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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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hewho.png

피트 타운젠드
로저 달트리
존 엔트위슬
키스 문

{{{#808080 {{{-2
[ 전 멤버 ]
[ Studio Albums ]


파일:my_generation_the_who.png


파일:a_quick_one_the_who.png


파일:더 후 3집.jpg


파일:tommy_the_who.png


파일:whos_next_the_who.png

My Generation
1965.12.03.

A Quick One
1966.12.03.

The Who Sell Out
1967.12.15.

Tommy
1969.05.23.

Who's Next
1971.08.14.

파일:quadrophenia_the_who.png


파일:by_numbers_the_who.png


파일:who_are_you_the_who.png


파일:face_dances_the_who.png


파일:its_hard_the_who.png

Quadrophenia
1973.10.26.

The Who By Numbers
1975.10.03.

Who Are You
1978.08.18.

Face Dances
1981.03.16.

It's Hard
1982.09.04.

파일:endless_wire_the_who.png


파일:who_the_who.png

Endless Wire
2006.10.30.

WHO
2019.12.06.

}}}




파일:thewho.png
더 후 관련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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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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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더 후
THE WHO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피트 타운젠드, 로저 달트리, 존 엔트위슬, 키스 문
입성 연도
1990년
후보자격 연도
1990년
후보선정 연도
1990년

























더 후
The Who

파일:the-who.jpg


▼ 다른 사진 보기

파일:후후후.jpg

초창기 (1965년)[1]
왼쪽부터 존 엔트위슬, 피트 타운젠드, 로저 달트리, 키스 문


파일:후 1969.jpg

전성기 (1969년)
왼쪽부터 로저 달트리, 피트 타운젠드, 키스 문, 존 엔트위슬


파일:후 1978.jpg

황혼기 (1978년)
왼쪽부터 로저 달트리, 키스 문, 피트 타운젠드, 존 엔트위슬


파일:후 2020.jpg

현재의 모습 (2020년)
왼쪽부터 로저 달트리, 피트 타운젠드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결성
1964년 2월[1]
[[잉글랜드|
잉글랜드
display: none; display: 잉글랜드"
행정구
]]
파일:그레이터 런던 휘장.svg 런던
데뷔
파일:영국 국기.svg 1965년 1월 12일
(영국 데뷔일로부터 21643일째)
파일:미국 국기.svg 1965년 2월 13일
(미국 데뷔일로부터 21611일째)
데뷔 음반
싱글
I Can't Explain

1집
My Generation

멤버
피트 타운젠드 (기타, 보컬)
로저 달트리 (보컬)
존 엔트위슬 (베이스)
키스 문 (드럼)
투어 멤버
사이먼 타운젠드 (기타)[2]
존 버튼 (베이스)
로렌 골드 (키보드)
잭 스타키 (드럼)[3]
과거 멤버
더그 샌덤 (드럼)[4]
케니 존스 (드럼)[5]
장르
록 음악, 하드 록, 로큰롤, 프로토 펑크, 프로그레시브 록, 파워 팝, 사이키델릭 록, 블루스 록
링크
파일:더 후 공식 홈페이지 로고.png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1. 개요
2. 위상
3. 상징
3.1. 로고
4. 멤버
4.1. 달트리-타운젠드 관계
7. 퍼포먼스
7.1. 악기 부수기
7.2. 그 외
8. 인기
8.1. 한국에서의 인지도
9. 사건사고
10. 여담
12. 싱글
12.1. 미국 빌보드 핫 100
12.1.1. 3위~10위
12.1.2. 11위~30위
12.2. 영국 오피셜 차트
12.2.1. 2위
12.2.2. 3위~10위
12.2.3. 11위~30위
13. 개별 문서가 존재하는 곡



1. 개요[편집]



파일:the who gig.jpg

더 후는 1964년 결성되어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영국의 전설적인 록밴드이다.


2. 위상[편집]


더 후는 영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그룹 중 하나이자, 음악사적으로도 영향을 지대하게 끼친 밴드이다. 1959년 로저 달트리에 의해 결성된 스쿨 밴드인 ‘디투어스’가 시초이며, 이후 같은 동네 친구이자 학교 친구들인 피트 타운젠드, 존 엔트위슬, 키스 문을 차례대로 영입하면서 결성되었다. 이들의 데뷔작인 My Generation은 대중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하드 록 앨범으로 여겨지며, 이후 발매한 앨범들에서도 하드 록의 발전을 꾀하면서 이후의 하드 록 및 헤비 메탈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외에도 최초의 콘셉트 앨범 중 하나인 The Who Sell Out을 발매하는 등 하드 록과 헤비 메탈 장르 외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나, 1978년 키스 문의 죽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되었다가 남은 멤버들이 다시 활동하고 있다.

비틀즈, 롤링 스톤스, 킹크스 등과 더불어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이끌었던 밴드 중 하나이자 하드 록, 헤비 메탈, 펑크 록 장르의 초석을 다진 밴드 중 하나로 거론된다. 음악사적으로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친 밴드인 만큼 크림, 지미 헨드릭스,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등 1960~70년대의 여러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린 데이, 오아시스 등의 1990년대~2000년대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밴드이다. 특히나 록 음악 특유의 과격하고 역동적인 무대 퍼포먼스 측면에서는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밴드이다.

거친 무대매너와 연주력, 기성세대에 반발하는 가사로 인해 많은 평론가들에게 펑크 록의 시초자로 평가받는 밴드이기도 하며, 1960년대 당시 모드족의 상징이었던 밴드이다.

2020년대에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롤링 스톤스와 함께 록밴드 중에서는 최고참인 밴드가 되었다.[6] 80대를 내다보는 멤버들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굉장히 놀라운 부분.


3. 상징[편집]



3.1. 로고[편집]



파일:thewho.png


파일:더 후 공식 홈페이지 로고.png

공식 로고
영국 공군 라운델

더 후의 로고는 밀덕이라면 많이 본 적이 있는 영국 공군 라운델이다. 록 음악의 불모지인 한국에서도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 AC/DC, 건즈 앤 로지스 등의 밴드들의 로고는 유명하지만 더 후의 로고는 어째서인지 상기한 밴드들만큼은 유명하진 않다. 그럼에도 꽤 간지가 나는 로고이기에 상기한 밴드들의 로고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의류 상품으로 활발하게 소비되고 있다.

이 영국 공군 라운델을 모티브로 제작한 로고는 밴드 초반부터 쓰였는데, 사실 초창기 더 후는 모드 컨셉을 잡았던 밴드였다. 당시 모드족들을 상징하는 로고가 영국 공군의 라운델이었는데, 더 후 또한 이러한 점을 노려 모드족들을 겨낭하기 위해 로고를 아예 이 라운델로 했던 것이다.

물론 1960년대 후반부터 모드 컨셉을 버리긴 했으나, 이 로고는 그 이후에도 계속 쓰였고, 현재까지도 더 후를 상징하는 로고로 많이 알려져 있다.


4. 멤버[편집]


더 후의 구성 멤버

파일:타운젠드옹 1:1.jpg

피트 타운젠드 Pete Townshend
출생
1945년 5월 19일 ~ (78세)
출신지
[[잉글랜드|

잉글랜드
display: none; display: 잉글랜드"
행정구
]]
런던 치스윅
활동
1961년 - 현재
포지션
리듬 기타, 보컬

로저 달트리 Roger Daltrey
출생
1944년 3월 1일 ~ (80세)
출신지
[[잉글랜드|
잉글랜드
display: none; display: 잉글랜드"
행정구
]]
런던 이스트 액튼
활동
1959년 - 현재
포지션
보컬, 하모니카, 기타

존 엔트위슬 John Entwistle
생몰
1944년 10월 9일 - 2002년 6월 27일 (향년 57세)
출신지
[[잉글랜드|
잉글랜드
display: none; display: 잉글랜드"
행정구
]]
런던 치스윅
활동
1960년 - 2002년
포지션
베이스, 보컬

키스 문 Keith Moon
생몰
1946년 8월 23일 - 1978년 9월 7일 (향년 32세)
출신지
[[잉글랜드|
잉글랜드
display: none; display: 잉글랜드"
행정구
]]
런던 웸블리
활동
1964년 - 1978년
포지션
드럼
그 외
더그 샌덤, 케니 존스
파일:thewho.png
더 후가 현재까지 높게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로는 멤버들의 엄청난 역량 또한 한몫 했다. 크림, 레드 제플린과 함께 인간 흉기들의 모임이라고 불릴 정도로, 멤버 전원이 각자의 분야에서 TOP 10 안에 들어간다. 특히 존 엔트위슬키스 문은 세 손가락 안에 꼽히며, 피트 타운젠드로저 달트리도 록 음악의 범주 안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이다.

  • 리더이자 리듬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젠드키스 리처즈와 더불어 세계 제일의 리듬 기타리스트라 불린다. 그는 밴드 음악의 기초를 탄탄히 구축했고, 성격답게 공격적이고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과격한 연주를 했으며 피드백과 파워코드를 대중화시키기도 했다. 그 외에도 풍차 돌리기나 악기 파괴 등의 무대 퍼포먼스로 후대 밴드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작곡 능력 또한 매우 뛰어났는데, Tommy 같은 록 오페라나 My Generation 같은 과격한 사운드의 초창기 음악들부터 Who's Next 같이 신디사이저를 이용한 세련된 음악들까지 보여주면서 작곡의 중심축이 되었다. 보컬 실력 역시 출중해서 Going Mobile같은 곡을 직접 부르거나 대부분의 백보컬을 담당했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보컬 능력이 떨어져 힘에 겨워할 때가 있고,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로저가 피트의 파트를 담당했던 적이 있었다.

  • 창립자이자 프론트맨 로저 달트리는 록 오페라 스타일의 드라마틱한 보컬과 로큰롤의 정열적인 보컬을 모두 능수능란하게 소화하는 사람이라 많은 록 팬들에게 최고의 록 보컬리스트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는 성부가 테너가 아닌 바리톤이었으나, 당시 록 보컬 중에서 가장 안정적인 발성으로 3옥타브 초중반의 고음도 쉽게 뽑아내는 괴물같은 보컬이었다. 당장 최고의 보컬리스트라고 꼽히는 로버트 플랜트, 프레디 머큐리가 로저 달트리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라이브 퍼포먼스도 정열적인데, 쉴세없이 몸을 흔들고 뛰어다니는 와중에도 특유의 굵직하면서도 울부짖는 듯한 창법이 살아있다. 또한 공연내내 마이크를 쥐불놀이하듯 뱅뱅뱅 돌리다 잡는게 트레이드 마크. 마이크가 날아갈 것만 같은 스릴이 관전 포인트다.

  • 베이시스트 존 엔트위슬은 “세계 최고의 베이시스트”를 뽑는 자리에서 절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전설적인 베이시스트다. 그가 보여준 베이스 라인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것이었으며, 소위 말하는 기관총같은 베이스 테크닉을 록계에 처음 선보인 것이 바로 존이다. 녹음에서든 무대에서든 늘 과묵한 사람이었지만, 속에 있는 활화산과도 같은 격동과 열정을 베이스 라인으로 고스란히 표출한다. 이 베이스 연주는 리드 기타의 역할을 대신할 정도로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빌리 시언, 존 디콘, 게디 리 등 후대 베이시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노년기의 연주 영상을 보면 노련한 정도가 아니라 웬만한 후배는 능욕하는 수준이라 입이 떡 벌어진다. 혼연일체의 경지에 도달한 것 마냥 베이스를 신체의 일부같이 마음대로 다뤄서, 괴물같은 스피드와 테크닉을 뽐내기 때문에 "Thunder Fingers" 라는 별명이 있었다. 또한 여러 가지 악기를 쓴다는 특징이 있는데 60년대 말부터 모습을 드러낸 헤비쉐입 베이스를 아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영상이나 사진을 보면 알렘빅, 딘, 깁슨(펜더 베이스 넥), 워윅 등 온갖 브랜드의 헤비쉐입 베이스를 다룬다.

  • 드러머 키스 문존 본햄과 함께 전설적인 드러머로 모든 리스트에서 그는 존 본햄 다음 순위인 2위를 지키고 있으며콩라인?, 친구인 존 본햄과 함께 드럼계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드럼 연주는 그 자체로 정열이 넘쳐 흔히 천둥 소리로 비유된다. 라이브 도중에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드럼 세트를 부숴먹었다고 하며 실제로도 호르몬 과다분비 등으로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는 정신 질환이 있었다. 키스의 연주를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여타 드럼 연주자들이 썼던 것보다 사용하는 탐의 수가 훨씬 많다. 무대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더블베이스 드럼을 나눠주고 마운트도, 플로어, 스네어를 통틀어 거의 8~16여 개에 이르는 탐을 사용했는데, 놀랍게도 그 모든 탐을 전광석화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슈퍼밴드 Cream의 드러머이자 '드럼의 마왕'이라 불리우던 진저 베이커와의 일화로도 유명하다. 데뷔는 진저 베이커가 훨씬 먼저 했으나 하드 록 시대에 접어들자 두 사람 모두 경쟁적으로 드럼 구성을 늘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이 때 앨리스 쿠퍼 밴드의 드러머이자 키스 문의 친구였던 닐 스미스도 항상 둘보다 드럼 갯수 하나를 늘려서 연주했다고 한다. 이 답없는 경쟁은 당시 병풍에 불과하던 드럼 세계의 확장이라는 훌륭한 결과를 일궈냈다.

더욱 놀라운 점은 더 후는 크림, 레드 제플린과 같은 슈퍼밴드가 아니라 학교에서 친구들끼리 모여서 만든 스쿨 밴드였다는 것이다. 키스 문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전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으며, 키스 문 또한 이들의 고등학교 친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슈퍼밴드들보다 더한 역량을 자랑한다는 점에서 전 세계의 수많은 리스너들의 놀라움을 사고 있다.

4.1. 달트리-타운젠드 관계[편집]




파일:달트리&타운젠드 현재.jpg

과거 모습.
현재 모습.
플랜트-페이지 이전의 보컬-기타 콤비로 꼽히는 관계이다. 키스 문과 존 엔트위슬이 사망한 후에도 이 둘은 더 후를 끝까지 지켰으며, 현재까지 더 후로서 활동하고 있다. 둘은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동네 친구였으며, 현재까지 사이가 상당히 좋다고 한다.

이 둘은 동시대의 레논-매카트니, 재거-리처즈와는 달리 작곡의 주도권이 피트 타운젠드에게 있었기에 작사 작곡 콤비라고 평가받지는 않으나, 보컬과 기타를 최초로 분리함으로써 후대의 수많은 보컬-기타 콤비에 영향을 끼친 전설적인 콤비로 평가받는다. 다만 더 후가 록 음악이 형성되던 1960년대 중반부터 활동했다보니 완벽한 보컬, 기타 분리까지는 아니었으며, 기타리스트인 피트 타운젠드 또한 대다수의 곡에서 서브 보컬로 활동하였으며, 일부 곡에서는 메인 보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7]

또한 이 둘은 현재까지도 큰 갈등없이 더 후로서 활동하며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밴드 자체는 인기가도를 달릴 때도 데뷔 당시처럼 늘 티격태격댔다고 한다. 옆에서 보기에는 당장에라도 깨질 것같은 분위기였다는데, 가까울수록 더 싸운다고 하니 그만큼 절친했다는 증거도 된다. 흡사 오아시스를 보는 듯하다 같은 세대의 플랜트-페이지, 레논-매카트니, 워터스-길모어가 깨지고 후대의 조니 마-모리세이, 슬래시-액슬[8], 갤러거즈, 에디 밴 헤일런-데이비드 리 로스 등 수많은 보컬-기타 콤비가 깨질 때에도 로저 달트리와 피트 타운젠드는 재거-리처즈와 더불어 끝까지 콤비를 유지했다.[9] 록 역사상 가장 과격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뭉친 밴드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까지 큰 갈등 없이 멤버들끼리 현재까지 친한 밴드가 된 것이다.

5. 역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더 후/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더 후 1966.jpg


파일:더 후 1971.jpg

1966년. A Quick One 발매 당시.
1971년. Who's Next 발매 당시로, 최고 전성기 시절이다.

파일:더 후 1978.jpg


파일:더 후 2021.jpg

1978년. 키스 문 사망 직전 찍은 사진.
현재 모습[10]
1967년 몬터레이 페스티벌에서의 "My Generation" 연주.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에서의 "Pinball Wizard" 연주.
1978년 셰퍼튼 스튜디오에서의 "Won't Get Fooled Again" 연주.
2015년 히데 파크에서의 "Baba O'Riley" 연주.

6. 평가와 영향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더 후/평가와 영향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퍼포먼스[편집]



7.1. 악기 부수기[편집]




기타를 부수는 피트 타운젠드

악기 해체의 미학을 철저히 구현한 밴드로, 요즘 록밴드 공연에서는 흔한 악기 부수기의 원조가 바로 이 밴드이다. 악기를 부수기 시작한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피트 타운젠드는 1964년 더 후의 인디 시절 천장이 낮은 클럽에서 공연하던 중 자신의 기타를 머리 위로 높게 들어올렸는데, 천장에 기타 헤드가 부딪히며 넥이 부러지는 바람에 ㅆㅂ, 됐다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 하지만 관객들은 오히려 환호했고, 그 이후부터 피트는 그렇게 기타를 부수기 시작했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드럼을 부수는 키스 문

피트 타운젠드뿐만 아니라 혈기가 아주 넘치던 키스 문도 1964년 경부터 공연이 끝난 후 드럼을 때려부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악기 부수기는 더 후의 아이덴티티가 되었으며, 훗날 여러 록밴드들이 공연이 끝나고 악기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7.2. 그 외[편집]




윈드밀 퍼포먼스를 하는 피트 타운젠드
악기 부수기뿐만 아니라 매우 거칠고 열정적인 퍼포먼스로 유명하다. 지금이야 팔순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들이 됐으니 전성기 시절보다는 훨씬 덜하지만, 4인조 시절에는 정말 소위 말해 발광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라이브 영상을 보면 로저 달트리는 시도때도 없이 마이크를 돌리고, 피트 타운젠드는 윈드밀과 슬라이딩은 물론 점프하면서 뛰어다니고, 키스 문은 드럼을 두들겨 패다시피 하며 라이브가 끝나면 세상 끝난 것처럼 악기를 죄다 부숴놓는다. 과묵한 것으로 알려진 존 엔트위슬만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베이스를 연주한다. Won't Get Fooled Again 라이브 영상에 '존은 활동 과잉(hyperactive)스러운 세 아이를 돌보는 쿨한 베이비시터같다.'라는 댓글이 최다 추천을 받을 정도.


8. 인기[편집]


더 후의 앨범 판매량은 약 6천만 장에서 7천만 장으로, 음악적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다고 평가받는 것에 비해 그렇게 많은 음반을 판매하지는 못했으며[11], 빌보드 200,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기록한 적이 한 번도 없다.[12] 이러한 원인으로는 더 후가 시대의 흐름과 관계없이 본인들만의 음악적 실험을 계속해서 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이끌었던 밴드답게 현역 당시에는 매우 인기있던 밴드였으며,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는 현대에도 인기 있는 록밴드 중 하나이다. 상술하였듯이 더 후는 본인들만의 음악적 실험을 계속하여, 현대의 리스너들 사이에서는 1960-70년대 곡이지만 상당히 세련됐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주목할만한 점은 1970년대 후반까지 더 후의 인기가 상당 부분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Who Are You는 빌보드 1위는 못했지만 3위까지 올랐고 상업적, 비평적으로도 모두 성공을 거뒀다. 이때가 정통 펑크 록[13]과 브리티시 하드 록이 사양세를 걷고 디스코의 시대가 도래한 때였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매우 놀라운 성과이며, 키스 문의 사망이 없었다면 롤링 스톤스와 마찬가지로 1980년대 2번째 전성기가 있었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더 후의 인기는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식지도 않은채 꾸준한 팬층을 유지하였다. 이와 같은 점은 더 후가 현재까지 존속하면서 영국의 최장수 록밴드로 남을 수 있게 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8.1. 한국에서의 인지도[편집]


이렇듯 세계적으로는 현재까지 유명한 밴드이지만 국내 인지도는 떨어지는 편. 롤링 스톤스, 킹크스, 버즈 등과 함께 해외 대비 한국 인지도가 극심하게 낮은 대표적인 록밴드이다. 록 불모지인 한국에서는 어지간한 록 덕후가 아니면 나오지 않는 이름이며, 더 후가 주로 추구했던 하드 록의 입지는 거의 바닥을 치는 수준이어서 신세대는 커녕 구세대 또한 잘 모르는 밴드이기도 하다.[14]

국내에서는 더 후의 80년대 앨범인 Who Are You가 소개되고, 미국 드라마 CSI 과학수사대 시리즈같은 범죄 드라마 시리즈에 음악들이 사용되면서 조금이나마 알려지게 되었다.[15] 닥터 하우스 시즌1 에피소드14의 엔딩곡으로 Baba O'Riley가 삽입되며 해당 곡의 제목을 묻는 질문이 미드 커뮤니티에 올라오기도 했다.

이처럼 더 후의 이름이나 이들의 노래의 인지도는 낮지만, 이들의 거친 퍼포먼스는 움짤이나 짤방으로 생성되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주 돌아다니기 때문에, 더 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피트 타운젠드의 풍차 돌리기, 로저 달트리의 마이크 돌리기, 키스 문과 피트 타운젠드를 위시로 한 악기 부수기 등을 보여준다면 아는 경우는 상당히 많다. 풍차 돌리기와 마이크 돌리기는 후대 뮤지션들도 한 퍼포먼스이다.

또한 최근에는 탑건: 매버릭Won't Get Fooled Again이 삽입되어 국내에도 점점 알려지고 있는 중이다.


9. 사건사고[편집]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9.1. 더 후 콘서트 압사 참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더 후 콘서트 압사 참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여담[편집]


  • '레드 제플린' ('Led Zeppelin')이라는 이름은 원래는 추락한 비행선의 이름에서 따온 밴드명인데, 이 밴드명을 지어준 장본인이 바로 키스 문이다. 야드버즈에서 지미 페이지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 다 탈퇴하자 홀로 남은 지미 페이지는 새로운 멤버들을 영입한 뒤 이름을 "뉴 야드버즈"로 지었는데, 야드버즈의 실질적 리더였던 (탈퇴)멤버 제프 벡은 그 이름을 쓰지 말고 새로운걸 지으라고 요청했다. 지미 페이지가 밴드명을 뭐라고 지을까 고민하던 차에 지인이었던 키스 문이 "너희 밴드는 제플린 비행선처럼 금방 높이 뜨겠지만, 무거운 납처럼 곧바로 추락할 거야"라며 장난 반으로 지어준 것이다. 그리고 위로 추락해버렸다

  • 가는 곳마다 호텔 을 몽땅 부숴놓기로 유명했다. 특히 키스 문의 주도하에 이런 일이 많았는데 변기에 M60 폭죽을 넣어서 폭파시키거나 호텔 수영장에 캐딜락을 처박아 버리거나 창밖으로 TV를 던져 박살을 내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후에 이를 모두 변상해준 다음에 까지 두둑하게 얹어주고 나갔다 한다. 그 후로 롤링 스톤즈가 이 퍼포먼스를 따라했고, 1970년대엔 레드 제플린을 비롯한 여러 후배 밴드들도 이걸 고스란히 따라했다.[16] 90년대엔 오아시스가 이 짓을 하고 다녔다. 그것도 아직 데뷔앨범도 내기 전부터. 이로인해 원조이자 주범이었던 키스 문은 홀리데이 인과 쉐라톤, 힐튼 호텔 등에서 영구 거부를 당했고 죽을 때까지 이런 몇몇 호텔에 숙박할 수 없었다.

  • 1967년 어떤 쇼 공연 도중 키스 문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17]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공연이 끝나고선 악기를 아주 신나게 부수는데, 키스 문이 숨겨뒀던 화약들을 일시에 폭발시키는 바람에 키스는 황급히 무대 밖으로 나가버리고[18], 피트 타운젠트는 머리가 타고 귀에 이상이 생기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 무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이 사건은 신문에서 대서특필 되었다. 놀라운 점은, 피트 타운젠드는 이로 인해 청력이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기타를 다 부수고 심지어 MC의 어쿠스틱 기타 까지 부숴버렸다. 영상을 보면 기타를 부수는 피트 타운젠드의 바로 앞에서 드럼이 폭발하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피트 타운젠드의 위엄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존 엔트위슬은 피트 타운젠드와 키스 문이 엄청난 파괴적 퍼포먼스를 보이는 와중, 조용한 성격으로 알려진 것과 같이 조용히 자기 베이스를 잡고 있다가 드럼이 터져 충격을 입었다.

  • 키스 문은 약을 하도 많이 해서 무대에서 기절한 적이 있다. 1973년 Quadrophenia 투어 도중 공연전에 말 진정제를 브랜디와 섞어 마신 탓에[19] 공연 중에 무대 위에서 기절한 것(...). 그 상황에서 피트 타운젠트는 즉석에서 "관객 중에 드럼 칠 수 있는 사람 있어요? 잘치는 사람으로." 라 외쳤고, 그때 지원한 스콧 할핀이라는 젊은이가 드럼을 치게 된다. 그는 더 후의 심각한 였기 때문에 모든 노래를 줄줄 외우고 있었고,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다행인가...?[20]

  • 이런 괴팍한 행보와는 별개로, 키스는 성공적인 영화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데이빗 에섹스가 주연한 록 음악 영화 스타더스트에서 드러머 역으로 출연한 이래로 크고 작은 영화에서 발군의 연기력을 선보인다. 역시 정상이 아니야


  • 피트 타운젠드는 세계에서 몇 안되게 핑크 플로이드의 초연과 마지막 공연을 모두 지켜본 사람이기도 하다. 1967년 런던 UFO 클럽에서 시드 바렛을 비롯한 핑크 플로이드 초기 멤버들이 아방가르드한 공연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멤버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그로부터 훌쩍 지난 2005년 라이브 8에서 핑크 플로이드가 역사상 마지막 공연을 하기 직전의 순서로 공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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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슨 가족 시즌 12 에피소드 2에 출연한 적이 있다.

  • 일본 애니메이션 케이온!!에서 히라사와 유이가 선보인 팔을 풍차처럼 돌려서 피킹하는 '풍차 돌리기'[21] 필살기는 원래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젠드의 시그니처 무브이다. 또한 2기 3화에서 밝혀진 바로는 타이나카 리츠 또한 키스 문의 열렬한 광팬이다. 하지만 그 행보는 따라하고 싶진 않다고 한다. 케이온 극장판에서 엔딩곡 Singing!의 MV영상에서는 더 후를 오마주한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22] 케이온 연출을 맡은 야마다 나오코 감독이 더 후의 열렬한 팬이라 넣은 듯 하다. 그 후에도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애니메이션)의 오프닝곡으로 My Generation이 채택됐는데 이쯤하면 더후 덕후라고 봐도 무방하다.




11. 음반 목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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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싱글[편집]


미국보다는 영국에서 싱글이 더 히트쳤으며, 미국 빌보드 핫 100에서는 최고 순위 싱글도 9위에 그쳤다. 대신 11~30위 내에서는 꾸준히 곡을 올린 편인데 올린 연대만 보면 거의 롤링 스톤스 급이다. 밴드 결성이 거의 20년이 되어가던 1982년까지 빌보드 핫 100 30위권 내에 곡을 냈다는 점이 꽤나 놀라운 부분.


12.1. 미국 빌보드 핫 100[편집]



12.1.1. 3위~10위[편집]



12.1.2. 11위~30위[편집]




12.2. 영국 오피셜 차트[편집]


10위권 안에 들어간 싱글만 14개일 정도로 영국 오피셜 차트의 성적은 매우 좋았으나 전부 2,3,4위 정도에 그쳤고 1위는 한번도 못해봤다. 참고로 이는 앨범 차트도 동일.


12.2.1. 2위[편집]



12.2.2. 3위~10위[편집]


  • I Can't Explain (1965, 8위)
  • Anyway, Anyhow, Anywhere (1965, 10위)
  • Substitute (1966, 5위)
  • Happy Jack (1966, 3위)
  • Pictures of Lily (1967, 4위)
  • I Can See for Miles (1967, 10위)
  • Pinball Wizard (1968, 4위)
  • Won't Get Fooled Again (1971, 9위)
  • Join Together (1972, 9위)
  • Squeeze Box (1975, 10위)
  • Substitute (1976, 7위)
  • You Better You Bet (1981, 9위)

12.2.3. 11위~30위[편집]


  • Dogs (1968, 25위)
  • Magic Bus (1968, 26위)
  • The Seeker (1970, 19위)
  • Let's See Action (1971, 16위)
  • Relay (1972, 21위)
  • 5:15 (1973, 20위)
  • Who Are You (1978, 18위)

13. 개별 문서가 존재하는 곡[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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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초로 ‘더 후’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시점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의 결성일이다. 더 후의 전신인 ‘디투어스’의 결성일을 기준으로 삼으면 1959년 결성이다. 참고로 디투어스는 멤버들이 다니던 고등학교의 스쿨 밴드였는데, 1964년에 이름만 더 후로 바꿔서 그대로 메이저로 데뷔하였다.[2] 피트 타운젠드의 동생이다.[3] 링고 스타의 아들이다.[4] 1962년 ~ 1964년(활동), 2019년(사망). 초창기 멤버였으나 키스 문이 쫓아냈다(...).[5] 1978년 ~ 1983년, 1985년, 1988년, 2014년 (활동)[6] 오히려 에어로스미스, KISS, 토토 등 후배 밴드들이 더 빨리 활동을 접었을 정도다.[7] 그렇기에 보통 보컬과 기타를 완벽하게 분리한 최초의 콤비는 플랜트-페이지가 꼽힌다.[8] 이 둘은 최근 들어서 화해하긴 했지만 한번도 깨진적이 없던 달트리와 타운젠드의 관계에 비하면 확실히 험악하다.[9] 존 엔트위슬키스 문도 죽기 전까지 친하게 지내면서 관계를 유지했다.[10] 키스 문은 1978년 타계, 존 엔트위슬은 2002년 타계[11] 당장 더 후와 비견되는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등의 레전드급 밴드들은 전부 2억 장을 넘겼다.[12] 이와 비슷하게 레드 제플린은 빌보드 200에서는 1위를 밥먹듯이 차지했으나,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기록한 적은 없다.[13] 여기서 펑크록은 섹스 피스톨즈더 클래시 류의 펑크 록이 아닌 1960년대의 개러지 성향 펑크를 뜻한다.[14] 한국이 아무리 록 불모지라고 해도 구세대는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AC/DC 등 당시 전 세계를 휩쓸었던 그룹들은 잘 알고 있으나, 이상하리만큼 롤링 스톤스와 더 후는 한국에 극히 알려지지 않았다.[15] 보컬 로저 달트리가 CSI 라스베가스 시리즈에 범인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는 CSI를 처음 기획한 총감독 앤서니 자이커가 더 후의 팬이기 때문이다. 각각 라스베가스는 'Who Are You', 마이애미는 'Won't Get Fooled Again', 뉴욕은 'Baba O'Riley'. 사이버는 'I Can See For Miles'[16] 제일 돈이 넘쳤던 레드 제플린의 경우엔 호텔 벽을 뚫은 적도 있었고, 호텔 한 층을 통째로 빌려서 친구들과 술, 마약, 고급 창녀들 및 그루피족이 다같이 흥청망청 노는 난장판식 퇴폐 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존 본햄과 친구들은 호텔 복도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방문을 때려부쉈고, 참가자들은 아무데서나 하고 싶은걸 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가난한 펑크 밴드들은 하고 싶어도 못했다. 이런 짓도 돈 많은 스타급이나 할 수 있는 거다.[17] 연주곡은 그들의 1960년대 대표곡 My Generation이다.[18] 이 때 나갔다가 멤버들이 서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온뒤 엎어져있다.[19] 상기했듯 호르몬 분비 및 혈기 관련 증상이 있어서 웬만큼 센 약이 아니면 안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찾다 찾다 기어이 도달한 마약이 진정제(...). 말 진정제는 대체로 야생마같이 날뛰는 짐승들에게 쓰인다(...).[20] 그래도 당시 공연 영상을 보면, 다른 멤버들이 스콧을 위해 템포를 조절해주거나 중간중간 손짓이나 말로 가이드를 해주는 등 배려해준 부분이 있다.[21] 윈드밀(Windmill)이라 부르는 그 행위가 맞다.[22] 특히 방과후 티타임 멤버들이 영국 국기이불삼아 껴안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