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가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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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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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시초와 설명
3. 학계의 공식적인 입장
4. 결론
5.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오기섭이 한때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던 김일성일제강점기 저명한 항일 투사의 이름을 도용한 가짜라고 주장한 설. 1 2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의 평양 연설 이후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특히 군사정권의 반공 통치가 강화된 60년말부터 반공 성향의 학자나 언론인 등에 의해 퍼지기 시작해, 심지어 당시의 아동/청소년용 반공 교육서적이나 반공정신 함양매체(동화, 소설, 만화 등)에서 버젓히 통용될 정도로 한때 남한 사회에서 꽤 널리 통용되었으나, 더 이상의 증언이나 자료가 없어서 현재는 하나의 학설 이상의 진전은 없는 상태이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는데, 이 '가짜설'은 남한 우익진영에서만 제기된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익에 의해 체계적으로 퍼뜨려진 것도 아닌, 그가 평양에서 처음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북한 주민들과 남한의 조선공산당 그리고 우익 진영 등에서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던 것이 그 기원이다. 만일 이 설이 우익이 김일성을 비난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박헌영여운형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굳이 가짜론을 만들 필요도 없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설의 악용은 어디까지나 '원래 있던 것'을 원용한 것이다.


2. 시초와 설명[편집]


김일성 가짜설의 시작은 김일성이 백발노장이라는 소문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국내에 거주하던 사람들에게 김일성의 항일투쟁 소문이 퍼지면서 시작된 것인데, 당시 한국 사람들의 기본적인 정서는 장군이라고 하면 백발이 성성한 지식과 내공충만한 중년 이후의 남정네를 먼저 떠올리곤 했다(이는 과거 구한말 때 교육된 위인전의 영향이 크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김일성도 을지문덕이나 강감찬 같은 이미지[1]의 장군이라고 믿은 것이다.[2]

그러나 1930년대 당시 항일 투쟁은 장기화되면서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항일 투쟁을 지속하던 노령의 인사들은 여러 이유로 세상을 떠나는 상황이었고,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협력을 얻어 항일 투쟁을 전개하려는 젊은 층들이 항일 무장 투쟁의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의거해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거나, 아니면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항일단체에 대규모로 참여해서 활동했다. 그런데 1930년대 초반 갑자기 '중국공산당 내에 조선인 간첩이 있다'라는 괴소문이 대거 유포되면서[3] 공산당 내 조선인 간부가 대숙청(+ '일제의 간첩' 조선인 자체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소위 민생단 사건이 발생하였다. 중국공산당 만주 지역간부들에 의한 조선인 숙청은 근 3년간 지속되면서 만주에서 중국인들과 함께 항일 투쟁을 전개하던 조선인 간부들과 인텔리들의 상당수가 사라졌다. 이 사건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중년 이상 고령의 간부들은 싸그리 희생당하고 중국과 합작해 활동하던 조선인 부대들이 내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인 숙청을 과오라고 규정한 중국공산당 중앙지도부의 지시에 따라서 상황은 종결되었고, 남아있는 조선인들을 달래기 위해서 살아남은 20~30대의 젊은 층들을 초고속으로 진급시키게 된다. 만주 공산당 내 조선인 세력 사이에서 젊은 층이 지도부로 등장하게 된 것인데, 당시 30대 초반인 김책, 최용건과 20대 후반의 김일성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로 조선 내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것이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1930~40년대 만주에서의 항일 투쟁은 상황이 매우 열악해서 노령의 인사들이 나이와 건강상 버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1930년대 일제가 만주를 침탈하고 만주국을 세운 이례로 거점없이 떠돌아 다니며 노숙도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특히 겨울 혹한의 만주에서는 노령의 독립운동가가 현장에서 활약할 수 있는곳이 아니었다. 실제로 무장독립운동가들의 수명을 보면 미국, 유럽같으면 2차대전기에 고급지휘관으로 활동하고 1950~60년대까지는 족히 살아있었을 1880~90년대생들이 1930~40년대쯤에 병사, 전사, 암살 등으로 속절없이 죽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인 지청천 장군이 광복 후 50년대까지도 정치인으로 활동한 것이 매우 특이한 사례일 정도다.

그리고 해방 이후 김일성이 평양에서 한 최초의 연설(1945년 10월 14일) 때 평양시민들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김일성 장군의 이미지와 다른 젊은 김일성을 만나게 되었고(당시 김일성은 33세), 이런 이유로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의혹이 남한에서 공식적으로 가짜론으로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흔히들 70년대를 그 기원으로 보지만 김일성가짜설은 40년대 후반 대북 전단이나 대북 선전에도 버젓히 나오던 이야기. 다만 후술하게 될 김일성 가짜설의 정교한 이론화는 유신정권 이후로 시작되었다고 보면 된다. 사실 60년대 문교부(현 교육부) 공식 서적에는 버젓히 "김일성은 약간의 반일활동은 했지만 그 범위는 크지 않았다라고 적혀 있기도 했다.

사실 해방을 전후해서 김일성이 과연 이전부터 알려져 있던 독립운동가 김일성인가에 대한 회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계속 일고 있었다고 하다. 일단 이름 한자부터 달랐다(또 다른 독립운동가 김일성은 金一聖, 북한의 김일성은 金日成). 해방 직후 미 군정도 김일성(김성주)은 그 이전의 독립운동가인 '김일성'(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 활동하던 김경천이 대표적)이 존재했고 김일성(김성주)은 그의 이름을 빌려서 사용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4]

다만 김일성이 아주 유명한 인물도 아니고 김일성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일본경찰의 첩보에 의존하였고 그 첩보는 프락치가 없는 이상 대부분 용의자 심문이나 조선인들에 의한 소문에 의존했기 때문에 일본의 초기자료는 한자가 다른 김일성이나 오타로 김일선까지 나왔고 그것이 김성주의 가명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후대의 연구자들로서는 이것이 서로 다른 사람인지, 동일인인지 어려운 일. 다만 김일성이 소련으로 넘어갈 즈음에는 일본 경찰도 김일성의 정체에 대해서 확실히 알았었고 이때의 자료를 보면 우리가 아는 북한의 김일성임이 확실히 파악된다.[5]

이러한 김일성 가짜론의 정교한 이론은 재일교포 학자 허동찬의 이론인데, 허동찬은 일제 심문조서등에 나오는 한문 다른 김일성과 김일센 등에 따라서 적어도 두명 정도의 김일성이 있었다고 봤지만 앞서 말한대로 30년대 후반의 일제 첩보 자료 연구 결과 자신의 이론을 철회하고 김일성이 진짜임을 인정한다.[6]

가장 유명한 가짜설은 이명영[7]의 이론인데, 이 사람은 김일성이 3인(혹은 5인 이상)있다는 이론이다. 유명한 보천보 대전투를 이끈 사람은 1대 노인 김일성이고 이 사람은 전사했으며[8] 소련에서 파견된 좀 젊은 2대 김일성이 1대 김일성의 이름을 이었고, 이 사람은 소련에 돌아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사망, 1대와 2대의 이름과 업적을 김성주가 날로먹고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명영은 심지어 이런 1대, 2대를 제외하고 다른 김일성도 있었다고 해서 일명 김일성 열전을 쓰기도 했다. 이종석의 말대로 김일성 열전에 대한 연구는 곧 김일성의 업적을 빛내는 역설을 가져왔다는 것.

그러나 김일성(김성주)이 과거부터 있던 다른 사람인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빌렸다고 해도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이 김일성(김성주)이라는 것은 현재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당시 항일 무장 투쟁 지도자들이 자신과 부대의 안전을 위해서 가명을 사용하는 것은 무척 흔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김일성 가짜설의 근거중 하나로 묘사된 김경천장군의 경천 역시 지청천 신동천과 함께 천자돌림의 가명이었으며 김구나 이육사라든지 웬만한 독립운동가들은 가명을 썼으며 일본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곳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 아닌 이상 거의 가명일 수 밖에 없었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의 경우, 김산은 가명이고 본명은 '장지락'이었다. 항일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기록을 뒤져서 가명으로 진명을 알아내는 게 일이다. 가명이라는 이유로 가짜다는 말은 조악한 근거이며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도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라는 것은 의외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란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 북한의 영화 조선의 별에서도 엄연히 엄친아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개명해서 무장투쟁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북한의 교과서에도 김일성의 어린시절 이름이 김성주라는 서술이 나온다.

그리고 저우바오중을 비롯해서 김일성과 같이 항일투쟁을 한 중국인 동료들이 존재한다는게 밝혀짐으로써 학계에서 김일성가짜설이 사라지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김일성이 가짜라면 이 들의 존재를 설명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학계의 공식적인 입장[편집]


일단 반공적인 의미에서 김일성 가짜설이 널리 퍼지고 교육된 만큼 아직도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김일성 가짜설이 널리 퍼져 있기는 하나, 학계에서는 폐기된 학설이다.[9]

학계의 대세는 김일성이 독립 운동을 한 건 명백한 사실이지만 보천보 전투를 빼면 크게 내세울 만한 공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천보 전투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듯 그 전과가 크지 않더라도, 이미 이전의 주요 항일 투쟁 거점에 만주국이 자리잡고 항일 투쟁의 소식조차 뜸하던 때에 항일 무장 세력의 국내 진입이 이루어져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아직도 만주에선 항일독립군들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의의인 것이다. 더불어 김일성이 이 보천보 전투로 한반도 전역에서 큰 유명세를 얻었다는게 이후 현대사에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킨다.[10] 소군정이 김일성을 북의 최고지도자로 선택한 이유도 자신들의 영향력하에 있으면서도[11] 항일운동으로 조선인들에게 내세울만한 명성을 얻었던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김일성 진짜설을 주장하면 상당히 위험했던 것도 사실, 종북주의자들의 저서가 아니더라도 김일성 진짜 독립운동가설이 적혀있으면 처벌을 받았는데 70~80년대 악명높은 금서인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회고록에도 다음과 같이 엄연히 김일성은 진짜임이 적혀 있었다.

"김일성에 대해서도 한마디 안 할 수 없다. 전직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내가 이런 발언을 한다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로써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이 비록 당장은 충격파를 가져올 수 있으나 장구한 민족사의 체계로 보아서는 오히려 바람직할 수도 있다. 나는 진실을 말한다면 해방 전에 25세 약관의 김일성이 항일 무장게릴라전을 지휘하였고 한때는 중국공산당 만주지역의 동북항일군 소속으로 압록강 및 두만강연안에서 항일운동에 헌신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규모가 작기는 하였으나 그가 함남의 길주, 명천 등지의 남삼군에 상당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보천보전투를 지휘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김일성은 완전한 '가짜'라는 대목이 이승만 정권 이래 한국의 반공전선 교육의 가운데 토막이 돼오고 있었다. 이것은 공화당 정권에 들어서서 더욱 강화되었다. 아마도 친일을 했던 이승만 휘하의 대부분 관리들과, 친일 정도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군장교가 되어 독립군을 때려잡았던 경력이 있는 박정희에게는 김일성의 그만한 경력도 묵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재직 중에 김일성의 경력을 인정해주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식의 보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반공교육 체제를 확립하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김일성이가 완전 '가짜'가 아니고 사실은 '진짜'라고 교정하는데 있어서는 중앙정보부장인 나도 겁을 먹고 조심을 해야 할 만큼 한국의 반공문화는 무서운 존재였다. 한국에서 용공이란 딱지는 천형만큼 잔인한 저주였다."


물론 군사정권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저자 자신은 반공주의자라는 걸 강조하지만서도.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놀랐던 부분.

북한 망명 정치인 임은[12]이 일본에서 출간한 북조선 왕조성립비사는 김일성 정권의 피의 숙청을 처절하게 고발하고 한국전쟁은 북한이 주도했다는 걸 강조한 책임에도 김일성 가짜설을 부정하고 김일성 보천보 전투 주도설을 주장했다. 그는 물론 자신이 듣고, 조사한 바-주로 관계자들의 전언을 근거로 책을 썼는데, 책의 요지는 제목에 나오듯이 김일성 왕조를 무너뜨리자는 신념이라고 서술했다. 그는 북한 김일성의 경력이 대단히 부풀려졌다고 하나, 보천보의 김일성은 북한의 김일성이 맞다는 주장을 폈다. 대한민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는 황당한 거짓말도 있지만, 당시 일본에서 이 책이 출판되자마자 한국의 신문들은 여러 날에 걸쳐서 경쟁적으로 번역 연재하기도 했으며. 그리고 자연스럽게 번역되어 출간되어 현재 2가지 판본이 돌아다니고 있다.

즉 대부분의 근현대사 전공자들의 연구와 당시 사람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항일유격전을 지휘한 것도 맞고, 보천보 전투를 주도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외에 북한이 주장하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는 대부분 과대포장이거나 아예 날조이다. 심지어 김일성의 자서전과도 충돌하는 내용이 허다하다.

한편 정자환 가톨릭대학교 전 교수가 쓴, 《북한에게 남한은 무엇인가》에서 저자는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은 북한의 김일성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정자환 교수는 학부에선 영문학을 전공했고, 이후 하와이 대학에서 유학한후 가톨릭대학교 사회학 교수로 정년 퇴임한 분으로 여성노동자에 대한 연구와 진보적 사회활동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근현대사 전공자는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4. 결론[편집]


오늘날 수많은 관련 문헌 자료가 공개되어 더 이상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항일운동에 참여한 적이 없다는 가짜설은 설 땅을 잃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은 북한의 주장대로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있었다는 것도 이미 20여 년 전에 밝혀졌다. 김일성 가짜설이나 김일성의 독자적 항일무장투쟁설 모두 남북대립의 조건 속에서 정치논리에 의해 왜곡되거나 신화화된 주장임이 객관적 사실 확인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일단 드러난 객관적 사실은 북한의 역사서술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자료들이 풍부히 공개된 뒤에 작성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보면, 김일성 스스로 자신이 동북항일연군 소속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오늘날 역사학계의 논의는 김일성의 항일운동 여부 자체가 아니라, 동북항일연군 소속 한인들이 펼친 활동을 한국의 민족운동사 전체의 흐름 속에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의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다.

김성보, 북한의 역사 1: 건국과 인민민주주의의 경험 1945~1960, 역사비평사, 2011, p.35~36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김일성의 독립운동 행적은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더 명확한 증거자료가 나오기 전까지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독립운동 행적에는 분명히 과장이 존재한다. 또한 그가 해방 이전 국내외로 유명했던 독립운동가라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가 저지른 전쟁독재 행각들이 독립운동 행적 하나 때문에 정당화 될 수는 없다.

김일성 가짜설의 진위 문제는 사상 문제가 아니라 사실관계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김일성이 항일운동을 했다는 것은 그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긍정적인 영향을 전혀 끼치지는 못한다. 당대의 조선인들이 김일성을 높게 평가했던것은 김일성이 일제가 자행했던 탄압에 맞서면서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이었는데 정작 김일성은 권력에 오른 뒤에 그 명성을 악용하여 6.25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 책임에 대해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면서 권력강화에 몰두했고, 그러한 권력을 강화해서 아들에게 권력을 몰려준 작자이니 굳이 긍정적으로 평가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독립운동가로써 휼륭한 업적을 세웠다해도 독재자로 타락한 사례는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위낙에 흔해빠진 일이라 특이한 일도 아니다.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인정한다고 해서 해방 이후 그가 저지른 수많은 과오와 실책, 악행들까지 인정하는 건 결코 아니다. 그 둘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북한을 사실상의 사이비 종교(주체사상)가 지배하는 봉건세습왕조, 사실상 동물농장 + 1984 실사판으로 만든 것은 엄연히 비판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또한 김일성 가짜설은 예측하지 못한 후폭풍을 가지고 오기도 했는데, 80년대 지하 유인물과 해외 저작물로 김일성 가짜설이 가짜라는걸 알게된 대학생들은 극도의 불신에 빠져 그동안 받아왔던 반공교육 전체를 부정하게 되고, 이는 한 동안 주사파서울대를 제외한 모든 주요 대학 학생회를 장악할 정도로 크게 세를 떨치는데 기여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더라도 허위에 기초한 이론은 배제해야 된다는걸 알 수 있다.

다만 아직도 김일성 가짜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북한이나 김일성을 철저히 부정하려는 극단적인 정치적 편향성에서 비롯된 편파적인 정보 습득의 결과다. 쉽게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하자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북한군 특수부대나 간첩이 개입했다는 허구적인 음모론을 계속 주장하는 사람들이 민주당 혹은 민주당의 주요 지지 기반인 전라도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심으로 인해 민주당이 한국 민주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내세우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자체의 정당성 자체를 아예 철저히 부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부러 계속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5.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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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지문덕은 수나라와의 전쟁 이외의 기록이 남은 게 없어서 나이를 전혀 추정해볼 수 없지만, 강감찬은 귀주대첩 때 일흔이 넘었다.[2] 이 점은 일본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가 지은 <북한 현대사>에도 언급되어 있다[3] 이것은 항일무장투쟁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한 일제의 공작으로 추정된다.[4] 이 설은 해외까지 알려져서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만화 《동아총통특무대》에서는 소련NKVD(내무인민위원회)가 라브렌티 베리야의 명을 받고 진짜 김일성을 처형하고 김성주를 다음 김일성으로 세운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5] 중국과 일본은 한국인 인명을 한자로 적다보니 이런 식의 오기는 지금도 터진다. 곧바로 한자 표기를 알 수 있으면 괜찮은데 소리로만 이름을 듣고 기록하려면 답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리설주의 등장 직후 중국 측에서 그녀의 한자 표기를 몰라 임시방편으로 여러 표기를 동원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나마 일본은 불완전하나마 가나 표기라도 있지만 중국은 정말 답이 없는 수준. 사실 가나 표기도 완전하지는 않아서, 김정은의 등장 초기 알려진 정보가 많지 않아, 김정일의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많은 부분을 의지했는데 가나 및 일본어 발음 표기 문제로 “김정은”이 아닌 “김정운”으로 오해된 사례도 있다. 일본어로 운이나 은이나 둘 다 “ウン”이기 때문. 그렇기에 순우리말 이름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일, 중, 대만과 교류가 많을 경우에는 일부러 한자 표기를 만들어 쓰기도 한다.[6] 물론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30년대 자료를 고의로 무시한다.[7] 전 성균관대 정치학교수. 그의 아들 역시 모 대학 교수로 재직중인데 가끔 수업중에 김일성 가짜설의 근거를 보여주기도 한다 카더라.[8] 일본군의 특성인 전과 부풀리기의 일환으로 윌리엄 홀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모두 몇 번씩 전사한 경험이 있다. 김일성의 경우도 마찬가지.[9] 다만 앞서 말한 이명영 전 성균관대 교수는 1994년 김일성 사망 후에도 월간조선을 통해서 끝없이 가짜 김일성론을 주장했다.[10]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 겸 정찰국장 리상조는 보천보 전투 이후 중공군으로부터 김일성 부대를 도와주라는 지시를 받고 김일성을 찾았으나 김일성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리상조는 오히려 김일성 가짜설을 부정한 인물이다. 리상조는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에 참가한 것은 확실하다고 말하며, 그를 만나지 못한 이유를 '진지를 사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관련 기사(1989년 경향신문)[11] 김일성은 해방 당시 소련군 대위였다.[12]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서는 이 사람을 중앙정보부에서 만든 가상의 인물이라고 하는데, 소련으로 망명한 북한 유학생 허웅배가 리상조와 함께 쓴 필명이다. 임은이란 이름은 필명으로, 허웅배가 경상북도 선산군 임은리에서 필명을 따왔다고 언급하였다. 허웅배는 비록 임은리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그의 선대 본거지인 이곳을 그리워하며 필명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장군의 손자로. 모스크바 유학중 망명을 결심해 친구 셋이서 각자 이름을 이진, 한진, 허진으로 개명하고 함께 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