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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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노명일(어린시절).jpg

1940년 소학교 졸업 당시 촬영된 사진으로 보인다.
자 / 호
사국(士國) / 의산(義山)
본관
경주 노씨(慶州)[1]
출생
1926년[2] 2월 28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독동동
(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 문동골)[3]
사망
1953년 8월 15일 (향년 27세)
경상남도 부산시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노명일은 1926년 2월 28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독동동(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 문동골)에서 아버지 노원엽(盧元燁)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선산 김씨[4]과 혼인하였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 이후 5촌 조카 노진목(盧鎭穆)을 양자로 입적하였다.

어려서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수학하였고 1940년 고향의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해 4월 대구공립직업학교에 입학하였는데 2학년 때 조선인 학생웅변대회에 대구 대표로 참가하여 일제의 식민통치를 규탄하다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로 단상에서 끌려 내려가기도 했다. 1942년 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경기도 인천부에 위치한 주식회사 조선기계제작소(朝鮮機械製作所)에 채용되어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943년 7월경 노명일은 동료 임창빈(任昌彬)·이도열(李道烈) 등과 함께 회사 동료 박태철(朴泰哲)로부터 각자 한글로 문학작품을 써서 책자로 만들자는 제안을 받았다. 박태철은 평소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면 해외의 독립운동가들과 연락하여 독립을 실현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고, 내선일체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조선인들이 단결심을 키워 독립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옛날부터 전해내려온 언어와 풍속을 유지하여 독립을 해야한다며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곤 했다. 박태철은 이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문학을 통해 민족의식의 앙양을 도모하기로 하고 그 수단으로서 잡지를 발행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노명일은 박태철의 제안에 적극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그해 10월 중순 경에 회사 사무실에서 한국인이 양치기꾼의 지시에 따라 독립을 위해 궐기한다는 뜻으로 책자의 제목을 『목양』이라 짓고, 민족의식이 강한 작품을 게재하여 책자를 만든 후 각자 윤독하면서 민족의식을 함양하는 한편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배포하여 읽도록 하였다. 그러던

그 뒤 잡지 제2호의 원고를 모아 등사하려고 하던 1944년 6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7월 4일 인천소년형무소에 구금되었다. 이후 1945년 8월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8.15 광복 후 1953년 부산에서 한국독립노동당(韓國獨立勞動黨) 부총재 및 대변인으로 활동하다가 그해 6월 13일 반대 세력에게 살해되었다.#

199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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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락재공파(亦樂齋公派).#[2] 지사경주노공휘명일행적비에는 1925년생으로 새겨져 있다.[3] 경주 노씨 집성촌이다. 노명일은 독동리 607번지에서 태어났으며 이곳에는 현재 고택에 선산 노진환 소장 전적을 보관하는 고전적자료전시관이 설치되어 있다. 소장자 노진환(盧鎭桓)은 노명일의 5촌 조카이기도 하며, 선산 노진환 소장 전적은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44호로 지정되어 있다.[4] 김철묵(金哲默)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