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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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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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
金枓奉 | Kim Tu-bong


파일:김두봉 위원장(조정).jpg

출생
1889년 3월 17일
경상도 기장현 읍내면 동부동
(現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사망
미상
본관
김해 김씨

백연(白淵)
직업
한글학자, 정치인, 항일운동가
소속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제명)
최종 국적
[[북한|

북한
display: none; display: 북한"
행정구
]]


1. 개요
2. 생애
2.1. 독립운동
2.2. 6.25 전쟁
2.3. 몰락
2.4. 최후
3. 소속 정당
4. 경력
5. 여담
6.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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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im Tu-bong.jpg
젊은 시절
1948년, 노년의 모습

한글 학자, 독립운동가, 북한정치인.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백연(白淵), 백련(帛連).

일제강점기만주로 건너가서 항일 운동과 한글 연구를 병행했으며, 주시경의 수제자로도 명성이 높았다. 북한에서는 국가 수반으로서 고위직에 있었다. 저서로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있었던 한국어 사전인 <조선말본>이 있다.

최현배와 함께 주시경의 제자로서, 분단 이후 최현배는 남쪽에서 김두봉은 북쪽에서 한글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2. 생애[편집]



2.1. 독립운동[편집]


1889년 경상도 기장현 읍내면 동부동(現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서 김돈홍(金敦洪)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문과 한학을 배우고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여 주시경의 가르침을 받았다. 1908년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안교재, 남형우, 신배부, 이경희 등 동료들과 함께 비밀 결사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해서 활동했다. 그 와중에 계속 한글을 연구하며 <조선말본>을 집필하여 1916년 완성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검거를 피해 영국 화물선에 숨어서 상하이로 밀항했다. 1920년대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했고 김두봉은 내무부장 겸 선전부장이 되어 활동했다. 1942년 조선독립동맹의 결성에 참여하여 1942년 7월 의장이 되었다. 이 시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해 훗날 대한민국에서 활동하게 되는 최현배를 포함한 상당수의 어문학자들이 옥고를 겪었는데 김두봉은 중국에서 항일 운동을 하고 있어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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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북조선 로동당 창당 대회에 참가한 김일성과 김두봉[1]
맨왼쪽에 서있는 인물이 바로 김두봉.[2]

1945년 광복이 되자 남한이 아닌 북한으로 귀국하고 조선신민당을 조직하여 위원장을 지냈다. 1946년 8월 소련군의 지원을 받고 있던 김일성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이 창당되자 위원장이 되었으며 소련 군정하에서 조선어 신철자법 제정에 힘썼다.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총장을 지냈으며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언어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8년 북한 정권 수립 당시 김일성, 박헌영 등의 추대를 받아 북한의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국가 수반)이 되었다. 비록 국가 수반 자리에 오르기는 했으나 실권은 수상이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직책을 갖고 있던 김일성에게 있었다. 김두봉이 속해 있던 연안파 내에서도 실제 최고 실력자는 최창익이었다. 김두봉이 국가 수반 직에 오른 것은 당시 북한 정계에서 원로급에 속했고 항일운동가 및 한글학자로서 국내에 명망이 높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2.2. 6.25 전쟁[편집]


1950년 김두봉이 김일성의 6.25 전쟁 개전에 같이 참여했는지 논란이 있다. 김일성이 박헌영과 힘을 합쳐 한국전쟁을 일으키려 할 때 김두봉은 김원봉과는 다르게 "서울한반도의 심장이다. 서울만큼은 무조건 장악해야만 한다"며 김일성의 남침을 찬성했다는 의견이 있다.[3] 6.25 전쟁 직전 평화 회담을 대한민국에 제안하는 것을 보면 침략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뿐 아니라 김두봉은 연안파 북측 인물들과 끈이 있고 대표성이 있는 인물이다. 소극적 반대를 했다고 보기에는 평화 회담 제의 뒤 6.25 전쟁 2일 전 대한민국 국회를 비방하면서 남측은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발언을 하여 6.25 전쟁 북침 주장의 밑밥을 깐 점, 6.25 전쟁 발발 즉시 북침으로 가정, 7월 4일 남한의 토지 개혁 추진과 남측 행정 기구 조직, 1951년에도 여전히 미제국주의자들에 의한 괴뢰 비방 등을 볼 때 김두봉이 반대 또는 소극적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는 근거는 부족하다.

6.25 전쟁 당시 인민군 중좌로 참전한 최태환의 회고록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송악산 주능선에 배치되어 열흘 이상 보낸 6월 23일, 사단 사령부에서는 대대장급 이상 군관들을 소집하였다. 대부분의 군관들이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참가했다. 그러나 나는 당시 당 정치국원이었던 김두봉이 비밀회의를 소집하게 된다는 정보를 중앙으로부터 미리 통고받고 있었다.

우리는 말을 타고 송악산 계곡에 임시 천막으로 만들어진 회의장으로 갔다. 우리는 길게 놓여진 탁자에 둘러 앉았다. 그러자 곧 이어 김두봉이 나타났다. 온화한 기운을 풍겨주는 인물이었다. 내뱉는 목소리도 차분하고 느릿해서 그동안 들썩거리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듯 했다. 그는 알고 있던 대로 학자를 연상케 했다. 번쩍거리는 금실로 수놓은 계급장을 단 다른 장군들의 면모와는 전혀 다른 것이기도 했다. (중략)

현 시국에 대한 이야기가 끝날 때쯤 김두봉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영문을 모른채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금방 그의 눈물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동안 공화국에서는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해왔습니다. 이제 와서는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릴 수 없습니다. 남조선의 우리 동포들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이제 부득이 해방전쟁을 시작해야 하는데 일주일 안에 서울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서울은 남조선의 심장입니다. 그러므로 심장을 장악하게 되면 전체를 장악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거기서 남조선 국회를 소집하여 대통령을 새로 선출하고 인민공화국과 남조선정부가 합작, 통일이 되었음을 세계 만방에 알리면 더는 외국도 우리를 간섭,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느 군관동무들은 해방전쟁의 의의를 저버리지 말고 맡은 임무에 충실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두봉의 연설이 끝나자 장내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군관들은 전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순간적으로 마음의 안정을 잃어버린 듯 했다.

최태환, 박혜강, '젊은 혁명가의 초상: 인민군 장교 최태환 중좌의 한국전쟁 참전기', p.111-112.


위 내용은 전쟁 발발 이틀 전인 6월 23일, 김두봉이 최태환의 부대를 방문한 상황을 회고한 것인데 '남조선 해방전쟁이 임박했으니 부대원들은 맡은 임무에 충실해주기를 바란다' 는 내용의 연설을 하면서 부대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만일 김두봉이 전쟁에 찬성하지 않았으면 명색이 국가 수반이라는 인물이 한창 침공 준비 중인 전방부대까지 찾아와서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침공 독려 연설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아래부터는 김두봉이 침략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에 의하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예정대로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일제히 38도선을 넘어 전면 남침을 개시했다. 같은 시각 김일성은 내각 비상 회의를 개최해 “동지들, 매국 역적 리승만의 군대는 오늘 이른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공화국 북반부를 반대하는 무력 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라고 둘러대면서 휘하의 고급 당 간부들까지 속였다.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북한은 줄곧 “미제와 이승만 도당은 1950년 6월 25일 드디어 공화국 북반부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개시하여 조선 인민을 반대하는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조선인민군이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무력 침공을 물리치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섬으로써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알아봅시다! 6.25 전쟁사, p.110.


여기에 의하면 김일성과 군부는 당 고위 간부들까지 속인 것을 알 수 있다. 아나톨리 토르쿠노프(Анатолий Васильевич Торкунов)의 저서인 《한국 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Загадочная война: корейский конфликт 1950—1953 годов, 2001)》[4]에서 인용된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의 이름은 나오나 김두봉이라는 이름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김두봉보다는 테렌티 시티코프가 더 많이 나온다. 그들이 속였던 이유는 소련이 겨울전쟁 시절 같은 소련 아군에게 직접 포를 쏴서 핀란드군의 공격을 조작한 일에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 교수는 6.25 전쟁 당시에도 이 때의 경험이 큰 영향을 준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박명림 교수의 책에 의하면 이런 내용도 확인이 가능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책, 김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 등 남로당 계열의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군사 지도자들인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리권무, 김창덕, 류경수 등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비해 최용건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등은 반대 또는 소극적 찬성을 하였다.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나남 출판. 303쪽 ~ 304쪽.

이 내용을 구글 도서 검색에서 검색해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최용건을 제외하고도 전쟁에 소극적인 인물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우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김두봉이 있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서 볼때 김두봉의 입장은 '전쟁이 성공하면 좋은데 실패하면 어쩌지?'라는 불안과 기대가 섞인 어정쩡한 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홍순관의 증언에 따르면 최용건이 김두봉에게 만약 미군이 오면 어찌하냐고 우려를 표명했다가 리승엽에게 기회주의라고 맹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며, 슈티코프의 보고에도 김두봉은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고 미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에 극도의 공포에 질려서 소련군이 언제 개입하느냐고 허구한날 소련인들을 붙잡고 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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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협정문에 서명하는 김일성과 그를 지켜보는 김두봉. 옆에는 박정애다.

6.25 전쟁 초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에는 피난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던 임시정부 시절 동료였던 부통령 이시영에게 이승만이 도망쳤으니 이시영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는 논리로 김일성과 (명목상의) 정상회담을 하자면서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이시영은 이를 거부하고 피난을 갔다. 전쟁 중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헌법 준수를 촉구하며 김일성과 대립각을 많이 세웠으나 전체적으로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매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자격으로 신년사를 발표하고 계속하여 당지도부에는 포함이 되었으나 김일성은 김두봉이 비조직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계속하여 비판하였다. 무력감 때문에 김두봉은 소련측에 전쟁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사퇴했을 것이라고 자괴감을 토로하였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6.25 전쟁 중의 공을 인정받아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2.3. 몰락[편집]


전후에도 김두봉이 원한 총선이 실시되지 않고 일부 지방선거만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김두봉과 김일성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김일성의 계속되는 토사구팽과 개인숭배 강화에 환멸을 느낀 연안계와 고려인 지도자들이 1956년 3월,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의 스탈린 격하의 영향을 받아 김일성에 맞서 8월 그룹을 조직하면서 김두봉 역시 여기에 합류하였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김두봉은 주권기관 선거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면서 김일성을 비판했다. 어쨌거나 정치위원회에서 개편된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다시 선출되었다.

결국 1956년 8월 최창익, 윤공흠, 박창옥 등이 김일성의 독재를 비판하고 집단 지도 체제 구성을 시도한 8월 종파사건이 발생하였다. 김두봉은 처음에는 동참했으나 소련이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고 전원회의 2주일 전에 발을 빼버렸다. 살아남기 위해 최창익, 박창옥 등을 비판하는 데 동원됐으나 소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최창익, 박창옥을 비판해야 하는 당 회의 때 늙어서 힘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휴가를 가버리는 등 반대파 숙청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이 때문에 김일성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선거에서 대의원으론 재선되었으나 상임위원회 위원장 자리는 최용건에게 내주어야 했다. 이후 조직지도부 부부장 김영주가 주도한 열성자회에 끌려가 비판을 당했는데 늙고 병든 김두봉이 운신을 하지 못하자 김영주가 늙은 반동이 늙은 것이 벼슬인 줄 아냐고 못나오면 우리가 끌어내자고 군중을 선동하여 그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개처럼 끌어내서 조리돌렸다.

이듬해인 1958년 3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1차 당대표자회에서 전 부수상 박의완 등과 함께 혹독한 비판을 받고 상무위원에서 해임, 출당 조치되었다. 1958년 3월 7일, 김일성은 도, 시, 군당위원장들 및 인민위원장들에게 한 연설 <당사업을 개선할데 대하여>를 통해서 "김두봉은 자기가 대통령이니, 왕이니 하면서 거기에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일하는 기술서기들을 궁녀라고 하고 상임위원회를 당보다 더 높다고 하였으며, 별의별 못하는 소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상임위원회를 무법천지로 만들어놓았습니다."라고 그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2.4. 최후[편집]


이후 일개 농민으로 몰락하여 협동농장으로 쫓겨났다. 이때 평안남도 지도원으로 일하다가 남한에 공작원으로 파견되었고 1970년부터 1988년까지 수감되었던 김진계의 증언에 따르면 1962년에 김두봉을 만난 적이 있는데, 김두봉은 같이 쫓겨난 젊은 아내가 농사일을 해본 적이 없으니 제발 유치원 교사로 일하게 해달라고 당국에 탄원하였고 당국이 이를 수용해주어 김두봉과 그 아내가 유치원에서 일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와다 하루키의 북한 현대사에 따르면, 1960년 1월, 박창옥, 최창익, 고봉기, 김웅 등을 총살하기 위해 비밀재판이 소집되었을 때 김두봉은 이미 병사한 후라서 재판에 회부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김두봉과 같이 숙청당했던 박의완은 이때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유성철의 주장에 따르면 농촌으로 하방당한 후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농촌당원들에게 맞아죽었다고 한다. 유성철의 주장이 사실인지는 모르나 대숙청 시기 소련 NKVD가 실제로 써먹은 방법이기는 하다.

그리고, 하앙천처럼 김일성종합대학 역대 총장 목록에서 삭제되어 있다.


3.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무소속
]]

1929 - 1930
정계 입문

[[한국독립당|
한국독립당
]]

1930 - 1935
창당

[[민족혁명당|
민족혁명당
]]

1935 - 1937
합당[5]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혁명당
]]

1937 - 1942
당명 변경

[[무소속|
무소속
]]

1942
탈당

[[조선독립동맹|
조선독립동맹
]]

1942 - 1946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46
정당 해산

조선신민당

1946
창당


1946 - 1949
합당[6]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1949 - 1958
합당[7]

[[무소속|
무소속
]]

1958 - ?
제명

4. 경력[편집]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46년 6월 26일
1946년 8월 31일
1차 북조선대표대회에서 선출
북조선공산당과 합당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46년 8월 31일
1949년 7월 1일
북조선로동당 1차 당대회에서 선출
2차 당대회에서 재선
남북로당 합당 과정에서 퇴임
1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1948년 9월 9일
1957년 9월 18일
최고인민회의 1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임기 만료
조선로동당 1,2기 정치위원회 위원
1946년 8월 31일
1956년 4월 29일
1차 당대회에서 선출
2차 당대회에서 재선
1953년 8월 전원회의에서 재선
3차 당대회에서 직함 개편
조선로동당 3기 상무위원회 위원
1956년 4월 29일
1958년 3월 6일
3차 당대회에서 선출
1차 당대표자회에서 출당, 제명

5. 여담[편집]


  • 같은 항일운동가였으며 월북한 인사인 약산 김원봉과 이름과 행보가 비슷해 헷갈리거나 친척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이름에 들어간 '봉'자를 돌림자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김두봉의 '봉'자는 받들 봉(奉)이고 김원봉의 '봉'자는 봉황 봉(鳳)이다. 대신 둘이 인척 관계이긴 했다. 김두봉은 김원봉의 본처 박차정[8]의 외당숙이었다. 박차정은 김두봉의 5촌 조카인 셈. 생전에 김원봉에게 "내 조카 차정이는 갔지만 약산은 언제까지나 내 조카 사위"라고 말하기도 했다.

  • 한편 김두봉이 어느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하거나 이름을 올린 적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김두봉은 연안으로 가기 전까지는 사회주의와는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와 대립했다고 한다. 상하이에 있을 때는 한때 인성학교의 교원으로 활동하다 인성학교 교장에 추천되었는데 한번은 공산주의자들이 학교를 집회 장소로 허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김두봉은 신성한 교육 장소를 정치적인 투쟁장으로 쓰도록 허락할 수 없고 남의 나라 조계 안까지 와서 정치 투쟁을 하는 것은 민족적인 수치라며 이를 거부했었다. 김두봉의 거절에 앙심을 품은 공산주의자들은 집단으로 김두봉과 인성학교를 비난하는 성토를 했다. 이에 격분한 김두봉은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며 그들에게 학교를 빌려주는 것을 거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한다.

  • 그가 나고 자란 경상남도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현재는 부산광역시로 편입됨)는 김해 김씨 일파의 집성촌으로 이 지역 출신의 친척 중 항일 운동과 관련된 사람이 많았다. 제1공화국 초대 국회 부의장을 지냈고 한국 전쟁 당시 월북한 김약수는 그의 6촌 동생이다. 김약수는 개명한 것으로서 본명은 김두전(金枓全). 두(枓)가 돌림자이다.

  • 그가 북한의 언어 정책을 주도할 때 대한민국의 언어 정책을 주도한 최현배주시경의 제자로서 동문이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남북한의 언어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는 설이 있다. 북한의 한글 정책을 담당할 당시 한글을 알파벳과 같이 풀어쓰기로 적자고 주장하였으나 실현되지는 않았고 그 대신 조선어 신철자법을 제정하면서 2종류의 옛 자모와 4종류의 새 자모를 도입했지만 실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았고 김두봉이 실각된 후에 김일성이 이를 폐기하였다고 한다. 최현배와는 광복 이후 다른 길을 걷기는 했지만 젊은 시절에 서로 아는 사이였고 꽤 친했다고 한다.

파일:external/db.kookje.co.kr/L20150909.22006183928i3.jpg
  • 김구와도 인연이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함께 일하기도 했고 태평양 전쟁 말기에 연합 작전을 구상하기도 했다. 위의 사진은 김구의 부인 최준례가 사망하였을 때 김두봉이 만들어준 무덤으로 순한글로 써진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인연을 바탕으로 김구는 1948년 남북협상 때 김두봉을 형(인형(仁兄), '어진 형')으로 칭하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친족 관계가 아닌 경우 형이라는 호칭이 좀 애매하다. 원래 구어체에서는 남녀 불문하고 손위 사람을 '언니'라고 불렀다. 드라마 추노에서 잘 묘사되어 있으며 '졸업식 노래'의 첫 소절도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인데 여기서 언니는 남녀 불문한 손윗사람을 지칭하는 의미다. 그러다가 근대에 형이라는 호칭이 등장했다. 이 호칭은 가벼운 존중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게 동년배간에, 손위가 손아래에게, 손아래가 손위에게 사용된 예가 모두 존재하는 마법의 단어이다. 그래서 나이가 많은 김구가 훨씬 나이 적은 김두봉에게 형이라고 불렀다 해서 숙이고 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편지글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족하좌하 같은 서간문 어투가 아니라 평상문의 친근함을 과시하려고 저렇게 썼을 수도 있다.

  • 1961년 장면 내각이 남북 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홍명희와 함께 김두봉을 남한으로 초청하려 하기도 했다. 이미 숙청되어 협동 농장에서 노역하고 있던 시기 또는 사망한 시기이므로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그가 해방된 뒤 약 15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남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로 명망이 있는 인사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굿바이 마이 러브 NK: 붉은 청춘에 등장하는 모스크바 8진 중 1명이었던 최국인은 조선의용군 산하에 있는 연극단에 들어가 활동했고 그는 조선의용군 김두봉과 인연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김일성을 상당히 증오하는 발언을 다큐멘터리 내내 한 것으로 유명하다.

  • 월북 인사이며 북한 정권 초창기에 숙청당했기 때문에 다른 북한 정치인들에 비해 존재감이 부족한 편으로 현대 한국에서는 김일성과 함께 부정적 평가가 지배적인데 북한의 지도자로서 6.25 전쟁에 동의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항일 운동 역시 공산주의자로서 참여했기에 현대 한국 정부와 법통이 이어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등 현대 한국에서 쉽게 옹호해주기 어려운 입장을 나타내기도 했다. 북한에서도 김일성과의 권력 투쟁에 패해 숙청된 인물로서 평가가 낮다.

  • 과거에 개성에 갔을 때 황진이의 무덤에 헌화하고 술을 부은 뒤에 절을 했다고 한다. 국문학자로서 황진이에 대한 존경을 표현한 행동이었지만 후에 김두봉이 숙청당할 때 이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일국의 국가원수라는 자가 기생 년의 무덤에 꽃다발을 놓고 술을 따르고 절까지 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이유였다고 한다. 다만 김두봉의 숙청은 그가 연안파였기 때문이었고 황진이에 대한 문제는 구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김두봉이라는 인물이 정통 공산주의자였다기보다는 상당히 전통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 <공화국 시리즈>의 시작인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는 중견 배우 박영지가 연기했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 시절로 시대가 시대인지라 북한 인물에 대한 정보나 자료가 부족했고, 있다해도 당시 분위기상 반공적으로 다소 왜곡된 것이 대부분이였기에 박영지는 나름 자신만의 해석을 가지고 연기에 임했다고 한다.
  • 대한민국 전쟁 영웅이 되었다에서는 평양 함락 이후 김일성과 함께 도망다니다 말 한 마디 잘못 해서 김일성에게 죽도록 얻어터지며 이후 김원봉과 짜고 향후 탈출 보장을 조건으로 이강산의 특수 연대에 김일성을 넘겨주지만 이들을 완전히 믿지 않은 이강산의 명으로 일단 포로로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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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일성 바로 옆의 인물. 뒤에 걸려 있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눈에 띈다.[2] 오른쪽부터 김일성, 박헌영, 김원봉, 김달현, 허헌. 1948년 모란봉극장에서 남북연석회의 입장 당시 촬영한 사진이다. (출처[3]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과 한국 전쟁 - 김두봉의 활동과 역할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의 17쪽에는 6.25 전쟁 발발 후 상임위원장으로서 북한 법적 체계상 남조선 행정 기구 등을 도입하게 하고 조선인민군의 사기 진작을 도왔다.[4]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 등 공산 세력의 남침을 소련 문서로 엮어서 보여주는 책이다. 아나톨리 토르쿠노프는 정치학 박사이자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학장 및 동양학과 교수다.[5] 의열단,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대한독립당과 신설 합당[6] 북조선공산당과 신설 합당[7] 남조선로동당과 신설 합당[8] 부산 출신의 여성 항일운동가.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생가와 동상이 있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