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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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熙完
1956년 10월 1일 ~

대한민국언론인 출신 정치인.

1956년 경기도 이천군에서 태어났다. 이후 서울특별시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중동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 기자로 근무하였다. 김영삼대통령의 수석 연설비서관을 역임하고 이후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하버드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석사를 졸업했다.

1985년 신문사 선배인 홍사덕 의원의 천거로 신한민주당 당직자가 되면서 정계에 발을 들였다. 신한민주당 이민우 총재 비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공보비서를 맡는 등 당시 야당의 젊은 인재로 촉망을 받았으나, 1990년 3당 합당에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에 잔류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 송파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통일국민당 조순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에는 민주당 조순 후보 캠프에서 기획단장을 맡았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서울특별시 송파구 갑 선거구에 다시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홍준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을 지냈다.[1] 당시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시민사회와의 소통에 적극적으로 나서 제법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99년 재보궐선거에서는 서울 송파구 갑이 공동여당인 자유민주연합 몫으로 정해지면서 자민련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0년 홍사덕을 따라 한나라당에 입당하였으나,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당선권에 들지 못하자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그 후 권노갑 아래에서 일하다가 최규선을 만나 최규선게이트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이로써 정계에서는 아웃되었고, 2007년에는 제이유 주수도 관련 비리로 구속기소 되어 징역 2년형을 받았다. 세무당국은 관련 비리 추징금은 회수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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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것이 사실상 유일한 공직 경력이어서, 훗날 안좋은 일로 언론에 오르내릴 때면 항상 "전 서울시 부시장"이라고 나오는 바람에 서울시 공보 담당자들이 난감해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