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1973년 3월)

덤프버전 :


김현수의 역임 직책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클럽
파일:서울 이랜드 FC 로고.svg

5대











김현수의 수상 이력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파일:K리그1 로고.svg

2000 · 2001 · 2002 · 2003


김현수의 기타 정보

[ 펼치기 · 접기 ]




개성고등학교 축구부
Gaesung High School

파일:player_coach_2018_4.jpg

이름
김현수
金鉉洙 | Kim Hyun-Soo
출생
1973년 3월 13일 (51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직업
축구 선수 (센터백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부산 대우 로얄즈 (1995~1999)
성남 일화 천마 (2000~2003)
인천 유나이티드 FC (2004)
전남 드래곤즈 (2005)
대구 FC (2006~2007)
감독
현풍고등학교 (2008~2012)
서울 이랜드 FC (2019)
개성고등학교 (2021~ )
코치
대구 FC (2013)
경남 FC (2014)
천안시청 축구단 (2015)
상주 상무 (2016)
서울 이랜드 FC (2017)
기타
서울 이랜드 FC (2017~2018 / 수석 스카우트)
국가대표
3경기 (대한민국 / 1997~2003)
{{{#08162e,#ffffff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000000,#ffffff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height=40><width=30%><table bgcolor=#fff,#1f2023><bgcolor=#DD0129> {{{#fff ''' 학력 ''' }}} ||[[협성중학교]][br][[대구공업고등학교]][br][[아주대학교]][br][[수원대학교]] 대학원 ||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지도자 경력
4.1. 코치
4.3. 근황
5.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현역 시절 센터백으로 활약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아주대학교 출신의 선수로, 1995년 부산 대우 로얄즈에 입단하며 프로생활을 시작하였다. 부산에서 5시즌 동안 103경기에 출장하며 1997년 부산의 3관왕에 공헌하였다. 이적하기 전까지 주장으로 활약하며 팀의 마지막 황금기를 이끌었다.

2000년 성남 일화 천마로 이적하여 4시즌 동안 117경기에 출장하였다. 성남에서 2000년부터 2003년까지 4시즌 연속으로 K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듯 김현수는 당시 엄청난 수비수로 이름을 날렸다. 이는 마시엘에 이어 K리그 수비수로는 역대 두 번째 기록이다. 이 때 그의 수비 파트너가 바로 이영진, 김영철 그리고 이들을 보조하는 수비형 미드필더는 무려 김상식이었다. 애초에 당시의 성남은 3년 연속 우승을 거머쥘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팀이었고, 그 가운데서 김현수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후 2004년, 신생 구단인 인천 유나이티드가 적극적으로 구애하며 당시 K리그에서 이름을 날리던 김현수를 영입하는 데 성공한다. 인천은 안종복을 중심으로 대우 로얄즈 시절 멤버들을 모았고, 대우의 레전드인 김현수는 그 주축이 됐다. 그래서 김현수는 인천의 창단 멤버였고, 또 인천의 첫 주장이기도 하였다. 이 시즌 김현수는 인천 내 모든 선수 중 가장 많은 플레이 타임을 가져간 선수였으며, 이상헌임중용을 이끌면서 수비의 핵으로 평가받았다. 한편, 이 기간 동안 프로 통산 300경기의 업적도 달성했다. K리그 통산 10번째 기록이다.

인천에서 이렇게 좋은 모습을 보인 김현수지만, 2005 시즌 시작을 앞두고 김우재와 함께 전남의 장경진, 이준영과 2 : 2로 트레이드되어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했다. 김우재와 김현수 두 선수 모두 인천의 핵심이었고, 장경진은 당시 프로에서 검증되지 않은 유망주, 이준영은 가능성은 보여줬지만 유망주에서 벗어나기엔 아직 시간이 필요한 선수로 평가받아서 인천 입장에서는 애매한 트레이드일 수도 있었지만, 장경진은 결과적으로 인천에서 성공했고 이준영은 끝은 승부조작이었지만 뛰는 기간동안에는 여러 포지션을 돌아다니며 고생했다. 김우재는 교통사고를 당해 은퇴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인천에 더 이득이 큰 트레이드였다. 그는 전남에서 출장 기회를 거의 받지 못했고, 이적을 결심하게 된다. 시즌 중반에 그는 계약을 해지했고, 디나모 자그레브 입단도 타진했으나 결국에는 무산됐다.

2006 시즌을 앞두고 고향 팀인 대구 FC로 이적하였다. 대구에서 2시즌 동안 41경기에 출장하며 주장으로서 팀을 잘 이끌어 나갔다. 많은 대구팬들을 뒤로하고 더 큰 꿈을 펼치기 위해 애정 넘쳤던 고향에서의 선수생활을 마쳤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U-23 대표팀에서도 활약한 바 있으며, 성인 국가대표팀 선수로는 1997년 처음 선발되어 통산 3경기에 출전하였다.

그러나, 그와 플레이 스타일이 상당히 비슷한 선수가 국내 축구 역사상 손가락 안에 들정도의 선수였기 때문에, 대표팀 운은 없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당시 희귀했던, 흔히 말하는 커맨더형 센터백으로, 포지션이 센터백임에도 퇴장을 한 차례도 당하지 않을 만큼 파울을 거의 범하지 않는 깔끔한 수비수였다. 또한, 위치선정과 예측이 우수했고, 천부적 킥력 덕분에 유사시에는 페널티킥, 프리킥 전담 키커 역할까지 훌륭히 수행했고, 특히 페널티킥은 단 한 차례도 실축하지 않았다.


4. 지도자 경력[편집]



4.1. 코치[편집]


은퇴 후 2008년 대구 FC U-18 팀인 현풍고등학교 감독이 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2013년 대구 FC의 코치로 보직을 옮겼고, 2014년 경남 FC, 2015년 천안시청 축구단 코치를 거쳐, 2016년 상주 상무의 코치로 선임되 조진호 감독을 보좌하였다.

2017년 서울 이랜드의 수석 스카우트로 부임하였다.


4.2. 서울 이랜드 FC 감독[편집]


2019 시즌을 앞두고 인창수의 후임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프로팀 감독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하지만 프로팀 감독으로서의 검증이 전혀 안된 경력 없는 감독이라는 점과 더불어, 이번에도 지난해의 인창수와 마찬가지로 내부인사로 돌려막기하는 꼴의 대책 없는 감독 선임이라며 팬들의 시선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김현수 감독은 시즌 전 인터뷰를 통해 후방 빌드업을 추구할 것임을 밝혔다.

3월 3일 광주 FC전을 통해 감독 데뷔전을 치렀으나 이날 경기는 2:0으로 패했으며, 개막 후 5경기 연속 무승으로 K리그2 내에서 유일하게 승리를 거두지 못하며 리그 최하위로 떨어졌다.

4월 14일 FC 안양전에서 4:1로 승리하며 감독 데뷔승을 거두었지만 4월 22일 전남전 무승부 이후 연이어 3연패를 당하며 다시 리그 최하위로 떨어졌고, 5월 15일 FA컵 16강에서는 실업팀 대전 코레일에 패하게 되었다.[1]

5월 20일 광주 FC전에서 패하며 7경기 연속 무승을 기록했고, 이날 경기 후 인터뷰에서 눈시울을 붉히면서 "감독인 제게 문제가 있다. 구단과 상의를 해봐야 할 것 같다"고 언급하며 사퇴를 암시했다. 감독 역량의 문제보다는 투자에 인색한 프런트의 문제가 더 크기 때문에 많은 축구 팬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

결국 5월 22일 사의를 표명하면서 6개월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감독 대행우성용 코치가 맡는다.


4.3. 근황[편집]


이후 1년 간 공백기 이후 2021년, 자신이 프로 데뷔를 했던 부산 아이파크의 U-18인 개성고등학교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


5. 여담[편집]


  • 2019년 서울 이랜드의 대표이사와 동명이인이라 감독 선임 오피셜이 나오고 나서 일부 팬들은 대표이사가 사장 겸 감독을 하는 줄 아는 사람도 일부 있었다고 한다.
  • 딸 김고은이 2022 미스코리아에서 미로 당선되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7 04:51:52에 나무위키 김현수(1973년 3월)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물론 이날 경기에서 서울은 대부분 신인들을 기용했고, 대전 코레일울산 현대를 잡는 등 상승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