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정윤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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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南北朝正閏論

1. 개요
2. 북조정통론
3. 남조정통론
4. 삼종신기의 소재
5. 메이지 유신 이후
6. 현대


1. 개요[편집]


일본의 남북조시대에서 남조가 정통인가 북조가 정통인가 하는 논쟁이다. 다른 나라도 조위정통론이니 촉한정통론이니 하는 정통왕조 논쟁이 있긴 하지만 거의 흥미 위주의 논쟁인 데 비해 일본은 지금도 남북조의 후손인 황실이 있는 군주국이기 때문에 근현대까지 진지하게 논의되던 정통론 논쟁이다.

남북조정윤론은 크게 4가지 주장으로 나누어진다.


2. 북조정통론[편집]


북조정통론은 고다이고 덴노(後醍醐天皇) 이후 고곤 덴노(光厳天皇)로 정통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며, 남조 측은 고무라카미 덴노(後村上天皇)부터를 상황이 된 고다이고 덴노가 멋대로 세운 '남쪽의 가짜 군주(南方僞主)'로 파악한다. 삼종신기헤이안 시대 안토쿠 덴노와 삼신기가 교토에서 반출된 것과 같이 무단으로 반출된 것이므로 정통성을 증명할 수 없다. 따라서 남조의 천황에 대해서는 친왕으로만 호칭한다.

그러나 남조정통론이 북조를 완전히 무시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북조정통론도 남조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는데, 실질적으로 친왕으로 칭해진 남조 덴노는 조케이 덴노 정도이다. 고다이고 덴노는 어디까지나 '폐주' 정도로 취급됐고, 고무라카미 덴노고카메야마 덴노는 '대충 높은 은퇴한 황족' 자격이나마 고무라카미인(院), 고카메야마인으로 불렸다. 태상천황이 되지 않고 죽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천황이 그런 식의 추호(追号)로 불리던 시절이다.[1] 일본의 시호 참고. 그나마도 고카메야마 덴노는 퇴위한 천황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막부의 강권으로 조정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태상천황 칭호가 수여됐다.[2]


3. 남조정통론[편집]


남조정통론은 삼종신기의 소재와 고다이고 덴노의 직계로 이어지는 황통을 근거로 하여 남조의 정통성을 주장한다. 태평기가 유포되어 귀족, 무사 계층에서 남조에 동정적인 여론이 나타나게 되고, 에도 시대 도쿠카와 미쓰쿠니 등은 남조를 정통으로 파악하여 '대일본사'를 서술한다. 이 서적 간행 이후에는 귀족 층에도 남조 정통론이 널리 퍼지게 된다. 미야케 간란도 자신의 저서 중흥감언에서 남조정통론을 강조하였다.

남조정통론에 따르면 남조의 천황이 정통이며 북조의 천황은 가짜 군주이다. 북조는 고코마츠 덴노(後小松天皇)가 12촌 할아버지인 남조의 고카메야마 덴노(後亀山天皇)에게 선양을 받아 즉위한 것이 된다. [3]

물론 아직 황실이 북조정통론을 공식으로 하고 있는데 남조정통론이 북조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대일본사는 북조 천황들을 본기에 거의 부록처럼 끼워넣기는 했지만 본기라고 쓰긴 했고,(北朝五主紀) 인(院)을 그대로 사용했다. 대일본사는 정통 기전체 사서를 표방했으므로, 완전히 남조만을 정통으로 인정하려면 한서 이후의 전통에 따라 북조 천황들은 열전에 배치하거나 세가나 재기 항목을 만들어서 수록해야 한다.[4]

4. 삼종신기의 소재[편집]


삼종신기의 소재를 근거로 정통을 주장할 경우,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고다이고 덴노는 북조의 고곤 덴노에게 보낸 신기가 가짜라고 주장하였으나, 이 주장이 확실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다이고 덴노가 이즈모 신사에서 천총운검의 대체품으로 보검을 빌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나중에 교토를 점령했을 때 북조에서 삼종신기를 강탈해온다. 따라서 북조 역시 고곤 덴노는 즉위하는 시점에서 진짜 삼종신기를 썼을 가능성이 상당히 있기 때문이다.


5. 메이지 유신 이후[편집]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천황의 조정과 그 문신들은 '북조정통론'을 계속 유지했으며, '남조정통론'은 기본적으로 조정에서 정설로 인정된 이론은 아니었다. 사실 당연하다. 그 후로 이어진 천황의 조정은 직접적으로 북조를 계승했으며, 북조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남조는 단지 참칭 조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에도 시대부터 일본 국학이 나타나면서,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일본 국학에서는 초의제항우에게 옹립되었듯이, 북조 천황들이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옹립되었다는 이유로 북조의 정통성에 의문을 가지고 남조정통론을 주장하기 시작하여 지식인들 사이에서 남조정통론이 널리 퍼지게 된다.

그런데 이 상황은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자 커다란 모순으로 대두되었다. 결국 남조정통론과 존왕양이에 영향을 받은 메이지 정부는 남조정통론을 공인하게 되고, 천황의 조정이 전통적으로 받아들이던 북조정통론은 조정에서 폐기 처분되었다(…). 남조정통론이 받아들여지자 당장 역사교과서 단원 제목부터 '남북조시대'에서 '요시노(조정) 시대'로 바뀌었으며, 아시카가 다카우지 등을 역적으로 선포하는 등 여기저기서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천황 중심의 국가관 정립을 위해 국민들에게 남조정통론을 적극적으로 전파했다. 때문에 역사학계 혹은 교육계에서 북조를 조금이라도 옹호하는 소리의 '북'자만 나와도 언론통제 수준으로 탈탈 털어버리곤 했다. 예로 1934년, 사이토 마코토 내각에서 상공대신(현 경제산업대신)이었던 나카지마 구마키치는 어느 잡지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인간적으로는 뛰어난 인물이다'라고 기고했다가 귀족원화족들에게 역적 소리 듣고 상공대신 자리까지 사직해야 했다.


6. 현대[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천황과 황실의 공식적인 역사관은 남조정통론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천황의 대수는 남조의 천황을 기준으로 센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북조 계통인 이후 천황들의 정통성이 무작정 부정되지는 않고, 그런 적도 없다. 남조 정통론이 살벌한 위세를 발휘했던 일본 제국 시대에조차 북조 천황을 친왕으로 끌어내린 적은 없고, 당대부터 현재까지 황실 공식 족보에서도 북조 천황들에게 대수는 매기지 않을지언정 분명히 친왕이 아닌 천황이라고 칭하며 황실에서 제사를 올리는 것도 그대로 진행하고 있다. 유신지사들이 북조에 대한 제사를 줄이거나 끊는 방안을 어필한 적도 있었으나 상식적으로 북조 혈통을 이은 황실 입장에서 받아들일 만한 것이 아니었고, 유신지사들도 몇몇 문서에서 북조 천황들을 ○○천황이 아닌 ○○제(帝)라고 써본 것이 고작이었다.

남조와 북조의 선조는 원래 천황자리를 10년 씩 교대로 지내던 사이다. 고사가 덴노가 상황으로 물러난 뒤 4남 고후카쿠사 덴노가 즉위했는데 고후카쿠사 덴노의 후계를 고후카쿠사 덴노의 후손이 아닌 평소 총애하던 8남 가메야마 덴노의 아들인 고우다 덴노로 정했기 때문에 지묘인 계통(4남의 후손, 이후 북조)과 다이카쿠지 계통(8남의 후손, 이후 남조)가 돌아가면서 천황에 오르게 되었다. 무슨 이괄흥안군 추대하듯이 아무 황족 잡아다 옹립한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분쟁의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5]

하지만 패전 이후 천황 중심 역사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현재 대중들의 인식이나 역사 교과서 등에서는 남북조병립론이 정론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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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 덴노'로 통일되어 있는 시호 및 추호는 메이지 시대에 순차적으로 개정한 것이다.[2] 남조 측에서도 과거 우세를 점하고 교토를 점령했을 때 사로잡은 고곤 덴노, 고묘 덴노, 스코 덴노에게 태상천황 칭호를 비슷한 조건을 붙여 수여한 적이 있다.[3] 계보 (본인) 고코마츠 덴노 - (1) 고엔유 덴노 - (2) 고코곤 덴노 - (3) 고곤 덴노 - (4) 고후시미 덴노 - (5) 후시미 덴노 - (6) 고후카쿠사 덴노 - (7) 고사가 덴노 - (8) 가메야마 덴노 - (9) 고우다 덴노 - (10) 고다이고 덴노 - (11) 고무라카미 덴노 - (12) 고카메야마 덴노[4] 원래는 훨씬 더 깎아내려 썼으나 도저히 그대로는 조정에 제출할 수 없어서 대수정을 거쳤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다.[5] 고다이고 덴노 즉위 기준으로 고사가 덴노의 퇴위는 약 70년 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