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부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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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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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1. 개요
2. 과정
3. 결과
3.1. 6.25 전쟁과의 관계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國府遷臺(ㄍㄨㄛˊㄈㄨˇㄑㄧㄢㄊㄞˊ[1] / Retreat of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China to Taiwan

국부천대1949년 12월 7일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중국공산당에게 패배한 장제스중국국민당중화민국 정부타이완 섬으로 옮긴 사건을 말한다.

오늘날 중국 대륙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고 중화민국이 '대만(타이완)'으로 불리게 되는 결정적인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2. 과정[편집]


파일:국부천대.gif}}}
중국국민당의 이동 과정 (지도는 1947년 기준)

1949년 4월 수도 난징이 함락 직전까지 몰리자 중국국민당중일전쟁 때 정부를 이전한 적이 있었던 쓰촨성 등의 중국 서남부로 다시 정부를 옮길 생각이었다.

이때 중국국민당타이완 섬 이전을 건의한 것은 지리학자 장치윈(장기윤, 張其昀)이었다.[2] 장치윈에 따르면 대만은 오랫동안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본이 남기고 간 산업자원이 있고 공산당 세력이 미약한 데다 섬의 전략적 가치 등을 고려했다고 한다. 이에 더해서 대만은 일본이 장기간 점령한 상태라서 독자적인 군벌 세력이 없다는 점도 장제스의 흥미를 끌었다.

난징은 결국 1949년 4월 23일 함락되었고 이후 국민당 정부는 타이베이에 정착하기까지 8개월간 광저우, 충칭, 청두 등을 전전했다. 난징 함락 후 국민당 정부는 일단 광저우로 퇴각했으나 중공군이 화난(華南, 화남) 지방을 석권하면서 광저우가 위태로워지자 10월 13일 광저우를 버리고 중일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충칭으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11월 30일 충칭마저 공산당 수중에 떨어지자 국민당은 재차 청두로 퇴각하였고 12월 7일 쓰촨성 시창(西昌)에 대본영(총사령부)을 남겨 두고 타이베이로 철수했다. 12월 27일 청두는 함락되었고 시창에 잔류한 국부군은 이듬해 4월까지 저항을 이어가다가 중국공산당에 점령당했다. 일부 잔존 국민당 병력은 미얀마나 태국 등지로 옮겨가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타이베이는 정식 수도가 아니라 본토를 수복하기 전에 중화민국중국국민당이 임시로 머물며 권토중래를 노리는 곳이었지만[3] 현실적으로 섬에서 대륙을 수복하는 것은 대만을 아무리 발전시켜도 불가능하였다.[4] 오히려 타이완 섬 방어에 온 힘을 다 해도 모자랄 판이고 그 결과 타이베이중화민국의 실질적인 수도로 기능하게 되었다.

3. 결과[편집]


파일:Flag_map_of_China_&_Taiwan.png

천대 이후 국공내전은 당연하게도 중국공산당의 사실상 승리로 끝났다. 중국공산당은 중국 대륙 전역을 석권하였고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단, 실제 건국 선언은 국부천대 이전인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 선언을 한 것은 내전이 끝난 후가 아니라 내전 도중이다. 난징 함락인 4월부터 10월까지는 과도기로 볼 수 있으며 대륙의 주인이 중화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의 탈바꿈을 준비하는 기간이 되었다. 그리고 중화민국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넓은 나라[5]에서 경상도보다 조금 더 큰 넓이로 축소되었고 인구 역시 인구 5억 6,000만 명의 세계 최다 인구를 보유한 국가였지만 800만 명 남짓으로 축소되었다.[6]

이후에도 명목상 내전이 끝나지 않았으며 신생 국가 중화인민공화국과 기존 국가 중화민국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두 국가는 서로를 인정하지도 않았으며 6.25 전쟁처럼 휴전 내지는 종전 협정을 진행한 것도 아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의 실효 지배 지역을 계속해서 점령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1950년대 중반으로 이 전쟁은 이후 더 이상 뺏고 뺏기는 땅 없이 교착상태를 유지하다가[7] 1970년대 말에 사실상 종전 상태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상이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양안이 휴전이나 정전 협정을 특별히 맺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이 대만에 대해 현 체제를 유지하는 한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한 적은 있으나 이 역시 양자간의 어떤 형태의 협정이나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이 지금은 이미 멸망했고 과거 중화민국의 권리 자신들이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8] 이들의 입장에 따르면 지금 있는 중화민국은 말하자면 중화민국을 참칭하여 타이완을 점거하고 있는 국민당의 불법 정권인 셈이다. 중화민국 역시 공식적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여러모로 남북관계와 유사한데, 차이가 있다면 첫째로 최소한 협정의 주체로서는 인정하여 휴전 상태인 남북한과는 다르게, 두 '중국'은 어떠한 협정조차 맺은 적이 없다는 점이며, 둘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교류나 민간교류가 지극히 적거나 거의 없는 남북한과 달리, 중국과 대만은 경제적 교류[9]나 민간교류[10]는 허용되어 많이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분단 체제와 장제스의 독재 체제 자체는 오히려 국부천대를 통해 완성되었다. 기존의 군벌 세력을 기반으로 하며 국민당 내외에서 장제스를 견제하였던 정치 세력들은 국부천대로 인해 중국 본토에 가지고 있었던 군사력, 경제력 등의 모든 기반을 상실하였고 이 때문에 장제스를 견제할 힘을 잃었으며 장제스는 확고한 1인 체제를 만들 수 있었다.

국부천대에 따라 사실상의 수도는 난징에서 타이베이로 옮겨졌다. 하지만 천도 이후에도 중화민국은 오랫동안 명목상 중국의 정통 정권임과 중국 전체의 통치주권을 천명했으며 수도난징이라고 명시했으나 천수이볜, 마잉주 집권기를 전후해서 '중국의 정통 정부' 및 '법적인 수도'에 대한 인식이 약해졌다. 행정원이 발행하는 연감에선 아예 대륙지구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며 정부 관료들도 당당히 "중화민국의 수도는 타이베이"라고 말한다.

이때 중국국민당과 함께 중국 대륙에서 타이완 성[11] 관할 지역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외성인이라 부르며,[12] 타이베이, 신베이, 지룽, 타오위안 등 대만 섬 북부에 집중적으로 살고 있다. 아무튼 국공내전 덕에 타이베이는 중화민국의 '변방의 고만고만한 도시 중 조금 큰 도시'에서 '중심 도시'로 변모해 버렸다. 1661년에 세워진 타이완 동녕 왕국의 수도가 자리잡았던 타이완 섬 남부에 있는 타이난 이래 중국 역사에서 수도를 섬에 둔 첫 사례인 것이다.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이 1949년 10월 건국을 선언하자 기존 중화민국에 대한 승인을 전격 취소해 버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 그 뒤를 사회주의 국가들과 제3세계 국가들이 뒤따랐는데 영국이나 노르웨이 등 서방 국가들도 이를 뒤따라 중화민국에 대한 승인을 취소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 특히 영국은 자국령인 홍콩의 안보를 걱정해 중화인민공화국을 가장 빠르게 승인한 서방 국가가 되었다.[13] 노르웨이는 몰라도 영국만큼은 미국과 매우 밀접했기 때문에 홍콩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중국 공산정권을 승인할 일이 없었을 거라는 것이 중론이다. 물론 중화인민공화국의 대륙 지배를 돌이키기 어려워진 1960년대부터는 너도나도 중화민국에 대한 승인을 취소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

3.1. 6.25 전쟁과의 관계[편집]


서로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일이고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의 관계가 대한민국-북한의 관계와도 서로 닮은 점이 많기 때문에[14] 6.25 전쟁과 비교되는 일이 잦다. 보통 냉전 시기의 공산주의-자본주의 진영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되는 편.

국민당이 대만으로 이전한 직후 중공군은 대만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국민당 정권을 엄청나게 부정적으로 봐 오던 미국은 공산당 쓸어 버리라고 국민당에 지원을 해오기는 했 는데 국민당이 대책없이 중국 대륙에서 밀려나는 것을 보자마자 미련없이 손절했으며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공공연히 대만 섬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큰 관심이 없었다.자료 이때 CIA도 얼마 못 가 대만 섬도 공산당에 점령되리라고 보았으나 공화당 내에서는 트루먼 대통령의 무관심이 중국을 공산화했다며 불만이 많았다. 그런데 6.25 전쟁이 터지자 트루먼은 미군 파병을 결정함과 동시에 대만 해협에 항공모함을 띄워 공산 중국을 견제하기 시작했고 대만 침공을 위한 중공군 부대는 6.25 전쟁에 투입되어 소모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6.25 전쟁의 휴전 후 중공군은 대만 침공을 포기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마자 승인한 국가들 중 하나인데 사실 당시 스탈린은 그 전까지 같은 공산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을 무식하다며 나쁘게 보았고 차라리 장제스를 더 선호했다. 그러다가 마오쩌둥이 승리하자 태도를 180도 바꾸어 UN에서 중화민국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CHINA)으로 취급하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안전보장이사회를 장기간 보이콧했다. 덕분에 6.25 전쟁 당시 유엔군의 이름으로 대한민국을 지원할 수 있었다(유엔의 국제 분쟁 최초 개입). 지금도 유엔군 사령부(실제로는 미 8군 사령부지만)가 있다.

4. 대체역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국공내전/대체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기타[편집]


국공내전 당시 장제스중국국민당이 대만으로 패주하면서 베이징자금성 고궁박물관에 있던 유물 중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유물 29만 점을 위시로 전국 각지의 유물 60만 8,000점(출처)을 선발해서 가져갔다. 이 유물들이 대륙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문화대혁명으로 박살났을 위험이 크니 대만으로 옮겨둬서 결과는 좋았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3년 11월 3일 방송분에서 이 일화가 소개되었다. 비슷하게 자금성에 있었던 사고전서 문연각(文淵閣)본도 이때 이송해서 국립고궁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현대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서는 통탄할 일이라 국공내전 이후부터 공식적인 입장으로는 "절도한(도둑질한) 유물들 내놔라"고 하는데 범람연맹 쪽에서는 빨갱이 공산당 불법 정권의 억지 따위 알 바 아니라는 입장이고 범록연맹 쪽에서는 "늬들 문화재 문혁의 풍파에서 보호해준 것부터 감사해라"라는 입장이다. 사실 그대로 있었으면 홍위병 손에 박살났을 운명이라는 것은 중국인들도 인정하는 팩트다.

이외에도 유물은 아니지만 중국 역대 왕조가 대대로 우대한 공자의 직계 적손(嫡孫)으로 제32대 연성공(衍聖公)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이었던[15] 쿵더청도 장제스가 대만 섬으로 데리고 건너갔다. 북송금나라에 밀려 회수 이남으로 내려갈 때 송고종이 중화로서의 정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제3대 연성공 공단우를 함께 데리고 간 것에 비견할 만한 일로, 신해혁명 이래 연성공 작위를 이을 사람이 쿵더청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에 현재는 타이완에서 공자 가문의 종가(宗家)가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대륙에는 북종계의 직계 남성 후손은 없으며 남종 가문[16]과 쿵더청의 누나 쿵더마오(孔德懋)의 후손만 남아 있다.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은 중화민국 정부의 유일한 세습 공직으로 지위는 특임관(장관급)에 준한다. 쿵더청은 국부천대 이후 고시원 원장, 총통부자정 등의 고위직을 역임했고 쿵더청 사후 제2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을 세습한 장손[17] 쿵추이창도 총통국책고문을 맡고 있다.

중화민국이 들어서면서 유교의 성현인 맹자, 안회, 증자, 자사의 제사를 받들던 직계 후손에게 세습되었던 한림원 오경박사 직위를 각각 아성봉사관, 복성봉사관, 종성봉사관, 술성봉사관으로 개칭해 그 지위를 간임관(차관급)에 준하도록 했는데 국부천대 때 대성지성선사봉사관 공덕성만이 아니라 2대 아성봉사관 맹번기(孟繁驥)와 2대 종성봉사관 증헌의(曾憲禕)도 함께 대만 섬으로 건너가 지성, 아성, 종성 세 봉사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반면 2대 복성봉사관 안세용(顔世鏞)은 대륙에 남았고 술성봉사관은 공덕성의 차남 공유녕(孔維寧)이 맡았다가 2010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복성, 술성 두 봉사관은 폐지되었다.

운남성에서 패배한 국민당군[18] 잔당은 리미 장군의 지휘 하에 사단급 병력으로 재편하여 동남아시아미얀마태국으로 퇴각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통칭 운남 반공구국군) 이들은 CIA의 지원에 따라 반공구국군으로서 운남과 중화민국 수복을 부르짖으며 운남-버마 및 태국 국경지대에 여러 번 혼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주권 침해에 버마가 당연히 유엔에 문제를 제기하여 중화민국 정부에 압력이 가해지고 결국 장제스가 철수 명령을 내려 리미가 복종함에 따라[19] 대다수 병력은 철수하여 대만으로 이주하였다.[20] 철수 명령을 거부한 이들은 태국과도 충돌을 일으킨 끝에 서로 싸우지만은 않게 되었고 잔당들은 아편을 재배하여 수입원으로 삼았는데 이는 골든 트라이앵글의 성립에 큰 영향을 주어 쿤사 같은 마약왕들이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관련 블로그 글, 기사, 프레시안 칼럼 최후의 잔당들은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전쟁의 혼란기 속에 태국 정부의 지원 하에 적극적으로 반공 항쟁을 했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결국 태국에 귀화하여 태국 국적도 얻었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 들어 대만이 인구감소를 겪어 징병제 유지가 어렵자 이들의 후손들을 우대해 대만 귀화를 유도하고 있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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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자문화권에서 臺를 빨리 쓸 때 발음이 같은(한국어에서는 완전히 같진 않고 비슷한) 台로 쓰는 경우가 많아 관습적으로 國府遷台도 통용된다.(참고로 중국 대륙의 간체자나 일본의 신자체는 아예 공식적으로 臺를 폐지하고 台에 병합해 버렸다). 國府遷臺, 國府遷台 모두 한국 한자음는 '국부천대'로 읽어야 한다. 台의 원래 한국 한자음은 '태'(별 이름에 사용)와 '이'('기쁘다'라는 뜻. 이때는 怡와 동자)만 있지만 臺를 대신하는 글자로 썼을 때는 당연히 臺의 음을 따라 '대'라고 읽어야 한다.[2] 장치원은 국민당의 국부천대 이후 교육부장, 국민당 중앙상무위원 등을 역임하며 정계 및 관계에서 활약했고 오늘날 대만의 유력 대학교들 가운데 하나인 중국문화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후 1985년에 타계하였다.[3] 명목상 수도는 여전히 난징이다.[4] 국민당군이 난징은 물론 충칭에서도 막지 못했던 공산당군을 섬인 대만에서 대륙으로 상륙작전을 펼쳐 뚫는다는 것은 얼핏 생각해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유일한 방법은 외세, 특히 미국 등 자유우방의 힘을 빌리는 것뿐인데 미국은 당연히 제3차 세계 대전으로 직행할 수 있는 무리한 대륙 수복을 반대했다. 장제스6.25 전쟁을 기회로 하여 대륙 수복을 시도했으나 그마저도 무산되면서 중화민국이 대륙을 수복하는 것은 사실상 더욱 요원해지게 되었다.[5] 대영제국, 소련, 미국에 이은 4위[6] 1950년 당시 일본(8,300만 명)의 10분의 1, 남한(2,000만 명)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고 북한(950만 명)보다도 더 작은 규모였다. 물론 중앙군 50만 명을 비롯해 국민당원과 그 가족, 반공 성향의 피난민까지 합쳐 200만 명이 타이완으로 오기는 했지만 역부족이었다.[7] 사실 6.25 전쟁 역시 3년 1개월 동안 계속되었지만 밀고 올라가고 밀려가기를 반복한 것은 처음 1년이고,나머지 2년여 동안은 빼앗고 빼앗기는 땅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1년이 지난 뒤부터 휴전까지는 남북이 대치하는 전선은 현재의 휴전선과는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었다.[8] 정확하게는 중화인민공화국은 단 한 번도 자신들이 중화민국의 후신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실제로 중화민국의 국채라던가 기타 국가승계의 의무는 모조리 타이완에 있는 국민당에게 해결하라고 뻐기거나 아예 외국 자산을 몰수하기도 했다.[9] 중화민국(대만) 최대의 기업인 TSMC 해외공장 중 최초로 지은 곳이 중국 상하이에 있다. 그 외에는 미국 워싱턴 주까지 2개만 있었다가, 미국 아리조나에도 짓게 되었는데, 2021년 일본 구마모토현에 대규모 TSMC 공장단지 설치 공사가 시작되었다. 2023년부터는 독일 드레스덴에도 짓고 있다. 대만기업 중 중국에서도 영업하는 곳들이 적지 않다.[10] 이는 1980년대부터 시작되어(논의는 1970년대부터였고, 당시에는 3통이라고 불렀다. 무역-편지-여행이 그 3이다.), 계속 교류과정 간소화 시기를 거쳤는데, 21세기부터는 간소화가 완벽해져서(대3통이라고 부른다.) 그냥 일반적인 외국여행 수준으로 간편하게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원래는 홍콩이나 싱가포르를 경유하여 입국하도록 했다가, 21세기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게 만들어버렸다. 21세기부터는 중국인과 대만인끼리의 혼인도 엄청나게 많다. 스포츠 교류도 많아서, 21세기부터는 중국에서 하는 크고 작은 행사들에 대만인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걸 자주 볼 수 있다. 그래서 중국도 대만인들을 보면 경계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대만인 관광객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11] 국부천대 기준. 중화민국의 현행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타이완성뿐만 아니라 타이완 성에서 분리된 직할시들도 포함된다.[12] 당연히 푸젠성 관할인 진먼, 마쭈를 여기에 포함하지 않는다.[13] 당시 홍콩은 어쨌거나 중국 본토로부터 수도 등을 공급받지 않고서는 자립하지 못할 처지였으며 중국은 계속해서 홍콩에 각종 물자를 저렴하게 공급했는데 중국 입장에서도 미국 등 서방 세계 국가와의 교류창구를 남겨두는 차원에서 전략적 이해가 있었다. 영국 입장에서 자국의 금융자본의 상당 부분이 투자된 홍콩은 이미 너무나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런 중국의 이해와 영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다.[14] 물론 당시 역사적 관점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지 두 전쟁의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다.[15]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간단하게 말해 세습 '귀족 작위'가 세습 '유교 제사부 장관' 정도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 역할은 동일하다.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귀족 작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곤란하기 때문에 형식상 공직으로 바꾼 것.[16] 위에 언급한 공단우의 동생으로부터 이어진다. 당시 금나라에서도 곡부에 남아 있던 공단우의 동생 공단조를 연성공으로 내세워서 공자 가문이 송나라의 남종과 금나라의 북종으로 나뉘었다. 원나라 때 공자 가문의 정통성을 남종이 북종에게 양보하였기 때문에 공자 가문의 직계 정통성은 북종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혈통상의 정통성은 이들도 갖췄으므로 절강성의 남종 역시 공자에 대한 제사를 허락받고 문중의 대사에서 북종과 상호 협력해 왔다.[17] 쿵더청의 장남 쿵웨이이가 일찍 죽어서 한 대 건너서 세습했다.[18] 국부천대 이후에도 서창(西昌)에 남아 저항을 이어가던 대본영(국부군 총사령부) 휘하 부대였으며 버마나 태국 등지로 퇴각할 당시 운남 출신이 대다수였다.[19] 대륙에서 막 퇴각해 온 이들이고 엄연히 명령에 따라 반공 전쟁을 지속하는, 즉 이들은 엄연히 중화민국 국군이었고 국군이면 총통으로 복귀한 장제스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장제스의 명령은 대만으로 퇴각하라는 것이었다.[20] 첫 철수 명령을 내렸을 때는 미국의 비호와 장제스의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대응 하에 절대다수는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압력이 더더욱 가해지자 결국 최종적으로 철수, 운남 방면군은 이 날을 기해 본토에 공격을 가할 마지막 여력마저 완벽히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