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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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4월 삼국간섭이 일어나고 박영효 내각이 붕괴되는데 안 그래도 일본 우위의 방식이 마음에 안 들던 고종은 김홍집을 파면하고 1895년 5월 17일 갑오개혁 무효를 선언해버렸다. 개혁 내용이 마음에 안 들었다기보다는 일본이 마음에 안 들었다는 느낌의 행동으로 보인다. 이후 임시로 박정양과도 내각이 형성되었는데 1895년 7월 박영효의 반란 음모 사건이 터지면서 붕괴된다. 이후에는 명성황후가 주도해서 친미파와 친러파에 더해서 김홍집과 다시 제휴하여 제3차 갑오개혁을 시도했다.[17] (제3차 김홍집-박정양 연립 내각)[18]
1895년 10월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구성한 내각에 김홍집도 참여했다.(제4차 김홍집 내각) 이때 참여한 인물이 친일 성향이 강한 조희연, 유길준 등으로 조희연과 유길준이 고종의 상투를 자르고 단발령까지 추진하니 민중들의 반발이 격해졌다. 이것이 제3차 갑오개혁 혹은 을미개혁이다. 이런 틈에 끼어 있던 김홍집은 을미개혁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결국 욕이라는 욕은 다 먹게 되었다. 김홍집은 국모 시해의 책임을 지고 자결을 하려 했으나 "대감이 죽어서 이 일이 해결된다면 모르겠으나 실상은 해결될 일이 아니다"는 유길준의 만류로 그만뒀다.[19] 이때 유길준과 김홍집 사이에서 오간 말은 다음과 같다.
김홍집 내각은 백성들의 일관된 여론인 '반일, 반외세'에 반할 뿐 아니라 을미사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일본 측에 유리하게 처리했다는 의혹까지 얻게 되었고[22] 김홍집의 운명도 대략 정해졌다. 김홍집은 총리대신으로서 내각에 참여할 것을 수락할 때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것 같은데 총리대신 수락을 반대하는 가족들에게 "이 난세에 상감께서 잠을 못 이루고 조르시니 어찌 내 한 몸이나 아끼려고 거부할 수 있겠느냐? 부득이 어명대로 승낙했으니 내 생명은 이미 각오한 바이다. 너희들도 미리 짐작하여라"라고 못박았다고 한다.[23]유길준: 대감! 좀 고정하십시오. 대감께서 돌아가셔서 모든 것이 수습된다면 모르지만, 모후께서는 이미 참변을 당하셨고 사태는 기왕 벌어진 일입니다. 우리는 거꾸로 일격을 당한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태를 수습하는데 노력하는 것도 충절이 될 것입니다. 대감께선 그 뒤에 가서 돌아가신다 해도 늦지 않으니 제발 고정하시고 심사숙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김홍집: 유공(유길준)! 그대가 말하는 뜻은 다 알겠소.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보전과 개혁을 위하여 모든 굴욕을 참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번 사태만은 절대로 저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세록지신(世祿之臣)[20]
으로 또 일국의 중신된 자가 국모의 참변을 보고 어찌 살아서 폐하와 만백성을 대할 수가 있겠소? 나는 유공의 처지와 다릅니다. 유공은 어떤 난국이라도 극복해서 앞으로 이 나라를 건져야 할 사명이 있지만 내가 할 일은 이제 내 스스로 죽는 일밖에 없소.[21]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한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하고 친러 내각이 수립된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오자마자 을미사적[24] 과 법부대신 장박[25] 을 역적으로 선포하고 처형을 명령한다. 친러 정권들은 즉각적으로 의병과 보부상 수천 명을 동원하였고 경복궁에 경관들을 배치하였는데 일본 군인들은 총검을 날카롭게 세우면서 김홍집, 정병하, 유길준을 호위하였다. 유길준, 조희연, 장박 등이 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망명하는 와중에 김홍집은 고종을 직접 배알하여 회심을 촉구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죽을 각오로 거리로 나섰다. 지금 나섰다가는 죽을 것이라고 만류하는 일본군을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뿌리쳤다."시끄럽소! 일국의 총리대신으로서 백성에게 죽는 건 천명이오! 남의 나라 군인의 도움까지 받아서 살고 싶지는 않소!"
이후 직접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다가 일개 순사에게 붙잡혀[26] 정병하[27] 와 함께 광화문 앞으로 끌려간 다음 고종이 동원한 지방에서 올라온 보부상[28] 들에게 돌을 맞고 집단 구타당한 끝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이에 끝내지 않고 두 대신들의 사지를 찢고 종로까지 시체를 끌고 가면서 그야말로 광화문 ~ 종로 거리를 피바다로 만들어버렸다.[29] 김홍집의 가족 또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는데 연좌제를 통한 처벌이 내려질 것을 예상한 김홍집의 부인은 아들을 죽이고 자결한 것이다.
한편 살아남은 유길준, 조희연, 장석주는 경술국치 때까지 살아남아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으며 그나마 강직한 유길준은 남작 작위를 거절했다.[30] 조희연은 죽을 때까지 남작 작위를 갖고 있었고[31] 장석주는 대대로 작위를 세습했다.3. 평가[편집]
김홍집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엇갈리는데 한때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을 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32] 허나 김홍집을 이완용, 박영효와 동급의 친일파로 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이고 지나치게 이분법적이고 편협한 시각이다. 애초에 갑오개혁이 일본에 의한 타율적인 개혁이라는 이유만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논리는[33] 성립할 수 없는 것이 20세기 5년이 남은 1895년에 신분제 폐지, 연좌제 폐지, 과부 재가 허용, 청나라 사대 폐지, 왕실 재정 분리 등은 일본의 강요와 무관하게 이미 진작에 했어야 하는 것이었고, "외세가 강요해서 한 것이면 신분제 타파이고 근대교육이고 다 때려치자"는 건 위정척사파 논리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시기 국정 책임자들에도 친러파와 친미파가 포함되는 혼돈의 카오스였으며 김홍집은 갑오개혁의 얼굴마담이자 중재자로 계속 포함되어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이 박영효를 귀국시켜 김홍집과 연립 정권을 구축한 것은 일본이 김홍집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견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김홍집에게 공동으로 정권을 맡긴 것은 명백한 친일파인 박영효에게 단독으로 정권을 맡길 경우 반발이 불보듯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김홍집을 이용한 것이었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일본으로 도주하여 편안한 말년을 보낸 이들과 달리 일본의 보호를 거부하고 군중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도 거리에 나선 김홍집의 행동은 사리사욕을 위한 행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김홍집의 5대조 경은부원군 김주신은 왕의 장인이었음에도 정치에 일절 개입하지 않고 사리사욕과는 담을 쌓은 채 평생 근신하는 모습을 보여 외척의 모범으로 칭송받았고 이러한 가풍은 김홍집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일생동안 김홍집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친일을 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김홍집에 비판적인 이들조차 김홍집이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일국의 대신으로서 가져야 할 철학이나 신념이 확고하지 못하고 줏대가 없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당시 풍전등화의 정국에서 나라를 살려보기 위해 여러 세력을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친일이라고 알려진 것과 달리 일본 세력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위정척사파, 친청파, 친러파, 친미파 세력과 제휴하기도 했다. 오히려 한 세력에 일방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을 등용한 것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영의정과 총리대신을 지낸 것, 여러 차례 정권이 바뀌면서도 지속적으로 등용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한말 관료 중에 정무 능력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했다. 그래서 별명이 비 오는 날의 나막신이라고 불렸으며 최익현 등 일부 골수 위정척사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김홍집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갑신정변에서 살해당한 홍영식을 거만하다고 비판했던 매천 황현마저도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고 재간과 지략은 속류배가 따를 바가 못 되었다"며 "그의 죽음에 세인들은 모두 애석해했다."라고 평했다. 시인이자 사학자로서 죽기 전까지 친일파 연구를 해왔던 임종국은 김홍집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김홍집의 최후가 이렇게 숙연하거늘 어느 누가 그를 친일파라고 욕하겠는가? '일국의 총리로서 동족에게 죽는 게 '천명'이라고 갈파한 살신성인의 투철한 정치 책임으로 '일본의 앞잡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김홍집을 '한말의 위대한 정치가'라고 평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역사학자 박은숙 박사는 저서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에서 김옥균을 우호적으로 평가하며, 반대 급부로 김홍집을 비판하기도 했다.[34]3.1. 대외관[편집]
김홍집은 주변국 가운데 러시아를 가장 위협적으로 생각했고 이를 막기 위해 일본과 청나라의 힘을 적절히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김홍집이 처음 조선으로 가지고 들어온 <조선책략>의 내용이다. 조선 말기 개화파들의 특징이 자신들이 처음 배운 내용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했다는 것으로 청나라에 가서 양무운동을 보고 온 사람들은 친청파가 되었고 일본에 가서 메이지 유신을 접한 사람은 친일파가 되었으며 미국에 보빙사로 간 사람들은 친미파가 되었다. 대다수가 이런 식이었는데 김홍집은 조사 시찰단으로 일본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친일, <조선책략>으로 반러가 된 경우이다.
그러나 이를 해외 정세에 어두웠던 조선의 인물로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사고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러시아를 위협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조선 사람 김홍집뿐 아니라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배하기 전까지 당대 세계인들이 모두가 그랬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는 후대인의 관점에서는 말기 러시아 제국의 이런저런 문제점이 눈에 띄어서 속 빈 강정처럼 보이겠지만 19세기 말 당대인의 관점에서 러시아는 아시아를 정복할 기세의 대제국이었고 여기서 호적수는 오직 영국뿐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랬기 때문에 그레이트 게임 같은 국제적 쟁탈전이 벌어진 것이고,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배했을 때에도 세계적으로 경악을 불러일으킨 것이다.[35] 국제 정세상 만주에 더 관심이 많았던 러시아가 한반도 본토를 1차 타겟으로 잡고 있던[36] 일본보다는 나았음이 밝혀졌지만, 이 역시 역사를 다 알고 있는 현대인만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고, 당대인 시점에서 보면 베이징 조약으로 이미 기존에 인근 지역인 연해주를 청나라로부터 강탈해간 러시아를 더 경계하는 것이 당연했다.[37] 당시의 그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것을 김홍집이 몰랐다고 죄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생각은 이후 고종과 독립협회의 대립 과정에서도 다시 재현되는데 고종은 일본을 배제하고 러시아를 포함하여 협정을 맺으려 했고 독립협회는 러시아를 배제하고 일본을 포함하려고 했다. 특히 독립협회의 경우는 친미, 친일 세력이어서 자신들의 연줄인 미국과 일본을 옹호하려고 저런 주장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는데 김홍집은 당시에 만일 살아서 정계에 있었다면 고종을 위해서 일했을 위인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김홍집을 애국적 친일파 또는 친일적 애국자라 부르기도 한다.[38]4. 기타[편집]
김홍집의 사위는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인 성재 이시영이다. 이 인물은 이항복의 후손이기도 하다.5. 대중매체[편집]
- 1959년 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에서 배우 박암이 연기했다.
- 1994년 MBC 드라마 <새야 새야 파랑새야>에서는 배우 박영지가 연기했다.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 황태자를 교육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6. 둘러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