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침유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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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남침유도설의 주장과 반박
3.1. 이승만과 미국의 동상이몽
3.2. 전쟁전 미군의 철군
3.3. 국제적 동향
3.4. 미군의 신속한 개입
4. 러시아의 입장
5. 공산권의 주장
5.1. 소련
5.2. 중국
5.3. 북한


1. 개요[편집]


남침유도설()은 6.25 전쟁에서 미국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이다.

미국의 진보주의 언론가인 I.F.스톤이 최초로 주장했으며. 한국에서 유명해진 계기는 브루스 커밍스 교수에 의해서이다. 이후 종북 성향을 보이는 경우에서 북한의 전쟁범죄를 미화하기 위해 북침설로 짜맞춰서 언급한다.[1] 다만 I.F.스톤이나 브루스 커밍스는 종북주의자는 아니었고 북한을 미화하려는 관점에서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I.F.스톤의 경우, 북한이 전면침공하리라는 사실을 미국이 알고서도 봉쇄정책을 위해서 모른척 하면서 방치했다고 주장한다.[2]

남침유도설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NLPDR 좌익 학생 운동권이 주장하는 것과, 현실주의(국제관계)이론의 관점에서 주장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 NL운동권들의 주장은 미국이 한국군을 사주해서 북한을 침공하도록 해서,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던 북한군이 한국군의 침략을 물리치고 정당한 반격으로 남진하여 한국을 해방시키러 왔으며, 실제로도 전쟁이전에 남한측이 먼저 38선을 넘어선 선제공격과 도발이 많았다는게 증거라는 식의 주장으로, 사실상 북침설이다. 소련붕괴 이후 러시아가 소련 비밀문서고를 공개하면서 북한군이 대대적인 준비하에 전면적인 침공을 하였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지면서 사장되었다.

반면에 또다른 시각인 현실주의(국제관계)관점에서는 국가들은 이익을 목표로 행동한다고 보는데, 한국전쟁의 발발이 미국의 이익에 딱 맞아떨어진다는 점과, 미국이 북한군 침공 첩보를 의도적으로 묵살했다는 사실이 지적된다. 웨드마이어 보고서, NSC-68, SL-17 등의 기밀해제된 미국측의 문서가 증거로 제시된다. 미국은 여론이 중요한 민주주의 국가인데, 전통적으로 미국은 개입주의 대신에 고립주의 여론이 강했다. 그리고 당시 2차대전이 끝나고 염전여론으로 인한 대대적인 군축으로 미군의 상태가 형편없었다. 그런데 소련이 핵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미국의 대대적인 군비증강이 필요했다. 이러한 필요성을 절감하던 폴 니체(Paul Nitze)가 NSC-68을 준비한다.#그런데 NSC-68은 미국인들의 자유주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군국주의나 전체주의로 느껴질 정도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NSC-68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공산주의의 위협을 대대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전쟁이 발발할 필요성이 있었고, 매우 중요한 서유럽이나 일본에서 전쟁을 벌일 수는 없으니까, 혹시나 잃어도 그럭저럭 괜찮은, 덜 중요한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도록 했다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펜타곤보다 국무부가 더 호전적이었다는 점이다. 미국 국무부에서도 NSC-68과 한국전쟁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인정하긴 하고 있다.NSC-68 and the Korean War

고립주의와 개입주의(국제주의)의 갈등으로 보는 현실주의 관점에서는, 미국은 북한이 침공하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북한의 침공 첩보를 묵살하고 모른 척하였다. 북한이 침공하자 War plan SL-17 계획대로 진행하여 남한지역을 수복하였으나, 그 뒤로 괜히 맥아더가 욕심을 내서 38선 이북으로 북진했다가 말아먹었다고 평가한다. 오마 브래들리는 중공군 개입 이후의 한국전쟁을 '잘못된 시간과 장소에서, 잘못된 상대와 벌인 잘못된 전쟁'이라고 비판했다. 그래도 덕분에 수소폭탄 개발, 징병제 실시, 대대적인 군비증강과 신규 세금 징수를 요구한 NSC-68이 실행되었고, 이는 미국의 냉전승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당시 막 만들어진 나토에서 나토구성군 사령관을 누가 하느냐에 대한 의견대립이 지속되던 와중에 한국전쟁 발발덕분에, 미군이 사령관을 하는 것으로 결정났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는 주일미군에 반대하면서 미군 철수를 원하는 여론이 매우 많았고 안보투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주한미군이 철수한 한국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보여줌으로써, 주일미군이 철수하면 재미없을 거라는 것을 일본인들에게 보여주려 하였다. 또한 유엔군 형식의 경찰행동를 통하여 2차대전 전후질서인 유엔의 권위를 확립하고 상임이사국의 위상을 세웠다.

소련 비밀문서고 개방 이후에 제기된 현실주의 관점의 남침유도설로는, CIA 요원이었던 하리마오의 1998년 저서 '38선도 6.25 한국전쟁도 미국의 작품이었다'와 조지워싱턴대학 교수 리처드 쏜턴(Richard C. Thronton)이 2000년 저술한 『 Odd Man Out: Truman, Stalin, Mao,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이 있다.국방일보에서도 군사명저로 소개한 서적이며, 남침유도설 뿐만 아니라, 소련의 미국개입유도설과도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국내 번역본이름은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이며 한국국방연구원(KIDA)에서 출판하였는데 현재는 절판되어서 구할 수 없으며, 영어 원서만 가능하다.

NSC-68의 경고는 널리 알려졌다. 긴축예산을 고수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트루먼 대통령은 NSC-68과 그 문서에 함축된 모든 주장을 계속 반대했겠지만, 그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딘 애치슨은 이러한 상황을 "한국이 우리를 구했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제임스 캐럴, 전쟁의 집, 277p

1953년에 프린스턴 대학에서 개최된 세미나에서 애치슨의 동료가 "한국이 와서 우리를 구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를 위해 그 일을 해준 거죠"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애치슨은 "바로 그겁니다"라고 대답했다.

Bruce Cumings, "The Wicked Witch of the West is Dead", in Hogan, The End of the Cold War, 90.

제임스 캐럴, 전쟁의 집, 761p


우리는 왜 미국 국방부가 1950년 6월 19일부터 시작되는 1주일 동안 SL-17로 알려진 전쟁계획을 승인하고 퍼뜨렸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이 계획은 조선인민군의 침공, 부산 방어선으로의 즉각적인 후퇴와 부산 방어선의 방어, 그런 다음에는 인천에서의 육해공군의 합동 상륙작전을 가정했다.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그런데 이는 1950년 6월 18일 김일성이 북한군 전 부대에 전쟁 준비를 지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Joseph C. Coulden,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 41p




2. 역사[편집]


I. F. 스톤은 6.25 전쟁 진행중1952년에 발표한 그의 저서에서 미국과 유엔의 공식 자료를 분석하건대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았던 것을 보았다. 그는 전쟁의 발발에 대해 미국이 전혀 예상못했었다는 미 행정부의 주장을 의심하면서, 미국이나 남한이 전쟁을 일으킬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니라, 미국이나 남한이 전쟁이 임박했다는 것을 사전에 알면서도 북한으로 하여금 침략하지 못하도록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면서, 이것을 '침묵의 음모'라고 보았다. 이것은 몰락 위기에 처한 이승만 정권을 지키고 미국의 대 공산권 봉쇄전략을 실행하기 위해서 벌인 일이라고 정의했다. 1949년에 벌어진 몽금포 전투 때문에 남한북침설이 생기는걸 염려해 미국은 한국에게 정보차단을 요청하고 이에 한국은 참전병들의 입을 막았다는 증언이 있다.

스톤의 이론 다음으로 남침유도론을 한걸음 더 발전시킨 건 1960년대 초반 데이비드 W. 콩드였다. 콩드는 1945년 해방~1960년대를 다룬 논픽션 <조선 그 불행한 역사>[3]에서 좀더 조직적인 이론을 내새웠다. 이 이론대로라면 삼팔선 분쟁에 발 맞추어 미국과 이승만 정권이 남침과 확전을 유도했고 당일날 미국 군부는 그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역시 증거는 거의 없다고 보는 바다.

흔히 남침유도설의 선구자로 알려진 사람이 미국의 대표적 수정주의 사학자이자 한국학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이다. 브루스 커밍스가 관련 서적을 집필했을 때에는 소련이 아직 건재했던 냉전 시절이며, 당연히 소련의 기밀문서 따위는 입수할 도리가 없었다고 보았으며 일부 밝혀진 여러 공산권 자료들은 모두 미국이나 한국 정권이 조작한 것으로 치부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그런 정보의 제약 속에서 서방측에서 가지고 있던 정보만을 토대로 그의 대표작인 6.25 전쟁의 기원에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커밍스 자신은 기본적인 토양은 스톤의 이론을 긍정하나[4] 이런 저런 음모론 대신에 한국민족의 내적인 역량과 해방 이후 벌어진 혁명적인 움직임과 한국 권력자들의 탄압, 그리고 그러한 순수한 내전을 탄압하는 세력과 미국의 봉쇄주의자들의 결합이 6.25 전쟁이 국제전으로 벌어지는 중요한 요인으로 보았다.

이런 점에서 커밍스의 논지는 이전의 남침유도주의자들과 달리 미국과 한국이 유도했네가 아니라 남북한의 순수한 의미에서의 내전을 국제적인 분쟁으로 격화시키려는 움직임에 촛점을 두고 있어서 "전쟁을 누가 시작했고 어떻게 시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라는 것이 중점이다.

사실 브루스 커밍스는 남침유도설을 명확하게 주장한 적은 없고[5], '6.25 전쟁의 기원' 초판에 실린 내용은 1950년 6월 우발적으로 벌어진 소규모 국지전이 규모가 커지면서 국가간 전면전으로 비화됐다는 교전확대설에 가깝다.

즉, 흔히 말하는 미국이 한국을 시켜서 먼저 북한을 공격하게 해서 남침을 유도했다는 설은 커밍스의 작품이 아니라, NL학생 운동권들이 이전 사람들의 이론에 북한의 선전을 결부시켜서 음모론 수준으로 짜맞춘 것이고, 이것이 대한민국 국내에선 1980년대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학생들에게 친북/반미 정서가 휘몰아칠때 대대적으로 유포된 것이다. 또한 소련 붕괴 이전까지는 한국의 극단주의자의 주장에서는 수정주의 사관에 입각한 남침유도설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졌고 제기되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기밀해제된 공산권 문서 자료 공개 때문에 말 그대로 음모론의 수준으로 추락했으며 사실상 학계에서는 퇴출되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는데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6.25 전쟁 관련 문서를 넘겨주기 전에도 이미 일부 학자들이 그 문서를 열람하고 연구했었다. 브루스 커밍스 역시 그 중 하나. 그러나 이 자료들을 가지고 북한의 전쟁도발의 의지를 주장했던 웨더스비 부부의 의견에 대해서 자료의 취사조작이나 지나친 자기중심주의로 깐 사람이 바로 커밍스이다. 즉 커밍스도 이 자료를 이용했지만 믿지는 않았던 것이다.

한국학계에서는 이미 박명림 교수의 연구로 남침설이 정설로 다시 합의되고, NL운동권이 주장하는 북침설 식의 남침유도설은 완전 사장되었다. 이런 이유는 박교수의 연구가 미국기밀 문서를 연구해서 나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제정된 정보공개법(Freedom of Information Act) 덕분에 1950년대 1급기밀들이 30~50년이 넘어가면서 1980~1990년대에 대부분 공개하고 해제되면서 이전 추측설이 강한 연구들이 다 사장되었다. 이와 함께 박교수가 연구결과를 마무리하던 1990년대에는 소련붕괴로 누출된 기밀문서로 인해 공산권의 자세한 의도를 연구할 수 있었다.

결국 오랜 독재정권 시절에 형성된 주류에 대한 반감과 왜곡된 그리고 부실한 역사교육이 불러온 희대의 해프닝이다. 사실 남침유도설이라는 것이 기존의 역사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관점[6]이라서 왠지 그럴 듯해보이기 때문에 믿기가 쉽다. 특히나 한국 사회는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북한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논의가 불가능했으니 더더욱 그렇다. 아닌 게 아니라 한겨레21에서도 학계에서는 남침유도설이 유력하다는 어이없는 내용이 실리기도 했었다. 2006년 KBS 드라마 서울 1945에서 해당 속설을 반영하기도 했다.

음모론을 잠재우는 방법으로 투명한 정보공개가 효과적임을 증면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정병준 교수는 오히려 60년대 국방부에서 낸 책들을 호평한 바도 있다. 교차검증을 해본다면 북한 측 저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객관적이고 사실을 담았다고 평가했다. 예로 북한과 다르게 국방부 측 책에선 38선 국지전 당시 한국군이 선제공격한 사실도 담겨있다. 시대상황을 감안하면 상당히 자세하고 객관적으로 다뤘다. 물론 한국 측도 왜곡한 내용은 있고 정병준 교수도 책에서도 이점은 분명히 비판하고 있다.

2013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커밍스는 이 설을 말한적 없다고 부인했다. 과거의 이론을 부정한다기 보다는 일부에서 자신의 의견을 곡해하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브루스 커밍스, 6.25 전쟁을 말하다 인터뷰에서도 재차 강조하고 있듯이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의 핵심은 '한반도는 1945년부터 사실상 내전상태였고 1950년 6월 25일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이후의 전쟁도 남침유도설 보다는 교전확대설에 무게를 두고 있었으며, 지금도 교전의 연속을 통한 확전이라는 주장은 유지하고 있다. 브루스 커밍스가 남침유도설을 확정적으로 서술한 것처럼 퍼진 것은 냉정하게 말해서, 국내에서 '6.25 전쟁의 기원'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NL운동권이 주장하는 북침설 식의 남침유도설이 사장된 것이지, 미국이 냉전에 대응하는 세계전략의 일환으로 공산권 위협의 대대적인 부각이 필요하여, 북한군의 침공 첩보를 묵살하거나 방조하여 남침을 유도했다는 현실주의 관점의 가설이나 전후 미국의 고립주의 및 반전주의로 인해 사실상 국제적 군사행동에 소극적이였고 이로인해 일어난 비극이라는 주장은 학계에서 꽤 제기되고 있다. 위에서 나온 CIA 출신 요원도 주장하고, 국방일보에서도 소개하고, 국방연구원에서도 번역할 정도이다.


3. 남침유도설의 주장과 반박[편집]



3.1. 이승만과 미국의 동상이몽[편집]


6.25 전쟁 당시에 대한민국 국군의 전력은 조선인민군에 도저히 미치지 못했으며, 이는 개전 며칠만에 서울이 함락당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남침유도설에서는 이를 근거로 하여 미국이 의도적으로 한국군에 지원을 해주지 않아 한국군의 전력이 약해졌고, 그 결과 북한이 공격을 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사실 이건 논박의 여지가 없는 주장이다. 설령 미국이 남침 유도를 위해 지원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군사력 부족이 타당한 전쟁 명분이 될수 없으므로 결국 북한이 침략전쟁을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 왜 미국은 군사원조에 소극적이었는가? 당시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종료 직후 대규모 군축에 들어가며 잉여 군사장비가 말 그대로 넘쳐 흐르던 시절이라 한국이 요청하는 군사원조 정도는 별 무리 없이 지원이 가능했던 것처럼 보이고 이것이 남침 유도설의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한국, 정확히는 이승만의 비정상적인 군비지원 요구에 신물이 나있었다. 실제로 국군은 옹진반도의 국지전에서 북한군 1명을 죽이는데 105mm 곡사포탄 350발과 각종 박격포탄을 포함하여 14,700여발을 소모했다. 당시 한국군 포병대는 미군보다 더 많은 포탄을 소모하고 전과는 저 수준이었다. 당연히 이런 비상식적인 포탄 소모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당시 미국 자체가 한창 군축중이라 일본에 주둔중이던 미 제24사단 전체에 대전차고폭탄이 18발뿐이었을 정도였으니 한국군의 군비를 마냥 대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여기에 6.25 전쟁 10대 미스터리 문서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당시 이승만 정부의 대북 강경론은 미국은 물론이고 UN 한국소위원회조차 우려를 표하며 한국군의 탄약 불출에 제동을 걸 지경이었다. 당시엔 중국이 무너진 상태였고, 소련은 핵폭탄 개발에 성공해 핵 우위도 무너진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나 김일성 정부나 서로서로 고강도 도발 발언을 쏟아내는데 옆에서 보고 있자면 조마조마한 것도 당연.

이런 상황이니 미국은 한국이 북침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한국 대통령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외치고 있었고, 군부도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를 외치는 중이었다. 실제 1948~49년에 걸친 38선 무력충돌을 살펴봐도, 남한쪽의 선제공격이 상당 부분 있었다. 한국 정부가 북진통일의 의지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결론이 나지 않았는데 내부 정치적 목적 및 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설과 실제 북진을 하려고 했다는 설이 양립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실제로 북진 의사가 있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이러한 행위가 미국에게 이승만이 북한을 선제공격해서 북진통일을 시도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미국에 실로 얼토당토 않은 군사원조를 요구했다. 전차와 전투기[7] 각 수백 대에 잠수함과 구축함급 이상의 해군 함정 상당수[8]를 요구했는데, 이런 원조 요구를 듣고 미국은 이승만이 북진하겠다라는 것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거기다 이런 장비들을 구입이나 매매가 아니라, 군사원조랍 시고 공짜로 퍼주라 한 것이다.[9] 당연히 미국입장에선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10] 단순하게 생각해도 수백, 수천톤 하는 무기를 땅도 아닌 바다건너 나라에 주기위해 수십척의 수송선을 이용해야 할 것이고, 그 배에 들어갈 기름이며 수송선 운용인원에게 줄 월급을 계산한다고 하면 당연하지만 무상으로 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11]거기다 무기는 식량처럼 제공한다고 끝이 아니라 미국이 운용인원들을 교육시켜주고 운용에 필요한 물자까지 제공해줘야 하는 상황에서 상술한대로 현대전 군사훈련은 거의 되어있지 않은 국군의 수준을 보고도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으니 미국입장에서 주겠는가.

추가적으로 당시 미국의 유럽 외 지역에 대한 무지도 고려해야 한다. 지금에서야 모두가 한국전쟁의 전사를 익히 알고 있으니 당시 미국의 대응을 한목소리로 비난하지만, 1950년 1월 당시 구미 서방의 관점에서 제대로 근대화되었다고 할만한 군대는 동아시아 지역에선 사실상 전무했다. 그나마 근대화에 근접했던 일본군은 미군에게 처절하게 털린 끝에 아예 해체되었고, 미국이 지원해준 중국 국부군은 부정부패 끝에 고작 치하 따위가 중장비의 전부인 알보병 중공군에게 대륙을 포기하고 대만으로 도주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딴에는 미국식 훈련 프로그램과 미국제 장비로 무장을 시켜주고 미군 고문이 직접 자문을 해주는 한국군 정도면 서방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 신생국치고 그럭저럭 괜찮은 군대로 평가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아직 국군 창설도 채 3년이 되지 않아 훈련이 제대로 되어있을리도 없었다.

때문에 미국은 한국의 군사원조 요구를 수용하기는 커녕, 한국정부 자체 예산으로 시도하는 무기 도입이나 일본군이 남기고 간 폐기물자 도입에도 태클을 걸었다. 덕분에 공군은 멀쩡한 전투기 놔두고 캐나다에서 연습기 사와야 했고, 해군은 퇴역해서 스크랩 처분 기다리던 연안초계함 사들고 와야 했다. 물론 방어전에 사용할 무기는 제공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57mm 대전차포이다.

그 결과는 너무나 참담했다. 서울은 3일만에 함락당했고, 전쟁 2달만에 전선은 낙동강까지 밀려났다. 몇몇 국군 부대의 결사적인 저항과 주일미군을 선두로 유엔군의 참전이 아니었다면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를 일이다.

사실 유엔군 참전에는 소련의 묵인도 컸다.

일단, 국공내전 패배로 중화민국이 타이완으로 쫓겨나자 소련은 중국 정통정부의 권한(상임이사국)을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이동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 국가들은 이를 무시했다. 그러자 소련은 유엔 회의에 보이콧을 선언했고 마침 그 사이에 한국전쟁이 터지자 유엔은 곧바로 파병을 결의한 것이다.

당대에는 이것이 행운이었다고 생각했지만, 냉전이후 소련의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애초에 스탈린의 의중 자체가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한국전에 참전하는 것을 유도하는 데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유엔과 미국이 한국전에 집중하는 동안 소련은 비교적 동유럽에 집중할 수 있고 스탈린 역시 유럽을 더 우선시 했기 때문이다.[12]

물론 소련이 UN 회의에서 반대를 표명했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직접 개입하는 방식으로 참전했겠지만, 그 사이의 지연이 전황을 어떻게 바꿔놓았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뀌었을 전황은 절대 남한과 미국에게 유리했을 리 없다.

즉, 45~50년사이 한반도의 방위를 관리할 미군의 대비는 '남침유도'는 커녕, 제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는 정도로 보아야 합리적이고, 이는 미국의 희망사항일 뿐 명백한 전략적 실수였다는 것만 부각한다. 실제로 이시기는 겉으로만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었을뿐 냉전은 진작에 시작되었고, 소련이 직접 또는 공산권 동맹을 통해 바다로 나갈수 있는 길목에 있는 나라들(그리스,베트남,한국 등등)은 전부 전쟁터가 되었으며, 그 중요한 길목중 하나인 한반도에서 국지전을 억제할 충분한 전력이 있었어야 북한에 반격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실제는 미군이 참전하고도 인천 상륙작전 전까지 버틸 수가 없었다.

3.2. 전쟁전 미군의 철군[편집]


전쟁전 미군이 한국에서 철군한 것을 가지고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당시 미군은 한국을 '방어' 하기 위해 온것이 아니라,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한국에 상륙한 것이다. 당시 38선이 분단선, 국경선이 아닌 '무장 해제선'인 이유도 이때문이다. 실제로 미군은 일본군을 순차적으로 무장해제 시킨 이후 원칙적으로 철군 한 것이다. 또한 소련을 위시한 공산국가에서 철군을 요구하기도 했다. 1949년 소련군이 북한에서 최종적으로 철군하고, 소련이 미군의 주둔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자 미국도 이를 받아들이고 소련과 비슷하게 군사고문단 정도만 한국에 주둔시키고 철군하였다.

즉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현대의 주한미군과 당시 주둔한 미군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주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3.3. 국제적 동향[편집]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태평양-아시아에서의 미국 방위선을 설명하며 그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 인도차이나 반도를 제외시켰다. 소위 애치슨 라인이다. 때문에 남침유도설을 지지하는 쪽에선 미국이 의도적으로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하여 북한의 침공을 유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당시 미국의 핵심 전략과 가상적국이 누구인지 살펴봐야 한다. 당연히 소련이다. 미국의 대소련 전략에서 핵심 구상은 유럽전역에서의 방어전과 이후의 역습이었다.

미국과 그 동맹국은 소련에 비해 육군 규모가 작아서 지상전 전선은 최대한 축소해야 했고, 반면 해상전력은 압도적으로 우월해서 육로로 연결되지 않은 곳이거나 비중이 낮은 곳은 과감히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당시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은 유럽이었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선 해군으로 방어가 가능한 해상작전 중심의 전선만 유지하면 충분했으며 그 최전방이 바로 일본이었다. 육로로 연결된 한국은 관심외 대상이자 애시당초 소련과의 제3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 포기할 동네였다. 이를 근거로 애치슨 선언이 남침유도한게 아니라고 해석하나, 오히려 한국은 버려도 되기에 마침 전쟁이 일어나 공산권의 위협을 대대적으로 부각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서, 굳이 전쟁이 일어나야 한다면, 별로 가치 없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도록 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또한 애치슨 라인을 확대해석하여 " 미국의 방위지대에서 완전히 배제한다 "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실상은 그저 최우선 방어지점을 애치슨 라인으로 그은 것일 뿐, 배제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즉 전략적 거점을 라인으로 그엇을 뿐이지 방위지대 밖은 아애 포기한다라는게 아니라는 것. 실제로 조약문의 내용을 보면 방어적 주위(defensive perimeter)와 같은 표현이 많이쓰인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것 처럼 미국의 대소 전략이 방어전 이후 역습이였기 때문이다. 만약 3차대전이 일어날 경우 라인안쪽은 방어전을 수행하기 위해 무조건 필요한 땅이고, 방위선 밖은 방어전을 치름에 있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땅이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마디로 공산권에게는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가능성을 시사하면서도, 엄밀히 말해서는 포기하지 않았기에, 남침을 유도하면서도, 미군이 개입할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거기다 라인안에 들어간 지역을 보면 모두 미군이 직접적으로 관할할 수 있는 지역이다. 알류샨 열도는 미국 땅이였고, 필리핀은 당시 미국 산하의 필리핀 자치령 이었다.[13]일본도 말이 독립국이지 사실상 미군의 점령지였기 때문에 유사시 바로 육군을 배치, 방어전을 수행하기에 좋았다. 반대로 한국의 경우 독립국[14]에 자국의 군대까지 있었음으로 오히려 애치슨 라인안에 넣었다면 국제적으로도 큰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군이 방어하기 좋은 섬임에도 불구하고 타이완은 애치슨 라인에서 빠져있다. 덕분에 타이완도 대만위기를 겪었다.
자세한 내용은애치슨 라인참고

여기서 미국의 군사 산업 증강을 논한 NSC-68을 남침유도설의 근거로 삼기도 하는데, 이 문서는 애치슨 선언보다 후에 결의된 것이라며 부정하기도 한다.(1950년 4월 14일) 군수 장비를 증강하는 안을 결정하고 전쟁을 유도해야 할 텐데 아니라면서 남침유도설을 부정하기도 하나, 전쟁이 발발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고, 그러한 와중에 그에 부합하는 문서가 작성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애초에 비슷한 시기에 작성되었다. 1949년 12월 30일(애치슨 선언에서 겨우 2주 전이다!) 발표된 NSC-48에서는 북한의 침공에 대해서는 반격해서 몰아내되, 소련의 전면적인 대규모 침공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여기서는 남한을 포기하는 안도 계획되어 있다. 오죽하면 스탈린이 이 문서를 스파이를 통해 몰래 입수하고 전쟁에 동의했다는 설까지 있을 정도있고, 그래서 애치슨 선언으로 남침을 하게 되었다고 해석 가능하다.


3.4. 미군의 신속한 개입[편집]


미군 선발대인 스미스 대대는 7월 초에 한국에 전개했고, 본대인 24사단도 곧 한국에 도착했다. 의도적인 남침유도였기 때문에 미군이 이렇게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남침유도설의 주장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미군 점령하에 놓여 있었다. 당연히 일본에 미군이 있을 수밖에 없고, 이들이 옆동네인 한국에 신속하게 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24사단은 제대로 된 중장비도 없이 거의 몸만으로 한국에 전개했기 때문에 제대로된 전투부대로 투입된 것이 아니었고, 그에 속한 스미스 대대는 더 열악해서 한국군의 제 3군단에 군사고문 및 전황 파악을 위해 대전에 투입되었다가 북한군한태 패배하였다.

무엇보다 이들 미군은 북한군에게 털렸다. 미군에겐 T-34에 맞설만한 대전차무기도, 맞상대할 전차도 없었다. 군수 장비를 팔겠다면서 정작 '팔아야 할' 군수 장비는 갖춰놓지 않은 것이 말이나 될까?앞서 해보기? 게다가 장비 이전에 사단 병력 확보도 안 되어, 영창에 수감 중이던 애들까지 다 꺼내오고 구석에 박아놓은 전차도 수리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당시 유명한 일화로 하와이에 전시해놓은 셔먼전차와 퍼싱전차를 끌어오고, 그것마저 부족하여 박물관에 전시중이던 무기들까지 급하게 끌어모아서 전쟁을 했다. 의도적으로 남침을 유도한 미국이 이렇게 어설픈 애들을 초반에 파견해서 개털리고 자국군 희생을 키울까?

다만 이건 운동권이 주장하는 허술한 남침유도론에 대한 반박으로서만 유효하고, 현실주의 이론의 관점에서는 NSC-68의 논지에서, 군축으로 형편없게 된 미군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줌으로 대대적인 군비증강의 필요성을 절감하도록 시위했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SL-17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초기 미군의 패배와, 낙동강 전선까지의 후퇴, 인천상륙작전까지 전부 미군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 공개되었다.


4. 러시아의 입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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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당시.

소련이 붕괴되고 나서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역사를 바로잡고 한국에 우호적인 모습을 많이 보였다. 1994년 6월 2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는 상징적이고, 역사적인 일이 있었다. 러시아와 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러시아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김 대통령에게 검은 서류 상자 하나를 건넸다. 한국전쟁 전후 김일성의 남침계획 등을 담은 고문서 사본이었다. 사실 한국전쟁의 북침설이 역사왜곡으로 논파 되었던 건 그간 한국과 러시아의 몇몇 전문가들에 의해 이미 결론이 난 상태이지만 정부 대 정부로 관련 공식문건을 주고받고 이번이 처음이었다.


5. 공산권의 주장[편집]



5.1. 소련[편집]


한때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은 6.25 전쟁 와중인 1951년 12월, 북한과 함께 북침설 자료집 편찬을 하는 등 북침설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북침설’ 자료집 편찬을 기획한 총책임자는 테렌티 시티코프 북한 주재 초대 소련대사였다. 정작 책은 시트코프 대사가 전황(戰況)에 대한 책임을 물어 본국으로 소환된 직후인 1951년 12월 출간된다.

소련 당국은 대외적으로 북한의 남침을 부인해온 것과 달리, 1960년대 말부터 내부적으로 기밀문서에는 북한의 남침을 기정사실로 인정했던 문서가 존재하는 것이 확인이 되었다.#


5.2. 중국[편집]


중국에서는 대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미국의 압제에 시달리는 한반도의 인민을 도우러 의용군을 보냈다는 식으로 가리키며 누구 책임인가는 교묘하게 언급 안 한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김일성의 미친 전쟁이라면서 거의 이를 가는 분위기였으나 중국 외교에 있어 북한의 입지 때문에 입 쓱 다물고 소문 안나는 비밀외교에서만 항의하는 수준이었다.[15] 그러나 2013년 기준으로는 중국에서도 가방끈 긴 사람들은 대부분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알고 있다. 1996년 국방일보에선 1면으로 중국이 남침유도설을 북한의 남침으로 역사 교과서에서 바꾼다고 기사를 냈다가 언론으로 알려지면서 중국대사관의 항의를 듣고 국방일보답지 않게 정정 기사를 싣은 바 있다. 이는 90년대 북중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중국공산당 내부에서조차 김일성이를 도와준게 최대 실수였다는 비난이 나오는 것을 보고 부화뇌동한 기사로 보이는데, 아무리 북중관계가 나빠져도 중국이 그걸 대놓고 인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중국에서 6.25 전쟁 참전을 합리화하는 명분은 '남한군과 미군이 북한의 침략을 받은 다음 반격하여 38도선을 넘어 점령했기 때문에 이는 방어전쟁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침략이 되었으므로 중국군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어이가 없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식이면 소련은 동프로이센 앞까지 진격한 다음부터는 소련 스스로도 인정하는 독일 영토니 그 전까지의 피해가 얼마나 심하건, 히틀러가 어떤 인간이건 간에 나치 독일과 휴전했어야만 한다.[16]

어찌되었든 미국과 한국이 듣기엔 흠좀무하긴 하지만, 주로 중국 측의 주된 주장은 '미국이 잘못했으니 그래서 우리가 싸우러 갔다' 쪽이고, 남한과 북한 간에서는 '북한이 남한을 먼져 쳤다' 는 점은 이미 냉전 기간부터 가르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엔 소련,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도 '남한이 먼저 잘못했다' 라고 누명 북한의 입장을 따랐으나, 사실 공산권 쪽에서 김일성이 남침을 반드시 해야겠다고 바득바득 우겨댄 걸 본인들도 잘 알고, 억지스러운 주장이니.. 결론적으로 중국 측은 이 전쟁에 대해선 미국의 개입 건을 문제삼아 계속 태클을 걸고 있긴 하지만, 북한이 선제공격을 했다고 가르친다.

2020년 기준으로 시진핑이 집권하면서 다시 중국의 교과서를 비롯한 영화, 드라마 등에서 노골적으로 왜곡하려고 하고 있다.# 지금도 6.25전쟁 기밀 문서 공개를 꺼리고 있으며, 독재 국가 답게 긍정과 부정설 모두 검열하며 삭제하고 있다.

한 중국 학자는 중국 정부가 북한의 남침설을 공식 인정하게 될 시점은 중국과 북한이 공개적으로 분열하는 때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5.3. 북한[편집]


6.25 전쟁의 발발과 경과에 대한 북한의 주장은 이러하다. "미국이 남한군을 철저히 강화한 다음 남한군을 사주하여 북한을 침공, 북한은 여기에 반격하여 미국을 참패시키고 승리하였다, 정전협정은 미국의 항복문서이다"(...).

북한에서는 남한의 북침에 반격한 것이 6.25 전쟁이라고 가르친다. 북한의 주장은 남침유도설이 아니라, 그냥 '북침설'이며 게다가 정전협정은 '미국의 항복문서'이고 '북한이 전쟁에서 이겼다'는 것이다. 기가 막힌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북한에서는 '남침유도설'조차도 입 밖에 냈다가는 반동으로 몰리게 될 듯하다. 브루스 커밍스 역시 북한에서 별로 자기 의견 지지하지도 않으며, 자신을 친북으로 몰아붙이는 시각들에 불쾌감을 표시했다. 북한은 현재 유일하게 북침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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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놀랍게도 2020년대에도 북침설을 물고 나오는 사람들은 있다. 민플러스에서 정발한 A.B. 에이브럼스의 '끝나지 않은 전쟁'이 북침설을 주장하는데 학계에서는 대놓고 쓰레기라고 쌍욕하는 수준. 이 에이브럼스란 자도 전문가를 자칭하지만 정체조차 불분명하다.[2] 비슷한 경우로 일본의 전쟁범죄를 비판하고 평화주의, 반전주의를 주장했던 데즈카 오사무아돌프에게 고한다라는 만화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진주만 공습을 방조했다는 식의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사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암호를 모조리 해독하고 있었다. 일본이 선전포고문을 작성한 것도 진주만 공습이 이뤄지기 전에 이미 해독해서 알고 있었으며, 당시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일본 대사관은 도청중이었다.[3] 제목이 엄한 이유는 꽁뜨의 책 자체가 일본에서만 번역이 가능해서였다. 한국에서는 80년대 해적판으로 한국전쟁과 미국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4] 심지어 스톤의 핵심 주장 중 하나인 6.25 전쟁 발발 직전의 대만 미곡 시장 음모론도 그의 저서에 심도있게 실어준다.[5] 대신 위에도 언급됐듯이 남침유도론자들의 주장한 부수적인 음모론에는 이런저런 관심을 보여줬다.[6] 사실 이런 수정주의는 다양한 극단주의자들에게서 주장된다.[7] 심지어 미국에서도 당시 최신예였던 제트 전투기 P-80 슈팅스타를 요구했다. 당장 남한에는 가미카제 훈련받던 조종사 후보들 몇명밖에 안남았고, 당시엔 P-51 머스탱이나 F4U 콜세어가 현역이던 참이었다.[8] 중순양함급 함정도 수 척을 요구했었다.[9] 심지어 북한도 탱크 및 미그기를 도입하기 위해 스탈린을 조르고 졸랐지만 당연히 무상지원은 묵살당했고, 텅스텐 등 지하자원을 팔아다 도입한 것이다. 그나마 당시 소련은 전후 복구를 위한 자원 + 도태된 구형 무기처분 + 공산주의 큰형님 이미지를 유지시키기 위에 싼값에 대충 넘긴 것이고, 북한도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이 북한의 지하자원 개발과 중공업에 집중투자한 공장이 남아 저정도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지하자원이라곤 석탄 조금에 발전량도 모자라 북한에 전기를 빌려쓰던 가난한 남한 입장에서는 무상지원 말고는 답이 없었다.[10] 손원일 함장이 쓸만한 전투함을 산다고 했을 때 정부에서 지원금도 주고 국민들이 겨우겨우 번 돈 모아 사온 배가 순양함은 커녕 구축함보다도 작은, 싸게싸게 뽑아서 대충 연안방어용으로 쓰던 백두산함임을 생각하자. 아무리 군축중인 미국이라도 이런 장비들을 무료로 내놓으라고 하니 미국입장에서는 얼척이 없었을 것이다.[11] 이 때문에 미국은 평화유지군 등으로 군을 파견한 이후 철군할때 대부분의 무기를 현지에 그냥 버려두거나 암암리에 판매하거나 현지 군경에게 판매 혹은 지원 경우도 존재한다. 국내로 반입하면 수송비도 많이들고, 절차도 복잡하기 때문이다. 당장 한국전쟁 이후 랜드리스로 소련에 넘겨준 구축함들을 한국 해군에 무상으로 넘겨주는가 하면, 레바논 내전당시 평화유지군이던 미군이 철수하면서 버리고 간 무기가 무기밀매상 손에 들어가 문제가 된 적이 있다.[12] 스탈린이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클레멘트 고트발트에게 보낸 서신에서 확인되는 내용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해준 것은 미군 개입 이전에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김일성의 주접 때문이었는데, 미국이 한반도에 발이 묶이길 기대했다면 앞뒤가 안맞는 소리가 되기 때문에 예상 외로 미군이 대대적으로 개입하자 스탈린이 정신승리를 시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또 다른 의견으로, 스탈린은 한반도가 적화통일되면 그거대로 좋고, 미군개입으로 적화통일에 실패하면, 중국군이 순망치한으로 개입할테고, 잠재적인 경쟁자인 중국을 소모시키면서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놓게 되니까 어떻게 되더라도 좋았으리라고 계산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스탈린 생전에는 계속 딴죽걸면서 휴전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스탈린이 죽고나서 매우 빠르게 휴전협상이 진행되어서 전쟁이 끝났다.[13] 이때문에 미군 사령관인 맥아더가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하기 전까진 미군소속 필리핀군 고문직 이었다.[14] 그것도 중립국이나 전 식민지가 아니라 2차대전에 참가해 연합국에 도움을 준 승전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15] 가령 1956년 9월, 중국공산당 9차 당대회 때 조선로동당 대표단장 최용건에게 펑더화이, 리커눙 등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남침의 책임을 물으며 조선로동당 측을 맹비난했고 마오쩌둥도 내가 그러게 전쟁 하지 말랬잖아 라고 최용건을 꾸짖었다. 물론 마오쩌둥도 초기엔 동의했던 건 함정이다. 자신에게 통보도 안하고 졸속으로 전쟁해서 문제였지.[16] 더 황당한 사실은 중국공산당도 국공내전 당시 먼저 침공당한 측으로서 옌안까지 점령당할 정도로 초기에 조금 밀렸는데 그 이후 국민당군에게 내줬던 지역을 수복한 후 자기들이 역공했다. 중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견해를 여기에 대입해 보면 중국공산당은 점령당한 지역들만 되찾고 휴전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내로남불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