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앤 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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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생
3. 비극과 죽음
3.1. 1977, 고릴라, 디지트의 죽음
3.2. 과격한 보호운동
3.3. 미국으로 귀환
3.4. 코넬 대학교 생활
3.5. 1984, 르완다 귀환
3.6. 1985년 의문의 죽음
3.7. 용의자와 판결
3.7.1. 엠마누엘 르위레카나의 의혹
3.7.1.1. 의혹에 대한 반론
3.8. 새로운 용의자
4. 평가
5. 특징
6. 매체
7. 같이보기


1. 개요[편집]


Dian Fossey
(1932.01.16~1985.12.27(추정), 향년 53세)

미국의 인류 학자(영장류학자). 르완다에서 평생 고릴라 보호와 연구에 힘썼다. 저서로 '안개 속의 고릴라' 가 있으며 동명의 영화도 만들어졌다. 한국어로 그녀의 일생에 대해 자세한 자료를 보고 싶다면 그녀를 후원하기도 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 다이앤 포시 특별편이 포함된 회차를 보면 좋다. 고릴라들의 뒷이야기도 다룬다.


2. 일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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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소년 시절의 포시.

다이앤 포시는 1932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시에서 태어났다. 다이앤이 세 살 무렵 어머니는 알코올중독자 아버지와 이혼하고 6살에 재혼한다. 그러나 이 새아버지는 다이앤을 홀대했으며, 친어머니마저 이부동생들만 편애했다. 특히 다이앤은 자신을 무시하는 새아버지를 매우 싫어하여 그와 식사도 같이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나중에는 새아버지의 기대 때문에 캘리포니아 마린(Marin) 칼리지의 경영학과에 진학했으나 다이앤 본인은 경영학보다는 생물학에 흥미가 있었기에 나중에는 수의학과를 갈 목적으로 경영학과를 중퇴한 후 1954년 자비로[1] UC 데이비스 생물학과 수의예과정으로 전과한다. 그러나 졸업하지는 못했고 산호세 주립대학교로 편입해서 작업치료사가 되기 위한 학위를 땄다. 학위를 딴 다이앤은 아동병원의 작업치료사로 취직하여 한동안 그 곳에서 일했다.

이후 대학의 친구들을 통해 아프리카에 흥미를 가졌고, 1963년에 6주간 아프리카 사파리로 여행을 다녀온다. 여행 중 올두바이 협곡에서 루이스 리키(1903~1972) 박사를 만난 다이앤은 유인원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깊은 감명을 받고 영장류학자의 길을 걷는다.

1966년 다이앤은 리키 박사에게 고릴라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로부터 지원금도 받아낸다. 처음에는 콩고민주공화국의 카바라에서 연구를 시작했으나 내전 때문에 르완다로 이동했다. 다이앤은 카리심비 산과 비소케 산 사이에 캠프를 차리고 그 이름을 ‘카리소케’ 라고 지었다.

영장류의 생태와 사회조직의 구조를 밝히기 위해선 고릴라와 친해질 필요가 있었다. 다이앤은 고릴라들의 행동과 언어를 흉내내며 고릴라 무리가 자신에게 습관화될 수 있도록 몇 년을 기다렸다. 고릴라들은 경계를 풀고 다이앤과 친구가 되었으며, 다이앤은 맨 먼저 손을 내민 수컷 고릴라에게 피넛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릴라 무리들이 다이앤을 받아주자 다른 고릴라 무리나 새끼 고릴라들도 다가와서 털갈이를 하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이는 인간과 고릴라가 우호적 관계로 접촉한 최초의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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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컷 고릴라 디지트는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1976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3. 비극과 죽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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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1977, 고릴라, 디지트의 죽음[편집]


그러나 1977년 수컷 고릴라 디지트가 사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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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트의 머리와 팔이 잘려나간 시체를 서글프게 바라보는 모습.

1977년, 밀렵꾼 여섯 명이 사냥개를 대동하여 고릴라 사냥을 벌였다. 디지트는 무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으나 결국 죽었다. 그 외 수많은 고릴라가 희생되었으며 디지트의 새끼들은 잡혀갔다. 포시가 아끼던 개도 희생되었는데, 이 개도 고릴라 무리를 돕기 위해 싸우다가 죽은 것이다. 디지트를 기리기 위해 다이앤은 1978년에 만든 고릴라 보호기금의 이름을 디지트 펀드로 지었다. (1992년에 다이앤 포시 국제 고릴라 기금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3.2. 과격한 보호운동[편집]


그 뒤에도 연이어 고릴라들이 희생당하자 다이앤은 과격한 방식으로 보호운동을 펼쳤다. 기괴한 가면을 쓰고 자신을 마녀라 칭하며 고릴라 보호구역에 생긴 산촌 마을에 불을 지르거나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릴 것이라며 겁박했고 주민들이 가축을 몰고 보호구역으로 오면 가축에 물감 스프레이를 뿌려 오지말라는 경고까지 하였다.[2] 이 때문에 다이앤의 급진적인 환경 운동에 유인원 학자들도 비판할 정도로 원성이 쏟아졌다.


3.3. 미국으로 귀환[편집]


다이앤을 후원하던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리키 펀드'조차 다이앤에게 질색하여 그만두지 않으면 지원금을 끊겠다며 압력을 가했고, 르완다 정부도 미국 정부에 항의하면서 다이앤의 행태를 두고 양국 간의 외교분쟁이 생기기도 했었다. 한편 당시 미국과 서독, 영국, 이탈리아 등 기타 서방 국가들의 언론지에서도 다이앤을 고릴라에 미친 여자라고 비난하는 등의 자극적인 기사를 계속 내보냈고, 미국 정부도 다이앤한테 그만두며 당장 미국으로 돌아오게끔 압력을 가하였다. 결국 다이앤은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르완다 정부도 다이앤이 미국으로 가자 그녀를 입국 금지 대상으로 지정하는 등 다이앤의 입국을 금지했다.


3.4. 코넬 대학교 생활[편집]


미국 정부의 압력에 의해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 코넬 대학교에 자리를 잡아 1983년 책 '안개 속의 고릴라'를 집필했다. 이 책은 전세계 사람들이 고릴라 보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으며 다이앤에게도 큰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3.5. 1984, 르완다 귀환[편집]


하지만 다이앤은 고릴라 보호를 계속하기 위해 르완다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여러 차례 르완다로의 입국을 요청했지만, 이미 다이앤의 과격한 행동으로 인해 그녀가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에 다이앤을 입국 금지 대상으로 지정한 르완다 정부는 그녀의 입국을 거부했다. 그러자 다이앤은 과격한 노선을 버리고 르완다 현지인들과 상생하겠다는 약속까지 하여 1984년에 르완다 정부에서는 '이번에 한해서는 한번 더 속아보자'라는 식으로 그녀의 입국을 허용했고, 다이앤은 동년 르완다로 돌아왔다.

다이앤이 르완다로 돌아왔을때 고릴라 보호구역은 르완다 군대와 경찰이 적극적으로 단속하여 밀렵은 어느정도 감소했지만 대신 정부가 주도하는 고릴라 관광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다이앤은 관광지의 고릴라를 꾸준히 연구하는 동안 이상행동을 발견했고, 이것은 관광으로 발생한 쓰레기와 질병, 이동경로의 방해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결론내린다.

다이앤은 약속대로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세계에 고릴라 관광의 문제점을 널리 알리며 고릴라 관광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그녀의 주장은 관광수익을 내는 르완다 정부가 반대하였다. 문제는 여기서도 다이앤은 이 주장을 굽히지 않아 르완다 정부와 자주 충돌했으며 다이앤과 르완다 정부와의 대립관계는 고릴라 관광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다시 벌어지고 말았다.


3.6. 1985년 의문의 죽음[편집]


르완다 정부와의 갈등이 심해지자 르완다에서 다이앤의 신변이 위험해졌다. 특히 1985년 가을, 키우던 앵무새는 독살당하고 집 문 앞에서 퍼프 에더(아프리카 살무사) 조각들이 발견된다. 이것은 지역에서 사용되는 흑마술로 ‘죽음의 저주를 내린다’ 를 뜻했다. 그래서 이를 우려한 다이앤의 지인들은 다이앤에게 안전을 위해 르완다를 떠날 것을 권고했으나 다이앤은 거부하며 자기 역시 디지트를 따라가게 될 것이라고 지인들에게 말했다.[3] 게다가 이때 다이앤은 건강도 좋지 않았다. 다이앤은 담배를 많이 피우는 골초에다 알코올중독자라서 술도 많이 마신터라 폐기종에 걸리게 되었다. 나중에는 호흡곤란과 산소부족에 시달리게 되어 야외연구도 힘들어할 정도로 악화된다.

결국 다이앤은 같은 해 12월 26일, 오두막에서 잠자던 도중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시체는 오두막의 침실에서 발견되었는데 마체테로 난도질당했고[4], 사건 현장에는 호신용 권총이 남아있었다. 여권과 돈이 그대로 있어 원한으로 인한 살인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사건 현장에는 피가 많지 않아 다이앤이 끌려나와 외부에서 살해된 채로 다시 옮겨진 것으로 보고 있다.

3.7. 용의자와 판결[편집]


르완다 경찰은 범인으로 르완다인 밀렵꾼 추적자 '엠마누엘 르위레카나'와 다이앤 밑에서 일하던 미국인 연구소 직원 '웨인 맥과이어'를 용의자로 체포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진술에서 범인은 고릴라 문제로 대립했던 인근 현지 주민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연구소 직원 맥과이어는 미국 대사관의 지원으로 무사히 탈출하여 귀국하였고[5]귀국 이후에도 무죄를 주장하였지만 다른 용의자인 르위레카나는 르완다 현지 교도소에서 복역 도중 자살 또는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이후 르완다 경찰은 두 사람에 대해서 궐석재판을 감행하였고 사형(총살형)을 선고하여 종결하였다.


3.7.1. 엠마누엘 르위레카나의 의혹[편집]


체포 당시 현지 경찰은 엠마누엘 르위레카나가 "다이앤에게 해고된 적이 있고, 평소 다이앤을 증오했다"며 르위레카나를 체포했으나, 오히려 르위레카나는 몇 번이고 일을 그만두려 했지만 실력이 좋아서 다이앤에게 계속해서 고용됐고 그러다 다이앤이 죽기 사흘전 결국 자기발로 다시 나간 것이 저렇게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즉 르완다 경찰은 퇴직한 것을 해고당했다고 날조한 것이다. 게다가 르위레카나는 다이앤 사망일 당시 하루종일 가족과 함께 집에만 있었다.

따라서 실제 범인은 르위레카나가 아닐 수 있고 그 역시 다이앤처럼 살해되었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이 주장을 제기한 환경운동가 팔레이 모와트(Farley Mowat)는 1987년에 출간한 다이앤 포시의 전기 'Woman in the Mists'에서 그녀의 죽음이 고릴라 관광산업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르위레카나가 범인이 아니라는 주장 자체는 다이앤 포시 사망 직후 용의자 두명이 발표되고부터 주변인과 동료들이 꾸준히 주장해온 것으로, 르위레카나 범인설에 대한 의문점은 생전 그녀를 후원하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만든 다이앤 스페셜에서도 언급된다.


3.7.1.1. 의혹에 대한 반론[편집]

르위레카나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공통적인 반박점을 종합하자면,
  • 그는 해고당한 것이 아니라 고민끝에 자기발로 그만둔 것이라 다이앤에게 아무런 앙심도 없었고, 다이앤을 죽여봤자 아무런 득볼 것이 없는 사람이다.
  • 다이앤이 사망한 그 날 그는 하루종일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
  • 그는 감옥에서 사망했는데 목을 매 죽었다는 경찰들의 말은 목을 맬 도구가 하나도 없던 그의 수감상태에 기반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이외에도 살인사건 용의자 두명 다 따지고 보면 범인이라는 것이 납득되지 않는 증거 및 정황이 많기에 다이앤을 알던 사람들은(심지어 현지인들도!) 사실상 다이앤이 두 용의자가 아닌 다른 사람 혹은 조직에게 살해당했다고 생각한다고. 살인사건과 용의자 정황에 대해 대강이라도 알고싶다면 이 영상클립을 참조할 것.


3.8. 새로운 용의자[편집]


최근에는 당시 프로타이스 루엔게리 주지사가 다이앤 포시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으나 과연 이 사람이 범인인지는 최종적 밝혀지지 않지만 다만 이 주지사는 당시 르완다의 독재자 대통령처남으로 당시 다이앤 포시가 고릴라 보호를 위한 민병대 창설을 요구했고 자신의 요구를 거부할 때 프로타이스 루엔게리 주지사의 불법 금 밀수를 폭로하겠다고 하여 민병대 창설을 허가하였는데 루엔게리 주지사는 고릴라 관광 사업으로 보복하여 막대한 부를 쓸어모았고 이에 다이앤 포시가 고릴라 관광 사업에 항의하는 등 대립이 지속되자 몰래 죽였다는 의혹이 있다.[6]

4. 평가[편집]


고릴라 보호와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영국제인 구달독일의 비루테 갈디카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저명한 유인원학자이다.[7] 업적은 매우 컸으나 다이앤이 중간에 과격파로 돌아서면서 평가가 갈리기 시작한다. 폭력적 수단으로 고릴라 보호를 몸소 실현했으나 오랜 내전과 경제적 문제로 고통받는 르완다 사람들은 고릴라를 보호할 여유조차 없었다. 고릴라 박제와 고기, 새끼 고릴라를 애완동물로 사가는 전세계 부유층들과 밀매업자들을 우선 막아야 했으나, 다이앤은 직접적인 밀렵과 환경 훼손 행위를 중점적으로 저지하는 한계점을 보였다.

제인 구달은 서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다이앤 포시가 제발 그 부족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바랐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죽음이 그 지역 원주민과 적대적인 관계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라고 말했다. 월스트리트 저널 또한 기사에서 "고릴라 보호에 대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큰 족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알콜중독자였고 또한 그녀의 고릴라들을 그녀 주위에 살고 있었던 아프리카인들보다 더 사랑한 사람"이라고 비판적인 평을 내놓았다.

다만 다이앤이 처음부터 르완다 현지민들을 적대시한 건 아니었다. 친하게 지내던 고릴라인 디지트가 1977년 밀렵꾼에 의해 죽기 전까지는 밀렵꾼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아끼던 암컷 고릴라 논피가 영양을 잡으려고 놓아둔 올무에 걸려 다리를 절단해야 했을 때도 올무를 설치한 밀렵꾼을 용서하는 등, 20년 가까운 고릴라 연구 기간 중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현지인과 밀렵꾼을 이해하며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 다이앤이 과격해진 것은 르완다 현지인들을 혐오해서가 아닌 갈수록 심해지는 고릴라 밀렵 때문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적지만 젊은 시절에 르완다에서 강간당한 경험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다이앤은 콩고 군인들이 자신을 철장 안에 여러 백인들과 함께 가뒀으며, 다른 백인들은 한 명씩 끌려나가 모두 살해당하고, 자신만 윤간당한 뒤 살아남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이 일화는 다이앤 포시가 살아생전 후배동생 겸 친구인 비루테 갈디카스[8]와 몇몇 사람에게만 말했기 때문에 유명하지 않으며, 의문점도 많다. 다이앤 포시의 지인인 헤이즈는 다이앤의 삶에 대한 회고가 수시로 바뀌었다고 밝혔다. 어떤 때는 콩고군이 자신을 해친 적이 없었다고 하고, 어떤 때는 자신을 집단으로 강간당했다고 말하는 등 일관성이 없었는데 마치 자신을 신비로운 존재처럼 포장하려는 듯 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제인 구달, 비루테 갈디카스와 비교당한다. 그러나 두 사람과 달리 다이앤이 간 곳은 르완다자이르 공화국이였다. 제인 구달이 연구한 곳은 당시 아프리카에서 정세가 안정된 탄자니아였고, 갈디카스 역시 비록 드넓은 국토와 미비한 교통 같은 문제가 존재하긴 했지만 인도네시아의 보르네오 섬 남부 지역에서 현지 부족들의 지지와 조언을 받으며 안정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9] 하지만 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 지역은 내전과 정치적 혼란이 한창이었고, 르완다 사람들은 후투족투치족의 민족 분쟁과 빈곤으로 굶주리는 등 온건한 방식으로 고릴라 보호 운동을 확산시키기엔 너무 어려운 환경이었다.[10] 일부 호사가들은 포시가 차라리 마운틴고릴라의 서식지인 르완다나 자이르가 아닌 그나마 정세가 안정적인 서부로랜드고릴라의 서식지였던 가봉이나 콩고 공화국[11]으로 가서 연구 활동을 했다면 타살로 목숨을 잃지 않고 갈디카스나 구달 박사처럼 현재까지도 생존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더러 있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으므로 상상의 영역이다.

다이앤의 부모는 평소 딸과 의절하고 살 정도로 사이가 매우 안 좋았지만, 딸이 남기고 간 돈까지 안 좋아하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유산은 냉큼 차지했다. 제인 구달과 비루테 갈디카스의 부모와 가족들이 딸과 조카를 응원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들 본인도 부모와 사이가 좋았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다이앤은 자신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자신이 죽거든 그 재산을 고릴라 보호에 써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다이앤이 결혼을 하지 않아[12] 남편과 자식이 없었기에 결국 소송 끝에 결국 부모가 승리해 그들이 재산을 가로채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다만 이때 아버지는 친부와 양부 모두 사망하고 없었기에 재산은 부모 중 유일하게 생존해있던 다이앤의 어머니가 가져갔다. 현재는 이 친모도 사망해서 이 세상 사람은 아니었고 그나마 남은 돈으로 지인들이 르완다에 고릴라 보호 시설과 그녀의 기념비를 세우고 지금까지도 고릴라 보호에 앞장서고 있지만 고릴라 개체 수는 심각하게 감소하고 있다.

5. 특징[편집]


21세기에도 르완다에서는 내전과 여러 사정으로 고릴라의 수가 나날이 수가 줄어들고 있다. 2008년 르완다에서 발견된 고릴라 시체들은 온전하고 그냥 총으로만 쏴죽였다. 이 상태로 보아 군벌들이 저지른 짓이라 파악[13]되지만 범인을 알아도 처벌할 수가 없기에 지금도 이런 고릴라 학살은 계속되고 있다. 고릴라 보호단체들은 그냥 쳐다볼 수밖에 없는 현실.

마찬가지로 콩고에서도 내전이 심해지면서 군자금 벌이나 스마트폰 같은 전자제품을 만드는 데에 없어서는 안될 콜탄이라는 자원 채취를 위해 숲을 마구잡이로 파괴하거나 식용으로 사용하려고 밀렵한 탓에 고릴라 개체수가 많이 줄고 있다. '안개 속의 고릴라' 책을 봐도 콩고에서 살던 고릴라가 수백마리라고 나오던 걸 생각하면 얼마나 절망적인지 상황인지 알 수 있다.

2014년 1월 16일에 구글에서 다이앤 포시의 생일에 맞춰 대문을 다이앤 포시 관련 테마로 바꿨다.

키가 180cm나 되는 장신이다. 160cm대 초중반인 제인 구달과 찍은 사진에서 구달보다 거의 머리 하나가 더 크다.

6. 매체[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Gorillas_In_The_Mist_poster.jpg

  • 안개 속의 고릴라(Gorillas In The Mist: The Story Of Dian Fossey)(1988): 시고니 위버 주연 영화가 바로 그녀의 일생을 다룬 작품이다. 위의 그녀의 저서에서 제목을 따온 듯. 네이버 영화소개 및 국내 비디오 및 DVD 제목은 '정글 속의 고릴라' 로 되어있다(국내 미개봉작이다). TV 방영 제목은 '안개 속의 고릴라'. 감독은 나중에 언리미티드를 감독한 마이클 앱티드(1941~2020). 배급은 북미는 유니버설. 해외 배급은 워너브라더스. 2200만 달러로 제작하여 6139만 달러 흥행을 거둬들였다. 영화에서도 실제처럼 마지막에 잠자는 포시를 누군가가 집으로 들어와 마체테로 그녀를 살해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주말의 명화로도 더빙되어 방영된 바 있다.


7. 같이보기[편집]



[1] 왜냐면 경영학과를 중퇴하면서 양부, 친모와 크게 갈등해 생활비를 끊자 다이앤도 그들과 의절하면서 백화점 점원 일과 공장 일을 하여 생활비와 학비를 벌었다.[2] 심지어 마을에 사는 아이들 중 하나를 붙잡아서 등짝에다 끔찍한 경고문까지 새겼다고 한다.[3] 무엇보다 뒤에 서술하다시피 고릴라를 연구하려고 외딴 숲의 오두막에서 지내고 호신용 권총만 가지고 다녔는데 이는 안전에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그래서 지인들이 안전을 우려해서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지만 다이앤은 모난 성격 때문에 돌아가기를 거부하였고, 다이앤 자신도 1970년대 말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르완다 정부로부터 입국 금지 조처를 당한 것처럼 또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면 르완다 정부에서 입국 금지 대상으로 다시 재지정될 것을 걱정했다.[4] 마체테에 얼굴이 찔리고 머리를 강하게 맞아 머리가 쪼개진 참혹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5] 1등석에 탑승하여, 비행기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는 IBRD 직원들을 보면서, 르완다 경찰이 언제 들이닥칠까 두려워 자신은 앉아있는 내내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6] 참고로 프로타이스 주지사는 이후 2001년 르완다 내전에 대한 학살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에 체포되어 기소되었지만 항소심에서 학살 혐의에 대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 이후 석방되어 르완다 국민들의 보복을 우려한 나머지 탄자니아에 있다가 최근까지 니제르에 은신하고 있었고 법률 위반으로 니제르에서도 추방되었다고 한다.[7] 참고로 이 세 사람 모두 위에 언급된 루이스 리키 박사의 영향으로 유인원 연구(제인 구달은 침팬지, 비루테 갈디카스는 오랑우탄)에 평생을 바쳤다.[8] 갈디카스는 연령대가 포시보다 14살 차이였다.[9] 아예 현지의 부족장과도 결혼했다.[10] 그 덕에 르완다 현지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해 목숨을 잃어버린 다이앤 포시와 달리 이 두 사람은 여전히 생존 중이다. 물론 두 사람 모두 현재 고령(구달 - 1934년 생, 갈디카스 - 1946년 생)인지라 언제 세상을 떠나도 이상하지는 않은 할머니들이긴 하지만 50대의 젊은 나이에 타지인 르완다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한 다이앤보다는 나름 천수를 누린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11] 가봉과 콩고 공화국은 가난하지만 르완다나 콩고민주공화국보다는 그래도 경제, 정치적으로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12] 갈디카스는 백인 남편이 이미 있는데도인도네시아에서 정착 후 현지인 부족장과 결혼했고, 구달 역시 결혼을 하였고 이들 모두 자녀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13] 밀렵꾼이라면 돈이 될 부위를 잘라가지 이렇게 멀쩡하게 시체를 놔둘 리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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