크다. 구성애가 어린 나이에 성폭력 피해를 당했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당시의 다른 부모들과는 달리 구성애를 꼭 안아주면서 잘못한 것은 그 오빠이고, 구성애가 잘못한 것은 전혀 없다고 다독거려 주고 가해자를 직접 데려와서 구성애의 앞에서 사과를 받아냈다고 한다.

그야말로 모범적인 대처를 한 셈인데, 이 덕분에 구성애는 적어도 정신적인 성폭력 트라우마를 극복해낼 수 있었다. 또한 집에서 성적인 주제를 쉬쉬하기는 커녕, 자녀들 앞에서 진솔하게 대화하는 편이라 구성애 역시 성에 대한 터부를 느끼지 않고 자랐다고 한다.[3]

이러한 어머니로부터의 영향을 구성애는 자서전을 통해 밝혔는데 그 자서전 제목도 어머니가 자신이 성폭행 피해를 당했을 때 해준 말인 <니 잘못이 아니야...> 이다. 네이버 책 소개

그러나 정신적 후유증과 신체적 후유증은 별개였다. 성장하고 나서 월경을 시작하자 그녀는 극심한 생리불순에 시달려야 했는데, 주기가 불규칙했고 한 번 시작하면 3~4개월 동안을 하혈이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임신이 정말 어려웠고, 겨우 고생해서 가진 아이를 출산한 뒤에는 다시 생리가 멈추지 않더니 6개월 동안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하혈이 끝없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하혈, 한쪽에서는 수혈을 하는 나날이 계속된 끝에 결국 자궁을 들어내야만 했다. 결국 반평생을 고생한 셈이다. 아동 성폭행이 피해자에게 어떤 후유증을 남기는지, 왜 끔찍한 악행인지 알 수 있는 참담한 이야기이다. 또한 수영을 배울 때 물에 빠져 숨 막히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때 범행 당시 가해자가 자신의 입을 틀어 막았을 때 느꼈던 숨 막힘이 되살아나서 다시는 수영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피해로부터 한참 세월이 지난 후, 아이를 낳고 난 뒤에야 가해자가 자신 외에도 다른 아이들에게 같은 범행을 여럿 했다는 사실과 그런 그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진지하게 살인 계획까지 세웠었다고 한다.

대학에 입학한 후 구성애는 사회 참여적 성격이 강한 동아리인 총기독학생회(SCA)의 부회장을 역임하고, 농민학생연대활동에도 빠짐없이 참가하는 등, 농민운동가로서 사회참여 활동을 시작한다. 1979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부산직할시 일신기독병원에서 조산사 훈련[4]을 받는다. "병원에서 주사 꽂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한다.[5]

1980년에는 가톨릭농민회 활동가인 송세경과 결혼하는데, 이듬해 송세경은 부림사건에 휘말려 구속되게 된다. 2년 후 광복절 특사로 출옥하기까지 구성애는 남편을 구명하기 위한 활동에 전념한다. 하지만 오랜 투옥 생활과 고문으로 인해 생긴 남편의 PTSD 증세 등으로 인해 두 사람의 가정 생활은 파탄에 이르렀고, 수차례 가출을 시도하기도 한다. 노동 운동에 전념할 목적으로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하여 1년을 보내기도 하는데, 이 역시 남편의 동의를 얻지 않고 그러니까 이것도 가출 행한 일이라고 한다.


3. 성교육 활동가로서의 활동[편집]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면서 구성애는 병원에서의 경험을 살려 여성노동자[6]들에게 성지식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한 적이 있었고, 노동조합 차원에서 강의도 여러 차례 진행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계기가 되어 성교육 활동으로 방향을 잡아가게 된다. 즉,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다 우연한 기회에 성교육 강사로 활동 영역을 옮기게 된 것.

1998년 7월 22일, MBC '10시 임성훈입니다' 프로그램을 통해 3차례에 걸친 성교육 강의를 진행하였고,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강의수가 7회로 연장된다. 10월에는 '구성애의 아우성'(아름다운 우리 아이들의 성을 위하여)이라는 타이틀로 2주간 강의를 진행하는데, 밤 11시라는 편성시간에도 불구하고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유희열FM 음악도시에 <알고 싶어요>라는 코너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여 성에 대한 문답식 코너를 진행하기도 했다. 음도 청취자들에게 가장 인기있었던 코너 중 하나였다고...

이렇게 대중들에게 조금씩 유명세를 타다 2003년부터 포경수술 반대를 내세우기 시작하여 큰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주제가 주제다보니 10대 청소년들에게도 그에 대해 널리 알려지게 된다.[7] 10대들을 위한 성교육 저서인 구성애 아줌마의 아우성 시리즈등을 내기도 했다.


4. 이후의 활동[편집]


2012년 중순에는 TV에 출연하여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지지연설을 하였다. 진짜 여성인권을 챙길 수 있는 후보는 문재인뿐이라고 하였다. 구성애와 문재인의 인연은 위에 나온대로 부림사건의 피해자인 남편 송세경이 당시 변호인이였던 노무현과의 연도 있고 송세경과 문재인 당대표가 친구이기도 해서 연관되어 있다. 이 내용은 2015년 9월 25일자 진짜가 나타났다 문재인과 함께하는 추석특집 2탄에서 언급.

과거에는 아동·청소년의 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현재는 성인/부부의 성에 초점을 맞춘 강의[8]를 다수 진행하고 있다. 2012년 가을 구성애의 아우성 팟캐스트를 시작하여, 2013년 여름 1시즌을 마쳤다. 2014년 초에 휴식기에 들어가 있었다.

2013년 5월 25일, 6월 1일에는 MBN 속풀이쇼 동치미에 출연하여 청소년의 성교육 등에 대한 강의를 했다. 구성애의 성교육 강사로서의 명성을 보여주듯 종편 시청률로서는 놀라운 5%대의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2015년 4월 18일, 정영진 최욱의 불금쇼에 출연, 여성의 질에 대한 이야기와 남성의 몸을 생각하는 촉감 자위, 한국 성문화가 왜 타락했는지를 주장했다.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네티즌들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고 출연한 김영만이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리면서 네티즌들이 다음 타자로 구성애를 추천했다. 박진경 PD는 회의 단계에서 검토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단 마리텔이 종영되면서 구성애의 출연은 불발로 끝났다. 그런데 다시 시즌2가 시작되면서 출연가능성이 생겼다.

2016년 3월, 위기탈출 넘버원에 출연하였었다. 다만 당시 해당 내용이랑 발언이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위기탈출 넘버원/비판 및 문제점 항목 참고.

[1] 26세 회(會) 선(善)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2]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로,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서기를 지냈으며, 이후 빈민 운동가로 활동하였다.[3] 구성애의 10대 시절 친구 중 미군 병사와 연애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의 성경험을 구성애가 집에 와서 얘기하자 보통의 한국 어머니라면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질겁하며 아이를 혼낼 수 있었을텐데 구성애의 어머니는 담담하게 농담으로 맞받아쳤을 정도였다고 한다.[4] 조산사는 의료인 중 유일하게 간호사 면허 소지자만이 지원 가능한 직종으로 일정 기간의 교육과 훈련 등을 이수한 뒤 면허시험 응시 자격이 주어진다.[5] 이상의 내용은 팟캐스트 이이제이 구성애 인터뷰 편에서 언급한 내용[6]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노동자들의 인권은 바닥에, 성희롱이라는 개념조차 잡혀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성폭행사건도 비일비재했으나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7] 특히 큰 아들을 포경수술 시킨 것을 가장 후회한다고... 사실 구성애가 처음 간호사를 할 당시만 해도 의사들조차 무조건 포경 수술 하는 게 낫다는 입장이었다. 과거 한국인들의 위생 상태도 지금과 같지 못했고 미국의 영향으로 인해 포경 수술을 해야 좋은 것으로 여겼으나, 그 풍조를 제일 먼저 바꾸기 시작한 게 구성애라는 것.[8] 건강한 성관계가 강의의 주 내용이다보니 수위가 올라갈 수밖에 없어서, 지상파 강의에서는 한계를 느낀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케이블방송, 팟캐스트 등의 매체로 진출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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