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회사 거품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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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주요 경제/금융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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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 경제 | 제2차 세계 대전
대침체가 정확히 언제 끝났는지는 경제학자나 역사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20세기 이전
(연준 이전)
네덜란드 튤립 투기 파동(1636) · 미시시피 거품(1718) · 남해회사 거품 사태(1720) · 1792년 공황(1792)· 1819년 공황(1819) · 1837년 공황(1837) · 1857년 공황(1857) · 검은 금요일(1869) · 당백전(1866) · 장기불황(1873-1896) · 1907년 은행 패닉(1907)
20세기
(연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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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2002년 가계 신용카드 대출 부실 사태(2002) ·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2007) · 대침체(2008-) · 짐바브웨 초인플레이션(2008-) · 그리스 경제위기(2008-)
2010년대
베네수엘라 초인플레이션과 경제위기(2014) · 2014 브라질 경제위기(2014-2017) · 2015-2016년 중국 증시 폭락(2015-) · 브렉시트 증시 폭락(2016) · 튀르키예 리라화 폭락(2018-) · 아르헨티나 통화 위기(2018-) · 레바논 경제 위기(2019-)
20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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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lh5.googleusercontent.com/the-south-sea-bubble.jpg
파일:attachment/largecompany.jpg
남해회사의 주가 변동(위)과 기업 규모(아래)[1][2]
1. 개요
2. 사건 진행
2.1. 남해회사의 설립과 운영
2.2. 주식 발매와 투자 광풍
2.3. 거품 붕괴
3. 영향과 의의
4. 미디어 및 여담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남해 거품(South Sea Bubble) 또는 남해 포말()[3]1720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에서 노예 무역에 관한 특권을 가졌던 주식회사 '사우스 시(the South Sea, 이하 남해회사)'로 인해 발생한 거품경제 현상이다. 네덜란드 공화국튤립 파동, 프랑스 왕국미시시피 거품과 더불어 고전 경제기의 경제위기 중 하나로 꼽히며 용어 '거품경제' 역시 이 회사에서 비롯한 주식시장 과열을 '남해(바다)'의 '거품'으로 비유하면서 탄생한 것이다.


2. 사건 진행[편집]


I can calculate the motion of heavenly bodies, but not the madness of men.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4]

는 도저히 계산하지 못하겠다.

영국 조폐국장[5]

아이작 뉴턴. 자신의 주식을 처분한 뒤에도 끝없이 오르는 남해회사의 주가를 보며 했던 말.[6][7]



2.1. 남해회사의 설립과 운영[편집]


파일:사우스 시 컴퍼니 문장.svg
남해회사의 문장.

남해회사는 본래 영국 정부에서 남미 지역의 무역을 전담할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로, 제1대 옥스포드와 모티머의 백작 신분이었으며 전직 재무장관이자 문학작품 수집가로도 유명했던 로버트 할리(Robert Harley, 1661~1724)[8] 백작이 세운 일종의 공기업이었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내세운 목적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영국 정부의 채무상환 이자가 너무 커져서 그것을 떠넘길 차원에서 만든 회사였다. 이에 따라 1711년에 영국 정부의 부실채권과 증권 1000만 파운드를 남해회사 주식으로 전환하고 돈이 되는 노예무역을 독점할 수 있도록 특권을 주었는데데 할리 백작과 남해회사는 이 특권을 받고 매우 좋아했다. 남해회사는 정부 부채를 인수하면서 국채를 자사주로 교환해 줬는데 이와중에 발빠른 사람들은 55파운드의 국채를 미리 사들였다가 회사 설립 후 액면가 100파운드짜리 남해회사 주식과 교환했다.

하지만 남미를 장악한 나라가 가상적국인 스페인 제국이었으니 노예무역이 순탄할 리가 없었다. 특권을 받은 지 6년 만인 1717년에야 이익금의 25%는 스페인 국왕에게 귀속된다는 조건 아래에 1년에 단 한 번 영국 무역선이 페루칠레, 멕시코를 오가며 교역을 할 수 있다는 계약이 맺어졌지만 남해회사는 이 교역으로 이익은커녕 자본금만 까먹었다. 게다가 이듬해인 1718년에는 스페인과 영국 사이 전쟁이 발발하여(4국 동맹 전쟁) 스페인이 영국 선박의 입항을 금지시켜 남해회사는 200만 파운드의 빚을 지게 되었다.

그러자 남해회사는 노예무역 대신 금융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영국에는 잉여자본들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이를 노리고 복권 형식의 채권을 판매했는데 이게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것이 성공을 거두자 남해회사는 본격적으로 금융회사로의 변신을 추진했다.


2.2. 주식 발매와 투자 광풍[편집]


남해회사는 이에 영국 정부에게 회사 주식을 일반에 공개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내려고 했다. 물론 다른 은행들도 이 권리를 얻어내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펼쳤는데 남해회사는 전환사채(Convertible Bond)를 만기 8년에 연이율 5퍼센트로 발행해 3,100만 파운드의 국채를 전액 인수하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당시에는 국채에 대한 인식이나 신뢰도가 극히 낮았기 때문에 투자자들은 효과를 저울질했고 의회에서도 논란이 일어났는데 하지만 여기에 혹한 영국 정부는 결국 남해회사에 주식의 일반 공개 권리를 부여했다.[9]

하지만 이 과정에서 750만 파운드의 상납금을 내야 했는데 이는 남해회사의 당시 재정상황을 생각하면 상당한 부담이었다. 이에 남해회사는 마치 판돈이 아주 크게 걸린 도박판에 올인한다는 심정으로 단박에 엄청난 이윤을 내서 상황을 만회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남해회사는 무리하게 주가를 높였는데 1720년 6월 초에는 설립 이후 9년간 주당 100파운드로 시작한 주가가 세 배 할증발행이라는 신규 공급에도 890파운드까지 치솟았고 8월 초에는 스페인으로부터 남미 지역 전 항구에 대한 기착권을 따냈으며 새로운 금광을 발견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무려 1,000파운드까지 치솟았다. 1월에 남해회사 주식을 구입했다면 8월 초에는 무려 10배가 넘는 이득을 볼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불과 6개월 새 1,000%에 달하는 대 폭등이었다.

당연히 앉아서 몇 배로 돈이 불려진다는데 가만있을 사람이 없었다. 남해회사 주식을 못 가지면 바보, 해마다 몇 백 퍼센트씩 배당을 받을 수 있는 주식이라는 소문까지 퍼지기에 이르렀다. 위대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을 비롯해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인 대니얼 디포, 연작화 "어느 난봉꾼의 일생"으로 유명한 영국의 판화가 윌리엄 호가드 등의 유명인들도 남해회사 주식에 투자했다. 특히 디포는 격일간지 <리뷰>를 창간해서 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주식시장에 관한 기사와 사설을 빈번하게 실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서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전부 잃어버리고 10년 뒤 가난과 무관심 속에 사망했으며 뉴턴이 보유한 주식은 한때 평가이익 7,000파운드를 달성하기도 했지만 끝내는 2만 파운드를 날렸다. 요즘 가치로 따지자면 20억원이라는 거액을 잃은 것이었다. 반대로 헨델은 이 주식을 저점에 사고 나서 고점에 전부 매각하여 투자 원금 대비 100배의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2.3. 거품 붕괴[편집]


그러나 무한히 부푸는 풍선이 없는 것처럼 남해회사의 광풍 같은 투자도 그 끝으로 치달았다. 남해회사가 엄청난 이득을 보자 다른 이들도 우리도 주식으로 돈 못 벌 거 뭐냐라면서 정부 허가도 안 받고 불법으로 주식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시중에 주식 공급이 마구 넘쳐났고 당연히 주가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상황이 안 좋다고 느낀 영국 정부는 서둘러 1720년 6월 24일에 "거품 방지법"을 제정하고 무허가 주식회사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뻥이었다. 남해회사는 무허가 주식회사들로 인해 주가가 떨어지자 주가를 다시 높이기 위해서 의원들에게는 로비를 했고 한편으로는 스페인과 조약을 맺어 남미 주요 항구에 대한 통상권을 확보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심지어 은이 철만큼 많이 생산된다는 남미의 포토시(Potosi) 은 광산의 운영권을 남해회사가 따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정상적으로 보면 스페인과의 통상 조약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스페인이 자국 경제의 중요한 젖줄 중 하나인 포토시 은광의 운영권을 영국 회사 따위에게 줄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문이 신빙성있게 나돌았다는 자체가 당시 사람들의 탐욕어린 광기를 보여주는 주요한 사례가 된다.[10]

시장에서 남해회사의 주가가 오르자 의회는 1720년 4월 남해회사가 제안한 법률을 통과시킬 수 밖에 없었는데 그들 중에서도 주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았고 만약 주가가 더 오르면 남해회사의 주식과 국채의 교환비율이 떨어져서 정부가 손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식이 주당 1,000파운드라는 가격을 찍을 수 있었다.

정부관료들은 주식이 오를대로 오르자 주식을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정부관료들이 팔아치운다는 소문이 들리자 남해회사 주식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그간 남해회사의 허풍으로 오르던 주식이 남해회사의 사업 이득이 별로 없다는 의심이 커지고 소문이 거짓으로 밝혀지자 사람들은 이제 앞다투어 팔자로 돌아섰다. 결국 9월 주가는 주당 150파운드까지 떨어지기에 이르렀으며 12월에는 124파운드까지 주저앉았다.

결국 엄청난 손해를 보고 파산한 투자자들이 영국 정부에 거세게 항의했고 정부가 조사를 벌여 남해회사에서 뇌물을 받고 내부 정보를 제공받아 주식을 매도한 정부 관료들을 쳐내야 했다. 고점에서 남해회사 주식을 팔아 90만 파운드라는 거액을 챙겼던 재무부 장관은 런던 탑에 수감되어야 했고 당시 수상이었던 스턴호프는 국민들의 빗발치던 비난에 수상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며칠 뒤에 급사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영국 경제도 타격을 심하게 받았는데 거품 방지법으로 회사 설립에 까다로운 제약이 가해졌고 투자를 선동한 자의 재산을 몰수한 이후 영국의 자본 형성이 크게 둔화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영국은 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었는데, 때마침 이루어진 신대륙 개척과 신기술, 학문의 발달 덕분이었다.

당시 영국 주식시장의 규모가 약 5억 파운드로 추정되는데 이는 국내총생산의 약 7배에 달하는 규모였다. 현대의 미국 주식시장의 규모가 국내총생산의 2배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사건의 버블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11]

그러나 소수나마 이득을 본 사람들도 있다. 조지 프레드릭 헨델은 남해회사 주식을 잘 팔아서 그 수익으로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해서 자기 베이스로 잘 써먹었다. 그리고 훗날 영국 수상에 오르는 윈스턴 처칠의 9대조 할머니이자 당대의 영웅이었던 영국 육군 총사령관 존 처칠의 아내, 사라 처칠[12]은 남해회사 버블 시기에 주식투자로 무려 10만 파운드[13]를 벌었다고 한다. 사실 제로섬 법칙이 어느 정도나마 적용되는 분야라서 다수가 잃은 손해만큼 누군가는 이득을 얻게 된다. 물론 이런 버블 붕괴 사건은 사회적 혼란, 경제시장의 경직, 줄도산 등을 거의 반드시 수반하기 때문에 어지간해선 사회적 후생 손실이 그 와중에 얻는 개인의 이득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3. 영향과 의의[편집]


  • 영국 최초의 의원내각제 총리 탄생
재정 전문가 로버트 월폴조지 1세의 명으로 사태 수습에 나섰다. 물론 월폴은 남해회사 설립에 관여한 휘그당 출신이라 이 사태를 엄정하게 처리하면 정권이 토리당에게 넘어갈까봐 되도록 덮는 쪽으로 사태를 해결했다. 하지만 어쨌든 월폴에 의해서 경제적인 문제는 어느 정도 혼란이 수습되었고 조지 1세는 이런 월폴을 신뢰하여 월폴에게 정권을 맡기게 되었다. 남해회사 사건을 처리한 공으로 월폴은 1742년까지 장기집권했고 오늘날 의원내각제 하 영국에서 월폴은 초대 수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 공인회계사 제도와 회계감사 업무의 시작
찰리 스넬이 남해회사의 회계를 담당하던 브릿지 상회의 회계장부를 조사하면서 "브릿지 상회의 회계장부에 대한 소견"이라는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는데 이것이 세계 최초의 회계감사 보고서가 되었다. 이후 남해회사와 같은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주식회사들은 반드시 제3자를 통해 회계기록 평가를 의무화하여 영국에서 최초로 공인회계사와 회계감사의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이라 이후에도 이런 일이 안 일어났던 건 아니지만.

  • 용어 거품(버블)의 유행
남해회사의 영어 명칭은 사우스 시(South Sea)이며 이 회사가 발행한 주식이 급등하자 세간에서는 '남해에 거품이 일었다'는 언어유희가 유행했는데 바로 이 사태에서 시장의 과열을 거품(버블)이라고 부르는 용례가 탄생하였다. 경제 거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 자체는 이전에도 네덜란드 튤립 투기 파동이나 향신료, 차 무역 등 여럿 존재했지만 이 사건으로 영국 정부의 공문서에서 '버블'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

파일:SSC Bubble.png
남해회사 거품을 풍자한 카드, 1720년.


4. 미디어 및 여담[편집]


  • <남해거품>을 쓴 존 카스웰은 남해회사 임원이자 주요 홍보자인 존 블런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는 오른손에 기도서를, 왼손에 투자설명서를 끼고 살았다. 그리고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알지 못하게 했다."

  • 한국에도 번역된 종이의 음모가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책의 작가 데이비드 리스는 데뷔작인 이 '종이의 음모'로 에드거상의 최고 소설 상을 수상했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의 영국과 네덜란드 카드 중에는 남해 포말 사건이라는 카드가 있는데 금화를 조금 더 많은 양의 목재로 교환하는 것이다. 즉 본 내용처럼 금화(돈)을 더 높은 가격의 목재(남해회사채 증서)로 교환한다는 뜻이다.

  • 스펀지 42회에서 뉴턴도 주식 하다가 망했다며 이 일화를 소개하였다. 그러나 별은 1개밖에 받지 못했다.[14]

  • 데블스 플랜에서 궤도가 아이작 뉴턴의 발언을 인용한다. 정작 예고편에서만 나오고 본편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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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번째 사진의 그래프는 로그스케일이다.(말인즉슨, 몇 제곱이 세로축 단위다!)[2] 잘 보면 근대의 스탠더드 오일과 현대의 Apple조차 잘 나가던(?) 남해회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참고로 맨 왼쪽의 Bell System은 현 AT&T의 전신이며 저 Bell System 자체는 셔먼 반독점법으로 쪼개져 현재 버라이즌과 AT&T가 되었다.[3] 포말은 한자어로 거품을 의미한다.[4] 물리학의 거장이더라도 투자에는 초보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지 물리학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인간의 광기를 계량화하는 작업은 21세기에 행동경제학이 주류로 자리잡으면서 이루어졌다.[5] 뉴턴을 우리가 흔히 과학자로만 생각하는데 뉴턴은 인생 후반부 대부분(1696년부터 25년간)을 조폐국에서 근무했다. 물론 동시에 영국 왕립학회장(1703년부터 사망시까지)으로도 활동했기 때문에 과학과 무관하지 않았고 여전히 압도적인 권위의 과학자였다.[6] 이 말을 한 직후 돈을 더 벌기 위해 남해회사에 전재산을 투자했는데 그대로 떡락해 이전에 남해회사에 투자해서 번 돈을 다 날린 것은 물론 추가로 무려 20,000파운드(현재 한화 가치로 약 20억원)를 날려 버렸다. 이때 뉴턴이 잃은 돈은 전재산의 80~90%였다고 한다. 애초 처분한 타이밍에 끝냈다면 저 명언이 선견지명으로서 더 빛을 발했을 것이다. 과학자이자 주식 투자의 귀재인 클로드 섀넌과 비교되는 부분이다.[7] 물론 뉴턴은 워낙 부자고 돈나오는 곳이 많아서 죽기전에 주식 이전으로 다 복구했다.[8] 대한민국의 미국계 방송인 로버트 할리와는 한글 표기로는 이름이 같다. 다만 방송인 로버트 할리의 성의 영어 표기는 'Holley'다.[9] 영국 정부와 의회에 대한 남해기업의 로비도 한 몫 했다.[10] 사실 고종운산 금광의 채굴권을 외국인에게 넘겼던 등의 사례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이건 고종이 망국 직전인 1890년대에 어떻게든 외국 세력을 끌어들여 보겠다고 한 일이다. 1700년대의 스페인은 카를 5세, 펠리페 2세의 시대만큼은 아니었지만 보르본 왕조의 노력으로 상당히 국가적 안정을 찾으며 중흥을 맞이한 시기였다. 포토시와 같은 중요한 광산을 다른 나라 사람에게, 그것도 역사적으로 사이가 안 좋은 영국의 회사에게 구한말 조선마냥 가져다 바칠 이유가 하등 없었다. 게다가 이 때는 중상주의가 판을 치던 시기였는데 중상주의의 핵심인 금, 은 채굴을 경쟁국에게 내 줄 리가 없었다.[11] 참고로 투자의 신으로 불리는 워렌 버핏은 주식시장의 규모가 해당 국가의 국내총생산을 넘어서면 버블의 징조로 보는데 상당수 금융권 관계자들도 이 견해에 동의한다. 다만 미국은 세계 경제의 중심이자 패권국가로 전세계의 자본을 블랙홀처럼으로 빨아들이기 때문에 예외로 보고 나머지 국가들의 경우 아무리 돈이 많이 풀려도 시가총액이 국내총생산을 약간 넘어서는 수준이지 몇 배가 되는 사례는 거의 없다. 이 시절 영국의 7배라는건 정말 미친 버블이었던 것.[12] 2018년 영화 더 페이버릿에서 레이첼 바이스가 연기한 '말버러 공작부인' 사라가 바로 이 사라 처칠이다.[13] 2017년 3월 기준으로 한화로 환산하면 1억 4,285만 7,143원이지만 300년 전 값어치로는 100억 원 정도 된다.[14] 사실 뉴턴은 남해회사 거품 초기에 투자하여 수익을 얻었다가 매도 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까지 치솟자 다시 매수했고 결과적으로 상투를 잡은 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