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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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南原君奏議. 조선 전기의 문신인 양성지(梁誠之, 1415 ~ 1482)가 당시 왕이었던 세조에게 상주(上奏)한 글들을 직접 모아 편찬한 책.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편집]


서적12사상소문(書籍十二事上疏文)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양성지가 관료 재직 시절 세조에게 직접 상주하였던 글들을 모아 성종 13년인 1482년, 사망하기 직전에 편찬한 상소문 모음집이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3年, 壬寅 年, 明성화<成化>18年 기록에 따르면 봉장 10여통을 들고 춘추관(春秋館)의 요속(僚屬)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내가 평소에 선왕께 아뢴 것인데 《사기(史記)》와 아울러 기록할 만하다.’[1]고 하였으나 성종의 요속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크게 자책하며 이르기를 '세조(世祖)께서 나를 왕좌지재(王佐之才)가 될 만하고 제갈량(諸葛亮)에게 견주기까지 하였다.’[2] '하지만 이제 노부는 쓸모가 없다'[3]고 하고는 전후(前後) 소장(疏章)들을 모아 집에서 간행하고 이름을 《남원군주의(南原君奏議)》라 정한 후 사망하였다고 한다.

간략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독서와 서적정책(書籍政策), 도서의 보존 및 간행에 실효를 거두는 방법을 건의.
  •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우리나라의 중요 서책들을 모두 수집, 간행하여 보관케 할 것을 건의.
  • 자신이 제작에 참여한 의방유취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에 대한 학문 토론 진작 및 보존 대책 건의.
  • 자신이 직접 제작한 팔도지리지, 연변방수도(沿邊防戌圖),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 동국지도(東國地圖) 등이 가진 중요성과 이를 통한 한국의 종합 지리서 편찬 건의.

여기에 군정십책(軍政十策), 비변십책(備邊十策) 등이 포함된 버전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위의 서적, 독서 정책 내용들.
  • 요충지 중심의 지역방어 개념인 진관(鎭管) 체제를 제안하고 국방력 강화 강조.
  • 외적에게 몸을 낮추고 예물을 많이 바쳐(卑辭厚幣) 평화를 추구해서는 안되며, 반드시 한번은 적에게 크게 이겨 저들과 우리의 군사력이 대등한 수준에 있음을 보여준 후 수호(修好)를 해야 함.
  • 앞으로 중국의 역사가 아닌 우리 역사를 배워야 하며, 단군을 국조(國祖)로 받들고 단군과 삼국의 임금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야 함.
  • 우리 영토가 본래 요동을 포함한 ‘만리지국(萬里之國)’으로 우리 땅을 수복해야 함.
  • 신라의 노(弩) 기술자 구진천(仇珍川)이 당나라에 노를 만드는 기술을 알려주지 않은 것처럼, 앞으로 명나라 사신이 조선의 활을 구해가는 것을 막아야 함.
  • 무인(武人)을 우대하고, 여진족 가운데 귀순한 자들은 천대하지 말고, 조선 사람으로 만들 것.
  • 과거 선조들이 그랬듯 조선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함, 앞으로 환구단에서 천제(天祭)를 지낼 것.
  • 국가재정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 의창(義倉)을 설립할 것.
  • 제도적으로 점차 백정(白丁)들이 양민이 되는 길을 만들 것.
  • 혼례를 간단하게 하고 연찬(宴饌)도 절약하고 검소하게 할 것.
  •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雅樂)을 보호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할 것.
  • 궁벽한 시골에 의사를 보내고, 변방의 백성을 구휼할 것. 각 도 · 군 · 현에 의료기관을 설치할 것.
  • 노비에게만 노역을 시키지 말 것.

이러한 양성지의 상소문들에 대해 세조 때에는 왕이 전적으로 동의하고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세조 사후에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양성지 자신도 철저히 무시받다가 사망했다. 말년에 세조께서 날 왕좌지재라 부르며 제갈량에 비견하곤 하셨다고 주장했을 때 성종의 신하들이 '광릉(光陵)의 하교(下敎)가 농담(調戲)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4]며 비웃었을 정도였으니 어지간히 무시당했던 듯.

이 외에도 양성지의 문집인 눌재집(訥齋集)에는 양성지가 생전 세조에게 올렸던 주의(奏議) 34편, 상소문 330여 조가 남아 있어 이에 대해 더욱 자세히 연구해 볼 수 있다.


3.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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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是余平昔所奏也(시여평석소주야) 可幷載史(가병재사)[2] 世祖稱我(세조칭아) 爲王佐之才(위왕좌지재) 至比諸葛亮(지비제갈량)[3] 大怒自責曰(대노자책왈) 老夫無用(로부무용)[4] 聞者知光陵之敎(문자지광릉지교) 出於調戲(출어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