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빌 체임벌린

덤프버전 :



이 문서는 나무위키의 이 토론에서 해당 인물에 대한 옹호론이 '수정주의'임을 서술하지 않는다. 역사학계의 평가를 다루는 문단에 '옹호론'과 '비판론'이라는 하위 문단을 만들어 서술하되, 5순위 이상의 근거를 가진 서술만 작성한다(으)로 합의되었습니다.
타 위키에서의 합의내용이 더위키에서 강제되지는 않지만 문서를 편집하실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펼치기 · 접기 ]
[[조지 1세|

조지 1세
]]
초대
로버트 월폴
[[조지 2세|

조지 2세
]]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로버트 월폴
스펜서 컴프턴
헨리 펠럼
토머스 펠럼홀리스
제5대
제6대

윌리엄 캐번디시
토머스 펠럼홀리스
[[조지 3세|

조지 3세
]]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토머스 펠럼홀리스
존 스튜어트
조지 그렌빌
찰스 왓슨 웬트워스
제10대
제11대
제12대
제13대
대 윌리엄 피트
오거스트 피츠로이
프레더릭 노스
찰스 왓슨 웬트워스
제14대
제15대
제16대
제17대
윌리엄 페티
윌리엄 캐번디시벤딩크
윌리엄 피트
헨리 에딩턴
제18대
제19대
제20대
제21대
윌리엄 피트
윌리엄 윈덤 그렌빌
윌리엄 캐번디시벤팅크
스펜서 퍼시벌
제22대

로버트 뱅크스 젱킨슨
[[조지 4세|

조지 4세
]]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로버트 뱅크스 젱킨슨
조지 캐닝
프레더릭 존 로빈슨
아서 웰즐리
[[윌리엄 4세|

윌리엄 4세
]]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아서 웰즐리
찰스 그레이
윌리엄 램
아서 웰즐리
제29대
제30대

로버트 필
윌리엄 램
[[빅토리아 여왕|

빅토리아
]]
제30대
제31대
제32대
제33대
윌리엄 램
로버트 필
존 러셀
에드워드 스미스스탠리
제34대
제35대
제36대
제37대
조지 해밀턴고든
헨리 존 템플
에드워드 스미스스탠리
헨리 존 템플
제38대
제39대
제40대
제41대
존 러셀
에드워드 스미스스탠리
벤저민 디즈레일리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제42대
제43대
제44대
제45대
벤저민 디즈레일리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로버트 게스코인세실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제46대
제47대
제48대
제49대
로버트 게스코인세실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아치볼드 프림로즈
로버트 게스코인세실
[[에드워드 7세|

에드워드 7세
]]
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로버트 게스코인세실
아서 밸푸어
헨리 캠벨배너먼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조지 5세|

조지 5세
]]
제52대
제53대
제54대
제55대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앤드루 보너 로
스탠리 볼드윈
제56대
제57대
제58대
제59대
램지 맥도널드
스탠리 볼드윈
램지 맥도널드
스탠리 볼드윈
[[에드워드 8세|

에드워드 8세
]]
59대
스탠리 볼드윈
[[조지 6세|

조지 6세
]]
제59대
제60대
제61대
제62대
스탠리 볼드윈
네빌 체임벌린
윈스턴 처칠
클레멘트 애틀리
제63대

윈스턴 처칠
[[엘리자베스 2세|

엘리자베스 2세
]]
제63대
제64대
제65대
제66대
윈스턴 처칠
앤서니 이든
해럴드 맥밀런
알렉 더글러스 흄
제67대
제68대
제69대
제70대
해럴드 윌슨
에드워드 히스
해럴드 윌슨
제임스 캘러헌
제71대
제72대
제73대
제74대
마거릿 대처
존 메이저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제75대
제76대
제77대

데이비드 캐머런
테레사 메이
보리스 존슨





네빌 체임벌린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영국 제60대 총리
네빌 체임벌린
Rt Hon. Neville Chamberlain



파일:네빌 체임벌린 총리.jpg

본명
아서 네빌 체임벌린
Arthur Neville Chamberlain
출생
1869년 3월 18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웨스트미들랜즈 주 버밍엄
사망
1940년 11월 9일 (향년 71세)
영국 햄프셔 주 헤크필드
재임기간
제60대 총리
1937년 5월 28일 ~ 1940년 5월 10일
서명
파일:Neville_Chamberlain_Signature_2.svg

[ 펼치기 · 접기 ]
학력
럭비 스쿨 (-1886년)
버밍엄 대학교[1] (-1889년)
직업
정치인
정당


1. 개요
2. 생애
2.1. 총리 이전
2.2. 총리 재임
2.3. 퇴임 이후 : 5월 전시내각 위기의 키 포인트
3. 평가
3.1. 일반적 인식
3.1.1. 비판론
3.1.2. 옹호론
3.2. 학계의 평가
3.2.1. 옹호론
3.2.2. 비판론
3.3. 처칠의 추도문
4. 매체에서
4.1. 출판물
4.2. 영상물
4.3. 게임



1. 개요[편집]


영국 제 60대 총리. 당대엔 신흥 정치가문의 당주, 성공한 기업인, 대공황을 헤쳐간 유능한 재무관료 등으로 나름 잘나가던 정치인이었으나, 훗날의 역사에서는 뮌헨 협정이라는 오판을 저지른 지도자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2.1. 총리 이전[편집]


조지프 체임벌린의 차남으로 1869년 버밍엄에서 태어났다. 부친 조지프 체임벌린은 버밍엄 출신의 자유당 계열 정치인이었으나, 이후 보수당으로 전향했다. 이는 그의 두 아들[1]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1889년, 당시 아버지가 운영하던 도제 기업에서 회계사로 일하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2년 뒤 바하마와 앤틸러스 제도 등 카리브 해의 영국 식민지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을 경영하였으나 5만 파운드, 현재가치로는 대략 400만 파운드(한화로 대략 61억)를 손해 보고 실패했다. 영국으로 돌아와 가족의 도움으로 Elliot's Metal Company의 임원으로 있으면서 사업적 수완을 키웠고 금속 선박 제조회사인 Hoskins & Company를 사들여 17년 동안 Hoskins 상무이사로 있으면 회사를 번창시켜 사업적으로 성공한다. 네빌 체임벌린의 사업적 성공은 아버지도 놀라게 했다. 자기 친구에게 자기보다 사업적 통찰력이 뛰어나고, 아직 정치에 관심이 없지만 총리가 될 수 있도록 지지하겠다고 말했다.

1911년, 고향 버밍엄의 시장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로이드 조지 내각의 전시 군수지원 부분의 실무책임자로 기용되었으나 방향성의 차이로 중도에 사퇴했다.

1918년부터 버밍엄 지역구 하원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3년 재무장관으로 입각하며 처음으로 내각에 진출했다. 1924년에 보건장관으로 재입각, 29년까지 직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 중에 1926년 전국적 총파업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노동당과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맺었다.

그가 정치적으로 가장 빛난 시기는 1931~1937년이었다. 대공황으로 경제가 붕괴하던 와중에 보수당 출신이지만 거국내각을 운영하던 노동당 출신 램지 맥도널드 내각에서 재무장관으로 기용되어, 6년여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펼치며 긴축재정과 재정 및 금융개혁을 단행하고 열강간 공조를 통한 위기극복 등을 추진, 영국 경제를 다시 서서히 회복세로 이끌어 주목받았다. 오죽했으면 소련을 방문한 낸시 아스터가 스탈린과 면담했을 때 차세대 지도자로 이 사람을 골랐을 정도였다.[2]

1934년 당시 일본 외무대신으로 재임하고 있던 히로타 고키와 접촉해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인해 종료된 영일동맹을 대체하는 영일불가침조약을 새로 체결하려 했지만, 영국 총리 램지 맥도널드는 이 조약이 미국에게 영일동맹의 재림으로 보일까 우려했고, 일본 역시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이권을 보장해줄 의지가 없었고 결정적으로 런던 해군 군축조약 탈퇴 통보를 하면서 무산되었다.


2.2. 총리 재임[편집]


파일:attachment/네빌 체임벌린/anc-1.gif

1937년, 전임 스탠리 볼드윈의 뒤를 이어 대영제국의 총리로 취임하였다.

총리로 취임한 그의 당면과제는 역시나 나치 독일이었다. 독일은 무서운 기세로 주변국을 위협했고, 체임벌린은 독일 문제에 대해 외교적 해결책을 추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독일-이탈리아 연대의 파기 시도였다.

두 파시스트 국가의 연합을 막기 위해 체임벌린은 이탈리아 왕국에티오피아 병합을 사실상 묵인했으며, 스페인 내전에 대한 간섭도 막았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협상국이었기에 체임벌린의 생각이 크게 틀린 건 아니었다.[3]

체임벌린이 이런 외교적 유화책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영국의 경제상황에 기인했다. 대공황 여파로 대대적 군축을 한 상황에서 무력에 기반한 대독일 강경책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국의 군사력은 재무장관으로서 군축을 주도한 체임벌린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았고, 1935년경부터 본격적인 재무장을 시작했지만 아직 군사력의 재건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1차대전때의 막대한 인구 손실을 기억하고 있던 전간기 영국과 프랑스는 어떻게 해서든 전쟁가능성을 피하려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고 정치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파일:external/timetree.zumst.com/716a7a9cc2c24c8fb1d482e1f3d04d2a.jpg

친애하는 여러분, 역사상 두 번째로[4]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라고 믿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집에 돌아가서셔 평안히 주무십시오.

1938년, 뮌헨 협정 뒤에 다우닝가 10번가 앞에서 한 연설

결국 이 문제는 1938년에 터지고 말았다. 아돌프 히틀러주데텐란트 요구에, 체임벌린은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뮌헨 협정이었다. 체임벌린은 뮌헨 협정을 통해 당분간 히틀러와 독일의 팽창의욕을 꺾었다고 생각했고, 여기에서 나름 유명한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라는 발언이 나왔다.[5][6]


그러나 히틀러는 6개월 만에 뮌헨 협정을 파기했고, 다시 6개월 후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뮌헨 협정은 히틀러의 국내정치적 기반을 튼튼하게 해준 외교성과였으며, 독일 군부는 나치 정부를 탐탁치 않게 여겨 쿠데타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히틀러가 강대국을 상대로 오스트리아-주데텐란트-체코 삼연타석 외교 홈런을 치면서 지켜보자는 쪽으로 돌아섰고 이것이 폴란드 침공까지 갔다.


I am speaking to you from the cabinet room at 10 Downing Street. This morning the British ambassador in Berlin handed the German government a final note stating that unless we heard from them by 11 o'clock that they were prepared at once to withdraw their troops from Poland, a state of war would exist between us. I have to tell you now that no such undertaking has been received, and that consequently this country is at war with Germany.

-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에서 전달합니다. 오늘 아침, 베를린 주재 영국대사는 독일 정부에게 11시까지 폴란드에서 즉시 철수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면 양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내용의 최후 통첩을 보냈습니다. 허나 우리는 독일에게 어떠한 응답도 듣지 못하였고, 따라서 우리 영국은 독일과 전쟁 상태에 돌입했음을 말씀드립니다.

뮌헨 협정 파기 직후 체임벌린은 외교적 유화책을 포기하고 강경책으로 전환했으나, 폴란드가 망하는 와중에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독일에 맞서기 위한 전시내각을 수립하고 대독 강경파 윈스턴 처칠을 기용하였으나 노동당은 과거의 원한으로 전쟁내각 참여를 거부했고, 개전 이후 급격히 위세가 높아진 처칠 등 강경파도 좀 더 강경한 대응을 요구하여 국내정치적으로도 고립되었다.

체임벌린 내각이 기획한 노르웨이 전역이 1달여 만에 패배로 끝나감에 따라 전시내각은 붕괴 위기를 맞이했다. 노르웨이 침공을 강력히 주장한 처칠은 본인이 살려고 패배를 모조리 상관인 체임벌린 탓으로 돌리며 사임을 요구했고, 노동당도 체임벌린이 이끄는 전쟁내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체임벌린이 노르웨이 전역에 투입한 육군은 실전경험이 풍부한 9개사단 9만명을 배치한 히틀러에 비하면 한줌도 안되는 갓 징집한 2개 여단 3천명 병력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독일에 비해 한참 늦게 진주했기 때문에 독일군에 전략적인 거점을 모두 빼앗겨 있는 상태였고 비행장 강행착륙점령이라는 창의적이고 공세적인 돌입을 감수하던 루프트바페에 비해 영국은 공군 배치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 정도 차이의 병력 차이는 나폴레옹도 극복할 수 없다. 한편으로 영국이 일찌감치 노르웨이 개입을 준비했기 때문에 영국 해군은 독일이 상륙전을 개시할때 노르웨이 근방 작전선에 신속히 전개할 수 있었고 독일 해군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크릭스마리네는 노르웨이 전역을 마지막으로 작전능력을 영구적으로 상실했다. 해전에서의 승리와 육전에서의 패배는 영국이 동원할 수 있었던 함선과 병력의 차이인 것으로 해군이야 죽도록 지켜내어 강군을 유지했지만 육군을 쥐어짜내봐야 고작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도록 꾸준히 재무장을 반대하고 빠른 병력전개를 반대한 체임벌린의 책임은 명백했다.

You have sat too long here for any good you have been doing. Depart, I say, and let us have done with you. In the name of God, go!

- 당신은 하는 일에 비해 그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 이제 그만 끝내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라!

1940년 5월 7일, 영국 하원 회의장에서 레오폴드 에이머리[7]

레오폴드 에이머리의 연설을 계기로 5월 7일, 영국 하원은 체임벌린에 대한 재신임 투표를 실시했다. 이 투표는 신임 281, 불신임 200으로 겉으론 체임벌린의 승리로 끝났으나 기존에 비하면 지지세가 확연히 줄어든 상태였기에 사실상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과에 충격 먹은 체임벌린은 직후 처칠과 만나 총리직을 사임하겠다고 밝혔고 처칠은 체임벌린의 사임을 일단은 만류했다. 5월 9일에서 10일 새벽에 이르기까지, 반 체임벌린 세력과 처칠 옹립파들은 체임벌린 내각의 전쟁 지도 및 그 내각에서의 봉직 활동을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결국 정치적으로 고립된 체임벌린은 1940년 5월 10일 사임했다. 그리고 그 날,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었다.[8]


2.3. 퇴임 이후 : 5월 전시내각 위기의 키 포인트[편집]


비록 퇴임했으나, 총리로 오른 처칠이 독불장군 스타일에 자기계파가 여실히 부족했던 관계로 체임벌린은 여전히 보수당 범주류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재신임 투표 결과에서 알 수 있듯 총리 취임 당시보다 지지세가 크게 줄어든 것은 명백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보수당의 주류로서 상당한 막후 영향력이 있었다. 우선 총리직에서 물러났음에도 여전히 보수당 당 대표는 체임벌린이었다. 노동당의 비토 때문에 거국 전시내각을 위해 총리직에서 물러났을 뿐 보수당 범주류의 지지 속에 당 대표직은 유지하고 있었고, 처칠은 체임벌린을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처칠도 이를 고려하여 체임벌린을 전시내각의 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그 결정은 결정적 위기 상황에서 처칠에 도움이 되어 돌아온다.

1940년 5월 영국 전시내각 위기에서 체임벌린은 초창기에는 일단 온건강화파인 외무부장관 핼리팩스의 의견에 동조했지만, 독일과의 협상 및 이탈리아의 중재가 가능하다고 보았던 핼리팩스와 달리 체임벌린은 히틀러도 무솔리니도 믿지 않았다. 체임벌린은 단독으로 독일과 싸워 이길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탈리아와 무솔리니가 영국에 호의적 입장에서 중재를 해줄 것이라고 믿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리품을 노리고 이탈리아가 독일 편에 서서 참전할 것이라 예측했다. 뮌헨에서의 경험으로 히틀러도 무솔리니도 믿을 놈이 못된다는 걸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이처럼 전시 내각에서 처칠 중심의 강경항전파, 핼리팩스 중심의 범주류 온건협상파의 갈등이 일어날 때 체임벌린은 범주류에 속했음에도 최종적으로 처칠의 손을 들어주었고 영국은 협상대신 항전의 길을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후 급격한 건강악화로 인해 공적 업무를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9] 영국 본토 항공전의 와중에 계속된 공습으로 사무소와 피난소를 옮기는 악조건 속에서 자신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처칠에게 당 대표직 사임 및 대표직 이양을 제안한다. 처칠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10] 체임벌린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이를 수락, 10월 9일 체임벌린은 당 대표직에서 사임하고 처칠이 이 직위를 이어받는다. 1939년-1940년 초의 적대관계가 죽음 앞에서 해소된 것.[11] 사임 직후 가터 훈장을 수여받을 수 있었으나 이를 사양했다. 10월 14일에는 전쟁 와중에도 조지 6세 부부가 직접 문병을 오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하고 11월 9일 사망한다.

장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으며, 그의 관은 현직 총리인 처칠과 외무부장관 핼리팩스가 운구했다. 처칠은 하원에서의 추모연설에서 "역사가 뭐라 하더라도 체임벌린은 그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고, 그의 노력덕에 현재의 위기에 맞서 싸울 수 있다"며 체임벌린을 극찬했다.

3. 평가[편집]



3.1. 일반적 인식[편집]



3.1.1. 비판론[편집]


정치인 체임벌린에 대한 평가는 뮌헨 협정에 대한 평가와 강하게 맞물리며, 뮌헨 협정이 실패하면서 체임벌린에 대한 평가도 추락했다.

체임벌린의 공직생활에 대해 뭐라고 말하건 그의 평판은 유화정책과 뮌헨에서의 협정과 맞물려 있을 것입니다. 그건 그가 퇴임했을때나 6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않다고 하는 주장들은 본시오 빌라도를 로마제국의 성공적인 지방행정가로 평가하려고 애쓰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Duttun 2001, 리버풀 대학


1938년에 체임벌린은 뮌헨 협정을 독일과 합의하고 이를 이행하려고 하였다. 협정의 강경한 반대를 천명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를 불러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할양하지 않으면 체코에 대한 영국의 독립보장을 철회하겠다고 협박하여 요새화한 주데텐란트를 할양하도록 하였고, 그 결과 체코의 자기방어능력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주테텐란트는 독일과 접경지역이니만큼 많은 군대가 주둔해 요새화하고 있었는데 군이 전부 후방지역으로 철수하게되었고 상당수는 주테텐란트의 할양과 더불어 독일로 소유권이 아예 넘어가면서 방어계획 전체가 누출되어 방어전략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된다. 몇달 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남은 영토를 공격했을때는 재배치된 거점을 기준으로 한 전략계획 자체가 성립되지 못한 상태라 체코군은 혼란에 빠져 조직적인 대응을 할 능력이 없었고 결국 체코수상은 베를린으로 끌려가 무기력하게 항복문서에 사인하게 된다. 독일이 국경을 넘을 당시 체임벌린은 주데텐란트를 할양하면서까지 체코가 매달렸던 독립 보장에 따른 무력개입을 시행하지 않았다. 이같은 실책은 영국의 외교적 신뢰를 박살내었고 그 결과 유럽 대륙에서 일어날 지도 모를 전쟁을 막는데 실패했다. 참고로 이때 넘어간 군대는 체코가 독일과의 전쟁을 대비해 오랫동안 예산을 쥐어짜서 건설한 강군이었는데 이게 고스란히 독일로 넘아가면서 폴란드 개전 당시 기준으로 독일 전차군단의 40%가 체코산 전차를 장비했으며 2차대전 내내 체코의 군수산업체가 생산한 전차는 독일 전차수요의 20%가량을 담당한다. 가장 잘 대비가 되어있던 아군을 고스란히 적군으로 넘겨주어 독일이 전쟁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한 것이다.

히틀러는 체임벌린의 악수를 통해 영국가 프랑스가 독립을 보장한 체코슬로바키아를 당당하게 병합하고 협정을 지키지 않는 영국을 부각시켜 소련에게 영국과 프랑스와의 외교적 협력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상기시켜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결국 1년도 못 가 폴란드를 침공해 또 한번 영국의 폴란드 독립 보장을 쓰레기로 만들었고, 체임벌린은 참전을 결정했지만 가짜전쟁을 벌여 폴란드를 구원하지 못했다. 결국 그의 외교적 비굴함으로 모든 동맹국이 차례차례 사라지고 영국 혼자 남게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체임벌린이 말한 '우리 시대의 평화'는 1년도 못 갔고, 그 뒤로 뮌헨 협정은 '비굴한 평화주의가 동맹국을 깡패에게 팔아먹었을 때 일어나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가 뮌헨 협정을 묘사했던 "명예로운 평화"라는 말에 대한 처칠의 반박대로, "영국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명예를 잃었으며 그 결과 전쟁을 겪게 되었다."

당대에도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만 먹고 만족할 사람이 아니니 강경책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정치인은 있었다. 윈스턴 처칠 등이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임벌린은 결국 독일을 달래기로 결심했는데 이는 독일이 군사적 행동에 들어갈 경우 대공황을 맞아 약화된 영국의 군사력이 독일을 막을 수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독일의 군사력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나온 오판이었다. 당시 독일은 영국 이상으로 군사력 재건이 안 되어 있었고, 히틀러의 허풍과는 달리 영국이 강경하게 나올 경우 군사적으로 맞설 능력이 없었다.[12] 게다가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신뢰성에 대해서도 치명적인 오판을 한 셈이었다. 윈스턴 처칠은 2차대전이 끝난 후 회고록을 펴내며 체임벌린을 "선의는 있지만 나약하고, 히틀러의 위협에 둔감했으며, 유럽 국가들이 힘을 합쳐 히틀러를 제거할 수 있음을 몰랐다"고 평가했다.

이런 오판이 단 한번만 있었으면 모르겠지만 독소불가침조약건에서 또 한번 발휘되었다. 뮌헨 협정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너뜨린 결과 전쟁이 닥치리라는 것은 체임벌린을 포함한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여기서도 영국의 참전을 꺼렸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민족사회주의라는 이념을 내걸고 있었고 히틀러의 거의 모든 연설에서 유대인을 하수인으로 삼아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본가들이야 말로 만악의 근원이라는 비난을 멈추지 않았으며 영국은 그가 종결시키고자 하는 베르사유 체제의 화신과도 같은 국가였다. 따라서 영국은 독일과 싸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체임벌린은 독일과 전쟁을 할지라도 어차피 대륙에 있는 소련과 프랑스군이 열심히 싸울테니 영국은 배후에서 지원하며 생색을 내는 정도의 파병으로 동맹군을 동원하여 참혹한 전쟁에 영국인이 끌려가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스탈린은 체임벌린 내각의 이런 꿍꿍이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며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러시아 혁명러시아 내전 과정에서 1차대전 승전국은 소련(볼셰비키)을 대놓고 적대했고, 그 결과 소련은 러시아 제국 시절보다 영토와 영향권이 줄어들었다. 때문에 소련은 협상국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독일과 공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독일의 반소정책이 소련 안보에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 소련은 영국 및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려 한 것인데 그 영국이 소련군을 제물로 삼을 생각 뿐이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이런 상황에서 언젠가는 끝장을 내야만하는 자본가들이야 말로 사회주의의 적이고 그간 소련를 비난한 것은 그저 영국과 프랑스의 경계심을 떨구기 위한 구호였을 뿐이었다고 구슬린다. 리벤도르프가 방공협정에 소련도 가입하는게 어떠시겠습니까? 라는 농담에 대해 이제 나도 반공주의자요 라는 스탈린의 화답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 대신 소련이 피를 흘려 독일의 확장을 막으려고 하면 독일과 소련이 함께 망해버리고 소련의 적인 영국과 츠랑스 자본가들만 득을 본다고 생각해 역으로 독소불가침조약을 맺는다. 이후 소련은 독일 제2제국의 영향권을 회복하려는 독일과 손잡고 핀란드 발트3국 폴란드를 공격하여 러시아 제국의 구영토를 회복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독일편에 선다.

소련이 독일과 손잡고 반독일 전선에서 빠지고나니 독일은 전군을 프랑스에 동원할 수 있었다. 배후의 위협없이 전군을 동원한 독일군의 전면적인 공격을 프랑스는 막을 수 없었고 6주만에 항복해버린다. 결국 영국은 안일한 계산으로 동맹를 차츰차츰 팔아먹다가 결국 혼자 남게 되며, 프랑스나 체코슬로바이카 폴란드에서 동맹과 함께 전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영국은 그렇게 꺼리던 대규모 육군 징병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대규모 사상자를 내게 되었으며, 영국 본토가 대규모 폭격을 당하고 수년간 혼자 본토, 북아프리카와 북유럽에서, 유럽전토를 거의 장악한 나치 독일과 싸우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체임벌린은 독립 보장과 동맹이라는 안보체제에 따른 의무에 매우 불성실했고, 영국의 외교 신뢰성은 바닥을 찍었다.

체임벌린이 총리로 있는 도중에 재무장이 시작되었다고 그를 옹호하는 의견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재무장을 시작한 시점 이전에 독일, 프랑스, 소련이 모두 주데텐란트 위기를 맞아 아예 동원령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고 모든 사람이 전쟁이 눈앞에 있다는 걸 알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영의 재무장의 강도는 약하고 더뎠다. 뮌헨협정 이후 1년도 넘게 지나 노르웨이 침공 때 동원가능한 병력이 고작 2개여단 3천명에 불과했다. 이미 영국은 폴란드가 침략당하는 시점에서 기술적으로 전쟁상황에 들어가있었음에도 이런 병력 수는 영국의 국력과 위상을 고려할 때 믿기 힘들정도의 책임방기에 가깝다.

이렇게 뮌헨 협정의 참혹한 폐기 이후에도 결국 그는 독일이 이웃국가를 병합하는 걸 무기력하게 방관하기만 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독일에 석권되면 스웨덴의 철광이 발트해를 통해 운송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와 덴마크에 영국군을 진주시켜 요새화하여야한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독일이 침공한 이후에야 파병을 승낙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잃은 것이 결정타가 되어 모두의 외면을 받고 실각한다. 그가 실각한 원인은 영국 국내에서 그를 반대하던 처칠의 비난보다는, 그의 유약함을 끊임없이 시험하여 주변국을 하나하나 집어삼킨 히틀러에게 찾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거기다 가장 큰 문제는 체임벌린은 고작 6개월의 평화를 사기 위해 독립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를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사실 뒤의 옹호론은 결국 변명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영국이 스스로 해야 할 도리를 완전히 져버렸다는 것이 사실 가장 큰 문제지 6개월인지 6년인지, 재무장을 했는지 아닌지는 사실 이 점에 비하면 큰 문제는 아니다. 아무리 백만가지 옹호를 하더라도 체임벌린의 평가가 결코 높을 수 없는 결정적인 원인이다.

거기에 더해 뮌헨 협정은 그 결과가 영국에 대해서건 세계에 대해서건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도 문제. 한마디로 나치 독일을 막기 위해 그 요구를 생각도 없이 전면적으로 수용한 것이 뮌헨 협정이다. 히틀러가 나중에 가서야 뮌헨 협정을 탓했다고 하는 건 변명의 여지가 될 수 없다.[13]

그리하여 체임벌린에 대한 평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BBC 히스토리 매거진에서 평가한 20세기 총리들 중에서 제2차 중동전쟁을 말아먹은 앤서니 이든과 함께 0점을 받으면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

체임벌린은 전쟁을 두려워하기는 했지만 전쟁의 참혹함을 두려워한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 파탄을 겁내고 있었다. 이 차이는 매우 큰데 체임벌린은 평화를 원하기는 했지만 영국이 개입되지만 않는다면 전쟁이 일어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영국의 군사예산을 줄이기 위해 독일이 소련과 전쟁을 해주기를 바랬다.

영국은 대영제국제국주의라 비난하며 세력을 투사해오고 있는 미국소련 양국가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독일일본을 의도적으로 키워으며, 주변국가를 병합하는 것도 용인해주고 있었다. 체임벌린 정권은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하는걸 도와줬으며 단치히와 메멜에 관해서도 히틀러의 입장에 전향적이었다. 독일이 동진하면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이 어지럽게 섞여살고 있는 문제로 인종주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상극인 이 두국가가 전쟁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고 일본 역시 미국과 소련을 동시에 견제하는데 유용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정책은 세계평화를 강구하는데 목적이 있는게 아니라 주변국을 상대로 전쟁을 사주해서 나 혼자 평화로워지려는 형태의 정책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영국의 움직임을 감지한 히틀러와 스탈린은 독소불가침조약으로 응수했고 이에 영국정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뒤늦게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을 막으려고 단호하게 경고하고 최후통첩을 했지만, 히틀러는 개의치 않았다. 최후통첩 무시에 따라 전쟁이 시작된 상황에서도 체임벌린 정부는 독일이 동유럽으로 동진하여 독일제국 권역을 회복하는 것이라면 구태여 개입할 필요가 있는지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히틀러의 일탈을 애써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히틀러 역시 가짜전쟁내내 영국과 프랑스와의 적대관계는 원치않는다는 평화적 제스처를 보이고 있었다. 이에 따라 체임벌린 정권은 대규모 징병은 커녕 제대로된 모병조차도 하지 않았다.

노르웨이 전역 당시 히틀러는 육군만 9개사단 공군포함 12만명을 동원했지만, 이미 전쟁이 시작된지 1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체임벌린이 노르웨이 전역에 파병을 허가한 "있는대로 끌어모았다는 병력"은 4800명짜리 정규여단 하나, 나머지는 훈련조차 받지못한 3천명의 징집병에 불과했다. 이걸로 처칠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훈련도 안받은 1만도 안되는 징집군으로 4년동안 훈련받고 실전경험까지 갖춘 10만명 + 2만명의 공군을 이길 해군장관이 누가 있는지부터 먼저 답을 해야할 것이다.

물론 애당초 노르웨이 전역을 기획한 게 처칠이었고 노르웨이에 파병된 영국군 규모가 적은 건 처칠이 그렇게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칠이 병력을 저정도만 확보한 이유는 노르웨이에서 독일과 싸우려고 한게 아니라 선수를 쳐서 노르웨이에 쳐들어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철광석 수출항인 나르빅 정도만 점령하고 말려 했으니 준비한 병력이 겨우 저정도였는데 우연히 독일이 하루 먼저 노르웨이에 쳐들어간거고, 영국은 노르웨이 침공을 위해 할당한 병력을 잽싸게 지원군으로 이름만 바꿔서 노르웨이로 보낸 거다. 최대 39만에 달하는 대륙원정군은 다 프랑스에 있었다.

확실히 노르웨이 전역을 기획한 책임자는 처칠이었기 때문에 그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는 처칠이 뮌헨 협정 이전부터 늘 강경파로 활동했고 노르웨이 전역의 최초 기획도 노르웨이 전역의 철도 장악 및 독일 코앞의 베르겐 점령안까지 일찌감치 제안했지만 체임벌린이 이를 전부 불허한 것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타협책이라는 걸 간과한 것이다. 병력도 안주고 전개도 반대하고 개입시기도 끝도없이 늦춰서 독일군이 이미 장악한 이후에서나 들어가게 만들어놓은. 이 시점까지도 체임벌린은 여전히 동부 유럽에 대한 개입에 회의적이었고 히틀러의 야욕이 독일 제국 권역에 한정되어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노르웨이 전역은 이른바 유화론자라고 불리던 체코 폴란드등 독일제국령이었던 곳 까지만 중동부 약소국들을 전부 독일에게 도로 주면 히틀러가 영국에 대한 원한을 버리고 소련에 대한 반공십자군이 되어줄 거라고 믿는 자들의 믿음이 산산조각난 사건이었다. 물론 "독일을 이용해 소련을 공격한다."라는 아이디어는 보수당은 물론 영국 정계에 널리 퍼져있었다. 처칠도 파이크 작전, 언싱커블 작전같은 구상을 할 정도로 소련 역시 궁극적으로는 적으로 여겼다. 이걸 독일도 알고 있어서 히틀러는 영국 인사를 만날때마다 소련에 대한 과격한 언사를 해서 영국의 환심을 사고서는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시원하게 뒤통수를 쳤다. 이때 나치당 내에서도 영국을 동맹이나 최소한 중립국으로 묶어두지 않으면 양면전선이 열려 또 패배한다고 믿던 사람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루돌프 헤스가 독단적으로 영국과의 강화를 주장하고 날아가거나, 2차대전 말기 카를 되니츠가 서방에 항복하는 대신 (영국이 원래 원했던대로) 소련과 계속 싸운다는 딜을 걸 수 있었던 것이다.[14][15]

하지만 최소한 처칠은 체임벌린의 방식으로 군축을 하여 영국군을 허수아비로 만든 채로 독일에게 당근만을 주어 통제할 수 없다고 여긴 것만큼은 틀림없으며 심지어 전략적 적대국인 소련과 동맹을 맺어서라도 독일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소련을 독일보다 더 중대한 위험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며 타협의 여지가 없는 소련과 달리 나치 독일은 타협할 수 있는 대안으로 평가했지만, 정작 외교전에서도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스탈린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이 거듭된 외교적 실패와 패전에 대한 책임소재의 평가로서 가장 강력한 증거는 영국 의회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체임벌린을 실각시키고 처칠을 수상으로 밀어 올린 것으로 증명된다. 영국 의회가 처칠이 책임을 나누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처칠을 수상으로 추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독일 영역이었던 적이 없었던 노르웨이 침공에 착수하고 나서야 히틀러의 공격 방향이 독일권역이나 동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영국의 엘리트들은 독일과 혈투를 벌이는 것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 군축의 화신 체임벌린 정권의 마지막이었다.

체임벌린은 나치 독일의 움직임에 대해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읽지 못했다.[16] 그리고 주변에 윈스턴 처칠처럼 미래를 예측한 인물들도 있었음에도 전혀 미래를 예측하지도 못했고 당연히 처칠 등의 말도 파국이 오기 전까지는 믿지 않았다.

3.1.2. 옹호론[편집]


대체로는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체임벌린이지만, 1970년대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체임벌린에 대한 재평가 내지 옹호론도 하나 둘 일어난 바 있다.

일례로 체임벌린은 집권 후 기존 내각이 추진하던 재군비 정책을 보다 가속화했다. 이는 독일의 팽창에 대한 대응책으로 '군사적 옵션'이 필요함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다만 재군비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보니 시간을 벌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팔아먹는 데 동의한 것이고 이것이 그의 평가에 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것이다. 체임벌린의 재군비 강화 방침이 아니었다면, 영국은 보다 더 암울한 상태로 세계대전을 맞이하거나, 아예 군사력 부족을 이유로 폴란드 침공을 묵인했을 수도 있었다. 물론 독일 또한 군비를 키웠지만, 영국 공군은 여기서 확실히 이득을 봤다. 1937, 38년에 영국의 군용기 생산량은 연간 5천 대 이상 생산하는 독일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였으나 그 다음 해인 1939년에는 8천 대가 조금 안되는 수준으로 끌어올려 8천 대를 조금 넘게 생산하는 독일을 거의 따라 잡았다. 단순히 수량만 늘린 것이 아니라 항공기 생산에 필요한 경금속 생산량을 늘리는 계획도 수립하였다.

체임벌린이 단순히 대독 유화론자였다면 1939년 3월 체코 병합 이후 대독정책의 기조를 변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일방적 협정 파기와 체코 병합에 격분하여 아직 재군비가 충분히 되지 않았다는 보고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함께 대독 강경노선 및 폴란드에 대한 안전 보장을 천명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체임벌린은 1939년 9월의 폴란드 침공과 함께 실각했어야 했으나 실제로는 1940년 4월까지 정상적으로 총리직을 수행하며 전쟁을 지도했다. 노동당이 그의 전시내각에 불참한 건 어디까지나 체임벌린 개인에 대한 사적 불만이었지 그의 대독정책과는 무관했다. 그리고 체임벌린이 실각한 이유는 노르웨이 전역의 패전 때문이었는데, 노르웨이 전역은 처칠이 주도하였고, 그 패배 책임을 모두 체임벌린 탓으로 돌린 것이다.[17]

그리고 처절했던 1차대전이 끝난지 얼마 안되었고 작위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희생을 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또 전쟁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기성세대는 적지 않은 이들이 지옥같은 전쟁터에서 살아돌아온 사람들이었는데 자신의 아들들을 다시 전쟁터로 밀어넣는 결정은 더욱 지지를 받기 힘든 상황이었다.[18] 국내 여론 뿐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공격에 소극적이었던 프랑스를 어떻게 설득하느냐는 문제도 남아있었다.

체임벌린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쐐기를 박은 것은 체임벌린의 대독 유화론을 비판하고 강경론을 주장했던 윈스턴 처칠이다. 그러나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당국에는 '사실 자신이 영국 수상이었더라도 같은 정책을 펼쳤을 것'이라고 은밀하게 말했다. 체임벌린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동의를 받아, 히틀러와 한 두 번째 만남에서 히틀러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때 히틀러가 평화적인 사태 해결을 피하기 위해 추가 요구를 하자,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독일이 전쟁의 구실을 찾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여 뮌헨 협정을 체결했다.

협상을 통해 전면전을 피했다는 점에서 전세계가 안도했지만, 이를 자기 경력 최대의 실수라고 본 히틀러는 아주 불쾌하게 여겼다. 옳든 그르든 히틀러는 독일이 이때 전쟁을 하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했다. 결국 히틀러는 1939년에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 1938년 체임벌린에게 속아넘어갔다고 생각한 그는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할 심산이었다. 이렇듯 히틀러가 뮌헨 협정을 체결하고도, 침략전쟁을 벌여 협정을 어김으로써 '히틀러는 못 믿을 인간'이라는 것이 영국 국민을 포함한 전세계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각인되었다. 그 결과 히틀러는 다시는 협상에서 이득을 얻을 수가 없었고 분열되었던 영국 국민의 국론을 통일시켰다. 영국 국민들은 한 목소리로 이제는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히틀러와 협상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완전히 드러났기 때문에 영국은 끝까지 내몰리는 순간까지도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폴란드가 무너지고 프랑스가 넘어가고 런던이 폭격받는 상황에서도 처칠이 독일과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독일과 협상을 해봤자 체임벌린처럼 당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퍼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렇게 당하고도 여전히 독일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에드워드 8세 같은 사람이 있었음을 보아, 만약 체임벌린이 앞서 협상 단계에서 결렬되고 회담이 실패했다면 독일과의 전쟁 도중 독일과 협상한다는 선택지는 여전히 영국 국민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국이 몰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 선택지를 고려해보라는 압박이 나왔을 것이다.

1938년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독일의 군대가 정말 강력한지 아닌지, 체임벌린이 무슨 수를 써도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의 기만작전에 속아넘어갔고 그렇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말은 의미 없는 주장일 뿐이다. 영국프랑스는 당시에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를 골랐다. 시간을 벌고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에게 안타까운 것은 단지 준비할 시간이 1년밖에 되지 않았단 점이지만, 독일도 1년밖에 전쟁 준비를 하지 못했기는 마찬가지였다. 독일이 전쟁 준비가 완벽하게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패배했음도 사실이다. 히틀러는 패전을 앞두고 만약 1938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공격했다면 전쟁을 국지화할 수 있었을 테고, 영국과 프랑스는 정치적 자산이 무너진 채 소극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몇 년 동안 세계 대전을 연기하면서 군사력을 강화시켰다면 독일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3.2. 학계의 평가[편집]




3.2.1. 옹호론[편집]


학계에서는 체임벌린이 큰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의견도 소수 존재한다.

사람들은 1938년의 뮌헨 협정을 독일의 승리이자 침략행위 앞에 무릎을 꿇었던 굴욕적 사건이라 생각하지만 정작 히틀러는 뮌헨 협정 당시 크게 실망했으며, 이후 협정의 결과를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큰 실수로 여겼다.(미주 22)[19]

당시 히틀러는 계획대로 전쟁을 시작하지 못했고, 1939년이 되어서야 체코슬로바키아의 남은 지역들을 정복한 뒤 1938년에 자신을 좌절시켰던 요소들을 모두 배제하며 전쟁을 향해 나아갔다.

제러드 L. 와인버그, 2차세계대전사, 홍희범 옮김 (과천 : 길찾기 : 이미지프레임, 2016), 57~58재인용


1945년 2월 21일 히틀러는 1938년 뮌헨 협정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의 부관이자 개인 기록 보관인인 마르틴 보어만에게 설명했다. '우리는 1938년에 공격했어야 했다. 그것이 전쟁을 국지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히틀러는 단지 '짧은 전쟁'이었을 체코슬로바키아의 침공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은 자신을 꾸짖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정치적 자산이 무너진 채 소극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히틀러가 생각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얻었어야 했고 앞으로 몇 년 동안 세계 대전을 연기했을 것이다." 히틀러의 관점에서 가장 큰 범인은 바로 네빌 체임벌린이었다, 그의 의도는 약속을 통해 히틀러의 눈을 멀게 하여 1938년 9월에 영국이 무자비한 전쟁에 준비할 시간을 버는 것이다.

Richard Overy "Germany and the Munich crisis: A mutilated victory?.", Diplomacy & Statecraft, vol.10, no.2-3 (1999), p.191. #

Diplomacy & Statecraft(Web of Science)Historian(Web of Sciencen)[20]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역사가들이 체임벌린을 어떻게 보는가가 아니라 그의 주요 적수인 아돌프 히틀러가 그를 어떻게 보았는가이다. 역사가 휴 트레버-로퍼에 따르면, 1945년 2월 독일이 폐허로 변하고 패배가 임박했을 때 히틀러는 뒤돌아보면서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 의아해했다. 독일은 어디에서 전쟁에서 패배했나? 답: 뮌헨. 그는 “우리는 1938년에 전쟁에 나섰어야 했다”고 말했다.

"1938년 9월이 가장 유리한 날짜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때 무력으로 분쟁을 해결했어야 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독일의 멸망을 누구 탓으로 돌렸을까? 처칠도, 미 공군도, 소련군도 아니었다. 오히려 "기만적인 우산을 손에 들고 있는 대자본가 부르주아, 체임벌린"이었다.

Brent Dyck, "Neville Chamberlain: Villain or Hero?." Historian, vol.112 (2011), p. 15. Historian(Web of Sciencen)[21]


미국의 경우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반복되어서는 안 될 실수였다는 견해가 팽배했는데, 현재 대중들의 믿음인 또 다른 베트남을 피해야 한다는 것보다 그 견해는 당시에 훨씬 더 광범위하고 열렬히 개최되었다.

프랑스의 경우는 그 전쟁에서 프랑스가 겪었던 엄청난 사상자와 피해는 비례하여 주요 참가자 중 가장 큰 것이었으며 군사 계획과 준비를 제한했을 뿐만 아니라 지도자와 대중의 사고를 지배했다. 1938년 7월 프랑스 정부가 프라하에 보낸 메시지는 프랑스가 싸우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 그리고 영국이 전쟁을 한다면 프랑스가 착수할 유일한 주도권은 튀니지에서 이탈리아 식민지인 리비아를 침공하는 것이라는 정보, 두 의사 소통이 당시에 비밀로 유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프랑스 감정의 실질적인 의미를 강조한다. 사실,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영국 정부가 발표했을 때 파리의 패닉 때문에 네빌 체임벌린은 첫번째로 독일행으로 택해 날아갔다.

이것은 영국인의 태도에 대한 고려를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뮌헨에 대한 회고적 논의는 국내외의 정치적 현실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영국 내에서 체임벌린 정부에 대한 주요 야당은 체임벌린 정부가 너무 군국주의적이고 평화주의자가 아니라고 비난했다. 가장 최근의 선거에서, 1935년 노동당 반대파의 정치 포스터에서 체임벌린은 전쟁광이었다. 1935년까지 노동당은 의회에서 영국 해군이나 공군 등, 군대에 반대하는 투표를 했다. 그리고 1936년에는 스페인의 공화당 측에 무기를 보내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군사 예산에 대해 반대표를 던지는 대신 기권이라는 용감한 입장으로 돌아섰을 뿐이었다. RAF(영국 공군)를 현대식 전투기, 나중에 유명한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 등으로 재건하기 위한 체임벌린의 프로그램은 뮌헨 이후에 군대를 창설하기 위한 징병제 도입과 마찬가지로 뮌헨 이전의 노동당에 의해 만장일치로 반대되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면, 윈스턴 처칠이 왜 그랬는지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보수당이 인도의 민족주의 운동에 큰 양보를 하려는 의지를 보이자 처칠은 그에 반대하여 정치적으로 황무지였으나 베네스의 친구인 휴버트 립카(해설: 체코슬로바키아, 에드바르트 베네시의 고문)가 1938년 6월 런던을 방문했을 때, 처칠은 본인이 정부에 있었다면 체임벌린과 같은 정책을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처칠의 의회에서의 성대한 비판과 회고록에 쓴 비판으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하겠지만, 하지만 그는 그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정직하게 경고할 만큼 충분히 책임감이 있었다.

인명과 부에 막대한 희생을 치른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기억이 영국 대중을 무겁게 짓누르고 이러한 맥락에서 체임벌린은 일반적으로 반대라기보다는 너무 호전적이라는 공격을 받았고, 외부 제약도 런던 정부에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의 군사적 유대의 성격이 극적으로 반전되는 것을 목격했다. 식민 제국을 보호하고 확장하기 위해 영국에서 파견된 군대 대신에, 독일의 손에 패배할 위험으로부터 영국을 방어하기 위해 유럽과 중동의 전장에서 제국의 군대가 필요했다. 호주와 뉴질랜드의 안작 데이와 오타와의 팔러먼트 힐에 있는 비미 릿지기념비는 지난 전쟁과 미래의 주요 전쟁에서 군사 상황의 180도 변화를 상징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고 민족주의적 선동으로 황폐해진 인도에서 또 다른 거대한 자원 봉사자 군대가 증원될 경우 자치령이 그들 자신의 자유 의지로 영국에 합류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을까?

쓸데없는 질문이 아니었다. 1938년 런던의 누구도 1942년 10월-11월에 엘 알라메인에서 영국 지상전의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날 때 관련된 영국군 대부분이 영국이 아니라 제국과 영연방에서 올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일반적인 지표가 있었다. 1938년에 영국 편에서 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치령의 경고는 전투에 대한 어떤 결정도 매우 어렵게 만들었으며, 그리고 캐나다가 기권하기로 결정한 유럽 전쟁에 대하여 미국의 정책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광범위한 맥락에서 독일의 선전 방식은 주데텐 독일인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자결권에 대한 열망을 강조하는 기발한 접근 방식이었다. 우리는 이것이 모두 핑계였다는 것을 오늘날과 그 당시 일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국가를 파괴하기를 원했고 그 안에 체코인의 존재를 독일은 슬라브 인구를 독일화, 살해 또는 추방함으로써 해결할 문제로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당시에는 결코 그렇게 명백하지 않았으며 대중에게 현실을 분명히 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마도 1938년 5월 위기 직후 프라하가 제안한 매우 광범위한 양보의 주도권이다. 당시, 그러한 양보는 나약함의 표시로 해석되지 않았으며, 베를린의 지시에 따라 주데텐 독일인이 거부했으면 독일 정책의 가장된 목표가 아닌 실제를 조명됐을 것이다. 국내 내부적 요인으로 인해 그러한 조치가 불가능했을 것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취해지지 않았다.

Gerhard L. Weinberg, “Reflections on Munich after 60 years”, Diplomacy & Statecraft, vol.10, no.2-3 (1999), p.5-7. DOI: 10.1080/09592299908406123 재인용


선의를 가진 합리적인 인물로서 체임벌린이 퓌러에게 속은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체임벌린의 순진함과 히틀러의 음흉함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것이 작동하고 있었다. 유화정책은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일반 주민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에 반대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했다. 만일 처칠이 1936년 초와 1938년 말 사이에 총리 자리에 있었다면, 그도 자신이 나중에 했던 방식으로 국민들을 결집할 수 없었을 공산이 크다. 처칠이나 다른 어떤 총리도 여론을 무릅쓰고 나라가 전쟁에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영국 장성들의 심각한 경고를 무시하면서까지 히틀러에 대한 군사행동을 취하려고 했다면, 아마도 의회에서 불신임을 받거나 자리에서 내쫓겼을 게 거의 틀림없다.

처칠은 타협적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영국이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을 확보한 뒤에야 나라를 한데 결집할 수 있었다(그는 1940년 5월 10일 총리에 취임했다). 심지어 그때도 그가 얻은 지지는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것보다는 미약했다. 1939년 이전에 처칠은 거의 정치적 주변인, 즉 아주 명민하기는 하되 일찍이 파국적인 군사적 결정에 자주 연루된 성급한 도박가에 가까웠다.

앨버트 S. 린드먼, 현대 유럽의 역사(장문석 역, 삼천리, 2017), 601쪽재인용



3.2.2. 비판론[편집]


체임벌린의 비판론은 두 가지로 상반된 학설이 있다. 첫번째 학설은 서구권에서 주로 논의되었던 것과 같이, 대중적인 인식의 근원이된 처칠의 체임벌린에 대한 맹비난과 궤를 같이하는 논조의 학설이다. 그는 완고하게 재무장을 거부했으며 적에게는 나약하고 아군에게는 독선적이었다는이라는 비판이다. 그는 재무장관일때 군축을 통해 복지를 확충하고 그 덕에 인기를 얻고 총리가 되었기 때문에 정책의 전환을 결정하는건 자신의 정책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정계에서의 추락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체임벌린은 국민생활이 전력증강보다 우선되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육군장관 호어-벨리샤가 방위산업 활성화를 통한 경기활성화 방안을 보고했을때 이를 무시했다. 그리고 항상 재무장을 위한 여유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1937년까지 재무장을 위한 예산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 -중략 - 영국의 역사학자 파커는 체임벌린의 편협한 정책관보다 그의 독선적인 성격에 주목했다. -중략- 고데스베르크 회담 이후 대부분의 정책전문가들이. 히틀러는 유화정책을 악용하고 있으며 정책 수정이 필요하다고 조언했을때, 이 권고를 무시하고 정책을 추진한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체임벌린의 대독 유화정책 결정 과정과 평화체제 유지의 상관관계 연구 한승윤 인용


두번째 비판론은 소련과 동구권 학자들이 주로 제기하고, 서구권에서도 좌익 역사가들에게 의해 받아들여진 주장인데, 영국의 역사가들은 영국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고있을 뿐이고, 영국과 체임벌린이야말로 2차대전의 원흉이라는 비판이다.

영국은 영일동맹으로 일본을 후원하고, 베르사유 조약이후 내내 독일의 편을 들며, 독일의 재무장을 묵인하고 조장해왔다. 중부유럽에서 독일제국 군사력의 증발으로 전통의 라이벌인 프랑스자르 공업지대등을 점령하는 등 성장하는 것도 원치않았으며 소련이 서진하는 것도 원치않았다. 해답은 독일의 부활이었었다. 사실 영국은 확장하고 있는 제국을 엿먹이려 2등국가를 지원하는 오랜 전통이 있었고 독일은 그에 정확히 들어맞는 상황에 있었다. 그 2등국가가 주변국가를 병탄하는건 지원에 있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국 자신이 전세계 최대영토를 보유하고 수많은 이민족을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최대의 식민제국이기 때문이다 영국은 1차대전 당시 막대한 자금을 끌어다 쓴 결과 새로운 전쟁에 돌입할 재정적 여유가 없었다. 반면 필리핀과 괌을 획득하며 슬금슬금 영국령 인도제국의 동쪽에서 접근하면서 민족자결주의니 뭐니하면서 대영제국을 안에서 흔들고 있는 반란군 놈들의 경제적 침투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영국제국은 1920년대초부터 1차세계대전 이후 여타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서의 모순가운데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 영국과 미국 사이의 적대관계에 직면했다. 사실 전시 동맹에도 불구하고 1차대진 이후 미국과 영국의 관계는 파트너 관계라기보다는 경쟁자 관계였다. 그 이유는 "동맹국의 제국주의와 해군주의"에 대한 윌슨의 혐오감에 있었다. -중략- 따라서 파국이 도래할때까지 영국은 미국과의 갈등을 제거하거나 파트너쉽을 구축하려 하지 않았다.


체임벌린이 독일과의 유화정책을 추진한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가 미국이 지원의 대가로 영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지배를 요구할 것이라는 판단에 있었다. 이러한 인식에서 체임벌린은 제국특혜관세의 수정과 미국의 무역과 투자에 제국을 개방하는 것을 포함하는 미국이 지배하는 국제질서를 수용하기보다는 독일과의 유화를 추구했다.


1925년 10월에 체결된 로카르노 조약은 독일의 위상에 일정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유럽에서 전쟁을 위협하는 실질적 위협은 동쪽에 있는데 로카르노 조약은 이 문제를 거의 논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영국은 서부 유럽에서의 현상유지의 의무가 있지만,동유럽에서의 전쟁에 서유럽으로 확산될 경우에는 의무가 없다. 사실 로카르노 협상전의 영국의회에서 요구한 조건 중 하나가 동부 유럽에 대해서는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Lothian and the Problem of Germany, 1933-1939 인용


대영제국의 서쪽의 반란군이 머리 아픈 상황에 동쪽에도 반란군의 나라가 있었으며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심장인 영국에 대해 입만 열면 비난하고 있었다. 사민당이 집권하고 공산당이 약진하고 있는 독일의 상황은 영국에게 크나큰 불안감을 안기고 있었으며 이를 저지하려 프로이센 쿠데타를 일으킨 히틀러는 소련의 침투를 막아줄 방파제로서 강한 신뢰감과 호감을 주었다.

뮌헨협정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히틀러가 파기한 이후에도 체임벌린은 독일에게 이렇다할 제재를 하지 않았고 독일의 영토 재수복을 묵인했다.

히틀러샤흐트는 독일에서 문명의 보루이고, 우리의 유일한 친구들이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반대하면서 우리의 사회체제를 지키기 위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영국과 독일의 커넥션을 만들어 강력한 독일경제를 재건하는 일은 볼셰비키 위협에 대처하는 보루로 인식되어야 한다

M.norman 잉글랜드 은행 총재


파시스트와 공산주의자들은 서로 적대시하기 때문에 독일과 소련이 상호 공격하도록 부추기면서 우리는 갈등에서 벗어나있어야 한다. 독일과 소련이 처절하게 싸워 서로 약해졌을때, 서구세력들 무엇보다 영국이 무대에 등장할 때가 올 것이다.

로디언은 1936년 6월 3일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체임벌린에게 보낸 비망록에서 영국은 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을 지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또 독일의 요구에 따른 단치히와 메멜문제에 대한 해결과 헝가리 국경의 수정 및 식민지 경제문제를 논의해야한다고 말했다.

Neville Chamberlain and Anti-Communism(Anti-Soviet Union 인용


성장하는 제국을 손쉽게 막고자하여 모험적이고 호전적인 두국가를 키워놓고서 정작 이 두국가를 통제할 군사력은 군축으로 제거해버린 무모한 정책 탓에 2차대전의 원인 측면에서 영국의 책임은 피할 수 없다. 한편 전쟁을 승리한건 소련의 지상군과 희생, 미국의 해군과 자금이라는 것을 모두가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영국이 애초에 막고자하던 소련과 미국의 세력투사는 전세계적 단위로 확대되었다. [22]

체임벌린은 처칠이 제안했듯이 소련을 포함한 대동맹으로 독일을 제어하여 2차대전을 저지할 수도 있었으며 그랬을 경우 대영제국의 몰락도 지연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중/동유럽 약소국들의 운명을 독일과의 제국주의적 거래를 통해 파괴하였다. 이는 대영제국 스스로의 몰락도 재촉하는 패착이 되었다.

3.3. 처칠의 추도문[편집]



인간에게는 사건의 추이를 앞질러 예견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걸 다 안다면 세상 살아가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 1940년 11월 12일 네빌 체임벌린의 추도사 中


처칠은 체임벌린의 뮌헨 협정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했지만, 그의 행동은 그저 "실수"와 "오판"이지 동구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악의"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 비난하면 본인이 옹졸해보일테고 동시에 체임벌린이 악의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영국이라는 국가의 책임이 되기 때문에 영국의 정치인 입장에서 이런 입장을 취할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침묵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추도문을 발표한 것에서 보듯이 개인적으로는 처칠은 체임벌린을 용서한 듯해 보인다.

4. 매체에서[편집]



4.1. 출판물[편집]


  •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탬버린을 치는 걸로 나온다.[추정] 나중에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는 체임벌린이 히틀러에게 통수 맞은 것에 빗대 북한과 대화를 해도 차피 드시 쟁은 진다의 줄임말인 어반전터파들이 탬버린을 흔든다.어반전터파

  • 해리 터틀도브대체역사소설인 《일찍 일어난 전쟁》에서는 뮌헨에서 히틀러의 강압과 여론 때문에 협정을 파기하고[23] 초기에 독일에 선전포고하는 수상으로 나온다. 물론 서부전선에서의 여러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역사처럼 처칠에게 자리를 물려준 뒤 퇴임. 이 소설에서는 1차 세계대전 초반 + 낫질작전으로 프랑스 대부분이 독일에게 넘어간다. 진격은 파리 근방에서 간신히 멈추게 되는 상황이다. 처칠은 암살당한다.


4.2. 영상물[편집]


  • 브렌던 글리슨이 처칠을 맡았던 처칠의 전기영화 <폭풍 속으로>에서는 영국 배우 잭 셰퍼드가 체임벌린을 맡았다.

  •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는 히틀러의 프랑스 침공으로 체임벌린이 사퇴하고 윈스턴 처칠이 집권하여 영국이 독일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다. 영국 배우 로널드 픽업이 체임벌린으로 분했으며 작중에서는 고집불통에 안하무인스러운 성격을 지닌 주인공 처칠과는 반대로, 기존의 역사적 평과는 사뭇 다른 신중하고 침착한 분위기의 인물로 묘사된다. 초반부부터 실은 자신이 암으로 시한부가 되어 있음을 담담히 밝히는 부분 등을 보더라도 제법 온정적인 시각으로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왕인 조지 6세 등의 주변 인물들도 하나같이 처칠보다는 체임벌린을 두둔하는 분위기이다.[24]

  • 뮌헨 협정을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뮌헨: 전쟁의 문턱에서>(2021)는 오스카상 수상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가 체임벌린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체임벌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는데, 영화 끝부분에서 '체임벌린이 뮌헨 협정을 체결한 덕분에 연합국은 1년의 시간을 벌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2차대전에서 승전할 수 있었다.'라고 평가한다. 당시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등 전쟁에 관여한 유럽 열강들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현대의 관점에서 재평가한 체임벌린의 뮌헨 협정에 대한 가치가 처음으로 영화를 통해 조명받는다고 볼 수 있다.


4.3. 게임[편집]


  •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의 게임 Victoria에서 컴퓨터가 그 어떤 제안[25]도 다 들어주게 만드는 치트키가 네빌의 이름에서 따왔다. 게임 중에 F12를 누르고 Neville을 입력하면 사용할 수 있다.

  • Hearts of Iron IV에서 스탠리 볼드윈의 뒤를 잇는 영국 지도자로 등장한다. 대외정책은 유화적이었지만 한편으론 뒤에서 전쟁을 준비했다는 평가에 맞게 전쟁 지지도를 깎는 '유화론자' 특성과 군수 생산량을 늘려주는 '재무장 지지자' 특성이 동시에 붙어 있다. 전쟁지지도가 충분하다면 좋지만 반대로 부족한 상황이라면 쓰레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연합군 연설팩 DLC에서 직접 연설이 재생되는데, 하나가 뮌헨 협정 이후의 "우리 시대의 평화" 연설이며, 다른 하나는 "독일과의 전쟁" 발발 시 나오는 연설이다.

  • 대체역사물 게임인 터닝 포인트 : 폴 오브 리버티에선 윈스턴 처칠이 1935년 뉴욕에서 택시 사고로 사망하여 영국 본토 항공전까지 수상의 자리에 있었고, 이후 독일에 항복하게 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9 10:27:09에 나무위키 네빌 체임벌린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배다른 형제이다. 그래도 사이는 친했던 듯하다.[2] 여담으로 낸시 아스터는 처칠에 대해 질문받자 "그는 이미 끝났다."라고 평가했다. 물론 두 사람의 사이가 매우 나빠서 아스터가 처칠에게 자신이 처칠의 부인이라면 처칠의 차에 독을 탔을 거라고 하자, 반대로 처칠은 (낸시의 남편으로 살 바에야) 그 차를 마셨을 거라고 응수한 일화도 있을 정도이니 중립적인 평가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단순히 악감정 때문에 나온 평가는 아니다. 저 시기 처칠은 실제 한물 간 정치인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2차 대전이 아니었으면 오늘날 처칠은 그냥 평범한 옛 정치인 정도로 기억되거나 갈리폴리의 참사를 불러온 해군 장관이란 오명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인생은 타이밍.[3] 실제 이탈리아는 2차 대전 발발 직후, 영국에 연합국으로 참전할 수 있다는 의사를 타진한 적도 있다. 다만 그 전제조건이 이탈리아 지상군 전부를 현대화할 정도의 장비 요구라서 현실성이 없었다. 당장 영국도 대전 발발 후 본격적으로 육군력을 기르고 미국발 물량이 오기 전까지는 지상군이 굉장히 부실한 상태였다. 여러 현실적인 이유들 탓에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탈리아는 1차 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을 시종일관 방해했으며 실제로 1934년 오스트리아 병합을 저지했다.(물론 히틀러는 나중에 한번 더 병합을 시도해 성공했다.) 그러나 무솔리니가 명분 없는 식민전쟁을 벌여 국제사회에서 고립당하자 손을 잡을 나라가 독일밖에 없었다.[4] 첫번째는 1878년 베를린 회의를 마치고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다우닝가 10번가 앞에서 한 연설이었다.[5] 의미가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우리 시대의 평화'라는 표현으로도 잘 알려졌는데, 어느 쪽이던 긍정적으로는 쓰이지 않는다.[6] 몬티 파이선의 '세계에서 가장 웃긴 농담'에서는 나레이터가 '신형 농담은 영국의 전쟁 전 농담보다 6만 배는 더 강력했다.'라고 설명할 때 이걸 보여주면서 은근히 깠다.[7] 처칠과 마찬가지로 대독 강경론자였으며 인도-버마 식민지의 전문가였다. 이 연설은 올리버 크롬웰의 명언을 인용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에이머리의 이름은 두고두고 영국사에 이름이 남는다. 그러나 처칠과의 의견차이, 특히 인도 식민지 운영에 대한 견해차이로 전쟁내각에 기용되지 못했고, 전쟁 기간 인도 및 버마 식민지의 국무장관을 맡아야 했다. 독일 항복 직후인 1945년 7월 총선에서 낙선하고 세습귀족 임명 및 상원의원직을 제안받았으나 거부하고 정계를 은퇴했다.[8] 체임벌린으로서는 매우 운이 없었다. 아무리 노동당이 체임벌린을 싫어한들, 전 유럽에서 독일에 맞설 나라가 영국 하나뿐인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면 절대 비토하지 못했을 것이다. 체임벌린 내각 시기에는 아직 프랑스가 건재했기에 노동당도 체임벌린 밑에서는 전시 내각 참여 안 한다고 뻗댔던 거다. 실제 총리가 누구냐를 떠나 전시내각 참여 자체를 계속 반대하던 소수파들은 프랑스가 항복한 후 일제히 버로우했고 극소수가 종전 이야기를 꺼내긴 했으나 거국내각 부총리로 입각했던 노동당 당수 클레멘트 애틀리가 진압해버렸다.[9] 대장암이었는데, 전쟁 이후 스트레스로 병세가 더 급격히 악화되었다.[10] 5월 위기 이후 체임벌린의 지지로 처칠 내각은 안정을 찾고 있었으나 여전히 당 대표는 체임벌린인 상황에서, 체임벌린이 물러날 경우 설령 처칠 본인이 당 대표가 되더라도 그동안 잠잠해있던 온건파의 공격으로 처칠 내각이 흔들릴 우려가 있었다. 때문에 처칠은 후일은 몰라도 당장에는 자신이 총리를 맡고 자신을 지지해주는 체임벌린이 당 대표직을 맡아 당 온건파의 공격에서 비껴나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결국 체임벌린 사후 예상된 온건파의 반발은, 주미대사의 사망을 틈타 온건파 수장 핼리팩스 외무부장관을 주미대사로 보내는 것(...)으로 해결한다.[11] 처칠 입장에서도 1940년 5월 서부전선의 패전 와중에 체임벌린이 자신을 지지해준 것이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12] 독일은 1939년 세계대전을 개전할 당시에도 군 재건이 완료되지 않았다. 가장 기본적인 군복과 보병화기조차 부족해 징집된 청년들에게 군인신분임을 증명하는 완장 하나만 준 채로 집에서 들고 온 삽 하나 메고 있는 병사들도 꽤 있었을 정도로 재군비가 아직 한창 진행 중이었다. 해군 재건속도에 맞춰 충분한 시간을 들여 각 군의 재무장을 완료하고 개전하기로 한 초기 구상에선 개전 날짜가 1945년이었다. 우리가 아는 역사는 히틀러의 벼랑 끝 외교가 양날검이 되어 본래 계획보다 무려 5년이나 당겨진 결과이다.[13] 그건 히틀러가 어리석은 탓이지 뮌헨 협정의 결과때문이라고는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뮌헨 협정의 결과로 이득을 본 것은 히틀러와 나치 독일이지 영국과 프랑스가 아니었다. 애시당초 6개월 먼저 침공하든가, 아니면 주데텐란트를 뮌헨 협정으로 차지하고그 6개월 동안 전쟁 준비를 할 것인가는 어디까지나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 둘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틀러가 한 말은 그냥 망발에 불과한 것이다.[14] 히틀러도 초기에는 그렇게 믿었고 자주 발언했다. 나의 투쟁에서 영국과의 동맹 필요성과 방법에 대한 챕터가 다수 있다.[15] 물론 2차대전 후반기의 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전쟁을 영국 자력으로 해냈던 1차대전 때와 달리 엄청난 차관을 빌리고 투입한 병력의 질과 수 차이 탓에 협상의 주도권은 영국이 아닌 미국과 소련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이 시점까지는 소련보다 영국을 먼저 손봐줄 생각이었다.[16] 후술할 옹호론에서는 대체 체임벌린이 무슨 재주로 독일이 얼마나 재무장을 했는지 읽을 수 있겠느냐고 하지만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애시당초 총리에 오를 정도의 정치인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읽어야 하며 또한 이를 읽을 수 있도록 다양한 방면에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무능하거나 책임 방기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17] 사실 처칠이 이런 게 처음이 아니어서 1차 대전 당시 다르다넬스 해전갈리폴리 상륙작전의 패배를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존 피셔 제독에게 떠넘기고 해임시킨 전적이 있다. 정작 피셔는 여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이런 책임 떠넘기기로도 책임 회피에 실패해서 해군장관에서 물러나야 했다. 2차 대전 시점에서도 이 버릇을 못 버린 것. 그리고 독일이 노르웨이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독일 해군은 이 때 큰 타격을 받아 이후 대전 내내 소극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 해군의 재군비 계획을 몇 년 앞서 히틀러가 개전하는 바람에, 레더 제독이 "우린 이제 명예롭게 죽는 길만 남았다." 했다는데 그 얼마 안 되는 전력을 여기서 많이 손실했다.[18] 연합국과 추축국을 막론하고 2차 대전기의 정치인/관료/장군들은 1차 대전에서 병사나 초급 장교로 참전한 이들이 많았고 아들이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사례도 제법 있다. 그리고 일반 가정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19] 353쪽의 미주 22에 "그 증거는 weinberg, Foreign Policy 1937-39, pp. 462-463에 언급되었다"고 언급.[20] https://m.dcinside.com/board/rome/841311 재인용[21] https://m.dcinside.com/board/rome/841311 재인용[22] 헤게모니가 제국주의를 혐오하는 두 강국으로 넘어갔고, 이 두국가는 대영제국의 식민지를 독립시켜 산산조각낸다.[추정] 체임벌린→쳄벌린→탬버린. 실제로 과거에 쓴 기사들을 보면 "네빌 벌린"이라 쓴 기사들이 몇몇 있다.1, 2[23] 사실 체코 민족주의자에게 독일 고위 외교관이 암살되는 바람에 히틀러가 협정 파기 후 체코 침공을 결의한 이유가 더 크다.[24] 실제 역사에서도 뮌헨 협정 전후에는 대부분 체임벌린을 두둔하고 처칠은 한물 간 고집스럽고 늙은 전쟁광으로 평가했다.[25] 가진 돈이나 식민지를 다 내놓으라는 식의 정상적인 플레이에선 절대 이뤄질 수 없는 무리한 요구까지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