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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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107호
강진 정약용 유적
康津 丁若鏞 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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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산103-2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지
면적
23,204㎡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조선시대
위치



1. 개요
2. 상세
3. 교통
4. 외부 링크
5. 사적 제107호


1. 개요[편집]


茶山草堂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과 관련된 문화재이다. 1963년에 다산초당을 포함한 관련 유적 일대가 사적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공식 명칭은 강진 다산 정약용 유적 또는 강진 정다산 유적이다. 원래는 초가로 있지만 현재는 기와집 형태로 바뀌었기 때문에 유적지로 불리고 있다.


2. 상세[편집]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이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강진으로 귀양을 와서 18년 중 10년동안 생활하던 집이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유배가 끝날 때까지 생활하며 학문에 몰두한 끝에 목민심서를 비롯한 숱한 저서들을 남겼다.

1800년 다산을 총애했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의 시련이 시작되었으며 이듬해인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조선 가톨릭 신자이자 다산의 조카딸[1] 사위로 알려진 황사영[2]이 청국에 있는 가톨릭 주교인 구베아 주교에게 백서(帛書)[3]를 보낸 사건이 발생하였으며(황사영 백서 사건)[4] 여기에 보수 유학파(儒學派) 신하들로부터 서학(西學, 가톨릭 교리)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인신 공격과 모함까지 이르면서 결국 현재의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정약용이 처음부터 이곳에서 18년 간의 강진의 유배 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처음엔 강진 읍내의 주막인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에서 주모의 호의로 4년간 생활하였는데 정약용은 이 주막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야사로 이 주모의 딸이 정약용을 흠모한 끝에 정약용과 '통'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사의재는 강진군이 2007년에 복원해서 문화 관광 해설을 제공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다. 이후 고성사의 보은산방, 학래 이청(정약용의 제자)의 집 등을 전전하다가 47세이던 1808년 봄에 윤단(尹慱, 1744~1821)의 산정(山亭)인 귤동의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을 초당으로 초빙한 이는 윤단의 아들인 윤규로(尹奎魯, 1769~1837)였다. 윤규로는 자신의 네 아들과 조카 둘을 다산에게 배우게 했다. 다산은 18년(1801~1818)의 유배 기간 동안 다산초당에서 11년가량(1808~1818)을 머물렀다.

다산이 윤단의 산정으로 오게 된 것은 어머니가 해남 윤씨였기 때문이다. 외가 쪽 친척의 소유였던 산정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다산의 외가는 해남윤씨로 고산 윤선도의 가문이다. 다산초당의 원래 주인인 윤단은 윤복의 6대손이고, 윤복의 형인 윤형의 5대손이 인물화에 탁월했던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이다.
공재는 윤선도의 증손자이기도 한데, 공재의 셋째 아들 윤덕렬의 딸이 다산의 어머니이니, 공재의 손녀이다. 결국 산정의 주인인 윤단은 다산에게 먼 외가 친척인 셈이다.

다산초당은 1963년에 사적 제107호로 지정받았다.

다산초당에 걸린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이름의 초당(草堂)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는 작은 초가집이었으나, 복원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현대의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집으로 중건하였다. 강진군에서는 다시 이를 초가집으로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2018년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이다.


3. 교통[편집]


다산 초당을 방문할 경우, 자가용이 아니면 가기가 좀 힘들다. 강진군 읍내에서도 거리가 제법 떨어진 곳이고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편. 자가용으로는 강진 읍내에서 다산 초당 입구인 귤동 마을까지 약 20분 정도 걸린다.


4. 외부 링크[편집]




5. 사적 제107호[편집]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유배되어 11년간 머물면서 많은 책을 저술했던 곳이다.

정약용은 여유당(與猶堂) 등의 여러 호를 가지고 있으며, 천주교 이름으로는 요한(Johan)이라 하였다.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유형원과 함께 수원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수원 화성을 쌓기도 했다. 정조가 죽자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투옥되어 유배되었고, 그 후 18년 간의 유배생활 동안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의 사상은 한국사상의 원형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곳에서 11년 동안 머물면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흠흠신서』를 비롯한 500여 권에 달하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이를 총정리한 『여유당전서』는 ‘철학’, ‘법제’, ‘종교’, ‘악경’, ‘의술’, ‘천문’,‘측량’, ‘건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장래에 도움이 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학술적 연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옛 초당은 무너져서 1958년 강진의 다산유적보존회가 주선하여 건물이 있던 자리에 지금의 초당을 다시 지은 것이다. 작고 소박한 남향집으로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초당 뒤 언덕 암석에는 다산이 직접 깎은 ‘정석(丁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초당 왼쪽으로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앞 뜰에는 차를 달였다는 ‘청석’이 있고, 한 켠에는 ‘약천(藥泉)’이라는 약수터가 있어 당시 다산의 유배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정다산유적 → 강진 정약용 유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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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산의 큰형인 정약현의 딸이다.[2] 조선의 천주교 신자로 다산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이자 다산의 조카딸 사위이며 다산의 셋째형 정약종의 제자이다.[3] 명주 비단에 글을 썼다는 뜻[4] 현재 이 백서의 원본은 바티칸 시국의 로마 교황청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