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PC

덤프버전 :



[ 펼치기 · 접기 ]
구성
인사
여당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연립여당
자유민주연합 · 민주국민당
정책 및 방향
햇볕정책 · 대중참여경제론 · 일본 대중문화 개방 · 국민PC · 국립대학구조조정계획 · 전자정부 · 인사청문회 ·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 노사정위원회 · 국가인권위원회 · 경제자유구역 · 소프트웨어 산업 진흥법 · KAMD · 한국형 전투기 개발 추진 · 한국형 우주 발사체 개발 추진 · 한국형 무인 전투기 개발 추진
평가
긍정적 평가 · 부정적 평가 · 논란이 있는 평가 · 햇볕정책/평가
타임라인
1998년
1998년 재보궐선거 ·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휴민트 사건 · 일본 대중문화 개방 ·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 · 지리산 폭우 참사 · 여수 반잠수정 격침사건 · 정부대전청사 개청
1999년
제1연평해전 · 1999년 재보궐선거 · 1999 강원 동계 아시안 게임 · 국정원 출범 · 국민PC 보급 시작 · 국민연금 의무 가입 실시 · 인천 도시철도 1호선 개통 · 문화재청 개청 · BK21 · 신지식인 · 옷로비 사건 · 민주민족혁명당 사건 · 대한항공 8509편 추락 사고 ·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 · 대구 어린이 황산 테러 사건 ·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 2000년 재보궐선거 · 제1차 남북정상회담 · 6.15 남북공동선언 · 햇볕정책 추진 · 국정원 불법 도청 사건 · 진승현 게이트 · 의약 분업 · 새천년 NHK 사건 · 정현준 게이트 · 주한미군 독극물 한강 무단 방류 사건 · 추풍령 경부고속도로 연쇄추돌 참사 · 의문사위 출범
2001년
2001년 재보궐선거 · 제7호 태창호 사건 · 2001 한일 컨페더레이션스컵 · 이용호 게이트 · 여성부 출범 · 인권위 출범 · 테러방지법 파동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발족 · 육군 CH-47 올림픽대교 추락 사고 · 인천국제공항 개항 · 예지학원 화재 사고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2002년 재보궐선거 · 제16대 대통령 선거 ·2002 한일 월드컵 · 제2연평해전 · 이석기 검거 · 홍삼 게이트 · 최규선 게이트 · 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 · 2002 부산 아시안게임
2003년
1.25 인터넷 대란 · 대구 지하철 참사
별도 문서가 없는 평가 및 논란은 해당 주제 관련 문서를 참고
김대중 개인과 관련된 문서는 틀:김대중 참고






파일:정부상징.svg 역대 대한민국 정부의 주요 정책

[ 펼치기 · 접기 ]
이승만 정부
농지개혁법 · 국가보안법 · 한미상호방위조약 · 평화선 · 징병제 도입 · 반공포로 석방 사건 · 한국외국어대학교 · 인하공과대학 · 의무교육 · 남녀투표권 부여 · 지방자치제 · 국민방위군 창설
장면 내각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박정희 정부
새마을운동 · 율곡사업 · 백지계획 · 주민등록증 · 부가가치세 ·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 · 국민건강보험 · 월남 파병 · 예비군 창설 · 강남 개발 · 중앙정보부 창설 · 문화재보호법 · 1기 지하철 계획 · 국세청 설립 · 그린벨트 도입 · 국립공원 지정 · 국가기술자격법 시행 · 대덕연구개발특구 · 번개사업 · 국방과학연구소 · 경부고속도로 · 포항제철소 설립 · 울산정유공장 설립 · 자동차 산업 육성 · 한국수출산업국가산업단지 · 한국수자원공사 · 한국기생충박멸협회 · 원자력 발전소 설립 · 조선산업 육성 · 방위세 · 스크린 쿼터제 · 한국형 호위함 건조 사업 · 시민아파트 · 8.3 사채 동결 조치 · 금지곡 · 교련 · 한일수교 · 684부대 · 북악스카이웨이 · 남산타워 · 한국과학원 · 7.4 남북 공동 성명 · 방위병
전두환 정부
3S 정책 · 아시안 게임 유치 · 서울 올림픽 유치 · 2기 지하철 계획 · 남북한 아프리카 외교전 · 주택임대차보호법 · 학사장교 도입 · 평화의 댐 · 한국형 구축함 사업 · 행복추구권 · 장애인복지법 · 학력고사 · 연좌제 폐지 · 최저임금제 · 한국형 잠수함 사업 · 강원랜드 · 국제그룹 해체 · 자동차공업 통합조치 · 언론통폐합 · 보도지침 · 삼청교육대 · 폭력성 만화영화 금지 정책 · 야간자율학습
노태우 정부
범죄와의 전쟁 · 북방정책 · 1기 신도시 · 대학수학능력시험 도입 · UN 가입 · 남북기본합의서 · 토지공개념 3법 · 국민과의 대화 · 해외여행자유화 · 교련 폐지 · 한반도 비핵화 선언 · 인천 신 공항 추진 · 경부고속철도 · 자유로 · 송도신도시 · 대전 엑스포 유치 · KTX-2 · KLH · 지역 할당제 · 6.29 선언 · 국정감사 부활 · 서해안고속도로 · 새만금
문민정부
금융실명제 · 역사바로세우기 · 5.31 교육개혁 · 하나회 해체 · OECD 가입 · 도농복합시 · 중소기업청 · 정보통신부 설립 · 한일월드컵 유치 · 1~2차 FX 사업 · 도로명주소 · 청소년 보호법 · 불곰사업 · 한일어업협정 · 비정규직 도입 · 금산분리 · 공익근무요원 ·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법적 심판 · 부산신항
국민의 정부
전자정부 · 일본 대중문화 개방 · 햇볕정책 · DJ노믹스 · 동티모르 평화 협상 주도 ·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 노사정위원회 · 한국형 전투기 개발 추진 · 한국형 우주 발사체 개발 추진 · 국민PC · 국립대학구조조정계획 · 인사청문회 · 한국형 무인 전투기 개발 추진 · KAMD · 공인인증서 · 6.15 남북공동선언 · 소프트웨어 산업 진흥법 · 여성부 · 차기 호위함 사업 · 국가인권위원회 · 경제자유구역
참여정부
햇볕정책 · 비전 2030 · 행정수도 이전 · 2기 신도시 · 국방개혁 2020 · 주 5일 근무 제도 · 이라크 파병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 한미자유무역협정 · 호주제 폐지 · 전문하사 · 질병관리본부 · 종합부동산세 · 한국우주인배출사업 · 대학구조개혁 · 4대 개혁 입법 · 혁신도시 · 로스쿨 · 킬 체인 · 6자회담 · E-X · KHP · SAM-X · 교육행정정보시스템 · 수능 등급제 · 개인회생제도 · 국민참여재판 · 제주 해군기지 · 성매매 특별법 · 의학전문대학원 · 인터넷 실명제 · 현금영수증 · 인천대교 · 제3경인고속화도로 · EBSi
이명박 정부
4대강 정비 사업 · 5.24 조치 · 녹색 성장 · 국방개혁 307 · 평창 올림픽 유치 · 아덴만 여명 작전 · 2010 G20 서울 정상회의 · 한국장학재단 · 보금자리주택 · 의료분쟁조정법 · 협동조합기본법 · 번개사업 · 3차 FX 사업 ·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 독도 방문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 AH-X · L-SAM · 한국형 차기 구축함 · 셧다운제 · 아크부대 · 외규장각 반환 · 조선왕실의궤 반환 · 사증 면제 프로그램 가입 · 한EU FTA · 글로벌녹색성장기구 · 마이스터고등학교 · 미디어법 · UAE 원전 수출 · 종합편성채널
박근혜 정부
창조경제 · 초이노믹스 ·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 대체 휴일 제도 · 장기결석 아동 전수조사 · 청탁금지법 · 대량응징보복 · THAAD 배치 ·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 한일 위안부 합의 · 중국 전승절 참석 · 한미 원자력 협정 개정 · 한미 우주협력협정 · 국민안전처 · KC-X · 공무원 연금 개혁 · 2016년 개성공단 가동 중단 · 국정 교과서 · 테러방지법 · 전두환 추징금 환수 · 통진당 해산 · 파리협정 가입 · 중고 CH-47 도입
문재인 정부
적폐청산 · 탈원전 정책 · 남북러 가스관 사업 · 태양광 발전 지원 · 소득주도 성장론 · 혁신성장 · 한국판 뉴딜 ·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 신남방정책 · K-방역 · 3기 신도시 · 국방개혁 2.0 ·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 폐지 · 긴급재난지원금 · 문재인 케어 · 청년희망적금 · 대학기본역량진단 · 국민비서 · 항공모함 도입 추진 · G7 콘월 정상회의 참석 · 동맹대화 · 아르테미스 계획 참여 · 2019년 남북미정상회동 · 소·부·장 국산화 · 워리어 플랫폼 · 위수지역 폐지 · 고등군사법원 폐지 · n번방 방지법 · 인터넷 검열감시법 시행 사태 · 2019년 인터넷 검열 사건 · 안전운임제 · 출산육아지원정책 · 미라클 작전 · 홍범도 유해 봉환 · 생활SOC 복합화 사업 · 가덕도신공항
윤석열 정부
적폐청산 · 규제혁신 · 디지털플랫폼정부 · 과학방역 · 담대한 구상 · 북한방송 개방 · 대북 독자제재 · 국방혁신 4.0 · IPEF 가입 · 2022년 대한민국-폴란드 방산계약 · 행정수도 이전



1. 개요
2. 탄생 배경
3. 사양과 가격
4. 성공과 영향
5. 비슷한 사례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90년대 후반 국민의 정부 당시 PC 보급 사업의 일환으로, 1999년 10월 20일부터 2002년 이전까지 진행된 국민PC 사업으로 보급된 컴퓨터를 칭한다.# 다른 말로는 인터넷 PC라고도 한다.

당시 셀러론으로 무장한 100만원 짜리 컴퓨터는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고, 스펙 좀 타협한 고사양 PC도 120~150만원선에서 보급이 되었다.[1][2] 쉽게 말해 지금의 컴퓨터, 인터넷 대중화 특히 가정용 대중화에 한 획을 그은 사업이다. 100만원대 '국민PC' 나온다[3] 1990년대 후반까지 잘 나가던 PC통신에 쇠퇴기를 불러왔다.


2. 탄생 배경[편집]


국민의 정부는 1997년 외환 위기를 극복해야 했다. 그리고 극복 방안의 일환으로 거론된 것 중 하나가 IT 산업 집중 육성이었다. 그런데 IT 산업을 육성하려면 먼저 국민들이 정보화에 적응하는 것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일단 컴퓨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참고로 1990년대 초중반 당시 컴퓨터 보급 대수는 이전에 비하면 상당히 늘어나긴 했지만 실상을 보면 주로 회사나 학교에서 쓰던 업무용이나 교육용 컴퓨터였고[4], 가구보급률로 따지면 PC통신과 PC게임이 차차 보급되면서 일부 가정에서 여가, 오락용으로 쓰는 경우도 있었지만[5] 1995년 통계로도 여전히 30%대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6]

이렇게 보급률이 지지부진한 주요 원인은 역시 높은 진입장벽과 가격대였다. 1990년대 당시만 해도 다나와 같은 가격 비교 사이트도 없었고[7], 더군다나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기는 커녕, 인터넷이란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컴맹인 일반 대중들이 컴퓨터 하나 장만하려면 당시엔 당시 기준 200만원 내외 하던 대기업 브랜드 PC를 사거나 용산 전자상가처럼 관련 상가나 동네 PC 가게를 찾아가 조립컴을 사는 수밖에 없었는데, 조립컴의 경우 관련 물가에 대한 정보 접근성이 터무니없이 떨어지던 시절이니 운이 좋아 양심적인 업자를 만난다면 모를까 재수없으면 용팔이한테 걸려 돈은 돈대로 뜯기고 고장은 잦은 성능 구린 컴터 사는 호구되기 십상이었다. 이러니 일반 서민들은 컴퓨터 구입을 꺼릴 수 밖에...

그런 와중에 정부가 중소기업도 지원하고 국민들에게 가성비 좋은 컴퓨터도 보급할 겸 해서 입안한 정책이 바로 국민PC였다. 때마침 1997년 4월 1일 야간/할인시간정액제의 시행과 제2시내전화 업체로 선정된 하나로통신ADSL이라는 당시에는 획기적인 인터넷 망을 준비하고 있었고, 스타크래프트의 영향으로 PC방이 본격적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국민PC는 중소기업을 지원한다는 정책과도 맞물려 대기업의 입찰을 제한했기 때문에, 제조업체는 대부분 중소기업으로 총 12개의 업체가 선정되었다. 선정된 업체는 현대멀티캡, 세진컴퓨터랜드, 주연테크, 현주컴퓨터, 컴마을[8], 용산전자상가조합, 멀티패밀리 정보산업, 성일컴퓨텍[10], 세지전자, 엘렉스컴퓨터[11], iDOM엑스정보산업[13], PC뱅크[14]이며, 이 중 2022년 현재까지 남아있는 업체는 주연테크 뿐이다.


3. 사양과 가격[편집]


국민PC는 컴퓨터가 없는 사람들에게 컴퓨터를 저렴하게 쓸 수 있게 해주자는 것이 취지였기 때문에 본체 + 모니터 구성의 큰 본체 외에도 키보드, 마우스, 스피커, 운영체제(Windows 98 Second Edition[15]) 및 기타 소프트웨어를 함께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스피커는 지금이야 많이 저렴해져서 전자제품 매장 뿐만 아니라 다이소에서도 구매할 수 있고 심지어는 완제품 컴퓨터를 한 대 사면 덤으로 끼워주기까지도 하는 물품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돈을 내고 추가로 구입해야 되는 물건이었다. 국가에서 밀어준 브랜드인지라 판매를 우체국에서 담당했으며, 각 회사의 판매 대리점에서도 구입 가능했다.

사양은 크게 두 가지 모델로 나눠서 출시가 되었는데 펜티엄 3 카트마이를 장착한 고급형 모델, 멘도시노 셀러론을 장착한 보급형 모델로 나눠 출시되었는데 1999년 말에 출시된 뒤에 정부에서 2000년에 국민 PC의 성능 규격을 향상했다.#

그래서 당시 고급형 모델과 보급형 모델의 기본사양은 대체적으로 더음과 같았다.

  • 고급형 모델(기본 사양)
    • 메인보드: 인텔 440ZX, 440BX 혹은 VIA 693A 칩셋 메인보드[16]
    • CPU: 인텔 펜티엄 3 카트마이 450~600MHz[17]
    • RAM: SDRAM 64 ~ 128MB
    • HDD: E-IDE 15 ~ 30GB
    • ODD: 48 ~ 50배속 CD-ROM
    • 모뎀: 56kbps
    • 그래픽 카드:
      • NVIDIA RIVA TNT2 32MB (6개 업체에서 선택)[18]
        • 2000년 6월 이후 출시한 후기형 국민 PC의 경우 일부 제조사에서 GeForce 2 MX를 장착
      • 3dfx Voodoo 3 (일부 모델에서 채택된 사양이었다.)
    • 사운드 카드:
      • 메인보드 내장형
      • ESS/Crystal 칩셋 외장형

여기에 모니터키보드마우스OS와 기타 잡다한 프로그램이 딸려오는 식. 100만원 미만의 PC를 보급한다는 정부의 생각보다 비싸게 결정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격을 맞춰보았을 때 어느정도 성능도 내주고 업체의 마진도 적당히 챙겨주는 합리적인 가격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급형 모델의 유일한 단점은 64MB라는 RAM 용량으로, 당시 고사양 유저 기준으로는 약간 빡빡한 감이 있었기 때문에[19] 추가로 비용을 지불하고 128MB로 업그레이드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후 정부에서도 국민 PC의 사양 규격을 128MB로 상향했다. 때마침...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하지만 2001년 9.11 테러 이후 램값이 똥값이 되어 기존에 64MB로 사용했던 경우 128MB로 많이들 업글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0년 6월 이후 GeForce 2 계열이 출시된 뒤에 그래픽카드를 업그레이드 한 경우가 제법 있었다.

  • 보급형 모델(기본 사양)
    • 메인보드: 인텔 440LX[20], 440ZX, 440BX, 810 혹은 VIA 693A 칩셋 메인보드
    • CPU: 인텔 멘도시노 셀러론 300~500MHz (후기종은 코퍼마인 셀러론 766MHz)
    • RAM: SDRAM 32 ~ 64MB
      • 정부에서는 기본적으로는 64MB 이상을 권고했지만, 일부 제조사에서 32MB만 장착하여 판매하는 경우가 있었다.
    • HDD: E-IDE 6.4GB~10GB
      • 후기 기종의 경우 일부 제조사에서 최대 20GB까지 장착한 경우가 있었다.
    • ODD: 40배속 CD-ROM
    • 모뎀: 56kbps
    • 그래픽 카드:
      • ATi 레이지 IIc 4~8MB
      • 트라이던트 블레이드 3D 8MB
      • 인텔 i740 4MB~8MB
      • S3 그래픽스 트리오 3D 4MB
      • 인텔 810 칩셋 온보드 내장 그래픽 16MB (후기종에 적용)
    • 사운드 카드:
      • 메인보드 내장형 ESS 마에스트로-3

이쪽은 모니터 포함으로도 100만원대 이하의 가격을 책정할 수 있는 경우도 많아서# 엄청난 판매량을 자랑했다. 사실 일반적인 인터넷 서핑이나 문서 작업, 가벼운 게임 용도로는 셀러론 CPU도 성능 면에서는 크게 손색이 없었고, 대략 스타크래프트 권장 사양과 비슷하다. 다만 그래픽 카드 성능이 당대 기준으로도 그저 그래서 보급형을 사더라도 게임 좀 한다는 사람들은 그래픽 카드를 따로 업그레이드 하는 경우가 많았다.

12개 업체의 사양이 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정부가 사양을 지정해주고 그 틀 안에서 만들도록 지시했기 때문인데 견적만 주고 대충 지시했을 때 어떤 부품이 빠질지는 당시 정부도 잘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국민PC의 가격은 모니터의 유무와 크기, OS의 종류(리눅스, 윈도우)에 따라 가격이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당시 가장 인기가 있는 기종인 고급형 본체+윈도우 OS+17인치 모니터의 경우 150만원대에서 구입 가능했고 보급형 본체+윈도우 OS+17인치의 경우 110만원에서 120만원대에 구입 가능했다. 가격은 업체마다 2~3만원 정도 차이가 있었지만 거의 그 정도 선이 유지.


4. 성공과 영향[편집]


이전까지 완만하게 증가하던 PC 보급률은 이 사업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늘었고, 2000년에 이르러서는 PC 보급률이 70%를 넘어서게 되었다. 그 전에도 PC가 어느 정도 보급되긴 했지만, 컴퓨터가 없다고 해서 생활을 못하지는 않았고 가격부담 때문에 학령기 자녀가 없는 집에서는 교육용 PC로도 관심이 없어 컴퓨터 살 생각 자체를 잘 안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전화접속 기반 인터넷이 상용화됐지만, 전화요금제도 오늘날의 정액 무한제가 아닌 종량제라 통신비 부담이 컸고, 그런 방식의 인터넷 접속조차도 주로 컴퓨터를 잘 아는 젊은 사람이 하는 것으로 여겨질 만큼 컴맹인 일반인들은 쉽게 접근할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그래서 컴퓨터를 사도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소프트웨어는 게임 정도를 제외하면 지금 봐선 웃길 수도 있지만 워드프로세서였다.

이 시기에 보급률이 오를 수밖에 없었던 부가적인 이유도 있는데, 동시기 정부가 ADSL 인터넷 보급과 전자정부사업(각종 연금과 세무 업무처리포함)을 진행하고, 전화가 아닌 유선 인터넷 회선을 타고 본격적으로 인터넷뱅킹과 HTS가 일반화되며, 전자우편과 인터넷 포털서비스가 활성화되면서 중소기업과 개인사업자, 그리고 일반 개인까지도 인터넷을 알아야 생활이 가능해지는 시대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정보격차가 무시무시하게 벌어지며 사람들이 받는 압박은 상당했고, 정부로서는 어떻게든 가정의 PC보급률을 올리고, 컴퓨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1970년대 이전 출생자들을 재교육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춘 국민PC 붐은 대중들에게 컴퓨터가 생활하는 데 여러모로 편리하다는 인식전환의 계기도 만들어 컴퓨터를 지금의 필수 가전제품으로 등극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또한 국민PC 적금이라는 소액 대출을 내놓아 소비자의 부담을 줄였다. 이 상품은 우체국에서 대출은 안 되고 예적금담보대출만 취급할 수 있어서 내놓은 꼼수였다. 그래서 추심업무를 할 수 없었던 우체국은 보증보험을 들게 했다. 소비자의 부담을 줄였던 덕분에 약 5개월 만에 약 28만 대의 국민PC가 팔리고 19만여 명의 국민PC 적금 가입자가 생겨났다. 덕분에 당시 중/고등학생들은 집에 돌아가면 스타크래프트를 하느라 바빴다.

기존 PC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삼성전자, 삼보컴퓨터 등 대기업에서도 국민PC의 출현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있던 터라 국민PC보다 약간 높은 사양을 가진 제품의 가격을 이전보다 내려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PC의 보급은 더 가속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국민PC와 ADSL의 만남은 IMF 이후 살 길을 찾던 한국에 IT 정보화 강국이란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 정부의 IT정책 중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밝은 면이 있다면 어두운 면도 있는 법. 이 시절 PC의 대중화는 불법 복제네티켓 등 관련 도덕 교육이나 법령이 전무한 상태에서 PC만 팔아, 즉 질적 성장은 고려하지 않고 양적 성장에만 의존해, 인터넷은 말 그대로 불법자료의 천국이 되었고 부모들은 대개 컴퓨터를 잘 다룰 줄 몰라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 컴퓨터를 이용하는지도 몰라서 주 사용층인 자녀들이 음란물이나 사행성 게임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경우가 많았다.[21] 지금의 촘촘한 19금 규제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아니, 존재해야 한다는 인식조차 드물던 시절이니, 물론 지금의 인터넷 저질 문화보다야 전반적으로 건전했던 것은 있어서 양지에서는 반말조차 규제를 당하기 일쑤였던 시절이긴 했다. 물론 음지에선 대놓고 뻘드립을 치기 시작하는 등 인터넷 문화가 서서히 양극화되던 시기기도 했고. 세이클럽, 버디버디처럼 채팅 문화도 유행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 덕분에 사람들의 컴퓨터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아이러니한 계기도 되었다. 세상에 컴퓨터 사면서 "이제 이걸로 숙제 하면 내 학업 능력이 증진될 거야!" 하면서 기뻐한 청소년이 얼마나 됐을까. 다 영화/애니/게임 등 불법 콘텐츠 내려받으면서 쌓인 노하우와 게임하면서 사운드 드라이버 잡던 실력들이 나중에 과제를 하면서도 발휘된 것이다.(...) 역시 컨텐츠가 빈약한 IT 기기는 사용자를 스마트하게 만들지. 인터넷 보급 초창기만 하더라도 '인터넷 정보검색사 자격증'이란 것이 당당하게 존재하였고[22], 검색 엔진에 키워드를 넣어 자료를 찾아내는 과정을 TV 방송에서 시합까지 벌여 중계하기도 했다. 당시의 검색 엔진은 '장동건'을 치니 '마장동 건어물시장'이 뜨더라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등 자연어처리 성능이 2010년대와 비교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빈약해서, 키워드 서치를 위한 키워드를 사용자가 선택하는 것에 따라 검색결과의 차이가 컸다. 또한, 옛날에 도서관에서 사서가 책을 찾는 방식처럼, 키워드가 아닌 카테고리를 이용한 정보검색 능력도 필요했던 덕분에, 질문의 내용을 어느 카테고리에서 찾아야 하는지 아는 것도 정보검색사의 능력 중 하나였다.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이나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같이 지금에 와서는 별 의미가 없어보이는 자격증들이 당시에는 막연히 '미래의 운전면허증'처럼 여겨졌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당시 아이들에게 엄청나게 강력한 인터넷 학습동기를 유발하였던 불법 유통물 등 음지의 공로는 마냥 무시하기엔 꽤나 큰 수준이긴 했다.

개발도상국 아이들을 위한 OLPC를 이용해서 아이들이 게임이나 불법 유통물, 음란물 등을 보는 비율이 높다는 소식에 한 컴퓨터 관련자는 "저나 당신이나 다수는 그렇게 컴퓨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지 않았나요? 좋은 현상입니다."라고 쿨하게 넘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KOICA 소속으로 아프리카에서 2년 동안 선생으로 자원봉사하고 온 이도 현지에서 컴퓨터를 접한 아이들이 가장 먼저 하던 것이 게임이나 동영상 관람이었다고 밝혔다. 본능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인터넷 인프라 부족과 낮은 사양 등으로 음란물 접근성은 떨어져 고전게임이나 저화질 영화 동영상의 인기가 폭발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당시 용던이라고 불리면서 호갱님들을 뒤통수치던 용산 전자상가도 강한 타격을 입게 된다. 국민PC 사업 이전에는 안정된 서비스나 편리함, 브랜드를 고려하자면 대기업 PC를, 혹은 가격을 고려하자면 조립PC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대기업보다는 서비스가 떨어지지만[23] 용산보다는 편리하고 가격도 그리 높지는 않았던 국민PC가 등장하면서, 이들은 신용결제나 적금결제가 가능한데다 정가제였던 덕분에 용산보다는 믿음이 간다는 점이 크게 어필되어, 많은 사람들이 구매하게 되었다. 물론 용산 전자상가 내에서도 용산전자상가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크게 재미는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당시에는 현대 멀티캡, 세진 컴퓨터, 현주 컴퓨터가 아직 살아있어서 브랜드 인지도에서 크게 밀렸다는 것이 이유다. 하지만 조합을 결성하고 함께 호흡을 맞추었던 경험은 훗날 용산의 정직한 업자들이 에누리닷컴과 다나와 등에 힘을 함께 실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한다.


5. 비슷한 사례[편집]


2006년경 독일도 컴퓨터 사용 저변 확대라는 목적으로 컴퓨터를 만든 적이 있었다. 지멘스후지쯔의 합작 회사인 후지쯔 지멘스에서 만든 PC이다. 사양은 다음과 같다.

  • CPU: AMD Athlon X2 5000+
  • RAM: 2GB
  • HDD: 씨게이트 바라쿠다 7200.10 320GB
  • ODD: DVD 멀티 RW
  • VGA: ATI 라데온 X1650GTO + HDMI
  • 듀얼 TV 튜너
  • Windows XP 미디어 센터 에디션

OS로 Windows XP 미디어 센터 에디션을 설치하고 TV 튜너가 기본 사양에 들어있는 등 유비쿼터스 보급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PC로 멀티미디어 관련 사양이 강력하다. 가격은 999유로로, 1500원 환율을 적용했을 때 150만원 수준. 현재 기준으로는 가벼운 사무작업 또는 웹서핑을 제외하면 사용하기 어려운 사양이다. 국민PC와의 출시 간극은 약 7년인데, 그 사이 엄청나게 늘어난 RAM과 HDD의 용량 차이를 비교해보라. 거기다 국민PC는 현재 켜서 고전게임 하나 돌리는 수준이 끝인 반면, 저 사양에는 램만 4기가로 올려줘도 웹서핑과 유튜브 시청은 좀 느려도 가능하다는 게 1990~2000년대 컴퓨터 발전이 어마무시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애슬론X2 5000+는 2006년 3분기쯤이 지나서야 나왔다. 15년 사이에 참 많은 것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사양.


6. 국민 노트북 PC[편집]


정부에서는 국민PC 사업 성공에 힘입어 2000년부터 국민 노트북 PC 사업도 진행했다. 가격은 160~240만 원대로 오늘날의 고성능 노트북 가격에 가깝다. 하지만 이쪽은 크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는데, 일단 데스크탑 컴퓨터 있는데 뭐하러 노트북까지 또 사냐는 인식이 있었을 뿐더러, 노트북 가격도 상당히 비쌌던 시절이었던 것이 그 이유다. 대도시의 중심부 학교에서도 2~3대 정도만 보유하고, 학생들은 있다는 것도 잘 모를 정도로 귀하던 시절이었다.

2003년 3월에 런칭된 인텔 센트리노 브랜드로 무선 인터넷 붐을 일으킨 시절에도 '노트북은 데스크탑 컴퓨터보다 비싸서 엄두가 안 나는 품목'으로 취급하는 것은 여전했다. 다행히 2004년 9월에 90만원대 노트북, 2005년 이후에 60만원대 노트북이 처음 등장하고 나서야 기업들이 가격 경쟁에 불 붙으면서 살만한 품목이 되었으며, 가까운 곳에 통학하기 어려운 대학생들에게는 사실상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7.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4 11:52:36에 나무위키 국민PC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2020년 기준으로는 150만원이면 6코어 프로세서와 16GB 램, 고가형 그래픽카드는 물론 용량도 빵빵한 고스펙 조립식 컴퓨터 본체 단품을 살 수 있지만, 1990년대에는 이게 지뢰찾기, 카드놀이 같은 기본 게임만 되는 저가형 컴퓨터 가격이었고(관공서에 투입되는 사무용 컴퓨터 가격이 130만원대던 시절이었다) 당시 기준 고사양 게임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물건은 200만원이 넘었다. 성능은 급격히 좋아졌는데 가격은 오히려 낮아진 것.[2] 그리고 2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오를대로 오른 물가 상승률을 감안할 경우 현재의 가격으로 환산하면 앞 각주에 서술된 금액에 2~2.5배를 곱해야 한다. 당시에는 400만원으로 경차(자동차)를 살 수 있었다. 현재 물가로 치면 셀러론에 메모리 4GB, 내장그래픽에다 120GB SSD 정도 달린 최하위급 엔트리 깡통 모델이 200~300만원 하고 i5에 16GB RAM, GTX 1650S, 512GB 정도 사양이 500~700만원 하며(그래픽카드 대란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이 정도까지는 안 갔다.) i7, i9이나 RTX xx70 이상급은 준중형차~중형차와 맞먹는 살인적인 가격 탓에 워크스테이션용으로 연구소나 기업에 소량 납품만 되며 아예 개인사용자용으로는 출시조차도 하지 않는 상황 정도로 비유할 수 있다. 가끔 옛날 자료를 찾아보면 정보소외계층 운운하며 다른 친구들은 전부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데 자기네 집에만 없는 나머지 소외감 및 집단따돌림 등의 영향으로 자살한 청소년 등의 이야기가 있는데 90년대~00년대 극초반 당시에는 국민PC 사업에도 불구하고 그런 경우가 가능했다. 당시 국민PC라고 만든 최저가형 모델조차도 최저임금 노동자의 1~2개월분, 대기업 사원의 2주 분량의 급여에 해당했기 때문에…[3] 매일경제, 1999.08.02.[4] 국민PC 사업 이전에 정부 주도로 컴퓨터를 보급하기 위한 교육용 컴퓨터 보급 사업이 2차례 진행된 바 있었다. 1983년에 시행된 8비트 컴퓨터 보급을 위한 1차 교육용 컴퓨터 보급 사업과 1989년에 시행된 IBM PC 호환기종을 대상으로 한 2차 교육용 PC 사업이 그것. 다만 1차는 당시 대중 인식, 시대적 한계나 비싼 가격을 잡지 못한 것 등으로 실패했고, 2차는 그래도 중박은 터트렸다.[5] 물론 지금 보면 지뢰 찾기, 카드놀이 수준이긴 했다. 그래도 시간은 잘갔다. 더군다나 PC통신의 이용요금이 임금수준이 몇배로 오른 2020년대 기준으로도 만만한 수준이 아니었다.[6] 1990년대 중반만 해도 한 아파트에 컴퓨터 가지고 있는 집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2000년대 초반까지도 PC 없는 집은 수두룩했다. 당시 국민PC붐이 일면서 마치 2010년대 초에 스마트폰 붐이 일던 시절처럼 너도나도 사기 시작한 것.[7] 다나와는 2000년 2월 디지털카메라 가격 비교 사이트로 출발하였다.[8] 1999년 9월에 삼보컴퓨터가 대주주였던 나래이동통신에 인수되었으며 삼보컴퓨터의 제품을 OEM으로 공급받았었다. 사실상 삼보컴퓨터의 멀티였었다. 지금은 회사 자체는 망하고 당시 계약했던 일부 사설 컴퓨터 수리점들에 상호가 남아있다.[9] 그래픽카드 이름이 아니다. 여기서 R은 Rotation을 의미한다.[10] PC케이스와 파워서플라이를 국내에서 생산하던 업체였었는데, 일반적인 ATX 구격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듯한 케이스(현세대에서 RTX[9]라 불리는 그 규격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MK2 등 일부 업체에서 이 방식으로 생산한 적이 있었다.)를 주로 생산했었다.[11] 과거 애플 매킨토시 유통업체였으며, 후에 다른 회사에 인수되어 현재는 봄툰을 운영하는 키다리스튜디오로 바뀌었다.[12] 그 업체는 2012년 6월 1일자로 폐업했다.[13] 홈페이지 주소인 idom.co.kr은 다른 이름의 컴퓨터 판매 업체[12] 홈페이지에 연결됐었다가 남양주시 지역 정보 검색 사이트로 연결됐었다가 웬 미용실 블로그로 연결됐었다가 2023년 2월 4일 현재는 판매용이 돼 있다.[14] 2000년대 중반까지 LCD 모니터를 판매하다가 어느새부터인가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15] 1999~2001년 당시 최신 OS이자 2000년대 중반까지도 주류였던 OS였다. 많은 이들이 알고있다시피 2000년 9월에 출시된 Windows Me메모리 유틸리티가 없다면 Windows Vista조차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희대의 망작이었고, 동년대에 출시된 Windows 2000은 성능은 준수했지만 당시 수준으로는 요구 사양도 높은 편이었고 서드파티 업체들도 NT 커널에 대한 지원이 부족해 하위호환 문제도 상당했다. 커널 지원 문제는 2001년 10월에 출시된 Windows XP에도 이어졌다.[16] 693A 칩셋 메인보드의 경우 주로 ECS사의 제품이 많이 들어갔는데 693A 칩셋의 최악의 안정성 + ECS 메인보드 특유의 낮은 내구성으로 인하여 각종 에러나 고장이 잦아서 구매한 사람들이 제대로 피를 봤다.[17] 180nm 공정으로 미세화되고 클럭이 높아지면서 가격대까지 낮춘 코퍼마인 CPU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출시되기 딱 5일 전에 국민PC 사업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코퍼마인 CPU로 채택될 수 없었다. 다행히 펜티엄 3 코퍼마인도 슬롯1 타입이 존재했기 때문에 코퍼마인으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했다. 다만 후기 제품의 경우는 코퍼마인이 들어간 제품도 일부 존재했다. 이는 코퍼마인이 나오자 인텔이 카트마이의 생산량을 급격히 줄이면서 물량이 부족해 겨자먹기로 끼워준 셈이지만 가격을 더 받지는 않았다는 듯 하다.[18] EZ2DJ에서 죽어라 쓴 그 모델 맞으며, 그래픽 출력 수준은 상당한 상급이었다.[19] 2000년 당시 삼성 매직스테이션 데스크탑 중 중급형 기종의 램 사양이 64MB였다.[20] 주로 소켓 370 형태의 멘도시노 셀러론 전용 440LX 보드가 많이 쓰였으며 컴마을 제품에 들어간 메인보드의 경우는 ATi RAGE IIc 4MB 그래픽이 온보드 되어 있었다.[21] 물론 지금의 포털처럼 방대한 양의 검색 자료들이 존재하던 시절은 아니어서, 일단은 게임 목적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담으로 이런 인터넷 초창기 시절 가장 먼저 등장한 사이트들 중 하나가 연예인 팬클럽 못지 않은 안티 사이트들이었다.(...)[22] 내용이라고 해봤자 무슨무슨 검색 엔진이나 유명 유즈넷/FTP/고퍼 등을 검색하기 수준이었다.[23] 이런 점 때문에 선정된 업체들 중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들은 이후 경영난을 겪어, 이때 PC를 산 고객들이 사후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