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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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
南北國時代


파일:발해 건국과 발전.jpg

678년 or 684년 or 698년~ 900년
이전
이후
삼국시대
후삼국시대
1. 개요
2. 시대적 특징
3. 남북국시대 개념의 역사
4. 현대 학계에서의 남북국시대 개념의 위치
5. 시대구분
5.1. 신라의 시대 구분
5.2. 발해(고려)의 시대 구분
6. 관련 창작물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남북국시대한국사시대구분 중 하나다. 넓게는 신라의 삼국통일전쟁부터 후삼국시대 이전까지, 좀 더 정확하고 좁게는 발해의 건국인 678년 or 684년 or 698년부터 견훤이 호남지방에서 봉기한 892년 혹은 신라가 후삼국으로 갈라진 900년까지를 말한다.

1990년대만 해도 삼국 통일 이후를 통일신라시대라고 칭하며 국사 교과서에서 가르쳤으나, 발해에 대한 재인식[1]이 이루어지면서부터 발해가 존재했기 때문에 엄밀하게 통일신라만의 시대라고 말할 수 없고, 따라서 남북국시대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남북국시대'를 '통일신라와 발해'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모순적인 측면은 엄존한다.[2] 어찌되었건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남북국시대라는 명칭은 그럼 적절한가라는 의문은 계속 지적되고 있다. 일단 신라에서 발해를 북국으로 불렀던 기록은 있지만, 발해에서 신라를 남국이라고 부른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 주요한 근거. 삼국의 경우 '삼한'이라는 의식을 공유하였고 수 세기간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한 반면, 신라와 발해는 서로를 동류 집단으로 인식했을 개연성이 삼국에 비해 적고 경쟁 또한 제한적이었으며 역사기간 내내 무관심의 태도로 일관하였다. 지극히 후대인의 기준인 남북국이라는 표현이 과연 옳은지 논란은 있다.[3]

한편 통일신라란 표현을 유지하는 이유는, 신라의 '통일'이 발해의 건국에 선행하였고[4], 신라의 국가체계 자체가 '통일' 이전과 달라졌으며, 신라의 삼한일통을 첫 통일로 여기는 관점이 전근대 내내 지속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발해 자체가 완전히 한국사에만 귀속되기보다는 경계사적 특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5][6]

당시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통합했다고 당시에 스스로 인식했던 것은 사실이다. 발해가 건국되기 이전인 7세기 후반부터 보덕국, 9주 5소경 행정구역 설정(옛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각각 3주씩 부여해서 9주), 9서당 설치 등 '고구려도 이제 신라의 일부'로 간주하고 여러가지 정책을 시행했고, 당시 신라는 고구려 왕족 안승을 고구려왕, 보덕국왕으로 봉하고 신라의 속국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완전히 흡수합병했다. 무엇보다 발해는 통일신라가 등장하고 나서도 무려 20년이 넘게 지나고 나서야 건국되었기 때문에 이 공백기간, 즉 지구상에 제대로 된 한국계 주권국으로는 신라뿐이었던 이 동안 신라인들 스스로가 삼국을 통일했다 믿고 있었어도 그렇게 틀린 생각은 아니었고, 영토가 아닌 국가의 흥망 기준으로만 보면 맞는 일이기도 했다. 어쨌든 기존의 백제와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에게 패배하고 멸망한게 사실이니까.

삼한일통을 신라가 삼국을 정리한 이후에 원활한 통치를 위해서 밀었던 프로파간다로 보는 시각이 있고, 그것이 일부 진행되었던 것을 한 차례 혼란기 후 고려 왕조가 이어받아서 완료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기 때문에, 삼국통일이라는 개념이 삼국시대 당시엔 없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삼국시대가 끝난 직후, 즉 통일신라라고 칭하는 국가부터는 확실히 삼국통일, 삼한일통이라는 의식이 존재했다. 삼국 간에 여러 모로 어느 정도 동질감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당시 중국 측의 기록에서도 삼국을 하나의 족속으로 묶어 기록한 부분이 보인다. 어쨌든 이런 신라의 삼국통일 선언 이후 30년이 지나 건국된 발해의 존재는 신라, 그리고 고려의 삼한일통 의식상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에, 고구려 후손은 맞는데 직계는 아니고 방계라는 식으로 애매한 취급을 했고, 삼국유민 의식이 소멸한 조선시대에 들어서야 한국사로서의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7]

중국의 동북공정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통일신라시대라고 칭하게 되는 순간 발해가 중국 역사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해 통일신라를 옹호하는 측은, 중국이 부여사를 기점으로 부여-고구려-백제-발해를 통째로 계통화하려는 시점에서 신라의 성공적 영토 확장을 비하하는 것은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견해로 맞서고 있다.

간혹 동북공정을 반대하는 사람조차 발해가 과연 한국만의 역사인지 의문을 가지거나 이것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분명히 한국과의 연관성이 높은건 사실이지만 말갈을 비롯한 여러 북방민족들도 있었고 주요 강역 및 인적 자원 역시 발해의 멸망 이후 한국사의 흐름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8]

2. 시대적 특징[편집]


파일:신라-발해교류.jpg
남북국시대의 교류.

이 시대는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났던 삼국시대의 전란을 종식시키고 수백년간의 평화기를 맞이하였다. 11세기~13세기의 고려, 조선 전기 200여년, 후기 250여년과 함께 한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평화로웠던 네 시대 중 하나이다. 그 중에서도 남북국시대는 고려시대처럼 대대적인 외침과 정벌이 없었고, 몇 차례의 반정과 내란은 있었지만 해를 넘기는 경우가 드물 정도로 안정된 시대였다. 발해는 기록이 부족하여 장문휴의 등주 침공 외에도 영토확장 과정에서 전쟁이 있었을 가능성은 크지만, 일단 고구려 때와 비교한다면 훨씬 분쟁이 적고 평화로웠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 입장에서도 고구려에 비해 발해의 중심지가 중국과 거리가 멀기도 했고 당 자체의 국력도 이전보다 쇠퇴한데다 발해가 전신인 고구려에 비해 덜 호전적이었기 때문이다. 당나라도 더 이상 초기처럼 대외원정에 집착하지 않았고 발해도 당의 권위를 적당히 인정해 균형을 이루었다.

남북 양국간의 충돌도 거의 없었는데 발해의 중심지는 고구려 시절보다 훨씬 북쪽이었고[9] 남북으로 대치한 두 나라 사이에서 본격적인 대규모 군사적 충돌은 수백 년 간 거의 없었다.[10] 발해 역시 신라는 물론 전 왕조 고구려와 달리 국가 초기 이후로는 당나라와의 무력 충돌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 역시 국가 내부가 안정되고 과거 적이었던 신라와 화친하면서 규모가 큰 무력 대립은 사라졌다.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이나 남북국 시대 후기로 가면 당나라 해적이나 거란족의 대두 같은 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전면전이 일상이었던 삼국시대와 비교하면 위협도는 확연히 적었다. 물론 한국과 일본측 사서들에서는 이 시기 일본이 신라를 병선 300척으로 공격했다가 곧바로 격퇴당했다거나 신라가 서일본 지역을 공격했다는 기록들도 꽤나 나와서 아예 대규모 무력충돌이 전혀 없었는지는 확실치 않은 부분들이 있기는 하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를 참조.

국가간 전면전이 사라지고 동아시아 정세가 안정화된 것에 덧붙여 이슬람 세계의 국제성에 힘입어 한반도 왕조에서도 국제적인 조류를 타, 중동까지 신라가 알려져 세계지도와 지리서에 신라의 이름이 등장하고, 발해는 모피 수출로 이름을 날리는 등의 족적을 남겼다. 국가간 인적 교류도 후대에 비해 더 활발했다. 8세기 후반 들어 당, 신라, 발해, 일본이 비슷한 시기에 모두 정치적 혼란 속에 빠지면서 국제성은 쇠퇴하고 연안 무역이 발달하긴 했지만, 9세기 초 발해와 신라가 약간의 회복세를 보이면서(선왕흥덕왕 등) '신라도'가 뚫리고 청해진이 설치되는 등 교역은 오히려 더 활성화되었다. 신라도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신라 북쪽 천정군의 '탄항관문'부터 발해 책성부(훈춘)까지 39개의 역참이 줄지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역에는 각각 필요한 기본적인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야 하고 역과 역 사이에는 도로도 관리되어야 한다. 교통로가 활요되지 않는데 수십 개의 역을 둘 필요는 없으므로 남북국간 교류는 실제로 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인적 교류 면에서도 예를 들어 박씨박혁거세로부터 비롯된 대표적인 신라계 성씨지만[11] 발해에서도 박어, 박승 등 벼슬을 지낸 인명이 확인된다.

두 나라는 9세기 초반에 중흥했으나 쇠퇴는 서로 비슷한 시기에 천천히 소리없이 다가왔다. 10세기 들어 당나라가 멸망하며 중원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야율아보기가 통합한 거란이 성장하여 발해와의 장기적인 소모전에 들어가 끝내 발해를 멸망시켰고, 신라 역시 진골들의 소모적인 내전 상황에 이은 민란의 폭발과 지방 호족 세력의 대두로 인해 쇠퇴했던 것이다. 결국 892년에 견훤이 호남에서 봉기한 것을 시작으로 후삼국으로 분열(후삼국시대)하였으며, 고려가 삼한의 재통일을 이룸으로써 남북국 시대는 완전히 종결된다.


3. 남북국시대 개념의 역사[편집]


신라의 삼국 통일론(삼국통일전쟁)은 고려 후기 ~ 조선 중기까지는 크게 지지를 받았고, 발해는 신라와 같은 정통 국가로 인식되지는 않는게 일반적이었다. 《고려사》에서 발해의 주체를 속말말갈이라고 하였고, 고려가 발해의 영토를 통합하지 못했음에도 태조가 즉위 19년만에 통일삼한(統一三韓)했다고 기록하였다. 《삼국유사》에서도 발해를 말갈의 무리와 섞인 것으로 서술해 신라에게 정통성을 부여하였고 신라가 일통삼한(一統三韓)했다고 명시했다. 고려 말의 《제왕운기》나 《고려도경》 등에서 고구려와 고려 사이의 계보로 발해가 들어가기도 하지만 조선 초기의 《동국통감》에서는 고려 태조의 대 거란 정책을 비판하면서 우리 민족과 발해의 연관성을 부정하였다.

비로소 신라 통일론에 있어서 본격적으로 반대적인 시각이 뚜렷히 드러난 건 조선 중기로, 가장 먼저 지적된 것은 영토의 불완전성 문제인데, 조선 중기의 한백겸(韓百謙)은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에서 이런 면을 수도의 위치와 연관시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정할 때는 그 규모가 크지 않으면 안 되며, 그 형세를 잘 살펴야 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초기에 당군이 철수한 뒤 수도를 국토의 중앙 지역으로 옮겨 사방을 제압하였다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할 수 있어, 부여와 요양 심양 지역을 우리 판도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어찌 저 거란이나 여진족(女眞)이 홀로 그 땅을 마음대로 차지할 수 있었겠는가.

신라의 군신이 일이 성사되자 쉽게 만족하여 한 모서리에 안주하여 당장의 안전을 추구하며 나날을 보내고, 서북 지역 태반을 헌신짝 버리듯 인접한 적들에게 내주어, 마침내 그 뒤 고려조에 이르기까지 7백여 년간 계속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어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으니, 어찌 가히 탄식치 않으리오.

동국지리지》 中

 
한백겸은 신라 지배층이 안정책을 취해 고구려의 옛 땅을 방기한 것을 비판하면서, 고구려 영토의 태반을 포기한 점이 결국 나라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며 불만스러운 점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는 신라의 삼국 통일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18세기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에서 통일신라의 정통성을 인정했지만,[12] 9주 5소경을 기술하면서, 위에 제시된 한백겸의 글을 인용하였다. 안정복도 고구려 영역 통합의 불완정성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것.

신라 삼국 통일론에 대한 불만이 높아진 것은 조선 후기,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다.[13]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거주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거주하면서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 씨가 동남쪽에 거주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으로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가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의 땅으로, 동쪽과 서쪽, 북쪽을 개척하여 (고구려의 영역)보다 더 넒었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한 뒤에 왕씨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하였는데, 남쪽으로 김씨의 땅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었지만, 북쪽으로는 대씨의 땅을 모두 소유하지 못하여, 그 나머지가 여진에 들어가기도 하고 거란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유득공(柳得恭), 1784년, 《발해고(渤海考)》 서문

유득공은 남북국시대론을 개진하면서 고려 통일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이는 결국 신라 삼국 통일론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신라 통일의 불완정성을 논하는 것은 결국 고구려의 영토를 신라가 제대로 통합하지 못했고, 그것 때문에 우리나라가 약소국이 되었다는 식의 인식과 연결되었다. 이런 인식이 근대에 들어와 민족주의와 연결되어 신라 통일론을 비판하고 남북국시대론을 진전시켰다. 그러면서 신라가 외세와 결탁하여 동족을 팔아먹었다는 식의 비자주성, 비민족성을 강조하여 비판하게 된 것이다.

파일:단재신채호.jpg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신채호가 1908년에 발표한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그는 신라의 통일을 부정하고, 신라와 발해의 양국 시대를 주장하였으며, 이종(異種)을 불러 동종(同種)을 멸함은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임과 다를 바 없는 행위라면서 신라의 통합 전쟁을 비난하였다. 신라가 민족적 역량과 영토의 축소를 가져왔으며, 외세와 결탁한 반민족적 행위로 사대주의(事大主義)의 독소를 심었다는 것이다.

삼국통일론과 남북국시대론을 둘러싼 논의에서, '민족'이 핵심 화두가 되었다.

역사의 도덕화, 이념화는 민족주의 사학의 주요 특성이고, 이에 따른 신라 통일론 비판과 남북국시대론의 강조의 사론은 20세기에 꾸준히 이어졌다. 그런가 하면 삼국시대에는 아직 민족 관념이 성립하지도 않았다면서 민족 관념으로 삼국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신라 통일론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671년,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보낸 문무왕의 서한에서 언급한, 대동강 이남 지역을 신라 영토로 한다는 무열왕당태종의 합의를 주된 논거로 하여, 신라 조정의 전쟁 목적이 삼국 통일이 아닌 백제의 병합이었다고 파악하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 설에서는 신라가 고구려 영역을 온전히 통합하지 못한 것은 본래 의도부터가 그러한 만큼, 이에 대한 비판은 삼국 통일론에 집착함으로서 야기된 자승자박적 비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남북국시대를 깊이 추구하다 보면 결국 통일신라라는 명칭에 대해 거부감을 보일 수 밖에 없고, 이에 따라 7세기 말 이후의 신라 국가의 명칭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유득공, 신채호등의 민족주의 관점에서 통일신라를 부정하고 발해를 통일신라와 동등한 민족국가로 간주하거나 신라보다 오히려 발해의 민족적 정통성과 자주성을 높이 평가해 남북국시대로 인정하면 논리적 모순이 생긴다. 즉 통일신라 개념을 유지한 상태에서는 요동을 상실한 민족적 쇠퇴의 책임을 통일신라에게 상당부분 물을 수 있겠으나, 민족적 정통성을 나눠가진 남북국 관점으로 보면 발해 멸망 후 [14] 한반도 깊숙한 곳에 수도를 둔 남쪽의 왕조(신라-고려-조선)처럼 면면히 계속되는 민족 국가를 만들지 못하고 중국과 유목민족에 동화[15]되어 민족의 판도에서 요동을 상실한 것은 이유야 어떻든 결국 발해인과 그 후손의 직접적 책임이기 때문이다.[16]

이러한 견해 등에서 일반적으로 공통적인 시각이 7세기 이전의 이른 시기에 한국 민족이 형성되어 있었고, 삼국이 중국과는 구분되는 소위 해동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식이다. 그런 인식에 의거하면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죄악의 행위이며, 그나마 온전히 통합하지 못하고 남은 일부가 따로 나라를 세웠으니, 이를 남북국시대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역시 상당하다. 삼국통일전쟁 문서의 해당 부분 참조.


4. 현대 학계에서의 남북국시대 개념의 위치[편집]


한국 학계에서도 남북국론에 서서 후기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이 시기의 역사를 서술한 개설서 등이 출간되었다.[17] 반면 북한 한계는 '후기 신라'라는 명칭을 본격적으로 사용했고, 초기에는 신라가 당과 결전을 벌여 이를 몰아낸 사실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다가 1960년대 이후부터는 발해사를 강조하고 신라 통일론을 부정하였다. 나중에 가면 오히려 더 발해에 비중을 두는 식으로 전개가 되었다.

사실 발해의 정체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학계에서 첨예한 논쟁 중이긴 하지만, 국내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나라이며 한국의 역사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는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이므로 1990년대 후반부터 국사 국정 교과서에 남북국시대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그러나 '통일신라'와 '남북국시대'라는 표현이 병존하고 있어, 이것이 모순적인 교육이라는 지적도 자주 있어 왔다. 물론 발해의 정체성에 대해 국내 학계에 회의적이거나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거부하는 표현.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각각 통일신라발해 문서 참고. 사실 '남북국'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면 신라와 발해의 당시 비중이 비슷하게 다루어져야 하겠지만, 발해에 대한 기록이 턱없이 적은 탓에 비중은 압도적으로 신라 연구 쪽으로 쏠려 있다. 서강대학교 이기백 교수를 위시한, 신라와 발해의 '남국 - 북국' 의식 주장에 대해 회의하는 입장에서는 아예 이러한 분류보다 '요동사' 개념을 도입하는 등의 시도를 하기도 했다. 신라가 발해를 '북국'으로 지칭한 기록은 분명하나(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 등), 발해가 신라를 '남국'으로 지칭했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게다가 이러한 표현 또한 남북국이란 말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단순한 방향 표시라는 주장이 제시되었는데, 예를 들어 발해는 일본을 남국으로 지칭하기도 해 신라만을 특별히 다룬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제시되었고, 신라 역시 최치원이 직접 남긴 <사산비명>(四山碑銘)에서 당나라를 일관적으로 서국(西國)이라고 불렀다.

2016년 한국사 국정교과서에 해당 시기인 7세기에서 9세기 사이를 남북국 시대가 아닌 통일신라 시대로 수정 기술될 것이라 알려져 한때 논란이 있었다. 교육부 관계자에 따르면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쓰게 되면 지금이 제2의 남북국시대로 볼 여지가 생기며 이는 북한 정권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한국일보 기사) 또한, 북한에서도 남북국 시대라고 부른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상술된 '남북국 시대라는 이름이 과연 적절한가?'는 차치하더라도, 남북국 시대 표현을 배제하는 데 있어 북한이 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신라와 발해를 묶어 남북국시대라 칭하는 것과 현 시대를 미래에 제2의 남북국 시대로 칭하게 되는 것은 단순한 추측일 뿐더러 별개의 문제지 않은가. 또, 남북국 시대란 명칭을 북한이 최초로 만든 것도 아니므로[18] 북한에서 쓰이는 명칭이라 하여 사용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에 뿌리를 두었던 신라가 최초로 통일을 이룩하였고, 거기에서 비롯된 국가적 정통성이 통일신라 - 고려 - 조선 - 대한민국으로 이어짐을 재확인하려 했다는 해석이 많다. 한국사 국정 교과서의 전반적 기조가 국가 정통성 강조이기 때문. 결국 논란 끝에 결과적으로는 남북국 시대로 표기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국정 교과서가 채 도입도 되기 전 폐지되면서 옛 논쟁으로 남게 되었다.


5. 시대구분[편집]



5.1. 신라의 시대 구분[편집]


신라는 남북국시대 이전부터 계속 존재했고 삼국시대가 끝나면서 고구려, 백제 유민을 포함한 삼한일통 의식을 내세웠기 때문에 이전 삼국 중 하나였던 신라와 구분하기 위해 통일신라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 시기 전체를 '통일신라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사라졌지만 이 시기의 두 나라 중 신라라는 나라를 특정해서 부를 때는 구분의 필요성은 존재하기 때문에[19] 통일신라라는 용어가 여전히 많이 사용되고 있는 편이다.

신라왕조 전체적 구분상으로는 삼국사기의 구분상으로는 대략 중대~하대, 삼국유사의 구분상으로는 하고(下古)에 해당한다.


5.2. 발해(고려)의 시대 구분[편집]


한국사 다른 주요 왕조에 비해 체계적인 구분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편인데 사회변혁을 알 수 있을만큼 많은 자료가 있지 않은데다 존속기간도 한국사 주요 왕조치고는 비교적 짧은 편이기도 하다.

건국과 성장기(걸걸중상 or 고왕 ~ 문왕, 678 or 684 or 698~793), 쇠퇴기(대원의 ~ 간왕, 793~818), 중흥기(선왕, 818~830, 일명 해동성국), 쇠퇴와 멸망(대현석 ~ 대인선, 871~926)까지의 후기 식으로 나누는 경우가 많지만 그때그때 다르다. 보통 선왕의 해동성국 시기를 중흥기라고 지칭하는 점은 일치하는 편이다


6. 관련 창작물[편집]


후삼국시대와 같이 소외되고 있는 시대로 관련 창작물이 많지 않은 편이다. 아무래도 앞 시대인 삼국 시대나 뒷 시대인 고려 시대에 비해 외적으로 평화로운 시대였기에 전쟁 영웅 같은 소재를 그리기는 어렵고, 정치 사극이나 퓨전 로맨스물의 배경은 주로 사료도 많고 인지도도 높은 조선 시대로 만들어지고 있어서 그렇다. 신라도 신라지만 발해는 기록 자체가 적어도 너무 적어서 완전 가상 스토리가 아니라면 뭘 만들기가 어려울 정도라 그렇기도 하다.

2백여 년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남북의 두 나라가 평화로우면서도 어떤 시대였는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시대를 공존하며 보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느낌이 들기도 하다. 당나라에서의 사신의 상석 논쟁이나,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시절 과거 시험에서 당나라의 관리더러 '발해인에게 편파적으로 유리하게 심사한다.'고 하며 시험 관리를 공정하게 해달라고 보낸 서한에서 발해인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한 사례를 보면, 두 나라 간의 라이벌 의식은 분명히 있었고, 이를 지금의 남북한관계에 대입해보면 제법 괜찮은 소재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20] 그리고 발해 쪽에서 써먹을 만한 소재로는 발해의 제 2대 왕인 무왕 대무예대문예 형제의 발해와 당나라를 넘나드는 기나긴 대립관계가 있다.

이 시대에서 예외적으로 꽤 인기가 있는 소재로 장보고가 있으며, 발해의 경우 대조영이 그나마 인지도가 있다.


  • 드라마
    • 원효
    • 해신
    • 대조영
    • 와이파이 한국인 장보고[21]

  • 소설
    • 대발해 - 대발해(만화)
    • 대조영 - 위의 드라마 대조영의 원작.
    • 진혼기



7. 관련 문서[편집]


[1] 예: 발해를 꿈꾸며가 대중가요로 불러질 정도로 해당 시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정치적으로도 북한과의 화해 무드에 접어들며 발해에 대한 대중의 관심 역시 전보다 높아졌다. 이 시기에 대조영(드라마)과 같은 발해 관련 컨텐츠도 제작되었고 역사스페셜 등에서도 발해사 재조명이 이루어졌다.[2] 남북국시대란 어려운 용어를 지양하는 초등학생 대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3] 물론 이런 시대사에 대한 논쟁은 원삼국시대, 삼국시대에 대해서도 끊임이 없다. 후술하겠지만 남북국시대라는 표현은, 미래의 후손들이 고려의 통일 이전 시대의 불완전성에 대한 평가와 더해, 당시의 두 국가를 한국사의 국가로서 포괄한다는 의지적 표현이란 점이다.[4] 즉 어찌되었든 고구려 멸망 시점에서 발해 건국 시점까지, 괴뢰국을 제외한 제대로 된 한국계 주권국은 지구상에 오직 신라뿐이었다.[5] 요즘은 신라의 삼국통일이 아닌, 신라의 정복 전쟁이란 표현도 종종 보인다. 다만 통일신라는 그 이전의 신라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기에, 통일신라라는 말을 대체하기는 쉽지 않다. '후기 신라'로 쓰면 간단할 것 같지만 신라 하대가 있기 때문에(...)[6] 삼국 시대의 삼국 중 하나인 신라676년 이후의 신라는 어떻게 보더라도 국가의 성격이 너무나 바뀌었기 때문에 구분하는 용어 자체가 없으면 상당히 문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은 당시에는 그냥 구분 없이 쭉 이어지는 '로마'라고 불렀는데, 그렇다고 현대인들이 그 둘 다 그냥 로마 제국이라고 부른다면 상당히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같은 나라라고 해도 용어 자체의 구분은 필요한 것이다. 후기신라, 대(大)신라 등 통일신라를 대신할 다른 용어가 제기되기도 했다. 신라의 국명 표기 문제는 통일신라 문서 참조. 애초에 천년왕조 신라도 신라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것도 아니었지만 다 신라로 퉁치는거랑 비슷하다. 다만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다른 전례가 없기 때문에 이 역시 논란을 낳는다.[7]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역사관에 따르면, 한 왕조가 새로 개창되면 같은 문화권의 전 왕조의 역사책을 정리해 편찬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지만 완전한 통일은 아니었고, 때문에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때 삼국사기가 편찬되었던 것이다. 발해는 고려 극초기까지는 동시대에 공존했고 정안국발해 유민 문제도 있어서, 고려가 다루기는 어려워 조선 때야 비로소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8] 발해의 한국 귀속 문제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요~금 치하의 발해계에게 발해인의 정체성이 존재했다는 점을 드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들이 한국의 고려 왕조가 아닌 북방 이민족 왕조 치하에 놓였음을 의미한다. 결국 수많은 발해인이 발해의 고토에 그대로 남아 현 한국인의 원류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은 발해를 순수한 한국사로 보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9]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450km 정도지만,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까지는 1천여 km에 달한다. 최전방 기준 거리를 따져도 신라 수도에서 고구려 국경까지 장수왕~문자명왕대 30km 언저리 까지 근접했었고 마찬가지로 진흥왕 이후 고구려 수도에서 신라 국경까지도 약 150km밖에 떨어지지 않았었기에 양국은 서로(+백제)에게 군사적 부담을 많이 느꼈다. 반면 신라와 발해 국경에서 신라 서라벌과 발해 상경까지는 각각 약 400km, 600km 가량 떨어져 있어 서로에게 군사적 부담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신라에게는 일본이, 발해에게는 거란이 더욱 큰 군사적 위협으로 다가왔으며 양국 모두에게 가장 큰 위협은 단연 패권국인 당나라였다.[10] 성덕왕의 733년 발해 공격의 경우 이는 가다가 폭설로 그냥 돌아왔고, 요사 지리지에서 발해 선왕이 신라에 승리한 기록, 일본 기록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신라가 발해에 승리한 기록 등이 전해지긴 하지만 실제 전쟁 상황이었는지는 학계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고 전쟁이 있었다 하더라도 전면전과는 거리가 먼 극히 제한적인 충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1] 현대에도 전세계의 박씨는 조선족이나 기타 재외동포를 포함하여 한민족, 한국계가 절대다수이다. 중국어 위키백과에도 박씨는 조선인(한민족) 특유의 성씨라고 서술되어 있다.[12] 안정복은 신라가 삼국 중 한 나라이던 시기는 한국사의 정통이 아니었고, 통일하면서 정통성을 가졌다고 보았다.[13] 즉, 근현대에 와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성장에 의해 발생한 불만이 아니라 이미 조선 시대부터 그 문제 의식이 생겨나고 있었다.[14] 정안국같은 발해 부흥 운동은 있었다[15] 세계사를 보면 국가의 흥망성쇠는 자연스러운 것이라 민족사적으로 보면 발해가 망한 것은 언어와 민족 정체성을 잃은 것과 비교하면 사소한 것이다. 실제 이집트에 끌려간 이스라엘 민족이나 쿠르드, 유럽의 발칸 소수민족은 국가 없이 수천년간 지배당하면서도 민족성을 지킨 사례가 있고 여진족만해도 고구려, 거란(요나라), 몽골(원나라), 명나라 같은 다양한(반농, 유목, 농경) 이민족 국가의 지배를 천 년 이상 받았으면서도 민족성을 지켜 결국 금, 후금(청)을 건국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만 보면 한족의 정복보다는 오히려 이민족 왕조로 중국 대륙을 정복했을 때 한족으로 동화된 사례가 많다. 만약 발해인이 민족성을 유지했다면 후금이 아니라 후발해가 건국됐을지도 모를 일이다.[16] 이스라엘, 아르메니아, 발칸 제민족 사례를 봐도 국가의 멸망과 독자적인 민족집단의 소멸은 완전히 다르므로 한족(漢族)과 유목민에 동화되어 민족성을 영원히 상실한 발해인의 책임을 거란군의 강력함으로 면죄부를 주려는 발상은 어불성설이다. 5호 16국처럼 중국을 정복했다가 오히려 漢族 문화에 동화되어 민족성을 상실한 유목 정복왕조는 많으나 발해처럼 피정복, 국가 멸망으로 민족성을 상실한 예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동아시아에서 정복으로 인한 민족성이 상실된 거의 유일한 사례는 건륭제가 멸족시킨 준가르가 있으나 그조차 러시아로 도망간 준가르 후손들은 현재 러시아 칼미키야 공화국에서 유럽에서 유일하게 불교 문화를 지키며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17]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 역사》,1997년, 제3장 발해와 그 문화, 제4장 후기 신라의 사회와 문화.[18] 위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조선 시대부터 이미 나온 명칭이다.[19] 예를 들어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이 근본적으로는 같은 나라였지만 편의상 시대별로 용어 구분이 필요해 구분해서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동로마 제국은 그 나라가 존재하던 그 당시에는 '그냥 로마 제국'이었다.[20] 당나라로 유학간 신라-발해의 두 주인공 간의 애증의 라이벌 구도나 공동경비구역 JSA, 모가디슈의 신라-발해 버전 등[21] 라디오 드라마이다, 장보고의 일생 외에도 이정기가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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