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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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시대 제주도의 거상.
2. 생애[편집]
양인(良人)인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이름 불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부모 모두 세상을 떠나고 두 오빠는 목동이 되어 막일을 하며 외삼촌 집안에서 얹혀 살다가 은퇴한 기생에게 수양딸로 맡겨져 기생 수업을 받았다. 이후 제주 관가의 기생이 되었지만 가문에 누가 된다는 친가 쪽의 강요를 받고 그만두었다.[1]
다시 양인 신분으로 돌아온 뒤 객주 일을 시작했고, 본토와 제주도 사이의 물자 유통에 수완을 발휘해 제주도에서 알아주는 대부호가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다른 객주들의 시기심 때문에 부정축재로 허위 신고를 당해 투옥되었다가 지역 주민들의 상소로 풀려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당시 심노숭이라는 문인은[2] 제주목사인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제주도를 방문했다가 김만덕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고 글로 남겼는데 "만덕이 기생 노릇을 할 때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하여 남자가 돈이 많으면 따랐다가 돈이 떨어지면 떠나되 옷가지마저 빼앗아서 그녀가 지닌 바지저고리가 수백 벌이었다고 한다. 그 바지를 늘어놓고 햇볕에 말리는 것을 보고 동료 기생마저 침을 뱉고 욕했다. 그렇게 벌어서 만덕은 제주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다."라는 글을 썼다. 아마도 김만덕과 경쟁 관계였던 객주들이 퍼뜨린 루머 중 하나인 모양.
1795년[3] 태풍이 제주도를 강타하면서 가뜩이나 식량 생산이 저조했던 도내 농사에 큰 타격을 입혔다. 본토에서 2만 섬을 보내지만 가던중 침몰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하자, 김만덕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본토에서 쌀 5백 섬을 사와 제주도민의 구호에 써달라고 관가에 헌납했다.
이 소식은 얼마 후 제주 전임 목사였던 유사모에 의해 조정에도 전해졌고, 당시 왕이었던 정조가 제주목사를 통해 소원을 물으니 "한양에 한번 가서 왕이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내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 이천 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김만덕을 불러 명예 관직인 의녀반수에 봉하고 직접 만났으며[4] 금강산 유람을 하고 싶다는 청도 받아들였다.
기생 출신 양인이 왕을 알현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김만덕은 제주도 출신 여성인데, 제주도 사람들은 인조 7년(1629년)에 내려진 출륙금지령 때문에 제주에서 태어난 이상 평생 섬을 나갈 수가 없었다. 사실상 김만덕은 제주 여자로서 이례적으로 한양을 밟아본 거의 유일한 여성인 셈이다.[5] 이 때문에 당대 지식인이자 정치인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채제공은 김만덕의 생애를 다룬 만덕전을 집필했고, 정약용 같은 실학자와 김정희,[6] 조수삼 같은 문인들도 김만덕의 구휼 사업을 칭송하는 시와 글을 남겼다.
금강산 유람을 마친 뒤에는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 객주 일을 계속했다.[7]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대신 양아들을 들여 키웠다. 1812년 고향 제주에서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고, 유언으로 양아들의 기본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제주도의 빈민들에게 기부했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기록에 따르면 외모는 체구가 크고 칠순의 나이에도 얼굴과 머리가 신선이나 부처와 같았다고 한다. 당대에는 겹눈동자[10] 라는 소문이 퍼졌으나 정약용이 직접 만나 확인한 결과 사실이 아니라고 다산시문집에 기록을 남겼다.[11][12]
3. 사후[편집]
황진이나 신사임당, 허난설헌 같은 여타 조선사를 장식한 여성들만큼의 이름값은 없지만, 혼자 힘으로 사업을 시작해 부자가 되었다는 입지전 스타일 인물에 대인배 업적까지 더해져 전근대의 한계를 극복한 '자수성가한 여성'의 대표 격으로 여겨지고 있다.
제주도에서도 1976년 제주시 건입동의 모충사 경내에 김만덕기념관을 만들고 1980년부터 매년 탐라문화제 개최일에 맞추어 만덕제라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04년에는 김만덕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국내외 소외 계층들에 대한 지원과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같은 해 10월 8일에는 국립합창단에서 한국 합창곡 창작 지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극작가 김문환과 작곡가 이영조에게 위촉한 칸타타 '만덕할망'이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초연되었고, 같은 달 22일에는 순천시에서도 공연되었다.
제주도에선 "김만덕 할망"으로 불리며 도내 유치원, 초등학교 등에서 지역위인들을 가르칠 때 많이 언급되어 온데다, 1977년에 방영된 제주 출신 배우 고두심 주연의 MBC 일일드라마 <정화>[13] 덕분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회자되어 신사임당만큼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2020년 9월 경에 출생지와 관련하여 용역 연구를 한 결과 현재의 이도동에 해당되는 제주성 내로 밝혀졌다. 김만덕을 다룬 문학작품을 분석한 결과 김만덕의 출생지는 크게 2군데로 언급되어 있다고 확인했는데, 제주성 내[14] 와, 제주시 구좌읍 동복리[15] 다.
그런데 연구팀은 김만덕 당대 사료와 후대 사료, 후손들의 증언에 기초했을 때 김만덕의 출생지는 "제주성 안"이라고 결론냈다. 정비석 작가가 책 머리말[16] 에서 보일 수 있는 (김만덕 자료 수집 차 제주를 방문해)"김만덕 후손들을 직접 취재했다"는 기록이 없었다는 점을 밝힌 건 덤으로.#원문기사
4. 여담[편집]
김만덕에 관한 연구는 아직 충분히 진행되지 않아,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17] 아래의 글들은 2010년 이후 진행된 연구를 기반으로 작성된 것으로, 향후 새로운 연구에 의해 반박될 수 있다. 이밖에 최신 연구자료가 김만덕기념관의 자료실[18] 에 업데이트 되고 있다.
4.1. 면천 여부[편집]
제주 목사의 장계에, “전 순장(巡將) 홍삼필(洪三弼)은 의기(義氣)를 발휘하여 진휼을 도왔으므로 두 고을의 수령 중에 빈자리가 나면 의망(擬望)하고, 노기 만덕은 기민(饑民)을 진휼하고 부족한 것을 구제하는 데 특별히 수고하였으니 바라는 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신이 삼가 유지(有旨)의 내용을 홍삼필과 만덕에게 반시(頒示)하니 만덕의 소고(所告)에 저는 늙고 자식도 없으니 면천(免賤)할 마음은 없고 육지로 나가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하였으므로, 그가 바라는 바에 따라 육지로 나가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에 연유를 급히 장계합니다.”하였다.
일성록 정조 20년 7월 28일 6번째 기사.[19]
만덕의 성은 金이며 탐라의 良家女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어 기녀에게 의탁해서 살았고, 관청에서 만덕의 이름을 기안에 올리자 기역을 수행했지만 그 자신은 기생으로 처신하지 않았고, 20여세에 그 사정을 관에 읍소하였고 관에서는 불쌍히 여겨 기안에서 빼주자 다시 양인이 되었다.
채제공, 『번암집』 「만덕전」 권55.[20]
국문번역은 해당 논문을 재인용함.[21]
채제공은 『번암집』 「만덕전」 권55[22] 에서 김만덕이 양인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채제공의 만덕전을 제외한 당대의 기록들에는 김만덕의 면천에 관한 내용이 없다. (후대의 기록 중 김만덕을 양인으로 서술한 것은 대부분 채제공의 글을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 논문 참고 바람.[23] ) 예를 들면, 만덕을 직접 만난 또 다른 인물인 정약용의 경우, 『여유당전서』에 만덕을 제주기녀(濟州妓)라고 기술하였다.[24]
이밖에도 관기가 쉽게 면천될 수 없었던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한다면, 김만덕이 양인으로 면천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고 볼 수 있다. 약 18종의 조선후기 기생안(妓生案)[25] 에 관해 연구한 한 논문[26] 에 따르면, 18종의 조선후기 기생안 중에서 면천 기록이 확인되는 비·기는 단 2건 뿐이었다. 이는 만덕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는 아니지만, 당시의 시대상과 기녀의 삶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4.2. 김만덕은 객주였는가?[편집]
만덕이 객주업을 통해 재산을 모았는지, 기녀 활동으로 재산을 모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진행 중이다. 만덕이 객주였음을 확증할 수 있는 문헌기록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화를 늘리는 데 재능이 있어서 물가의 높고 낮음을 잘 짐작하여 내어 팔거나 쌓아 놓거나 했다. 그런 지 몇 십 년 만에 제법 부자로 이름이 드높았다.
채제공, 『번암집』권55, 「만덕전」.[27]
국문번역은 해당 논문을 재인용함.[28]
성격이 또한 구애됨이 없고 장부의 기상이 있어서 재산을 잘 다스렸다. 배 만들어 쌀을 사들이고, 점포를 차려 놓고 삿갓과 말총을 판매하니 재물이 쌓여 자못 풍요하였다. (性又不拘有丈夫氣善治産造船而貿遷米設舖而販賣籉騣積貲頗饒.)
이면승(李勉昇), 『감은편(感恩編)』권3,「만덕전(萬德傳)」. 해당 논문을 재인용함.[29]
만덕의 재산 형성 과정에 대해 언급한 당대의 대표적 기록으로는 채제공의 「만덕전」 그리고 이면승의 「만덕전」 2개 정도가 있다. [30] 이 중에서 채제공의 글은 상업의 기본을 서술한 것일 뿐이므로 구체성이 떨어진다. 이면승의 경우에는 ‘교역’의 모습을 묘사함과 동시에 ‘점포’를 차렸다고 기술한 점에서 확인해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만덕의 사업을 ‘객주업’이라고 특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 당대 기록 중 이면승의 글 외에는 만덕의 재산축적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한 기록이 없다는 점 등을 생각해보면, 후속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현재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제주의 도외 유통에는 화북포, 조천포 두 포구가 주로 이용되었으며, 건입포구는 도내 유통을 위한 포구였다.[31] 만약 김만덕이 건입포에서 활동하였다면, 김만덕이 육지를 오가는 무역인들을 상대하는 ‘객주’였을 가능성은 낮아진다.[32] 추가적으로, 19세기 중엽까지 제주 도내에는 장시가 없었다고 여겨지고 있다.[33][34] 이에 대해서는 아직 18~19세기 제주의 상업 실태에 관한 연구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추가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4.3. 심노숭의 기록에 대하여 [편집]
지난해 제주 기녀 만덕이 곡식을 내어 진휼하니 조정에서는 그녀를 예국(隸局)의 우두머리 종으로 삼고 금강산 유람까지 시켜주면서 말과 음식을 제공하였으며, 조정의 학사들로 하여금 그녀의 전(傳)을 짓도록 명하여 규장각의 여러 학사들을 시험하였다.[35]
지난날 내가 제주에 있을 때 만덕의 얘기를 상세하게 들었다. 만덕은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해 돈을 보고 따랐다가 돈이 다하면 떠나는데, 그 남자가 입은 바지저고리까지 빼앗으니 이렇게 해서 가지고 있는 바지저고리가 수백 벌이 되었다. 매번 쭉 늘어놓고 햇볕에 말릴 때면, 군의 기녀들조차도 침을 뱉고 욕을 하였다. 육지에서 온 상인[36] 이 만덕으로 인해 패가망신하는 이가 잇달았더니 이리 하여 그녀는 제주 최고의 부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형제 가운데 음식을 구걸하는 이가 있었는데 돌아보지도 아니하다가 섬에 기근이 들자 곡식을 바치고 서울과 금강산 구경을 원한 것인데, 그녀의 말이 웅대하여 볼 만하다고 여겨 여러 학사들은 전을 지어 많이 칭송하였다. 내가 「계섬전」을 짓고 나서 다시 만덕의 일을 이와 같이 덧붙인다. 무릇 세상의 명과 실이 어긋나는 것이 이러한 것이 많음을 혼자 슬퍼하나니 계섬의 이른바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심노숭(沈魯崇),『효전산고(孝田散稿)』 권7, 「桂纖傳」, 학자원 영인본 3책, 1163-1164. 해당 논문을 재인용함.[37]
만덕에 대한 당대의 기록 중 유독 심노숭의 기록만 결이 다르다. 채제공의 기록과 심노숭의 기록을 비교해보면 크게 두 가지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정보의 원천이다. 심노숭은 1794년 제주를 방문하였기 때문에, 제주 도민으로부터 직접 정보를 입수했을 것으로 추론된다.[38] 반면 채제공은 만덕전에서 밝혔듯이, 서울에 올라온 김만덕을 1~2차례 대면하고 당사자인 만덕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하였다. [39] 모든 사료는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구술 기록의 경우 구술자의 기억의 한계, 구술자의 의도 등에 따라 왜곡될 수 있다. 즉, 채제공의 「만덕전」 역시 다른 사료와의 비교·분석을 통해 비판적으로 독해해야 할 사료이다.
2번째는 저술 이유이다. 심노숭은 자발적으로 만덕의 이야기를 기술하였다. 그는 『효전산고』 「계섬전」을 저술할 때, 기생 계섬과 김만덕을 비교하기 위해서 만덕의 이야기를 짧게 인용하였다.[40] 반면 1796년 정조가 개최한 초계(抄啓文臣制)의 친시(親試) 주제 중 하나가 ‘만덕’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채제공을 비롯한 당대 집권층이 김만덕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에는 정조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해볼 수 있다.
5. 매체에서[편집]
대항해시대 5에서 나온다. 스킬은 재고 회복으로 무난히 사용할 수 있다. 대항해시대 오리진에서는 조선 소속이며 베타때 공개된 오리지날 제독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었고, 2022년 추석 이벤트 NPC로 등장했었으며, 2023년 8월 패치로 플레이어블 제독으로 추가되었다. 성우는 김하루(한국)/니시다 노조미(일본)
1977년 MBC에서 김만덕의 일대기를 다룬 '정화(情火)'라는 일일연속극이 방영을 했다. 주연은 탤런트 고두심이다.
2010년에 KBS 1TV에서 거상 김만덕을 방영하기도 했는데[41] , 주연은 배우 이미연이다. 위기의 코드가 다 읽힐 정도로 뻔한 과제를 설정 해 놓고, 주인공들이 문제를 너무나 쉽게 해결하여 재미를 반감시켰다는 지적이 있어서 반응은 다소 미온적이었다.
2017년, 제주시와 뮤지컬 제작사 미소에서 창작 뮤지컬 '만덕'을 공동 제작했다.
조선왕조실톡 223화에 나왔는데, 이때는 주식회사 만덕그룹(…)의 CEO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