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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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광의 수상과 명예 및 감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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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 챔피언 결정전 우승 반지
2001
(감독)












대한민국농구협회 경기력향상위원장

KOREAN BASKETBALL ASSOC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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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광
金東光

출생
1951년 12월 2일 (72세)[1]
부산광역시 해운대구[2]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신장 184cm|체중 90kg
직업
농구 선수 (포인트 가드 / 은퇴)
농구 감독
가족
아들 김지훈
종교
불교
학력
인천신흥초등학교 (졸업)
송도중학교 (졸업)
송도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이학부[3] (학사)
실업 입단
1975년 기업은행 농구단
소속
선수
기업은행 (1975~1983)
감독
바레인 농구 국가대표팀 (1983~1985)
기업은행 (1987~1992)
서울방송-안양 SBS 스타즈 (1994~1997)
수원/서울 삼성 썬더스 (1998~2004)
안양 SBS-KT&G (2004~2006)
서울 삼성 썬더스 (2012~2014)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2015~2016)
코치
기업은행 (1985~1987)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1994~1997)
해설자
SBS / SBS Sports (2007~2008) [4]
MBC SPORTS+ (2011~2012)
MBC SPORTS+ (2014~2018)
행정가
한국농구연맹 (2007~2008 / 기술위원)
한국농구연맹 (2008~2011 / 경기이사)
한국농구연맹 (2011 / 경기위원장)
한국농구연맹 (2018 / 심판위원장)
한국농구연맹 (2018~2021 / 경기본부장)
대한민국농구협회 (2014~ / 이사)
대한민국농구협회 (2021~ / 경기력향상위원장)

1. 개요
2. 유년기
3. 선수 경력
4. 지도자 경력
4.1. SBS 1기 시절
4.2. 삼성 1기 시절
4.3. SBS 2기-KT&G 시절
4.4. 삼성 2기 시절
4.4.1. 2012 ~ 2013 시즌
4.4.2. 2013 ~ 2014 시즌
4.6. 통산 감독 성적
5. 코칭 스타일
5.1. 장점
5.2. 단점
6. 방송해설위원 시절
7. KBL 경기본부장
8. 스타일
8.1. 작전타임
9. 기타
10.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농구인. 現 대한민국농구협회 경기력향상위원장 겸 이사. 한국프로농구에서 감독과 행정가까지 했던 이력이 있다.

현역 시절 포인트 가드로 두각을 나타냈고 지도자로서도 여러 구단을 두루 거치면서 성공했다. 직설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화끈한 성격과 카리스마가 부각되면서 팬들 사이에서는 '광뽀대'와 귀화혼혈 출신인지 모습이 마치 만화의 두치와 뿌꾸에 나오는 '드라큘라'라는 별명을 가진 열혈남아로 불린다.


2. 유년기[편집]


학창 시절은 꽤 암울한데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아버지 조지 E. 프레츠는 한국전쟁 당시 부산 미 공군 기지에서 복무했던 미군이었고, 어머니 김옥련씨는 진남포 출신의 실향민으로 무남독녀로 자랐으나, 6.25 전쟁 때 부모와 헤어져 부산까지 내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임신 사실도 모른 채 전출 명령을 받아 한국을 떠났고 이후 그가 바레인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을 때인 1983년까지 30여년 동안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어머니에 의해 홀로 키워졌고 학창 시절에는 운동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나 별 감정도 없었다고 한다. 바레인에서 처음 아버지를 만났을 때도 의외로 별 감정 없이 무덤덤했다고. 그러나 97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또 자녀를 키우면서 뿌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00년 이후에 다시 아버지와 만나고 있다고 한다.[5]

부산에서 태어나서 어머니에 의해 홀로 키워졌다. 출생 신고도 거의 2년이나 늦게 했는데, 1950년대에는 워낙 혼혈에 대해 그토록 좋지 않았던 정서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그랬다는 아픈 사연도 있다. 그의 어머니는 황해도 출신인데 혼자 월남했기 때문에 남한에서 가족이나 친척도 없는 처지였다고 한다. 그랬던 어린 시절을 그는 야생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6살 때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쭉 자랐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단칸방에서 살면서 매우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감독&해설자로서의 모습만 본 젊은 농구팬들은 조금 튀게 생긴 사람 정도로 여기기 쉬우나, 선수 시절에는 장발아프로 스타일로 누가 봐도 혼혈 티가 확 나는 외모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밖에서 친구들에게 맞지 말고 이겨서 오라고 강하게 키웠고 실제로 싸움을 잘했기 때문에 학창시절 혼혈이라고 따돌림당하거나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생활력을 키워주기 위해 너무 강하게 키우려 했고 때문에 학창 시절에는 어머니가 어려웠고 어머니에 대한 정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자식을 키우게 되면서 학창 시절 어머니가 어려워서 어머니께 잔정을 드리지 못했던 점을 슬퍼하게 되었다고 한다. 1997년 평생 아들 하나만을 위해 살아오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


3. 선수 경력[편집]


중학교 시절 같은 혼혈인 문영환을 만나게 되고 이 둘은 절친이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야구를 하려 했으나 야구부에 떨어지고 문영환과 농구부 주위를 배회하다가 송도중학교 농구부의 전규삼 감독이 둘 다 서양 혼혈이니 나중에 신체조건이 크게 좋아질 거라는 기대로 둘을 스카웃했다. 이후 수십년간 대한민국 농구를 떠받치는 전규삼표 가드의 첫 시작이었다.[6][7] 김동광 본인은 혼혈로서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기살기로 운동만 했다고 한다. 물론 남들보다 신체 능력이 나았기 때문에 유리한 점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취직 등에 있어서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배는 노력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런 각오와 더불어 남들보다 운동을 잘 하게 되니까 스스로 더 열심히 운동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더 커질 것으로 생각했던 키는 좀처럼 자라질 못해 고등학교 졸업 시점까지도 178cm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대학교 입학 후 멈췄던 키가 갑자기 커져서 184cm까지 컸으니 당시를 생각하면 좋은 체격이었다.

이후 순탄할 것 같은 대학 생활은 지병인 빈혈이 찾아오면서 위기를 맞았는데, 너무 훈련을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토록 훈련이 세기로 유명한 고려대 농구부에서 당시 코치가 김동광의 훈련을 막아가면서 몸 관리를 하게 했고 병원 치료를 하면서 몸을 추스른 김동광은 2학년 때부터 레귤러가 된다. 그 후 대학 무대를 정복하게 된다. 이 때 동시대에 활동한 라이벌로는 박수교가 있다. 김동광과 박수교는 이후 1970년대 명 포인트 가드로서 라이벌이 되었다.

혼혈로서의 장점을 이어받아서 운동 능력이 뛰어났고 포인트 가드이면서도 몸싸움에도 강했으며 천부적인 농구 센스와 포인트 가드로서의 리딩은 당시 최고로 평가받았다. 국가대표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이 때 중국과의 경기 중 228cm짜리 목철주[8]한테 파울했다가 맞을 뻔한 적도 있다.[9] 현역 시절 그의 별명은 불멸의 가드, 코트의 마술사, 탱크가드, 코트의 야생마 등등. 별명만 봐도 최고로 평가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대학교 졸업 후 기업은행의 간판선수로 맹활약했다. 최인선도 있었지만 보통 올드 농구 팬들은 기업은행하면 김동광을 더 기억한다. 당시 기업은행 농구 팀에서 김동광 하면 당연히 떠오르는 이름이었고 그 시절 잘 생긴 얼굴까지 더해 인기도 대단했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삼성 & 현대 등의 대기업들이 잇따라 농구 팀을 창단하면서 기업은행은 선수 스카웃에서 돈빨이 받쳐주지 못해 밀리기 시작했더니 기업은행의 행보 또한 김동광을 실망시키면서 그는 1983년을 끝으로 돌연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4.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후 1983년 월급 200만원의 파격적인 조건으로[10] 2년 9개월 동안 바레인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1985년 바레인에서 계약이 끝나자마자 친정인 기업은행의 코치로 복귀하였다. 1987년 강호석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승격하였다. 대기업팀들과의 힘든 스카웃 경쟁에서 나름대로 알짜배기들을 챙기면서 1992년 실업연맹전 우승도 일궈내는 등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3년 SBS 농구단이 창단되고 선배인 신동파 당시 SBS 감독의 부름을 받게 되는데, 이때 기업은행에서 강력하게 이적을 만류했지만 결국 김동광의 SBS행을 막지 못했다.


4.1. SBS 1기 시절[편집]


1년 뒤 신동파 감독이 물러나자 SBS 감독을 이어서 하게 되었다. KBL 프로농구 출범과 함께 SBS 스타즈 초대 감독이 되었다. 자신을 보좌할 코치로 강정수 코치가 직접 보좌를 했다.이 당시 단신 기술형 외국인이었던 제럴드 워커와 함께했다.

1997 원년 시즌 정규리그 2위와 4강 플레이오프 직행으로 선전했다. 하지만, SBS 구단은 우승 실패를 이유로 경질을 선언했고 강정수 코치는 SBS 스타즈 2대 감독으로 승진했다. 이 과정에서 특유의 드센 품성 탓에 총감독으로 물러나는 부침을 겪기도 했다. SBS 감독 퇴임 이후 1997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약하게 된다. ABC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정광석 감독[11]을 보좌한 코치로 한국농구를 28년만에 아시아 정상에 올려놓게 된다.[12]


4.2. 삼성 1기 시절[편집]


파일:김동광 삼성 감독 1기.jpg

프로농구 출범 이후 최경덕 초대 감독과 김현준 코치의 감독 대행 시절의 뒤를 이어서 SBS 프로 초대 감독에서 물러난지 1년만에 삼성 프로 2대 감독으로 부임했다.1998 ~ 2004년까지 6년간 수원-서울 삼성 썬더스의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1998-1999 시즌 자신을 보좌할 코칭스테프는 김현준 코치와 전창진 코치였다. 선수도 양경민을 보내는 대신 포인트 가드 주희정을 영입하고 신인 드래프트에서 슈팅 가드 강혁을 지명하면서 가드 라인 보강에 성공하면서 전력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 해 삼성은 KBL 출범 이후 첫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999-2000 시즌을 앞두고 코치들이 바뀌었다. 전창진은 1년만에 삼성 코치직에서 잘린 뒤 나래 코치로 이적했고 김현준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새롭게 자신의 뒤를 받칠 코칭스테프로 안준호 코치와 이민형 코치가 새로 선임되었다. 그 중 이민형 코치는 김동광의 측근이다. 문경은주희정을 중심으로 하늘로 떠난 영웅에게 최선을 다하면서 김동광 감독과 2년 연속 KBL 플레이오프 진출을 하게 된다.

2000-2001 시즌을 앞두고 외국인 선발을 잘하면서 최강삼성의 시대를 열게 된다.아티머스 맥클래리라는 올어라운드 포워드 겸 언더 센터와 함께 디펜스가 뛰어났던 무스타파 호프를 영입에 성공하게 되며 차민석(2021 드래프트 1순위)선수 등장 이전 유일의 1순위인 이규섭의 입단과 함께 높이와 전력보강에 성공했다. 포인트 가드 주희정-슈팅 가드 강혁-스몰 포워드 문경은-파워 포워드 아티머스 맥클래리-센터 무스타파 호프라는 정통 베스트 5를 시작으로 식스맨에 가드 김희선과 포워드 강병수와 이규섭 그리고 센터 박상관과 이창수까지 선수층도 좋아졌다.이 기세를 바탕으로 2000-2001 시즌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4강 플레이오프에서 SBS 스타즈를 3승 1패로 창단 첫 KBL 파이널에 진출했고 2000-2001 KBL 파이널은 전자라이벌인 LG 세이커스와 붙게 되는데 전력에서 우위라는 평을 들었다.

파일:김동광 삼성 통합우승 헹가레.jpg

파일:김동광 삼성 통합우승.jpg

2000-2001 KBL 파이널에서 4승 1패로 KBL 플레이오프 우승과 함께 삼성 유일의 KBL 통합우승을 이끌었다. 삼성은 KBL 출범 이후 첫 KBL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마침내 농구명가의 천둥시대를 열였다.그리고, 당시 KBL의 서울 입성 규정 상 KBL 플레이오프 우승팀에 허락했는데 청주 연고의 SK 나이츠와 함께 서울 잠실의 한지붕 두가족 시대를 열게 된다. 하지만, 2001-2002 시즌 KBL 사상 첫 디펜딩 챔피언의 플레이오프 탈락의 시련을 당하게 된다. 이 몰락의 과정을 이렇게 나온다.

하지만 삼성시절에는 성과에 비해 저평가 받은 대표적인 감독인데, 프랜차이즈 스타와의 관계 조율에 실패하고 내친 일 때문에 김동광 감독의 인격을 비난하는 팬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문경은을 팽하고 우지원을 데려왔던 일. 우지원먹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못한 건 아니었지만 역시 문경은만한 활약은 하지 못해 득점력 저하를 불러왔고, 우지원을 데려온 이유를 수비강화라고 언플했지만 정작 우지원 역시 수비가 헬이라 별 차이는 없었다.

더군다나 수비를 중요시하고 기본을 강조하면서도 외국인 선수를 늘 단신조합으로 뽑아서 돌동광이라고 대차게 까이기도 했다. 항상 191cm-199cm 조합의 용병을 선호해서, 2m를 넘는 상대 장신 용병들에게 속절없이 털렸다. 이 때문에 외국인 선수 선발에 있어서 안목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단신덕후라는 비아냥도 들었다. 성적 자체는 좋았지만 이런 점들이 늘 중요한 순간마다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훗날 문경은과의 일화에 대해 2022년 2월 1일 해명하기를 언론에 알려진것처럼 문경은의 수비가 떨어지고 자신이 싫어해서 우지원과 바꿨다는건 절대 사실이 아니며 우지원이 문경은 보다 수비가 약간 나았지만 얼마나 차이가 났겠냐면서 오히려 자신은 문경은의 트레이드를 강력히 반대했으며 문경은이 오히려 자신에게 트레이드를 강력히 요청했으며 심지어 구단 여행때도 계속 트레이드 시켜줄것을 간청했다고 한다. 자신이 봤을때는 다른팀 쪽에서 부추긴거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는데 진실은 감동광 & 문경은 둘만 알듯. 관련기사

2002-2003 시즌을 앞두고 서울 SK 나이츠에서 FA가 된 서장훈을 영입하면서 다시한번 정상도전을 했지만 실패를 하게 된다.주희정의 속도와 서장훈의 높이는 조화를 이루지 못했고 조직력에서 기복을 보였다. 결과는 2002-2003 시즌 6강 플레이오프에서 매각설에 시달렸던 4위팀 여수 코리아텐더 프루미에 2경기 모두 패하며 탈락했고 2003-2004 시즌에는 5위로 마감했다. 6강 플레이오프에서 4위팀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에 1승 2패로 패하며 6년간 삼성 썬더스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 한은 결국 00-01 통합우승 시절 코치였던 삼성맨인 안준호가 후임감독으로 부임해서 2005-2006 플레이오프 7전 전승 우승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것도 주희정을 포기하면서 얻은 성과. 자세한 건 SBS 2기-KT&G 시절로 대신.

4.3. SBS 2기-KT&G 시절[편집]


파일:김동광 SBS 감독 2기.jpg

결국 삼성 감독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곧바로 2004년 SBS 스타즈의 감독으로 복귀했다.자신을 도울 코치들은 SBS 프랜차이저이자 안양 성골인 이상범 코치를 유지하면서 SBS에서 연수를 보낸 김동광의 측근 중 하나인 김상식 코치를 두게 된다.

시즌 전 SBS는 전 두 시즌과 달리 상위권 후보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토종 선수로 포인트 가드 이정석을 시작으로 슈터에 쌍포 양희승김성철이 있었으며, 외국인 조 번과 주니어 버로 조합이 좋았다.

하지만 전자랜드와 삼성, 모비스에 연달아 지면서 개막 3연패를 한 데 이어 1라운드에서 3승 6패, 2라운드까지 7승 11패에 그치며 오히려 꼴찌로 추락했다. 지난 2년간 괴롭혔던 뒷심 부족 문제, 큰 기대를 모았던 이정석이 부상으로 1라운드를 나오지 못한 것이 치명타였다. 기대를 모았던 쌍포 마저 엇박자를 나타내며 시너지를 전혀 내지 못했다. 여기에 주니어 버로는 발목 기형으로 인해 제 모습을 보이지 못하며 퇴출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 하지만 시즌 중반 이후에는 양희승김성철의 쌍포, 조 번의 꾸준한 활약으로 중위권으로 올라서며 6강권 경기력을 이어갔다.

하지만, 1월 중순 조 번이 원주 TG 삼보와의 3차전 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당하며 팀을 이탈했고, 무릎 내측 인대 파열로 6-8주 결장이 확정되며 시즌-아웃을 당했다. 그나마 당시 1월 이달의 선수에 선정된 양희승 포함 주니어 버로 등 토종 선수들의 분전으로 중위권은 유지했지만, 올스타 브레이크 직전 3연패를 당하며 18승 20패로 6위로 추락하며 위기를 맞이했다. 자칫 3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탈락할 위기였다.

그러나 번의 부상은 신의 한 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바로 썰렁했던 안양체육관을 매진으로 만든 단테 존스였다.

파일:김동광 SBS 12연승.jpg
2005년 3월 1일 SBS가 최다 연승 신기록
(12연승)을 세운 뒤의 단체 사진


6강 언저리에 있다가 교체한 외국인 선수 단테 존스의 신들린 활약을 앞세워 15연승을 달리면서 정규시즌 3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15연승 이후 마지막 홈경기에서 LG에게 패배하면서 성적은 33승 21패. 원년 시즌인 97년 이후 최고 성적에 해당된다. 15연승 당시 대구 오리온스에 크게 이기고 있던 도중 여유있게 벤치에 앉아 코치들과 웃으며 노가리를 까던 캡처 사진[13] 덕에 광간지라는 별명을 얻기도. 6깅 PO에서 오리온스를 가볍게 꺾었으나 4강 PO에서는 전주 KCC 이지스에게 1승 3패로 졌다. 그럼에도 김동광은 KBL 최다 연승 신기록을 세우면서 성공적인 복귀를 해냈다.

2년차를 맞이한 2005-06시즌. 이정석을 트레이드로 보내는 대신 삼성 시절부터 제자나 다름이 없는 주희정을 영입하며 런앤건을 꿈꾸기 시작했다. 구단도 SBS는 매각되었고 담배회사인 KT&G로 인수되었다. 팀 명칭은 안양 KT&G 카이츠였다. 외국인도 높이 보강을 위해 주니어 버로를 보내고[14] 전자랜드에서 활약한 정통 센터로 타워 빅맨인 가이 루커를 영입했다. 특히 단테 신드롬을 일으킨 단테 존스의 2년차도 기대되었으며, 쌍포 양희승-김성철도 건재했다. 창단 이래 첫 우승, 심지어 15연승 당시의 경기력만 재현된다면 사상 첫 9할 승률 1위까지 기대했을 정도로 기대감이 높았다.

하지만 2년차 시즌은 좋지 못했다. 양희승-김성철을 포함해 선수들의 잦은 부상이 이어졌으며, 단테 존스는 집중견제와 상대 외국인 선수들의 높아진 경쟁력 속에서 잦은 다혈질과 개인플레이로 고전했다. 여기에 주니어 버로가 나간 센터 자리의 부재도 컸다. 가이 루크-허브 래미쟈나-안토니오 키칭스 또한 버로보다 한참 아래의 기량으로 단테의 의존도를 가중시켰다. 이로인해 시즌 중반에는 9위까지 추락하면서 플레이오프에서 멀어지는 듯 했다. 다행히 후반기에는 전력을 추스르며 단테가 예전의 폭발적인 득점력을 다시 발휘했고, 국내 선수들도 점차 정상 컨디션을 찾아가며 5라운드 부터는 다시 무서운 상승세를 타며 플레이오프 경쟁에 다시 참여했다. 그러나 3월 22일 대구 오리온스와의 경기에서 83-98 완패를 당하며 사실상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됐고, 결국 5할 승률을 기록하고도 당시에는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탈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전체적으로는 높아진 다른 팀들의 수준, 잦은 부상 악재 속에서도 선전했지만 초반 부진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 해 치열한 6강 PO 경쟁 때문에 7위로 밀리면서 PO 탈락했다. [15]

문제는 이 2차 SBS-KT&G 시절은 단테 존스의 의존도가 너무 컸다는 점이었다. 김성철 - 양희승이라는 쌍포와 주희정이라는 리딩 가드가 있었지만, 팀의 핵심은 단테 존스였고, 존스에 대한 파해법이 나오면서 성적이 하락한 격이다.

차기 시즌에도 전력보강 대신 전력유지를 했지만 그건 독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전과 달리 명백히 약체로 평가받았기 때문. 설상가상, 쌍포였던 김성철이 인천 전자랜드로 이적하며 전력이 더욱 약해졌다. 결국 양희승마저 부진에 빠지며 극단적인 단테 존스의 의존도가 더욱 심해졌고, 결국 2006-07 시즌 초반 6승 10패에 그치자 전격적으로 해임되었다.

후임으로는 김상식 대행을 거쳐 유도훈 감독을 선임하면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차기 시즌이었던 2007-2008 시즌에도 정규리그 4위와 플레이오프 4강까지 돌풍이 이어갔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유도훈 감독마저 구단과의 불화 끝에 2008-2009 시즌 개막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자진사퇴를 하게 된다. 결국 SBS 시절부터 성골이었던 이상범 코치가 09-10 시즌 감독대행을 거쳐 오늘의 KGC인삼공사로 바뀐 10-11 시즌부터 정식 감독이 되었다. 그는 11-12 시즌 SBS 시절부터 없었던 KBL 챔피언의 한을 푼 스페셜 원이 되었다.

물론 백수로 논 것은 아니다. KBL에서 행정 일을 보면서 귀화혼혈선수의 영입과 함께 리그 수준을 높이면서 SBS SPORTS와 방송해설로서도 코트가 아닌 야인으로 지내게 된다. 그리고 2011년 MBC SPORTS+ 해설위원과 2012년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으로 복귀할 때까지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특히 삼성과 KT&G-KGC에 대한 해설은 애정을 넘어 열정이었다.[16]

4.4. 삼성 2기 시절[편집]



4.4.1. 2012 ~ 2013 시즌[편집]


파일:김동광 삼성 감독 취임식.jpg

파일:삼성 김동광 감독 김상식 수석코치.jpg


2012년을 앞두고 2006년 안양 KT&G 카이츠 감독 경질 이후 6년만에 KBL 감독으로 돌아왔다. 60세가 넘은 나이었다.

당시 김동광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젊은 사람들은 되고, 저는 안 됩니까? 나이가 많다고 생각해 마음을 비웠던 상태였다. 농구 감독은 나이를 떠나 열정을 갖고 선수들과 어울리며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은 현직 감독들에 비해 절대 뒤쳐지지 않는다. 내가 젊은 감독들에게 배울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11-12 시즌 모교 후배인 김진 감독이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최고참이 되었는데 그만큼 KBL 프런트 농구의 문제점도 드러낸 상태였다. 13-14 시즌을 앞두고 강동희 감독이 승부조작으로 자진사퇴한 원주 동부 프로미의 감독 또한 자신의 고등과 대학 후배인 이충희 감독이 부임할 정도로 감독의 평균연령대가 50대에서 40대로 줄어들기도 했다.

창단 최저 성적을 냈던 김상준 감독을 구단에 이어 삼성스포츠단 차원에서 전격 경질한 이후 서울 삼성 썬더스의 감독으로 전격 부임하면서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김동광의 측근 중 하나인 김상식대구 오리온스 감독을 수석코치로 같이 부임했다.[17]

하지만, 의문이 나왔는데 삼성에서 은퇴했던 이상민이 코치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민이 경험을 쌓아서 감독으로 갈때까지 시간을 벌기위한 몸빵용 감독이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딱히 인연이 없는 이상민[18] 김동광 감독 본인이 선임했을 리는 없고, 프런트가 꼽아놓은거 같은 구도라서 결과가 어떻게 될지 기대 반 우려 반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논란에 관계없이 전력보강 구상을 확실히 밝히는 등 의욕적으로 임하던 모습은 팬들에게 잘 어필이 되었다.

파일:김동광 삼성 감독 개막전.jpg

2012-2013 시즌 홈 개막전에서 승리하면서 전설의 명장이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원주 동부 프로미부산 kt 소닉붐에서 팀과 잘 섞이지 못해서 계륵 취급을 받던 브랜든 보우먼과 대리언 타운스를 각각 트레이드로 데려와서 팀에 완벽히 적응시키면서 재평가를 받았다. 2000년대 초에 용병을 갈구던 모습과는 달리 그 둘의 기를 잘 살려주는점이 높게 평가받았다. 높이가 필요할 땐 205cm, 125kg의 거구 타운스로 대처하고 속도와 득점이 필요할 땐 빠른 보우먼을 기용해서 재미를 봤다. 더군다나 보우먼의 경우 원주 동부에서 음식이 맞지 않아 고생하고 강동희 감독에게 이리저리 까이는 등 고생하다가 삼성 이적후 활기있는 모습을 보여서 죽은 용병도 살린다는 드립이 나왔다.

또한 브랜든 보우먼이 이적 후 원 소속팀 동부와의 경기에서 복수심에 불타올라 노마크 상태에서 필살 5점짜리 360도 계란후라이 덩크!를 구사하다 실패한 뒤 이승준에게 인유어페이스 덩크로 역관광당했음에도 오히려 보우먼을 격려해주는 모습에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보우먼을 자주 갈비집에 데려갔었다는...

중간에 8연패를 포함하여 4라운드 1승 8패 9위까지 내려갔지만, 다른 팀들 역시 안 좋은 경기력을 보여줘서 완전히 경쟁에 밀리지는 않았다.

이 시절 경희대학교 10학번 트리오[19]김종규, 김민구, 두경민을 노리기 위해 쉬어가는 모습을 보였던 허재의 KCC와 전창진의 KT 그리고 강동희의 동부가 탱킹전에 참여했고 여기에 자신의 대학 후배인 김진의 LG도 가세하는 모습에 최고참 감독으로서 쓴소리를 했고 인터뷰에서 "질 거면 우리한테 승수를 내줘라. 우린 플레이오프에 가겠다"며 차라리 자신이 봄농구를 올라가기 위해 배수의 진을 쳤는데 성공하게 된다.

3월 15일에 KCC를 꺾고 2년만에 6강 플레이오프에 팀을 진출시키자 농구팬들은 김상준 전 감독이 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추락시켜 놓은 97 시즌 원년 이후 15년뒤인 지난 11-12 시즌 꼴찌팀을 6강으로 이끈 김동광 감독님에게 찬사를 보냈다.


4.4.2. 2013 ~ 2014 시즌[편집]


파일:김동광 삼성 8연패.jpg

2013년 9월 30일, 신인 드래프트에서 1.5%의 확률을 뚫고 4순위 지명권을 따내 고려대 가드 박재현을 지명했다.#1 이후 원주 동부 프로미와 박병우 - 김명훈 트레이드를 성사시키면서 빅맨 보강을 하였다. 사실은 2년간 임대형식으로 트레이드로, 2년이 지나면 소속팀으로 복귀할 수도 아니면 완전히 바꿀 수도 있다. #2

시즌 초반에는 마이클 더니건이 2경기만에 부상으로 빠지며 8연패를 당하는 등 위기를 맞았지만, 더니건이 돌아오면서 골밑과 수비가 보강되면서 중위권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이후 팀이 다시 연패에 빠지면서 슬슬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특히 트레이드 부분에서 굳이 마이클 더니건을 내주고 허버트 힐을 데려온 것이나, 박재현을 지명으로 인해 빅맨 보강을 위해 박병우를 내주고 김명훈을 영입한 부분, 김동우 영입등으로 선수 보강을 했지만, 뚜렷한 효과를 내지 못한 부분을 비판받았다.

그런데 시즌 중이던 2014년 1월 27일, 팀의 성적 부진에 대해 책임을 지고 감독직 자진 사퇴를 선언했고, 삼성 구단은 00-01 통합우승 시절의 감독이라는 공을 고려했는지 총감독 직함을 주며 계약기간을 채웠다. #3 잔여 시즌은 김상식 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이상민 코치와 함께 치른다고 한다. 팬들은 마저 시즌 치르고 떠나라며 아쉬워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드래프트 때 좋은 선수 잡겠답시고 경기를 개판으로 치른 몇몇 팀들과 달리 끝까지 열심히 했던지라 더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위에 나온 트레이드 포함 신인 육성 능력에서는 비판이 뜨고 있다.

믿거고의 모교 제자인 박재현을 2013 KBL 드래프트에서 지명하면서 박병우를 보낸 부분이 포함된 트레이드들의 실패, 김상준 전 감독의 제자인 포워드 임동섭을 잘 뽑았지만 원래 포지션인 포워드가 아닌 억지로 빅맨으로 전향시켜 발목 부상을 입게 하는 바람에 거진 2시즌을 날려먹은 일, 하위 픽임에도 포텐이 있던 이관희를 올드 스쿨 타입이었는지 자기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고 벤치에 짱박고 그 자리를 황진원김승현 같은 노장들에게 준 것 때문에 안 좋은 쪽으로 재평가도 이루어지면서 삼성 암흑기의 또 다른 주역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사실 김동광 감독 입장에서도 세대차이기는 하지만, 결국 믿거고의 저주를 끊지는 못했다. 추가로 삼성은 전자 라이벌인 LG와 함께 신인 육성을 그렇게 잘 하는 팀이 아니다.

현재까지 흑역사 기간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은 해 놔서 비밀번호가 될 뻔할 걸 도중에 끊어놓은 덕에 삼성빠들의 평가는 좋은 편이고, 또한 KBL 원년 시절부터 본 농빠들 사이에서도 평판은 매우 좋다.

결과론으로 김동광 감독이 보여준 수비와 열정은 대다수 농빠들에게 최고로 기억되고 있으니, 이 점은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한 일이다.


4.5.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5 ~ 2016)[편집]


삼성 감독 재복귀 이전 방송해설을 했던 MBC SPORTS + 방송해설위원을 재개하는 도중 2015년 6월 29일, 남자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다.

그런데 막장 농구협회가 명색이 국가대표팀인데 통역도 매니저도 전력분석관도 없이 감독 한명만 덜렁 선임해놓고, 지원은 나몰라라 하고 있어서 농구팬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매니저도 전력분석관도 없는 김동광호, 불안하다 관련 썰

이렇듯 제대로 된 지원도 없이 선수들이 유니폼을 빨고 제대로 식사도 지원 못해주는 상황에서도 괜찮은 경기력을 보이며 고군분투 했으나, 중국에게 역전패 당하고 8강에서 이란을 만나 패하며 목표를 이루진 못했다. 국가대표의 중심으로 떠오른 이승현과 가드로의 가능성을 보여준 최준용이 그나마 수확.[20]

삼성 썬더스 감독 말년처럼 비극의 성적이었지만 최선을 다하면서 농구인들과 농구팬들은 그나마 위로의 박수를 보냈다. 후임이 부친대표팀을 구성했던 걸 보면...

그 시절 고려대 농구부 출신은 이승현강상재 그리고 문성곤을 지도했다. 3 선수 모두 이민형 감독의 제자들로 KBL에서 선전 또는 성과를 내고 있다. 결국 모교의 눈과 KBL의 눈은 같았다. 이들을 선발하면서 향후 김상식 코치가 허재를 거쳐 대표팀 감독으로 승진할 때 세대교체의 유산을 남겼다.

방송해설에서 보았던 농구지식과 농구열정은 현재 KBL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4.6. 통산 감독 성적[편집]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시즌
플레이오프
1997
안양 SBS 스타즈
21
14
7
2위
4강 PO
통산
21
14
7
0.667
-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시즌
플레이오프
1998-99
수원/서울 삼성 썬더스
45
25
20
6위
4강 PO
1999-00
45
23
22
3위
4강 PO
2000-01
45
34
11
1위
우승
2001-02
54
24
30
8위
-
2002-03
54
28
26
5위
6강 PO
2003-04
54
28
26
5위
6강 PO
통산
297
162
134
0.545
V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시즌
플레이오프
2004-05
안양 SBS-KT&G
54
33
21
3위
4강 PO
2005-06
54
27
27
7위
-
2006-07
16[21]
6
10
-
-
통산
124
66
58
0.532
-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시즌
플레이오프
2012-13
서울 삼성 썬더스
54
22
32
6위
6강 PO
2013-14
39
14
25
8위[22]
-
통산
93
36
57
0.387
-
총계
535
278
257
0.520
V1


5. 코칭 스타일[편집]


전형적인 올드 스쿨 타입이다. NBA로 보면 LA 레이커스마이애미 히트의 전설적인 명장인 팻 라일리를 보면 연상하기 쉽다. 같은 가드 출신의 최인선 감독은 전술과 전략이 해박하면서 미국농구와 한국농구 사이의 해법을 잘 제시했으며 선수를 살린 경우라면, 김동광 감독의 경우 공격 전술과 전략보다 수비 전술과 전략에서는 역대급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SBS 시절 이상범양희승 그리고 삼성 시절 강혁이규섭을 혹독하게 지도했다.


5.1. 장점[편집]


김동광 감독의 최고의 장점은 수비였다. 모교 제자이자 전자라이벌인 창원 LG 세이커스이충희 초대 감독처럼 맨투맨 디펜스와 더블팀 디펜스를 교란하게 활용했다. 높이와 힘이 있는 빅맨들을 중심으로 한 디펜스는 역대급 평가를 받고 있다..[23]

특히 속도가 빠른 편이었던 주희정의 압박수비를 잘 활용했다. 또한 삼성의 성골인 강혁은 투맨 게임 마스터지만 맨투맨 디펜스는 물론이고 존 디펜스도 최고의 수준이었다. 투 가드 라인의 디펜스가 최고면 그야말로 상대팀은 강동희김승현 레벨의 타짜급 리딩 가드가 아니면 김동광 감독이 지휘하는 수비를 깨기 어렵다. 반대로, 큰 인연이 없는 이상민의 경우 턴오버 제조기라는 오명을 받았다.

공격전술의 경우, 주로 투맨 게임에서 리딩 가드 또는 세컨 가드를 항상 강조하면서 픽앤롤과 픽앤팝이라는 전술 또한 간단명료한 것을 선호했고, 외국인 선수에게는 오펜스 때 아웃사이드보다 포스트(즉 인사이드)를 더 강조했다. 특히 아티머스 맥클래리와 무스타파 호프로 00-01 시즌 삼성 역사상 유일의 KBL 통합우승을 달성했고 주니어 버로를 통해 04-05 SBS 12연승 돌풍을 일으켜 파워를 바탕으로 한 포스트 플레이를 강하게 하면서 색깔이 있는 성적을 냈다.

삼성 감독 1기 시절에는 팀에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문경은김승기를 트레이드로 보낸 이후 김희선과 그리고 트레이드로 데리고 온 주희정과 드래프트로 뽑은 강혁으로 이어지는 가드 라인 재편에 성공함을 넘어 드래프트로 뽑은 이규섭의 멘토로 강병수를 데리고 오면서 로스터 밸런스를 잡은 점이다.

SBS 감독 2기 및 KT&G 감독 시절에는 이미 LG 창단멤버였으나 자리를 잡지 못했던 양희승김성철과 쌍포로 구축한 점을 넘어 삼성에서 키웠던 주희정을 데리고 오면서 안양발 런앤건을 만들어냈다.

5.2. 단점[편집]


강성인 성격으로 인해 선수들과 불필요한 기싸움과 오해가 많았다. 삼성의 스타로 남지 못한 문경은과 구단이 또 하나의 우승을 위해 데리고 온 서장훈과의 관계는 썩 좋지 못했으며 SBS 감독 시절에는 당시 신인이자 막내였던 이정석 또한 김동광의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해 떠나야 했다. 공교롭게도 이정석은 삼성에서 이적한 후 05-06 플레이오프 7전 전승 우승 멤버가 되었다. 당시 감독도 자기 라인이 아닌 삼성 성골이었던 코치 출신의 안준호였다.

또한 김동광 감독은 3점슛에 의존하는 농구를 싫어했는데, SBS 2기 시절 단테 존스의 화려한 3점과 덩크에 열광했던 팬들이 많았지만 정작 본인이 그로 인해 비극이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24] 그 시절 김동광 감독은 같은 슈터인 양희승김성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코비 브라이언트 모드로 혼자 북치고 장구를 쳤던 단테 존스를 극도로 싫어했다. 05-06 시즌 이후 FA로 풀린 김성철을 잃은 이후 이 현상이 극심했는데 결국 이로 인해 프런트와의 갈등으로 06-07 시즌 6승 10패로 16경기만에 경질되었다.

6. 방송해설위원 시절[편집]


이게 웬일입니까??[25]

멋있는 게 하나 나왔네요


과거 SBS SPORTS와 지상파인 SBS에서도 방송해설을 했지만 실제로 방송해설의 인기는 MBC SPORTS+에서 시작되었다.

참고로 MBC SPORTS+는 고려대 스포츠부 출신을 살리는 대표 스포츠 전문 채널로 과거에도 직설적인 해설로 유명세를 탔지만 KBL 주관방송사가 된 이후 즉시 영입을 결정하면서 농구인기를 올리기 시작한다.

MBC SPORTS+는 현재 대한민국 스포츠채널 중에서 최고봉으로 KBO 프로야구와 MLB도 중계하는 등 선진적인 케이블 스포츠 채널이다.

"야구에 허구연이 있으면 농구에는 김동광이 있다"는[26] 어록까지 나올 정도로 최고의 해설을 자랑한다.

2011년부터 MBC SPORTS+에서 해설을 하였는데, 해설로서 상당히 직설적인 스타일을 드러냈다. 가끔 무개념 판정을 하는 심판디스하기도 하는 등 프로농구판 모두까기인형의 위엄을 보이고 있어 해설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일부 팬들은 자기팀 선수를 디스한다고 별로 좋아하지 않을 때도 있다. 농구팬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편. 감독 시절에도 외국인 선수가 전술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자 카메라 앞에서 아 진짜! 하면서 위엄을 보였던 전력이 있었는데 해설에서도 그 성향이 확실히 나타난 듯.

2011-2012 시즌 방송해설일 때 주로 3팀에 대한 편파(?) 해설이 있지만 이 팀들의 장단점에 대한 분석은 거의 역대급이었다.

자신이 SBS 스포츠에서 해설을 하면서 SBS가 포함된 안양에서 감독직을 했는지 SBS 스타즈-KT&G 카이츠의 후신인 안양 KGC인삼공사에 대한 분석이 정확했고 부산이 고향이지만 실제 농구고향인 인천 연고와 역시 아들이 매니저를 맡았던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에 대한 애정이 있는 해설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을 명장으로 만들었던 서울 삼성 썬더스 경기의 해설도 당시 김상준 감독이 몰락을 했는지 역대급 디스에 가까운 혹독한 비판의 해설을 하면서 모두까기인형의 위엄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외 자신이 고려대 출신인지 고려대 농구부가 주축이었던 창원 LG 세이커스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에 대한 해설도 냉철한 분석가로서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에서 사퇴한 이후 2014-2015 시즌에 MBC SPORTS+에 돌아오면서도 이 분석력은 변함이 없었다. 4년간 방송해설을 다시 맡았다.

자주 쓰는 표현으로는 "왕왕"이 있는데 익숙치 않지만 "시간 간격을 두고 이따금씩"이라는 뜻의 표준어다. 자신이 가드 출신이라 그런지 리딩가드의 중요성도 심심치 않게 강조한다. 또 백보드를 이용한 뱅크샷 자유투는 성공률이 높지 않다고 좋지 않게 보는 편이다.[27]

해설 성향은 뒤지고 있거나 스쿼드가 빈약한 팀을 응원하는 편이 많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편파해설이라고 까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2015-16 챔피언결정전 6차전. 이 경우에는 KCC가 배수의 진을 쳐도 모자랄 상황에 정규시즌 1위팀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2쿼터부터 가비지 상태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더 나은 경기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런 듯 하다. 생각해 보자. 3쿼터 종료 시점에서 상대에게 무려 98점을 헌납했다는 건 팀을 응원하러 온 원정팬들에게도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당 경기의 해설 내내 KCC의 형편없는 수비력을 시종일관 깠는데도 이게 편파로 불릴만한 해설인지도 의문이다.

그 여부와는 상관없이 2015-2016 KBL 플레이오프 챔피언이 된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는 찬사를 보냈고 모교 출신의 새 스타인 이승현 선수에게는 거의 극찬을 했다. 바로 수비와 열정이었다.

2016-2017 시즌 KBL 첫 농구영신 경기가 시작되었는데 그 마이크를 잡은것도 김동광이었다.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서울 SK 나이츠의 2016-2017 시즌 고양체육관에서 처음으로 열렸던 농구영신 경기에서 당시 야구 최고의 캐스터인 한명재 아나운서와 야구 최고의 해설위원인 허구연 해설위원과 마이크를 잡기도 했다.

2017-2018 시즌까지 MBC SPORTS +의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다가 MBC SPORTS+가 중계권을 반납하기 이전이었던 2018-2019 시즌은 다시 KBL 심판위원장과 KBL 경기본부장으로 복귀하면서 중계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7. KBL 경기본부장[편집]


2017-2018 시즌까지 MBC SPORTS +를 맡은 뒤 갑작스럽게 KBL 한국프로농구연맹의 호출을 받게 된다.

2018년 07월 26일 KBL 경기본부장으로 선임되었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KBL 경기 이사라는 행정을 맡은 이후 7년 만에 다시 KBL에 돌아오게 되었다.

주요 업무는 심판 오심문제를 줄이는 일이다.

이 부분은 방송에 보도되기도 했다.

2020년 01월 21일에는 KBL 경기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지만 대한민국농구협회 기술위원장으로 선임되면서 떠나게 되었다.


8. 스타일[편집]


한마디로 신사다. 그리고 코트에서 직접 뛰는 선수 마냥 땀도 많이 흘리는 열혈 감독이다. 작전타임때 험한 말을 입에 담지 않으며 답답한 상황에서도 침착한 어투로 선수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들의 플레이를 독려한다. 선수들을 질책할 때 목소리 톤이 높다는 특징이 있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꼭 필요한 작전이나 잘못만 지적한다. 이는 역시 목소리 톤이 높은 허재, 전창진 등 다혈질 감독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두 감독은 독설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로 질책 수위가 강하지만, 김동광은 톤은 높지만 뼈있는 충고나 일침을 자주 던져주며[28] 선수들의 입장을 공감해 주는 경우가 많다.

미국인이었던 아버지와 학창시절 농구 외에 학업도 중요시했던 전규삼 송도고 농구부 감독의 영향을 받아 나름 영어 공부도 열심히 했고, 바레인에서 오랜 기간 감독으로 일해서인지 외국인 선수들과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데[29] 혼혈이라는 혈통을 떠나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바레인 감독이 되기 전까지 30여년간 한국에서만 살아온 네이티브 한국인으로서 영어 회화 실력을 그 정도로 갈고 닦았다는 것은 스스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당시에는 영어 회화 학습 여건이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다. 외국인 선수들과 거침없이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면 왜 광간지인지 실감이 난다. 아래에 서술된 것처럼 대리언 타운스를 향해 "Come on, man~!"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가히 압권.

아들인 김지훈에게도 마치 농구인의 모습 그대로 엄격함과 냉정함을 가졌다. 이건 허재보다 더하고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김진보다 더 심했다. 김윤은 생각보다 성장하지 못한 모습으로 2년만에 은퇴를 하게 된다. 이 부분은 김지훈 선수도 부상으로 인해 2년만에 은퇴 이후 매니저를 한 모습과도 평행이론이다. 하지만, 그 속에 따뜻함도 있다. KT&G 감독 시절 경질이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당시 회고할 때 부자선발을 본인은 인정하셨고 삼성 감독 재복귀 때 전자랜드 매니저였던 김지훈 선수에게도 교사자격증이 있으니 다른일을 찾으라는 모습을 보였다. 부자보다 농구인으로서 서로를 위해 쿨하게 인정하면서 개척을 하고 있다. 그리고, 농구에 대한 간절함이었는지 김지훈 선수는 결혼 이후 휘문고 코치로 제2의 농구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8.1. 작전타임[편집]


다른 감독들에 비해 조명이 크게 되지 않았지만, 엄청난 어록제조기다.

특히 지나칠 정도로 언행 수위가 높아 불쾌감을 조성하는 전창진이나 허재와 비교했을 때 훨씬 수위가 양호하며, 직설적이면서도 정도를 넘지 않은 쓴소리로 농구인들의 정신을 깨우면서 농구팬들에게 감동을 남긴 편이다. 모교 후배인 강을준처럼 사투리가 심하지 않은점도 호평을 받는다.

아래는 작전타임 당시의 어록. 김동광 플레이어

"반칙을 하려면 강을준 같은 애한테 해야지, 자꾸 김현준한테 하면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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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막판 파울 작전으로 나온 작전타임에서[30]


게임을 진지하게 해. 거저 되는거 하나 없어 니들. 그냥 거저된다고 생각하지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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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SBS 14연승 경기 당시 2쿼터에 역전 당하고 나서 작전타임때 선수들을 독려하며


정석아. 너 정규전 많이 해봤지? 위축될 거 하나 없어. 이런 게임을 즐겨봐. 그래야 플레이오프 가서도 할 것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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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SBS 14연승 경기 당시 4쿼터 작전타임때 선수들을 독려하며


지금 문제는 지금 뭐야? 수비가 뭐야? 우리, 누가 셋 하라 그랬어? 난 셋 하라고 한 적이 없어. 아 돌겠네. 맨투맨이야.


수비는 열정이야. 수비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야.


야 동준이, 송영진이 데리고 못하면 어떻게 해, 에어포스트를!


야 이동준! 그렇게 무서워서 무슨 농구를 할래? 난 농구 하면서 여기 들어오는 데 피해주는 사람 처음 봤어. 그럼 넌 인삼공사 팀이냐? 아 이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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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16일, 2R 안양 KGC인삼공사와의 홈경기 4쿼터 1분 남은 상황에서 작전 타임.[31]


동준아 슛이 안 들어갔지? 그지? 여기 들어가서 파워가 지나가 너는 여기 있으면.. 그냥 나가 줘야지.. 가만히 구경할 바엔 앉아서 구경하라니깐! 나와서?


이관희! 볼이 뜨겁냐? 잡은 볼을 왜 놓쳐 이 사람아!


주고 다시 받아야지 얼루 들어가~! 언제 어려운 거 가르쳤냐? ... 아이 참 답답한 놈이네.[32]

야 차재영이! 너 가서 여기 걸라고 그랬는데 딴청 하고 앉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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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재영의 플레이를 질책하며


내가 짧게 협력 수비하는 척하면서 돌아오라고 몇 번을 말해? 아~이. 야 선수는 부저가 울릴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돼! Come on man![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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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스를 혼내며


아니 농구에서 박스 아웃을 가만히 서서 하는게 어딨어? 아냐 이 사람이 앞으로 붙어 주고 나오는 그게 농구야! 그렇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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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에게 항의하며


여기서 골밑까지 들어가면 무슨 수로 막을거야? 이건 아냐! 전쟁이야! 이안엔 전쟁! 싸워! 5 파울 나와도 좋아!


여기 지금 수비가 있는데 이걸 왜 니가 가, 여기 있으면 되지! 그리고 지금 리바운드 싸움인데 누가 리바운드를 남한테 맽길 게 아냐! 너는 얘한테 맡기고, 너는 얘한테 맡기고, 누가 리바운드를 하란 얘기냐! 이 안엔 전쟁이야 이 사람들아! 무슨 얘긴지 알어?


야, 너가 지금, 네가 한 행동이 뭐냐 하면, 게임 하다 침도 뱉을 수 있고 욕도 할수 있어. 너도 똑같이 해야지! 너는 놀아나는 대로 하니까 얼마나 손해냐? 넉 점을 거저 주고 공격권까지 줘, 머리를 써야지! 너도 똑같이 욕해! 걔가 욕한다고 발길질 해야 되냐? 농구장에서 발길질 해야 돼? 정신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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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3시즌 5라운드 KCC전 홈경기 4쿼터 8분 20초 남을 때, 46:58 지고 있는 상황[34]


다 한번씩 해야 되냐? 너 왜 안 되는 줄 알어? 잡으면 일대일만 할려 그래! 일대일 능력도 안 되는데 일대일만 할라고 그래! 어떻게 해야 돼? 스크린을 걸어서 플레이를 해야지! 일대일로 해결 하면 아무 소리 안 할게. 그러고 에러 나고 백코트 나면 어떻게 하잔 얘기야? 어? 너, 너, 뭐 어떻게 할라고?


몸싸움 해주라고 유성호! 맨날 웨이트는 뭐하러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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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싸움에서 밀리는 유성호에게)


(선수들 플레이가 맘에 안드는지) 리바운드 하나 잡어 임마, 일메타 구십 몇이야 너. 서 있을려면 여기 나와서 서있어.


야 니들 눈엔 맨날 안 보이냐? 왜 우리 편만 안 보여 쟤네 건 다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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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에게 항의하며


그런 파울 하지 말라고, 무슨 얘긴지 알어? 인텐셔널 파울 같은거 하지 말라고, 대답을 해야 내가 알아들어, 어?


김동광: 비디오 판독 해봐!

최한철 심판: 맞으면요?

김동광: 아 얘기해! 내가 감독 관둘게!

최한철 심판: 아니 그게 아니고 제가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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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쿼터 종료 직전 남은 시간 문제를 두고


여기 전주 아니야 이 사람아! 여기 우리 홈이야! 죄송하긴 뭘 죄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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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C와의 홈경기에서 자꾸 석연찮은 판정이 내려지자


야, 수비를 그렇게 해선 안되지.. 뭐 하는 거야 도대체? 어?? 아... 승현아 니가 보기엔 어떠냐? 어떻게 해야 해? # (이후) 올라가 수비해. 끝까지 하라고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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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 시즌 2014년 1월 18일 4R LG전 홈경기 3쿼터 후반부터 터무니없는 점수차이로 지고 있다가 수비에 대한 질책을 하고 황당함에 벤치에 있던 김승현에게까지 던진 말이다. 사실 목이 쉬었는데도 불구하고 할말은 끝까지 했다. 이후 8연패로 인해 성적부진과 함께 자진사퇴를 하고 말았다.



9. 기타[편집]


광간지라는 별명이 유명하지만 실제로 혼혈 출신인지 모습만 보면 드라큘라 백작에 가깝다. 즉, 열심히 하지 않으면 잡아먹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규섭은 김동광 감독의 호된 질책과 함께 눈물을 흘렸지만 사실 많이 아끼기도 했다.

아들인 김지훈도 고려대를 졸업하고 프로농구선수로 잠시 뛰었으나 무릎 십자인대 수술을 3번이나 하면서 큰 활약은 하지 못하고 은퇴하게 된다. 2010년부터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매니저로 활동하기도 했다. 프로 지명을 아버지가 감독으로 있던 KT&G로 받아 낙하산 인사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 사실은 허재의 아들 허웅이 아버지에게 지명을 받지 않고 원주 동부 프로미에 입단하자 경기 해설 도중에 몇 번 언급한 적 있다.

2012년삼성 썬더스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김동광 감독 배수진 "농구명가 재건위해 아들도 잘랐다"라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본인이 고려대 출신이다 보니 수위급 물망에 오른 고대 후배들이 드래프트에 뛰어들 때마다 고대 가드들을 지명했으나, 그 후배들은 믿거고 정신들을 증명하듯 감독 커리어 말년을 망치게 하는데 한 몫을 했다. 대표적인 선수가 박재현.[35]

야구해설위원 허구연과는 고려대학교 동문으로 친분이 상당하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1951년 동갑내기지만, 김동광의 고려대 학번이 더 빠르다. 2016년 12월 31일, 고양실내체육관에서 열린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서울 SK 나이츠의 사상 첫 KBL 프로농구 농구영신 경기에서 허구연 야구 해설위원이 특별 해설을 할 때 옆에서 많이 도와주기도 했다.

사실 야구로 보면 SUN인 선동열을 연상하면 쉽다.

잭 니콜슨을 닮았다.


10.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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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식 생일1953년 1월 5일로, 이 공식 생일엔 좀 아픈 사연이 있다. 자세한 건 후술.[2] 출생 당시 舊 수영비행장(現 센텀시티) 부근이다. 출생은 부산에서 했지만 6세 이후부터는 인천광역시에서 자랐다.[3] 전공은 불명. 체육교육과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4] 2006-2007 & 2007-2008 KBL 파이널 특별 해설 포함[5] 2001년 아버지를 한국으로 초청했을 때 아버지 프레츠씨는 독일 명문 귀족이었던 가문의 족보를 가져왔고, 가문의 반지를 일곱 자녀 중 장남인 김동광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6] 그 이후 전규삼의 손에서 강동희, 신기성, 김승현, 김현중 같은 많은 명품 가드들이 숱하게 나왔다.[7] 강압적인 지옥 훈련부터 욕설, 구타, 똥군기 등으로 얼룩진 대한민국 학원 스포츠에서 전규삼 감독은 대단히 이례적인 존재, 더 깊게 보자면 한국 학원 스포츠가 지향해야 할 바를 분명하게 제시한 명지도자였다. 1996년에 완전히 은퇴할 때까지 36년 동안 송도중학교, 송도고등학교 감독을 역임하면서 단 한 차례도 선수들을 때리지 않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부터, NBA 고급 플레이들을 연구해서 직접 선수 개개인 맞춤형 훈련 프로그램을 짜줬다는 후문까지.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선진적인 발상을 가지고 계신 셈이다.[8] 중국명 무톄주 (1949-2008). 중국의 전설적인 농구선수로, 16세때 이미 2미터를 넘었다. 포지션은 센터. 군팀인 바이 로케츠에서 뛰었으며, 현역 대령이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바이 로케츠는 워싱턴 위저즈(당시명 불릿츠)과 친선경기를 치렀고, 그때 인상적이었던지 NBA에서 관심을 가지기도 했으나, 당시 중국은 거의 북한급으로 폐쇄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NBA진출을 할 수 없었다.[9] 당시 중국과의 경기 중 목철주를 도저히 정상적인 수비로는 잡을 수가 없어서 돌아가면서 논개를 시전하고 거의 폭력 수비를 하다시피했는데 이때 김동광이 목철주를 세게 쳤다가 친 목철주가 김동광을 찢어죽일 기세로 맹렬하게 달려드는 걸 당시 한국 대표팀에서 제일 컸던 하동기가 막느라 죽을 힘을 다했다고 한다. 하동기는 이때 당시 죽음의 공포를 느꼈대나 뭐래나... 알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하동기는 하승진의 아버지이다.[10] 1983년 당시 월급 200만원(연봉 환산시 2400만원)은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이었는데 이 돈이면 서울 강남에 35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너끈히 살 수 있던 금액이었다. 더구나 이 당시 직장인들의 평균 월급이 30~40만원 수준인 점을 고려하면 한국 직장인 평균보다 최소 6배 이상 많은 금액의 파격 대우를 받았다.[11] 2012년 별세[12] 이 당시 중국 선수들이 외국에서 단체로 병에 걸려와 컨디션이 극악이었다.[13] 완전히 굳은 표정으로 코트를 바라보던 김진 감독과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14] 당시 기사에 의하면, 단테와 함께 재계약을 하려던 버로가 재계약에 미동적인 태도를 보이며 재계약에 실패했다는 후문이 있다.[15] 당시 허재의 KCC와 김진의 오리온스 그리고 신선우가 부임한 LG와 정규리그 54게임 기준 52게임까지 순위를 알 수 없었다. 결과는 KCC 5위, 오리온스 6위, KT&G 7위, LG 8위 그리고 SK는 9위였다. 그 중 LG와 SK는 우승후보로 평가받았는데 충격과도 같았다.[16] 그도 그럴것이 삼성과 KGC에서 가장 오랜 감독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팀의 특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셈이다.[17] 김동광의 측근은 김상식 이외에 1기 시절 임정명이민형이 있었다. 그 중 이민형은 코치로서 한 때 삼성에서 00-01 통합우승을 함께 했다. 하지만 모교인 고려대학교 농구부의 감독직 재임으로 인해 이번에는 함께하지는 못했다. 한 때, 모교 후배인 강을준의 수석코치직이 나왔지만 SBS 스타즈 출신의 김상식으로 회선했다.[18] 김동광과 이상민은 초중고대, 그리고 프로팀까지 전혀 접점이 없다. 학연도 아니고 지도자와 선수로 같은 팀에서 활약한 적도 없다. 반대로 김상식의 경우 기업은행, SBS에서 감독과 선수로 함께 했고, 김상식이 은퇴하자 김동광이 직접 팀에 건의해서 해외 연수까지 보내준 사이다.[19] 쉽게 말하면 경희대 3인방[20] 방열 회장이 유재학을 이뻐했던 댓가라는 비판이 있기도 했다.[21] 시즌 도중 경질[22] 중도사퇴[23] 심지어 외국인 선수들에게 직접 영어로 토킹하면서도 디펜스는 항상 빠지지 않는다.[24] 사실 김동광 감독은 속공과 3점은 살리지만 자신은 확률높은 셋 오펜스(지공)과 얼리 오펜스(지공 속 속공)를 강조한다.[25] 선수가 일반적인 상황에서 나오기 힘든 플레이를 많이 했을 때 이 대사가 항상 나온다. 선수가 이지샷 특히 노마크 상황의 골밑슛을 넣지 못했을때의 반응이 가장 많다. 물론 접전상황에 선수가 외곽에서 말도 안되는 터프샷을 성공시키는 경우도 이 대사가 나온다.[26]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고려대 동문이다.[27] 실제로 농구 교본같은 것을 보면 뱅크샷은 정면이 아닌 대각선 위치에서 쏘라고 권하는 경우가 많다. 정면에서 쏠 경우 방향이 조금만 빗나가도 슛이 실패하기 때문이다.[28] SBS 14연승 당시 SK에게 고전하며 패배 위기에 몰렸을 때 당시 신인 포인트가드인 이정석에게 "너 농구 얼마나 했어? 경기를 좀 즐겨봐. 플레이오프 가서도 잘해야 할 것 아니야."라며 격려하기도 했다. 2쿼터 초반 16점차를 역전당했을 때도 선수들을 몰아붙이지 않고 "농구는 거저 하는 것이 아니야. 욕심 부리지 말고 여유롭게 해."라고 말하기도 했다.[29] 프로 원년부터 통역 없이도 외국인 선수들과 격의없이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비슷한 케이스로는 김 전 감독처럼 해외 생활을 오래 했던 최종규 당시 인천 대우증권 제우스 감독이 있다.[30] 팀 파울 상황에서 파울이 나오면 상대팀에 자유투를 내줘야 하는데 강을준은 슛 정확도가 약해서 오히려 상대팀 입장에서는 반길 만한 입장이었다. 반대로 김현준은 던지는대로 백발백중으로 들어가버리니 상대팀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31] 이동준이 마크가 숭숭 뚫리고 파틸로가 드라이브인을 해오자 비켜주는 등 올스타전스러운 플레이를 보여주자 내뱉은 말.[32] 알다시피 차재영은 바닥을 기는 BQ로 유명했다. 현역 시절 별명이 괜히 차재앙이 아니다.[33] "I said short hedge back, how many told you? 아~이. 야 must be player, ended buzzer. You know, you try your best. Come on man!" 문법에 맞게 수정한 문장은 "I said short hedge back, how many times did I tell you? You must be a player till the buzzer ends"정도[34] 이동준전주 KCC 이지스정희재의 트래쉬 토크(이동준의 입모양을 봐 짐작컨대 "뭐라고? 양키새끼라고?"로 추정)에 흥분해 그를 가격하고 테크니컬 파울을 얻자 작전타임의 상당 부분을 이동준을 추스르는데 썼다. 이동준은 이 경기 후 자신이 혼혈이라 게임 중 여러 불이익을 받는다면서 격한 감정을 토로했는데, 김동광 본인도 혼혈인지라 남 일 같지 않았던 모양.[35] 사실 신인 한 명의 문제라기보다는 삼성이라는 팀 자체가 그야말로 안준호 이후 바닥을 기는 스쿼드였기에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임동섭은 한창 부상으로 앓고 있었고, 이동준, 차재영으로 대표되는 포워드진의 BQ야 뭐 이규섭이 은퇴하고 김동욱마저 오리온으로 보내버린 마당에 제대로 된 승률이 나올 리가 없다. 이상민은 김상준보다 더한 성적인데도 이름값으로 인해 살아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