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 오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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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피에르 아이슬랭 드 몽타구
(Nicole Oresme)
생몰년도
1320년에서 1322년 사이 ~ 1382년 7월 11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플뢰리쉬르오르네
사망지
프랑스 왕국 리지외
직위
바이외 주교, 리지외 주교, 나바르 대학 총장, 루앙 대성당 참사회원

1. 개요
2. 생애
3. 연구
3.1. 번역가
3.2. 정치학
3.3. 경제학
3.4. 수학
3.5. 우주론
3.6. 물리학



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신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수학자, 경제학자, 번역자. 샤를 5세의 고문으로서 프랑스 왕국의 경제 부흥을 이끌었으며, 경제학, 수학, 물리학, 천문학, 철학, 신학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저서를 집필했다. 14세기 유럽의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지방의 플뢰리쉬르오르네 출신으로 전해지지만, 가족 및 출생년도,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학식과 품행이 우수하지만 파리 대학교 등록금을 지불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보조금을 지원하고 국왕이 후원하는 기관인 나바르 대학에 재학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그는 농민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1348년 이전에 파리 대학교로 진학해 예술학을 공부했으며, 1348년부터 신학을 공부했다. 1356년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같은 해에 나바르 대학 총장이 되었으며, 1362년 6월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니콜은 뛰어난 학식과 식견을 갖춘 인물로 명성을 떨쳤고, 1356년 푸아티에 전투 후 잉글랜드에 포로로 끌려간 아버지 장 2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던 샤를 도팽의 호의를 얻었다. 샤를 도팽은 그를 아들 샤를 도팽의 가정 교사로 선임했으며, 1359년 11월 2일 왕실의 목사이자 고문으로 선임했다. 샤를 5세는 그의 재능과 성품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조언을 즐겨 따랐고, 그가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샤를 도팽은 그의 신학 이론을 따라 아비뇽의 교황 궁정에서 교회의 무질서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1361년 바이외 주교에 선임되었으며, 1362년 11월 23일 루앙 대성당의 참사회원으로 임명되었고, 1363년 2월 10일에 파리의 생트샤펠 예배당 정경으로 선임되었으며, 1364년 3월 18일 루앙의 학장에 선임되었다. 이렇듯 여러 직책을 역임하는 와중에도 파리 대학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한편으로는 저서를 집필하고 고대 그리스, 로마 학자들의 저서를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하기도 했다. 또한 샤를 5세의 고문으로서 많은 조언을 했는데, 특히 백년전쟁으로 피폐해진 프랑스의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정책 수립에 많은 도움을 줬다. 1377년 리지외 주교에 선임된 뒤 리지외에 거주했고, 1382년 7월 11일에 사망한 후 리지외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연구[편집]



3.1. 번역가[편집]


니콜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학자들이 수학, 정치,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룬 저서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특히 1369년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론》, 《정치학》, 《윤리학》, 《경제학》[1] 번역 작업을 시작해 1370년 완성했고, 그 공적으로 1371년부터 왕실 연금을 받을 자격을 인정받았다. 또한 그는 오늘날 군주제, 민주주의, 과두정치, 귀족정치, 법적 의무 등 정치 용어와 분자, 분모 등 수학 용어, 그리고 천문학, 우주학, 지리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프랑스어 단어를 창안하기도 했다.


3.2. 정치학[편집]


니콜은 군주제를 최고의 정부 형태로 봤고, 선한 왕은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폭군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고 여겼다. 그러면서도 군주는 국민이 정부에 참여하도록 해 통치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봤다. 다만 오직 합리적이고 현명하고 덕망 있는 사람들만 정치에 참여하도록 허용받아야 한다고 봤고, 반란은 공공선을 위협하므로 주민들이 국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법이 왕의 뜻보다 우월하며, 극도로 필요한 경우에만 변경될 수 있다고 봤다. 이렇듯 그는 왕이 통치하는 체계를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왕권 행사는 법에 어긋나지 않게 이뤄져야 하고, '합리적이고 현명하며 덕망 있는' 민중의 정치 참여를 긍정했다.


3.3. 경제학[편집]


니콜은 <화폐의 기원, 자연, 법칙 및 변경에 관한 논문(De Origine, natura, jure et mutationibus monetarum)>을 통해 독창적인 경제 이론을 제시헀다. 그는 인간이 재산을 소유할 자연적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군주는 신민의 사유 재산을 정당한 이유 없이 몰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화폐는 군주의 개인 소유물이 아니라 그 지위를 정의할 수 있는 공동체에만 속한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주권자가 임의로 화폐에 쓰이는 재료의 중량, 명칭, 수량 및 순도의 변경을 통해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부당하며, 사람들이 화폐를 신뢰하지 못해 경제가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확장해 고리대금업을 불공정한 것으로 규탄하면서, 국가에서 이를 통제해 신민이 고액의 이자를 갚느라 경제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걸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4. 수학[편집]


니콜은 <특성과 동작의 구성에 관한 논문(Tractatus de configurationibus qualitatum et motuum)>에서 수학 분야를 다뤘다. 그는 정량적 현상의 그래픽 표현을 위한 좌표의 원리와 유용성을 처음으로 생각한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intensio'와 'extensio'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훗날 위도(latitudo) 와 경도(longitudo)로 대체되었다. 그는 두 개념을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직사각형으로 시각화하는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특정 사물의 위도는 경도를 나타내는 기준선의 특정 지점에서 베이스에 수직으로 세워진 위도에 비례하는 길이로 표시되었다.

니콜은 이러한 도형의 기하학적 형태가 사물 자체의 특성에 상응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경도에 평행한 선으로 표시되는 물건들은 균일한 것으로 정의할 수 있고, 다른 물건은 차이가 있는 것으로 정의했으며, 균일하게 변하는 특성은 경도 축에 기울어진 직선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 분석이 뜨거운 정도, 흰 정도, 단 정도 등 다양한 특성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시간을 경도, 속도를 위도로 취한다는 조건 하에서 형태의 위도를 계산하는 자신의 방법이 점의 이동에 적용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때 수량은 주어진 시간에 포함되는 공간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전치 덕분에, 균일한 위도 차이의 정리는 균일하게 변하는 운동이 횡단하는 공간의 법칙이 되었다. 그가 시간에 따른 가속 물체의 속도를 시각화한 '다이어그램'은 훗날 학계에서 최초의 '막대 차트'로 인정받기도 했다.

저서 <알고리즘의 비례>에서, 니콜은 특정 조화수는 무한대로 발산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의 증명은 2의 거듭제곱인 임의의 n에 대해 1/(n/2)에서 1/n 사이의 급수에 n/2 - 1개의 항이 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들 항은 각각 적어도 1/n이며, n/2이 있으므로 합하면 적어도 1/2이 된다. 예를 들어, 1/2이라는 항이 하나 있고, 합하면 적어도 1/2이 되고, 합하면 1/3 + 1/4, 합하면 1/5 + 1/6 + 1/7 + 1/8, 합하면 적어도 1/2이 되는 4개의 항이 있다. 따라서 급수는 유한한 극한을 갖지 않는 급수인 "1 + 1/2 + 1/2 + 1/2 + ..."보다 커야 한다. 이것은 조화급수가 발산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주장은 첫 n개 항의 합이 적어도 '(1/2)[math(\log_2n)]' 만큼 빠르게 증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조화급수가 아래 관계임을 보여 수렴하지 않음을 증명했다.


[math(\displaystyle \sum_{k=1}^\infty\frac1k > 1+\frac12\sum_{k=2}^\infty 1 )]
[1] 이중 《경제학》은 오늘날 학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을 빌린 알려지지 않은 학자가 집필한 것으로 간주된다.



3.5. 우주론[편집]


니콜은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파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이 제시한 논증을 비판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지구가 움직이면 공기가 남아서 매일 동쪽에서 서쪽으로 큰 바람에 불게 될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므로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니콜은 지구와 물, 공기가 모두 동일한 운동을 공유하므로, 아리스톨레스의 논증은 의미가 없다고 봤다. 또한 여호수아가 태양을 향해 멈추라고 하자 정말로 멈췄다는 성경 구절에 대해 "그 구절은 관례적인 용법일 뿐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다고 주장했다. 그는 천구가 아니라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면, 하늘에서 우리가 보는 모든 움직임은 마치 천구가 지구 주위를 회전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설명했고, 별들로 이뤄진 거대한 구체가 회전하는 것보다 작은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그는 수학 연구에서 서로의 거듭제곱으로 표현될 수 없는 분수의 개념을 개발했으며, 상대 빈도에 관해 확률론적, 통계적 논증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현실에서도 달과 행성의 운동 주기와 마찬가지로 하루와 해의 길이가 서로 맞지 않는 것이 그렇지 않는 것보다 훨씬 자주 일어나며, 행성의 합과 충은 결코 똑같은 방식으로 재발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경로가 천체에 의해 미리 결정되며 행성 및 별자리의 움직임 등으로 미래의 사건을 예측할 수 있다는 점성술은 비합리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점성술사들은 당장 날씨 조차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며, 차라리 선원과 농부가 그들보다 날씨를 더 잘 예측한다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3.6. 물리학[편집]


니콜은 색상의 본질과 빛의 본질은 동일하며, 특정 색은 빛의 일부로, 오직 그 색만 반사되어 우리 눈에 들어오기에 우리는 그 색만 인식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물체와 운동의 관계에 대한 나름의 설명을 제시했다. 그는 운동이 물체에 귀속된다고 봤고, 물체는 움직이지만 움직임 그 자체는 아니며, 물체가 물체가 운동을 시작하면 새로운 "방식" 또는 "존재 방식"이 생기며, 이는 뚜렷한 지점이 아닌 움직이는 물체의 관점을 통해서만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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