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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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관료, 정치인.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1932년 5월 11일에, 경상북도 달성군 다사면(現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에서 태어났다.
2.2. 군인[편집]
대구농림중학교(39회)[4] 를 거쳐 1950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6월 대구성서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그러나 같은 달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갑종간부후보생에 지원했고, 육군종합학교(9기) 졸업 후 포병 소위로 임관하여 참전하였다. 1954년 미국 육군포병학교를 졸업하였고, 1961년 국학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제11보병사단 제55포병대대 대대장을 거쳐 1961년 제6군단 포병사령부(現 제6포병여단) 제993포병대대[5] 에서 대대장(중령)으로 근무하던 중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여 육군본부 점령에 기여하면서 '혁명 주체세력'으로 인정을 받았다.
2.3. 관료[편집]
1961년 충청남도경찰국장을 지냈고, 1962년 8월 21일부터 1963년 1월 12일까지 약 5개월간 제23대 전라남도경찰국장을 지냈다. 1963년 1월 12일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장으로 발령되었다. 1963년 12월 17일 대령으로 예편되었다.
이후 치안부이사관으로서 1964년 7월 8일부터 1966년 5월 1일까지 제19대 서울특별시경찰국장, 1966년 5월 2일부터 1968년 2월 22일까지 제29대 국립경찰전문학교 교장을 지냈다. 이 시기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고,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1968년 2월부터 1969년 10월까지 제15대 제주도지사를 지냈다. 제주도지사 재직 시절에 흔히 '5.16 도로'로 불리는 1131번 지방도를 신설했다. 1969년 10월 수산청장에 발령되었고, 1971년 6월 12일부터 1974년 9월 1일까지 제13대 경상북도지사를 지냈다. 이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1974년 9월 2일부터 1978년 12월 21일까지 제16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였다. 원래는 영등포-왕십리로 계획돼 있던 서울 지하철 2호선을 거대순환선으로 만든 사람이다. 특히 2호선 계획 당시, 구자춘 혼자서 말 그대로 지도에 연필로 줄 그어서 노선을 20~30분 만에 만들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나름 유명하다. 그의 계획은 영등포역 경유가 당시 기술상의 어려움으로 신도림역으로 바뀐 것 말고는 거의 그대로 실현되었다. 구자춘 시장은 포병 장교 출신이라서 지도를 보는 안목이 뛰어났기 때문에 이런 일화가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해당 이야기를 다룬 서적의 내용이다.
2월 초순의 어느날, 오전 11시 경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도시계획국장, 도시계획과장, 지하철건설본부장 등이 시장실로 호출되었다.
(중략)
구(자춘) 시장은 미리 준비해 둔 서울시 지도를 펴놓고 그들이 서서 보는 앞에서 지하철 2호선의 선을 그었다. 검은색 연필이었다. 종전에 정해져 있던 제2호선은 왕십리 ~ 을지로 ~ 마포 ~ 여의도 ~ 영등포였다. 그런데 구 시장은 마포, 여의도를 피하여 신촌 ~ 제 2한강교 ~ 당산으로 이었고, 그것을 더 연장하여 구로공업단지 ~ 봉천동 ~ 관악구청앞 ~ 사당동 ~ 서초 ~ 강남 ~ 삼성동 ~ 잠실 ~ 성수 ~ 뚝섬을 거쳐 왕십리로 이었다. 구도심(을지로) ~ 영등포 ~ 영동[6]
을 잇는 3핵의 연결이었다. 마포 ~ 여의도를 피한 것은 그의 전임 김현옥, 양택식 시장이 만든 것이었기에 구 시장은 여의도에의 새로운 투자는 피하는 눈치였다.(중략)
포병장교 출신답게 구 시장의 지도 파악력은 정확했다. "구로공단 앞은 통과해야 되겠지" "서울대 앞도 지나야 되겠지" 질문인지 독백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말들이 튀어나왔지만 누구 하나 발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 그렇게 선을 긋는 데 걸린 시간은 20분도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손정목 -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3권 발췌
실제로 이 노선을 완성하기 위해 실사로 나갔을 때, 기술력의 한계로 2호선 영등포역을 기존 역과 1km가 넘는 거리에 지어지게 될 예정이었고, 이렇게 되면 환승역의 의미가 없어지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당시 역간 거리가 꽤 길던 구로-영등포역 사이에 새 역을 짓기로 결정, 그로 인해 신도림역이 지어졌다.
한편 농촌이나 다름없던 강남을 2호선이 지나게 되면서 강남 개발이 가속화되었다. 그 이외에도 서울특별시 강북 지역의 명문고 이전, 반포동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건립, 금화터널 건설 과정에서의 독립문 이전, 한양도성 일부 복원, 도심부 주차장 확충 등을 추진하였다. 이런 그의 별명은 대표적으로는 황야의 무법자였다. 그 이외에도 몇 가지 별명이 붙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인 1978년 12월 22일부터 1979년 12월 14일까지 제38대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그리고, 10.26 사건 당시 육군본부 국무회의에도 참석했다.
2.4. 정치 규제[편집]
전두환이 집권하자 1984년까지 정치 규제를 당하였다. 이 시기 같은 능성 구씨 27세손인 42촌 형 구자경 회장의 배려로 럭키금성그룹 경영고문을 맡았다.
2.5. 정치 경력[편집]
1987년 김종필과 함께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부총재를 맡았다. 이듬해인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달성군·고령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이자 대구농림중학교 동기동창이던 민주정의당 이용택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임기 중이던 1988년 7월 12일 국회 추천 인사로 독립기념관 이사에 선임되었고, 1988년 9월 15일에는 한일의원연맹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90년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자 당적을 옮겼고, 그해 3월 19일 당무위원에 선임되었다. 3당 합당 후 치러진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 후보로 경상북도 달성군·고령군 선거구에 출마해 재차 통일국민당 이용택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1995년 김종필과 함께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여 부총재를 맡았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유력한 경상북도지사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출마하지 않았다.
2.6. 사망[편집]
국회의원 임기 도중이던 1996년 2월 8일, 의정보고회에 참석하기 위해 승용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곧바로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으로 이송되어 입원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이틀 뒤인 1996년 2월 10일, 심장수술을 받던 중 갑자기 혈압이 떨어져 결국 당일 저녁 향년 6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유해는 2009년 6월 30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2층 208실에 이장되었다.
3. 소속 정당[편집]
4. 선거 이력[편집]
5. 여담[편집]
- 달성군이 경상북도 소속이던 시절의 마지막 국회의원이다. 구자춘 사후 치러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달성군이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어 대구 선거구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6. 둘러보기[편집]
7. 창작물에서[편집]
[1] 대구역사문화대전[2] 능성 구씨 좌정승파(左政丞派) 절도사공계(節度使公系) 집성촌이다.[3] 좌정승파(左政丞派)-절도사공계(節度使公系) 27세 자(滋) 항렬.[4] 이용택 전 국회의원과 39회 동기생이다.[5] 2022년 10월 1일 부로, 제6군단이 해체되면서 그 예하의 제6포병여단도 함께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6] 여기서 말하는 영동이란 강원도 영동이 아니라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뜻의 영동(永東)이다. 이는 강남 지역을 일컫는데, 지금은 영동대교 외에는 잘 쓰이지 않는 말이다.[7] 1990년 민주자유당 합류(3당 합당)[8] 1995년 탈당 후 자유민주연합 입당
1996년 임기 중 사망
1996년 임기 중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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