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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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엘리트 전사 계급의 탄생
2.2. 몰락
2.3. 현황
2.3.1. 귀족이 있는 국가
2.3.2. 귀족 폐지 국가
2.4. 승계
2.5. 칭호
2.5.1. 서유럽
2.5.2. 동유럽
2.5.3. 동양
2.6. 군사
3. 지역별 귀족 집단
4. 제도
5. 매체
5.1. 귀족 캐릭터
6. 기타



1. 개요[편집]


귀족(, nobility)은 일반 민중과는 다른 정치적·법제적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 및 집단이다. 쉽게 말해 에 의해 보호받는 특권 계층을 가리킨다.

역사적으로 현대 이전에는 세계 대부분 국가에서 귀족이 존재했으나 오늘날에는 장교 임관과 상원의원 선출에서 우선권을 갖는 영국을 제외하고는 그러한 특권은 거의 사라졌고, 공화국이 되면서 귀족이 아예 없어지거나 귀족이 남아있더라도 명예 칭호나 조상으로부터 쭉 물려받은 (城) 정도만 남은 경우가 많다. 물론 법적인 특권만 없어졌지 상당수가 대대로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과[1] 인맥을 비롯한, 거기서부터 비롯된 교육과 기타 사회적인 기회마저 일반인에 비해 접근성이 높기에 현대에도 꽤 상류층으로 자리잡고 있다.

귀족과 그 외 일반 민중을 구별하는 기준은 혈통, 재산, 공적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러한 특권 계층이 성립된 이유와 그 특권의 종류도 국가와 시대마다 천차만별이므로 귀족을 딱 이렇다고 정의하기란 어렵다. 칭호는 제각각이지만 법제화된 특권 계층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가 있다.

한국사삼국 시대, 고려중국위진남북조시대- 시대도 귀족이라는 표현이 나오긴 한다. 다만 당시에 '세족' 또는 문벌' 등의 표현을 더 많이 썼다. 서양권의 귀족과 1:1 대응은 안 되는 단어지만 비슷한 용법으로 쓰였다.

영문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8세기 중세 유럽의 귀족 비율은 프랑스의 경우 약 1%, 스웨덴은 약 0.5%, 독일의 경우 약 0.01%로 매우 적었다. 봉건제의 끝물인 18세기에는 유럽의 총 인구 1.7~9억 명 중 약 3-4백만 명으로 약 1.5%~2.3%가 되기도 했다.

흑인들은 문명화된 곳들을 제외하고는 그들 귀족이 흔히 생각되는 귀족보다는 우두머리에 가까운 개념이었다.[2] 실제로 원시적 사회의 귀족들을 우두머리 추()를 써서 추장이라고도 한다. 보통 촌장은 해야할 일은 많은데 받는 건 그다지 없기에 모두가 기피하는 직종이지만 있기는 해야하기에 하던 사람의 자식이 어쩔 수 없이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국가의 경우 그 성격상 신분제도가 있어서는 안되지만, 실질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킨 공신들을 우대하고 여러번의 숙청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최후에 승리한 세력이 공산귀족(노멘클라투라)으로 변질 되는 경우가 많다. 폐쇄적이고 견제하는 세력이 제1세계에 비해 없다시피한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이기도 하다.

현대 시대에는 재벌, 정치인들이 이에 비견할만하다. 실질적으로 사회 내에서 권력을 가진 계층이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국가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역설적으로, 이념상으로는 분명 평등을 지향해야 할 사회주의 국가들도 체제 단위 통제성이 강하다보니 같은 현상이 관찰된다.[3]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법적 틀 안에서 곧잘 부와 권력을 독식하고 후대로 상속하는 까닭에 나오는 비유적 표현이지, 정말로 이들이 귀족인 것은 아니며, 귀족에 대한 정의의 본질이 아니다.[4]


2. 역사[편집]



2.1. 엘리트 전사 계급의 탄생[편집]


서유럽에서 귀족은 중세의 전사 계급이었다. 세련되고 우아하기보다는 오히려 호전적이고 상무적이었다. 유럽 이외에도 전사계급적 성격을 강하게 가진 귀족층은 일본사의 다이묘나, 신라의 화랑으로 대표되는 한반도 고대의 귀족층,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경대부(卿大夫)나 인도의 크샤트리야 등 보편적인 현상이다.

원시적인 시대에 과연 말 같은 것들로 설득해서 귀족이 되었을까? 오히려 근본을 따지자면 조상이 학자 같은 게 아니라 군인인 사람들이 훨씬 많다. 중세 유럽 때부터 내려온 귀족 가문들의 시초는 여러 경로로 흘러들어온 호전적인 이민족들이었다. 이들의 숫자가 많아져 제압을 할 수 없었고, 차라리 회유책을 썼는데 교황청에서 그들에게 DUX라는 칭호를 내렸고 이것이 오늘날 공작을 의미하는 DUKE의 시초가 된다.

중세보다 훨씬 이전인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귀족층은 중세 귀족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모두 군인 출신도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귀족들은 군인이면서도, 학자 내지는 정치인이었고, 종종 무역상이나 기술자인 경우도 있었다. 물론, 로마 원로원(세나투스)의 경우에는 플라미니우스가 "원로원 의원은 상업활동에 종사할 수 없다"고 입법해, 로마 귀족을 뜻하는 직위 중 하나인 원로원 의원들과 그 가족들은 무역상이나 상인으로 종사하지 못했다.

서유럽 귀족들에게 이상적인 귀족 집단으로 묘사된 로마 귀족들은 노빌레스로 불리지만, 엄밀히 서유럽과 같은 의미의 순수혈통 귀족 내지 전통세습귀족으로 불릴 수 있는 집단은 파트리키다. 물론, <12표법>을 시작으로 귀족과 평민의 통혼이 인정된 이래의 공화정 시대에서 귀족(파트리키)/평민(플레브스)의 개념은 희미해졌고, 그 과정에서 플레비스 계층 중 원로원 의석을 얻은 평민 계급에 속한 원로원 귀족들은 신귀족, 평민귀족 등으로 불린 이들이 등장해 '명망가(노빌레스)'로 불리거나 원로원 가문이라고 불리긴 했는데, 이들은 기본적으로 중세 귀족과 평민 사이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고대 로마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귀족(파트리키)'은 초기 로마 왕정 시대부터 엘리트 전사계급 성격보다는, 재산 기준상 플레브스(평민)과 대비되는 성격을 가진 집단에 가까웠다. 이때 귀족의 개념은 켄투리아 의회에서의 우선 투표권과 발언권을 보장받고, 사제 담임권을 가지는 의미의 시민권적 특권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애당초 로마 초기 사회에서 재산과 집안 내 서열로 계급을 구분한 이유도 이것 때문인데, 로마군 편제의 시작을 보면 귀족과 평민을 구분하는 재산 기준은 전시상황에서 자비로 말, 무기, 식량을 감당할 수 있는 여력에 따라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5] 그럼에도 귀족이란 같은 씨족 내에서 가장이나 가부장권을 가진 이들로 지칭되는 경우도 있어, 같은 시조를 둔 씨족 안에서도 코그노멘(가문성씨)을 다르게 가져가는 씨족 내에서도 귀족과 평민으로 나뉘기도 했다.[6]

로마 세계에서 전설 시대로 불리는 왕정 시대부터 공화정 초기까지의 귀족이란, 로마 사회 안에서 보다 많은 의무를 지는 만큼의 특권을 보장받는 집단 내지 각 씨족 가문들의 가부장과 그 일가 개념에 가까웠다. 이런 이유 때문에 로마 전통혈통귀족, 즉 파트리키 씨족으로 유명한 코르넬리우스, 발레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파비우스, 유니우스 가문 등을 보면 일반적인 서유럽의 중세 이후 귀족들과 달리 한 가문의 범주에 들어가는 씨족 가문들 사이에서도 코그노멘(지파성씨)에 따라 귀족, 평민이 두루 포함되어 있다. 물론 율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만리우스 씨족처럼 집안 지파들 전체가 파트리키인 씨족 가문들도 있긴 했지만, 이들은 공화정 초기 이후 거진 대가 끊겨 사라지게 됐다. 따라서 왕정 이래 순수혈통을 유지하며 모든 지파가 귀족을 구성한 율리우스, 만리우스, 파피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세르빌리우스 씨족 가문들은 기원전 1세기를 끝으로, 율리우스 가문과 세르빌리우스 가문을 제외하곤 먼친척 중 그나마 찾을 수 있는 평민을 입양조차 거부해 멸문하게 된다.

이런 차이 외에도 고대 로마 사회에서 귀족이란, 공화정 시대부터는 파트리키와 노빌레스/ 플레비스가 있고 그 사이에는 공화정 후기부터 급부상한 또 다른 평민 집단의 갈래인 기사계급(에퀴테스)[7]이 출현했다. 따라서 공화정 시대부터는 고대 로마의 파트리키와 노빌레스, 플레브스 등의 관계 역시 초기 로마 시대부터 플레브스(평민) 계급의 경제 상황이 오래된 명망가인 극소수의 파트리키 내 대귀족를 제외하면 파트리키보다 낫거나 대등한 수준인 경우가 나타나면서 의미가 조금은 변하게 된다. 따라서 공화정 시대때의 귀족과 평민 사이의 통혼이나 상호 입양 역시 우리의 생각보다 꽤 많았다. 당장 고대 로마 파트리키를 대표하는 클라우디우스 씨족 내 대귀족 명망가 풀케르 가문만 하더라도, 이 가문의 차남이 평민계급에 속한 노빌레스 가의 리비우스 드루수스 집안으로 입양되거나 본인 스스로 아예 평민의 양자가 되어 호민관에 입후보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고대 로마사, 라틴사를 연구하는 서양학자들은 고대 로마 귀족과 씨족 연구에서 귀족을 공화정 중기 이후부터는 평민(플레브스)와는 같은 로마시민권자 중 대비되는 계급 정도로 해석하며, 제정 시대 이후의 로마 귀족 역시 중세 서유럽 귀족처럼 군인이며 전사 개념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고 말한다. 이 외에도 중세 유럽의 귀족과 달리, 로마 귀족의 개념은 로마시민권자로 동일한 징병의무와 시민권적 권한 행사 등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는데,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가령 고대 로마 사회에서 귀족으로 퉁칠 수 있는 원로원 가문들은 왕정~전제정 시대까지 몸이 멀쩡한 성인남성이라면 군대에 들어가거나, 못 가더라도 군대 경력을 쌓아야 엘리트로 인정받았다. 이는 하드리아누스 시대 이후 그리스, 푸닉(오늘날의 북아프리카 지중해 해안), 아나톨리아, 시리아, 레반트 출신의 신흥 귀족들이 원로원 내 부와 권력을 쥐기 전까지 당연시된 전통이었는데, 서기 2세기 후기 이후에도 로마 제국 안에서, 속된 말로 본인과 출신가문이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받고 싶다면 군대 짬밥이라도 맛을 봐야만 제 구실을 할 줄 아는 엘리트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로마 상류층들의 교육 방법은 기본적으로 서양 중세 귀족들처럼 무인으로서 필요한 교육을 체득하고 직접 구르면서, 그 속에서 국가 사무에 필요한 행정, 외교, 인사 등을 배우는 방식이 필수였고 이는 황실이나 대귀족과 같은 지도계층이라면 장애가 있지 않는 이상 일평생동안 담당해야 할 의무이자 특권이었다. 그래서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친혈육들인 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제왕교육을 함에 있어 군입대 후 최전선에서 싸우게 하거나, 여건상 두 후계자를 동시에 전선에 투입하기 어려운 속사정이 있다면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례처럼 자신의 집무실에 남겨두고 본국 이탈리아 안에서 군대 사무를 체득하도록 지시했다.[8] 따라서 로마 귀족이 우리가 흔히 아는 중세 귀족과 평민 사이의 이미지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고대 서양 귀족 중 대명사인 로마귀족 역시 중세 귀족과 차이가 있더라도 "군인=귀족"이었고, 군대 경험과 입대는 귀족에게 있어 특권 중 최우선시되는 조건 중 하나였다.

동시기 동아시아에서 귀족층은 화랑을 위시한 신흥 무인세력보다는 전통적으로 제사장 계급이었다. 천자천황이라는 칭호에서 알 수 있듯 동아시아에서 군주는 하늘이 부여한 계급이며 다른 귀족들은 그 군주가 권한을 위임한 계층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귀족계급의 태동에 대해서는 진화심리학적 관점보다는 문화사회학적 관점이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맞다. 중세 이후 유럽의 패권을 장악한 게르만족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정확할 것이다.

다만, 실제로 지역 영주나 부족의 족장이 그대로 귀족 계급이 된 건 사실이다. 즉, 제사장 같은 성직자들은 막 국가화를 이룬 세력의 창립멤버들이고, 주로 군사력으로 지배력을 얻은 귀족들은 그런 시스템이 세워진 나라나 지역에 어떤 방식으로든 새로이 합류하여 지배층이 된 이들이라고 보면 된다. 역사를 추적할 수 있는 사례들을 보면 군사 귀족들이 처음부터 있던 게 아니라 결국은 사람들의 인망을 모아 탄생한 초기 귀족들로부터 권력을 찬탈하고 귀족 계급을 완성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9] 게르만족 역시 게르마니아 등을 보면 초기에는 흔히 생각하는 후기의 귀족들 대신 제사장 등이 귀족 취급을 받았다. 일본에서 지배계층인 공가사무라이가 형성된 과정도 이런 식인데, 본래 일본의 군주는 단순한 군주가 아닌 고대 일본 사회의 세습 신관을 중심으로 뭉친 제정일치제 부족 사회의 우두머리였고, 공가는 그 주변에서 대제사장 역할인 군주를 보필하는 이들이었으며, 사무라이는 나중에 국가의 기틀이 얼추 갖춰진 헤이안 시대 쯤에 뒤늦게 일본 사회에 편입된 지방 호족들이 기원이다.[10] 그래서 일본사 내내 아무리 사무라이가 막부를 세워서 공가와 천황을 허수아비로 만들었을 정도로 위세가 강했을 때조차, 감히 공가 측과 맞먹으려들지도 못했을 정도였다.[11]

그리고 초기 귀족들의 성채는 전투를 하기 위한 막사에 가까웠다. 창문이 거의 없다시피하고 돌로 된 건축물이기 때문에 위생적으로도 상당히 안 좋았다. 문서에서도 보듯이 11세기에서 12세기에 세워진 성채들인 킵(keep)의 경우, 성터 주변을 파서 해자를 만든 후에 파낸 흙을 해자를 따라 쌓은 후에 그 위에 목책이나 석벽을 올린 일종의 토성(土城)이었고, 귀족들은 그 가운데에 세워놓은 탑 모양의 저택에서 살았다.[12] 우리가 아는 멋들어진 성관(城館)에서 살게 된 건, 방어건물로서의 성의 의미가 쇠락하고 순수한 방어건물인 성형 요새가 그 역할을 대체하기 시작한 16세기부터의 일이다.

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기사(Knight) 계급이 되었고, 전투가 없을 때 본인들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문화가 무도회, 전투력을 증명하는것이 필요했기에 만들어진 스포츠가 토너먼트, 그리고 일상에서도 지속적으로 강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자신의 힘을 증명해야 했는데 그게 지나치게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바람에 제동을 걸기 위해 만들어진게 소위 말하는 기사도라고 볼 수 있다. 서양의 근대화는 바로 이런 귀족문화의 철폐에서 시작됐다.

또한, 봉건 영주의 계약에는 40일간의 의무복무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간이 넘어가면 왕은 급료를 줘야 했고, 외국으로의 공격인 경우에는 영주가 참전을 거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어전인 경우, 급료는 받을 수 있지만 참전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왕이 사라지면 계약관계에 의한 영주의 권한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 하지만 여전히 40일이 넘어가면 그 값을 치러야 했다. 후기로 갈수록 직접 참전하는 대신, 왕에게 '방패세'를 내고 왕은 그 돈으로 용병을 사는 방식을 택했다.[13]

다만, 북유럽 지역은 다른 유럽의 귀족들과는 양상이 달랐는데, 스웨덴의 귀족들은 세금 면제 등의 특권을 누렸으나, 영지를 하사받지 못했으며, 농노제또한 없었기에 기본적으로는 부유계층에 불과했다.

동양권도 귀족 계급의 시작은 별로 세련된 이미지가 아니었다. 동양권의 귀족은 부족연맹국가라는 좀더 진보된 정치체제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대부분 문관과 무사, 제사의 보조를 담당하는 직책을 병행하던 이들이 자신들의 직책을 세습하면서 하나의 특권 계층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성립된 국가가 주변국을 정복하거나, 자국의 일부로 편입시키면서 본래 독립국의 군주이거나, 부족의 족장이었던 이들을 우대하는 과정에서 귀족 계층이 생겨나거나 확대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가야 멸망 후에 가야의 왕족들이 신라에서 진골로 대접받았던 것이나, 상나라 멸망 이후에 세워진 주나라에서 주나라 왕실의 친척이거나, 왕실의 등극을 도운 주변국의 군주들에게 봉토를 분봉해준 것이 있다. 특히, 고대 중국 사회의 귀족은 이렇게해서 중화권에 편입된 여러 부족들의 족장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여기서 오등작의 하나인 후작을 뜻하는 글자인 侯(제후 후)가 나왔을 정도다.[14] 일본이나 한반도의 귀족 세력도 이렇게 탄생했다. 일본의 경우는 사무라이의 기원이며 아이누족 등의 이민족들 조상 민족인 에미시계 부족들이 일본 황실에 칭신하면서 현지의 호족으로 인정받기도 했고, 그 밖에도 헤이안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수의 토지들이 이나 호족들에게 분봉되면서 귀족의 일부를 이루기도 했다. 한반도 역시 마을의 촌장이나, 부족의 족장, 속국의 군장들이 귀족 계층을 이루었다. 때문에 동북아시아에서도 귀족은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북아시아유교의 영향으로 중화권은 귀족 계층이 사라지게 되었다. 근대 이전에는 동북아도 유목민들이나 일본, 혹은 조선 이전의 한반도 등 귀족 계급이 계속 지배하였다. 대표적으로, 유학자들은 처음부터 신분이 좋지 않았던 사람들도 많아서 그런지 공부를 하면 천한 사람도 귀족보다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그런 사람을 태생적인 귀족보다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한족 귀족 계층은 유교의 세가 점점 강해짐에 따라 한나라까지는 성골과 비슷했다. 과거 합격 여부를 기준으로 삼은 조선의 양반과 다르게 한나라 시절에는 향거리선제를 통해 지방의 호족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방식이다. 양한 모두 호족을 완벽히 제어하는데 실패했으며 위진남북조 시대는 귀족의 전성기였다. 수당시대를 거치며 사대부 계층이 점점 강해지다가 주전충이 귀족을 학살한 사건도 있고 신사로 가는 과정인 형세호[15]가 떠오르면서 송나라 시대부터 혈연을 기반으로 한 귀족세력이 사라지게 된다. 더구나 이미 유학자들[16]에 의하여 시험에 통과할 능력이 없다고 공격받고 있었다. 물론 아주 오랜 귀족들은 우리나라나 일본과 달리 유목민과 결합한 신흥 귀족들이 떠오르기 전에 대다수가 망해서 정통 후계자인 세력이 없었다.[17] 따라서 유목민과 그 영향에 따른 귀족들만 존재하였다. 조선양반중국의 유교[18]에 의해 공식적으로는 귀족이 사라졌지만 주로 과거 귀족이었던 사람들이 귀족이 아니었던 사람들을 차별하면서 나타난 계층이다. 그러나 유교의 영향력을 적게 받은 유목민들이나 일본은 근대 이전까지 계속 귀족들이 지배하였다. 동북아 귀족들이 유교보다 불교도교에 더 흥미를 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동남아인 베트남조차 귀족들은 유교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여기는 중국이나 한국과 같은 한자 문화권인데도 그렇다.

사실 귀족제에서는 군주의 부모라고 해도 자리를 물려주고 나면 철저히 자식인 군주에게 숙이고 신하로서 예를 다하는 경우[19]가 많았다. 그러나 동북아에서는 군주라고 해도 부모에게 상당히 예의를 차렸는데, 이는 한고조[20]나 유교가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흥미롭게도 유교의 영향력이 적었던 일본의 귀족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2.2. 몰락[편집]


하지만 총기의 등장으로 값비싼 방어구가 더 이상 승리를 장담해주지 못하게 되면서 전사 계급으로서의 지위가 흔들리게 된다. 초기에는 풀 플레이트에서 특정 부위의 갑옷을 두껍게 하는 방법으로 대응할 수 있었지만 총기류와 판금 갑옷을 장비한 기병 간의 막대한 가격 차이 때문에 중무장 기병은 도태되어 갔다. 개괄적으로는 그렇게 넘어가나, 훨씬 이전인 중세 성기(11~13세기)부터 봉건적 토지 소유 개념이나 전사로서의 귀족 개념은 쇠퇴하고 있었다. 이민족의 침략이 종결되고, 기독교를 중심으로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귀족들은 전사보다는 경영자로서의 역할을 요구받기 시작했고, 분할상속이나 여성상속 등의 이유로 전쟁에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토지시장이 발전하면서 주군에게 행하는 충성 맹세나 군사적 봉사에 대한 강조 같은 봉건적 토지 소유 개념이 쇠퇴하고 주군의 허락이 없이도 귀족의 토지가 다른 귀족이나 부유한 평민에게 거래되었다. 12세기경 이러한 봉토의 거래는 제도적으로 인정된 권리였다. 마치 현대에 영토가 국가에 귀속된 개념이지만 자유롭게 거래가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재산으로서의 토지와 지배권으로서의 토지가 분리된 것이 이 때이고 서양의 영주권 등도 이때 생겨났다. 그 땅을 사간 사람도 이용은 마음대로 하지만 그 땅에서는 지배자인 영주에게 세금을 내고 그 지역의 법을 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한편 군복무를 할 수 없거나 하기 싫은 귀족들은 대신 방패세를 냈는데 왕들은 그 돈을 받아서 용병을 고용하든 상비군을 꾸리든 했다. 군주 입장에서도 이게 나았는데, 상비군이 생김으로써 중앙의 군사력이 영주의 군대를 다 합친 것보다 많아져 절대왕정으로서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프랑스는 장다름이라고 좀 잘사는 평민으로 꾸린 기사대를 이미 운용했다.

귀족같은 지위는 여전히 동시대 다른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히려 부르주아들의 힘이 센 영국[21]에서 시작한 산업혁명이 영국의 패권국화에 기여한 것을 봤을 때,[22] 패권국에 귀족이 있었을 뿐이지 귀족덕에 패권국이 된것이 아니다.

이처럼 더 이상 귀족은 국가의 전사가 아닌, 이익을 사수하는 집단으로 변모했고 권력을 추구하는 군주들은 정당한 방법이던 누명을 씌우던간에 귀족들에게 준 각종 이권을 회수하려 들었고 귀족들은 이를 견제하며 버텼다. 그러다 프랑스에선 루이 16세 치하 혼란스러운 시대에 막 귀족의 지위를 얻은 전 부르주아들이 더이상의 경쟁자를 얻기 싫어하여 다른 부르주아들이 출세할 길을 막는 데에 적극적이었고, 이에 격분한 부르주아들은 귀족들의 권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평민들을 선동하여 이는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얼떨결에 루이 16세까지 참수하는 대참사가 일어나자 당황한 유럽 국가들은 한데 뭉쳐 프랑스를 군주제 국가로 되돌렸으나 혁명은 그치지 않았고 이후 프랑스는 정식으로 공화제가 되어 귀족 계층이 폐지된다.

이후 사라예보 사건으로 열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고, 전쟁의 결과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왕정이 폐지되었고 러시아는 전쟁 도중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왕권이 뒤집혀버렸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국가에서 해방된 수많은 신생국들이 소련이나 미국을 모방해 신분제가 없는 정치 체계를 채택함으로서 귀족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라진다.


2.3. 현황[편집]



2.3.1. 귀족이 있는 국가[편집]


"귀족이 있는 국가"의 대표격. 한국 사람들은 영국을 보고 아직도 왕이 있냐며 의아해하는데 사실 왕은 국가원수의 일종이니까 이상할것은 없지만 아직도 귀족이 있다는 사실에 더 놀라워 하는사람들이 많다. 성문(成文) 규정은 없으나, 작위 수여는 군주의 관습적 권한이다. 1965년 이후 非 왕족 출신에 대한 작위 수여는 3건에 불과하다.[23] Lord의 칭호를 받는 공후백자남 세습 귀족 가문은 900개 가량이다. 성립 시기에 따라 잉글랜드 귀족, 스코틀랜드 귀족, 아일랜드 귀족, 그레이트브리튼 귀족, 연합왕국 귀족으로 구분된다. 아울러 귀족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남작 밑에 준남작이 있으며,[24] 세습되지 않는 일대귀족(전원 남작)이 있다. 1999년 귀족원 개혁으로 759석 중 92석만이 세습귀족의원의 몫으로 남았지만, 귀족이 명예칭호에 불과한 다른 나라와는 달리 작위에 따른 공적 특전이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 특권이라는게 영국군 장교로 우선 선발 혜택을 받는 것과 상원의원에 우선 적으로 임명될 수 있는 것, 세금 감면 빼곤 별 의미없는 것들 뿐이다. 게다가 20세기 초반 이후 영국 상원의 영향력은 극히 작아져서, 귀족들은 평민 출신으로만 선출되어 구성되는 하원으로의 진출이 막히는 문제때문에, 그 출신 성분이 외려 짐이 되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귀족 출신인데 정치가가 되기 위해 귀족 작위를 반납하거나,[25] 반대로 특정 정치가에 대해 군주가 귀족으로 임명해서 해당 정치인의 정치 경력을 끝장내기도 한다. 특권이라고 하면 유서깊은 가문에 한해서 명예직을 받거나,[26] 귀족이 영국군 장교에 입대를 희망하여 왕립 사관학교 등으로 지원해서 입학/입대를 할 시, 장교 선발과정에서 특혜를 받아 일반인보다 빠르게 장교로 입대가 가능한 것인데, 원래 귀족의 유래가 전사이기에 별로 대단한 건 없다. 특히 영국의 귀족들은 전쟁이 나면 체면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앞장서서 입대해서 야전으로 싸우러 나가므로,[27] 이런 특권이 별로 득될 것도 없다. 예나 지금이나, 귀족은 적군들의 좋은 표적이 되기 때문에, 말이 좋아 특권일 뿐이지 평민 출신 장교나, 부사관, 병사들보다 더 먼저 죽을 위험을 안고 있어야 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서양의 귀족제도가 무력을 기반으로 한 특권계층이기 때문에 군사적인 실적이 없는 귀족은 권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조선시대에 문맹 국왕이랑 비슷한 상황으로 놀림거리가 되는 문제다. 유럽 각국의 왕족들이 명목상이나마 군복무를 하는 것도 이런 영향이며 솔선수범이나 노블리스 오블리제와는 좀 다른 얘기다.[28]
암데일의 준남작인 투퍼 가문을 비롯한 여러 귀족 가문이 현재 존재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자국민이 영국 왕실로부터 받은 기사 작위를 인정하는 지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일단 영연방 왕국으로서 귀족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호주의 귀족들을 분류해놓은 영문 위키 문서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자의교서 "교황궁 규정 변경"(Pontificalis Domus)을 통해 교황궁에서 토를로니아 가문과 콜론나 가문을 제외하고[29] 나머지 귀족들의 의례상 의무를 정지하여 완전히 무력화되었지만,[30] 작위 수여는 여전히 교황의 권한으로 남아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즉위 초반기에 몇몇 폴란드 동포들에게 작위를 수여한 바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교황의 작위 수여는 조용히 이루어지며, 사도좌공보에도 실리지 않는다. 등급은 기사, 남작, 자작, 백작, 후작, 공작, 프린스의 7단계가 있다. 그 외에 기사작위는 아니지만 기사훈장 또한 수여하고 있다.[31] 작위는 검은 귀족 문서를, 훈장은 교황 훈장 문서를 참고할 것.
성문규정은 없으나, 작위 수여는 군주의 관습적 권한이다. 공작, 후작은 내국인 작위로는 존재하지 않고,[32] 백작, 자작, 남작, 기사(Ridder), 無작위귀족(Jonkheer)의 5단계가 있다. 1994년 이후 非왕족 출신에 대한 새로운 작위 수여는 없다.
"군주는 작위를 수여할 권리가 있으나, 이에 어떠한 특권도 수반되어서는 안 된다(헌법 113조)"고 규정한다. 공후백자남 아래 기사(Ridder), 無작위귀족(Jonkheer) 등 7등급이 있다. 가문의 수는 1천개 남짓.
작위 수여는 군주의 권한으로 헌법 제62조에 근거한다. 영국과는 달리, 작위에 따른 공적인 특권은 없다.[33] 1948년 프랑코 총통에 의해 작위수여가 부활하여 현재에 이른다. 콜럼버스의 후예인 베라과 공작(duque de Veragua), 아즈텍 왕실의 후예인 목테수마 데 툴텡고 공작(duque de Moctezuma de Tultengo), 잉카 왕실의 후예인 산티아고 데 오로페사 후작(Marquesado de Santiago de Oropesa) 등이 있다. 스페인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2011년 기준으로 작위 수는 2,874개로 중복 보유자까지 고려하면 2,205명의 작위보유자가 있다. 통념과 달리 가장 많은 작위는 후작으로 2009년 기준 1,370개로 거의 절반에 가깝다. 그 다음은 백작(946개 작위), 남작(169개 작위), 공작(153개 작위), 자작(140개 작위) 순.
기존의 귀족 작위들을 없애진 않았으나 1902년 이래로 왕실을 제외한 작위 수여가 없으며 1975년 군주의 작위 수여 권한을 폐지했다.
기존의 귀족들을 없애진 않았으나 19세기에 귀족들의 특권을 모두 폐지했다. 현재 200개 정도의 남작과 백작 가문이 존재한다.
현재 10~15개 가량의 귀족 가문이 존재한다. 비교적 신생국가여서 그런지 수가 적다.[34]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각 주의 술탄들을 제외하고도 여러 귀족 가문이 현존하고 있다. 그러나 사바사라왁말레이시아 편입 후에 귀족들이 모두 사라졌고, 한때 말레이시아의 일부였던 싱가포르는 원래부터 귀족이 없었다. 느그리슴빌란 주는 연방제 국가인 말레이시아의 한 주이면서 그 자체로 또 연방을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말레이시아 정부가 규정하는 귀족 제도와는 별도로 자신들만의 귀족 제도가 존재한다.[35]
전통적으로 부족장들을 귀족으로서 대우하며,[36] 영국과 마찬가지로 이들에 대한 공적인 특권이 존재한다. 현재 양원제 형식으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가 존재한다. 귀족들은 상원을, 평민들은 하원을 구성하는 식이다.
통가와 동일한데, 오세아니아의 국가 대다수는 다 이런 케이스다. 그래서 사모아의 국가원수는 전통적으로는 사모아 부족 연맹의 대추장으로 취급된다.
전통적으로 9단계로 나뉘는 귀족 계급이 존재했으며,[37] 현재도 이들은 '하이쏘'라고 불리면서 사회의 기득권을 독점하고 있다.[38] 심지어 드라마같은 태국산 창작물에서는 귀족을 미화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태국우민화 정책과 연결되어 태국의 양극화를 고착화시키고 있다.


2.3.2. 귀족 폐지 국가[편집]


대체로 군주정에서 공화정으로 바꿀 때 군주와 함께 폐지하는 경우가 많아서, 현대 공화정 국가들은 거의 다 귀족제를 폐지했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국가에 따라서는 공식 석상에서 귀족 호칭을 쓰는 정도는 허락하기도 하며, 이 경우 사실상 이름의 일부로 취급한다.

프랑스의 귀족제는 프랑스 혁명 발생 이후, 1790년에 폐지되었다가 1802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서 부활되는 등 제정과 더불어 폐지와 부활을 반복하다가 1870년 프랑스 제국이 무너지고 프랑스에 공화정 체제가 자리잡으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스에선 귀족 가문의 후예들이 자신을 공작이니 백작이니 칭호하는 일이 흔했고 정부 차원에서는 귀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공식 석상에서 구 귀족가문의 명사들을 XX백작, XX공작으로 불러줬다.[39] 그러다 1975년에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안와르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의 방불에 맞춰서 이러한 관례를 폐지했다. 이러한 관례를 폐지한 이유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지스카르 대통령은 "프랑스는 공화국이다"라는 한마디로 대답했다. 재미있게도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본인도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당장 성씨인 '데스텡'(d'Estaing)도 "에스텡의"라는 뜻으로 성씨 앞의 d'(드)가 귀족임을 나타내는 수식어이다.
왕정이 폐지된 이듬해인 1947년에 폐지되었으나 무솔리니 정권 이전에 받은 귀족 칭호 자체는 인정해주었다. 이와는 별개로 기사 훈장은 수여하는데, 단순히 이름이 기사 훈장일 뿐이지 영국마냥 쿼터가 있는 작위는 아니기에 수훈자가 굉장히 많다.
핀란드의 귀족 제도는 1809년까지는 스웨덴의 귀족제를 따르다가 1809년부터는 러시아에서 정립한 핀란드 귀족제를 따랐다. 핀란드에서 최후의 귀족은 1912년에 서임되었으며 이후로 세습이 가능한 작위가 수여된 바가 없다. 핀란드는 공화국임에도 불구하고 귀족제도를 폐지하지 않았다.[40] 하지만 의회 수립과 더불어서 차차 귀족들의 권한을 줄여 나갔고 1920년에 세금 특권을 폐지함으로 주요 특권들을 모두 회수했으며 1995년 귀족들의 특권을 마침내 말소했다. 여전히 핀란드 공화국 정부는 기사작위를 서임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기사작위를 귀족으로 인정하지는 않는 편이다.
화족이라는 이름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존재했으나 패전한 이후에는 GHQ에 의해서 1947년에 폐지되었다. 이때, 다이쇼 덴노의 직계를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은 평민 신분으로 전락했다. 이를 신적강하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상으로 백성이 성씨를 가진 경우는 없었으며 백성이 성씨를 갖는 것은 절대 금지되었다가[41] 메이지 시대부터 성씨로로 구별하도록 정했다. 백성이야 족보가 없었으니.. 성씨를 가진 경우는 귀족과 사무라이 가문만이 가질 수가 있었으니 모든 일본인 중에서 족보가 있는 경우에는 귀족 가문이나 사무라이 가문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미 전근대에도 관료제와 과거제의 발달로 사회구조로 볼 때는 귀족들이 지배층이 아니게 되었으나, 엄연히 작위제도와 그에 따른 귀족신분은 존재하였다. 왕정 시절에는 공자의 후손이 받은 연성공 같은 작위가 있었고 친왕, 오등작의 개념이 존재하였으나 신해혁명 이후에는 복잡해졌다. 정부 차원에서 새로운 작위를 더 수여하지는 않았지만 기존 청나라가 수여한 작위나, 연성공같이 전통적으로 세습되던 작위들, 그리고 내몽골/위구르/티베트에서 전통적으로 세습되던 소수민족들의 작위의 존재와 세습은 인정한 것이었다. 당장 청나라 황제위부터 청나라 소조정 명목으로 존속되었다. 위안스카이홍헌제제를 시도했을 때는 체계적인 오등작 체제를 정비하여 전국의 군벌들을 귀족으로 서임한 것이 최후의 작위 수여였으며, 1916년 제제 선포가 폐지되면서 귀족 제도도 다시 폐지되었다. 청나라 소조정은 1924년에 핍궁사건으로 폐지되었고 연성공 작위도 1935년 귀족 작위에서 세습장관직으로 대체되었다. 소수민족들의 작위는 대체적으로 유지되었으나 군벌혼전에 휘말려 멸망당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고, 중일전쟁, 국공내전에 휘말려 최종적으로 모두 소멸되었다. 앞서 말한 연성공의 경우는 중화민국 수립 이후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라는 세습직 공직으로 바뀌어서 타이완에서 현존하고 있으나, 보수를 받지 않는 명예직에 불과하다. 현대의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인민공화국으로서 귀족이 없다.
이집트는 나세르의 쿠데타 이후, 1952년에 귀족제를 먼저 폐지했으며 1953년에 왕정도 폐지해버렸다.
몽골은 1925년에 귀족제를 공식 폐지했다.
멕시코가 독립한 이래로, 두 번이나 황제가 다스리는 군주정이 들어섰으므로, 원래 귀족이 있었다. 아즈텍 제국 황실의 후손인 목테수마 가문이나[42] 몇몇 콩키스타도르의 후손들같은 멕시코의 토착 귀족도 있고 스페인 본국에서 이주해온 귀족들도 소수 있었다.[43] 이들은 1861년에 멕시코 최후의 군주인 막시밀리아노 1세가 처형되고 멕시코가 공화국이 된 이후에도 토지의 대부분을 차지한 대지주로서 사회에서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공화국 정부로부터 그 특권을 인정받고 귀족 작위를 인정받았는데, 1913년에 멕시코 혁명이 발발한 바람에 모든 기득권을 상실하고 귀족 작위와 그에 수반된 공적/사적 특권 또한 전부 박탈되었다.
영국 식민지이던 인도 제국 시기까지는 각지의 번왕을[44] 포함한 귀족들의[45] 지위가 인정되었으나, 인도의 독립과 동시에 번왕과 귀족들의 법적 지위와 특권이 모조리 박탈당했다.[46] 현재도 번왕이 있기는 하나, 법적으로 공인받는 존재도 아니고, 아무런 특권도 법적 지위도 없다. 이 번왕들은 여전히 지역 유지로서 영향력을 유지하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망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 지역의 번왕은 현지 관광 산업을 꽉 잡고선 여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영향력을 불려서, 주 정부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지역 유지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시골 지역의 번왕은 자신의 거대한 궁전을 고급 호텔로 개조해서 생계를 잇고 있는데, 명색이 그 지역의 번왕이라는 사람이 인건비가 없어서 자기가 직접 손님한테 서빙하러 다니고, 모후는 아들과 함께 하인도 없이 궁전 청소를 직접 도맡아 하는 신세다.
인도와 동일하다. 이쪽도 여러 번왕국들이 존재했으나, 1950년대에 모조리 폐지했다. 파키스탄의 번왕들은 인도의 번왕들보다 더 영향력이 약해서 아예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번왕의 존재가 아웃 오브 안중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나마 번왕의 존재감이 있는 지역에서도 번왕이 대놓고 정부에 의해서 무시당하는 상황이다. 예를 들면 카라코람 산맥에 위치한 훈자 지역은[47] 전통적으로 세속주의 성향이 강했기에 현지의 번왕이 직접 이 지역에 이슬람 율법에 기초한 법률을 강요하지 말라고 파키스탄 정부에 항의했는데도 무시당했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까지는 각지의 번왕과 기타 영주들에게 법적인 지위가 인정되었으나, 독립 이후에 모조리 부정되었다. 발리 섬이나 욕야카르타같이 왕실의 존속 기간이 길었던 지역은 여전히 왕실 관련 인사들이 현지의 지역 유지로 군림하는 중이다.
심지어 욕야카르타는 주지사도 욕야카르타의 번왕이 겸하고 있다. 욕야카르타의 번왕이 독립운동에 기여했기 때문에 지역에서의 특권을 묵인한 것에 가깝다. 그런데 2012년에 인도네시아 국회에서 욕야카르타의 주지사 직위는 세습직임을 인정해서 사실상 욕야카르타 번왕의 지위가 법적으로 인정되었다. 이것이 인도네시아가 자국 내 귀족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욕야카르타 현지의 관습을 명문화해서 인정해준 것일 뿐이다.
1922년 이전까지는 아일랜드가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영국 왕실이 임명한 귀족들이 대거 존재했다.[48] 아일랜드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이를 위해 벌인 아일랜드 독립 전쟁에서 아일랜드 독립군이 승리하면서 아일랜드 영토에 남아있던 귀족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죄다 친영파로 몰려 영국령으로 남은 북아일랜드로 추방되어 귀족 제도가 사실상 소멸하였고, 1922년에 아일랜드 자유국이 선포되면서 아예 귀족제의 폐지를 명문화했다.
1973년의 쿠데타로 인해 왕정이 폐지되면서 귀족제가 소멸하였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은 구 귀족 세력이 아직도 현지에서 지역 유지로 군림하는 경우가 꽤 있다.
1830년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나서 파나리오테스라고 불리던 전통적 귀족들의 지위가 대거 박탈되었다가, 공화정에서 왕정으로 전환된 이후에는 왕족들에게 일부 귀족 작위가 수여되었다.[49] 하지만 1974년에 왕정이 폐지되어 공화국이 된 이후로 남아있던 귀족 작위도 다 폐지했다.
오스만 제국전성기에는 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초창기에 튀르크 부족과 비잔티움 제국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토착 지배자들에게 자치권을 주거나 관직을 주는 등 귀족 비슷한 개념 자체는 있었지만, 메흐메트 2세 이후로는 데브시르메 제도를 통해 예니체리를 비롯해 평민의 아이들을 선발해 키우는 제도가 정착하면서 기존의 튀르크, 비잔티움계 귀족들은 자기 동네에서 큰소리좀 칠 뿐 중앙정계에서 거의 멀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상업을 기반으로 발칸 반도 출신의 동유럽계 귀족 세력인 파나리오테스가 성장하고 이들의 부와 재력에 오스만 제국 황가와 정교회가 의존하기 시작하고, 데브시르메 제도가 문란화되면서 실질적인 귀족으로 군림하는 가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여러대에 걸쳐 재상을 해먹은 쾨프륄뤼 가문이 있다. 이후 파나리오테스와 기존의 동네대장이었던 중동아나톨리아 반도 등지의 튀르크계, 아랍계 토착 귀족 세력이 혼재하는 형식의 귀족 제도가 존재했으나,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그리스를 필두로 하여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들이 독립하며서 현지의 토착 귀족이었던 파나리오테스들이 스스로의 모국에 합류하였고 결국 귀족 제도 자체가 휘청거리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중동 지역들도 대거 독립하면서 아랍인 귀족 세력도 이탈해 버렸고, 최종적으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 공화정이 선포되어 터키 공화국이 선포된 뒤로는 모든 귀족 세력이 일소되고 귀족제가 소멸하였다.[50]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으로 귀족제가 크게 위축되었고, 뒤를 이은 10월 혁명으로 소련이 출범하면서 귀족제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까지만해도 귀족 가문들이 수도 없이 존재했으나, 전후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귀족들의 지위와 특권이 모조리 박탈되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작위명 정도는 공식석상에서도 붙일 수 있다. Anton Wolfgang Graf von Faber-Castell가 대표적인 예.[51]
과거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귀족으로서 골품제, 문벌귀족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오등작을 폐지하고 군작만을 종실에 봉하면서 법적으로 귀족 제도가 없어졌지만 양반 구성원들이 사회적으로는 어느 정도 귀족처럼 기능했다.[52] 이후, 조선을 이은 대한제국에서도 귀족은 없었다.[53]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야 핵심 친일파들이 조선귀족 작위(공을 제외한 오등작)를 받는 등 일본 제국화족처럼 귀족 제도가 유지되었지만,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없어졌고, 광복 이후인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민국 헌법에서 특권계급을 부정하는 헌법조항(11조 2항)을 넣어서 현대까지 내려온다. 귀족적인 계급문화도 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으로 상당부분 사라져 법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귀족은 소멸하였다. 대한민국 헌법 2장 제11조 2항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에서 강력히 부정하고 있다.

그 외 독일이나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법적 신분으로서 인정을 받지는 못하지만 귀족 칭호(Prinz, Graf, Freiherr 등)를 성명의 일부로써 사용할 수 있다. 이 때 반드시 'von'이 붙는 것은 아니다.[54] 남태평양의 통가피지에서는 지방 추장들을 귀족급으로 대우하여 의회에서 그 의석을 보장하고 있다.

유럽에서 귀족과 평민들의 성은 유래가 다른데, 귀족들은 주로 연고지, 특히 지배하는 영지의 이름 앞에 그곳에서 비롯하였다는 뜻의 소사(particle)를[55] 붙여 자기 성씨로 삼은 것으로, 그 풍습의 원조는 프랑스였다. 프랑스에서는 지명의 어두가 자음인지 모음인지에 따라 "de" 혹은 "d'"를 사용하였고, 이 풍습이 유럽 각지로 확산되어 각국 언어에 맞게 변화하였다. 가깝고 비슷한 언어습관이 있는 이탈리아(De, Di)나 스페인(de)에서도 비슷한 풍습이 생겼고, 마침내 독일인들도 따라했다. 우리가 흔히 독일 성씨로 생각하는 "von"은 영어에서 'of'로 번역되며, 그 밖에 "zu"나 "von und zu" 등이 쓰였다.[56] 반면, 평민들은 그냥 성씨 없이 살거나 자기 직업명 혹은 인근 거주지와 자기 거주지를 구분할만한 지형으로써 성씨를 삼고는 했고,[57] 지명을 쓴다면 어디서 온 누구라는 성씨의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귀족의 경우, 주로 가문의 영지나 작위의 이름에서 성이 유래했다. 유명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우 현 스위스에 위치한 합스부르크 성에서 유래했고, 후술할 비텔스바흐 가문의 이름은 저지 바이에른에 위치한 비텔스바흐 성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몇몇 명문 가문은 그냥 시조가 되는 사람의 이름을 성씨로 삼아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독일의 공화국 체제가 귀족 작위를 인정하지 않자,[58] 내로라 하는 명문 왕공귀족은 소수만 아는 자신들의 성씨를 쓰느니 자신들의 영지의 이름을 쓰기로 결정했다. 가령 대대로 바이에른의 왕족이었던 비텔스바흐 가문은 독일 제국이 몰락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고 나서는 성씨를 다 "von Bayern", 즉, "바이에른의"로 바꿨다. 2013년 비텔스바흐 가문의 수장인 프란츠는 자신의 성씨를 아예 "Herzog von Bayern", "바이에른의 공작"으로 바꿨다. 그래서 가주인 프란츠 비텔스바흐의 법적 성명 "Franz Herzog von Bayern"을 그대로 번역하면 "바이에른의 공작 프란츠"가 된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비텔스바흐 가문은 굉장히 큰 가문이라서 "Herzog in Bayern" 성씨를[59] 쓰는 사람들이 많다.[60]

역사적으로는 귀족 작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국가의 인물이 타국에서 예외적으로 귀족으로 대우받은 경우도 있다. 가령, 미국에게 합병된 하와이 왕국[61] 귀족이자 독립 운동가, 정치인이었던 로버트 윌콕스는 자국을 합병한 미국 정부가 헌법상 귀족을 인정하지 않으므로,[62] 하와이 왕족 신분을[63] 통한 귀족 신분을 하와이 내 어느 곳에서도 내세울 수가 없었지만, 그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이탈리아 왕실이 그를 자국법에 따른 귀족으로서 인정해 주었다. 작위를 하사하진 않았지만, 귀족으로는 인정받았으므로 이탈리아에서 윌콕스는 무작위 귀족으로서의 예우를 받았다. 조선에서도 이범진이 러시아에서 공작 대우를[64] 받았으며[65] 영친왕은 유럽 여행 시에 백작으로 대우를 받은 예가 있다. 그 외에도 역사상 최초의 비(非) 백인 출신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수상자였던 시드니 포이티어라는 미국 배우는 태어날 때부터 미국과 바하마의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었고 바하마는 영연방 입헌군주국 중의 하나이므로, 그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자, 공식적으로 '경'으로 불리게 된 미국인이라는 흔치 않은 경력을 보유하게 되었다.[66]

2.4. 승계[편집]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왕위 계승의 법칙

작위 승계 방식은 국가마다 시대마다, 심지어 가문마다도 다르게 나타났다. 다만 일반적으로 시대가 흐르면서 중세 말에 분할상속제에서 장자상속제로 변한 것이 일반적이다. 일단 서유럽 본토에서는 살리카 법의 영향으로 공식적으로는 남자만 작위를 세습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만 영국이나 남유럽의 경우에는 여자의 작위 계승 그리고 그 자녀들에게 작위를 물려주는 것이 허용되기도 하였다. 영국의 경우에는 여자의 작위 계승 허용 여부가 가문마다 다르다. 연합왕국이 성립(1707년)되기 이전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귀족의 경우에는 여자의 작위 계승을 허용하는 가문이 꽤 있으나,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공훈귀족의 경우에는 여자의 작위 계승을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 다만 공훈귀족이라 할지라도 작위를 수여받는 사람이 딸밖에 없다면 칙허장을 통해 그 다음 대만은 맏딸이 계승할 수 있게 해 주고, 3대째부터는 딸들이 낳은 남자 자손들만 계승권을 가지게 해 주는 경우도 많았다.[67] 참고로 영국 공작가의 경우에는 말버러 공작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자의 작위계승을 허락하지 않으며, 2012년 현재 영국에는 여공작과 여후작이 없다. 말보로 공작가의 경우에도 초대 말버러 공작 존 처칠에게 아들이 없어 2대 공작위를 딸이 물려받았으나 3대는 외손자가 물려받았고, 그 이후에는 여자가 실제로 작위를 계승한 적은 없었다.

스페인에서는 2000년대에 법률이 개정되어, 아들이건 딸이건 가장 먼저 태어난 자녀가 작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한편 독일어권이나 러시아에서는 작위가 마치 성씨처럼 자녀들에게 계승된다 할 수 있는데, 이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나 동양의 귀족제와 비교했을 때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물론, 귀족의 자녀들이 다같이 부모의 작위를 칭할 수 있는 것과는 별개로, 여기도 작위에 해당하는 영지의 통치권은 당연히 후계자에게만 주어졌다. 그래서 부모가 여러 개의 작위를 칭하는 게 아니라면, 후계자를 제외한 나머지 자녀들은 영국 귀족들과 똑같이 성직자나 학자의 길을 걷거나, 군대에 입대해서 장교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68] 하지만 어쨌든, 처음부터 몇번째 자녀에게 주는 것이 정해져있는 일부 작위를 제외하면[69] 모든 작위를 장남에게만 몰빵해주는 영국과는 달리, 독일이나 러시아에서는 일단 자녀들에게 나름 공평하게 부모가 가진 작위들을 분배하거나, 이게 불가능하면 아예 작위를 공동으로 칭할 수 있게 허용되었다는 점때문에, 통상적인 귀족의 삶을 벗어나버리는 일은 드물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백작이면 큰아들뿐만 아니라 작은아들도, 심지어 딸들도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을 백작이라 칭할 수 있었다. 다만, 딸들은 자기의 백작 칭호를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없었고 단지 귀족과 결혼한 경우에만 남편의 귀족 칭호를 물려줄 수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되면 남계 자손들이 늘어나는 만큼 귀족의 수가 계속 증가하므로, 어느 정도 귀족의 숫자를 조절할 필요가 생기기에 귀천상혼 같은 제도도 생겨났을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유럽에서는 러시아에는 대공이 많다는 것이 조롱거리일 정도였다. 니콜라이 2세의 영국 망명 시도 때도 니키가 그 지긋지긋하게 많은 대공들을 거느리고 온다면서?라고 왕실에서 빈정거릴 정도였고, 나폴레옹 평전을 쓴 매클린은 코르시카 귀족의 지위에 대해서 러시아 대공이랑 비슷하다=개나소나 귀족이다라는 식으로 냉소적인 평가를 남긴 바가 있다.

제정 러시아의 경우에도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암살자로 유명한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은 어머니가 공작가의 마지막 혈육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성씨를 따랐다. 단 아버지의 작위인 수마로코프-엘스턴 백작위도 보조적으로 칭하긴 했다.

밸푸어 백작위는 만약 당주가 계승자 없이 사망한다면, 작위는 단절되지않고 사촌이 계승한다.

2.5. 칭호[편집]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공후백자남의 오등작이 있다.


2.5.1. 서유럽[편집]


독일어권이나 러시아에서는 승계한 대수(代數)와 작위, 봉작지(封爵地)를 따로 기재하지 않고 단순히 이름만으로 귀족을 나타낸다. 이것은 아래 승계 단락에서 서술하듯이 작위가 장남에게만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과 관련이 있고,[70] 따라서 작위가 성씨와 한 묶음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 Richard Karl Freiherr von Weizsäcker(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독일 전 연방대통령)

영국이나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에서는 이름 뒤에 작위명을 대수와 함께 기재함으로써 귀족임을 나타낸다.

프랑스 등 나머지 유럽 대륙국가에서는 대수는 포함시키지 않는 채 작위의 이름으로만 부른다.
  • Jacques Rogge, Count Rogge(벨기에 출신으로, 8대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 bethleni gróf Bethlen István(헝가리 전 총리)[71]

영국에서 작위의 칭호는 문장원(College of Arms)이라는 기관과 협의하여 결정한다. 대부분 자신의 이름과는 별도로 노섬버랜드 공작(The Duke of Northumberland)처럼 본가에 가까운 지명(본래는 영지를 의미한다)을 취하지만, 다이애나 스펜서 전 영국 왕세자빈의 부친(현재는 남동생)의 작위명인 스펜서 백작(The Earl Spencer)처럼 성씨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 같은 성씨를 쓰는 귀족이 또 있으면 뒤에 of 지명(보통 연고지)를 붙여서 구분한다.[72] 어떤 경우든 당주는 로드(Lord)를 붙여서 부른다. 또한 명목상의 작위를 칭하는 장남과 마찬가지로, 공작과 후작의 차남 이하는 로드에 성씨가 아닌 이름을 붙이고, 백작이나 자작, 남작의 아들이라면 디 오너러블(the Honourable)을 붙인다. 여성의 경우는 조금 달라서, 공작과 후작, 백작의 딸은 레이디(Lady)를 붙이고, 자작과 남작의 딸은 디 오너러블을 이름 앞에 붙인다.

영어에도 한국어에서의 폐하, 전하, 합하, 각하 같은 종류의 경칭이 있다.[73] 가령 여왕을 직접 불러서 말을 걸 경우라면, 처음에 "Your Majesty"와 같이 "요- 마제스티",[74] 2번째부터는 "Ma'am"과 같이 "마-암"이다.[75] 왕실의 남성을 불러야 할 경우, 처음에는 "요- 하이네스"(Your Highness), 2번째부터는 "서"(Sir)라고 한다. 3인칭으로 사용할 경우에는 각각 "허- 마제스티"(Her Majesty), "히즈 로열 하이네스"(His Royal Highness)가 된다. 마찬가지로 귀족의 경우, "요- 로드쉽"(Your Lordship), "요- 레이디쉽"(Your Ladyship)이라고 하는데, 군주의 경우 공작 등을 "요- 그레이스"(Your Grace)라고 부른다.

한편, 귀족은 아니지만 작위와 마찬가지로 총리 등의 추천을 통해 군주가 수여하는 칭호 중에 준남작(baronet)과 기사(knight)가 있다. 2가지 모두 이름 앞에 존칭인 Sir/Dame을 붙이지만, 전자는 세습되고 후자는 당대에 한정된다. 준남작의 경우 기사와 구별해야 할 때는 Sir Marcus Worsley, Bt.(또는 Bart) 라고 표기한다. 부부를 함께 표기할 때는 Sir David and Lady Wright 식으로 한다. Sir/Dame에는 반드시 이름이 따라 붙으며, 직접 성이 오는 경우는 없다.

백작 이상의 고위 귀족, 여러 개의 작위를 가진 귀족들은 후계자에게 귀족의 칭호를 예우상 붙여줄 수 있다. 물론 실제 작위를 수여하는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우상 그렇게 불러줄 뿐이다. 이를 예우 경칭(Courtesy title)이라고 하는데, 나라마다 상세한 규칙에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귀족/영국의 '자녀와 예우 경칭' 문단으로 이동하면 어떤 식인지 이해할 수 있다.


2.5.2. 동유럽[편집]


9세기 이후로 슬라브어권루마니아 일대에서는 보야르라고 불린 귀족 계층이 있었고, 이들의 우두머리를 보이보드라고 했다. 이 명칭은 서유럽기사공작에 대응하는 칭호로 쓰이기도 했으며, 오늘날의 세르비아보이보디나 자치구의 이름은 과거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부터 현지의 귀족이 이 지역의 공작으로 봉해진데서 유래했다.[76]

동로마 제국의 경우는 통일 로마 제국 시기부터 내려온 귀족 가문[77] 이외에도, 제국의 영역에 편입된 슬라브계 및 알바니아계 귀족들이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파나르 지구[78]에 대거 몰려살았는데, 1453년에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 오스만 제국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추가로 루마니아계 귀족들도 여기에 합류하여 오스만 시대의 세습 귀족 계층인 파나리오테스가 형성되었다. 이들 파나리오테스는 이후에 그리스 독립 전쟁을 필두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발칸 반도의 각국이 속속들이 독립하자, 제각기 독립운동에 가담하면서 모국으로 귀환하여 소멸하였다. 일부 친오스만 성향의 귀족들은 제국에 남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민족주의 열풍에 깊은 영향을 받아서 모국의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그중에서 직접 독립운동을 이끌은 몇몇이 모국의 군주나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79]

러시아는 본래는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대동소이한 귀족 제도가 있었으나, 전제군주정이 강화됨에 따라 점차 봉건귀족들을 제거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전제군주정이 약화되면서 사실상 귀족제도가 다시 부활했다. 서구화가 된 이후의 러시아의 귀족 제도는 공작-백작-남작으로 구성된 삼등작 제도였다. 후작이나 자작이 없는 것이 의아할 수 있겠는데, 이들 작위는 서유럽에서도 정상적인 작위는 아니었기 때문에 타국의 작위를 물려받았거나, 그 조상이 외국의 작위를 보유한 채로 러시아에 귀화한 경우가 아닌 이상, 구태여 이런 작위를 줄 필요는 없었다.[80]

2.5.3. 동양[편집]


동북아시아 중 중국에선 주나라봉건제에서 유래한 공후백자남 오등작 작위가 사용되었다. 천자는 제후를 봉하고 제후는 가신을 봉했다. 이들 천자국 내의 제후, 제후국 내의 가신들이 귀족으로 취급되었다.

한국의 고대 왕조 조선, 부여는 '상(相)', '가(加)'와 같은 우리 고유의 작위가 있었다. 이는 각 부족 가문의 장에게 수여돼 강한 권한을 주었다. 이들이 귀족으로 취급되었다.

고구려, 신라, 백제는 각국만의 관등이 있어 소수 귀족 계층만이 오를 수 있는 신분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고구려의 고추가, 막리지, 백제의 좌평, 신라갈문왕, 각간 등등. 신라는 건국 초기부터 이어진 골품제에 의거해 귀족층을 규정했으며 삼국통일 과정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귀족층을 신라의 귀족체계에 편입시켰다. 신라는 이후에도 자체적 기준을 사용했지만 중세에 새로 건국된 나라인 발해와 고려왕조부터는 중국식 작위를 도입해 귀족들이 왕작, 오등작, 군(君)에 봉해졌다. 고려는 초기에는 오등작 외에 태자·군·부인 등 독자적인 칭호를 사용해 왕족들을 책봉했고 중기부턴 오등작만 사용하다가 말기엔 다시 군(君)을 봉했다. 조선은 초창기 오등작을 봉했다가 군(君)으로 변경했고, 대한제국 때 공작을 책봉한 사례가 있다.

한국[81]중국[82]의 작위는 봉작지를 표시한 데 비해, 근대 일본화족제도는 봉작지 없이 작위만 표시하였다.[83]

2.6. 군사[편집]


귀족이 군대에 입대할 경우 평민과는 다른 신분임을 표시해 뒀는데 이를 위(尉)라 하며 이는 오늘날 위관급 장교의 유래가 된다.

전근대 군대는 위계서열과 명령체계가 중요한 집단인 까닭에 귀족과 평민을 구분해 두고 귀족의 지휘하에 평민이 움직이는 체계를 구축하였는데, 그 귀족을 군대에서는 "offic(i)er"(관료, 장교)라 칭했다.[84] 이는 지휘권은 아주 중요하고 명예로운 "권한"이자 "권리", "의무"였고, 일반적으로 그러한 업은 고귀한 신분인 귀족에게 맡기는 사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귀족이 지휘관으로서의 교육과 전사로서의 훈련을 받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상술하였듯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전사였으며, 그를 통해 자기 지위를 유지했다. 그렇기에 옛 "기사/귀족"은 신분제가 해체된 근대에도 "사관/신사"로 변모하여 흔적을 남긴 것이다. 참고로 근세에 평민출신 일반병들과 귀족출신 장교들 사이를 연결해주던 베테랑 병사들이 현대 부사관(sergeant)의 기원인데, 이들도 더 과거에는 하급귀족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위계에서 신분제 색채를 지우고 민주주의를 가미한 것이 현대의 군대이기에, 과거와는 달리 귀족 신분이 아니어도 자기가 원하면 임관할 수 있다. 대부분 따로 시험을 응시해서 합격한 이후 소정의 훈련을 거쳐 임관하지만 일부 국가들은 사병에서부터 하나하나 진급해 올라가기도 한다. 다만 사병에서 시작해서 하나하나 진급할 경우, 18살 땡 하자마자 바로 이등병으로 입대해서 단 한 번도 진급누락이 없다 한들 소령이나 중령정도까지 올라가면 60살이 되어 정년퇴임해야 한다. 그러니까 대령 이상 진급하려면 어쩔 수 없이 따로 장교로 지원해야만 한다.[85] 결론적으로 현대의 군대에서 장교란 능력만 받쳐주면 누구나 될 수 있는 계급이다.

영국에서는 귀족들이 영국군 장교로 지원하면 일반인 지원자들보다 우선적으로 합격 및 선발되는 혜택을 받는다. 단, 군종장교는 예외로 각 종파별 군종장교 지원 자격에 따라 선발될 뿐 신분 상의 혜택이 없다.

1차대전까지도 유럽에서는 귀족들이 장교를 맡고 전투를 지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군사적 능력과 상관없이 장교가 되는 경우가 있어 승패를 떠나서 많은 희생자를 낳은 전투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서양에서는 발라클라바 전투와 윈스턴 처칠의 갈리폴리 전투가 유명하다. 반대로 1차대전보다도 전이었으나 귀족이 없던 미국의 남북전쟁이 더 현대적인 부분이 있기도 하였다. 동양의 경우를 보더라도 사대부 출신 의병장들은 의욕만 너무 앞서서 전투를 그르치는 경우가 있었고, 전쟁사에서 승리한 전략, 전술을 상황을 살피지 않고 적용하는 경우나 전투에 나가있는 장수에 대한 사대부의 정치적 간섭 혹은 전략, 전술의 몰이해로 전쟁 자체를 패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최근 역사까지는 생각보다 상당히 군사적인 능력이 좋았다. 애초에 유럽의 귀족은 군사력으로 인한 특권계층으로, 그 시초가 로마를 침략한 게르만족 추장이나 그 추장의 부하 전사였으며, 그 이후로도 특권 계급을 기반으로 하여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으니 당연한 것이였다. 그들이 실질적으로 군사적 역할을 하는 동안, 군사적 능력이 없다면 다른 경쟁자한테 도태되어 자기 신분 내에서 존속할 수가 없었다.

이들의 무능이 주로 드러낸 것은 근대의 일로, 이는 오히려 이들이 군사적 역할을 맡는 신분에서 벗어나 사회적 계급으로 변모하였는데도 여전히 옛 관습대로 우선적으로 종군시킨 관성이 원인이었다.[86] 인구가 늘고 기술이 발전하며 국민국가가 등장하면서, 특별히 잘 싸우고 군무를 더 많이 배운 개인에 의존하는 시대를 벗어나, 균일한 무력을 지닌 광범한 다수가 군대를 구성하게 되었고, 체계화되는 군사학적 연구성과를 더 넓어져가는 식자층한테 체계적으로 교육시키는 체제가 형성되면서, 귀족들이 전사집단으로 남을 이유가 없어졌고 점차 시민사회에 권력을 넘기고 뒤편으로 물러나게 되었다.[87] 다만, 그런데도 한동안은 귀족들이 장교단 다수였던 것은 여전히 대다수 문맹 노동계급 시민으로서는 군사학적 지식을 소화해낼 능력이 없었던 까닭이며,[88] 이 시기 동안 매관제로써 최소한의 자격을 지닌 이들을 선별하는 동시에 사관학교로써 유능한 이들을 골라 전문지식을 지닌 장교를 양성하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귀족이 정치권력이나 경제적 주도권을 내려놓은 것처럼 군대에서도 더는 유의미한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저 장교 임관에서의 미미한 혜택 수준으로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3. 지역별 귀족 집단[편집]




4. 제도[편집]




5. 매체[편집]


보통 한국에서 '귀족'이라 하면 떠올리는 것은 한국사 사극인 경우를 제외하면 주로 근대 이후 유럽 문화의 귀족이며, 만화판타지 소설 등 서브컬처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부족전쟁에서는 마을을 점령하는 용도로 쓰인다.

부정적인 캐릭터로 빠질 경우 십중팔구 고루한 사고방식과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경직된 인물로 그려진다. 스스로의 신분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 타인에게 오만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남성향 배틀물이나 양판소에서는 높은 확률로 유약한 이미지가 붙는데, 현장에서의 업무에 서툴다거나 폭력이 관련된 일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이 경우 경험 많고 노련한 평민 출신의 주인공에게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조연급 이상의 비중을 가진 캐릭터라면 외모가 출중한 경우가 많아서 주인공의 연인이 되거나 하렘, 역하렘에 편입된다.[90] 다소 질이 떨어지는 작품 등에서 맨날 찌질한 이유로 왕을 방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근대 사회에서의 귀족계급은 전사집단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유약한 이미지는 맞지 않는다. 특히 서구에서 귀족사회가 지금과 같은 문벌화를 이루는 것은 르네상스절대왕정을 거쳐 중앙집권화를 다지고 근대국가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다. 그 이전까지는 봉건제 아래에서 창칼을 들고 스스로의 영지를 지키는 합법적인 무력집단에 가까웠다. 유럽 이외의 사회에서도 귀족이라 불릴만한 지배계층은 대개 무기를 들고 피지배계층을 통제하는 전사들이었다.[91] 다만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일찍부터 고도로 발달된 관료제를 바탕으로 체계화된 중앙집권화를 이뤘기에 지배계층의 문인화가 훨씬 빨랐다. 한국, 일본 등의 서브컬처에서 묘사되는 문약하고 지적인 이미지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비교적 많지는 않지만 긍정적으로 묘사되거나 미화되기도 한다. 순정만화여성향에서 상류사회에 대한 동경의 일환으로 전근대 귀족들의 화려한 삶을 묘사한다. 단 유럽의 중세 이전까지 내려가면 말 그대로 갑옷 입은 야만인들이 튀어나오게 되기 때문에(고증에 충실한다는 전제 하에서) 보통 배경으로 잡는 시대는 르네상스 이후의 바로크 ~ 로코코가 된다. 이를 시대상과 결부시켜 극적으로 그려냈다고 평가받는 작품 중 하나가 바로 베르사이유의 장미. 그 밖에 현대에까지 잔존해 있는 귀족이 등장하는 사례도 많다. 아무래도 동시대를 묘사하는 것이 더 쉬우니까... 그 외에도 귀족은 귀족이되 몰락한 귀족이 주역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한국산 창작물의 경우 라이벌(?)인 양반에 비하면 매우 입지가 좁다. 우선 한국인 심상에서는 일찍이 중앙화한 관료제 사회와 시험을 통한 인사제도를 경험해오고 그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까닭에 그렇지 않은 귀족제도가 낯설 수 밖에 없는데, 양반에 대한 심상은 현실에서도 픽션에서도 '가난한 양반'이 드물지 않고,[92] 학자나 지식인 이미지가 강하며 특히 '과거를 위해서 피똥 싸게 공부한다.'라는 관념이 매우 강렬하여 상대적으론 취급이 괜찮다. 특히 관료들의 경우 높은 확률로 과거급제자이니 적어도 '놀고 먹는 놈' 이미지는 일단 피해간다. 동아시아의 관료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라서 지식의 양은 너프가 불가능하니, 주로 배운 것 이상을 보려하지 않는 옹졸하고 시야가 좁은 캐릭터를 만드는 식으로 너프가 가해진다.[93]


5.1. 귀족 캐릭터[편집]


작위별로 보고 싶으면 작위/창작물 문서로. 여기에서는 작위가 밝혀지지 않은 캐릭터도 포함한다.

게임상에서는 취급이 평범한 기사 정도이고, 게임내 역할도 개그 캐릭터이기 때문에 단순한 기사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2장 크로이체르의 회상에서 셀린이 분명히 위스텐 크로이체르 공작이라고 칭했다. 한편 크로이체르 본인은 할아버지가 부당하게 취득한 이 직위를 아주 불편하게 여기고 있다.
립슈타트 전역 이후부터 은하제국 로엔그람 왕조의 초대황제로 즉위하기 전까지. 당초 로엔그람 백작가를 하사받았는데 암릿처 성계 회전 이후 황제 프리드리히 4세가 승하하면서 리히텐라데와 손잡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후작으로 승격되었고 립슈타트 전역에서 귀족연합군에게 승리를 거둔 후 리히텐라데를 숙청하고 제국재상을 겸임하면서 공작으로 승격되었다.
후작이었으나 프리드리히 4세가 승하하고 에르빈 요제프 2세를 옹립하면서 제국재상에 취임하고 작위도 공작으로 승격되었다.

6. 기타[편집]


귀족이 특허제도가 생기기 전의 과학 발전을 주도했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의 기술자들은 실용적이지 않으면 팔리지 않으니 실험적이거나 복잡한 물건들을 잘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귀족들의 사치를 부리면서 괴상하거나 실험적인 물건도 구입하며, 귀족끼리 경쟁심도 가졌다. 덕분에 초기의 전장식 소총이나 풀 플레이트 아머 같은 고급지고 비싸고 기계적으로 복잡한 물건들이 귀족층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심지어 개 품종 구분조차 귀족 문화에서 탄생된 것이다.

MMORPG 계열에서는 약간 다른 의미로 쓰이는데, 특권계층이라는 귀족의 이미지에서 발전해서 파티플레이시 꼭 필요하고 유용하지만 사람들이 잘 하지 않아 귀하고 좋은 대접을 받는 직업을 일컫는 데 주로 쓰인다. 보통 힐러탱커 계열이며 파티플레이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역할이나, 그만큼 책임감도 많이 필요하거나, 공략을 잘 알고 있어야 하거나, 운용이 어렵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을 지원만 하고 자기가 직접 하는 건 없다 보니 재미가 없거나 한 이유로 사람들이 잘 하지 않는 것. 이와 반대되어 쉽고 재밌어서 많이 하므로 구하기 쉬운 직업은 천민으로 흔히 불린다. 보통 딜러인데, 탱과 힐이 열심히 고생하는 동안 이들의 케어(?)를 받아 가며 딜만 하면 되니 상대적으로 더 쉽기는 하지만, 귀족들의 서폿을 받는 천민이란 것도 좀 특이하기는 하다.

[1] 성이나 저택같은 경우에는 관광지로 전환해서 관광 수입을 얻는다. 은근 수입이 쏠쏠한 편이다.[2] 흑인들의 삶을 다루는 매체에서 귀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진짜 없는 수준이기 때문.[3] 예컨대 소련에서는 국가 운영 상 관료제가 강화된 결과 소위 '공산귀족'이라고 불리는 노멘클라투라 집단이 탄생하였다. 오늘날 중국도 집권정당이 국가 위에 존재하는 이른바 당국가체제를 따르고 있는데, 이는 곧 공직과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당원과 그러지 못한 일반 인민으로 신분이 나뉘어있다고 볼 수 있다.[4] 간추려서 말하면, 일반적으로 '특권'의 '보유'와 '세습'이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한 귀족은 아니다. 부와 권력도 그 자체가 귀족 신분을 보장하지 않으며, 사회계층이 고착되면서부터는 오히려 부도 권력도 없지만 귀족 신분은 누리는 현상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참고로 이러한 오해는 오늘날 상류층에 해당하는 다른 계층인 자본가, 즉 부르주아에 관해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며, 이는 해당 문서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바다.[5] 초기 로마 왕국의 군사제도에서는 병사 자신의 재산으로 무장을 구입해야 했기 때문에 말을 사서 무장할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만 기병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이 의미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 군인이 직업이자 상비적 개념으로 변모하면서 바뀌게 된다.[6] 따라서 코르넬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씨족 같은 대귀족 가문들 역시 씨족 내에서 귀족지파와 평민지파로 분화되면서도 그 전통을 공유했다.[7] Equites. 라틴어로 기병을 의미한다. 고대 로마의 원로원 계급 다음가는 신분으로, 제정 시대가 되면서부터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파트리키/노빌레스 가문들을 대신해 로마 귀족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다.[8] 이는 장애가 있던 또 다른 손자 클라우디우스 1세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 한쪽을 절던 그는 즉위하기 전까지 정치, 행정, 군대 관련 지식에 필요한 역사, 의학, 지리학 등을 아우구스투스의 명령 아래 갈고 닦았다.[9] 그 결과로 여성 귀족의 상대적 지위 하락 등이 일어나기도 한다.[10]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일본 최초의 군주인 히미코는 일본 최초의 국가인 야마타이국의 무녀였다는 기록이 있고, 헤이안 시대 당시에 지금의 간토도호쿠 지방을 정벌한 뒤에 투항해온 아이누족 추장들에게 후지와라 성을 사성하여 오슈 후지와라씨, 아베씨 등의 사무라이 가문의 기원이 되었다. 일본에서 여성 군주가 나오지 않게 된 것은 사무라이 이전에 군사 귀족들에게 천황 자리를 중간에 찬탈당했기 때문이다. 사실 사무라이들은 처음에는 군사 귀족보다 귀족들의 시종 비슷한 취급을 받아서 그 영향이 나중에까지 미쳤다.[11] 추신구라 사건의 원인도 바로 이것이다. 쇼군을 중심으로 한 무가 세력의 권위가 정점에 이른 에도 막부 시대에서조차, 감히 천황의 칙사 앞에서 쌈박질을 벌이는 무례를 범했다는 이유로 다이묘까지 할복해야했을 정도니, 권력이 없어도 공가들의 권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는 수준이었다는 뜻이다. 물론 이는 사무라이라는 정체성이 본질적으로 시종에 가까웠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기도 했다.[12]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 킵이 방어탑의 일종으로 나오는 이유가 이것이다.[13] 사실 이런 면은 근대 유럽 귀족사회에서도 근근히 이어져서, 귀족들 중에는 군인으로 출세하는 사람도 많았고, 게르만족 문화에서 유래된 결투 등의 풍속도 오랫동안 잔존해있었다.[14] 을 든 무사의 모습을 묘사한 상형문자인데, 고대 사회에서 무사는 곧 귀족이었으므로 이 글자가 귀족을 뜻하는 글자가 된 것이다.[15] 양반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집안을 따지던 양반들보다도 관직, 토지나 돈을 중시하여 성공한 하류층과 인척이 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양반들은 개천용 출신이 아니면 개천용들과 엮이지 않으려고 했다.[16] 문벌귀족이 있던 시기만 해도 과거의 위세가 약하여 집안이 안 좋은 형세호나 사대부는 관료가 되기 어려웠다.[17] 점점 유교에 의해 쇠퇴하고 있었으나 주나라 시절 오등작에서 비롯된 등작이 작용하고는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반도에서는 조선 때까지 정도전 등이 봉화백 등을 받을 정도로 귀족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나 명나라의 압력으로 귀족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18] 공자가 말단 귀족의 사생아 아니면 천민이라 그런지 귀족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19] 서양에서는 선왕도 그냥 공작이 될 뿐이었다. 물론 상류층의 효심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귀족 신분 자체의 권위가 부모의 권위를 넘을 정도로 매우 막강했다.[20] 한고조의 아버지 역시 군주에 대한 태도를 지적받은 적이 있으나 한고조가 그런 문화를 철폐했다.[21] 다만 영국은 귀족 같은 상류층에서는 가장 낮은 신분이었던 준귀족층인 젠트리가 부르주아 역할을 하였으며 그래서 귀족적 전통도 많이 남았다. 동양으로 치자면 이들은 사무라이와 비슷한 사람들이다.[22]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박살내고 패권국이 되었다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은 그보다 한참 뒤에서나 강대국이 된다. 당장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즉위한 제임스 1세가 아들 찰스 1세를 스페인 공주와 결혼시키려 했다 실패하자 프랑스 공주와 결혼시켰던 것만 봐도 영국은 그 후로도 대륙의 패권국이던 스페인과 프랑스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영국이 실질적으로 패권국이 되는 시기는 영란전쟁 이후라고 본다.[23] 준남작위 또한 1965년 이후 수여는 마가렛 대처의 남편 데니스 대처 단 1건 밖에 없다.[24] 준남작이 귀족이 아니라는 것은 법적으로나 그렇다는 뜻이고, 실제로는 모든 준남작 작위가 세습작위이며 귀족명감에 수록되므로 사회적인 인식 상으로는 사실상 귀족이며, 같은 귀족들끼리도 준남작 작위를 보유한 사람을 귀족으로 인정하는 편이다. 그저 원래 영역제후라기보다는 세습기사에서 왔으므로 성에 Lord를 쓰는 제후와는 달리 기사와 동일하게 이름에 Sir을 붙인다. 이는 애초에 영국의 귀족제가 다른 대륙유럽국가는 물론 그 바깥 문화권하고도 대체로 동떨어진 특수성을 지녀서 발생하는 일이다. 이에 관해서는 젠트리 문서를 참고할 것. 준남작은 기사보다는 높고 남작보다는 낮은 작위로, 명목상 일대귀족보다 낮지만 세습이 가능한 작위라는 점에서 실질적으로는 대등하거나 오히려 높다.[25] 작위를 반납한 것과는 좀 다르지만, 윈스턴 처칠도 작위를 안 받은 덕분에 정치가가 될 수 있었다. 처칠 가문은 말버러 공작가였고 당시 공작위는 윈스턴의 사촌형 차지였는데, 사촌형이 작위를 물려받을 아들을 보지 못하면 다음 공작 자리가 윈스턴에게 가게 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촌형이 결혼하고 곧 아들을 본 덕에 윈스턴 처칠은 공작이 될 일이 없어졌고, 대신 정계에 입문해 나중에는 총리에까지 오른다. 처칠에 대해선 긍정적 평가도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어쨌든 그가 세계 근현대사의 걸물임은 부정할 수 없는 만큼 처칠이 공작위를 물려받았다면 세계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지도.[26] 예를 들면 상원의원, 명예 연대장 등.[27] 그래서 노골적인 성적 묘사때문에 여러번 문제작으로 꼽힌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도 부유한 귀족인 주인공의 남편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자랑스럽게 전쟁터로 나갔다가, 적군인 독일군의 폭격을 맞아서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불과 얼마 전에도 해리 왕자이라크전에 참전하여 직접 야전에서 각종 임무를 수행한 전적이 있다. 테러의 대상이 될 것을 우려해서 가명으로 복무했으며, 정체가 알려지자 본토로 강제 송환되었다.[28] 실제로 유럽 각국에서 아직 귀족들의 공적인 특권이 살아있던 시절에는 많은 왕족과 귀족 자녀들이 우선적으로 군복을 입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붉은 남작'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실제로도 남작 작위를 보유한 귀족이었던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이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영국의 많은 귀족가문들이 대가 끊겨서 멸문한 것도 유명한 이야기다. 물론 전간기에 새로운 책봉으로 채워넣긴 했지만.[29] 이들 가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황의 의전행사에 참여하고 있다.[30] 일부 귀족들은 이에 반발해 성 비오 10세회 쪽으로 넘어가기도 했다.[31] 기사단 훈장이라는 기사단의 형식만 갖추었을 뿐, 최고 등급 훈장을 받는다고 해도 'Sir'과 같은 칭호가 붙지 않는다.[32] 바테를로 공작, 회스던 후작위가 있긴 한데 둘 다 공을 세운 외국인에게 내린 작위이다.[33] 영국도 공적 특권이 거의 없어서 유명무실한 수준이지만, 스페인은 아예 대놓고 헌법 차원에서 공적 특권 같은 건 없다고 못을 박아놨다는 차이가 있다.[34] 스웨덴에서 독립해서 건국된지 120년도 되지 않았다.[35] 느그리슴빌란 주를 대표하는 술탄을 선출하는 방식도 참 독특해서 바로 이 주의 귀족들끼리의 선거에서 선출되는 귀족이 느그리슴빌란의 새 술탄으로 즉위한다. 말레이시아 중앙정부의 양 디페르투안 아공(국왕) 선출 방식을 그대로 가져온 것인데, 중앙정부의 국왕은 대통령마냥 임기가 정해져있는데 반해 느그리슴빌란 주의 술탄은 종신제라는 차이가 있다. 디스커버리 채널에서도 느그리슴빌란 주의 술탄을 선출하는 과정을 취재해서 다큐멘터리로 만든 적이 있었다.[36] 본래 귀족이라는 개념에는 중앙정부가 이미 각지에 존재해온 어디어디의 부족장 내지는 속국의 군주들에게 지위에 걸맞는 예우를 하느라고 만들어 낸 것도 포함되었다. 춘추전국시대 당시의 중국의 제후들, 특히 주나라 종실이 아닌 이성제후국들이 대표적인 사례다.[37] 17세기의 태국에서 활약한 일본의 전설적인 모험가인 야마다 나가마사도 당시의 태국 왕실로부터 귀족 작위를 하사받은 적이 있었다.[38] 영어의 '하이 소사이어티'(high society)에서 온 말인데, 귀족 말고도 유서깊은 재벌지주, 정치인 가문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참고로 하이쏘의 반대말은 '로쏘'라고 불리는데, 역시 영어 단어인 '로우 소사이어티'(low society)에서 온 말이며, 일반적인 평민들을 가리키는 말이다.[39] 대표적인 사례로 제6대 브로이 공작인 물리학자 루이 드 브로이의 경우가 있다.[40] 의외로 귀족제와 공화정이 공존한 사례는 많다. 이른바 귀족공화국이라 하여, 군주 없이 귀족들의 회의를 통해 국가를 통치하는 사례가 꽤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로마 공화정이다. 영국도 청교도 혁명으로 인해 잠시 공화국이었던 시절에도 귀족이 있었고 아예 이 시절의 국가원수직인 호국경 직위는 귀족만 임명될 수 있던 자리였다. 그래서 공화국에 귀족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 아시아인이나 미국인들과는 달리, 유럽인들은 공화국인데 귀족이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딱히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공화제가 단순히 왕이나 귀족이 없는 것이라고 아는 것이 오류인데, 자세한 것은 공화제 문서를 참고할 것.[41] 일부러 금지했다기보다는,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가 전형적인 농본주의 사회였던지라, 성씨가 필요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따라서 평민들에게 성씨가 필요한 경우라면 존 만지로의 경우처럼 창씨를 얼마든지 허용해줬지만,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그냥 '밭 한가운데 사는 셋째 놈(다나카 사부로, 田中 三郞)'하는 식으로 대충 부르는 게 일반이었고, 메이지 시대부터는 이를 정식 성씨로 인정해준 것에 불과하다.[42] 스페인에서도 귀족으로 인정받는 가문이었던 만큼, 1913년에 멕시코에서 귀족제가 폐지되면서 가문 전체가 스페인으로 망명했다.[43] 대부분이 현지의 총독이나 행정관으로 파견된 하급 귀족들이었다.[44] 힌디어라자(Rajah)라고 한다.[45] 카스트 제도크샤트리아브라만에 해당하는 이들이다.[46] 하이데라바드 왕국같은 경우는 이 같은 인도 정부의 방침에 분개하여 파키스탄 편입을 선언하고 인도 정부에 반기를 들었으나, 인도군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이용해 반란을 진압하고 하이데라바드 왕실을 축출해버렸다.[47] 세계적으로 장수마을로 알려진 그곳 맞다.[48] 기네스 맥주기네스 북으로 유명한 기네스 가문이 있다.[49] 왕정 시절의 그리스의 왕태자는 공식적으로 스파르타 공작의 작위를 겸했다.[50] 오스만 제국술탄가톨릭교황과 유사한 성격의 세습 작위인 칼리프 지위를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터키 공화국이 선포되어 술탄의 지위에서 폐위된 뒤에도 이 작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나, 1924년에 터키 정부가 칼리프 직위도 폐지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군주들의 작위가 모조리 소멸했다.[51] 연필회사 파버카스텔의 전 회장. 원래부터 파버 남작이 세운 회사였다. 파버 여남작이 카스텔 후작이랑 결혼하면서 등급이 낮아져 파버카스텔 백작가문이 탄생했다.[52] 일반적으로 양반은 귀족이 아니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양반이라는 지위는 공식적이지도 않고, 양반 가문이라도 엄연히 4대에 걸쳐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하면 양반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양반은 '계급'이지 '신분'이 아니다. 학자에 따라 이견이 있는 편이긴 하나, 양반은 그 신분유동성으로 말미암아 귀족이라기보다는 현대 사회의 공무원, 즉 관료에 더 가까운 성격이다. 혈통만으로 세습가능한 직위가 아니며, 엄연히 시험을 통해 인정되는 신분이었고, 실제로도 시대마다 편차는 있어도 하층 신분의 상향유동경향을 보이는가 하면 반대로 기존 양반도 향반(鄕班)처럼 권력에 접근하지 못하거나 아예 잔반(殘班)으로 몰락하여 노동계급이 되고는 하였다. 다만, 대대로 양반을 한 명문가들은 분명 일반 평민에 비해서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우선 과거 시험 자체가 학업이나 응시 기회 등 접근성 문제나 채점 과정과 같은 연고 문제 탓에 신분이 낮은 사람이 합격하기에 더 불리한 구조였으므로, 전근대 수준에서 그나마 공정하다는 거지 현대의 채용시험 만큼 공정성이 완벽하게 보장되지는 않았다. 실제로 대대로 양반을 한 명문가가 계속 승승장구하는 게 보통이었고, 4대 연속으로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예외적이고 드문 사례였다. 이러면서 자연히 양반층 다수는 과거 귀족이던 가문 출신이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귀족적인 성격이 있기는 했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5월 5일 기사를 보면 평민이 양반이 되자 천한 출신이라고 공식적으로 대놓고 모욕을 주고 그게 용인이 된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양반이 신분이 아닌 것은 인정하되, 사회적으로 특권적이었던 그 구성원을 가리키기 위해 사족(士族) 등의 용어를 쓰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딱히 한국만 그런 게 아니라 거의 세계 보편적인 현상으로, 유럽에서도 고대에든 중세에든 서유럽에서든 동로마에서든 간에 태생부터 귀족이었던 사람들은 노력을 통해 귀족이 된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입지전적인 신흥귀족들은 결혼이든 족보 조작이든 방법을 찾아 본인 가계를 오래된 혈통귀족과 결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53] 다만, 왕작위는 있었고 오등작에 따라 왕족이나 관료들에게 작위를 내리기도 했다.[54]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아들인 베르톨트 폰 슈타우펜베르크 소장은 Graf von Stauffenberg, 현 독일연방군 정보총감인 카를에른스트 슈트라흐비츠 대령은 Graf Strachwitz. 두 사람 모두 성 앞에 'Graf'가 표기된 명찰을 정복 상의에 패용하였다.[55] 혹은 불변화사. 부사나 전치사다.[56] "zu"는 가문의 발상지를 가리키고, "von"은 실제 다스리는 영지를 가리켰다. 그리고 "von und zu"는 영어로 옮기면 "of and at"으로 양자가 일치할 때 사용하였다. 예컨대 귀족이지만 보유토지가 없다면 "zu"를 쓰고, 종가로서 발상지를 다스린다면 "von und zu"를 쓰게 되는 식이었다.[57] 성씨가 없는 경우는 인간관계를 맺고 교류하는 사회·공간의 폭이 좁을 때는 성씨를 가지는 게 큰 의미가 없어서이며, 조금 그 범위가 넓어지면 주변 지형지물을 활용하였다. 직업의 경우 보통 특수직으로서 대대로 이어온 가업인 경우이다.[58] 법적으로만 인정하지 않을 뿐이고 성명의 일부로 사용하는 것은 허락한다.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이조차도 인정하지 않는다.[59] 비텔스바흐 가문은 통치 공작 본인 외의 후손들에겐 "바이에른에서의 공작"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대충 바이에른 안에서는 공작이지만 밖에선 아니라는 외왕내제스러운 칭호. 이는 아직 집단주의적이고 족벌주의적인 성향이 강하였던 중세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관습으로, 독일에서나 프랑스에서나 종실작위로서 "prince"가 탄생하기 전에는 작위 칭호를 가주 외 구성원도 사용하였다. 이 같은 현상은 근대에도 독일어권 여러 나라에서 계속 존속했다.[60]프로이센 왕족들도 독일 제국이 몰락한 후 비텔스바흐 가문처럼, 구성원들의 성씨를 모두 '프로이센의'라는 뜻의 von Preußen(폰프로이센)으로 바꾸었다.[61] 현재는 하와이 주가 되었다.[62] 미국 헌법 제1조 10절 1항: 어느 주라도 조약, 동맹 또는 연합을 체결하거나, 나포 허가장을 수여하거나, 화폐를 주조하거나, 신용 증권을 발행하거나, 금화 및 은화 이외의 것으로써 채무 지불의 법정 수단으로 삼거나, 사권 박탈법, 소급절차법 또는 계약상의 채무에 해를 주는 법률 등을 제정하거나, 또는 귀족의 칭호를 수여할 수 없다.[63] 어머니가 하와이 왕국의 왕족이었다.[64] 세종대왕의 후손인 전주이씨이며, 고위층 관리였기 때문에 의전상 공작의 대우가 필요했다.[65] 자연히 그 아들 이위종도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공작으로 불려졌다. 다만, 제정 러시아에서는 공작이 너무 많다 보니 다 귀족같이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의 작위는 해당 가문의 적자후손이면 누구든지 칭할 수 있는 것으로 만약 톨스토이 백작 가문의 적자 후손이면 장남이건 차남이건 모두 톨스토이 백작으로 불렸다. 참고로 러시아의 작위는 공작, 백작, 남작, 이렇게 3등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66] 참고로 시드니 포이티어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후에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로부터 미국 정부가 내리는 최고 등급 훈장인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로서 그는 두 나라의 최고 등급 훈장 수상이라는 경력을 보유한 인물이 되었다.[67] 물론 안 그런 경우도 많았는데, 1983년 봉작된 화이트 로 자작도 딸만 있었으나 칙허장 없이 단절됐다.[68] 이건 아들의 경우고, 딸들은 주로 정략결혼을 통해 타국으로 시집을 갔다.[69] 가장 좋은 예로 왕위 계승과 관련이 없는 둘째에게만 상속하는 콘월 공작위나, 왕위 계승자만 상속받을 수 있는 웨일스 공위가 있다.[70] 과거에는 가산(家産)을 가문이 공유하듯 작위도 그러한 경향이 있었다. 중세 초에는 프랑스 등 타 지역에서도 가주 외 구성원도 작위를 칭호로써 함께 사용하였고, 이는 분할상속제가 장자상속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prince"와 같은 종실작위 내지 가문작위로 대체되었으나, 독일은 그보다 늦게까지 전통을 유지하였고, 그래서 예컨대 아버지가 공작이었다면 자녀도 공작이었다. 아버지가 바이에른 공작이라면 자식들도 전부 바이에른 공작이 되는 셈. 따라서 이를 구분하기 위해 뒤에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명과 함께 표기했다. 예를 들자면 1505년, 바이에른을 통일한 바이에른의 공작은 1505년 이전엔 바이에른-뮌헨 공작으로 불렸다. 근세에 들어선 이후 독일에서도 분할상속제가 폐지되고 단일상속제가 도입되면서 프랑스 등 타국과 마찬가지로 변하게 된다. 러시아의 경우 표트르 대제가 새로운 작위 제도를 만들 때 독일의 작위를 본 따 만들었기에 독일과 마찬가지로 작위가 부계 성씨에 따라 분할상속되었다. 그래서 러시아의 작위는 사실상 성씨의 일부로서 가문의 격을 나타낸다.[71] bethleni는 봉작지 이름이다. 헝가리 바깥에서는 István gróf Bethlen de Bethlen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 경우에는 Bethlen이 봉작지가 된다. de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우처럼 "~의"를 의미한다. 즉, Bethlen의 백작이라는 뜻.[72] Lord Mackay of Clashfern, Lord Mackay of Ardbrecknish.[73] 여기서의 각 칭호의 끝에 붙은 "하"(下)는 신분이 높은 사람을 직접 지칭하는 것을 삼가고, 그 사람의 발밑을 가리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74] 영국 영어미국 영어가 약간 발음이 다른 것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데, 흔히 우리가 "유어"라고 한글로 표기하는 Your를 영국에서는 "jɔ:(r)", 즉 "요~"에 가깝게 발음한다. 미국 영어의 발음은 천천히또박또박 발음하면 "유~얼"(얼은 아니고 rhotic으로 r 굴리는 소리)처럼 들리고, 빠르게 발음하면 "여얼~"에 가까운 발음이다.[75] Ma'am은 Madam의 단축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담"으로 발음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예전에 사창가의 여주인을 Madam으로 불렀기 때문에 "여왕 폐하께 같은 발음으로 대답할 수는 없다"라는 이유라고 한다.[76] 사족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헤르체고비나도 이런 의미로 붙은 지명이다. 차이가 있다면, 보이보디나 자치구와는 달리, 어원이 독일어(herzog)라는 것이 있다.[77]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할때, 로마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가문들이 좀 있었다.[78]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주교좌가 있는 곳이다.[79] 대표적인 경우가 그리스의 초대 대통령인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알바니아 왕국의 유일한 왕이었던 조구 1세다.[80] 유럽후작변경백공작에 준하는 위치를 가진 작위를 동양권에서 동양의 오등작 제도에 끼워맞춰서 억지로 번역한 것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유럽권의 자작은 19세기 이전까지는 아예 세습 작위도 아니고 본래 백작이 통치하는 영지의 섭정 직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가, 이 지위를 영지의 원래 주인인 백작이 가문의 단절 등으로 인해 부재하게 되면서 섭정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세습하면서 영지를 대신 통치하던데서 유래했다. 다만 원래부터 자작 작위가 남작위 백작 아래로 설정되어 만들어진 영국과 일찍이 7세기부터 자작의 귀족으로써의 지위가 높아진 스페인의 경우는 예외다.[81] 가령 한남군 개국공, 조선국공, 덕풍부원군.[82] 가령 한수정후(漢壽亭侯), 당국공(唐國公).[83] 가령 백작 데라우치 마사타케(伯爵 寺內正毅). 이는 러시아의 작위 체계와도 유사하다. 공작을 Duke가 아니라 Prince로 지칭하는 것 역시 러시아의 그 것과 동일하다. 차이가 있다면 러시아의 작위는 공작 (Prince)-백작 (Count)-남작 (Baron)으로 구성된 삼등작이었고 가문의 모든 구성원들이 작위를 받았지만 일본의 경우 단 한 사람만이 작위를 보유할 수 있었으며 공작 (Prince)-후작 (Marquis)-백작 (Count)-자작 (Viscount)-남작 (Baron)으로 구성된 오등작을 시행했다.[84] 전근대에는 동아시아 유교문화권 정도를 제외하면 군정과 민정을 잘 구분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럽에서 귀족이나 기사는 군인이자 관리였고, 동일하게 서임 즉 임관(commission)되는 존재였다. 이것이 "officer"가 장교도 관리도 뜻하고 동원어로서 "official"(공무원, 관료), "office"(사무소) 등과 연관된 이유이자, "commissioner"(판무관)가 외교관으로서 속령이나 식민지 등의 군정과 민정을 아우르는 행정장관(총독)이 되기도 하는 이유이다.[85] 다만 이는 평시의 경우고 전시에는 전공에 의해 더 빨리 진급할 수 있었다. 사병 출신 장성 문서 참고.[86] 이러한 법제적·사회적 구조는 근세에 많은 하급귀족들에게 비극으로 다가왔는데, 전통적인 전사였던 귀족들은 노동에 종사하는 것이 금기시되거나 아예 금지되기도 하여서, 상당수 토지가 없는 이들은 빈곤하게 살아야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지식을 쌓아 변호사나 관료가 되어 공무에 종사하든가 하급군인이 되어 전쟁에서 목숨을 걸어야 했다. 특히 후자를 잘 보여주는 문학 속 인물상이 바로 삼총사의 달타냥이다.[87] 특별한 무력적 지위를 잃고도, 귀족은 한동안 전쟁지도자이자 공공책임을 부담하는 사인으로서, 식자층 지주로서 권력을 유지하였으나, 그 지위는 상공업과 금융업에 힘입은 부르주아에게 빠르게 넘어가게 되었다.[88] 이러한 현상은 딱히 귀족이나 전사가 아닌데도 행정관이나 교사, 언론인, 지식인 등 "관료"나 "명사"로 취급되던 이들이 우선적으로 장교로 선발되는 상황하고도 상통한다. 가령 갑작스레 군 규모가 확대되었던 미국 내전기 미군에서도 이런 식으로 군에 몸담은 일이 없는 상류층 인사가 장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89] 다만 귀족적 성격과 관료적 성격 중 어느 쪽에 중점을 두느냐로 논란이 있다. 해당 문서로.[90] 한편 피지배층의 고혈을 빨아먹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고도비만이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91] 물론 중세 시기에는 지식과 행정은 교회가 담당했고 봉건 귀족들은 전쟁을 담당했기에 성직자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무식했고, 또 무식해야 육체적 능력이 향상된다고 생각해 일부러 무식해지려 노력하는 이들도 있었다지만, 이런 건 일시적인 풍조에 가까우며 실질적으로는 영지를 다스리고 관리해야 하므로 일정 수준의 지식을 요하는건 필수적이었다. 또 당대의 분업이란 게 딱딱 나눠지는 것도 아니어서, 성직자라도 무술을 익혀 기사로서 나서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으며 기사가 자기 주군의 행정업무를 종사하면서 보좌하기도 했으므로, 봉건귀족과 성직자의 역할을 완벽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성직자도 고위로 갈수록 귀족 태생인 경우가 많았다. 어찌되었든 당대의 평민들보다는 지식도 전투력도 훨씬 높았을 것이다.[92] 당연히 역사적으로는 가난한 귀족도 존재했는데, 그야말로 오두막에 농노 일가 하나가 일굴만한 농지만 받는 말단 기사나 아예 토지 등 재산 자체가 없어 머리를 쓰든 몸을 쓰든 벌어서 먹고 사는 귀족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잘 알려진 귀족의 전형은 영주인데, 경제적 기반으로 봉토가 있는 봉건귀족과 그렇지 않은 양반 사이에는 분명히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93] 음서나 뇌물 먹이고 들어온 놈으로 만들어서 너프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결국 하급관직을 벗어나 요직에 앉으려면 과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하는 까닭에, 일단 음서로 자리를 얻더라도 공부를 해야 했다.[94] 단 이쪽은 특이하게 후천적 귀족에 해당되는데 본래 친부모는 전쟁으로 돌아가시고 자신을 입양한 건버드는 본래 평민이었다가 이터널 티아라를 완성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귀족 신분이 된 케이스.[95] 사실 이건 명예직이고, 실제로 하텐그라쥬는 아라짓 왕국과 싸우는 나가 사회의 도시다. 그리고 나가 사회에는 귀족이 없다.[96] 작품 마지막에 칼라일 영지를 대신해 다스릴 백작 작위를 받는다.[97] 크라운가드 가문 남매[98] 로렌트 가문[99] 뒤 쿠토 가문 자매[100] 제리코 가문[101] 키테라 가문[102] 샤우나 가문[103] 페로스 가문[104] 이 챔피언들은 귀족 혈통이 아닌 각각 데마시아와 녹서스 귀족 가문에 입양된 인물들이며, 탈론은 상술한 카타리나와 카시오페아의 뒤 쿠토 가문 소속이다.[105] 죽은 뒤 닥터 헬백작 칭호를 내렸다.[106] 에버가든 가문에 입양되었기 때문에 호적상 귀족이다.[107] 귀족 출신이나 정합기사가 된 후에 그 기억을 잃었다.[108] 남작 작위가 있었지만 약혼녀를 혼자 구하러 가느라 작위를 버렸다.[109] 원래 이브 자체가 나소드의 여왕이지만 (기본전직 기준으로) 이브는 귀족보단 최후의 생존자에 가까운 느낌이기에 전직 중 여왕이미지가 강한 코드: 엠프레스만 기제.[110] 몰락한 귀족이며, 전직인 노블레스에서 힘을 되찾아 귀족, 여왕의 느낌이 더욱 강해진다.[111] 물론 낮은 지위에서 성공한 인물도 있다. 티란데, 마커스 조나단[112] 은하제국 측 인물들은 귀족들이 많다.[113] 공식에서는 귀족이라고 설명되지 않았지만 설명에서 보면 몰락한 귀족이라고 추측되고 있다.[114] 아이저 규리하, 정우 규리하, 이이타 규리하, 시카트 규리하[115] 락토 빌파, 스카리 빌파[116] 홀빈 퍼스, 마진 퍼스, 레데른 퍼스, 지키멜 퍼스[117] 원작 한정으로 영국 귀족 출신이다.[118] 앤더슨 백작가의 후계. 이쪽은 레반투스 대공의 가신에 가깝다.[119] 황제를 수호하는 유서 깊은 경호귀족 집안 출신이다.[120] 오로치 일족 내에서 최상위 귀족인 오로치 사천왕들이다.[121] 대표적인 예로 탈라사르 대공인 카토 시카리우스.[122] 이들은 모두 한가닥 빛나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보통 일러스트에선 브릿지로 그려진다.[123] 이쪽은 카를로스 가문와 야인의 피가 섞인 혼혈이다.[124] 단 이쪽은 임무를 위해 위조한 신분일 가능성이 높다.[125] 룬 서브스토리에 등장한 도마뱀 소년.[126] 대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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