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현(1935)

덤프버전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해당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김상현 문서
김상현번 문단을
김상현#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역임한 직위
[ 펼치기 · 접기 ]



파일:국회휘장(6대-7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제9선거구)
제6대
김재광

제6대
김상현


제7-8대
김재광
파일:국회휘장(8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제12선거구)
제7대
윤제술

제8대
김상현


선거구 조정
오유방
김재광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서대문구 갑)
제13대
강성모

제14-15대
김상현


제16대
이성헌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광주 북구 갑)
제14-16대
박광태[1]

제16대
김상현


제17-19대
강기정




대한민국 제6-8·14-16대 국회의원
김상현
金相賢 | Kim Sang-hyun


파일:김상현 전 의원.jpg

출생
1935년 12월 6일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상오리 호산마을[1]
사망
2018년 4월 18일 (향년 82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묘소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 천주교종로성당나자렛묘원
본관
김해 김씨
배우자
정희원
자녀
아들 3명, 딸 1명 (삼남 김영호)
학력
진원국민학교 (졸업)
한영중학교 (졸업)
한영고등학교 (중퇴)
병역
대한민국 육군 일병 의가사 제대
종교
가톨릭 (세례명: 대건 안드레아)
신체
O형
최종 당적

파일: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의원 선수
6
의원 대수
6, 7, 8, 14, 15, 16
경력
제6대 국회의원 (서울 서대문구 갑 / 민중당)
제7대 국회의원 (전국구 17번 / 신민당)
제8대 국회의원 (서울 서대문구 을 / 신민당)
신민당 정책심의위원회 부의장
제7대 대통령 후보 김대중 비서실장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대행
민주화추진협의회 부의장
민주화추진협의회 상임운영의원
통일민주당 총재 직무대리
통일민주당 부총재
통일민주당 서울 서대문구 갑 지구당 위원장
제14대 국회의원 (서울 서대문구 갑 / 민주당)
민주당 최고위원
민주당 당무위원
제14대 국회 전반기 보건사회위원회 위원
민주당 대통령선거대책위 부위원장
제14대 국회 후반기 외무통일위원회 위원
새정치국민회의 지도위원회 의장
새정치국민회의 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
새정치국민회의 당무위원
제15대 국회의원 (서울 서대문구 갑 / 새정치국민회의)
제15대 국회 전반기 재정경제위원회 위원
대한택견협회 회장
새정치국민회의 지도위원회 지도위원
대한산악연맹 회장
제15대 국회 후반기 국방위원회 위원
아시아산악연맹(UAAA) 회장
국제산악연맹(UIAA) 부회장
대한체육회 고문
아시아산악연맹 회장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대한산악연맹 회장
제16대 국회의원 (광주 북구 갑 / 새천년민주당)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후농(後農)[2]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선거 이력
5. 소속 정당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정치인.


2. 생애[편집]


1935년 12월 6일, 지금의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상오리 호산마을에서 태어났다. 장성진원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한영중학교를 거쳐 서울 한영고등학교 야간부를 다녔으나 3학년 2학기 당시 중퇴했다.

1956년 김대중이 정치인 지망생이던 시절 운영하던 웅변학원에 등록한 학원생으로 김대중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3] 곧 사이가 가까워져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으며[4], 김대중을 따라 민주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1959년 6월 재보궐선거 당시 강원도 인제군 선거구에 출마한 김대중의 선거운동원으로 가두 연설을 담당했고, 이후 김대중이 민주당 선전부장이 되자 바로 밑의 직책인 선전부 차장이 된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반대하는 김재광국회의원직 사퇴 때문에 치러지는 재보궐선거에서 민중당 후보로 서울 서대문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5]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이철승 등이 40대 기수론의 기치를 내걸고 나서자 김상현이 김대중에게 대선 출마를 요청했다. 경선에서 김대중이 승리하면서 대통령 후보자 비서실장으로 활동하였다. 1971년 치러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참고로 해당 총선에서 그와 맞붙은 민주공화당 후보는 임택근 아나운서이었다.

파일:KTYSandIDK.jpg
3선 개헌에 반대하며 김영삼, 이기택과 거리로 나섰다.[6]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조윤형, 최형우, 김한수, 김녹영, 이종남, 김경인, 나석호, 강근호, 이세규, 류갑종, 박종률 등처럼 모 군부대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그리고 징역을 살았으며 출소한 이후 재야에서 활동하였다.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박종태, 양순직, 함석헌 등과 같이 국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문당하였다. 1980년 신군부가 꾸민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역시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7]

1984년 당시 미국에 망명중이던 김대중을 대리하여[8]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창립하고 공동의장권한대행을 맡았다. 1985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자 야권의 '선명야당' 창당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신한민주당 창당에 앞장섰다.[9]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측이 김대중에게 통일민주당 입당 및 경선을 요구했고, 김상현 역시 이를 수용하자는 입장을 보였으나, 김대중은 이를 거부한다.[10] 이에 실망한 김상현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으로 따라가지 않고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였다.[11]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김대중의 저격공천(평화민주당 김학민 후보)으로 야권 표가 분산되어 민주정의당 강성모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파일:EF21279D-F3A4-4C4C-BCAF-60995786DD38.jpg
1990년 노무현 의원과 함께 3당 합당에 반대하는 모습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할 때 따라가지 않고 무소속으로 남았다. 1991년 평화민주당의 후신 신민주연합당에 입당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무려 20년만에 원내복귀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이에 따라갔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7년 한보그룹 부도 직후 정태수와 연루되었으나 1999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듬해인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했다.[12] 그러자 이에 반발하여 민주국민당에 입당하고 전국구 2번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2001년 새천년민주당에 복당하였다. 이후 박광태의 광주광역시장 출마로 인해 지역구가 공석이 된 2002년 재보궐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광주광역시 북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16대 대통령 선거 때는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으나, 이후 새천년민주당 분당열린우리당으로 옮기지 않고 잔류했으며,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는 탄핵소추에 찬성하였다.[13] 이로 인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7선에 도전했다가 탄핵 역풍에 휘말려 열린우리당 강기정 후보[14]에 밀려 낙선하였으며, 이후 정계를 은퇴했고[15], 그 이후로는 민주당계 정당에서 사망 전까지 상임고문직을 맡았다.

이후 2014년 8월 12일 자신의 오른팔격으로 평가를 받았던 고 박성수 전 동작구의회 부의장의 갑작스러운 서거 소식에 영정을 붙잡고 통곡을 하였고, 이후 그 충격으로 인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2017 여름 신촌동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투병생활을 하다 2018년 4월 18일 결국 숙환으로 별세했다.[16]


3. 기타[편집]


  • 당시 군사정권과 대립각을 강하게 내세운 정치인이었지만, 특유의 범우주급 친화력과 인맥관리로 여야를 가리지 않고 친분이 두터워서 적이 없다시피 했으며 오랜 세월 정치권의 마당발로 통했다. 그래서 초선의원 시절 1934년 생으로 한살 연상이던 박정희 정권의 실세이자 민주공화당 내 초 강경파 의원인 차지철과도 친구를 먹고 허물없이 우의를 다졌으며,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도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주군 김대중과는 라이벌 관계이던 김영삼상도동계 인물들과도 친분이 상당했으며, 김대중이 13대 대선을 앞두고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자, 이에 반발하여 김영삼을 지지하면서 통일민주당에 잔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이 노태우, 김종필과 손잡고 3당합당을 단행하자 군사정권 잔당들과는 같이 할수 없다며 참여를 거부하며 이탈하였다. 이후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 등과 함께 꼬마 민주당을 만들었다가, 야당 통합을 주장하면서 신민주연합당에 입당하면서 한때 등을 돌렸던 김대중과 다시금 한배를 타게 되었다.

  • 정치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김대중의 비서로 시작해서 오랜세월 김대중과 호형호제하는 최측근으로, 원조 동교동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실제 김대중이 1971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을때, 당내에서 김대중을 지지하는 유일한 현역 국회의원이었다고 한다.[17] 하지만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의 평민당 창당과 독자출마를 명분이 없다고 반대한 것때문에 김대중과 철저하게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그뒤에 돌고돌아서 다시 한배를 타게 되지만 이후 김대중과 김상현의 관계는 그야말로 서로 철천지 웬수같은 관계였다.[18] 사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김대중 후보의 출마를 반대하며 또다시 김대중의 심기를 건드린 것도 김상현[19]이었다. 이때 천하의 멘탈왕 지도자로 유명한 김대중이 경선활동 중 후보 정대철보다도 정대철과 연합하며, 이승만 정부부터 40년을 사제관계 수준으로 지냈음에도 87년에도 이어 97년에도 자신의 대선출마를 반대하며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의형제급 제자 김상현 때문에 분노에 치를 떨었다는 후문도 있다. 사실 당시는 한국 정당이 지금의 대표제[20]가 아닌 총재제를 하고 있어서 총재와 대통령 후보를 동시에 뽑고 있었는데, 김상현은 총재 후보, 정대철은 대통령 경선 후보였고 둘이 연합을 했던 것. 그것도 김대중의 대선 마지막 출마를 노리던 97년에 김상현은 당시 "국민회의 하면 무조건 김대중이다 하는 말은 이제 없다 이겁니다", "국민회의가 다 김대중 총재 겁니까? 그런건 없지요"라고 이곳저곳의 유세장에서 마구 연설을 해댔으니, 김대중이 부들부들거릴만도 했다. 근데 시간이 더 지나고 막상 자신이 총재 선거도 불리해지자, 김상현은 거꾸로 정대철을 뒷통수치고 선거운동원들에게 "대통령은 김대중, 총재는 김상현 뽑으셔야죠."라고 민주당원들에게 말하고 다니게 해서, 뒤늦게 이 소문을 들은 정대철도 뒷목을 잡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결국은 김대중이 총재와 대통령 후보 모두 당선 되어버리고 97년 대선때 대권까지 거머쥐면서 그 이듬해 김대중 대통령에 미움을 산 이 둘은 김대중 정부시절 모든 요직에 일체 등용되지 못하고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파일:DN19990094-00_01345424.jpg

  • 1999년 전두환 전 대통령을 초청하여 골프회동을 가졌는데 이날 골프회동은 김상현 고문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전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이양우 변호사와 민정기 전 비서관도 함께 참석했다. 당시 5공 세력의 정치재개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는 상황에서 현 여권과 연희동 측과의 모종의 물밑접촉이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21]

  • 정치인 중에서도 애주가로 유명했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이 점을 반영했는지,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받다가 전두환이 갑자기 안가를 불러내어 얘기좀 하자며 위스키을 따라 주자 "아무리 나를 때려 죽이려고 했다지만 술자리 예의는 예의지. 한 잔 받으시오."라며 서로 대작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4. 선거 이력[편집]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5
11월 재보궐선거
(국회의원)
서울 9[22]

[[민중당(1965년)|
파일:민중당(1965년) 흰색 로고타입.svg
]]

11,402 (36.46%)
당선 (1위)
초선[23]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3,554,224 (32.73%)
당선 (17번)
재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2[24]
63,575 (62.43%)
당선 (1위)
3선[26]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대문 갑

[[통일민주당|
파일:통일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30,598 (31.39%)
낙선 (2위)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42,591 (45.49%)
당선 (1위)
4선[27]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29,979 (40.10%)
5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국민당(2000년)|
파일:민주국민당(2000년) 흰색 글씨.svg
]]

695,423 (3.67%)
낙선 (2번)

2002
상반기 재보궐선거
(국회의원)
광주 북 갑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18,618 (55.84%)
당선 (1위)
6선[28]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29,023 (33.87%)
낙선 (2위)


역대 선거 벽보

[ 펼치기 · 접기 ]

파일:김상현8.jpg


파일:김상현13.jpg

8대 총선 (서울 12[1])
13대 총선 (서울 서대문구 갑)

파일:김상현14.jpg


파일:김상현15.jpg

14대 총선 (서울 서대문구 갑)
15대 총선 (서울 서대문구 갑)

파일:16대 총선 전국구 민주국민당1.jpg


파일:빈 가로 이미지.svg

16대 총선 (민주국민당 전국구 2번)
2002년 상반기 재보궐 (광주 북구 갑)

파일:김상현17.jpg


17대 총선 (광주 북구 갑)




5.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56 - 1960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60 - 1963
탈당

파일:민주당(1963년) 흰색 로고타입.svg

1963 - 1965
창당

[[민중당(1965년)|
파일:민중당(1965년) 흰색 로고타입.svg
]]

1965 - 1967
합당[29]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1967 - 1969
합당[30]

[[무소속|
무소속
]]

1969
자진 정당 해산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1969 - 1972
정당 재등록

[[무소속|
무소속
]]

1972 - 1985
탈당

파일:신한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1985 - 1987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87
탈당[31]

[[통일민주당|
파일:통일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87 - 1990
창당

1990 - 1991
탈당[32]

1991
입당

1991 - 1995
합당[33]

1995
탈당[34]

1995 - 2000
창당

2000
합당[35]

2000
탈당[36]

2000 - 2001
창당

2001
탈당[37]

2001 - 2005
복당

2005 - 2007
당명 변경
정계 은퇴

2007
합당[38]

2007 - 2008
당명 변경

2008
합당[39]

2008 - 2011
당명 변경

2011 - 2013
합당[40]

2013 - 2014
당명 변경

2014 - 2015
합당[41]

2015 - 2018
당명 변경
작고


6. 둘러보기[편집]












[1] #[2] 고은 시인이 지어준 것이다.[3] 당시 김상현은 대한웅변협회 학생회장이었다.[4] 동교동계 사람들도 김대중을 선생님이라고 높여불렀지 형님 소리를 할 수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보통 사이는 아니었다.[5] 여담으로 이 때 당시 김상현이 내세운 이력 중 하나가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한 환영 국민위원장이라는 아스트랄한 직책이었다. 인터뷰 기사 근데 당시 그는 미성년자 고등학생이었다.[6] 가장 오른 쪽의 인물이다.[7] 본래는 신군부에서 그를 포섭하려고 했다 전해진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전두환과 술을 마시는 장면도 이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8] 단, 김대중은 김영삼과 함께 하는 민주화추진협의회 참여를 반대했다.[9] 당시 민주헌정연구회 등 재야에서는 총선 보이콧론을 주장하는 등, 새로운 야당 창당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고, 김대중의 의중도 비슷했다.[10] 경선을 치르면 해 볼 만하지 않겠느냐 싶겠지만, 당내 기반이 없는 김대중에게는 불리했다.[11] 김대중의 정치 커리어 초반부터 함께한 동지였으나, 이 때를 기점으로 사실상 둘의 관계는 단절됐으며 이후 1991년 꼬마민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의 후신 신민주연합당에 합류하기도 하나 합류 후에도 동교동계의 견제를 받는 등 순탄하지 않았다. 심지어 1997년에 자신은 국민회의 총재 선거에 출마하고, 대선 후보로 정대철을 밀기도 했다. 물론 둘다 김대중에게 박살났다.[12] 그 지역구는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낸 우상호가 공천되었는데 만 65세의 5선 의원이 정계에서 용퇴하고 만 37세의 젊은 정치신인이 공천된 것인 만큼 세대교체의 이미지도 컸다.[13] 당시 안대희 전 대법관의 대북송금 특검 사건으로 인하여 동교동계친노간의 갈등이 폭발한 상황으로 동교동계 인사 대부분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였다.[14] 내리 3선을 했고 훗날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광주광역시장에 당선된다.[15] 다만 아들인 김영호는 이듬해인 2005년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거와 달리 본인은 그대로 2008년 총선 앞두고 열린우리당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과 통합한 통합민주당 창당 직전까지는 새천년민주당에 개편된 민주당에 잔류하였다.[16] 고 박성수 전 부의장은 지난 13대와 14대, 15대 선거와 2002년 재보궐선거의 선거자금을 지원하며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정도로 굉장히 각별한 사이라고 알려져있다. 특히 김상현 의원이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 고 박성수 전 부의장이 항상 김 의원을 모시고 다녔다고 한다.[17] 보통 동교동계의 좌장으로 꼽히는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는 모두 김상현보다 훨씬 뒤에야 의원뱃지를 달았고 이 시기에는 전부 김대중의 개인비서에 불과했다. 또한 현역 동교동계 정치인 중 하나인 박지원은 1981년에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전국구 공천을 신청한 적도 있었고 이후 1980년대 중반에야 합류한 인물이다.[18] 어느 정도였냐면 김대중이 1994년 정계 복귀를 고민할때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한광옥 등 다른 동교동계 중진들에 심지어 아직 국회의원도 아니었던 김근태, 정동영까지 만나서 의견을 들으면서도 정작 30년간 자신의 최측근으로 형제처럼 지내왔던 김상현은 단 한번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19] 독립운동가 정일형의 아들인 정대철이 당시 부총재였고, 그를 후보로 밀었다.[20] 대표와 원내대표, 사무총장 등 정해진 다수의 간부들이 당내 권력을 나누는 형태. [21] 국민회의 김상현 전두환 전 대통령 골프 회동[22] 서대문구 갑[23] 전임자 김재광 한일기본조약 반대로 의원직 사퇴[24] 서대문구 을[25] 이와 동시에 중앙정보부로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다.[26] 1971. 10. 17 자격박탈
(10월 유신)[25]
[27] 1995 새정치국민회의 입당[28] 전임자 박광태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광주광역시장 출마로 사퇴[29] 민정당과 신설 합당[30] 신한당과 신설 합당[31]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32] 3당 합당에 대한 반발로 탈당.[33] 신민주연합당과 신설 합당[34]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위한 탈당.[35]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36] 총선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37] 새천년민주당 복당을 위한 탈당.[38] 중도개혁통합신당과 신설 합당.[39] 대통합민주신당과 신설 합당.[40]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41]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