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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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2년 ~ 1713년
1. 개요[편집]
조선의 문인. 본관은 안동, 자는 경명(敬明), 호는 포음(圃陰)이다. 김상헌의 증손자이며, 김수항의 다섯째 아들이다. 형제들이 유학 외에 시문이나 노장, 그림 등에 관심을 두었던 것과 달리 완전히 유학에만 집중한 유학자이다.[1][2]
2. 생애[편집]
1662년(현종 3년) 김수항의 5남으로 출생했다. 육창의 다섯째. 평생 출사하지 않고 처사로 살았다. 부친을 닮아 외모가 준수했다고 한다.[3] 다른 형제들과 달리 낙송루시사 등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시문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유학에 전심했다.
1676년 12월, 15세에 인조 시기 영의정을 지낸 홍서봉(洪瑞鳳, 1572 ~ 1645)의 증손녀이자 홍처우(洪處宇)의 딸인 남양 홍씨와 혼인하였다. 1680년 딸이 태어났다.[4] 1681년 자연의 흥취가 담긴 여러 산문을 뽑아 '澄懷錄(징회록)'을 편찬하였고,[5] '名山最勝(명산최승)'을 엮었다.[6] 1683년 동생 김창립이 사망한다. 1684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출사하지 않았으며, 당시 졸수재 조성기와 오산 차천로와 동악 이안눌의 시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졸수재가 그 둘을 높이 평가한다는 이야기를 셋째 형 삼연 김창흡에게 전하며 둘 사이의 서신 논쟁의 시작을 만들기도 했다. 최소한 1685년부터 부모를 바로 옆에서 모시는 역할을 시작한 것 같다.김창협의 편지
1687년 부친이 벼슬에서 물러나 양주로 함께 갔으며, 유배지에도 김창흡과 함께 따라갔다.[7] 1689년 부친이 기사환국으로 진도로 귀양을 가자 모친을 모시고 다시 따랐으며, 김수항 사사 후 영구를 모셔 양주에 올라와 장사 지냈다. 김수항은 김창업의 매화시에 대한 차운시를 마지막 시로 남겼는데, 당시 포음도 함께 차운시를 남겼다. 이후 삼연은 힘든 마음을 특히 포음에게 많이 표현하였고[8] , 삼년상 이후에도 형이 불서를 탐독하자[9] 포음이 유학자 입장에서 경계해주었다. 부친 사망 후 홀로 남은 모친 안정 나씨[10] 를 1703년 사망할때까지 모셨다.[11] 그리고 부친의 유고를 수습하였다.
기사환국 후 삼년상 기간 동안 형제들과 가문의 백운산 별서에서 은거하였다.[12] 자신의 서실을 惺惺齋(성성재)로 명명했다. 1691년 자신의 공부의 길이 맞는 것인지 의심을 품으며 김창협에게 조언을 받는다.링크 삼년상을 마치고 목식동으로 돌아왔고, 이후 외가가 있는 과천의 반계, 한강, 목식동, 북동을 돌며 살았다. 1693년 장모 풍양 조씨가 사망하여 그 행장을 작성한다. 또한 백부 김수증이 칠순을 맞아 자신의 아들과 조카들에게 곡운구곡도첩에 부칠 시를 짓도록 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13] 1698년 큰형 김창집이 강화유수로 부임하자 모친을 모시고 강화도로 갔고 부친의 문집 '문곡집'의 간행을 도왔다. 1700년 김창집의 송도유수 전임으로 다시 송도로 따라간다. 딸이 21세에 사망하여 행장을 작성한다.[14]
1701년 서울로 돌아왔고, 1702년 현재 종로 통인동 일대인 포음(圃陰)의 경저에서 머무르게 된다.[15] 그리고 이 해에 외아들 김용겸이 태어났다. 1703년 모친이 세상을 떠났고, 이후 조정에서 수차례 왕자 사부(王子師傅),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 등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출사하지 않고 학문과 강학에 전념하였다.[16][18] 김시보, 조문명 등 일가의 문인들도 당시 포음과의 교류의 기록을 남겼다.[19]
1703년 모친, 1707년에는 사위 이망지가 사망한다.[20] 1707년 김창협이 창계 임영의 문집 서문을 쓰는 일로 물어와 의견을 교환한다.링크창계집 서문 1708년 김창협이 사망하였다.[21] 1709년 숙환이 심해지며 김창업의 집 근처인 석교로 나가 지내게 되었으며, 부친의 연보를 완성하였다.
1710년 중형 김창협의 농암집 간행시 사단칠정설의 일부인 이기승부설(理氣勝負說)의 내용을 싣는 것을 호락 간의 논쟁의 격화를 우려하여 반대하였다.[22] 1711년 딸의 묘를 천장(遷葬)하며 제문을 다시 쓴다.[23] 1712년 8월 20일부터 9월 27일까지 조카 김언겸(金彦謙, 넷째 형 김창업의 둘째 아들)과 함께 김창흡이 머무르던 설악산을 방문하고 금강산, 영동을 유람하며 기행문 '동유기(東游記)'를 썼다. 여행 당시 아들 김용겸에게 보낸 척독 2편도 전한다. 1712년 장인 홍처우의 별서 능허정(凌虛亭)으로 거처를 옮겼고, 연행길에 떠나는 형 김창집과 김창업을 전송한다. 포음은 형에게 연행길에 있는 명산, 대천, 고적이 기록된 책 한 권을 챙겨주었다.
1713년 3월에는 형제들이 무사히 연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김창흡의 세 아들들(김양겸, 김치겸, 김후겸)과 마중나와 환영하며 김창집의 집에 머무른다. 그런데 등에 종기가 발생하였고, 그 합병증으로 5월 3일 김창집의 집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형인 삼연이 포음의 시가, 서간, 산문, 경전 훈고 등을 편집, 조카 김신겸[24] 이 교열하여 1726년 유척기가 문집 '포음집(圃陰集)'을 간행하였다. 훗날 이조판서에 추증된다.
처사(處士) 김창즙(金昌緝)이 졸(卒)하니, 나이는 52세였다. 창즙은 고(故) 정승 김수항(金壽恒)의 다섯째 아들로서, 사람됨이 담정(澹靜)하여 욕심이 적었고, 문장 능력은 조금 있었으나 학문에 방해되고 공부를 끝마치지 않았다 하여 상사(上舍)에 이름을 올려놓고 곧바로 다시는 과거에 응시(應試)하지 않은 채 성리서(性理書)에 전심(專心)하며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으니, 그 형 김창협(金昌協)이 감탄하기를, ‘각고(刻苦)의 공부는 내가 미치지 못할 바라.’ 하였다. 추천으로 교관(敎官)·사부(師傅)·주부(主簿)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사림(士林)이 몹시 애석하게 여겼다.숙종실록 졸기
부친 김수항의 묘 오른쪽 100여 보 되는 곳에 안장되었다고 하나, 현재 묘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3. 여담[편집]
훗날 어유봉이 소옹의 말에 빗대어 김창협 형제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소요부(邵堯夫 소옹(邵雍))가 말하기를,
“군실(君實 사마광(司馬光))의 말은 여유롭고 백순(伯淳 정호(程顥))의 말은 조리 있으며 언국(彦國 부필(富弼))의 말은 자세하고 회숙(晦叔 여공저(呂公著))의 말은 간결하다. 이들은 송나라 원풍(元豐) 연간 인물들로 당시에 걸출하였다.”
하였다.
나는 다행히 김씨 부자와 형제들과 종유하였는데, 나 또한 함부로 말하기를,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의 말은 여유롭고 농암(農巖)의 말은 조리 있으며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말은 자세하고 포음(圃陰 김창즙(金昌緝))의 말은 간결하다. 이분들은 당시의 걸출한 인물이라 말하더라도 좋을 것이다.”
하였다.
이건명[25] 이 포음을 기리며 읊은 시.링크
정승 가문의 지란옥수 당시에 떠들썩했나니 / 相門蘭玉映當時
다섯째 아들의 명성이 일찌감치 추앙받았지 / 第五聲名早見推
〈육아〉 시를 보자 책을 덮고는 / 詩到蓼莪曾廢讀
형들을 따라 만년에 휘장 드리웠네 / 情深壎吹晩垂帷
반평생 단표누항하며 마음 고치지 않았고 / 簞瓢半世心無改
평생토록 근심하면서 운명도 기구하였지 / 憂戚平生命亦奇
천도는 아득하여 묻기 어렵거니 / 天道冥冥難可問
책상머리엔 다행히 관례 치를 만한 아들 있다오 / 牀頭賴有勝冠兒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1711 ~ 1788)가 대학의 해설에서 포음의 해석을 극찬한 바 있다.
정심장(正心章)의 장구에 나오는 “일단 있게 되었는데[一有]”라는 두 글자는 상구(上句)의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다.[人所不能無]”라는 말을 받아서 말한 것이다. 그런데 ‘불능무(不能無)’는 바로 ‘유(有)’ 자의 뜻인 만큼, 이 ‘네 가지[四者]’는 사람에게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는 말인데, 그렇지만 이것이 ‘일단 있게 되었을 때에 제대로 살피지 못하면 욕(欲)이 발동하고 정(情)이 우세해져서[有之而不能察 則欲動情勝]’ 하문(下文)에서 말한 것처럼 된다고 하는 말일 뿐이다.
따라서 계착(係著)의 설을 심두(心頭)에 두지 않고, 단지 문장 그대로 평이하게 본다면 문의(文義)가 본래 명백하여 허다하게 설할 것이 없다. 그런데 다만 《어류》의 여러 설들을 먼저 받아들이고는 그 설을 가지고 《장구》를 보기 때문에 그만 ‘유지(有之)’를 계착의 뜻으로 여긴 나머지 점점 고질화되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온 세상이 모두 이런 식으로 오해하였으니, 만약 포음(圃陰)의 일척안(一隻眼)[26]
이 없었더라면 주 선생(朱先生)이 주해(註解)를 개정한 본의(本意)가 거의 매몰될 뻔하였다.
4. 가족관계[편집]
딸은 단명하였으며, 외아들 효효재(嘐嘐齋) 김용겸(金用謙, 1702 ~ 1789)은 동세대 가문의 좌장 격인 인물이 된다. 포음은 사망하기 전 12세 밖에 안된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족질이자 김창협의 문인인 김시보(金時保, 1658 ~1734)에게 교육을 부탁하였다.[27][28] 김용겸은 예학과 음률에 밝았고 1748년(47세, 영조 24년) 선공감 가감을 시작으로 음직으로 관직에 올랐음에도 정조의 눈에 들어 공조판서까지 역임한다. 그러나 후사가 없어 먼 친척 김적행을 양자로 들였다. 김적행의 손자 김기순(金琦淳, 1806 ~ ?)이 문과 급제한 것을 제외하면 조선왕조에서 출세한 후손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이 묘자리가 전하지 않는 이유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