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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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발생 원인
2.1. 과거 인식
2.2. 주초위왕설
2.2.1. 과학적으로 불가능
2.2.2. 후대의 윤색
2.3. 현대의 해석: 중종의 친위 쿠데타
3. 중종의 의중
4. 후일담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기묘사화()는 중종 14년(1519) 일어난 사화(士禍)이다. 연산군 축출 이후 중앙 정계에 진출했던 진보적 사림파들이 다시 한번 정계에서 밀려 나간 사건으로 조광조, 김식, 기준, 김정, 한충 등이 극형을 당했고 나머지 사림들도 대부분 귀양가거나 정계 진출이 좌절되었다. 이 밖에 김안국, 김정국 형제, 정광필, 안당 등 이들과 친분 관계가 있던 조정 중신들도 피해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사림의 중앙 정치 진출은 한 세대 밀렸다.

흔히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문구가 기묘사화의 일화로 널리 알려졌지만 후대에 만든 루머인 듯하고, 실제로는 중종의 친위 쿠데타라고 볼 수 있다.


2. 발생 원인[편집]



2.1. 과거 인식[편집]


과거에는 조광조 등 신진 사류가 성리학에 기반하여 주장하는 개혁에 훈구파가 반감을 품어 기묘사화로 발전했다는 인식이 다수였다. 훈구파에 대항해 일어난 사림파들이 원칙적인 주장을 내세우고, 중종이 이에 동조하여 힘을 싣자 남곤, 심정 등 훈구파가 힘을 잃기 전에 사림들을 모략해 일어난 사화가 기묘사화라는 것이다.

결정적 계기는 위훈삭제 사건으로 중종반정으로 공신 작위를 받은 사람들 중 실제 참여가 없었던 자들의 공신첩을 회수하자는 사림파의 주장이 관철되자 위기감을 느낀 훈구파가 공작을 펼친 결과라는 것. 홍경주의 위치에 주목하여 아직 군부에 세력이 남은 훈구 세력이 군사력으로 중종을 협박했다는 시각도 있었다.

기묘사화를 상징하는 문구인 '주초위왕'(走肖爲王)은 이 같은 시중의 인식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여겼다. 주초위왕의 '走肖'(주초)는 '趙'(조)를 파자하여 만든 말이다.[1] 따라서 주초위왕은 곧 '조위왕(趙爲王)' 다시 말해 '조씨 성을 가진 자가 왕위에 오른다조 바이든?'는 뜻이 된다. 훈구파 중 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였기에,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적은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게 만들어 글자 모양을 나뭇잎에 새기면,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여 사화를 일으켰다는 것이 과거의 통념이었다. 나뭇잎이 기묘

주의할 점은 주초위왕은 야사가 아니라 엄연히 실록에 여러 번 기록된 정사라는 점이다. 주초위왕은 중종 당대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후일 선조실록에 언급되기 때문에 엄연한 정사다. 흔히 '정사 = 정확한 역사' 정도로 받아들여서 생기는 오류인데 정사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제작한 역사를 의미하지 내용의 정확성은 별개다.


2.2. 주초위왕설[편집]



2.2.1. 과학적으로 불가능[편집]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재하지 않았을 확률이 매우 높다.

우선 과학적 근거를 보자면 실제로 벌레가 파먹기는 불가능하다고 밝혀졌다. KBS 역사스페셜팀이 실제로 실험을 해봤는데, 결과 벌레는 그런 거 신경 안 썼다. 즉, 주초위왕은 근거가 없는 야사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다른 원인이 있다는 것.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벌레는 애초에 잎을 먹는데 거기에 꿀만 바른다고 해서 그 부분만 파먹을 이유가 없다. 그냥 잎도 먹으면서 꿀 발린 부분도 같이 먹을 것이다.

2001-02년에 선풍적 인기를 얻은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도 주초위왕 소재를 등장시키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꿀은 물론이고 포도당, 액즙, 효소에다 애벌레, 누에, 등애, 사마귀, 심지어 쥐까지 동원했지만 모두 실패를 하고 결국 달군 인두로 나뭇잎을 조잡하게 주초위왕이라고 적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때문에 실제 방영에서는 앵글을 엄청 뒤에서 잡았고, 나뭇잎의 주초위왕도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조잡하다. 나뭇잎 군데군데 탄 자국이 있음은 덤.

이후 인하대학교 생명과학과 연구팀이 제대로 된 연구방법론을 통해 이 토픽을 검증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가 <Entomological Research>라는 국제학술지에 정식 논문으로 게재되었다. 결과는 역시 실패였다. 논문 링크


유튜버 공돌이 용달도 이를 시도한 영상을 업로드했다. 역시 재현에는 실패하였고, 영상 후반부에는 상술한 인하대 연구팀과 만나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주초위왕' 에피소드의 과학적 검증이다. 검증에서 볼 수 있듯이, '벌레'가 글자 부분만 골라 잎을 파먹게 유도하기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과학적으론 불가능해도 남곤 등 일당이 일부러 글자 모양으로 잎을 파내고 벌레가 먹은 것이라고 둘러대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 또한 부자연스러운 점이 많다.


2.2.2. 후대의 윤색[편집]


당초에 남곤이 조광조 등에게 교류를 청하였으나 조광조 등이 허락하지 않자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뭇잎의 감즙(甘汁)을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아 모으고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 네 글자를 많이 쓰고서 벌레를 놓아 갉아먹게 하기를 마치 한(漢)나라 공손(公孫)인 병이(病已)의 일처럼 자연적으로 생긴 것같이 하였다. 남곤의 집이 백악산(白岳山) 아래 경복궁 뒤에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워 대궐안의 어구(御溝)에 흘려보내어 중종이 보고 매우 놀라게 하고서 고변(告變)하여 화를 조성하였다, 이 일은 《중종실록》에 누락된 것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략 기록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1년(1568) 9월 21일 2번째 기사#


주초위왕 일화는 당대 기록인 중종실록에는 없으며 50여 년이 지난 선조실록 1568년 기사에 뜬금없이 '남곤 등이 조광조를 모해한 전말'이라 하여 사관이 기록해 놓은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역모와 관련된 내용이면 미신이나 주술적인 요소도 빠짐없이 기록했기 때문에 당대에 기록되지 않은 것에서 이 이야기가 진짜인지 신빙성을 의심하고도 남으며, 후대에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관은 이 이야기를 저술하면서 중종실록에 누락된 내용이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는데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일파에게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니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쟁은 없는 이야기도 지어내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다. 만약 주초위왕 사건이 정말 기묘사화의 시작이었다면 당대 중종과 신하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안 나왔을 수가 없고 실록에도 기록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밑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중종은 온 신하들이 다 반대하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 기어코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다. 따라서 뜬소문으로라도 주초위왕 같은 말이 나돌았다면 중종 본인이라도 이야기를 꺼냈을 것이다. 왕조국가에서 왕이 된다는 참언만큼 죽이기 좋은 명분은 없다.

하지만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는 순간이나 투옥 이후 심문을 할 당시에는 비슷한 이야기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또한 실록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기묘사화를 현장에서 지켜보고 실록을 적던 사관들도 왕의 의중을 모르겠다며 매우 답답해하는 심정으로 실록을 서술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만약 그 자리에 '대궐에 글자가 새겨진 잎이 발견되었다.'느니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 같은 말이 조금이라도 나왔다면 사관이 적극적으로 적으면 적었지 이를 굳이 은폐할 이유는 없다.[2]

따라서 '주초위왕'은 조광조의 신원이 회복되고 '성현'으로 추앙받기 시작하는 선조 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봐야 한다. '주초위왕' 설이 나온 이유는 중종에게 성현을 숙청한 왕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지 않기 위함이었고 이는 왕실의 이미지와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에 조선 왕조 내내 주초위왕 설이 정설처럼 여겨졌던 것이다.[3]

이후 주초위왕 이야기는 널리 퍼져서 조선시대 내내 정설처럼 통했고, 현대에도 한동안 진실처럼 여겨졌다. 이는 조선왕조가 무너진 이후에도 실록이 완역되기 전까지는 기묘사화 당대의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이 멸망한 이후에도 한동안 이 이야기는 사실인 줄 알았으나 거듭된 연구로 현재는 주초위왕은 허구이며 기묘사화는 중종 본인이 조광조 숙청을 목적으로 일으킨 친위 쿠데타라는 것이 정설이다. 왕조 이미지를 위해 후대에 윤색된 내용이 첨가되었다는 점에서 양녕대군이 양보했다는 속설과도 일치하는 점이 있다.


2.3. 현대의 해석: 중종의 친위 쿠데타[편집]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

중종실록》, 중종 14년(1519) 12월 16일 병자 2번째 기사

주초위왕 설이 사실상 허구로 밝혀진 지금, 기묘사화는 중종이 스스로 일으켰다는 게 정설이다.

실제로 기묘사화의 전개 과정을 보면 일반적 인식과는 다른 상황들이 나타난다. 우선 기묘사화 당시 실록 기사를 보면, 조정 회의에서 조광조에게 사형을 내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중종 단 한 명뿐이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광필은 물론이고, 사화의 주모자로 알려진 남곤도 조광조에게 사형을 내리는 데에는 반대했다. 이들은 조광조 일파도 아니었고, 오히려 조광조를 가장 강경하게 견제하던 세력들이었다.[4] 조광조가 처음에 사형을 면하고 능성[5]으로 귀양간 것도 남곤과 정광필이 결사적으로 반대한 덕이었다.

심지어 훗날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라는 명이 내려졌을 때 사관은 "정광필이 가장 슬퍼하였고 남곤 또한 슬퍼했다." 하고 기록했다. 훗날 권신이 되는 심정, 이행 등도 조광조를 죽일 필요까진 없을 것이라며 사사에는 반대했고, 정책적으로는 조광조의 반대파이지만 대쪽 같은 정승이었던 정광필은 "신은 임금을 살육의 길로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저들은 조금도 삐뚤지 않은 사람들인데 어찌 죽음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간언하면서 아예 모가지까지 내어놓고 중종을 만류했지만, 중종은 기어코 추가죄목을 찾아내 조광조를 죽였다.

따라서 기묘사화는 중종 자신의 의지로 일이 촉발되었고, 중종 스스로 밀어붙여 조광조를 숙청했다고 봐야한다. 중종이 이런 결심을 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는 제쳐두더라도, 세간에서 알고 있는 것처럼 기묘사화의 주역은 남곤이나 심정이 아니다. 실제 사건이 일어났던 중종 14년(1519) 11월에 대신들을 은밀히 소집한 것도 중종이고 이 자리에서 느닷없이 조광조에 대해 사형 판결을 내린 것도 중종 혼자 저지른 일이다.

특히 야밤에 미리 군 병력을 소집해 궁궐 내에 배치한 후 조광조 일파였던 승지들을 체포하고 임시 승지를 임명해 조광조 일당을 모조리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누가 봐도 친위 쿠데타의 모습이다. 아무리 권력의 핵심인 고위직 신하라고 해도 남곤, 심정 같은 신하가 군 병력을 소집해서 궁궐 내부로 불러들인다는 미친 행위를 할 수 있을리가 없다. 왕을 끌어내리는 정변이나 역성혁명에서나 볼법한 일이지, 신하들 간의 파벌 싸움과는 한참 거리가 먼 상황인 것이다. 남곤이나 심정이 한 건 그냥 중종의 발표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 것일 뿐이다. 중중과 훈구파 사이에 뭔가 뒷거래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훈구파가 주도하고 중종이 마지못해 허락한 모습은 절대 아니다. 그나마도 '조광조의 실각'에 지지를 보냈을 뿐이며, 위에서 언급했듯 중종이 조광조를 처형하려 하자 어떻게든 막으려 했던 인물들이었다.

거기다가 리더라고 불렸던 남곤은 사실 훈구파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인물이다.[6] 당시에는 훈구와 사림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딱딱 나뉘는 개념도 아니었다. 훈구 대신은 말 그대로 원훈들, 즉 정통 공신 가문 출신을 말하고, 사림은 개인의 학문 사조를 말하는 것이라서 충분히 겹칠 수도 있었다. 현대 정치로 비유하자면 훈구는 원로, 사림은 진보 정도로 볼 수 있다. 진보 세력에도 얼마든지 나이많고 경력도 오래된 원로 정치인이 있듯, 당시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남곤은 개국공신 남재의 후손이라 공신 가문이지만 사림의 종장인 김종직 일파에 속했다. 그는 정통 관료 출신이면서도 사림 세력[7]과 교류를 많이 한 사림 온건파에 가까웠으며, 중종 즉위 후에는 성희안, 박원종 등 기존 공신들과 대립각을 세웠고, 나름 청렴하고 깨끗한 인물이기도 했다. 능력도 출중해 명나라로 보내는 외교 서신을 만드는 일도 이 사람 혼자 전담했다. 그리고 사림의 대표 주자로 여겨진 조광조도 개국공신 조온의 후손이며 명망 있는 가문이었기 때문에 가문을 기준으로 본다면 훈구에 속했다.

계파 분류상 겹친다는 점은 제외하고도 애초에 남곤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았다.[8] 남곤이 조광조와 정치적으로 척을 졌음은 사실이었지만, 기묘사화 당시에 남곤은 '귀양 정도나 한 몇 년 정도만 있다가 돌아오겠지?'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의 실록 기록을 보면 남곤의 발언은 어느 순간부터 기묘하게 달라져 나중에는 조광조 일파로 보일 정도로 그들을 두둔하기에 이른다. 당시 남곤이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결국 기묘사화는 주연 중종, 조연 남곤·심정·홍경주, 피해자 조광조로 봐야 한다. 즉, 중종에 씐 유약한 이미지와 주초위왕 에피소드, 후대의 윤색이 섞이면서 주·조연이 바뀐 셈.

후대에 남곤, 심정 등이 기묘사화의 주역으로 남은 이유는 간단하다. 훗날 조광조는 문묘에 배향되면서 사실상 '조선판 유교 성인'의 위치로까지 추앙받았다. 따라서 당연히 조광조의 일생을 다루면서 그의 몰락하는 과정을 안 다룰 수가 없는데, 기묘사화의 주역을 중종이라고 인정해버리면, 중종은 문묘에 배향될 정도의 성현(聖賢)을 죽였다는 오점이 남는다. 중종의 체면과 이후 왕통의 정통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조광조를 신원하려면 누군가 그 책임을 대신 져야 했고, 그것이 남곤과 심정이었기에 이 둘은 '주초위왕'이라는 낭설과 함께 모든 오명을 대신 뒤집어 쓴 것이다.


3. 중종의 의중[편집]


중종이 기묘사화의 주역이라는 점은 이처럼 확실하지만 '중종이 왜?'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중종이 회고록을 남긴 것도 아니고[9] 중종 본인이 당시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으므로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후대에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한다.

1차적으로 꼽히는 원인은 우선 조광조가 왕권과 조선 왕실에 대한 도전 행위를 보였다는 점이다. 사실 중종 치세 초기는 아무리 폭군인 연산군을 몰아내기 위해 일어섰다고는 해도 반정은 반정이라 정통성이 매우 약했다. 거기에 운도 없이 중종 치세때 재난이 매우 잦았다. 종묘에 벼락만 2번 떨어졌고, 성저십리쪽인 지금의 성북구에서 진도 6.7의 지진이 일어나 전국이 흔들리고, 가뭄, 가을장마, 태풍, 해일 등의 자연재해가 한해 몰아서 일어나고, 전염병도 돌았다. 이러니 가뜩이나 약했던 왕권이 더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일례로, 중종과 조광조는 당시 조선 왕실에서 전통적으로 존중해왔던 도교풍 제사기관인 소격서 철폐를 놓고 격심한 의견 대립을 보인 적이 있다. 이때 조광조는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에 두고 강경하게 폐지를 요구했다. 수차례 폐지 논의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 성종 같은 역대 왕들이 지켰던 소격서가 중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없어지게 되자 중종은 체면이 깎이게 되었다. 결국 완고하고 타협을 모르는 조광조의 행동을 중종은 점점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계속해서 왕권을 위협하고 신하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는 태도에 슬슬 화도 났을 것이다.

홍문관에 전교하기를, "소격서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아조(我朝)의 세종과 성종께서 태평의 정치를 이룬 것은 본디 우연한 것이 아닌데도 오히려 혁파하지 않으셨으며, 이는 지금 창설한 것이 아니니 혁파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매, 조광조 등이 재차 아뢰기를,

"가령 세종·성종께서 대성(大聖)이라 하더라도 이 소격서를 혁파하지 않으신 것은 큰 잘못입니다. 지금 만약 세종·성종께서 혁파하지 않으신 것이라 하여 끝내 혁파하지 못하시면, 뒤를 잇는 자손도 반드시 성상을 핑계하여 말할 것이니, 유행하는 폐단이 오늘날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하였다.

중종실록》, 중종 13년(1518) 8월 28일 4번째 기사#

실제로 실록 기사에 따르면 조광조는 점점 선을 넘는 발언을 일삼고, 조선 왕조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이전 왕의 행동을 신하 입장에서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발언까지 했다. 중종은 폐지를 요구하는 조광조에게 "세종께서도 소격서를 철폐하지 않았다." 하며 반론하자 조광조는 대뜸 "세종대왕의 유일한 오점이 바로 소격서를 남긴 것."이라고 받아쳤다.

선대 왕의 오점 운운하는 이 발언은 지금 봐도 상당히 무례한 말인데, 당시 시대에서 사안에 따라서는 역도로 몰리기에도 충분한 언행이었다.[10] 선왕에 대한 평가는 설령 지금 왕이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지라 조선 역사를 보면 선왕의 결정을 뒤엎지 못하거나 뒤엎어도 실제 생각은 달랐을 것이라느니 신하가 멋대로 저지른 일이라느니 하면서 우회적으로 건드렸을 정도이다.[11][12]

따라서 조광조의 행동은 전제 왕권 체제에서 용납될 수 없었고, 면전에서 자신의 고조부에 대한 지적을 들은 중종도 그 앙금을 오래도록 기억에 새겨둘 만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세종은 당대나 현재나 조선 역사에서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사람인데 유일한 오점이 어쩌고 하는 것 자체는 왕 입장에서는 더욱 꺼림찍할 수 있었다. 즉, 이런 식으로 조광조 일파가 점차 '선을 넘는 발언'을 하면서 왕권을 위협하는 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에 숙청하기로 가닥을 잡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또한 이 소격서 혁파 사건 전에도, 조정이 '조광조 일파'로 채워지기 시작하자 기막힌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조광조 세력 신하들이 근래에 나라가 바로잡혀가고 있다며 이게 다 조광조 덕이다라고 발언한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이 역시도 문제인 것이 전제군주제 하의 국가에서는 정말 왕이 쉴드 불가능한 실책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왕의 실책은 신하의 실책이 되고 신하의 공적은 왕의 공적이 된다. 그런데 저 발언은 중종 면전에서 나온 말이다 물론 조광조의 정책은 조광조에게서 나온 것이니 실제로는 그의 공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왕 앞에서 조광조 덕이에요(=당신 덕이 아니다) 라고 하는것에 중종의 기분이 어땠을까?[13]

이외에도 기묘사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위훈삭제 사건에서 조광조 일파가 주장했던 삭제 명단에는 종친들도 많이 있었기에 왕가의 지지 세력이 흔들리게 되자 중종이 위기감을 느꼈다는 분석도 있다. 어느 방향이든 왕권에 위협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물론 당대의 위훈삭제 사건이 나름 정당한 행동이긴 했다. 위훈의 수가 너무 많고 반정공신들 중엔 엉뚱한 사람들도 많이 껴서 논란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 위훈삭제는 이미 중종 초의 대간들도 주창했던 일이며 실제로도 일부가 개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판에서는 정당하고 부당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종 입장에서 그들이야말로 임금인 자신에게 가장 든든한 친위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종반정을 기획, 실행하여 중종 정권을 출범시켰고 최고의 권세를 누렸던 3은 이미 사망한 뒤라, 남은 공신들은 정말 중종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을 모조리 삭제하자는 주장은 중종 입장에서는 위협으로 느낄 소지가 충분하다.[14]

나름 개혁파라고 생각해서 힘을 몰아줬지만, 그게 제대로된 개혁이라기보다는 사림끼리 정계 인맥을 형성하고 코드인사로 점철된 '우리끼리' 정치를 보여줬기 때문에 중종이 실망해서 숙청을 결심했다는 추측도 있다. 실제로 조광조가 실각한 이후 조광조 및 그 일파가 저지른 현량과의 폐단이 온갖 곳에서 고발되어 나온다. 주된 고발 내용은 급에 맞지 않고 실력이 부족한 인사를 단지 사림 조광조 일파라는 이유만으로 두루 요직에 앉혔다는 것.

현량과(賢良科)는 부득이 혁파해야 합니다. 당초에 듣건대, 김식(金湜)은 급제한 자가 아니건만 저들이 다 끌어들여서 경연관(經筵官) 또는 대사성(大司成)이 되게 하고자 하였으나 조종의 법이 아니므로 현량과라는 명목으로 저희가 아는 자들만을 뽑아서 시험하되 그 사람들의 이름 밑에 ‘경제(經濟)가 유여(裕餘)하다.’ 느니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다.’ 느니 주를 달았다 합니다. 대저 경제가 유여하다는 것은 능히 성인 지위에 도달한 자라야 그런 것입니다. 널리 베풀어서 뭇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요(堯)·순(舜)일지라도 잘할 수 없는 것인데, 이런 사람을 경제가 유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학문에 연원이 있는 것도 성인 지위인 사람입니다. 공자(孔子)의 제자 중에서 오직 안자(顔子)한 사람이 이에 해당하고 자유(子游)·자하(子夏)일지라도 잘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저런 자가 잘할 수 있겠습니까?[15]

이것은 다 임금을 속인 것이며 그 나머지도 이와 같습니다. 임금께서 능히 깨달으시면 쾌히 결단하여 혁파해야 하고 이렇게 유난하셔서는 안 됩니다.

중종실록》, 중종 14년(1519) 12월 14일 2번째 기사#

이러한 고발이 사화 이후에 터져나온 것은 조광조 일파가 죄다 실각했기 때문에 뒤이어 나온 것이지 인사 비리 자체는 이전부터 계속 암암리에 문제제기되었을 확률이 높다. 당연히 중종 귀에도 들어갔을테니 조광조에게 크게 실망하여 결국 숙청으로 가닥을 잡지 않았겠냐는 것. 그전까지는 문제제기가 거의 되지 않았는데 이는 당연하다. 조정의 요직들이 죄다 조광조 일파 손아귀에 들어갔으니 제기를 할래도 할수가 없었던 것. 괜히 중종이 기묘사화를 일으키면서 숙정문으로 몰래 훈구파들을 입궐시키고 조광조 일파 모르게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게 아니다.

조광조·김정·김식·김구·윤자임·기준·박세희·박훈 등이 서로 붕비(朋比)가 되어 자기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자기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로 서로 의지하고 권세있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서 후진을 이끌어 궤격(詭激)이 버릇되게 하여 국론이 전도되고 조정(朝政)이 날로 글러가게 하였으나, 조정에 있는 신하가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크다. 왕법(王法)으로 논하면 본디 안율(按律)하여 죄를 다스려야 하겠으나, 특별히 말감(末減)하며 혹 안치(安置)하거나 부처(付處)한다. 대저 죄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는데 벌은 경중이 없이 한 과조(科條)로 죄주는 것은 법에 어그러지므로 대신들과 경중을 상의하여 조광조는 사사(賜死)하고 김정·김식·김구는 절도(絶島)에 안치하고 윤자임·기준·박세희·박훈은 극변(極邊)에 안치하라.

중종실록》, 중종 14년(1519) 12월 16일 2번째 기사#

실제로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 중종의 전교를 보면 중종이 지목한 조광조의 핵심 죄목은 자신들끼리 편을 만들어 싸고 돌았고, 자기 사람들만 천거하는 코드인사를 행했으며 국론이 뒤집히고 조정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내린다. 중종이 생각한 조광조 숙청 사유야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전교에는 아무래도 생각하기에 가장 큰 핵심적인 죄목을 대표로 언급했을테니 이게 숙청을 결심한 결정적인 사유일 확률이 높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중종이 폐위 과정을 눈으로 목격하였고, 자신에게 주어진 왕좌를 신권의 지나친 비대화로부터 지키기 위해 왕권에 위협되는 조광조와 그 이상의 권력을 갖는 권신 김안로의 숙청을 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처럼 여러 가지 추측이 설왕설래하지만, 중종이 실제로 어떤 의도로 숙청을 밀어붙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설명했다시피 중종이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중종의 생각은 위의 추측 중 하나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았을 확률이 높고, 어쩌면 위에서 언급한 사유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숙청을 결심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중종이 조정 중신들의 수차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결정을 관철하여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고, 심야에 미리 친위 세력까지 준비해 조광조 일파를 일거에 쓸어낸 것을 보면, 중종의 조광조 숙청 의지는 예전부터 확고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평범하게 정국을 돌보다가 벌레에게 파먹힌 나뭇잎 따위를 보고 홧김에 갑자기 결정한 숙청은 절대 아니라는 말이다.

4. 후일담[편집]


중종은 당시 승지들도 모르게 입궐명령을 내렸고, 남곤, 심정 등은 경복궁의 북쪽에 있는 신무문으로 들어와 승지들 모르게 회의를 열었다. 그래서 기묘사화를 북문지화(北門之禍)라고도 부른다.

갑자기 소집된 조정 회의에 놀란 조광조 등 사림파는 부랴부랴 경복궁으로 들어왔지만 회의는 이미 끝난 뒤였고 곧바로 체포되었다. 어리둥절했던 조광조는 감옥 안에서 배신감을 가져서 술을 엄청나게 마셨다고 한다. 죄인이 어떻게 감옥에서 술을 구했나 싶을 텐데, 조선시대의 감옥은 사식이 없으면 수감자가 굶어 죽을 만큼 거의 식사를 챙겨주지 않았다. 대신 감옥 밖에 있는 가족들이 수감자 먹을 음식을 챙겨주게 하였다. 이는 역으로 생각하면 잘 살던 사람이 감옥에 들어갔더라도 다른 가족만 멀쩡하다면 그만큼 사식이 잘 들어갈 수 있었다는 뜻도 된다. 그래도 술은 너무했다.

다음 날 취조를 위해 간수들이 조광조를 끌어냈을 때는 이미 너무 취해서 심문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여기서 만취한 나머지 조광조는 심문관이었던 병조판서 이장곤에게 술주정을 했는데 "희강(이장곤의 자)아!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못난이 같으니라구!"라는 반말도 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었다.

결국 이게 조광조를 죽음으로 모는데 중요한 명분 중 하나를 제공했다. 중종은 대신들 거의 전부가 조광조의 사형을 반대하는 와중에 "국문장에서 한 짓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하며 사형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남곤이 이를 필사적으로 막으면서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습니다."라고 술에 취해서 벌인 실수라 죽이는 것은 심하다며 반박했기에 사형을 언급하지 못하고 결국 유배로 끝이 났었다.[16]

앞에서 말했다시피 남곤과 정광필의 만류로 조광조는 능성으로 귀양 당했지만 한 달도 못 돼 바로 사사당했다. 이 외에 김정, 기준, 한충, 김식 등 수십 명도 역시 유배됐다. 현랑과는 없어졌고 공신에서 삭탈된 훈구파들은 모두 복훈되어 빼앗긴 재산을 모두 되찾았다.

후일 이때 희생된 사람들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불렀다. 다만 조선 당대에도 비판이 있어서 율곡 이이는 16세기 후반에 쓴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가 성급했다고 비판했고, 퇴계 이황 또한 조광조를 두고 공부가 부족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대체로 조광조가 너무 과격하게 이상 정치를 추구했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조광조의 개혁에 긍정적인 부분도 있기는 하다. 한전론과 노비 종모법을 중심으로 연산군 이후 심각한 사회 문제였던 국역의 이완, 지배층의 모랄해저드와 토지 잠식, 양소천다 현상을 해결하려 했고 훈구와의 격렬한 충돌 끝에 절충론이라 할 수 있는 급양자 3자 첨입까진 이끌어 낸다. 이 시기 조선 인구의 50%가 노비였다. 국가가 내부에서 완전히 곪아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선조 대에 집권한 후대 사림들 중에 이 정도로 적극적인 개혁을 주장한 사람이 없다. 제대로 언급이나 관련된 개혁 논의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치부에만 열을 올렸다. 사림, 특히 서인을 중심으로 개혁론이 제기되고 사족들이 동감하게 된 건 임진왜란이란 초유의 국난 이후다. 개혁 안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걸 절실히 깨닫고 나서야 움직였다. 허나 조광조도 그 일파도 사실 민생문제나 부국강병보다는 자신들의 성리학적 이념 실현에 더 맹목적으로 매달려 있었기에 맞는 얘기는 아니다. 즉 조광조에 대한 비판론자들이 수구반동이라기보다는 자기네들 눈에 보기에도 조광조가 너무 맹목적이라 공부가 부족하다고 평한 것일 수 있다. 실제로도 세종대왕, 성종대왕이라도 잘못했습니다란 돌직구는 시대관을 감안하면 망언급이다. 또한 현량과를 통해서 코드인사라는 무능한 자기 일파로만 가득 채운 후 자신들에게 반대하면 무조건 소인으로 몰아붙이는 태도를 비롯해 시와 문장을 모두 없애버려야 한다는 망언과 속고내 토벌 반대를 하면서 보인 망언 등은 옹호의 여지가 없고, 조광조를 신격화시킨 사림들도 해당 부분의 언급을 하지 않을 정도.

선조 1년에 조광조는 신원되었으며, 문묘에 배향되고 영의정으로 추증되는 등 명예가 회복되었다. 하지만 주범이자 선왕인 중종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왕조 국가에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주초위왕' 날조설이 공식화되고 모든 책임은 남곤과 심정에게 돌아갔다.

참고로 이때 이순신의 조부인 이백록도 기묘사화에 휘말려 처벌을 받았다. 단,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처럼 사약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고, 그냥 벼슬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물러났다가 나중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벼슬 생활을 한다. 그러니 이순신더러 역적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엄연히 틀린 말.

게다가 이순신이 벼슬 생활을 시작한 선조 시대에는 여론이 공식적으로 완전히 뒤집혔다. 물론 사림들에게는 더욱 오래 전부터 기묘사화가 부당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상이 기묘사화 때 해를 입었다.'고 하면 역적의 자손이라 하여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문의 영광으로 여길 만한 일이었다. 당장 인조 때 명신 김육만 해도 증조부가 조광조 때 같이 피해를 입은 김식이었다. 김육의 가문은 송시열과 대대로 대립하며 김석주까지 번영을 누렸으나 후반기에는 송시열과 다시 손을 잡았다.

한편 이 사화는 훗날 이이이준경이 대립하는 한 가지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이는 을사사화(1545) 공신들의 위훈을 삭제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 반면, 이준경은 함부로 시도해선 안 된다고 비판하였다. 이준경은 바로 조광조의 제자였고, 그 조광조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똑똑히 보았기 때문.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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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자이므로 의미 해석에 의미는 없지만 굳이 해석해보자면 똑같이 달린다가 된다. 왕과 같은 길을 걷다가 결국 추월해버리고 왕이 된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2] 조선을 비롯한 왕조국가에서는 자신이 연관된 적도 없는 역모 집단이 자신을 추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죽게 된 왕족들이 많았다. 그만큼 왕의 자리를 노린 죄는 무겁게 다스렸고, 당대 사람들에게 이는 숨을 쉬듯 당연한 패러다임이었다. 따라서 조광조에게 어떤 형태로든 '왕이 된다.'는 참언이 나돌았다면 조광조라는 인간의 죽음을 개인적으로 안타깝다고 여길 수는 있어도 사약을 받는 것 자체는 납득하는 분위기였을 것이다.[3] 실제로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 시기, 조광조의 관직이 잠깐 회복되는 일이 있었고 이를 인종 사후 행장에 인종의 업적으로 실으려 하자 '이걸 적으면 인종에게는 업적이 되겠지만 중종에게는 위신이 깎이니 적지 말자.'는 주장이 나오면서 삭제된 바 있다. 당시 실록 기사 이걸 기록한 사관은 업적으로 남겨야 한다는 주장에 동조했는지 삭제한 내용을 실록에 주석으로 적어놨다.[4] 조광조가 현량과를 시행하려 할 때 가장 앞장서서 반대한 자가 정광필과 남곤이다.[5] 현재의 화순군 능주면, 도곡면, 도암면, 이양면, 청풍면, 춘양면 일대에 있었던 옛 행정구역.[6] 서얼 출신인 유자광의 어머니가 노비 신분이라는 것을 언급해 유자광을 모욕했다는 설이 있기도 했다. 물론 유자광은 서얼 출신이라서 왕의 권세에만 기대야만 하는 처지라서 훈구파와도 겉도는 수밖에 없는 신세였지만.[7] 남곤은 김종직의 제자이자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의 동문 겸 친구였다.[8] 오히려 중종이 두려워서 억지로 따른 티가 드러나는데, 정광필을 설득하라고 중종이 밀명을 내려도 정광필에게 가서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등 내심 찬성하지는 않지만, 병력까지 동원한 중종이 두려워서 소극적으로 따르며 방관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조광조를 진짜로 죽이려 드는 중종의 행동에 자신의 관직까지 사임할 각오로 적극적으로 반대하게 돌변하는데, 연산군 때의 사화가 다시 벌어지는 것을 막으려던 것으로 보인다.[9] 조선 역대 국왕들의 일기인 일성록이 편찬되는 건 정조 대부터다. 설령 당시에 일기를 적었더라도 기묘사화 같은 파장이 어마어마했던 사건을 기록하면서, 중종 본인이 거기에 자신의 의중을 정확히 기록했을지는 의문이지만.[10] 조선은 엄연히 왕권을 가장 중요시하는 전제군주제 국가였는지라, 신하의 공로는 왕의 공로가 되고, 왕의 과오는 신하의 과오로 치부했을 정도였다.[11] 당장 무오사화가 왜 일어났는지부터 생각하자. 연산군은 조의제문으로 인해 세조는 왕위 찬탈자이자 정통성이 없는 왕이라고 오명을 씌웠다는 식으로 연결해서 삼사를 숙청했다. 또한, 몇천 년 전 중국 진나라 시기에 번건이 당시 황제인 진무제에게 등애의 사면을 건의한 것이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고 촉한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왜 나왔겠는가? 그를 사면하는 순간 선대 황제이자 아버지인 진문제가 그를 평상시에 위험한 존재로 눈여겨 보고 있다가 종회의 반란을 구실 삼아 죽였다는 점을 자식인 진무제가 시인하는 꼴이었기 때문이다.[12]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잘 보면 알겠지만 조광조 본인의 몰락도 이런 식으로 윤색되었다. 기묘사화는 중종이 주도적으로 나선 숙청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남곤과 심정이 저지른 것으로 바뀌었다.[13]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후세 사람이 보기에도 군주의 권위가 외형상으로도 짓뭉개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왕조 말기, 그것도 에나 보이는 현상이다. 예시를 들어 조조가 동귀인과 복황후를 죽인 일, 고징이 효정제에게 "건배하시지요" 라는 말을 한 일 등에서 당시의 군주인 헌제와 효정제 모두 각각 후한과 동위의 마지막 군주였다. 물론 조광조 일파가 중종을 무시한건 아니다만 다른 신하들이 다른 신하의 공업을 군주의 공업이라 하지 않고 해당 신하의 공업이라 하는 것에 중종의 기분은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14] 특히나 중종은 공신 문제로 초기에 여러차례 사건사고를 겪었다. 김공저의 옥사 당시 김공저가 공신이 못 되어 불만을 품은 이들이 많으니 우려스럽다고 말한 게 드러났고 이과의 옥사는 아예 자기가 공신이 못 되었다고 역모를 꾀하다가 걸린 일이다. 심지어 거기에는 반정에 참여하고도 대우받지 못한 무관, 종친이 다수 있었다. 그나마 이건 양반이다. 그 뒤에 벌어진 신복의의 옥사는 개정당한 무관, 종친 출신 공신들이 역모성 발언을 주고받다가 생긴 일이다. 즉, 중종은 이미 공신 책봉, 개정 문제로 초기에 여러 난제들을 충분히 겪었다. 그런데 위훈삭제 대상자는 1등에서 4등까지 숫자도 전체 100여명 중 70여명에 달했다. 이러니 중종은 경악할 수 밖에... 그나마도 처음에 대신들이 주창한대로 4등 중에서 (심지어 이 4등은 대상자가 50여명에 달했다.) 문제 있는 사람만 추려내는 것이면 모르겠지만 (중종도 여기까지는 타협의 여지가 있었는지 별 문제없이 받아들였다) 그것도 아니니...[15] 쉽게 말해 능력보다 훨씬 후하게 평가를 주면서 자기 일파 사람을 일부러 요직에 앉혔다는 뜻이다.[16] 중종은 죽여야 하는 이유를 계속 강조하나 남곤이 그 때마다 막아서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선 유배를 보낸 후에 죽여야 했다. 이 때 중종의 위협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감안하면 남곤과 정광필은 다른 것은 몰라도 조광조의 사형을 막으려고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 셈인데, 중종에게 옳은 말을 하는 정광필마저도 중종이 위훈삭제를 취소하라고 계속 압력을 놓자 결국에 굴복해야 했을 지경이었다. 당장 중종의 친위쿠데타로 인한 군대에 의해 위협을 당하는 상황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