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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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8대 국무총리
노신영
盧信永 | Lho Shin-yong


파일:노신영.jpg

출생
1930년 2월 28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학천리
(現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
사망
2019년 10월 21일 (향년 89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 39호
본관
광주 노씨

학천(鶴泉)
재임기간
제19대 외무부 차관
1974년 2월 11일 ~ 1976년 3월 9일
제18대 외무부 장관
1980년 9월 2일 ~ 1982년 6월 1일
제12대 국가안전기획부장
1982년 6월 2일 ~ 1985년 2월 18일
제18대 국무총리[1]
1985년 5월 16일 ~ 1987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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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노창열, 어머니 방인숙
형제자매
형 4명[1]
배우자
김정숙
자녀
아들 노경수, 노철수, 노동수[2]
딸 노은경, 노혜경
친인척
며느리 정숙영, 홍라영
사위 류진
학력
덕흥공립국민학교 (졸업)
평양 제2공립중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켄터키 주립대학교 (정치학 / 석사)
종교
기독교 (개신교)
신체
178cm
약력
제4회 고등고시 행정과 제3부(외무) 합격
로스엔젤레스 총영사
제18대 외무부장관
제12대 국가안전기획부장
제18대 국무총리
초대 롯데복지재단/롯데장학재단 이사장
롯데그룹 총괄고문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6. 소속 정당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18대 국무총리.


2. 생애[편집]


1930년 2월 28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학천리에서 출생했다. 평양제이중학교 졸업 후 부모의 권유에 따라 1949년 서울로 월남해 1950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입학 후 2주 만에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서울 수복 후 군에 입대하였다. 군 복무 중인 1953년 2월 부산에서 열린 제4회 고등고시 행정과 제3부(이후 외무고시를 거쳐 현재는 외교관후보자시험)에 합격했지만 당시 규정상 군 복무자는 수습 행정관으로 채용될 수 없었다. 이에 방법을 찾던 중 외국의 대학으로부터 입학 허가서와 장학금 또는 재정보증서를 받고 유학 시험에 합격하면 제대가 가능했기에 유학길에 올랐다. 1955년 미국 켄터키 주립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귀국해 외무부(현 외교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68년부터 주 로스앤젤레스 총영사를 지내면서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로널드 레이건과 친분을 쌓았고,[2] 1972년에는 주 뉴델리 총영사로 부임해 인도와 대사급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3] 1974년부터 2년간 외무부 차관을 지냈고, 1976년 제네바 주재 대표부 대사로 부임했다.

전두환이 집권한 직후인 1980년 9월 외무부 장관에 임명됐고 정통 외교관료답게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라든가 일본과의 경제협력 등을 진두지휘하는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대일 경제협력의 경우 1982년 당시 세지마 류조가 방한하자 일본으로부터 한국이 공산권을 방어하는 보루이고 이에 의해 일본이 안보에서 무임승차하고 있다는 논리를 펴서 경제협력 차관을 받아낸 일화가 유명하다.[4]

1982년 6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에 따른 민심 수습책에 따라 국가안전기획부장에 임명되었다.[5] 중정-안기부-국정원 역사상 최초의 문민 부장이자 전두환 정부의 유일한 문민 부장이었다.[6] 군사 정권에서 정보기관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역할을 감안하면 순전히 외교에만 능통한 노신영을 안기부장에 앉힌 것은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이는 전두환이 자신의 집권을 적극 도운 군부 출신 인사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다. 물론 안기부의 역할 중 해외공작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외교에 능통한 노신영의 노하우가 분명 도움이 될 법도 했기에 이 점도 고려 대상이기는 했다.
안기부장으로 임명된 뒤 가장 먼저 해결한 건 바로 김대중 석방이었다. 1982년 12월 김대중형집행정지로 석방돼 미국으로 갔는데, 이는 노신영이 외무부 장관 시절부터 김대중을 석방시켜야 한다고 전두환을 설득해온 결과였다.[7]

1983년 5월 일어난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 때는 미국과의 협의는 물론이고 당시 '중공'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던 적성 국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협상을 진두지휘해 성공적으로 해결했다. 중국 여객기가 불시착한 곳이 하필 주한미군 기지라서 미국과의 협의 과정에서 우리 군과의 소통도 필요했는데, 김윤호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등의 군 수뇌부가 안기부장의 지시를 받을 수 없다[8]며 반발하기도 했다. 물론 미국과의 외교적 문제가 얽혀 있어 군부 단독으로는 해결을 못하다 보니, 전두환이 군부 세력 견제도 할 겸 외교 전문가인 노신영 안기부장에게 맡겼던 것이라 군 수뇌부측은 국방부장관을 통해 지시하라는 절충안을 내놓아 무난하게 해결되었다. 현재의 국가안보실장에 해당하는 직위가 없다보니 생긴 해프닝인 셈이다.

반면 국내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미흡한 모습을 보여줬다. 대표적으로 김영삼단식 투쟁상도동계-동교동계 정치인들이 신한민주당을 결성할 때 아무 대응을 못한 것이다. 사실 외교 전문가였던 노신영이 국내공작 업무는 문외한인 것도 컸다. 이를 뒤집어보자면 군사정권답지 않게 정보기관이 매우 유연한 시기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의 신임을 계속 얻었으며 1983년 10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정부의 주요 관료들이 대거 사망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장세동 대통령경호실장과 함께 유임됐다.[9]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있던 시절 천안 독립기념관 건립을 구상했으며, 졸업정원제에 대해 반대하였다.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이 선전한 데 대해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으나 오히려 국무총리로 임명됐다.[10][11] 그리하여 노태우, 장세동 등과 함께 후계자로 주목받았으나 일반 국민들에게 인지도가 낮았고 노태우, 정호용 등 군부 출신에 의해 견제를 받았다.[12] 이후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과 함께 물러났다.

공직을 떠난 이후 1994년부터 롯데복지재단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995년에는 롯데장학재단 이사장도 겸직했다가 2012년 롯데그룹 총괄고문으로 추대되면서 이사장직을 신영자에게 넘겼다. 그 외에 1997년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 석좌교수, 1998~2002년까지 '안중근 의사 숭모회' 6대 이사장 등을 각각 지냈다.

2019년 10월 21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향년 89세로 사망했으며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3. 가족관계[편집]


부인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기로, 2009년 먼저 사망했다.#

장남 노경수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명예교수이고, 그 부인은 정세영의 딸이다. 차남 노철수는 홍진기[13]의 차녀와 결혼했으며, 막내딸 노혜경은 풍산그룹 창업주 류찬우의 차남 류진에게 시집갔다.

삼남 노동수는 주가 조작 혐의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


4. 기타[편집]


  • 백선엽과는 같은 동향의 같은 면의 바로 옆 마을 출신이다. 이러한 인연 덕분인지 노신영이 사망할 때까지도 서로 자주 연락했다. 두 사람은 9개월 차이로 노신영이 2019년 10월, 백선엽은 2020년 7월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

  • 후임 외무부 장관을 지낸 이범석과는 같은 평안남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외교가에서 경쟁해서 그런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이범석이 외무부 장관에 임명된 뒤로는 화해했다고 한다. 1983년 10월 전두환이 버마 순방을 논의할 때 이범석과 함께 반대하기도 했는데 전두환이 고집을 꺾지 않으면서 결국 이범석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만약 이 장관과 버마 방문 전 화해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죽을 때까지 회한의 감정에 시달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반기문이 외교관으로서 자신의 롤모델로 존경했다고 전해진다.
파일:external/news.chosun.com/200610260636_01.jpg
왼쪽부터 신동빈, 반기문, 노신영, 한승수.


5. 대중매체에서[편집]



  • 1998년 SBS 정치 대하드라마 <삼김시대>에서는 배우 박종관이 연기했다.


6.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1985 - 1990
정계 입문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0 - 1995
합당[14]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1996
당명 변경

[[무소속|
무소속
]]

1996 - 2019
탈당
정계 은퇴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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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임 국무총리 진의종이 사임하면서 정식으로 취임 전까지 국무총리 서리 수행. (1985년 2월 19일 ~ 1985년 5월 15일)[2] 이 덕분에 훗날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이 된 후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외무부 장관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3] 이때 반기문이 초임 외교관으로 노신영 총영사 아래에서 근무했다.[4] 일본의 반응은 차가웠는데 "당신네 나라는 싫어하는 나라의 기술을 배우고 돈을 빌리러 오기도 하시오? 차라리 돈이 부족하면 빌려달라고 하지 무슨 안보 운운하면서 말을 돌리시오?"라는 면박을 줬다. 한편 소노다 스나오(1913~1984) 당시 외상은 겉으로는 묵묵히 노신영의 말을 듣다가 회담 내용을 살짝 흘려 버리고 협상을 파탄 직전까지 몰기도 했다.# 심지어 온갖 우여곡절 끝에 받아낸 차관 금액조차 목표치보다 적었다.[5] 본래는 외교관 출신인 자신이 정보 분야의 최고 책임자를 맡는 게 내키지 않은 터라 사양했지만, 전두환이 계속해서 설득하는데다 전임자 유학성도 "대통령께서 하라시는데 별 수 있습니까? 하라면 해야죠."라는 말로 수락을 종용하면서 결국 안기부장을 맡았다.[6] 신직수 중정부장이 법조인 출신이긴 했으나 군법무관으로 임용되어 반은 군인이었다.[7] 김대중 사형 집행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전두환에게 노신영은 한미 관계에 악영향이 온다는 우려를 표명했고, 이에 전두환이 김대중을 석방시킬 경우 정국이 시끄러워진다고 우려하자, "외교는 줄다리기입니다. 힘들다고 줄을 놓아버리면 줄다리기조차 할 수 없게 됩니다. 줄다리기를 하되 얼마나 잘해내느냐, 그게 외교의 관건입니다."라는 명언으로 전두환의 결심을 이끌어냈다.[8] 전통적으로 장성이 부임하던 안기부장이었지만, 노신영은 이례적으로 문민이었다. 그러니 서슬 퍼런 군사정권 하에서 군부가 문민 안기부장을 상대로 대놓고 이견을 냈던 것이다.[9] 노신영은 전두환이 순방지에 버마를 추가하려 하자 외무부 장관 이범석과 함께 처음부터 반대했다. 때문에 국가안전기획부가 북한의 테러 공작을 파악하지 못한 것과 별개로, 그에게 책임을 묻기도 애매했다.[10] 본래 전두환은 명색이 안기부장이라는 노신영의 선거 예측이 완전히 빗나간 점을 문제삼아 안기부장에서 경질했지만, 이것만 빼면 일을 잘해서 웬만하면 다른 자리에라도 앉히고 싶어했다. 그러나 안기부장은 장관급보다 높은 부총리급인지라 다시 외무부 장관으로 보낼 수는 없으니 고심 끝에 국무총리에 임명했던 것.[11] 사실 전두환은 총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노신영을 1년 정도 더 안기부장으로 유임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격전 끝에 수도권과 부산 등 험지에서 살아돌아온 국회의원들이 당정 개편을 요구하자 결국 노태우를 민정당 대표로, 노신영을 국무총리로 임명했다.[12] 이러한 점들에 있어서 푸틴의 최측근 메드베데프와 상당히 유사하다. 노신영과 메드베데프 모두 자국 최고의 명문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문관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무력 위주의 정치 세력을 이끄는 보스에게 발탁돼 그 보스가 대통령인 정부에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보스 휘하의 무력집단으로부터 지속적인 견제를 받는다는 것도 유사하다.[13] 이승만 정권의 마지막 법무부 장관으로 4.19 혁명 당시 유혈 진압의 책임을 지고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이후 삼성그룹에 들어가 중앙일보TBC의 초대 사장이 되었다. 홍진기의 장녀가 바로 이건희의 부인 홍라희. 이병철과는 사돈 관계로 그가 삼성에서 매스컴 분야를 책임지게 된 건 이 때문이다.[14]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