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질(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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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礩
1422 ~ 1478

조선의 문신. 한때 성삼문 등 사육신과 함께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 복위거사에 동참하려고 했으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듯하자 목숨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껴서 장인인 정창손에게 사육신의 거사행위를 고변하면서 사육신 사건을 일으킨다. 한때는 사육신과 동지였지만 끝내 동지들을 배신하여 죽게 만든 결정적인 원흉. 자는 가안, 호는 쌍곡이다. 본관은 구 안동 김씨로 경주 김씨의 한 분파이며, 신라말 호족 계열인 신 안동 김씨와는 관련이 없다.

1450년(문종 1년) 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5대 문종 때 추장문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고 이 때 들어서 성삼문, 신숙주와 함께 문종의 애정을 받아왔다.

1455년(세조 1년) 7대 세조가 즉위하면서 성균관사예로 일하였는데 이 때 성삼문의 제안으로 상왕 단종 복위거사에 동참하게 되었으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알게되면서 목숨을 잃을까하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서 장인 정창손의 집으로 찾아가 정창손에게 사육신의 거사를 밀고하였고 결국에는 세조 앞에서 사육신의 세조 살해미수 및 상왕 복위거사에 대한 보고를 하면서 사육신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사육신 사건 이후에는 세조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군기감판사로 임명되었으며 좌익공신, 상락군, 평안도 관찰사, 공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까지 지냈다.

우, 좌의정 시절에 한명회, 신숙주와 함께 원상세력에도 가담하였으며 구성군 이준을 제거하는데 기여하였고 경국대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이같이 세조로부터는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자 공신으로서 인정을 받았지만 한때 사육신의 동지로서 목숨이 두려워서 동지들을 배신하여 죽게 하였던 점에서는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다.

김질의 후손으로 김자점이 있으며, 그 김자점의 먼 후손은 백범 김구다. 덕분에 김구는 어린 시절 도망쳐 다니면서 살았다고 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