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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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2. 설명
3. 나무위키에 등재된 도원수 역임자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都元帥

고려 전기-조선시대무관 관직. 품계는 정 2품이다. 이 직책의 기원은 고려 전기에 외침을 막기 위한 출정군에서 시작, 고려 후기 왜구 등의 외침을 막기 위해 각 지역에 원수를 파견하고, 그 원수들을 통합 지휘하는 도원수 제도이며, 고려 말의 도원수가 조선시대에 계승된 것이다.


2. 설명[편집]


보통 원수가 이끄는 군대의 규모는 1만 내지였다. 임진왜란 당시의 제승방략 작전술이나 병자호란 당시의 청야견벽 작전술도 결국 부대 결집 및 기동을 위해선 그 도나 도시, 지역에 있는 군사들만을 모으는 것이었다. 이렇게 결집시킨 부대 규모는 5만에서 7만 정도 되었다. 이를 보았을 때 당시 원수와 도원수를 부대 규모(현대 인구수로 추산하면 25만-35만 사이의 병력 규모이다.)로 따져서 현대 계급으로 본다면 원수는 사단장, 도원수는 군단장 정도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고,(결집 시 규모는 사실상 현대의 작전사령관급이다.) 부대 운용 체계로 보았을 때에는 군단장, 야전군사령관으로 볼 수 있다.

조선군 육군은 크게 수도 한양 및 그 주위를 지키는 중앙군과 각 지역을 방어하는 지방군으로 나뉘었는데, 이 지방군은 하나로 통합되지 않고 각 지역의 관찰사(감사) 및 병마절도사(일부 지역에선 관찰사가 겸임)가 개별적으로 지휘하였다. 이는 조선시대에는 문치 우위와 조정의 중앙 통제를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특정 개인 및 집단이 조선군의 군권 전체를 장악하는 일을 매우 경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정 지역의 국방을 특별히 강화하거나 외적의 침입으로 인해 대규모로 군을 동원할 경우, 각 지방군 및 병마절도사를 일괄적으로 지휘하는 지휘 체계가 필요할 때가 있는데, 이 때 이 임시로 도원수를 임명해서 그 지휘를 맡게 된다.

임시 관직이므로 도원수의 지휘 범위는 그 때마다 달라진다. 조선시대에 전국 팔도의 지방군 전체를 도원수가 지휘한 사례는 그만큼 큰 전쟁이었던 임진왜란 시기 뿐이다. 이 때의 도원수는 김명원(1592~1593년)과 권율(1593~1598년)이다.

현대 한국군과 비교하면 그 위상 면에서는 합동참모의장이 그나마 비슷하지만, 상설직이며 전 국군에 대한 군령권을 가지는 합참의장과는 달리 도원수는 임시직이며 지휘 범위도 유동적이라는 것이 다르다. 오히려 전시에 한국 육군 작전사령부 2개를 모두 모아서 단일 집단군을 편성한다면 집단군사령관에 해당하는 위치다. 정승이 겸하는 도체찰사와 종1품관이 겸하는 체찰사에게 심한 간섭을 받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군권을 휘두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 초기에는 도체찰사 4명(유성룡, 이원익, 정철, 윤두수)이 도원수 김명원에게 각각의 군령을 내리는 혼란이 발생했다. 때문에 도원수의 사실상의 부하는 삼도수군통제사(수군)와 도순변사(육군)이다.

그 때문에 이후에는 남과 북을 총괄하는 도체찰사 2명으로 줄여 혼란을 막았다. 실제로는 북부 4도(평안, 황해, 함경, 경기)의 도체찰사 유성룡은 후방지원에 전념했고 남부 4도(경상, 전라, 충청, 강원)의 도체찰사 이원익이 도원수 권율을 실질적으로 통제했다. 참고로 병조판서와 도원수 간의 서열관계는 명확하지 않았다. 명목상으로는 병조판서가 도원수보다 높았지만 품계는 같았고, 임진왜란 때의 병조판서는 이항복이었지만 도원수는 이항복의 장인 권율이었던 사례도 있다. 군정권과 평시 군령권을 가지는 병조판서였지만 도원수가 임명된다는 건 전시라는 뜻이고 전시 군령권을 가지는 도원수를 제치고 일선 부대를 병조판서가 지휘할 수는 없었다.

그 외 조선에서는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규슈 탐제(探題)'[1]라는 직위를 '구주도원수(九州都元帥)'라고 부르기도 했다.


3. 나무위키에 등재된 도원수 역임자[편집]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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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 무로마치 시대 지방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