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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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倧敎[1]
파일:external/www.daejonggyo.or.kr/chungi.gif
대종교의 교기인 천신교기(天神敎旗)
중광
나철
중광 시기
1909년
총전교
박민자(2018.06.17. ~ 現)

1. 개요
2. 역사
3. 단군 진영(眞影)
4. 기타
4.1. 설립 과정이 대종교와 관련이 있는 대학교
4.2. 대종교 성지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공식 홈페이지

단군을 교조로 하는 대한민국 고유의 종교. 역사적으로는 홍암 나철이 창교했다고 하지만 대종교 측의 주장에 따르면 1904년에 백두산 도인 백봉(白峯)이 창교하고[2] 1909년 음력 1월 15일에 홍암 나철과 몇몇 사람들이 모여 중광했다. 대종교의 자체적인 입장은 과거로부터 이어 오다가 백봉이 드러낸 한민족의 고유한 신앙을 나철이 다시 복구(중광)했다는 것이다. 《천부경》과 《삼일신고(三一神誥)》를 경전으로, 삼진귀일(三眞歸一)을 교리로 한다.

흔히 단군을 '숭배'하는 종교로 오해받는데 물론 100% 틀린 것은 아니지만 주신은 상제(上帝), 즉 하느님이다.[3] 환인, 환웅, 단군을 삼신 '한얼(한군의 정신)님'이라고 부른다. 즉, 민족의 뿌리에 위치한 것. 따지고 보면 이 종교에서의 단군은 기독교예수와 비슷한 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총본사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에 있고 신자 수는 4천 명 이내로 파악된다. 대종교의 교당을 '시교당(施敎堂)'이라고 부르며 교단을 대표하고 통괄하는 교주 격 직위로 '총전교(總典敎)'가 있다.

2. 역사[편집]



2.1. 대한제국[편집]


'대종교(大倧敎)'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대한제국 시기인데 여기서 대종은 곧 주신인 천제를 나타낸다.

1대 교주인 나철이 중심이 되어 1909(융희 3)년 음력 1월 15일[4] 한성부 북서 가회방 재동계 재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5]에 있던 6칸짜리 초가집에서 오기호 등 발기인 10명과 함께 모아 단군교(檀君敎)라는 이름으로 개창한 것을 시초로 본다. 한국사에서 단군이 부각되었던 이유가 흔히 그렇듯이 실제로는 단군 숭배보다도 외세인 일본에 대한 저항에 초점을 두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분석이다.


2.2. 일제강점기[편집]


창교 이듬해에는 교세가 2만 명으로 크게 늘었고 1910(융희 4)년 8월 1일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이름을 바꿨다.[6] 이 과정에서 정훈모(鄭薰模)를 중심으로 한 일부 신도가 단군교 교명의 고수를 명분으로 삼아 분립하였다. 정훈모는 이 '단군교'의 교주가 되었는데 단군교는 우여곡절 끝에 대종교와 다른 행보를 걷다가 1936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7]

일제는 1911년 「조선총독부 시정연보(施政年報)」치안(治安) 부분에 '종교 취체항'[8]을 설정하여 종교단체의 활동을 법률적으로 통제하고 간섭할 구실을 만든 뒤 민족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같은 해 서일·채오·계화 등이 만주로 망명하여 길림성 왕청설치국(汪淸設治局)[9]에 비밀결사 중광단(重光團)을 설립했다. 대종교 교단 지도부는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1914년 아예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청호촌(淸湖村)[10]으로 총본사를 옮겼다. 1916년 음력 8월 15일(양력 9월 12일)에 교주 나철이 자결하고 김교헌이 2대 교주가 되었다. 김교헌 시기에 대종교는 종교조직으로서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1919년 3.1 운동개신교천도교 세력이 주축이긴 했지만 대종교도 함께 운동을 지원했다. 1919년 4월에는 중광단을 조직했던 서일이 다른 종교계 인사들과 함께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을 발족했고 이 대한정의단과 신민회 계열이 합작하여 대한군정회를 조직했으며 다시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가 통합하여 대한군정부를 조직하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보이듯이 대종교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항일 무장투쟁으로 1920년 청산리 대첩에 가담했던 북로군정서군이 바로 대종교가 양성한 조직이다. 위에 언급한 대한군정부의 이명이 바로 북로군정서다.[11] 가담한 주요 인물로는 서일, 현천묵, 김좌진, 이범석 등이 있다. 특히 서일은 대종교 3대 교주(당시 호칭은 도사교)가 될 사람으로 공인받았다.

이 북로군정서는 훗날 대한독립군 등 10여개의 다른 무장투쟁세력과 연대하여 연해주로 건너가 대한독립군단으로 재편성되었지만 러시아 내전에서 편을 들어준 소련에 의해 토사구팽당해 1921년 자유시 참변을 당해 사실상 해체되었으며 서일은 자유시 참변에 이어 그해 9월 27일 소련군의 후원을 받은 토비(土匪)들의 습격을 받아 휘하 병사들이 궤멸되자 이에 책임감을 느껴 대종교 도사교 직위를 계승하기 전에 자결하였다. 이후 대종교 교단에서는 서일을 추존하여 도사교라고 부른다.

한편 대종교의 총본사는 일제의 지속적인 추적으로 1920년 간도 참변 직전에 기존의 길림성 화룡현 청호촌에서 길림성 밀산현(密山縣) 삼사통(三梭通)[12]으로 옮겨졌다가 서일이 자결한 뒤 1922년 총본사는 다시 연길도(延吉道) 영안현(寧安縣) 남관(南關)[13]으로 옮겨졌다.

총본사는 1928년 다시 밀산현 제6보(第六保) 삼사통으로 옮겨졌으며 1934년에는 영안현 발해보(渤海保) 동대와자(東大洼子)[14]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투쟁과 함께 대종교는 만주 곳곳으로 세를 뻗어나가기도 했는데 심지어 멀리 중국 대륙 본토에까지 전파되었다. 그러나 3대 교주[15] 윤세복 시기에 대종교 사상 최악의 위기가 닥쳤는데 1932년 본거지인 만주에 일제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성립되어버렸다. 이 시기 수많은 대종교인이 살해, 구금당했고 대종교 자체도 비밀결사화했다.

특히 1937년부터 대종교 총본사에서는 영안현 동경성구(東京城區) 8가(八街) 부근에 있던 상경용천부 터에 단군을 모시는 천진전(天眞殿)의 건립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1942년 조선어학회 소속의 국어학자 이극로가 천진전 건립 관계로 당시 교주인 윤세복에게 「널리 펴는 말」이라는 원고를 보낸 바 있었다.

이때 일본 경찰은 미리 교단 내부에 심어 놓은 밀정을 통해 이를 압수하여 원고의 제목을 '조선독립선언서'로 바꾸고 그 내용 중 "일어나라, 움직이라"는 부분을 '봉기하자, 폭동하자.'는 뜻의 일본어로 번역했으며 "대종교는 조선 고유의 신도(神道)를 중심으로 단군 문화를 다시 발전시킨다는 기치 아래, 조선 민중에게 조선정신을 배양하고 민족자결의식을 선전하는 교화단체이니만큼 조선독립이 그 최후목적이다."라는 죄목 하에 조선어학회 사건과 때를 같이하여 1942년 11월 19일 교주 윤세복 이하 25명을 동시에 검거했는데 이 사건을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고 한다.

당시 투옥된 간부 중 초대 교주 나철의 두 아들인 나정련나정문 형제를 비롯해 권상익·이정(李楨)·안희제·김서종(金書鍾)·강철구·오근태·이창언(李昌彦)·이재유(李在囿) 등 10명이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 순국했고 그 밖의 간부들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윤세복을 비롯해 최소 7년, 최대 15년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이렇듯 만주에서 활동하던 대종교 교단은 만주국 성립에서 일본 패망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동안 마치 카타콤 시절의 초기 기독교처럼 수난과 박해의 대상이었다.


2.3. 미군정 ~ 대한민국[편집]


8.15 광복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북한 정권은 자신들의 정통성 확립에 유용하다고 여겼는지 다른 종교들에 비해 비교적 호의적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근근이 명맥을 잇고는 있으나 불교, 천주교, 개신교 등에 밀려 현재는 굉장히 마이너한 군소종교가 되었다. 같은 구한말 민족종교인 원불교, 천도교보다 교세가 약하다.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원불교는 무려 13만 명에 천도교도 10만 명은 되는데 대종교는 고작 3766명이다. 이슬람(3만 5천 명 추정)보다도 훨씬 적다. 3만 4천 명으로 잡히는 '증산교'보다도 적다. 다만 증산교는 증산 계통의 종교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라 통계에 허점이 있다.

2000년대에 모종의 큰 갈등을 겪고 총전교가 둘로 나뉘는 등의 위기가 닥쳤으나 무사히 해결되었다. 현재는 선도사 출신의 인물이 총전교 자리에 오르면서 서서히 안정되었고 사이트 관리가 다시 정상화되면서 자료도 올라오고 있다.

다음에 개설된 대종교 카페 한 곳은 일부 신도의 정성어린 관리 덕인지 총본사 사이트보다 자료가 더 많으며 이 카페를 통해 대종교에 나오게 되는 경우도 꽤 늘어났다.

2012년도부터 총본사 주차장을 거주자 우선 주차장으로 운영 중이라고 하며 현수막도 걸려 있다. 참고로 총본사로 향하는 골목길이 굉장히 좁은데다 불법주차가 심해서 이동에 상당한 불편이 있었으며 결국 대대적인 단속이 시작되었다.

1대 교주였던 나철이 독립투쟁의 방안으로 단군교라는 형태를 빌렸다면 2대 교주가 된 김교헌[16]의 경우는 방향성이 전혀 달랐던 것이 큰 원인이 되었다.

김교헌이 저술한 '신단실기'와 '신단민사'와 같은 경우 모두 대종교 입교 후에 저술된 것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역사서라고 하기보다는 종교 교리 서적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책을 쓰는 과정에서 사료로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이상국집과 같은 일반적 물건 외에도 근거 없이 포함된 자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17]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당시 대종교(라기보다는 나철)와 인연이 있던 신채호와는 사이가 틀어지게 되면서, 더더욱 역사서보다는 종교교리 서적에 가까워졌다.

여기서 종교적 교리를 조금 약하게 하면 북방사를 중심으로 하는 이상룡의 사학이 된다. 그리고 김교헌-이상룡의 방법론에 (그렇지 않아도 민족 개념을 지나치게 확대한 바람에 큰 차이가 없던) 일본의 만선사관+내선일체를 포함해 버리면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이 등장해서 대동아공영권을 돕는 논리가 되어 버린다. 환빠의 구심점이 되는 인물이 친일을 했네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야기도 이 논리에 포함된다. '양 극단은 통한다'는 씁쓸한 이야기의 좋은 일례이다.

초대 문교부 장관인 안호상(安浩相)[18], 1980년대에 단전호흡 등이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던 소설 단(丹)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봉우 권태훈[19] 등이 대종교 총전교(교주)로 재임했다.


3. 단군 진영(眞影)[편집]


파일:external/www.ablenews.co.kr/C_%5B1%5D8244.jpg

원래 대종교에서 사용하는 공식적인 단군 진영(眞影)은 왼쪽 것이며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1949년에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20]의 청원을 받아들여 대종교 진영을 단군의 공식적인 진영으로 인정하였다. 하지만 1977년에 사단법인 현정회(現正會)에서 오른쪽 단군 진영을 승인해달라고 정부에 요청, 승인받았다. 둘 다 국가공인 단군 진영이지만, 대종교에서는 당연히 현정회 측 진영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부가 이미 대종교의 단군진영을 국가 공식 진영으로 인정했으면서도 왜 또 다른 진영을 다시 인정했는지는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대종교가 종교단체라 특정 종교의 그림을 그대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부담을 느끼지 않았느냐는 의견도 있다. 그래서 종교단체가 아닌 현정회에서 단군진영을 인정해달라고 하자 그것도 인정했으리라는 것이다.

대종교단의 설명에 따르면 왼쪽 단군 진영은 나철 선생에게 어떤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 신라 시대 솔거가 그렸던 단군 진영이라면서 그림 한 장을 넘겨준 바 다른 화가를 시켜 모사한 것이라고 한다. 대종교에서는 교단에서 사용하는 단군 진영을 한배검 천진(天眞), 줄여서 천진이라고 부른다.


4. 기타[편집]


일제강점기 독립투사 상당수가 대종교도였다. 일제 말기에 거의 모든 종교들이(, 불, 기독교, 천도교) 친일을 할 때도 대종교가 친일을 하지 않은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그간 쉬쉬하며 감추었던 친일 행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2대 교주 김교헌은 본래 한일합방 찬성 상소를 했던 인물이었다.[21] 그 공로로 일한합방기념탑에 합방 공로자 명단에 포함되었다[22]. 거물급 친일파 심종순, 이규환, 민병석, 이재곤, 유진찬, 윤덕영이 1922년에 대종교에 입교하였고 막대한 자금을 대어 대종교 남도본사가 유지되었다.[23] 대종교 동창학교 교사를 지낸 김규환은 김이대로 개명한 뒤 1930년대 간도협조회의 앞잡이가 되었다.[24] 1934년에 일본총영사의 허가를 얻어 1940년도 대종교보에는 황국신민 서사를 첫 장에 싣고,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 건국이념인 오족협화를 주제로 방송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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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0750a50b316e9cc612613b0eafa4b0112edfc73eab0105fccd2fea6a4b305de9.jpg

대한민국에 있는 단군/민간신앙 관련 유적이나 문헌에 종종 '한배검'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다 대종교와 관련이 있거나 후대에 대종교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것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태백산 천제단(천왕단)으로, 1950년 이후에 일부 흐트러진 것을 정비하면서 석단 위 제단 앞면 축대에 천제단 대종교태백지사근제(天祭壇 大倧敎太白支司謹製)[25]라고 적혀 있고 제단 위에는 '한배검'이라 씌어진 작은 비석이 고정되었다. 여담으로 태백산 천제단은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 228호)로 지정되었기 문화재 보존 차원에서 태백산 천제(天祭) 등 특별한 행사가 아니라면 제물을 올린다거나 하는 행위가 금지된다. 하지만 일반 관광객들이 올라가서 상을 차리거나 향을 피운다거나 심지어 모 기독교 단체에서 레이드를 했다가 처벌을 받은 사례까지 존재한다.

대종교는 개천절 국경일 지정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기도문은 따로 없으나 깨닫는 말씀[26]→천부경→삼일신고 순으로 독송하는 것을 천경신고라고 한다. 참고로 깨닫는 말씀은 세 번 독송하나 천부경과 삼일신고(천경신고)는 한 번씩만 독송하며 경배시간에는 정해진 예원이 천고(큰 북)을 치는 동시에 독송하는 편이다. 사이비 종교 의혹이 있는 단월드와는 관계 없지만 그쪽에서 나철이 그들의 시초라고 밀고 있다.


4.1. 설립 과정이 대종교와 관련이 있는 대학교[편집]


  • 국학대학 - 초대 이사장 집안부터 초대교장, 초대학장 위당 정인보까지 모두 대종교 관련 인물이었다. 물론 대종교 교단차원의 설립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종교측 자료에는 홍익대학과 함께 교단 내의 대표적 교육기관 설립이라고 되어 있다. 이후 1967년 우석대학교에 흡수되어 없어졌고, 그 우석대학교도 고려대학교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만다.
  • 홍익대학교 - 학교명부터가 단군의 홍익인간에 따 온 것이다. 대종교 지도자였던 독립운동가 이흥수가 사재를 출연 재단법인 홍익학원으로 1948년 8월 설립되었으나 재단이 바뀌면서 1960년대 이후로는 대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 단국대학교 - 학교의 설립자인 독립운동가 장형이 1914년 대종교에 입교했고 원로원참의(元老院參議)를 지낸 교단의 원로급 인사. 단국(檀國)이라는 교명도 단군과 애국을 뜻한다. 현재는 대종교와 상관없지만 민족대학이므로 대종교 관련 자료와 연구 실적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 신흥대학 - 경희대학교의 전신.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이어 설립된 신흥대학의 설립자인 초대 부통령 이시영[27]이 역시 대종교의 원로원장·사교(司敎)·도형(道兄) 등으로도 선출되었던 대종교 원로급 인사였다.[28]


4.2. 대종교 성지[편집]


당연하겠지만 대종교에서는 단군과 관련한 사적들을 성지로 여기는데 이를테면 마니산 참성단, 태백산 천제단을 비롯한 제단시설을 비롯하여 팔전평양 숭령전, 구월산 삼성사, 묘향산 단군굴 등이다. 중국에 있는 길림 동도본사 터와 삼종사 묘역, 상해 서도본사 터 등도 성지로 여긴다.

천도교원불교 같은 민족종교들은 크고 아름다운 성지나 본당건축이 있고 하다못해 수운교도 도솔천이라는 랜드마크급 건물이 있는데, 대종교는 이렇다 할 멋진 건축물이 없다. 창시자 나철의 고향인 보성군 벌교읍에 그를 기념하는 '홍암나철기념관'이 지어졌지만 이건 독립운동가 나철 개인을 기념하는 성격이 더욱 강하고 대종교 관련 성지나 건축물은 많지만 정작 종교단체 대종교가 소유한 것은 적다. '대종교 총본사'도 교단 규모에 비해 작은 편은 아니지만 대종교의 역사적 의미를 비추어 볼 때는 소박한 편이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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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大'宗'敎가 아님에 유의. '대(大)/종교(宗敎)'가 아니라 '대종(大倧)/교(敎)'다. 倧은 '상고 신인 종' 또는 '신선 종'이며 옛날 옛적 있었다는 신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다.[2] 대종교종경종사편수위원회, <<대종교중광육십년사>>, 대종교총본사, 1971, 103~107쪽.[3] 기독교(가톨릭, 정교회, 개신교)에서 하느님으로 모시는 야훼와는 다르다.[4] 양력 2월 5일.[5] 구체적으로는 종로구 가회동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산하 안국선원(安國禪院) 자리라고 한다.#[6] <<황성신문>> 1910년 9월 8일자, <광고>.[7] <<근대 단군 운동의 재발견>>, 아라, 2016, 41쪽[8] 취체(取締)는 일본에서 사용하는 표현으로, 단속이라는 뜻이다. 즉, '종교 단속에 관한 항목'[9]중화인민공화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현. 1912년에 왕청현으로 승격되었다.[10]중화인민공화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용성진(龍城鎭) 청호촌(淸湖村)[11] 당시 이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인정하는 서로군정서군이 서간도에 존재했기 때문에 그에 상대되는 의미로 북간도의 북로군정서라는 명칭이 붙었다.[12]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지시시 당비진(當壁鎭).[13]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닝안시(寧安市) 난관다오촌(南關道村).[14]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닝안시(寧安市) 보하이진(渤海鎭).[15] 엄밀하게 대종교식으로 표현하자면 도사교(都司敎)[16] 이후 적은 내용을 보면 역사가로 포함시키기 어려운 인물이지만 단순히 번역만 한 김택영, 현채, 장지연 같은 인물도 역사가로 포함시켜 버리는 얇디얇은 한국 사학사에서는 그냥 역사가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전 시기의 역사가의 역사책이라고 생각 없이 받아들이면 안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17] 그런데 이 책들에서 배달족이라는 단일민족을 설정하고 여기에 여진족, 거란족 등을 포함시키는 설명이 등장한다. 또한 환단고기에 괜히 신선술 이야기가 많은 것이 아니다. 실제로 환단고기에 근거가 되는 고사서가 존재했다고 가정을 해도 이 정도까지 종교 교리 서적과 일체화되어 버리면 원류를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지므로 사서로서의 가치가 극도로 낮아진다.[18] 1902~1999. 호는 한뫼. 1948년 정부수립 당시부터 1950년까지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했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대종교 16대 교주(14대 총전교)이기도 했다. 대종교 교주이던 1995년에 북한단군릉을 개건했다며 초청장을 보내자 냉큼 월북하여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와 수사를 받기도 하였다.[19] 1900~1994. 호는 봉우(鳳宇), 여해(如海) 등을 사용하였다. 단전호흡 등을 비롯한 이른바 단학수련을 유행케 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적 감정을 고취시키는 '백두산족에게 고함'(83년 출간) 등의 책을 펴내었다. 1980년부터 1992년까지 대종교 14~5대 교주(12~3대 총전교)이기도 했다. 대종교 총전교로서는 안호상 박사의 바로 윗 선임자가 된다.[20] 안호상은 1996년에 대종교 16대 교주, 정확히는 14대 총전교를 맡기도 한 고참 대종교 신자기도 하였다.[21] 박환, <만주지역 독립운동가 김교헌의 민족운동>, <<전쟁과 유물>> 제4호, 전쟁기념관, 2012, 203쪽.[22] 다만, 이 경운 친일로 인정되지 않는다. 선친일 후항일 사례로 분류되기 때문이다.[23] 삿사 미츠아키, <<한말 일제강점기 단군신앙운동의 전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117~118쪽.[24] 이용창, <독립운동가인가, 변절자인가>, 민족문제연구소, 2017.7. https://www.minjok.or.kr/archives/89992[25] 대종교 태백지부가 천제단을 조심스럽게(공경스러이) 만들었다는 뜻이다.[26] 세검 한몸이신 우리 한배검이시여, 가마히 우에 계시사 한으로 듣고 보시며 나아 살리시고 늘 나려주소서라는 내용의 짧은 기도문이다.[27] 우당 이회영의 동생[28] 이시영은 이후 개신교 감리교로 개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