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국(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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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국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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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국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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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8.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9.svg파일:KIA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10.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6
1997
2009

파일: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2002

파일:KIA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11.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 코치

2017

파일:WBSC 프리미어 12 엠블럼.svg
2019 프리미어 12
은메달(코치)

2019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2 KBO 리그 도루왕


김종국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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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
KIA 타이거즈 등번호 16번

문희수
(1990~1995)

김종국
(1996~2010)


김희걸
(2011~2012.6.21.)
KIA 타이거즈 등번호 83번
정인교
(2006~2007)

김종국
(2011~2012)


홍우태
(2013~2018)
KIA 타이거즈 등번호 77번
이강철
(2008~2012)

김종국
(2013~2014)


김기태
(2015~2019)
KIA 타이거즈 등번호 74번
김실
(2014)

김종국
(2015~)


현역


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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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23 KIA 프로필 김종국.png

KIA 타이거즈 No.74 [[감독#s-2|

]]
김종국
金鍾國 | Kim Jongkook
[1]
출생
1973년 9월 14일 (50세)
광주광역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광주서림초 - 무등중 - 광주일고[2] - 고려대 (체육교육학, 92 / 학사)
포지션
2루수[3], 유격수[4]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6년 1차 지명 (해태)
소속팀
해태-KIA 타이거즈 (1996~2010)
지도자
KIA 타이거즈 2군 수비코치 (2011)
KIA 타이거즈 2군 작전·주루코치 (2012)[5]
KIA 타이거즈 1군 작전·주루코치 (2012~2021)[6]
KIA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 (2021)[7]
KIA 타이거즈 감독 (2022~)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작전코치 (2019~2021)
계약
2022 - 2024 / 10억 5,000만원[8]
연봉
2023 / 2억 5,000만원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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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내 최세훈(1978년생), 슬하 1남 1녀
응원가
함중아 - 내게도 사랑이[1][2]

1. 개요
3. 플레이 스타일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야구인. 現 KIA 타이거즈의 제10대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2루수.

해태-KIA 타이거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원클럽맨이며 대표적인 로컬 보이다.[9]

대표적인 별명으로는 동명이인 연예인 김종국의 히트곡에서 따온 한 남자와 고글을 쓴 모습이 오리와 비슷하다는 데서 딴 고글 덕[10], 종국성[11]이 있다.


2. 선수 경력[편집]




3. 플레이 스타일[편집]


통산 타율이 .247에 시즌 최고 타율이 .287일 정도로 타격이 좋은 편이 아닌 전형적인 수비형 내야수였으나, 수비 실력이 워낙 뛰어나 기본기가 확실히 잡혀있었으면서도 안타가 될 법한 공을 신기에 가깝도록 쉽게 잡아내는 빼어난 수비를 보여준 2루수였다. 아마 시절부터 수비력 좋은 유격수로 유명했고, 프로에서도 무리없는 실력이었으나 해태 시절엔 이종범이 있었고, 이종범이 떠나고 유격수에 도전했으나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그가 부상에서 복귀했을 땐, 신예 홍세완[12]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수비에 있어서는 워낙 안정적이고 완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13] 국제용 2루수라는 별명도 붙었고 실제로도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다. 그 뿐 아니라 작전 수행능력과 도루 능력만 보면 당시 리그에서 손꼽힐 정도였으며, 커리어 하이였던 2002년에는 도루 50개로 1위를 기록하면서 정수근, 이종범, 전준호와의 경쟁에서 타이틀을 거머쥔 적도 있었다.[14] 통산 도루 성공률도 79.4%로 높은 편이다. 이종범과 함께 2000년대 초반 KIA 타이거즈테이블 세터를 이뤘으며[15], 2000년대 KIA 타이거즈의 센터라인을 굳건히 지켜주었다.


4. 지도자 경력[편집]



김종국의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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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담[편집]


  • 타이거즈 역대 감독 중 현역 선수로서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유니폼을 동시에 입어본[16] 최초의 감독이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에는 2001년 7월 29일 해태라는 이름의 마지막 경기[17]의 1번 타자[18]였다.

  • 이외에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팀 선수 출신 중 처음으로 프로 팀 감독을 달았다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당시 대표팀의 주전 2루수였기 때문. 감독 선임 직후 시점에서는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였으나, 2022 시즌 후 같이 WBC 엔트리에 있었던 이승엽박진만이 각각 두산과 삼성의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유일한 사례는 아니게 됐다.

  • 외국인 선수들에게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광주일고 시절과 해태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던 KIA 인수 초창기에는 군기반장이었으며[19] 주장을 한 적도 있다. 광주일고 후배인 이호준[20] 불타는 그라운드에서 특히 김종국에게 많이 맞았다고 털어놓았다.[21][22] 선수 생활 말년에도 그 기질이 있었는지 말년에 잠깐 선수 생활을 함께했던 최경환박명환의 유튜브 채널인 박명환야구TV에 나와 관련 이야기를 풀었는데, 당시에도 김종국이 후배들의 기강을 굉장히 잘 잡았다라고 회상했다. 출처 본인이 갸티비에서 말하길 자신은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프로 선수면 프로 선수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지론으로 기강을 잡았다고 밝혔다.

  • 별명으로는 동명이인 가수 김종국이 부른 노래 제목에서 유래한 '한남자'가 있으며 잘할 때는 '한남신'으로 업그레이드 되기도 했다. 2009년에는 플레이가 달라졌다고 해서 '딴남자'라고도 불렸는데, 타격 센스가 나아졌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크지만, 바로 전년도에 1년에 에러 2개[23] 밖에 안 냈던 선수가 한 경기에서 에러 2개를 저질러 악마와 거래를 해서 타격과 수비를 바꿨다는 말이 나온데서 나온 별명이다. 이외에도 트레이드 마크인 돌출된 입과 고글 때문에 '제트오리', '고글덕' 등의 별명도 있었으며, 국제전에서 특히 좋은 활약을 보였기에 '국제용 2루수'로도 불렸다. 이래저래 야구에서 지명타자도 있듯이 지명수비제도가 있었다면 이종열, 김재걸과 더불어 주가가 더 높았을 선수였다.

파일:external/www.tigers.co.kr/1183.jpg

  • 원래는 안경을 쓰고 플레이했으나, 은퇴 후 코치가 된 뒤로는 김종국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안경이 사라졌다. 라식 수술을 받은 뒤로 안경과 작별했다고. 다만 감독 취임 이후에는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고 마스크까지 같이 착용해서 경기 중에는 아예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리고 있다.

  • 김종국의 선수 시절 등번호였던 16번은 김종국의 은퇴 후, 김희걸이 가져갔으나[24] 2012년 시즌 중반에 삼성과 이뤄진 트레이드로 이적하면서 온 조영훈이 16번을 달게 되었다. 조영훈이 안경을 쓰고 16번을 단 모습이 김종국과 유사해 일부 KIA팬들은 흥분하였다.

파일:attachment/one_guy.png

그리고 두 사람을 같이 세우고 보니 좀 닮았다. 물론 조영훈은 왼손잡이 좌투좌타, 김종국은 오른손잡이 우투우타이기 때문에 전혀 다르기는 하지만 조영훈이 2012 시즌 후 NC 다이노스의 특별지명으로 이적하면서 이러한 모습을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

  • 앞서 나왔던 것처럼 곱상했던 20대 시절엔 해태 시절이나 KIA나 아저씨 팬 비중이 높은 타이거즈 선수치고 여성 팬이 많은 편이었다. 은퇴한 후에도 종국 코치를 연호하는 여성 팬들이 보이는 편이다. 홍세완이 김종국의 여성 팬과 결혼했고 본인도 이것을 뿌듯하게 생각한 듯. 여기

  • 마구마구에서는 3슬롯에 하이점프캐치를 단 준수한 레전드 카드로, 타이거즈 계열 세트덱에서는 필수 카드였"지만" 1999 홍현우 엘리트 카드 베테랑이 가능해지면서 290만 거니를 호가하던 카드에서 50~60만 거니 선에 거래되는 쩌리로 전락했다. 물론 지금도 간간히 쓰고 있기는 하지만...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언급하기를, 수비력은 최고였으나 타력이 좋지 않아 본인이 타격코치 시절 열정적으로 가르쳐서 2할 1푼대의 타율은 2할 7푼대로 끌어올렸다고 한다. 김성한이 나가자마자 타율이 원상복귀되었다는 것이 함정.

  • 선동열, 김기태에 이어 타이거즈 역대 감독 중 3번째로 팀의 연고지인 광주광역시 출신이다.[25] 공교롭게도 선동열, 김기태, 김종국 모두 광주일고 출신들이다.

  • LG 트윈스류지현과 함께 역대 프로야구를 통틀어서 순혈성 끝판왕이다. 연고지인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지역 최고 명문 야구부인 광주일고를 나왔다. 또한, 제2의 이종범으로 기대를 받으며 최고 명문팀이던 해태 타이거즈에 1차지명되었고, 김응용 감독의 지도 하에 1996년 한국시리즈, 1997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하며 왕조의 명맥을 이어가는데 힘을 더했다. 이후 모기업이 KIA로 바뀐 후에도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하였고, 2010년 은퇴 후 2011년부터 2021년까지 쉼 없이 코치 생활을 하였으며, 2017년엔 코치로도 2017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한다. 그리고 2022년에는 팀의 감독에까지 취임하며 순혈성에 정점을 찍었다. 고려대학교 재학 4년을 제외하면 모든 야구 인생을 광주와 KIA에서 보낸 셈. 그리고 애초에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모교 고려대학교가 구단 내에서는 순혈라인이다.[26] 정리하자면 선수 시절에 팀에 기여한 바가 큰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으로 모기업이 바뀌기 전후의 우승을 모두 경험하였고, 팀의 왕조의 막바지를 함께하였으며, 코치 시절에도 우승을 경험하였다. 더불어 코치 시절까지 이적이 없는 원클럽맨에다 연고지역 출신에 지역 최고 명문 출신의 로컬 보이까지 해당한다.

  • 비슷한 시기에 단장으로 함께 부임한 장정석과는 1973년생 동갑이며 1996년 프로 데뷔 동기이기도 하다. 2002년 장정석이 현대에서 KIA로 트레이드된 후 3시즌간 KIA에서 두 사람이 한솥밥을 먹었다. 장정석은 김종국을 차기 감독으로 낙점하며 "선수 시절 3년 동안 함께 해보니 결단력도 있고, 잘못하면 따끔하게 혼내는데도 후배들이 진심으로 따르는 모습을 보았다. 실질적인 리더였다"고 회상했다.[27]

  • 감독 생활 중 2022 시즌에 선수 기용에 아쉬움을 보이며 KIA 팬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다.

  • 광주일고 동기 박재홍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으나 둘의 사이는 세간의 평과 달리 좋은 편이다.이태일 기자 블로그 스톡킹에 박재홍이 출연할 당시 박재홍은 김종국의 수비력이 탄탄했다고 칭찬했고 반대로 김종국은 '박재홍은 공,수,주 3면 모두 완벽했고 그야말로 야구천재'였다고 밝혔다.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박경태가 술회하기를 박경태가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하고 합숙소를 무단 이탈하자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었다고 한다.


6. 관련 문서[편집]


[1] WBSC 공식 등록명[2] 67회 졸업[3] 1359경기 중 1024경기 출전하였으며, 커리어하이였던 2002년엔 골든글러브 수상과 국가대표 발탁의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주 포지션은 2루수였지만, 뛰어난 수비력을 바탕으로 주전 유격수로 활약한 적도 있으며, 1루수와 3루수로 출전한 적도 있다. 주로 키스톤 콤비의 역할을 맡았지만, 내야 전 포지션이 가능했다.[4] 아마 시절 유격수로 유명했으며, 프로에서도 이종범이 떠난 유격수 자리에 정착할 뻔했지만 부상으로 무산되었고, 부상에서 복귀했을 땐, 신예 홍세완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 다시 2루로 정착하였다. 홍세완이 부상으로 이탈이 잦아진 2004년부터 유격수 출전이 늘어났고, 2007년까지 2루수 못지않게 유격수로 출전하였다. 통산 284경기 출전.[5] ~6월 11일[6] 2012년 6월 12일~2021년 5월 19일[7] 5월 20일~[8] 계약금 3억원 / 연봉 총액 7억 5,000만원[9] 광주에서 나고 자라 광주일고를 졸업한 성골 중의 성골이다. 게다가 해태 시절부터 타이거즈에 몸담고 있으면서 은퇴 이후에도 단 한 번도 구단을 떠나지 않고 2011 시즌부터 공백 없이 코치직을 맡았다.[10] 엉덩이가 커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다. #[11] 수비력이 좋아 2루 자리에 성벽이 있는 것 같다는 의미의 '종국성', 이 별명은 서남 방언인 '성'과 발음이 같아 종국이 형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한다.[12] 매해 두자릿수 홈런에 유격수 최초 100타점을 기록할 정도로 전도유망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아쉽게 활약 기간이 짧았다.[13] 총 14시즌 동안 통산 실책이 단 112개.[14] 경쟁자였던 저 3명이 모두 KBO 역사에 남을 대도임을 기억하자.[15] 데뷔하고 몇년간은 주로 9번타자로 나섰으나 부상을 털어내고 기량이 오른 후, 01년에 복귀한 이종범을 받쳐주는 당시 유행하던 작전 수행과 빠른 발 스타일의 2번타자 역할을 수행해냈다. 특히 2002년도엔 그의 실력이 정점에 올라 50도루를 기록하며 도루왕의 타이틀을 얻게 되고, 그해 2루수 골든글러브까지 거머쥐었다.[16] 타이거즈 선수 출신 감독으로는 김성한, 서정환, 선동열에 이어 4번째지만 앞의 셋은 1980~1990년대 해태 타이거즈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다.[17] vs 삼성 라이온즈전(광주)[18]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라인업은 1번 김종국-2번 최익성-3번 장성호-4번 산토스-5번 신동주-6번 이동수-7번 김창희-8번 김상훈-9번 홍세완 이었다.[19] 해태 시절까지 포함하면 김일권, 김성한, 이순철, 송유석, 이호성 순으로 군기반장 계보가 이어진다.[20] 고교 기수로 보면 이호준이 2년 후배지만 해태 입단 연번으로 치면 1994년에 입단한 이호준이 1996년에 입단한 김종국보다 더 먼저다. 이호준은 고졸로 입단했고 김종국은 대졸로 입단했기 때문. 그러나 프로 경력이 아닌 나이로 선후배를 가르는 야구계 특성 때문에 이호준은 김종국을 깍듯이 선배로 모셨다고 한다.[21] 이 때 이호준이 한 말은 "내가 1학년 때였는데 3학년 형들은 타격감이 떨어질 때면 여지없이 1학년 후배들을 인간 타이어로 삼아서 방망이로 때렸다. 참고로 그때 3학년이 재홍이 형이었다. 펀치력이 셌던 재홍이 형에게 맞을 때는 엉덩이가 들썩거렸다"고 하니까 옆에서 스윙 연습하던 박재홍이 갑자기 째려보며 "야! 누가 그러면 진짜 내가 때린 줄 알잖아~"하고 푸념섞인 원망을 했다. 그러자 당황한 이호준이 타겟을 바꿔 "재홍이 형한테는 한 대도 안 맞았다"면서 "종국이 형한테는 많이 맞았지"라고 말을 바꾼다.[22] 하지만 프로에 와서는 성격을 바꾼 듯, 점잖은 학구파 선수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래서 2009년 한국시리즈 때 사람들이 놀란 것이다.[23] 참고로 이 기록은 역대 2루수 1시즌 최소 실책 타이기록이다.[24] 참고로 이 번호를 탐내던 또 다른 KIA 선수는 짐짝.[25] 옛 광역 연고권인 전라도 전체로 역대 타이거즈 감독의 출신지 범위를 넓히면 해태 원년 멤버였던 전북 군산 출신 김성한 전 감독도 포함된다.[26] 과거 2014 시즌 종료 후 임기만료로 물러날 줄 알았던 선동열 감독의 재계약이 이뤄졌을 때 정의선 당시 부회장 지시로 맺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유 중 하나가 선동열이 고대 출신 선배이기에 밀어줬다는 사유가 정설로 받아들여졌다.[27] 08~09년간 같이 선수생활을 하던 최경환에 따르면, 평소엔 조용하나 분위기를 잡을 땐 확실히 하는 스타일의 군기반장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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