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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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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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3대 중앙정보부장
김재춘
金在春|Kim Jae-choon


파일:C97598F8-BF7F-4C4B-9DA7-56A6D8D13D53.jpg

출생
1927년 6월 4일
경기도 김포군 (現 경기도 김포시)
사망
2014년 1월 2일 (향년 86세)
서울특별시
본관
의성 김씨

인산(仁山)
재임기간
제12대 육군방첩부대장
1961년 6월 10일 ~ 1962년 7월 12일
제3대 중앙정보부장
1963년 2월 21일 ~ 1963년 7월 11일
제9대 무임소 장관
1963년 7월 23일1963년 9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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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김희방
자녀
슬하 5남 1녀
학력
통위부 보병학교 (졸업)
육군기갑학교 (졸업)
육군대학 (졸업)
건국대학교 (경제학 / 학사)
건국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석사·박사)
종교
불교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8, 9
경력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육군 방첩부대장
국가재건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
제3대 중앙정보부장
제9대 무임소 장관
자유민주당 최고위원
한국사회연구소 이사장
한국배합사료협회 회장
국민대학교 경제학과 초빙교수
한국산업기술개발연구소 소장
제8대 국회의원 (김포군·강화군)
한국삼업조합연합회 회장
제9대 국회의원 (고양군·김포군·강화군)
한국축산단체연합회 회장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전임교수
자유민주연합 상임고문
군사 경력
임관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5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44년 ~ 1963년
최종 계급
소장 (대한민국 육군)
주요 보직
육군 제6군관구사령부 참모장
참전
6.25 전쟁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5. 선거 이력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군인, 중앙정보부장, 정치인, 국회의원.


2. 생애[편집]


1927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 5기로 입교('47년)해 이듬해인 48년 졸업 후 소위로 임관했다. 그가 생도였을 당시 박정희는 중대장 겸 교관으로서 김재춘과 인연을 맺었다. 6.25 때도 9사단에서 박정희의 부하로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1960년 4.19 당시 김재춘은 6관구(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으로 당시 이승만의 경무대로부터 시위 무력 진압 명령을 받는다. 고민에 빠진 그는 당시 군수사령부 사령관 박정희에게 연락해 조언을 구했다.

김재춘 참모장: "사령관님, 실탄 지급해서 출동하라는 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박정희 사령관: "야! 그건 절대 안 돼! 실탄을 지급하는 순간 참변이야!"

직후 항명죄로 체포돼 형의 언도를 기다리는 동안 이승만이 하야했다.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그는 6관구 참모장에 복귀해 박정희와 술잔을 기울이며 더욱 관계를 돈독히 해나갔다.

1961년 제6군관구사령부(현 수도군단) 참모장으로서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다. 반란군은 제6군관구사령부를 지휘소로 정해두었는데 김재춘은 5.16 군사정변 당일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를 받고 쿠데타 지휘부를 체포하러 출동한 헌병차감 이광선 대령 이하 헌병대 병력을 설득하여 체포를 저지하고 반란군으로 끌어들이는 공로를 세웠다[1]. 그 덕분에 5.16은 무혈 쿠데타가 되었다.[2]

김재춘은 육군사관학교 5기생의 리더로서 김종필, 김형욱을 위시한 육사 8기생과 권력 다툼을 벌였다. 이후 방첩부대장을 역임한 후 곧바로 1계급 진급하여 소장으로 예편한 김재춘은 1963년 제3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했다.

김재춘의 위세는 2인자 김종필도 몇 수는 접어야 할 정도였으며 심지어 박정희 의장마저 한 수 접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박정희와 혁명 동지들이 혁명 공약을 지켜 군으로 돌아가는 것이 대의명분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실제로 육해공 참모총장들과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등 장성들을 규합해 박정희에게 대통령 출마 포기를 협박해서 일시적으로나마 군정 연장을 포기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낸다. 너무나 정론이다 보니 박정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여러 조건을 붙인 상태에서 군 복귀 성명까지 발표해야 했다.

중앙정보부장에 오르자 중정을 만든 김종필과 그의 수족을 모두 자른다. 직후 박정희와 독대를 해 비선 조직 재건동지회를 몰래 만든 책임과 창당 비자금 마련을 위한 증권파동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김종필외유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김종필도 군말없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청구동 자택에서 칩거한다.

김재춘은 중정부장을 맡은 와중에 박정희로부터 이상한 명을 받는다. 가칭 '범 국민당'을 조직하는 김재순박준규(1925)를 도와 창당 작업을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선거 컨설턴트 이재만이란 사람에게 '군정을 종식시키고 대통령 출마를 하라'는 조언을 받은 상태였다. 이재만은 공화당은 그대로 두고 제 2의 여당을 만들어 재야 세력 중 중진들이나 새 인물들을 포섭해 곧 있을 대통령 선거에 이용하라는 조언을 했다. 사실 김재춘은 박정희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중이었는데 박정희가 신당 발기 준비를 김재춘에게 맡겨 슬슬 중정부장을 내려놓게 하려는 면도 있었다.

범국민당 창당의 산파 역을 맡게 된 그는 그러나 당시 재야 세력들의 창당 붐으로 범국민당 인사 영입은 물론 창당 준비에 상당한 차질을 빚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원래의 공화당은 윤치영을 당의장으로 영입하는 등 안좋은 여론 속에서도 착착 나아가고 있었다. 박정희는 대통령 출마를 하면서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정계 구축을 완성했고 범국민당과 김재춘은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

그즈음 심란한 김재춘에게 더욱 심란한 일이 벌어졌다. 소위 '7.6 친위 쿠데타 미수 사건('63)'이라 명명된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영남 출신 육사 11기들이 부패한 혁명위원들을 몰아내고 박정희 의장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려는 시도였다. 김재춘은 그들을 달래고 모르는 척 봐줬는데 이는 16년 뒤 12.12 군사반란이라는 어마어마한 대형 산불로 재발하였다. 이 때 사건을 담당한 방첩대장이 정승화 준장(육사 5기)으로, 16년 후인 79년 육군참모총장 재직 중 12.12 군사반란으로 체포돼, 모진 고문 및 17계급 강등과 불명예 제대라는 인격 모독을 당해야 했다.[3]

김재춘은 끝내 중앙정보부장직을 내려놓고 범국민당을 공화당과 백지 합당시키라는 박정희의 명령에 거역한다. 끝내 자유민주당(1963)을 창당시켜 송요찬 전 내각수석[4]을 대통령 후보로 내려고 했다. 결국은 후임 중정부장인 김형욱에게 납치돼 이후락에게 외국으로 나가라는 굴욕적인 말을 듣고 자유민주당의 모든 당직을 내려놓고 브라질로 떠난다. 재밌는 건 이 때 정적 김종필과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만나 마치 절친처럼 회포를 나누기도 했다. 김종필 역시 브라질에 유배를 와있는 실정이었다. 물론 김재춘 때문에 거기 있는 것이었지만.

이후 김재춘은 권력의 핵심에서 사라진다.

1964년 6.3 항쟁에 연루돼 당국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민중당 후보로 경기도 김포군-강화군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됐으나 결국 1972년 5월 집권 여당인 민주공화당으로 당적을 바꿨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유탁과 민주공화당 복수 공천을 받아 경기도 김포군-강화군-고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오홍석 후보와 민주공화당 김유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0년 전두환 정부가 출범하자 정치 규제를 당하다가 1984년 해금되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의 군 보좌역으로 지지를 했는데 이 일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과천시의 농지를 정부과천청사 부지로 강제로 뺏기다시피 하는 굴욕을 당했다.

2014년 1월 2일 향년 86세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


3. 여담[편집]


  • 육군사관학교 5기 출신으로 정승화,채명신과 동기이다.
  • 9사단 장교로서 6.25에 참전했으며 무려 현리 전투 패배에서 살아돌아온 사람 중 하나이다. 단,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당시 사단장과 불화로 대구 육군군사학교 교장으로 좌천돼 그 때만은 함께 하진 않았다.
  • 노태우가 그의 전속부관을 한 적이 있다.
  • 손녀사위가 한진그룹 회장인 조원태이다.
  • 1994년 MBC 정치드라마 제3공화국에 출연해, 군사정변 초반의 여러 정황들을 직접 증언했다.
  • 헌병차감 이광선 대령과 헌병대 병력은 김재춘과 반란 관련 인물들을 체포하라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을 받고 제6군관구사령부에 도착하고도 김재춘의 설득에 넘어가 오히려 쿠데타에 가담했다. 사실 김재춘은 원래 인간 관계가 폭넓고 원만해서 군대 내부에 적이 없다시피 했는지라 반란군과 진압군의 중재가 가능한 인물이었다. 만일 김재춘이 지략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쿠데타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거나 실패했을 확률이 컸다.
  • 김형욱중앙정보부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혁명 당일 김재춘은 신들린 연기로 이광선 대령의 헌병 병력을 "전군이 들고 일어나서 참가하는 혁명이다. 괜히 대들었다가 죽지 말고 같이 동참해 달라"며 설득하였고 그래도 불안했는지 부대 내 제사공장으로 유인 후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려는 놈들은 즉시 갈겨버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 때 김형욱은 김재춘이 확실히 보통은 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5]
  • 중앙정보부장 시절 JP의 친구이자 국가재건최고회의 경제고문이었던 김용태의 아내를 중앙정보부로 연행해 고문을 하다 유산에 이르게 한 적 있다. 김용태의 회고에 의하면 훗날 자신이 어느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는데 어떤 남자가 이발소로 들어오다 황급히 나가길래 이발사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바로 김재춘 이었다고 한다.
  • 아호인 '인산'에서 이름을 따 고향 김포와 서울 강서구 일대에 대규모 농장, 목장, 사료 공장 등을 갖춘 '인산농원'이라는 농기업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박정희가 미사일 등 신무기 연구 개발 기지를 과천에 짓기 위해 김재춘으로 하여금 인산농원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땅을 구입하도록 했다. 국가재정으로 직접 땅을 사면 미국의 의심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 그러나 신무기 기지 계획이 대전으로 바뀌면서 김재춘은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봤다. 이를 보전하기 위해 서울시로 하여금 과천 부지를 사들이도록 해 서울대공원을 지었다.
  •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진위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8년 6월의 역대 정보부장/안기부장 모임에서의 일.

김종필, 김재춘, 김계원, 장세동 씨 등 10여 명이 둘러앉았다. 전두환 씨는 불참.

국회가 화제가 되고 얘기는 80년 광주 문제로 옮아갔다.

장세동(전두환 정권의 국가안전기획부장 경호실장) 씨가 광주 사태는 진주민란이나 홍경래의 난 같은 것이라는 취지로 80년 5월의 광주 상황을 설명해갔다. 그러자 김재춘 씨(3代 정보부장)가 무뚝뚝하고 직선적인 성격 그대로 "무슨 그따위 얘기를 아직도 하고 있는 거요.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보로 아는가. 당신네들이 총칼 들고 정권 잡아가지고 저지른 짓을 무슨 홍경래 반란이라고?" 하며 내쏘았다. 그 자리에서 어떤 분은 웃으며 일어서면서 "국회에서 특위 조사할 것도 없이 결론이 이미 나와 버렸군" 하여 웃고 헤어졌다. (당시의 한 참석 인사)

동아일보 1992년 10월 10일자 남산의 부장들(김충식 글) 112회 - <전두환 '대권 각본' 밀어붙이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선여부
비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김포군-강화군)

[[민중당(1967년)|
]]

33,874 (45.01%)
당선(1위)
초선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김포군-강화군-고양군)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48,532 (39.11%)
당선(1위)
재선[6]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김포군-강화군-고양군)

[[무소속|
무소속
]]

23,797 (16.20%)
낙선(3위)



6. 둘러보기[편집]







[1] 그냥 공로도 아니고 쿠데타는 보통 사상자가 최소 수십에서 수백은 무조건 발생하는데 양측 피해자가 아예 전무한건 전적으로 김재춘이 말빨로 체포 진압 병력들을 설득했던게 매우 컸다.[2] 물론 미군의 개입을 막았던 윤보선 대통령이나 곳곳에서 다시 한 번의 동족 상잔은 피하자는 여러 사람들의 덕이 더 컸다.[3] 육사 개교 후 최초의 정규 4년제 교육을 받은 육사 11기는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육사 1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육사 선배들을 무시했던 반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하는 친위 그룹으로서 자리매김했다. 박 대통령이 금일봉도 많이 내렸다고. 육사 11기가 군내 최대 사조직이 되고 실전 경험을 갖춘 갑종간부후보생 출신 간부들도 하나둘 군을 떠나면서 12.12 군사반란의 토대는 착착 놓여지고 있었다.[4] 당시 송요찬은 김형욱 중정부장에게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구속된 상태였다. 송요찬은 소위 4대 의혹 사건 때 재무부 장관 천병규와 싸우고 사표를 던진 이후 박정희 욕을 계속 해왔었다.[5] 이후 제6군관구사령관 서종철과 헌병감 조흥만이 들이닥치자 김재춘은 안전 장치가 풀린 권총을 들이대며 위협했고 투스타와 원스타였던 둘이 기세에 눌려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쿠데타에 가담했다고 한다.[6] 민주공화당 김유탁 후보와 동반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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