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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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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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1.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2.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3.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4.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5.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6.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7.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3
1986
1987
1988
1989
1991
1993


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8.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9.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1996
1997


파일: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코치)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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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KBO 리그 베스트 10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85, 1988 KBO 리그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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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1988, 1989 KBO 리그 홈런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82, 1988 KBO 리그 타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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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1988, 1989 KBO 리그 장타율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88, 1989 KBO 리그 승리타점왕










김성한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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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1번}}}
팀 창단

김성한
(1982~1995)


김상진
(1996~1999)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79번}}}
결번

김성한
(1996~2000)


김정수
(2006~2007)
해태
/
KIA 타이거즈 등번호 90번

결번

김성한
(2001~2004)


유남호
(2005)
한화 이글스 등번호 71번
정민철
(2010~2012)

김성한
(2013~2014)


김종수
(2015~2016)




파일:Kim Sung-han.png

김성한
金城漢 | Kim Sung-han

출생
1958년 5월 18일 (65세)
전라북도 군산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군산중앙초 - 군산중 - 군산상고 - 동국대
신체
178cm, 85kg
포지션
1루수
3루수, 2루수, 유격수 (1982)[1]
투수 (1982~1983, 1985~1986)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82~1995)
지도자
해태 타이거즈 2군 타격코치 (1996)[2]
해태 타이거즈 1군 타격코치 (1997~2000)
해태-KIA 타이거즈 감독 (2001~2004)[3]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04~2005)
한화 이글스 1군 수석코치 (2013~2014)[4]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타격코치 (2002~2003)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2009)
프런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전력분석원 (2006)
해설위원
MBC ESPN 야구 해설위원 (2007~2008)
광주 CMB 야구 해설위원 (2010~2012, 2015~ )
경력
KBO 경기운영위원 (2006)
KBO 상벌위원 (2006)
KBO 기술위원 (2007~2012)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기술위원 (2008 / 2010)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2. 프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3.1. 타자
3.2. 투수
4. 은퇴 이후
4.2. 해설자 경력
4.3. 기타 활동
5. 사건 사고
6. 여담
7. 연도별 주요 성적
7.1. 수상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해태 타이거즈 야구선수이자 前 KIA 타이거즈 감독.

선동열, 김응용과 함께 타이거즈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이종범의 등장 전까지 해태 타이거즈를 대표하는 전국구 스타였다.[5] 현역 시절 주 포지션은 1루수로 원년에 투수를 겸했다는 점이 유명하며, 특유의 '오리궁뎅이' 타법 역시 유명하다.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멤버로, 은퇴할 때까지 해태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던 타이거즈 원클럽맨이다. 리그 초창기의 슈퍼스타로 KBO 리그 최초로 단일 시즌 10승-10홈런, 30홈런, 20-20 클럽, 통산 1,000안타, 통산 2000루타, 통산 700득점 등 기록을 달성하였고, 1983년부터 1999년까지 16년 간 통산 최다안타 1위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2022년 현재 스탯티즈 기준 통산 wRC+가 3천 타석 이상 소화한 선수 가운데 20위에 올라있을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오랜 기간동안 선보였다. 그리고 그가 10승투수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조차 모르는 사실이 해태 원년 유일 10승 투수이고 타이거즈 최초의 10승 투수였다. 원년에 10승[6]을 찍은 투수는 고작 8명, 그중 한명이 김성한이었던 것.

선수 시절 등번호는 11번. 은퇴 후에는 코치로 활동하다가 김응용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로 자리를 옮기며 감독직을 이어받기도 했다. 다시 말해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감독이자 KIA 타이거즈의 첫 감독이다.

한편으로는 대대적인 타이거즈의 똥군기가 30년 넘게 이어지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몇연패를 하거나 분위기가 안좋으면 최고참으로써 줄빠따를 떄리기도 했다.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이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끊을 수도 있는 사람이 오히려 그걸 더 즐겨서 후배들을 잡았다. 타이거즈는 이종범 대에서 구타가 끊기기는 했으나..[7]

2. 선수 경력[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군산상고 시절부터 4번타자 겸 투수로 활약하였다. 1학년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5번타자 겸 3루수로 뛰었고 특히 그의 활약상은 2학년이던 1976년에 빛났는데, 동갑이자 1년 선배였던 김용남과 함께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을 견인함은 물론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투수와 유격수를 소화하며 팀의 준결승 진출에 기여하였고 가을에 열린 우수고교 초청 야구대회에서는 고교야구 3대 투수 중 하나였던 김시진과 맞붙기도 했다.

그러나 하필 같은 팀의 김용남이 고교 3대 투수로 꼽히던 스타였기 때문에 정작 스포트라이트는 김용남이 다 받았다. 4번타자 투수 김성한도 이름값은 높았고 어디 가서든 에이스 자리는 꿰찰 만한 능력이었지만, 같은 팀에 김용남이 있고 그의 라이벌이 최동원, 김시진이었으니 자연스레 관심에서 비껴나 조력자 포지션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해 군산상고가 김성한이 투타 및 수비[8] 전반에서 활약해줬기에 호성적을 낼 수 있었음은 이견이 없다. 당시 김용남과 김성한이 있는 군산상고의 마운드는 76년도 고교야구 뉴스 하면 꼭 나올 정도로 위력적이었고, 타자로서의 기여도까지 합하면 김성한은 군산상고에서 제일 가치있던 선수였다.

이후 3학년 때도 한일간 고교야구 대회에 선발되는 등 활약을 펼치며 동국대에 진학했다.[9] 동국대에서도 3~4번타자로 주로 출장하며 투타 양면에서 고른 활약을 보였지만 팔꿈치 부상 등으로 인해 2학년부터는 투수로서의 출장이 점점 줄고 우익수나 지명타자로 나오는 경기가 늘기 시작했다. 3학년 때까지는 그래도 투수로 등판하는 경기가 종종 있었으나 4학년 때는 투수 등판이 거의 없어 한미간 대학야구전 대표팀에 외야수로 선발되었을 정도였다. 이후 졸업을 앞두고 한일은행 야구단 입단 제의를 받았지만 막 창설된 프로를 선택, 고향팀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2.2. 프로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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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 06 'KBO판 이도류' 김성한의 '10승과 3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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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드에서 투구하는 모습.
당시 해태의 선수는 불과 15명으로 타 팀에 비해 상당히 부족했던 탓에 팀 창단 초기에는 투수와 타자를 겸업하면서 활동하였다. 이러한 팀 사정으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KBO 리그에서 투타겸업을 하면서, 양쪽에서 모두 좋은 성적을 낸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선수가 되었고, 이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해태 타이거즈의 역사적인 첫경기인 1982년 3월 28일 부산 롯데전에서부터 선발투수 방수원과 뒤를 이어 올라온 신태중이 무너지며 1-10으로 끌려가자 팀의 세번째 투수로 등판했다. 신태중이 남긴 3명의 주자들을 모두 분식회계 했지만 7회말과 8회말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4월 8일 삼미전에서는 마무리 투수로 등판해 1.2이닝 무실점으로 세이브를 기록했다. 4월 10일 전주 OB전에서는 선발투수로 등판해서 완투패를 기록했다. 4월 14일 삼미전에서는 선발투수 방수원의 뒤를 이어 등판해 6이닝 2실점으로 데뷔 첫 승리투수가 되었다. 5월 15일 광주 삼성전에서 팀이 2-0으로 지고 있던 6회 구원투수로 올라왔고 황규봉에게 7회말 투런 홈런을 쳐서 동점을 만든 후 11회까지 6이닝 5삼진 3볼넷 무실점을 기록하였고, 황규봉을 상대로 11회말 끝내기 안타를 쳐 팀의 2-3 역전승을 이끌어내며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승리투수와 결승타를 동시에 이룬 선수가 되었다.[10][11] 11일후인 5월 26일 서울 MBC전에서도 7회말 구원투수로 올라와 10회초 이광권을 상대로 결승 2루타를 친 후 10회말을 틀어막아 승리투수가 되며 한국 프로야구 유일의 승리투수와 결승타를 동시에 그것도 두 번이나 이룩한 선수가 되었다. 6월 12일 광주 롯데전에서는 9회까지 139구를 던져 데뷔 첫 완봉승을 거두었다. 8월 8일 삼성전에서 1.2이닝 3실점으로 부진하고 이후 팔꿈치에 통증을 느껴 한동안 투수로 등판하지는 않았다. 9월 28일 구덕 롯데 더블헤더 1차전전에서 9이닝 3실점 완투에 타석에서는 5타수 3안타 2타점을 기록해 4-3 승리를 이끌어내며 10승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 경기는 한국 프로야구 유일의 9명의 선수로 끝낸 경기로 기록되어 있다. 즉 투수교체는 물론 지명타자나 대타, 대주자, 대수비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2차전에서는 타자로 선발 출장해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이해에는 심지어 올스타전에서도 투타 겸업을 했다. 1차전에서 유종겸에 이어 투수로 등판해 3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으며, 2차전에서는 5번 지명타자로 출전해 4타수 3안타를 쳤고 3차전에서는 하기룡에 이어 투수로 등판해 3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 82년 그의 투수 성적은 war 2.52로 전체 투수 중 14위, 즉 3선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투수라는 점이 입증되었다.

당시 김성한의 투수기용이 단순히 해태의 선수층 부족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래 국가대표도 갈 만큼 투수로서의 능력은 검증된 선수였으니 투수로도 쓸 수 있었던 것. 다만 팔꿈치 부상으로 투수로서의 커리어는 위험 수준이었고, 고교시절부터 4번타자로 활약했을 정도로 타격 능력 또한 출중했기에 프로 데뷔 후 3년만에 타자로 완전 전향할 수 있었다. 팔꿈치 부상을 안고 있었음에도 프로 원년 선수층이 얇았던 해태의 팀 사정상[12] 투수까지 겸업하면서 휴식없이 타자와 야수로도 계속 출장했는데, 이는 이후 기량하락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거기에 김성한 본인은 대학시절부터 쭉 팔꿈치 아픈 걸 참아가며 공을 던졌다고. 그래서 시즌 끝나고 "너무 힘들어서 자청해서 마운드에 올라 죽도록 던지고 다시는 투수를 할 수 없도록 팔이 영영 고장났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라고 털어놓았던 바 있다.[13] 다만 나중에 돌아보니 힘들었던 건 생각은 안 나고 재미있었다고.

이후 완전히 타자로 전향하고 나서는 그야말로 맹활약을 펼치며,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김종모와 함께 '김씨타선'으로 대표되는 해태 타이거즈의 중심 타순을 이끌면서 해태를 7번이나 우승시키는 데 큰 공헌을 쌓았다. 이미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에 80경기 전경기에 출전해 타율 3할(.305, 리그 10위)에 10홈런 이상(13홈런, 리그 4위), 타점 1위(69개), 10승 5패 방어율 2.88을 기록하며 자신의 진가를 알린 김성한은 1985년 22홈런으로 홈런왕에 MVP까지 수상하면서[14][15] 본격적으로 프로야구의 간판 스타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김성한의 전성기는 첫 홈런왕을 기록한 85년부터 해태의 6번째 우승의 중심이었던 91년까지로, 이 기간의 기록을 보면 타율 .301(3위) 홈런 145개(1위), 타점 483개(1위), 안타 803개(1위)[16], 도루 99개(8위), OPS.902(2위), WAR 30.97(2위), wRC+ 157.5(2위)를 기록하면서 또 다른 전설인 이만수와 함께 리그를 양분했던 어마어마한 타자였다.[17] 개인 타이틀 역시 이 기간동안 홈런왕 3회(1985, 88, 89),[18] 타점왕 1회(1988), 최다안타 2회(1985, 88), MVP 2회(1985, 88)를 기록하면서 화려함과 꾸준함을 갖춘, 당시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었다. 또한 거구의 홈런왕이 주는 이미지와 달리 발도 꽤 빨랐는데, 통산 14시즌 동안 143도루 67실패로 성공률이 68.09%를 기록했다. 현대 세이버매트릭스 상에서 보통 도루의 손익분기점이 보통 70% 근처에서 형성되는걸 생각하면 그리 뛰어난 주자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빠른 발로 공격적인 주루를 시도할 수 있었던 선수임에는 분명하다.[19] 이 시기에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한 시즌 30홈런과 20-20 클럽[20]을 달성했다.

그가 은퇴한 후 타이거즈 소속으로 홈런왕이나 타점왕을 한 번이라도 달성한 선수는 2009년에 36홈런과 127타점을 달성하며 홈런왕과 타점왕을 동시에 석권한 김상현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 2017년 최형우는 타점왕을 노렸으나 4개 차이로 다린 러프에게 자리를 내줬다. 그 김상현도 2009년을 제외하면 다시는 그와 비슷한 모습조차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타이거즈 역사에서 김성한이 얼마나 꾸준한 강타자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장거리 타자였음에도 그의 통산 BB/K는 0.69로, 단순히 파워만 센 공갈포가 아니었음을 입증한다. 이 당시 김성한은 몸에 맞는 볼도 상당히 많았는데, 88년엔 2위, 89년엔 3위, 92년엔 15개로 1위까지 달성했다. 자신이 생각했을 땐 당시 워낙 홈런을 많이 치던 전성기 시절이라 견제 목적으로 던진게 많았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참조영상
}}}
김성한의 은퇴식
그러나 그런 그도 30대 중반에 접어든 1991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노쇠화가 오기 시작한다. 1991년 3할에 가까운 타율(.294)과 리그 3위의 홈런(23개)을 기록하던 방망이는 1992년 15홈런으로 꺾이더니[21] 1993년부터 다시는 두자릿수 홈런을 치지 못했다. 은퇴년도인 1995년에 잠실에서 홈런을 기록했을 정도로 펀치력은 여전했으나 노쇠화로 인해 본래 자신의 약점이던 스윙스피드가 더욱 떨어지게 된 탓이다. 결국 95년 투고타저와 맞물려 시즌 타율이 1할까지 떨어지게 된 김성한은 그 해에 은퇴를 결정하게 된다. 그의 은퇴식에는 1980년대를 함께 호령했던 라이벌 이만수가 꽃다발을 건내주어 눈길을 끌었다. 그가 남긴 통산기록은 타율 .286 1389안타, 207홈런[22], 781타점[23], 762득점[24], 2루타 247개, 2285루타, 143도루. 은퇴를 선언한 95년 당시 도루를 제외한 타격 모든 부분의 1,2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25]

초창기의 해태 타이거즈 웹사이트에는 명예의 전당이라는 게시판이 있었는데, 김봉연이나 김종모, 선동열 등을 제치고[26] 김성한 혼자 당당히 올라있었다. 그래서인지 내용도 김성한에 대한 것들만 가득했는데, 영구결번만 안 되었다 뿐이지 당시 타이거즈의 역사를 빛낸 대스타로서 김성한의 위상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스윙스피드를 올리기 위해 개발된, 백스윙을 거의 생략한 간결한 타격폼 덕분에 특히 속구에 강해서 프로에서 최동원한테 가장 많은 안타를 얻어낸 선수였으며,[27] 제 1회 한일 슈퍼게임에서 일본 올스타에 큰 점수차로 밀리던 8회초 이라부 히데키의 직구를 받아쳐 도쿄돔 상단으로 넘겨서 한국 야구의 자존심을 그나마 세웠던 적도 있다. 게다가 4차전에서도 홈런을 날리며 일본 올스타를 상대로 한 한국프로야구 사상 첫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덕분에 대회 당시 그의 배트가 도쿄돔의 일본 야구 박물관에 전시되는 영예를 누렸다. 또한 1993년에 열린 한일프로야구 친선경기[28]때도 잠실구장에서 이라부에게 홈런을 뺏은 바 있다.
파일:해태 타이거즈 김성한.png}}}
타자로서의 활약은 위와 같이 두말할 필요도 없고, 투수로서도 4시즌 동안 통산 방어율 3.02를 기록, 총 167이닝을 던졌고 1982년에는 무려 106.1이닝[29]을 소화했다. 1982년에 타자로서 타자로 타율 0.305, 13홈런, 69타점, 10도루라는 빼어난 성적을 기록했지만, 투수로서도 규정이닝을 넘기면서[30] 10승[31] (5패 1세이브), 방어율 2.88을 기록하며 프로에 데뷔했다.[32] 현재까지 KBO에서 본인 한 명밖에 없는 한시즌 10승 - 10홈런 - 10도루 - 3할 타율 - 타점왕이라는 진기록 보유자.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투타 10-10-10클럽을 개설[33]하고 현재 그 유일한 회원이며, 투수도 타석에 서는 NPB 센트럴리그MLB내셔널리그식으로 경기운영을 바꾸지 않는 한 앞으로도 이 기록은 깨지기 힘들 것이다.[34] 메이저리그에서도 10홈런-10승은 베이브 루스(1918년, 11홈런-13승)와 오타니 쇼헤이(2022년, 34홈런-15승)만 달성한 기록이다. 다만 세간에서 당시 선발 투수로 활동했다고 인식하는 것과는 달리 26경기 출장 중 5경기만 선발로 나왔다. 물론 80경기 체제 중에 5경기를 선발로 나온 것이 생각보다 적은 비율은 아니었겠으나, 주로 나온 포지션은 구원 투수로 보는 것이 맞다. 문제는 구원 투수라지만 80년대 야구 특성상 마구잡이로 등판하였다. 첫머리에서부터 보였던 규정이닝을 넘기면서 라는 글귀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3. 플레이 스타일[편집]



3.1. 타자[편집]


파일:오리궁둥이 타법.png}}}
트레이드마크인 오리궁뎅이 타법.[35]

엉덩이를 뒤로 내민 상태로 타격을 하는 특이한 타격폼으로 인해 오리궁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현재 기준뿐만 아니라 타격폼이 정형화되지 않아 각종 기상천외한 타격폼이 넘쳐났던 당시 기준으로 봐도 이상한 타격폼으로 유명했다. 이는 아마시절 유독 스윙스피드가 느렸던 김성한이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연구에 연구을 거듭한 끝에 완성 된 것으로 원래 동국대 시절에는 느린 스윙스피드를 보강하기 위해 배트를 비스듬이 기울여 번트를 칠 듯이 흔들거리다 짧게 끊어치는 타격을 했다고 하는데, 이게 알루미늄 배트로 치는 거라 반발력이 좋아서 홈런이 잘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프로무대로 올라가니 나무 배트로는 도저히 대학시절의 끊어치는 타격이 안 돼서 타격폼을 스스로 연구했다는데, 그게 바로 오리궁뎅이 타법이다. 간결한 스윙을 통해 정확도를 높이면서도 자신의 강점인 뛰어난 펀치력을 살릴 수 있었다.[36]


3.2. 투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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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를 했을 때 제구력과 피해가지 않는 공격적인 피칭, 경기 운영능력이 돋보였다. 김성한 본인은 투수로서 자신의 강점으로 변화구와 제구력을 뽑았다. 컨트롤 타입 투수였다고.

주로 사용했던 변화구로는 슬라이더, 커브를 던졌고 슈트도 많이 써먹었다고 한다. 구속은 당시가 스피드건이 많이 없었을 때라 따로 기록이 존재하진 않고, 김성한 본인은 (잘 던질 땐) '한 140km 초반 정도 던지지 않았을까' 라고 회고하긴 했지만 어쨌든 구속보다는 제구력이 돋보였다고 한다. 배팅볼을 잘 던져서 선배 김봉연이 계속 던져달라고 할 정도였다. 더불어 배트 스윙이 간결했던 것처럼 팔 스윙도 짧았다고.


4. 은퇴 이후[편집]



4.1.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성한/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2. 해설자 경력[편집]


2006년 미국 연수를 끝내고 난 2007년엔 팀 후배 이순철과 함께 MBC ESPN 해설위원이 된다. 2008년까지 활동.

2010년부터 광주CMB 해설위원을 시작하였다.

2014년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에서 물러나자 CMB광주방송 KIA 타이거즈 홈경기 해설을 다시 맡게 되었다.


4.3. 기타 활동[편집]


2008년 7월 광주광역시 상무지구에서 중식당 하이난을 오픈해 부인과 같이 운영했다. 심지어 손님이 많이 몰리는 시간대에는 직접 손님들 차 발레파킹을 해주었다. 벽마다 김성한의 선수시절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다양한 팀의 후배들이 찾아와서 사인을 남기고 갔다.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2015년 6월에 나주시에 '더 하이난'을 오픈했다. 상무지구의 하이난은 '시안'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2012년 7월경 교원그룹의 상조 브랜드인 '물망초'의 광고에 김용철 전 롯데감독대행과 함께 출연하여 주목받기도 했다. 광고 슬로건인 "떠나도 남는다 가슴에 남는다"가 김성한 본인의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는 터라 짠해지는 느낌이다.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에서 물러나 야인이 다시 되고, 2014년 2월 무렵 음료광고를 하나 찍었다. 뿐만 아니라 KBS광주[37], 광주MBC, CMB 등 지역 방송국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는 등 지역 방송인으로서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입담이 상당히 좋다. 2021년 광주MBC의 유튜브 오리지널 컨텐츠 전설의 타이거즈에도 출연하였다.

선동열 감독이 부진한 성적으로 계약기간이 끝나고 사실상 재계약이 불가능하리라 여겨졌을 때는 새 감독 후보군으로 오르는 듯 했었으나 선동열의 재계약으로 결국 소문으로 끝났다. 그러나 선동열이 2014년 10월 25일에 사퇴하면서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비록 흑역사가 존재했지만 2년연속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은 김성한 감독이 복귀하면 환영할 기아팬들이 많을 듯하다.[38][39] 하지만 김기태가 부임하는 바람에 복귀는 당분간 요원해졌다.

그리고 상무지구에 차렸던 중국집 '하이난'을 넘겨주고[40], 나주혁신도시 휴먼스프라자 4층에 새롭게 '더 하이난'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중국집을 열었다고 한다. 중국집도 하면서, 나주시의 유소년야구와 아마야구 육성에 온 힘을 다하겠다고 한다.

요즘엔 야구칼럼을 쓰는데, 김성한의 눈이라는 타이틀로 엑스포츠뉴스에서 연재를 하고 있다. 상당히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논점으로 글을 풀어나가서 한번 읽어볼 만 하다.

2017년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지지연설을 했다.영상[41] 이 때문에 2018 시즌이 끝나고 kt wiz의 단장으로 선임된다는 썰[42]이 네티즌은 물론 선수단 내에서도 돌았고, 정권에서 앉힌 낙하산 단장이라고 야구팬들에게 비난받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김진욱 감독과 임종택 단장이 모두 나가면서 새로 인선된 단장으로 이숭용 타격코치가 확정되면서 김성한 전 감독이 kt 단장으로 가는 일은 없었다.

이번엔 진천선수촌의 새로운 선수촌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이 2018년 12월 19일에 전해졌다. 하지만 이기흥 대한체육회 회장은 이 소식을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대중의 반응은 당연히 안좋다. 야구팬들은 모두 김성한의 배트 폭행 사건을 기억하고 있고, 최근 심석희 폭행사건으로 체육계의 폭행 악습들을 끊자는 목소리가 커져가는 와중에 폭행에 앞장서던 사람이 선수촌의 촌장으로 낙점 되었기에 반발은 더 커져가는 중. 2019년 1월 4일 보도에 따르면 신치용, 김호곤과 함께 선수촌장 복수 후보로 올라있다고 한다. SBS의 보도에 따르면 김성한은 2017년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문재인 후보를 공식 지지했고 TV 찬조연설자로 나섰음에도 유세 활동이 보잘것 없던 사람들에 비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측근들을 체육회 요직에 앉혔다가 정부와 여권에 미운털이 박힌 이기흥 회장이 김성한을 통해 정권과의 연결고리를 만들려고 하는 보은 인사 차원의 내정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다만 체육계 인사들의 대부분 불만스럽게 애기하는 의문점은 태릉선수촌과 전혀 관련없는 프로출신 사람이 회장 유력시가 되는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한국 스포츠 망치는 현 정권 낙하산 인사

사실 보은인사 시비보다는 구타사건으로 인해 선수촌장에서 낙마한 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다른 구타사건이 연일 지상파 뉴스를 타던 와중이니 더더욱. 구타사건만 아니었다면 사실 보은인사 논란은 다른 사례에서 흔히 보듯이 무시할 법도 했는데, 선수 구타라는 악질 범죄행위 이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체육계에 역풍을 몰고 오기 좋은 기록이다.

이후 신치용 고문이 2019년 2월 7일부로 선수촌장이 확정됨에 따라 없는 일이 되었다.

2019년 12월 10일 서울 청담동 리베라호텔에서 다른 선수들과 함께 김응룡의 팔순연을 개최하였다. 팔순연을 통해서 과거에 소원했던 선수들과도 풀었다고 한다.[43]

2020년 21대 총선에서 김응룡, 이순철과 함께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을 지원유세하였다.

2021년 10월 3일 한화전[44]에서 시타를 했다.[45]#

2021년 11월 19일 전설의 타이거즈 라이브 방송에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김종모, 방수원과 같이 출연했다. 다음날에는 광주 시내에서 라이브 출연 멤버 6명 및 김응용 감독이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기념 카퍼레이드를 재연하였다.

그의 여러 인터뷰 중 하나(2020)

2021년 7월부터 지역민방KNN에서 제작했던 섬마을 할매가 시즌3로 들어오며 광주방송과 공동제작으로 바뀌며 이만기와 함께 MC로 출연중이다


5. 사건 사고[편집]



5.1. 김성한 구타 사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성한 구타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여담[편집]


(김응용 감독: 저거 스트라이크 맞아? 김 코치 나와서 항.. 항의 한번 하지 그래.) 감독이 나가라고 해서 나온 거니까 신경쓰지 말고 뭐.. 어필을 하는 척만 하자고. 이봐. 요즘 자네는 미니시리즈 보나? (임창정: 아니.. 저는 테레비 잘 안보거든요. 저는 그냥 숙소 들어가면 자요.) 사랑의 진실이라고 얼마나 인기있는데.. 나는 요즘 프로야구 하이라이트 안본다니까? 이봐, 나 퇴장 좀 시켜줘라. 어제 술을 많이 먹었더니 죽겠어... 응? (임창정 : 진짜로요?) 응! (임창정: 퇴장!) (다른 선수들 나가서 말리고 데리고 간다.) 이게 퇴장이야? 왜 퇴장이야. 아니.. 왜 퇴장이냐고. (슬쩍 고맙다는 의미로 윙크를 날린다.)

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에서 나온 김성한 코치 대사
카메오 출연으로 원래 출연료가 없었으나 김응룡 감독이 영화 제작자에게 '출연료 안 주나?' 질문에 김응룡 감독에게는 1천만원, 김성한 코치에게는 7백만원을 입금시켰다고 한다. 김성한은 사실상 조연급인데 출연료가 서로 바뀐느낌이다.

  • 1982년 김성한의 포지션은 투수 + 내야유틸이라는 인식이 강한 편인데, 원래는 3루수였다. 고교 때 유격수로도 출전한 경력이 있었던데다 초미니한 해태 선수단에서도 주전 야수 막내라 땜빵을 자주 한 탓.

  • 투타겸업 때문에 투수 계약금, 타자 계약금을 따로 받았다는 카더라가 돌았는데 김성한 본인이 말하길 "해태가 어떤 구단인데..." 다만 메리트 제도로 쏠쏠한 재미를 봤다고. 안타에 승리투수까지 다 해먹고 130만원을 따 가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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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년 시즌, 타임 요청을 받아주지 않은 김광철 주심과 말싸움을 한 짤방이 유명하다. 자세한 스토리는 기사 참조.

  • 짬뽕에 관한 일화가 있다. 원래부터 김성한 본인이 짬뽕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현역 시절에는 본인의 타격감이 좋지 않다 싶으면 구단 직원 또는 고교-대학 직계 후배를 구장에 일찍 불러서 짬뽕 한 그릇 사주고 배팅볼을 던지게 하면서 타격감을 끌어올렸다. 김성한이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추가로 설명하길 짬뽕도 사주고 짜장면도 사주고 영수증이 없어서 얼마 어치를 사줬는지 모르나 본인이 사준 짜장면과 짬뽕을 안 먹은 사람들이 없다고 했다. 또 코치 시절엔 당시 신인급 야수였던 이호준장성호를 일찍 불러 짬뽕 한 그릇을 먹이고 훈련시켰던 야구에 열정적이었던 사람이다. 김성한 홈런은 짬뽕국물 덕이었네 잠실 야구장 원정 때 시합 전 짬뽕을 먹고 1경기 2홈런을 때리는 걸 본 기자가 기사를 썼고, 바로 다음 원정이었던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해태 팬이 꼬깃꼬깃 접은 1만원권을 김성한에게 쥐어주며 '이 돈으로 짬뽕 사먹고 홈런 쳐달라'는 말에 너무 감동을 받아 눈물이 나왔다고 한다. 결국 그 날 경기에서도 홈런을 때렸다. 지금은 중국집을 경영하고 있으니 짬뽕과의 인연은 야구계를 떠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셈.

  • 연차가 높던 시절, 해태의 라커룸에는 개인당 의자가 배치된 대신 평상이 있었는데 신입들은 눈치 보여 앉지도 못하는[46] 평상에 누워 있거나 앉아서 부채를 부쳤다고 한다. 상기 언급한 짬뽕도 베테랑들만이 라커룸에서 시켜먹을 수 있었다. MBC 스포츠플러스의 엠스플 텔레비전 9화 참조.

  • 어린 시절의 가난 탓인지 자산 관리에 신경을 기울였다. 김봉연이 술회하기를 야간 경기를 마친 다음날 선수들은 피곤해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김성한은 이른 아침부터 땅을 보러다녔다고 한다. 기사에 언급된 피아노 대리점에서 피아노를 1호로 구입한 사람이 김봉연이었다.

  • KBO 최초의 원조 멀티플레이어라 할 수 있는 이건열이 1루수 연습을 하러 1루에 가면 김성한이 '아따 너는 저기(외야)로 가라잉~' '외야수로 시합 뛸 수 있는디 1루에 뭣하러 오냐 이xx가…'하며 쫓아냈다고 한다. 이건열은 해태 입단 전 포수와 1루수로 활약했는데 해태에 입단하고 보니 고교-대학 직계 선배인 김성한이 1루를 지키고 있었고 결국 유격수를 뺀 내야 전 포지션과 코너 외야 포지션을 떠돌아야 했다. 이건열이 주전 1루 자리를 잠시나마 꿰찼던 시점은 김성한이 은퇴한 후다.

  • 홍현우의 수비력 향상에 일조했다. 수비 연습 시 3루수인 홍현우가 송구를 하면 정면으로 오는 것만 받고 옆으로 오는 것은 받지 않았으며 뒤로 빠진 공은 홍현우가 뛰어가 주워와서 공손히 김성한의 글러브에 갖다 바쳐야 했다. 물론 머리통 한 대씩 맞는 건 당연.[47]


  • 1958년생으로 원래는 77학번이어야 하지만, 1년 유급으로 인해 1978년 대학교에 입학했다. 58년 개띠 동갑내기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이만수와 같은 케이스다.

  • 프로야구 창설이 없었다면 실업팀 한일은행에 입단하려 했다고 한다. 프로 출범 당시 한일은행과 가계약까지 마쳐놓고 계약금도 받은 상황이었다고.

  • 조카가 시각장애인 가수인 이민석이라고 한다.[48]

  • 동국대의 대표적인 선수였으나, 정작 본인은 동국대에 가는 걸 굉장히 싫어했었다고 한다. 원래는 당시 영남대 감독이던 배성서가 동국대로 이적해서 자연스럽게 동국대로 갔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은 원래 가고 싶은 대학교가 있었지만[49], 동기생 6명을 받아준다는 조건으로 교사들과 야구부 감독의 강권으로 간 것이라 굉장히 원망스러웠다고[50].

  • 해태 타이거즈의 동계훈련으로 잘 알려진 호랑이와의 눈싸움을 벌이는 해태 선수 3명 중 1명이다.[51]



  • 지역해설을 맡기도 했던 CMB에서 김성한의 맛집홈런이라는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다.



7.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타자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해태
80
318
.305
97
(3위)
17
(5위)
4
(4위)
13
(4위)
69
(1위)
48
10
17
.506
.340
1983
96
339
.327
(3위)
111
(4위)
20
0
7
40
59
(3위)
13
42
.448
.402
(3위)
1984
98
365
.258
94
16
2
12
41
48
7
43
.411
.336
1985
105
400
.333
(3위)
133
(1위)
29
(1위)
1
22
(1위)
75
(2위)
66
(2위)
8
45
.575
(1위)
.400
(3위)
1986
104
404
.280
113
(4위)
16
0
18
(2위)
57
(5위)
64
(2위)
10
38
.453
.340
1987
81
306
.314
96
22
(3위)
0
15
(3위)
46
43
3
33
.533
(3위)
.378
1988
104
404
.324
(3위)
131
(1위)
12
0
30
(1위)
89
(1위)
72
(2위)
16
42
.577
(1위)
.382
1989
118
414
.280
116
(3위)
18
0
26
(1위)
84
(2위)
93
(1위)
32
(3위)
93
(1위)
.512
(1위)
.407
(2위)
1990
89
331
.281
93
17
2
11
49
61
14
45
.444
.361
1991
112
411
.294
121
25
(3위)
5
23
(3위)
83
(4위)
69
16
66
.547
(5위)
.388
1992
117
410
.261
107
18
0
15
59
62
6
44
.415
.331
1993
107
362
.273
99
23
(5위)
0
6
52
45
4
33
.387
.331
1994
45
157
.236
37
10
0
1
14
17
4
12
.318
.288
1995
82
229
.179
41
4
0
8
23
15
0
18
.301
.236
KBO 통산
(14시즌)
1338
4850
.286
1389
247
14
207
781
762
143
571
.471
.358

역대 투수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2
해태
26
106⅓
10
5
1
-
0.667
(4위)
2.88
88
6
51
49
44
34
1.25
1983
4
17⅓
1
1
0
-
0.500
2.08
13
1
6
8
6
4
1.04
1984
1군 기록 없음
1985
10
40⅓
4
3
1
-
0.571
3.35
35
1
19
12
18
15
1.31
1986
1
3
0
1
0
-
0.000
9.00
2
0
3
0
3
3
1.67
KBO 통산
(4시즌)
41
167
15
10
2
-
0.600
3.02
138
8
79
69
71
56
1.25


7.1. 수상[편집]


  • 한국시리즈 우승 7회 (1983, 1986~1989, 1991, 1993)
  •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6회 (1985~1989, 1991)
  • MVP 2회 (1985, 1988)
  • 홈런 1위 3회 (1985, 1988, 1989)
  • 타점 1위 2회 (1982, 1988)
  • 장타율 1위 3회 (1985, 1988, 1989)
  • 승리타점 1위 2회 (1988, 1989)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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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수를 제외하고 내야수 모든 포지션을 원년에 뛰었다. 당시에 해태는 14명으로 시작한 초미니구단이라서 선수 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2] 계약은 2군 타격코치로 했지만 시즌 대부분을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연수를 받는데 보냈다.[3] ~7월 26일[4] ~5월 13일[5] 해태 타이거즈의 전국구 스타 타자 계보로 김봉연-김성한-이종범이 있으며, 김성한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한대화이순철, 이종범과 함께 활약했던 홍현우, 그 이후 세대인 장성호 역시 전국구적인 모습을 보였다.[6] 말이 10승이지 당시 팀당 80경기씩을 치렀기 때문에 그 해의 10승 투수는 팀이 치른 총 경기 수의 1/8 이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얘기다.[7] 요즘엔 다행인게 2023년 기준 타이거즈는 다른팀보다 오히려 군기없이 선후배가 즐기는 문화가 자리잡았다는 것..[8] 김성한은 투수로 출장하지 않을 때는 내야수로 출장했다. 이 때 유격수로도 출전하고 했던 경험이 프로 초기 반쯤 내야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기용되는 데 공헌하기도...[9] 동갑내기 이만수와 비슷한 케이스로 중학교 시절 유급한 바 있어 78학번으로 입학하였다. 김성한의 경우는 중학교 때 방황으로 1년 유급하게 되었다고.[10] 이 기록은 김성한 말고도 최동원김재박도 이루었다.[11] 다만 최동원은 지명타자가 소멸되는 바람에 1타석에 들어선 것이고, 김재박은 투수가 없어서 마운드에 오른 것이다.[12] 투수가 김용남, 이상윤, 방수원강만식, 신태중 이렇게 5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신태중은 못 던져서 9경기만 출전하는 바람에 실질적으로는 4명 + 김성한으로 시즌을 꾸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엔트리 상 김성한은 내야수...[13] 80년대 한국프로야구는 체계적으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던 시대였었기에 투수와 타자의 겸업은 선수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다. 심지어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관리가 이루어지는 MLB에서도 이도류는 실행되기 힘든데 이는 오타니 쇼헤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오타니도 이도류를 MLB에서도 시도하여 루키 시즌에는 재미를 보긴 했으나 이후 부상과 부진으로 인해 2,3년차 시즌은 투타겸업으로는 실패한 시즌이 되었고 투타 모두 성공적인 시즌을 보낸건 4년차가 되어서였다.[14] 본래 그 해 전후기 통합우승을 차지한 삼성의 이만수, 장효조, 김시진 등이 유력한 MVP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이들에게 표가 분산되면서 예상 밖으로 김성한이 MVP를 차지했다.[15] 하지만 그해 투수로써 4승 3패 war 0.9를 쌓았으니, 투수 알바를 합친다면 오히려 mvp는 적절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거기다가 해태는 전체 3위로써 하위권이 아니었다. 워낙 삼성이 압도적이어서 그렇지.[16] 1991년에는 KBO 리그에서 개인 통산 1,000 안타를 기록한 첫 선수가 되었다.[17] 이 7년간의 개인 통산 기록은 김성한이, 세이버메트릭스 기준의 질적 지수는 이만수가 더 앞선다.[18] 특히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시즌 30홈런은 김성한이 가장 먼저 달성하였다.[19] 단 88~90년에는 각각 16도루 5실패로 성공률 76%, 32도루 8실패로 성공률 80%, 14도루 4실패로 성공률 77%를 기록하며 매우 좋은 주루센스를 보여주었다. 나머지 시즌의 성공률이 60% 중반대에서 형성되는 바람에 통산 기록을 많이 까먹은 케이스. 단 김성한의 현역 시절은 무관심 도루를 기록하지 않고 도루로 전부 기록하던 시절이었기에 도루 기록이 다소 부풀려져 있음은 감안해야 한다. 그럼에도 최전성기 기준으로는 충분히 위협적인 주자였음은 분명한 사실.[20] 1989년 26홈런 32도루를 기록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야구전문지 <주간야구>만이 대서특필했을 뿐, 그 외에는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21] 그럼에도 그의 인기는 상당했다. 일단 해태 창단 당시에 활동하던 선수는 동기인 김종모와 김성한 단 두명 밖에 남지 않았고, 홈런타자인 김성한의 인기는 김종모보다도 훨씬 강했다. 그 해 올스타전에서 팬투표로 베스트10에 올랐고, 홈런을 날리는 활약으로 미스터 올스타를 수상했다.[22] 은퇴 시점 이만수에 이어 역대 2위였으나 2년 후 장종훈한테 그 자리를 내주고 만다.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통산 홈런 1위였으며, 나지완이 2020년에 넘기기까지 25년간 깨지지 않았다.[23] 이것도 12년 후인 2007년에 장성호가 팀 기록을 갱신한다.[24] 2004년 이종범이 팀 기록을 갱신한다[25] 당시 안타, 루타, 득점, 2루타 부분에서 역대 1위에 올라 있었다.[26] 다만 당시 선동열은 주니치 드래곤즈에 임대된 상태였고 주니치 선수로 은퇴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을 것이다.[27] 통산 31개[28] 주니치 드래곤즈치바 롯데 마린스의 방한 시험경기, 3차례의 경기를 가졌었는데, 1,2차전은 LG 트윈스롯데 자이언츠 연합팀이 주니치, 치바 롯데 연합팀과 친선경기 가진바 있었다. 1차전 사직 경기는 2:2로 무승부였고, 2차전 잠실 경기는 승리하였다. 김성한 선수가 속한 해태 타이거즈는 1991시즌 한국시리즈 우승팀 자격으로써 단독으로 일본팀과 3차전 경기를 치렀다. 그 경기는 일본팀이 승리하였다.[29] 더 놀라운 것은 전반기에만 96이닝을 던졌다.[30] 이때는 80경기만 했기 때문에 규정이닝을 넘긴 수치이다.[31] 3선발승으로 김용남 이상윤(모두 6선발승)에 이어 팀내 선발승 3위[32] 김성한의 야구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단한 기록인데 당시 10승과 2.88은 해태 팀내에서 평균자책점 1위에 다승 1위였다. 더군다나 그때 80경기 체제에 타자로서도 13홈런 10도루면 오늘날은 거의 2~3점대 평균자책점에 15승, 20-20클럽을 달성한 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20-20 클럽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상황에서 제일 먼저 달성한 것도 김성한이었다.[33] 오승환도 10-10-10 클럽을 달성했지만 이쪽은 승리, 홀드, 세이브라는 순수 투수 관련 기록이다.[34] 이는 故 최동원의 한국시리즈 4승과 더불어 절대 안깨질 기록으로 김성한의 10 - 10 -10 -3할 타율로 꼽힌다.[35] 한때 타격폼을 백인천의 타격폼으로 바꿔보려고 했었다. 이걸 본 김응용 감독은 "그냥 니 식대로 해. 백인천이 네가 될 수 없듯 너도 백인천이 될 수는 없어."라는 말로 타격폼 수정을 막았다.[36] 이 일화는 레전드 카툰을 그렸던 만화가 최훈이 취재해서 쓴 이야기다.[37] 같은 지역 방송인인 지정남과 함께 KBS광주 열린마당의 고정 패널로 수년 넘게 출연하고 있다.[38] 지금 기아 상황이 답이 없긴 해도, 김감독 초기도 상황은 비슷했다.[39] 다만 이당 시엔 젊은 선수인 김상훈, 홍세완, 장성호, 이현곤, 정성훈,김진우 등이 있었다는것. 과연 김감독이 와도 잘 할지 의문.[40] 지금은 '시안'으로 상호를 변경했다.[41] 참고로, 스승인 김응용 감독 역시 문재인 지지를 선언했다.[42] 여기에 감독으로 해태출신이 같이 온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LG의 금지어이순철이나 대학야구 감독으로서 호성적을 거두던 장채근, 이건열이 온다는 썰이 돌았다.[43] 참석자로 선동열, 방수원, 이종범, 이순철, 김성한, 한대화, 류중일, 조계현, 이승엽, 이호준, 장채근, 장성호, 이대진, 송유석, 양준혁, 이강철, 강영식, 양승호, 김인식, 강병철 등이 있었다.[44] 공교롭게도 김성한이 마지막으로 지도자로 있었던 구단이 한화다.[45] 시구자는 임택 광주광역시 동구청장[46] 더군다나 군대 이상으로 군기가 빡셌던 해태였음을 생각해 보라. 군대에서도 이등병이 침상에 누워서 TV를 본다면 고참들이 어떻게 대하겠는지 상상에 맡긴다. 그렇게 군대같던 해태에서 새파란 신입이 평상에 눕는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47] 그 악습을 버리지 못한 채 감독이 되어 결국 선수의 머리통을 배트로 후려치는 짓을 저지르고야 말았다.[48] 임요환과 2004년 경기를 가졌던 그 사람. CCM 가수로 RickyP와 같이 앨범에 참여한 적도 있다.[49] 인터뷰에서 어디인지는 밝히지 않았다.[50] 그리고 훗날 군산상고 야구부는 김성한 이후 10년 뒤에 같은 해태 타이거즈의 선수 최해식에게도 똑같은 강권을 하게된다. 최해식은 고려대를 진학하고 싶었으나 동기생을 받아준다는 건국대로 가게됐다. 비슷하게, 광주일고 출신인 이종범연세대, 고려대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으나 혼자만 입학하는 조건이어서 동기생 패키지 입학을 제의한 건국대 유니폼을 입었다. 이런 속칭 '끼워팔기'는 야구선수들의 대학 진학이 당연시되던 90년대까지만 해도 일종의 관행과 같은 일이었다.[51] 김준환, 김성한, 조충열이 주인공이다. 김성한이 술회하기를 호랑이와의 눈싸움은 동계훈련이 아니었고 취재기자들의 요청으로 선수들을 광주 사직동물원으로 데리고 간 다음 눈싸움 장면을 연출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