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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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im_Man-jung.jpg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48호 서포 김만중 영정
대전역사박물관 소장.[1]
이름
김만중(金萬重)
본관
광산 김씨
출생
1637년(인조 14) 3월 6일
조선 한성부
사망
1692년(숙종 18) 6월 14일 (향년 55세)
조선 경상도 남해 적소
(現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노도길 76-16)

서포(西浦)
시호
문효(文孝)
정당
노론
부모
부친 - 김익겸(金益兼, 1614 ~ 1637)
모친 - 해평 윤씨(1617 ~ 1689)[2]
형제자매
형 - 김만기(金萬基, 1633 ~ 1687)
배우자
이은상(李殷相)의 딸 연안 이씨
자녀
1남 1녀[3]
아들 - 김진화(金鎭華, 1655 ~ ?)
딸 - 김수혜(金秀惠, 1657 ~ ?)
친인척
백부 - 김익렬(金益烈, 1601 ~ 1631)
백부 - 김익희(金益熙, 1610 ~ 1656)
숙부 - 김익훈(金益勳, 1619 ~ 1689)[4]
숙부 - 김익후(金益煦, 1624 ~ 1648)[5]
숙부 - 김익경(金益炅, 1629 ~ 1675)[6]
조카딸 - 인경왕후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소설가다. 대표작은 구운몽사씨남정기.


2. 생애[편집]


예학으로 유명한 거물 유학자 김장생의 손자이던 아버지 김익겸이 정축호란(병자호란 이듬해) 당시 강화도에서 순절[7]한 탓에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전쟁 통에 태어난 유복자였다. 어머니 해평 윤씨[8]에게서 엄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는데, 어머니 윤씨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녀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어린 김만중이 집안 살림을 걱정해 보고 싶은 책을 사지 않자, 회초리를 치면서 자기가 하루종일 짠 옷감 절반을 뚝 잘라 줬을 정도였다. 자신이 직접 서책을 빌려와서 교본을 만들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김만중은 대단한 효자였는데 그의 소설 《구운몽》이 홀로 된 어머니의 여흥을 위해 읽기 쉬운 한글로 지어진 소설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9]

그의 형 김만기숙종의 장인[10]으로, 현종 말엽부터 숙종 초엽까지 막강한 권세를 행사했던 인물이었으며 숙종의 환국 정치에도 적극 관여하여 남인들을 박살내는데 큰 몫을 한 인물이었다. 당파적으로 김만기와 김만중은 모두 서인에 속했고 김만기, 김만중 형제 모두 송시열의 열렬한 추종자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게, 김만중 형제의 증조부가 다름아닌 이이의 학통을 이어 조선 중기 서인의 사상적 흐름을 주도한 김장생이었고 송시열이 김장생의 학통을 이어받은 입장이기도 했다.[11] 송시열은 아버지 김익겸의 묘비명을 써주기도 했다. 김반·김익겸의 묘

이러한 어머니의 정성과 김만중 본인의 노력으로 1665년에 과거에 급제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1671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시찰했고 1672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효종인선왕후의 사망으로 불거진 제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배하자, 서인이었던 김만중도 파직되어 처음으로 관직 생활에서 쓴 맛을 보게 된다. 1679년에 복직하여 예조참의, 공조판서, 대사헌 등을 지냈으나 탄핵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1686년에는 장희빈 일가에 대해서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분노를 사서 처음으로 선천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1687년 귀양에서 풀려났지만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 세력이 대거 축출되면서 김만중도 다시 탄핵을 받아 남해의 노도[12]로 유배되었다. 어머니 윤씨는 아들을 걱정하다가 사망했으며, 김만중은 어머니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한 채 1692년 유배지인 남해에서 끝내 사망했다. 알려지기로는 남해에서 숙종을 참회시키기 위해 《사씨남정기》를 집필했다고 한다. [13] 이 주인공의 모델부터가 대놓고 숙종이며, 실제로 숙종은 《사씨남정기》를 보다가 주인공의 처사에 분노해 책을 집어던졌다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3. 기타[편집]


  • 조선 시대의 다른 사대부들과는 달리 한글로 소설을 쓴 인물인데, 실제로도 한글로 쓴 문학이야말로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였다고 한다.[14] 《구운몽》의 경우는 한문본과 한글본이 모두 존재하는데, 대체로 학자들은 가장 오래된 《구운몽》 필사본이 한글본인 것으로 보아 김만중이 한글로 구운몽을 썼을 것이라 본다. 문학계의 태두라 불리는 이가원 선생도 원본이 한글본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새로운 판본들이 발견됨에 따라 문헌학적 연구를 통해 원본이 한문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다(누가 자꾸 학자들이 원본을 한글본으로 추정한다고 수정해놓는데, 사실 현재 학계에서는 원본을 한문본으로 추정하는 것이 통설이다. 가장 오래된 한문 판본인 "노존본"이 발견되어 분석이 끝난 게 벌써 엄청 옛날 얘기(정규복, 1977). 물론 원본이 한문인지 한글인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김만중의 다른 대표작인 《사씨남정기》는 한문 번역자인 김춘택의 서문을 통해 한글본이 원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나, 원본이 소실되어 오늘날에는 한문 번역본을 다시 번역한 판본으로 읽히고 있다. 정 2품 즉 차관급 인사가 집필한 라이트 노벨이다. #

여하튼 이로 인해 김만중은 한글로 쓴 것이 국문학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인정받는다. 당시 조선 사회의 상류층들이 한글을 '언문(諺文)', 심하게 얘기하자면 '암클'(여자들이 쓰는 글), '중글'(승려들이 쓰는 글), '아햇글'(아이들이 쓰는 글), '상말글'(상민들이 쓰는 글)이라고 푸대접했던 데 비해 김만중은 한글을 국서(國書)라고 칭할 정도로 한글을 높이 평가했다.

  • 김만중이 정철의 문학 3편(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이라며 높게 친 것도 한글 비중이 높고 표현이 수려했기 때문인데, 그 중에도 한글 비중이 가장 높은 속미인곡을 최고로 쳤다.[15]

  • 2010년에 '김만중 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개최함으로써 그의 활약상을 현대에도 기리고 있다.참조

[1] 위키 이미지[2] 윤지의 딸로, 윤신지와 정혜옹주의 손녀[3] #[4] 서자[5] 서자[6] 서자[7] 강화성이 청나라군에게 무너지자 책임자가 아님에도 김상헌의 형 김상용과 같이 화약으로 자폭했다. 정작 책임자인 찌질이 김경징은 달아났다가 사약을 먹고 죽는다.[8] 윤두수의 친손자인 윤신지와, 선조인빈 김씨의 딸인 정혜옹주(貞惠翁主) 사이의 친손녀.[9] 《구운몽》의 구성은 얼핏 보기엔 남성향 미연시라노벨과 흡사한 것 처럼 보이나, 작중 등장하는 여성 등장인물들은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개성 넘치는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로맨스 판타지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에게 인기있는 장르였음을 생각하여보면,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충족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10] 숙종의 첫째 왕후인 인경왕후 김씨가 그의 여식이다.[11] 하지만 의외로 교조주의 성리학적 관점을 가지지는 않았을거라는 설이 많다. 그의 소설을 봐도 알겠지만 불교적, 도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하기도 하고 별로 대접받지 못한 소설을 그것도 한글로 쓰였다. 때문에 그가 과연 당대의 교조주의자였던 송시열의 추종자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부분. 근데 송시열이 열혈 주자 추종자였던 것이야 이론이 없지만 그렇게까지 꼴통이었던건 아니다. 김만중의 행위는 송시열 추종자가 아니면 도무지 안할 짓들이 많은데 송시열을 위해 유배까지 간 양반이 김만중이다.[12] 렛츠고 시간탐험대가 이 곳에서 조선시대 유배 생활을 재현했다. 김만중이 살던 도 복원되어 있었다.[13] 최근 발견된 《서포연보》에서는 그간 알려진 것과는 달리 《구운몽》이 선천 유배 시절에 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14] 이런 면모는 2002년 KBS 드라마 장희빈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15] 비록 정철은 시대는 다를지언정 김만중과 마찬가지로 서인으로 영수까지 지낸 인물이고, 미인곡의 주 내용은 유배 중이던 정철이 "임금님 사랑해요. 그러니까 나 좀 풀어줘요"라는 식의 내용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역시 유배 중이던 김만중에게는 더더욱 마음에 와 닿았을 것이다. 차이점이라면 그의 경우에는 《사씨남정기》를 쓰면서 숙종을 모델로 한 유연수라는 남자 캐릭터를 창조하여 숙종을 대차게 비판했다는 점이다. 단, 여기에는 김만중이 노론으로 인현왕후와는 인척이라서 인현왕후 옹호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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