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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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김녕(金寧)#.
2. 생애[편집]
1939년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에서 태어났다.# 경남고등학교(12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고등고시 사법과 15회에 합격하고 유신 정권 시절 대구지방법원 판사를 지내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학생에게 무죄를 선고해 인사상 불이익을 받자 사표를 내고 부산직할시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변호사로 활동하면서도 1979년 부마민주항쟁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 때문에 부마민주항쟁의 자금책으로 몰려 한동안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1980년대 내내 부산지역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부림사건,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때마다 학생운동가, 민주화운동가들을 변호하였다. 부산지역 재야민주화운동의 핵심인물로 노무현, 문재인 등과 함께 1987년 6월 항쟁에 참여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이 부산 재야의 대부인 김광일 변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자신을 포함한 재야세력의 공천'을 조건으로 해서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이때 김영삼에게 추천한 재야인사가 바로 노무현과 김재규인데 노무현은 제안을 받아들여서 통일민주당에 입당해서 총선에 출마하였고, 김재규는 거절하고 재야로 남았다. 김영삼이 발탁하여 상도동계정치인이 된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5공 청문회에서 맹활약하며 청문회 스타로 두각을 나타냈다. 김영삼이 초선임에도 통일민주당 기획조정실장을 맡기는 등 굉장히 신임하였다.
1990년 3당 합당 때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1990년)에 남았다. 상도동 사람들은 김영삼이 5명의 통합불참의원 가운데 김광일을 잡지못한 것을 가장 아쉬워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미니민주당이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하여 민주당이 되자 거기에 따라가지 않고 1992년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였다.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자유당 정상천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제14대 대통령 선거 직전 정주영의 당 운영을 비판하며 통일국민당을 탈당하였다.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초대 위원장, 대통령비서실장, 대통령 정치특보가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 퇴임 후에도 김영삼 대통령을 지근 거리에서 보좌하였다. 여담으로 1995년 9월 당시 민주자유당 서울 송파구 갑 지구당위원장 임명이 되었으나 12월에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한승수 후임으로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어 지구당위원장직을 사퇴해, 공석이 된 그 자리에는 검사출신인 홍준표가 임명되었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부산 해운대구·기장군 갑에 공천을 신청한 김광일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역구를 옮겨 공천하고 김광일 전 실장은 오래 전부터 해운대구·기장군 을의 안경률 위원장에게 지역구를 옮기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 다짐해 왔는데, 이번에 이쪽으로 공천을 받고 매우 마음이 상했다. 강삼재, 박종웅 의원을 제외하고 YS를 따르는 민주계가 대거 공천에 탈락하자 이에 반발하여 공천을 반납하고 민주국민당에 합류하여 부산광역시 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정문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낙선 뒤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등을 지냈으며 주로 부산 지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2010년 5월 24일[1] 향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여담[편집]
- 김영삼 대통령과는 학연 지연 혈연 종교연으로 매우 특수한 관계였다. 경남고와 서울대 동문, 부산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김녕 김씨 종친이고 보수교단의 개신교 장로였다.
- 영화 변호인에 나오는 김상필(배우 정원중)이 바로 김광일을 모티브로 삼은 인물이다.[2]
4. 선거이력[편집]
-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5. 소속 정당[편집]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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