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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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6대-7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충남 부여군)
선거구 개편
이석기[A]
이종순[B]

제6-7대
김종필


제8-9대
김종익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충남 제5선거구)[C]
제9대
김옥선
김종익

제10대
김종필
[D]
조중연

제11대
이상익
조중연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충남 부여군)
선거구 개편
이상익[E]
김옥선[E]

제13-15대
김종필


제16대
김학원







대한민국 제11·31대 국무총리
김종필
金鍾泌 | Kim Jong-pil[1]


파일:JP.jpg

출생
1926년 1월 7일[2]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3]
사망
2018년 6월 23일 (향년 92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학교병원
사저
서울특별시 중구 청구동 다산로 142 - 15 [4]
묘소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5]
본관
김해 김씨[6]

운정(雲庭)
재임기간
초대 중앙정보부장
1961년 5월 20일 ~ 1963년 1월 6일
제11대 국무총리 (박정희 정부)
1971년 6월 4일 ~ 1975년 12월 18일
제31대 국무총리 (국민의 정부)
1998년 8월 18일[7] ~ 2000년 1월 12일
서명
파일:김종필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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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김상배, 어머니 이정훈[1]
형제자매
형 김종호, 김종익, 김종락, 김종소
남동생 김종관
배우자
박영옥
자녀
장녀 김예리[2], 장남 김진[3]
손주
김인영, 김지영, 김미영[4]
학력
부여공립보통학교 (졸업)
공주고등보통학교 (졸업)
주오대학 (예비과정 / 중퇴)
대전사범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 / 중퇴)
미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육군보병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아오야마가쿠인대학 (명예 / 박사)
종교
불교개신교 (감리회)[5]
신체
170cm, 75kg, A형[6]
의원 선수
9
의원 대수
6, 7, 8, 9, 10, 13, 14, 15, 16
약칭
JP[7]
취미
서예, 수채화, 검도, 골프, 미식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8기)[8]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49년 5월 ~ 1963년 1월
최종 계급
준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중앙정보부장
주요 보직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장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정보처장
병과
보병
참전
6.25 전쟁

1. 개요
2. 약력
8. 기타
9. 어록[8]
10. 소속 정당
11. 선거 이력
12. 저서
13. 대중매체에서
1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군인 출신 정치인, 제11·31대 국무총리.

6·7·8·9·10·13·14·15·16국회의원이자, 민주공화당 제4대, 신민주공화당 초대, 자유민주연합 제1·2대 총재를 맡는 등 삼김시대의 주역이자[9] 한 시대를 풍미한 정치계의 거물이었다.


2. 약력[편집]


  • 1961.5. 초대 중앙정보부장 (박정희 정부 / 부총리급)
  • 1963.12. 민주공화당 의장
  • 1963.12.17. ~ 1967.6.30. 제6대 국회의원 (초선 / 충청남도 제5선거구 / 민주공화당)
  • 1967.7.1. ~ 1971.6.30. 제7대 국회의원 (재선 / 충청남도 제5선거구 / 민주공화당)
  • 1971.6.4. ~ 1975.12.18. 제11대 국무총리 (박정희 정부)
  • 1971.7.1. ~ 1972.10.17. 제8대 국회의원 (3선 / 전국구 / 민주공화당)
  • 1972.10. 비상국무회의 부의장[10]
  • 1973.3.12. ~ 1979.3.11. 제9대 국회의원 (4선 / 전국구 / 유신정우회)
  • 1979.3.12 ~ 1980.7.4. 제10대 국회의원 (5선 / 충청남도 제5선거구 / 민주공화당)
  • 1979.11. 민주공화당 총재
  • 1987.10. 신민주공화당 총재
  • 1987.10. 제13대 대통령 선거 신민주공화당 후보
  • 1988.5.30. ~ 1992.5.29. 제13대 국회의원 (6선 / 충청남도 부여군 / 신민주공화당)
  • 1990.5.9. ~ 1992.8.28. 민주자유당 최고위원
  • 1992.5.30. ~ 1996.5.29.제14대 국회의원 (7선 / 충청남도 부여군 / 민주자유당)
  • 1992.8.28. ~ 1995.1.20.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11]
  • 1995.3. 자유민주연합 총재
  • 1996.5.30. ~ 2000.5.29. 제15대 국회의원 (8선 / 충청남도 부여군 / 자유민주연합)
  • 1997. 제15대 대통령 선거 자유민주연합 후보[12] (사퇴)
  • 1998.3.3. ~ 1998.8.17. 국무총리 서리
  • 1998.8.18. ~ 2000.1.12. 제31대 국무총리 (국민의 정부)
  • 2000.5.30. ~ 2004.5.29. 제16대 국회의원 (9선[13] / 전국구 1번 / 자유민주연합)
  • 2001.10. 자유민주연합 명예총재
  • 2007. 한나라당 명예상임고문
  • 2012. 새누리당 명예상임고문


3.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종필/일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사건사고 및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종필/사건사고 및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종필/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종필/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청구동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청구동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기타[편집]


  •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남북통일주한미군 주둔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대해 통일 뒤 땅의 소유권은 북한 주민이 우선이며 남북통일 이후 미군의 한반도 주둔에 대해 주한미군을 외세라 논하며 우리에게 도움이 되거나 되지않는 상황에 따라 철수까지 가능하다는 견해를 보였다.[14]

  •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는 IMF를 대체할 아시아통화기금을 제안하기도 했다.[15] 당시 정부의 입장도 아시아통화기금을 김종필 국무총리의 사견으로 여겼으나 아시아통화기금에 대해 현상황에서는 한중일 금융협력이 최우선이나 장기적으로는 검토할만하다는 입장을 밝혔다.[16]


  • 5.16 군사정변의 경우, 김종필이 전체적인 계획을 짜고 이를 박정희가 실행하도록 밀어주었다는 게 정설이다. 이후 민주공화당 창당 과정은 전적으로 김종필의 설계대로 흘러갔다. 박정희는 굳이 여당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일본식 정치에 매료를 느낀 김종필은 창당 과정에서 일본의 사례를 최대한 참고했다고 한다.

  •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는 박정희의 뒤를 이어서 직선 대통령이 될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1980년 이후로 대권에서 멀어지면서 이를 포기하고 끊임없이 의원내각제를 추진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의원 내각제를 추진한 까닭은 김종필의 지역 기반인 충청도가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지역이기 때문에 소수의 국회의원으로도 캐스팅 보트를 쥘 수 있는 의원 내각제 쪽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17] 그와 연대한 다른 정치 세력 모두 자신이 당선된 후 내각제 개헌을 약속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최근 들어 현행 대통령제의 개선 방향으로 대통령제에 내각제를 결합한 이원 집정부제나 순수 의원 내각제가 언급되고 있는데 김종필로서는 소회가 남다를 듯. 장도리 같은 만평에서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 매번 김종필을 속이고 뒤통수를 때리는 일을 묘사하기도 했다. 부인 박영옥의 묘를 찾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의원 내각제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18]

  • 12.12 군사반란 주도자들에 따르면 처음엔 김종필을 전면에 내세워 정국을 안정시킬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의 봄 당시 양김에게 세력이 밀리던 김종필이 박정희와 유신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자, 전두환 등 하나회 세력이 이를 패륜적으로 받아들이며 다른 대안을 찾다가 결국 본인들이 직접 정권을 잡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한다. 김종필은 박정희의 견제로 군 영향력을 상실한지 오래되어 군부에서 지지세력이 없었다.

  • 흔히 3김이라 불린 세 거물 정치인 중 김영삼, 김대중에 차례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김종필도 대통령 한 번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여긴 이들도 있으나 이러한 김종필 대망론에 회의적이었던 이들은 김종필 대망론 자체가 실제의 정치적 상황을 기반으로 제기된 것이 아니라 삼김시대라는 조어에 의한 착시 현상을 통해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삼김시대라는 표현 못지 않게 양김시대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된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애초에 김종필 자체가 김대중이나 김영삼과 동등한 지지 기반이나 영향력을 가진 대선 후보였던 적이 없다는 것. 실제로 1노 3김이 대격돌하여 전체 표의 99.8%를 나눠가졌던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보더라도 김종필은 득표율 8.1%로 득표율 0.2%의 신정일 후보를 제외하면 꼴찌나 다름없는 4위를 기록했고 이는 각각 28%, 27%의 득표율을 기록한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1/3 수준에 불과했다. 더구나 양김의 경우 민주화 운동 지도자라는 공통점에 기반하여 단일화를 거쳐 지지 기반을 통합할 경우 안정적인 1위도 가능할 수 있다는 기대를 받았던 데 비해 김종필에게는 그런 가능성조차 없었다.[19] 김종필 자신도 이런 현실을 인식하여 13대 대선 이후부터는 직접적인 대선 도전을 포기하고 캐스팅 보터로써 입지를 다지는 데 매진하였으나 결국 자민련(과 그 후계격인 정당들)이 사실상 몰락하여 거대 양당에 흡수되고 말았다는 점까지 생각해야 한다.[20] 즉, 3명의 대권 수권 후보를 묶어 3김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수권 후보였던 양김과 수권 후보는 못 되지만 캐스팅 보터의 역할을 하던 김종필을 묶어 3김이라고 부르다 보니 같이 묶여 불리는 김종필까지도 나머지 둘과 같은 주요 수권 후보라는 착시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 실질적인 권력에서야 당연히 박정희 정부의 2인자였던 김종필의 권력이 박정희 정부로부터 탄압당한 김대중이나 김영삼보다 훨씬 강했을 것이고 5.16 군사정변을 통해 단숨에 정권의 핵심에 진입한 김종필이 3김 중에서 가장 먼저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YS, DJ와 달리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다. 1960년대만 해도 김영삼, 김대중보다 인지도는 훨씬 높은 편이었고 1970년대 국무총리 사임 이후 존재감이 많이 희석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박정희의 잠재적 후계자나 잠재적 라이벌로 보일 정도로 영향력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YS와 DJ 역시 야당의 주요 정치인으로 성장했는데, 김대중은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와 경쟁했고 김영삼은 그 제7대 대선의 대선 후보 경선에서 김대중과 결선 투표까지 가는 팽팽한 대결을 벌인 바 있어서 제3공화국 후반기 시점부터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야당의 지도자급 인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21] 그런 상황에서 10.26 사건 이후 박정희의 뒤를 이어 민주공화당 총재로 올랐으며 제10대 대통령 선거 출마와 함께 포스트 박정희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 전두환 정부 시절에 김종필은 강제 정계 은퇴를 당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은둔 생활을 보냈는데 이에 반해서 1983년 김영삼은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조직하고 단식 투쟁을 전개한 바 있으며 1985년에는 이민우, 김대중 등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여 정권에 대항하였다. 김종필이 여당도 아닌 야당도 아닌 상황에서 민주화 운동을 치열하게 해온 김영삼, 김대중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이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삼김시대가 확실하게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시기에 김영삼, 김대중 양김은 여전히 치열하게 민주화 운동을 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낸 반면 김종필은 미국에 있었으며 어쩌면 자신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민주화 참여를 거부하면서 3김이기는 하나 레벨이 떨어지는 급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김대중은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국내 활동은 제한적이고 전면에서 활동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1985년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1986년 신한민주당 상임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했으며 그의 계파라고 할 수 있는 동교동계 정치인들은 현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 박정희와는 정말 친했고 군 복무도 같이 했으며 심지어는 박정희의 셋째 형인 박상희의 장녀 박영옥과 결혼했다.[22] 그리고 상당한 애처가였고 아내가 세상을 뜨자 정말 크게 슬퍼했다. 그리고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같이 한 자리에 묻히겠다고 하면서 현충원 안장을 거부하기도 했다.[23]

  • 2015년 당시 일본 관방장관이었던 스가 요시히데에 대해 "하는 말을 들어봐도 한국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고 이해 속에서 양국간 우의를 다져야겠다는 마음씨가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했고 "예전에 상대했던 일본 정치인들은 그래도 도량이 있었다."며 "스가 요시히데는 위안부가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데 참 이해하기 곤란하다."고 지적했고 "짓밟힌 위안부 할머니들이 있는데 일본 입장이 어떻든 간에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

  • 이회창의 선배 격인 인물로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사람이라는 매우 적절한 별명을 갖고 있다. 다만 이회창과의 관계는 냉랭했던 편. 김종필은 9선 국회의원에, 대한민국 행정부 2인자인 국무총리를 2번 역임했으며[24], 군사정권 시절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25]초대 중앙정보부장까지 했던 것을 감안하면 대통령이 아닌 사람으로는 최고 권력을 휘둘러 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26]

  • 일본어에 능하여 일어로 연설이나 인터뷰를 소화한 적도 많았다.[27] 한 예로 한일 수교 40주년을 맞아 2005년에 일본 NHK에서 제작한 한일 협약에 대한 다큐멘터리출연일본어로 인터뷰한 사례가 있다.[28]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종필 총리 악기 원본.jpg}}} ||
  • 르네상스적 인간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인문적 소양이 풍부한 인물로 공직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히 그림을 그렸고[29] 만돌린, 아코디언 등을 연주할 줄 알았다. 그리고 대학생 시절 택시회사를 경영하며 직접 운행을 한 경력 덕분에 당시 고위층 중에서는 가장 운전을 잘 하는 인물이었다. 또한 패셔니스타[30]이자 미식가로 알려져 체스타필드 맞춤 양복을 입고 전국 각지의 맛집을 찾아다니며 식도락을 즐겼다. 미식가라고 해서 늘 사치스러운 산해진미를 고집한 것은 아니지만 1990년대 초반에 한끼에 20만 원어치의 중식 정찬을 즐겨 화제가 된 적도 있다. 그것도 여럿이서 먹은 거라 테이블당 계산 가격은 100만 원이 넘었고 술도 두주불사였는데 발렌타인 17년을 특히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또 아래 단락에도 나오지만 취미도 부유층 스포츠라는 인식이 있는 골프였다. 국민의 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재직하고 있던 시절 외환위기 상황이였음에도 꿋꿋하게 골프를 쳤는데 그럼에도 JP가 워낙 거물이다 보니 감히 시비를 거는 이가 없었다고.[31] 우스갯소리로 JP는 고급 취향 때문에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 한학에 조예가 있었으며, 심계도 깊은 김종필이었기 때문에, 취재하는 기자들이 JP의 말을 나름 유추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말을 운치있게 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의미가 여러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 또한 김종필의 멋들어진 휘호 정치와 예술에 대한 일가견 있는 면모가 중국 언론이나 정가에서 줄곧 호의적인 시선으로 다뤄졌기 때문에, 중화권 외교에도 도움이 되었다는 후문.

  • 조갑제의 증언에 의하면 JP는 만남이 기다려지는 인물로 사석에서 만났을 때 정치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는다고 한다.[32] 문화예술로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사람과의 관계가 아주 부드럽고 남에게 싫은 소리도 하지 않는 인물로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예술가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아무래도 일본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인지라 일본의 상류층 사회에서 중시하는 풍류(風流)[33]가 체화(體化)된 것 같다는 평이었다. 일례로 박관용 전(前) 국회의장은 야당 의원이던 시절 국무총리였던 JP에게 항의하러 찾아간 일이 있었는데 JP가 국무총리실 입구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다독거리는 바람에 끝내 항의를 못했던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 2015년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거물급 정치인답게 오자와 이치로를 비롯, 한일 양국의 정치 거물들로 구성된 조문객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2015년 4월에는 국정원이 정치에 개입하는 현상의 원인은 자체 수사권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자체 수사권을 검찰에 양도하고 대북정보 수집 등 정보기관 업무만 수행하도록 조직을 개편할 것을 제안했다.

  • 중앙일보에서 김종필 증언록《소이부답(笑而不答)》[34]이 연재되고 있다. 보러가기 만화도 있다.

  • 하하무한도전 짝꿍 특집에서 주장한 바에 의하면 독일에서 한창 잘 나가던 아버지가 귀국한 건 김종필이 불러서 온 것이라고 한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당시 박정희 정부에서 추진하던 해외 유학 간 인재들을 귀국시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게 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하동훈이 독일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으로 온 것 자체는 사실이다. 박명수가 하하에게 눈총을 준 뒤 하하를 애써 옹호했다가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35] 그 뒤로 무한도전에서 간간이 언급됐으며,[36] 박명수는 김종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김종필의 성대모사를 했다. 내각제, 3김정치는 이어져야 한다. 등의 발언을 하는데 워낙 성대모사를 잘하는데다가 말투가 웃겨서 유재석도 제지를 안하고 같이 웃는다.

  • 초록색을 좋아한다. 신민주공화당과 자유민주연합의 당 색이 초록색인 것도 이 때문이다.


  • 농협중앙회 한우개량사업소와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 김종필이 1968년 잠시 정계를 떠났을 당시, 정부로부터 현대의 서산시 지역의 토지를 불하받아서 삼화목장주식회사라는 대규모 축산 농장을 개발했다. 그런데 전두환 정부 시절 신군부에게 부정 축재라는 명목으로 재산을 강제 헌납할 때 이 농장도 포함된 것. 그리고 농장의 부지 및 설비는 한우 종자를 개량하는 한우개량사업소로 바뀌었다. 민주화 이후 소송을 통해 개인 재산으로 돌려받을 기회가 있었으나 포기했다.[37]

  • 골프를 매우 좋아했는데, 특이한 점이, 그 당시만 하더라도 국산 골프채의 성능 및 품질 수준은 조악했는데, 당시 김종필 총리는 드라이버 및 페어웨이 우드는 국산 랭스필드 제품만을 고집했다. 당시 랭스필드는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낮은 브랜드였는데, 김종필의 비서를 통해 국산 골프채 사용을 촉구하면서 자사의 최고급 골프채를 협찬한 후 한동안 "김종필 골프채"로 유명세를 떨쳤다. 아이러니한 것은 김종필은 혼마 회장으로부터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5스타 드라이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38] 아마도 당시 국산 장려 풍조에 동조하는 의미에서 사용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 * 또 1998년 7월 US 오픈에서 우승한 박세리를 격려하기 위해 그녀의 부모, 동료 프로골퍼들을 함께 삼청동 국무총리공관으로 초청해서 노고를 치하한 바 있다.

  • 축구계와도 의외로 인연이 있는데, 1966년도에 자신의 약칭을 따서 JP컵 쟁탈 한중일 축구대회라는[39] 축구대회를 만든 적도 있었다. 당시 한국, 대만, 일본의 실업축구 우승팀이 맞붙어서 치르는 대회였다. 하지만 JP의 약칭을 딴 축구대회에 대해 박정희가 불쾌감을 표시하는 바람에 대회는 딱 한 번만 개최되고 그 이후로 폐지됐다.

  • 김종필의 사망일인 2018년 6월 23일 서울특별시 공개 경쟁 임용 시험이 치러졌는데, 그 중 9급 한국사 과목에서 김종필에 관한 문제가 출제돼 우연의 일치로 화제가 되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위해 김종필이 먼저 일본에 특사로 파견됐는데 이를 이후락으로 바꾼 선지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시험을 끝내고 휴대폰을 켜니 김종필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있는 것을 보고 그날 시험 문제 때문인 줄 안 수험생들도 많았다고 한다.

  • 정부에서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기로 하였다. # 여담으로 무궁화 대훈장 추서란 오보가 퍼졌었는데, 이는 정진석 측에서 낸 이야기였다.

  • 평생의 한이 하나 있다. 박정희쿠데타대통령이 되었기에 김종필 본인은 깨끗하게 지도자가 되어 이를 만회하고 싶어했다.[44] 하지만 권위주의 정권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이기에 전직 장성급 장교라는 신분과 지역주의는 김종필에게 큰 핸디캡으로 작용했고, 대선 때마다 당락을 좌우하는 킹메이커로서의 영향력을 과시하기는 했으나 끝내 킹은 되지 못하고 80살을 넘겼다.
    • 이는 드라마《제5공화국》에서도 연출되는데, 6.29 선언 이후 정계에 복귀한 JP에게 김영삼, 김대중, 노태우 모두 접촉을 시도한다. YS를 대통령의 자리에 밀어올린 3당 합당도 처음부터 JP가 노태우에게 먼저 합당을 제의했고 이후 JP와 YS의 골프 회동 끝에 YS가 합당에 합류했으며 JP가 YS를 지원하기로 내부 의견을 모으면서 YS가 14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기존의 4당 체제에서 YS가 대통령이 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DJP 연합은 DJ가 직접 JP의 자택으로 찾아가 바닥에 주저앉아 한번만 도와달라고 호소하면서 성사되었으며 DJP 연합 덕분에 충청권의 표를 대거 흡수하고 그동안 DJ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사상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TK에서도 나름대로 선전했다. 15대 대선에서 이인제의 탈당은 의도와 다른 결과를 초래한 것이고[43] JP는 DJ의 당선 이후 헌정사에 있어서 손에 꼽히는 실세 총리로 활동했다. 물론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와 대선 주자로 격돌하던 인물인데 비해 김종필은 박정희 정권의 2인자 레벨이었기 때문에, 김종필 자신도 이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잘 알아서 80년대 말 정계에 복귀한 뒤로는 3당 합당이든 DJP 연합이든 캐스팅보터 이상의 역할을 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즉 변수로서는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 한계 역시 뚜렷했던 것. 그래서 후일 노무현에서 석패한 이회창 또한 김종필과 손을 잡았더라면 그 상징성이 보수 결집의 부스터 효과를 내어 무난하게 대선에서 승리했으리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하 문단에서 반론되었듯, 이는 드라마등 창작물의 연출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거나 역사적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김종필의 이미지를 지나치게 과장되게 받아들인 이들의 착각이다.
      • 이전 문단들에서도 여러 번 언급된 것처럼, 김종필이 한국 현대(특히 민주화 이후) 정치계를 대표하는 캐스팅보터이자 킹메이커라는 이미지를 가진 정치인인 것은 분명 사실이나, 그 위력에 대해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도 적절한 분석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6.29 선언 이후 김종필이 정계에 복귀하자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 모두 접촉을 시도하고, 3당 합당 역시 김종필이 먼저 노태우에게 제안한 것>은 드라마 제 5공화국의 연출이지 실제 역사가 아니고, 실제 역사에서 3당 합당은 여소야대 구도로 약해진 정국 장악력을 보충하기 위해 민정당이 먼저 야당 지도자들에게 합당을 제안한 것이었으며, 그 핵심 입안자는 박철언이라고 이미 알려져 있고, 제1 교섭 대상은 김대중, 그리고 김대중에게 거절당한 후 제2 교섭 대상은 김영삼이었다. 그 후 합당 전개 과정에서 김영삼과 김종필의 골프 회동이 4차례 있기는 하였으나, 이는 민정당(노태우)의 제안에 응한다는 전제로 그 조건을 교섭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14대 대선에서 김종필이 김영삼을 지원하기로 내부 의견을 모으면서 김영삼이 당선되었으며, 기존의 4당 체제에서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같은 부분은 거의 김종필을 띄워주기 위한 대체역사적 상상에 가까운 부분이라고 보아야 한다. 애초에 김영삼이 노태우의 합당 제의에 응하면서 4당 구도는 이미 깨진 것이다. 1강 2중 1약 구도에서 1강과 1중이 이미 손잡기로 결정한 마당에 "거기에 1약이 힘을 합쳐주지 않았다면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분석은 전혀 상식적이라 할 수 없으며 게다가 3당 합당 이후 민자당 내에서 김종필과 공화계의 행보 역시 김영삼 지지를 위해 내부 의견을 모은것과는 거리가 멀다. 민자당 내의 주도권 다툼은 주로 민정계와 민주계 사이에서 벌어졌고, 여기서는 사실상 깍두기 처지였던 공화계는 (노태우 이후 마땅한 대권주자가 없던) 민정계와 함께 내각제 개헌을 주장했지만 결국 김영삼과 민주계에게 밀려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던 것. 또한 그 직전 13대 대선의 예를 보더라도 김종필이 확보한 표는 4자 구도에서 어디로 움직여도 승패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 14대 대선의 상황에 비교해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김종필의 지지 기반은 이념적으로는 강경보수, 지역적으로는 충청 지역인데... 13대 대선 이후 민정당이 보수 주류의 입지를 차지했음이 명확해 진 상태에서 이미 민정당과 손잡은 김영삼에게 김종필이 몰아다 줄 수 있는 보수 표심이 그리 컸으리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며, 지역 표심을 따지더라도 14대 대선에서 지역 기반도 없던 정주영이 충청권에서 돌풍을 일으켰음을 생각하면 김종필은 충청 지역 표심조차도 철저히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즉, 14대 대선에서 김종필이 김영삼을 "권좌에 밀어올렸다."는 분석은 상당히 과장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거꾸로, <만약 김종필이 김영삼에 반대했다면, 김종필이 움직인 표를 받아 이득을 볼 수 있는 다른 후보가 있었는가?>를 생각하면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다. 김종필이 움직일 수 있는 표심의 최대치는 대략 그의 전성기였던 13대 대선 당시 자신이 직접 득표했던 8% 정도일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14대 대선에서 8% 이내의 표 이동으로 결과가 바뀔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바로 김대중의 당선, 즉 5년 빠른 DJP 연합 뿐이다.[40] 말하자면 대통령 직선제 이후 거대여당과 (사실상의) 유일 수권야당이라는 양당 구도가 고착되었고, 이 구도에서 군소 세력화된 김종필(및 김종필계-이후의 자민련)이 캐스팅보터로 기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김대중(및 민주당)과의 연합이었으며 이 외의 다른 상황에서는 캐스팅보트를 쥘 수 없었다는 것. 노련한 정치인인 김종필 자신도 이런 현실을 정확히 파악했기에 한때 상극이나 다름없던 김대중을 상대로 사실상 자신이 숙이고 들어가는 형태의 연합을 받아들인 것이다.
      • 16대 대선의 이회창-노무현 구도에서 이회창이 김종필과 손을 잡았더라면 낙승했을 것이라는 분석은 더욱 허망한 것이, 애초에 16대 대선은 보혁(保革) 대립 구도가 완전히 정착된 상태에서 차리리 노무현 / 권영길의 혁신 / 진보 진영 내 분열이 있었을 뿐 보수 결집은 이미 이뤄진 선거였다. 김종필에 대한 호감으로 표심에 영향을 받을만한 보수주의자가 이회창을 놔두고 노무현이나 권영길을 찍었을 가능성은 정말 희박해보이고, 그 외에 이 선거에서 이회창이 가져가지 못한 보수 진영 표는 이한동의 0.3% 뿐이다. 물론 이걸 다 결집시켰다고 가정하더라도 선거 결과는 뒤집히지 않는다. "노무현에서 석패한 이회창 또한 김종필과 손을 잡았더라면 그 상징성이 보수결집의 부스터 효과를 내어 무난하게 대선에서 승리했으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면, 그 사람들은 16대 대선 당시의 선거 결과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킹메이커 김종필이 지지하면 반드시 이긴다! 보수 결집으로 낙승한다!"는 자신의 믿음을 외치고 있는 것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물론 김종필이 16대 대선에 개입해 이회창을 지지했을 경우 선거 결과가 뒤집혔을 가능성을 가정해 보자면 소위 충청권 맹주로써 16대 대선의 승패를 가른 요충지 중 하나였던 충청 지역의 표심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제시해 볼 수 있기는 하다[41]. 하지만 이쯤 되면 위 문단에서 제시한 보수결집의 상징성과는 아득히 머나먼 차원의 문제가 된다. 결국 김종필이 킹메이커, 또는 게임 체인저로써의 영향력을 보여준 사례는 딱 한번, 15대 대선의 DJP 연합 뿐이었다. 물론 15대 대선의 수평적 정권 교체가 한국 정치사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김종필이 가진 캐스팅 보터로써의 의미를 결코 낮게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캐스팅 보터라는 것이 대개 그렇듯이, 그 영향력이란 이미 대등한 대결 구도가 팽팽하게 형성된 상황에서 승패의 추를 한 쪽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것이지 자신의 의도대로 구도를 짜 나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42] 이를 6공 초기 대통령들은 다 김종필이 만들어 준 것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일 수밖에 없다.


  •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 김종필이 사망한 이후 그에 대한 에피소드를 다룬 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 장례식으로 패러디했는데, 처음에 그가 맡았던 직위들, 뒤이어 그가 받은 훈장들과 그가 쌓은 업적들, 마지막 단계에서는 그가 쌓은 악업들을 소개한다. 해당 작품을 그리는 굽시니스트가 반보수 성향의 시사 만화가임을 생각하면 김종필을 나름 중립적으로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 국민의 정부 국무총리 시절 국무총리실에서 근무하던 공무원 한 명이 현재 모 대학 교수를 맡고 있는데, 이미지와는 다르게 굉장히 부드러웠고 농담도 자주 던졌다고 했다고 한다. 기분좋은 날에는 저녁을 사기도 했다는 듯.

  • 국민의 정부 국무총리 재임 시절인 1998년 12월 11일에 방영한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1937년 개구장이였던 부여보통학교 3학년생 시절 은사였던 이종순(李種順) (1916년 ~ 1972년) 선생님을 그리워하다가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 출연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1972년에 위암으로 사망해 60여년 만에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에 선생님의 장녀와 차녀를 만났다. 선생님이 작고한 1972년은 김종필이 박정희 정부에서 국무총리(1971년 ~ 1975년)를 지내던 시절인데, 이종순 선생님이 김종필을 기억하였고 똑똑한 학생이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김종필은 이종순 선생님을 흰 저고리, 까만 치마를 입고 흰 양말에 뾰족 구두를 신고 다녔던 선생님이 어린 시골 아이에게 선녀처럼 다가왔다고 기억하였다. 그래서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짓궂은 장난도 많이 친 개구쟁이였으며, 선생님 말씀이 "예절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잊지 못한다며 회고했다.

  • 자기 사람에 대한 신뢰가 커서 한 번 자기 사람으로 들이면 어지간해서는 내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1997년 대선 어간의 한 신문기사를 보면, 운전기사로 20년째 한 사람이 맡았는데, 그 사람이 나이가 들어 자신이 사임하겠다는 이야기가 실려있었을 정도. 실제로 JP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의 정치적 공과는 엇갈린 평이 나올지 몰라도 인간 김종필에 대한 평 자체는 좋았다고 한다.

  • 스스로 속에 구렁이가 몇 마리 들어 있다고 할 정도로 속내를 알기 어렵고 모략에 강한 인물이었다. 그의 증언록도 상당한 자기검열 거치고 썼기 때문에 읽을 때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운 편. #

  • 삼김 중 가족들의 존재감이 가장 옅은 인물이다. 삼김의 다른 구성원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배우자와 자녀들 모두 정치나 사회 분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 반면 김종필의 가족들은 눈에 띄는 대외 활동이 많지 않다. 아내인 박영옥 씨는 박정희의 조카이자 박근혜의 사촌언니이지만 평생 가정 주부로만 생활하면서 부부동반 행사에 남편과 함께 가끔 참석한 것을 제외하면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두 자녀 중 딸인 김예리 씨 역시 개인 사업을 할 뿐 눈에 띄는 대외 활동이 딱히 없다. 아들인 김진 씨는 아버지가 세운 운정장학회의 이사장으로 활동했고, 과테말라 출신 여성과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지만, 마찬가지로 정계에 관여하지 않고 있으며, 최근까지 국내에 홀로 있다가 2023년 12월 4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했다는 보도가 뒤늦게 나왔다.(#)

  • 언론은 유독 김종필을 그릴때 치아를 강조해서 앞니만 튀어나온 쥐 또는 토끼처럼 묘사하는 경향이 심하다. 과거 동아일보의 나대로 선생이 대표적이었고 한겨레 만평, 백무현 만평, 국민일보 서민호 만평 모두 김종필이라는 이미지를 하면 쭉 찢어진 실눈에 커다란 뻐드렁니 앞니로 쥐와 같이 묘사한다. 하지만, 김종필은 돌출입은 커녕 치아 자체가 가지런한 편이었고 잘생겼다.

  • 아침 식사를 커피 한 잔과 샌드위치로 때우는 독특한 식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조찬 행사 때도 카메라맨들이 없으면 커피 한 잔만 마시고 남은 시간은 말로 때웠다고.[45]

  • 평소 헬기를 자주 타고 다녔으며 담력이 강했다. 헬기에 오르는 모습도 잘생겼고 미소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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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은 시절 모습이 상당히 훈내나는 미남이었기에 여성들이 엄청나게 많이 따라다녔고 공부를 잘 해서 엄친아였다. 하지만 정치인이 된 이후에 너무 높은 위치에 있다보니 전 애인들이 김종필 국무총리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 젊은 시절 외모 덕에 여자관계가 꽤나 복잡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의외로 깨끗하다. 박정희, 정일권 등이 세컨드와 혼외자 논란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종필은 단 한번도 이러한 논란이 없었다.[46]

  • 김종필 국무총리의 사망에 이건희가 "큰 형님이셨는데, 마음이 아프다."하며 울었다고 한다.

  • 손주 바보였다. 그렇게 지인들하고 술자리를 갖는 것을 좋아했는데, 손주가 태어난 이후로는 그 술자리도 마다하고 바로 청구동 자택으로 가서 손주들 재롱 보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다.


9. 어록[47][편집]


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에게(Once, only once and for one only)

-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구절 인용[48]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49]

-

김종필 총재의 좌우명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한일 국교를 정상화시키겠다.

1963년. 일본과의 비밀협상이 국민적 반발에 직면하자


자의 반 타의 반

1963년 02월 25일, 4대 의혹 사건과 관련한 외유에 나서면서


파국 직전의 조국을 구하고 조국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5·16 혁명과 1963년 공화당 창당이라는 역사적 전기가 마련됐다

1987년 저서《새 역사의 고동》


권력을 장악한 1인자는 2인자를 소외하거나 무력화하고 싶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중략..)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넘겨야 한다. 참는다는 것은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게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게 진정한 인내다.[50]

신임 보안사령관전(前) 정권 부정부패의 "책임"을 진 김종필을 위로차 방문한 자리에서 조언을 구하자 건넨 말.[51]


5·16이 형님이고 5·17이 아우라고 한다면 나는 고약한 아우를 둔 셈이다.

1987년 11월 03일, 관훈토론회


나는 대통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1990년 10월, 노태우민주자유당 총재 후보로 추대하며


역사는 기승전결로 이루어진다. 5·16은 역사 발전의 토양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를 일으킨 사람이며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그 계승자이고, 김영삼 대통령의 변화와 개혁은 그 전환에 해당된다.

1993년 5월 16일, 5·16 민족상 시상식


있는 복이나 빼앗아가지 마시라.

1995년 1월 1일, 민자당 대표 시절, 민주계의 대표 퇴진론을 거론하는 세배객이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덕담하자


경상도 사람들은 충청도 사람들은 핫바지라고 그럽디다.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입 다물고 있는 사람들, 이런 뜻으로 그 사람들이 우리를 평한 겁니다.

1995년 6월 13일, 지방선거 천안역 지원 유세


역사는 끄집어 낼 수도, 자빠트릴 수도, 다시 세울 수도 없는 것이다. 역사는 그냥 거기서 배우는 것이다.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대해


요즘 세대 교체를 자꾸 말하는데 이스라엘골다 메이어 총리는 74세에 총리가 돼 4차 중동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996년 5월 18일, 대구 신명여고 강연


줄탁동기(啐啄同機)

1997년 자신의 대선 후원 조직인 민족중흥회 회보에 사용한 신년휘호.[52]


내가 제일 보기 싫은 것은 타다 남은 장작이다. 나는 완전히 연소해 재가 되고 싶다.

1997년 5월 29일, 자민련 중앙위원회 운영위


이인제 후보가 우리를 늙었다고 하는데 나와 함께 씨름 한 번 했으면 좋겠다. 내가 결코 이 후보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젊다.

1997년 12월 3일, 충북 괴산 정당연설회에서


서리는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슬금슬금 녹아 없어지는 것이다.

1998년 6월 27일, 총리 서리(署理) 당시 "서리 꼬리가 언제 덜어질 것 같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시인 프로스트가 "잠들기 전 가야 할 몇 마일이 있다."고 한 것처럼 저도 앞으로 가야 할 몇 마일을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겠다.

1998년 10월 16일, 동의대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 특강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 총리의 위치라는 게, 아무리 공동정권이라지만 델리키트하다.

1998년 10월 25실, "총리가 안다고 앞장서거나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행동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미리 왕성한 상상력과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스스로의 행보를 좁히거나 의지를 약화시키는 일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때를 맞춰야 하고 그러고도 안 될 때 몽니를 부리는 것이다.

1998년 12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의 내각제 약속 불이행 우려 관련 자민련 중앙위원회 연수에서


백날을 물어봐, 내가 대답하나

2000년 5월 2일, 일주일만에 당사에 출근하면서 김대중 대통령과의 회동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나이 70이 넘은 사람이 저물어 가는 사람이지 떠오르는 사람이냐. 다만 마무리할 때 서쪽 하늘이 황혼으로 벌겋게 물들어갔으면 하는 과욕이 남았을 뿐이다.

2001년 1월 9일, 민주당 이인제 최고위원이 4·13 총선 때 자신을 서산에 지는 해로 표현한 것을 두고


43년 동안 정계에 몸 담으며 나름 재가 되도록 탔습니다. 일찌감치 떠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뭔가 세워놓고 떠나려고 욕심을 부렸던 건 뿐이지요. 노병은 죽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는 겁니다.

2004년 4월 19일, 17대 총선 패배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박정희 전 대통령을 깎아내리려는 못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이 오늘날 사람답게 사는 것은 박 대통령이 기반을 굳건히 다져 그 위에서 마음대로 떠들고 춤추고 있는 것이라고

2005년 10월 28일, 박정희 전 대통령 26주기 추도식


정치는 단념의 기술이다. 정치란 해야 할 일은 어김없이 해내고, 해서는 안 될일은 단념하는 기술이다.


역사란 해서는 안 될 일을 함으로써 저지르는 과오들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 빚어지는 잘못들의 기록들이며, 일의 완급과 선후를 가려 순리에 맞게 다스리는 것이 정치의 기술이다.


결국 어제는 어제의 논리로 최선을 다했고, 그것이 바탕이 돼 오늘이 이뤄진 것이므로 과거를 그대로 두고 공으로든, 과로든, 받아들여 전승하거나 또는 배척하거나 둘 중 하나로 판단하고 행동해야한다.


보수가 늘 보수 그대로 있으면 연못이 썩는다. 이념적으로 보수와 진보를 가를 때 보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옛 전통, 즉 보수를 가지고 지신(知新)하는 것을 취하면 여기서 개혁적 보수라는 말이 나온다. 보수에는 항상 새로운 것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초심을 품고 과거 정치인들로부터 다시금 지혜를 배울 때다.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과오로부터 냉철함을 배우고, 해리 트루먼에게서 시대의 지도자상을 깨닫기를 바라며, 존 F 케네디에게서 불꽃같은 열정과, 윈스턴 처질의 위대한 봉사의 의미를 새기고, 샤를르 드 골에게서 애국의 길을 들여다보라.


10.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무소속
]]

1960 - 1963
정계 입문

파일:재건.png

1963
창당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1963 - 1968
합당[53]

[[무소속|
무소속
]]

1968 - 1969
탈당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1969 - 1973
복당

[[무소속|
무소속
]]

1973
탈당

[[유신정우회|
파일:유신정우회_한글로고.svg
]]

1973 - 1978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78
탈당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1978 - 1980
복당

[[무소속|
무소속
]]

1980 - 1987
정당 해산
정계 잠정 은퇴

[[신민주공화당|
파일:신민주공화당 글자.svg
]]

1987 - 1990
창당
정계 복귀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0 - 1995
합당[54]

1995
탈당[55]

1995 - 2004
창당

2004 - 2007
탈당[56]
정계 은퇴

2007 - 2012
입당[57]

2012
당명 변경

2012 - 2018
탈당[58]
사망


11.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5[59]

45,999 (68.15%)
당선 (1위)
초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69,961 (91.06%)
재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5,460,581 (48.77%)
당선 (1번)
3선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
당선
4선[60]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5[61]

134,513 (66.63%)
당선 (1위)
5선[62][63]
1987
제13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1,823,067 (8.06%)
낙선 (4위)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부여
53,967 (81.88%)
당선 (1위)
6선[64]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42,358 (72.53%)
7선[65]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35,292 (66.35%)
8선
1997
제15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최종 미등록 예비후보
[66]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1,859,331 (9.83%)
당선 (1번)
9선[67]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600,462 (2.82%)
낙선 (1번)
[68]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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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총선 (충남 5)[1]
8대 총선 (민주공화당 전국구 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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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총선 (충남 5)[2]
13대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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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총선 (충남 부여군)
14대 총선 (충남 부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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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총선 (충남 부여군)
16대 총선 (자유민주연합 비례대표 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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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총선 (자유민주연합 비례대표 1번)





12. 저서[편집]


  • <새 역사의 고동>, 서문당, 1987년 8월 1일 #
  • , 서문당, 1987년 10월 1일 #
  • , 사공, 1997년 4월 9일 #
  • 공저, <신문인 방우영: 미수 문집>, 21세기 북스, 2016년 1월 28일 #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와이즈베리, 2016년 3월 4일 #
  • 저서, <남아 있는 그대들에게>, 스노우폭스북스, 2018년 7월 2일 #


13. 대중매체에서[편집]


배우 이정길이 사실상 전담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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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년 MBC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는 배우 한인수[69]가 연기했으며 같은 시기에 나온 라이벌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는 이정길이 연기, 이 때문에 한인수가 제4공화국에서 연기했다.

  • 1998년 SBS 드라마 <삼김시대>에서는 배우 정동환이 연기했다. 외모는 나쁘지 않았지만 배우 특유의 허무주의적 인텔리 느낌을 지우지 못해서 잘 어울리지는 않았다. 야인시대의 최동열 역할을 생각해 보면 될 듯.

  •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한창호가 연기했다. 다만 실존 인물과는 외모에서 그다지 닮지 않았다는 평가.

  • 2004년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는 배우 정재곤이 연기했다. 박정희의 참모 역할로 나왔는데 너무 젊은 느낌이라 별로 닮아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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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이정길[70]이 연기했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이인임은 김종필의 얼굴을 따서 그렸다고 한다. 대놓고 이인임이 '원조보수' 드립을 치는 장면도 있다. 줄타기의 명수였다는 것도 공통점.

  • 라디오 드라마 <격동 50년>에서는 성우 김태훈[71]이 맡았다.


14. 둘러보기[편집]




















[1] 泌은 '샘물 흐르는 모양 필', '분비할 비' 두 가지 훈음이 있다. '비'는 완성형에서나 입력이 되고, '필'로 입력해서 변환해야 유니코드에서 호환이 된다.[2] 음력 1925년 11월 23일[3] 규암면 외리가 출생지라는 설도 있다.#, #[4] 사후 매각 후 철거, 2021년에 새로 빌라를 건축했다.[5] 김해 김씨 경파 집성촌이다.[6] 안경공파 16세손. 조부 김현택(金顯澤), 아버지 김상배(金相培), 본인과 형제가 각각 경파(京派) 20세손, 21세손, 22세손 항렬자를 사용한다.[7] 국무총리 서리기간까지 포함하면 1998년 3월 3일 부터 1998년 8월 17일 까지다.[8] 출처 : 연합뉴스, 2018. 6. 23.일자 보도 및 모바일한경, 2018. 6. 23.일자 [9] 다만 김종필은 나머지 둘과 다르게 대통령 자리에 앉지 못했다.[10] 국회부의장 격[11] 총재급 위상을 가진 대표로 김영삼 정부 초반에는 사실상 실세이자 2인자로 행정부에 영향을 주는 어느정도의 정권 지분을 가졌다.[12] DJP연합으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야권단일후보로 확정되자 자동적으로 후보사퇴하였다.[13] 역대 최다선[14] 통일뒤 땅 소유권 북 주민 우선[15] 김종필총리 아시아통화기금 제안[16] AMF 아시아통화기금 계획 사실상 백지화[17] 의원 내각제는 국회의 다수당이 내각 구성권을 갖게 되고 그 다수당의 수장이 총리가 되는 시스템이다. 3당 합당 이전만 해도 한 정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기 어려운 시대였으니 김종필이 어느 쪽에 붙느냐에 따라 집권 여당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20대 총선 전후로 호남 정가를 중심으로 의원 내각제 개헌 논의가 활성화된 근본 원인이기도 하다.[18] 재밌게도 본인이 군사정변으로 전복시킨 대한민국 제2공화국은 내각제였다. 내각제를 무너뜨린 사람이 훗날 내각제를 추진하게 됐으니 참 아이러니하다.[19] 무엇보다 상징적인 것이 4위 김종필의 8.1% 1,823,067표를 그대로 2위 김영삼의 28.0% 6.337,581표에 더해도 당선자 노태우의 36.6% 8,282,738표에 미치지 못한다. 즉, 당시 1노 3김의 대한민국 정치 4강 중에서 유일하게 독자적으로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것이 바로 김종필이었다. 당선자 노태우야 말할 것도 없고 양김 역시 '두 사람이 단일화했으면 노태우를 꺾었을 것이다'라는 단일화 필승론이 당시 한국 정치와 한국 현대 정치사의 중요한 떡밥으로 자리잡은 입장이다. 당대의 정치적 구도로 보건 득표율이라는 결과로 보건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3인은 그 사람이 선거에 불참한다면 선거 결과가 바뀔 가능성이 아주 높은 입장이었던 데 비해 김종필만은 선거에 참여하든 불참하든 선거 결과는 그대로인 셈이다.[20] 13대 대선 이후 3당 합당에 합류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에 합류하였지만 당내 주도권을 두고 치열하게 대립한 민정계/민주계(상도동계)와는 달리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계(청구동계)는 당내 주도권은커녕 제대로 된 지분도 인정받기 힘든 처지에서 계파의 핵심인 김종필 자신이 퇴진 요구에 몰리는 처지로 전락했고 결국 자민련을 세워 독립하게 된다. 다만 김종필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아서 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DJP연합으로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에 일조하면서 캐스팅 보터로써 정치적 의미를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시점이 되면 그나마 김종필의 잠재적 지지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지던 (군사정권에 거부감이 없는) 강경 보수층이 신한국당에 완전히 흡수되어 주요 대선 후보로써 성장할 지지 기반 확장력 자체가 거의 상실된 상태였다. 그리고 승자 독식형 선거제도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거대 양당화의 흐름에 따라 수권 정당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상실하고 캐스팅보터의 입지밖에 기대할 수 없게 된 자민련과 그 후계 정당들은 예정된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21] 양김은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한 바 있는데 조갑제는 "그 때는 두 사람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고 회상할 정도로 확고한 상징성을 확보했다.[22] 법적으로 김종필은 박정희의 조카사위가 된다.[23] 사실 한국 국립현충원은 20년간 함께 한 배우자는 자리 상관없이 합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국가원수, 국가사회유공자 등 일반 안장되는 무덤은 옆에다 땅을 파고 같이 넣는 형식이며 그 외 화장 후 안장되는 무덤은 분골함을 같이 넣는다.[24] 박정희 정부, 김대중 정부[25]국가정보원의 시초였다.[26] 다만 독재 정부 시절이었던만큼 상관인 박정희의 견제가 너무 심해서 그 대단한 위세와 영향력에 비해서는 그렇게 큰 힘을 갖지는 못했다. 내부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당시 김대중김영삼은 박정희의 반대파였고 전두환은 군대 내에서 영향력이 있었을 뿐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기도 전이었으며 그 외에 그들의 영향력에 대등하게 필적할만한 인물은 드물었다.[27] 그가 학창 시절 다녔던 고등보통학교는 현재 중-고등학교에 대응하는 학교로, 모든 수업이 일본어로 이루어졌다. 일본어를 배우지 않으면 학교 과정을 따라갈 수 없었다. 게다가 일본 유학 경험도 있어 일본어에 매우 능했을 것이다. 한일 협상의 기초가 된 김종필-오히라 메모 역시 일본어로 적혀 있다.[28] 다만 이때의 인터뷰를 보면 나이 탓인지, 유창하게 곧바로 회화한다기보다 머릿속에서 우리말을 일본어로 번역한 뒤 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도 어휘 선택이나 억양 등이 거의 현지인 급이다.[29] 수채화를 주로 그렸다. 유화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이유로 좀체 시도하지 않았다고 한다.[30] 실제로 1995년 한국복장기술경영협회가 선정한 베스트 드레서 1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된 바 있다.[31] 한나라당 의원들도 선배 정치인인 JP한테 함부로 할 수가 없었고 언론에서 종종 수군거리기는 하였으나 "내가 근무 시간에 골프 치는 것도 아니고 나이 칠십 넘은 사람이 골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몸져누우면 대신 앓아줄 것도 아니면서 왜 간섭하느냐?"고 받아쳤다고 한다.[32] 정반대가 김영삼인데 김영삼은 사석에서도 단순한 생활 차원의 신변이야기를 제외하면 정치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박준규는 김영삼을 가리켜 대화주제가 빈약해 딱해 보였다고 평한 적도 있다.[33] 그냥 멋스럽게 즐긴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도 인간의 희노애락 전반을 뜻한다.[34] "웃기만 하고 답은 하지 않다."는 의미로, 당나라이백의 시 <산중문답>의 한 구절에서 따 왔다.[35] 박명수가 진보 성향 연예인이라 김종필 자체를 옹호한 것은 아니다. 그저 의도는 좋았다 정도로 포장해 하하를 옹호할려 해준 것.[36] 명수는 12살 특집 등.[37] 서해안고속도로를 지나다 보면 서산시 근처에서 갑자기 넓은 초원이 펼쳐진 곳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곳이다.[38] 2000년 당시 가격으로 약 2,000만원 수준의 채였다. 현재는 700만원 ~ 1,200만원의 가격대[39] 당시 한국에서는 중화민국자유중국이라고 했고,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이라고 해서 교류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40] 당시까지 김종필과 김대중의 정치적 입장 및 지지층의 괴리가 컸다는 점에서 김종필 지지표가 정주영으로 가는 경우를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단 이 경우는 표의 이동이 상정 최대치인 8.1% 가 되어야 겨우 아슬아슬하게 선거 결과가 바뀔까 말까한 수준이 된다는 한계가 있다. 14대 대선 당시 정주영이 충청권에서 상당한 표몰이를 했음을 생각하면 이전 대선에서 확인된 소위 김종필 지지표의 상당 부분은 이미 정주영에게 가 있는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고, 게다가 김종필이 정주영을 지지한다고 해서 김종필이 가졌던 보수표가 전부 정주영에게 가리라는 보장도 없음을 생각한다면 8%를 움직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 자체가 무리한 것. 게다가 정말 그만한 표가 움직인다 하더라도, 그를 통해 바뀌는 결과는 정주영의 대통령 당선이 아니라 김대중의 어부지리 당선일 뿐이다. 김종필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 이득도 없이 괜히 헛일을 하게 되는 셈.[41] 사실은 이 가능성조차 애매한 면이 있는것이, 이회창은 충남 예산이 연고지임을 내세워 새로운 충청권 맹주의 자리까지 노리던 인물이고, 노무현은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역대급 승부수를 던져 충청권에서 그런 이회창을 상대로 승리한 인물이다. 즉 16대 대선이 명확한 양강구도로 흘러감에 따라 양 후보 모두 승패의 향방에 큰 영향을 끼칠 충청권 표심을 잡기 위해 격렬한 수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 물론 일어나지 않은 일의 결과는 알 수 없으니 함부로 말할수도 없는 것이지만, 아무리 김종필이 충청권의 유력 정치인이라고 해도 바로 그 김종필의 수사를 빌리자면 충청도 사람들이 핫바지도 아닌데 단지 '김종필이 지지한다'는 이유로 큰 기대감을 품을만한 개발이슈를 버리고 이회창 지지로 돌아섰을지는 의문인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움직여야 하는 표의 규모가 작은것도 아니었다. 당시 대선에서 노무현의 우세는 약 57만표이고, 이중 25만 6천표 정도가 충청권에서 얻은 우세였다. 그리고 충청권 표 중에서 다른 후보들의 표를 빼고 양 후보의 득표비만 보면 56:44 정도가 되므로, 충청표로 선거결과를 바꾸려면 이를 완전히 뒤집어 44:56으로 만드는 것 이상으로 많은 표를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김종필이라지만 본인이 직접 출마한 것도 아니고 단지 이름값만으로 10% 이상의 표를 움직일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인 것. 게다가 김종필의 전성기인 13대 대선을 보면 충청권에서도 김종필이 압도적 지지를 얻은곳은 충남(45.03%)이고, 충북에서는 전국 평균보다는 높은 득표율(13.52%)을 얻긴 했어도 그렇게까지 압도적인 표를 얻은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하필 충남(+대전. 13대 대선은 대전이 충남에서 분리되기 이전이었다.)은 행정수도 이전 이슈에 대한 기대감으로 노무현이 이회창을 10% 이상의 압도적인 격차(심지어 대전에서는 15% 이상의 격차)로 앞지른 지역이다. 이 격차를 메우고도 남아 역전시킬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김종필이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라 쉽게 말할수는 없는 것. 결국 본 문단에서 여러번 강조된 것이지만, 김종필은 물론 거물 정치인이었지만 흑막의 킹메이커로써든 충청권 맹주로써든 그 영향력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문제는 정치를 이미지로 소비하는 이들이 종종 그 이미지를 너무 과장하여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16대 대선의 경우, 노무현보다 이름값이 훨씬 높던 이회창이 의외의 패배를 당한 선거라 적지 않은 이들이 '이회창이 진 이유'를 어떻게든 찾으려 하는 경우가 많기에 이와 관련되면 이런 오해가 더 부풀어오르기도 쉽다.)[42] 상기된 1강 2중 1약의 4개 정파 구도로 설명하자면, 공화계를 이끌던 김종필의 첫 선택은 1강(민정계) + 1중(통민계)의 통합에 자신도 합류하여(3당 합당) 1초강 - 1약 구도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외부의 적이라고는 1중 평민당밖에 없는 상태에서 1강과 1중이 손까지 잡았으니 그나마 4대 정파 중에서 가장 세력이 작던 1약 공화계는 자연히 있으나 없으나 별 존재감이 없는 처지가 되고, 당 내 주도권은커녕 제대로 된 지분조차 보장받기 힘든 깍두기로 내몰릴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정치판에서는 1 + 1 + 1 = 3이 꼭 성립하는 것이 아니고, 혼자 고립된 평민당이 그 반대급부로 유일 야당의 포지션을 차지하게 되면서 일단 성립되었던 1초강 - 1약의 구도가 1강 - 1중 정도로 변화하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김종필과 공화계(자민련)이 기사회생할 길이 열리게 되었다. 김종필계 정치 세력은 여전히 1약의 처지였지만, 1강 - 1중의 대립 구도에서는 1약이 1중에 힘을 보탬으로써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것. 다르게 보면, 15대 대선 당시 김대중은 김종필의 협력이 간절히 필요한 처지였지만, 김종필 역시 김대중 이외에는 자신의 역량을 받아줄만한 상대가 없는 처지였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15대 대선 이외에, 특별히 김종필이 당락을 좌우했다고 할 만한 대선은 전혀 없다. 즉, 킹메이커라는 별명에만 눈에 빼앗긴 이들이 흔히 김종필을 대선 때마다 "이번에는 누구에게 힘을 실어줘서 대통령을 만들어볼까?"하고 정치판을 좌지우지한 배후의 흑막 같은 이미지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는 전혀 달리, 실제로 제 6공화국(민주화) 이후 김종필의 행보는 단 한장의 카드를 꼭 부여잡고, 참기 힘든 것도 묵묵히 참고 견뎌내다가 결국 찾아온 승부의 순간에 그 단 한장의 카드로 극적인 역전승을 이뤄낸 승부사에 더 가깝다.[43] 이를 두고 유시민은 "꼭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동해야만 좋은 결과가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비꼬기도 했다.[44] 이때문에 박정희의 종신집권에도 부정적인 의사를 피력하기도 했다.[45] 실제로 이렇게 간단한 아침식사 덕에 며느리가 고생을 덜한다고 좋아했다고 한다.[46] 김영삼은 혼외자 논란에 정관 불임수술(...)로 맞받아쳤고, 김대중은 전처 사별 후 시간이 흐른 뒤에 이희호를 만나 재혼했다.[47] 출처 : 연합뉴스, 2018. 6. 23.일자 보도 및 모바일한경, 2018. 6. 23.일자 [48] 박영옥 여사한테 청혼할 때 사용했다.[49]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의 구절이다.[50] 반면 1995년 1월, 여당인 민주자유당에서 "자의 반 타의 반"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을 때는, "나는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게 진정한 인내라 믿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참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1번 보여주겠다"고 발언했다고 한다.[51] 출처 : 중앙일보 연재 김종필 회고록 소이부답(笑而不答), 2015.09.18일자[52] 중국 송나라 선종(禪宗)의 대표적 전적을 담아낸 <벽암록>에 나오는 글귀로, 아기 병아리는 건강하게 부화하고자 알 속에서 두드려 나갈 때가 됐음을 알리고 + 어미 닭도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밖에서 알을 쪼아 껍데기를 깨줘야 하는 것처럼, "모든 일은 시기가 적절히 맞아야 한다."는 뜻. 당시 대선 정국에서 적절한 시기의 결단이 필요함을 간접적으로 나타냈다는 해석이다.[53] 민주공화당에 흡수 합당.[54]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55]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56] #[57] 이명박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 # 정계 복귀는 아니다.[58] 2월 17일[59] 부여군[60] 제9대 총선에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은 3년 임기로 2번 나눠서 선출했다. 김종필은 1기와 2기 모두 선출되었으며, 1기 당시는 현직 국무총리였다.[61] 부여군, 서천군, 보령군[62] 신민당 조중연 후보와 동반 당선[63] 80.7.4: 의원직 사퇴[64] 1990년 민주자유당 합류 (3당합당)[65] 1995년 자유민주연합 창당[66]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단일화로 인한 대선 불출마.[67] 최다선(9선) 타이틀. 9선을 기록한 인물은 같은 3김 중 하나였던 김영삼박준규 前 국회의장이다.[68] 0.2% 차이로 10선 도전 실패, 정계은퇴. 탄핵정국 당시이다. 10선에 성공했다면 앞으로 깨기 힘든 기록이 되었을 것이다.[69] 한인수의 경우 체격과 목소리가 너무 중후해서 이 시기보다는 노년기의 김종필에 더 닮았다.[70] 한일회담 때 언저리 사진을 보면 많이 닮은 편이다.[71] 공화국 시리즈 등 TV 드라마에서는 이철승을 연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