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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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유적


1. 개요[편집]


다자이후(太宰府; 태재부)는 고대 일본에서 조정의 사무를 일부 분담할 목적으로 설치한 지방행정기관 겸 특수행정구역으로, 지금의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에 위치했다. 현 다자이후시 명칭의 유래이기도 하다.

다자이후 일대는 한반도신라, 고려[1] 중국 역대 왕조와 가까운 규슈의 관문으로서 고대 일본의 대외 외교 창구이자 국방의 최전선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바다 건너편 한국의 부산에 설치됐던 왜관과도 비슷한 역할을 했던 셈이다.

당대 일본의 수도권인 기나이(畿内)는 여기에서 거리가 먼 간사이 지방[2]에 있었기 때문에 여기는 따로 고위 귀족을 파견하고 상당한 실권을 맡겼다. 물론 교토와 거리가 먼 변방이다보니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처럼 수도에서 밀려난 인물이 좌천되다시피 하는 장소로 인식되기도 했다. 신라 전성기에는 신라 사신단을 맞이하는 장소이자 무역 창구로 번성했으나 신라구가 기승을 부리던 9세기 말에는 이곳도 약탈당했다.

고대 이래로 규슈 지역의 정치 중심지이자 경제,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지만 조정의 통치가 무너지는 중세에 접어들며 기능이 차츰 약화되었고, 근현대에 들어서는 인근의 항구도시 후쿠오카가 규슈 일대 최대의 도시가 되었고 다자이후는 후쿠오카 외곽의 소도시가 되었다.


2. 역사[편집]


츠쿠시[3](筑紫; 축자) 다자이후라는 이름이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671년 덴지 덴노 때지만 그전에도 이 지역에 미야케(官家)를 두어 훗날 다자이후가 맡는 외국 사신 접대 등의 업무를 맡겼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있다. 이르게는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나오는 일대솔(一大率)을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660년에 백제가 멸망했을 때 일본의 덴지 덴노는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2만 7천 명에 이르는 군사를 한반도로 파병했지만, 이들은 백강 어귀에서 당의 수군 7천(+신라의 육상지원병)에게 대패하게 된다. 덴지 덴노는 이후 신라와 당이 일본으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4] 백제 유민들을 동원해 일본 각지에 고구려식 산성(고식산성)을 축조했고, 외부로부터의 침략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적에게 노출될 수 있는 규슈 일대를 총괄하는 쓰쿠시도독부(筑紫都督府)를 설치했다. 이것이 다자이후의 유래다.[5]

다자이후는 일본어 음독이고, 훈독으로는 오호미코토모치노 쓰카사인데[6] 쓰쿠시 즉 지금의 규슈 지역의 군사적 방위를 책임지는 서부지방군사령부 역할을 맡고 있었다. 서일본 일대에 설치된 사이카이도(西海道) 소속 9개 구니(国)[7]와 3개 섬[8]의 인사 및 감사 등의 역할을 모두 다자이후가 맡고 있었고, 신라나 당과의 관계가 정상화되고 군사적인 역할이 줄어들고 나서도 외교적으로 오히려 중시되어서 하카타 연안에 고료칸(鴻臚館)을 설치하고 다자이후의 감독 아래 외국 사신의 접대 및 상인의 관리 업무가 이루어졌다.[9]

고대 일본에서는 기나이의 조정과 함께 수도에 준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교토에 비하면 격이 떨어졌다. 나라 시대740년에 후지와라노 히로츠구(藤原廣繼)라는 인물이 다자이후의 쇼니로 좌천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을 정도. 쇼니는 차관직이고 다자이후의 장관은 다자이노소치(大宰帥)라고 불렀는데, 도고쿠처럼 친왕임국(親王任國)[10]으로 종3위 정부 고관 및 친왕이 임명되는 자리였지만 이들은 관직만 맡아놓고 실제부임지에는 가지를 않아서[11] 곤노소치(權帥)가 있기는 했지만 조정 대신이 다자이후의 곤노소치가 되는 경우 실무권한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우대신[12]이었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좌대신 후지와라노 도키히라와의 정쟁에 밀려 다자이곤노소치로 부임해오게 된 것은 좌천과 다름없는 처우였다. 자연스럽게 다자이후의 실권은 차관직인 쇼니(少貳)가 맡게 되었다.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 때는 비슷한 시기에 서쪽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반란에 의해 불타기도 했다.

남북조 시대에서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 활약한 슈고 다이묘 쇼니(少弐) 씨는 후지와라를 혼세(本姓)로 하는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인물 무토 스케요리(武藤資賴)[13]가 다자이쇼니를 지냈다는 데서 유래한 것. 가마쿠라 막부 타도 이후 고다이고 덴노의 황자였던 가네요시 친왕(懷良親王)이 정서장군으로써 다자이후에 파견되었고, 이곳에서 기쿠치 씨에게 옹립되어 남조를 지지하며 북조에 맞섰다가 1359년에 지쿠고 강 전투에서 쇼니 씨가 이끄는 북조측 군사에 패해 다자이후가 쇼니 씨에게 넘어갔다.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14]를 보내 규슈 단다이(九州探題)로써 다자이후를 지배하게 했다.

이마가와 사다요는 다자이후의 지배권을 놓고 쇼니씨와 대립하여 쇼니 후유스케(少弐冬資)를 죽이고 다자이후와 그 소재지인 지쿠젠 국을 규슈 단다이의 직할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마가와 사다요가 규슈 단다이에서 해임되고, 후임 규슈 단다이인 시부카와씨가 쇼니 씨의 역공을 받으면서 다자이후는 규슈 단다이와 쇼니씨의 분쟁지역이 되었다. 얼마 못 가, 오우치 씨가 규슈 단다이를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이 지역을 집어삼키고, 이어지는 쇼니씨의 저항을 오랜 세월에 걸쳐 분쇄하면서 센고쿠 시대에는 오우치 씨의 영지로 굳어졌다. 오우치씨의 실질적 마지막 영수인 오우치 요시타카는 쇼니씨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쇼니의 상급 관직이었으나 오랜 기간 유명무실했던 다른 다자이후의 차관직 다이니(大弐)를 황금 2천 냥이라는 거금을 주고 구매하기도 했다.


3. 유적[편집]


지금은 주춧돌과 터만 남아있다. 바로 옆에 다자이후전시관이 있어서 과거의 모습이 어땠는지는 여기서 확인 가능하다. 역사도시답게 주변에는 오래된 사찰이 몇 있다.

일반적으로 다자이후시 관광 하면 떠올리는 다자이후텐만구가 있는 다자이후역과는 꽤 거리가 떨어져 있다. 좀 더 후쿠오카시 방면에 가까운 위치. 다자이후 유적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토후로마에역이다.

[1] 발해규슈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다자이후가 아니라 동해 바다를 가로질러 호쿠리쿠에 다다르는 항로를 주로 이용했다. 물론 대한해협보다 훨씬 먼 바다를 항해하는 셈이라 매우 위험하여 발해 사신단 관련 기록을 보면 굉장히 사고를 자주 당한다. 배는 거의 망가지고 사람만 간신히 도착해 귀국할 때는 일본 배를 빌려 타고 간 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간신히 도착했는데도 아이누족 원주민의 습격을 당해 대부분이 몰살당한 경우도 있다.[2] 교토나니와(難波; 오사카) 일대에 해당했다. 시대별로 헤이조쿄(平城京; 나라시), 헤이안쿄(平安京; 교토부) 등 다소 이동이 있었다.[3] 후쿠오카 일대의 옛 지명. 율령제 이후 지쿠젠지쿠고로 나누어진다.[4] 이원복 교수가 그린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는 백강 전투 이후 덴지 덴노가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책에 대해서 반발하는 신하들에게 닥치라고 찍어누르면서 "지금 언제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쳐들어올지도 모르는데, 호족들이 자기 권리만 찾고 있을 때냐? 이런 위협적인 시국일수록 덴노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지!"라고 버럭하는 장면을 넣어, 덴지 덴노가 백강 전투 이후 신라-당나라 연합군이 일본 본토로 쳐들어올 수도 있는 위협적인 상황을 내세워 황권 강화에 써먹은 것처럼 그리고 있다.[5] 다자이후 정청 터 바로 위에 조선식 산성의 하나인 오노 성(大野城)이 위치하고 있다.[6] 이 오호미코토모치(大宰)의 미코토모치(宰)의 경우 중앙에서 특별히 파견하는 관리직을 가리키는 용어였는데, 임나일본부설의 여러 학설 가운데 부(府)의 일본어식 훈독 또한 미코토모치라는 점에 주목해 임나일본부의 정체가 실은 가야에 외교적 목적을 띠고 파견된 일회성 사신이 아니었나 하는 주장도 존재한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겨우 일회성으로 한 번 보내고 끝일 사신에게 백제에서 임나 지역에 설치한 군령과 성주를 야마토에 복속시키게 한다는 지나치게 막중한 임무를 주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지적도 존재한다.[7] 규슈 섬에 설치된 히젠 • 히고 • 지쿠젠 • 지쿠고 • 부젠 • 분고 • 사쓰마 • 오스미 • 휴우가의 9개 행정구역을 뜻한다. 규슈(九州)라는 이름도 이 9개 구니에서 나온 것.[8] 쓰시마, 이키, 그리고 다네가시마.[9] 신라발해의 사신들에게 으레 다자이후를 거쳐서 오도록 명령하거나 다자이후에서 사신을 그냥 돌려보내는 대목이 자주 보인다.[10] 고대 일본에서 도고쿠의 카즈사(上總), 고즈케(上野), 히타치(常陸)의 경우는 해당 구니(國)의 지방관인 카미(守)를 다른 관리가 아니라 덴노의 친아들 즉 친왕으로 임명했다.[11] 이는 도고쿠의 친왕임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이라노 마사카도 항목 참조.[12] 한국으로 치면 우의정급. 이는 좌대신(좌의정)도 마찬가지다.[13] 원래는 헤이케의 다이라노 토모모리를 섬겼던 무장인데 이치노타니 전투 이후에 겐지에 투항했다.[14] 고려 말의 정몽주왜구 근절을 요청하기 위해 직접 일본으로 와서 만났던 사람이기도 하다. 현재 다자이후 시에 남아있는 간제온지(觀世音寺) 절이 바로 당시 일본으로 건너온 정몽주가 처소로써 머물렀던 곳으로, 정몽주 본인이 간제온지의 경치를 두고 읊었던 한시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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