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국(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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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군인, 정치인.

2. 생애[편집]


남한에서는 1916년 출생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 1920년 4월 5일에 태어났다. 항일 빨치산 1세대 출신으로, 1937년 4월에 빨치산에 가담하여 기관총수로 싸웠으며 1939년 5월에 정찰병으로 무산지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카더라. 1941년 5월,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해방 이후 1945년 8월, 조선건국청년학교 교무주임에 임명, 보안국 특경대, 수상보안대 대장 등을 역임했으며 1949년 9월, 조선인민군 총사령부 정치보위과장, 경리부장으로 일했다. 1950년 8월, 경비국 개성지구 련대장에 임명, 이후 429 해안방어 여단 참모장을 거쳐 249 해안방어 여단장까지 승진했다. 1954년 5월, 소련으로 유학갔다.

1956년 9월, 김일성군사대학 졸업 이후 제1집단군 산하 사단장에 임명되었다. 북한 기록에 따르면 1956년,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보선되었다고 한다. 1958년 5월,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1959년 12월, 포병군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으며 1960년 2월, 공군 참모장에 임명되어 이후 집단군 부참모장으로 부임했다. 1962년 8월, 사회안전성 경비국 참모장으로 이동했다. 1967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1968년 10월, 수도방위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969년 군단장에 이르렀다. 1970년 4월,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불분명한 시점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70년 11월, 조선로동당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 1972년에 해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72년 12월, 주 잠비아 대사로 나갔으며 1976년에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77년 2월, 오트볼타 대사를 지낸 이후 귀국, 1978년 7월, 군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으나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에서 탈락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는 계속 재선되어 1990년 5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까지 지냈다. 1988년 9월, 상장으로 진급하였고 1988년 12월, 반제투쟁노병위원회 부위원장 직함으로 몽골을 다녀왔다.

그러다가 1991년 1월 30일 8시에 7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당중앙군사위원회는 부고를 발표, "동지는 전후무력기관의 중요한 직책에서 당의 군사로선을 관철하여 군사간부를 육성하고 우리 인민군대를 불패의 혁명무력으로 강화발전시키기 위하여 정력적으로 사업하였다. 동지는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최종계급은 상장이었다.

3. 참고문헌[편집]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 조선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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