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조 히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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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 제국의 제40대 내각총리대신이자 독재자 및 전쟁범죄자.
일본 육군 소속이며 최종계급은 대장이다. 일본육군내 통제파 파벌의 수장으로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주도했으며, 결국 1941년 내각총리대신 겸 육군대신 겸 육군참모총장으로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다.
대표적인 추축국 지휘관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 프로파간다를 포함한 매체에 일본군의 이미지가 '안경을 쓰고 콧수염 기른 빡빡이'로 정착된 것[3] 에 영향을 주었다.[4] 또한 워낙에 벌인 일이 거대하고 잔혹해서, 전후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미군은 자살하려던 도조를 살려서 기어코 교수형에 처했다.
2.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도조 히데키/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편집]
도조 히데키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일 뿐만 아니라 일본제국의 군국주의화를 주도한 원흉이었고, 그 결과 사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 질서에서 그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여지는 거의 없다. 즉, 당시 일본 제국은 전형적인 입헌군주제가 아닌 막부가 통치하는 나라에 가까웠으며, 그것도 일본 역사상 가장 광기에 찬 막부였다. 막부가 있으면 쇼군이 존재하는 법인데, 이 일본군 막부 내에서 쇼군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 바로 도조 히데키였다.
다만 일각에선 그가 개전 책임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5][6] 본인이 저지르지 않았던 악행조차 덤터기 쓰고 있는 억울함도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일본 제국의 최고지도자로 일본 육해군의 작전의 입안, 진행 사항 등을 보고받고 세세히 개입했으며, 악명 높은 731부대까지 직속으로 둔 히로히토 천황은 일말의 비판조차 할 수 없는 최고존엄이었으며, 패전 후에도 혼란을 안정시키려는 미국과 천황만큼은 살리려는 당시 일본의 합의로 일본은 명목상 입헌군주제라[7][8] 천황은 실권이 없었다는 논리로 면책되었다.
또 당시 일본군 전체가 도조 히데키에게 복종했던 것도 아니었다. 육군 출신이라는 이유로 총리 도조 히데키가 일본 해군을 통제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측면도 있었고[9] , 심지어 해군의 승패 여부조차도 모를 정도로 육군과 해군은 사실상 적군처럼 대립했다. 다만 이 사건 이후로 도조도 해군 군령부장을 경질하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앉히는 등 나름대로 해군을 통제하기 위한 압력을 넣기는 했다.
물론 도조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중일전쟁의 확대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인 만큼, 전쟁 중에 일어난 모든 참상에 대한 책임이 그에게 있다는 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도조가 히틀러와 동일 선상에 놓일만큼 악랄한 독재자라고 보기에는 다소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히틀러는 본인이 직접 유태인 학살을 지시하고, 독소전쟁 당시 국제법을 어겨서라도 슬라브인 말살에 집중하라는 지시를 내린 만큼 독일군의 모든 학살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희대의 학살자임이 명백하다. 그러나 도조는 독재자에 군국주의자였을지언정 직접적으로 학살을 지시하거나 인종말살 따위를 외친 적은 없다. 난징 대학살을 비롯한 일본군의 학살 대부분은 현장 지휘관 혹은 휘하 장교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었지 도조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10]
한 마디로 히틀러와 달리 도조는 군부의 모든 악행에 관여한 인물은 결코 아니며, 당시 일본군에서 반인륜적인 악행을 저지른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기무라 헤이타로, 다치바나 요시오, 이시이 시로 등에 비하면 그나마 상식적인 편에 속한다. 그렇기에 도조 히데키라는 인물을 단순히 같은 추축국의 수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히틀러 같은 인물들과 동일선상에 놓고 보는 것은 지나치다는 주장도 꾸준히 나오는 편이다. 즉, 도조는 개전 책임자로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도조를 히틀러 같은 만악의 근원으로 취급하다 보면 더 악랄한 자들의 책임이 묻힐 수 있다는 것.
그렇지만 딱 한 가지 확실한 건 악행의 여부를 떠나 본 문서에도 적혀있듯 최종 지휘관 측면에서 보자면 무능했다는 것이다.
3.1. 세계[편집]
보통 이런 대접을 받는다. 한국, 중국, 미국, 영국 등 이 인물 때문에 고생한 나라들은 이놈이라면 학을 뗀다. 당연하지만 미국에서 가장 많이 까인다. 중국에서도 많이 까이긴 하지만 중국에서는 독단적으로 학살을 저지른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넘사벽급으로 많이 까이는지라... 근데 현대 미국에서는 더 꾸준히 까이는 나치도 있고 일제에 대한 증오심 자체도 아시아권에 비하면 낮기 때문에[11] 분명히 안 좋은 이미지라서 나왔다 하면 풍자당하지만 히틀러 정도로 메이저하게 까이지는 않고 누군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특히 중국에서 더 많이 까이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는 전쟁범죄보다는 식민 지배로 인한 피해의 측면이 크기 때문에, 국권 피탈 당시의 대표적 인물인 이토 히로부미가 더 욕을 많이 먹고 있기 때문.
3.2. 당대[편집]
이 사람에 대한 주변인들의 증언은 어떤 면에선 정말 천차만별이라 이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 지나친 완벽주의자, 면도날 같은 별명이 있는가 하면 "맘씨 좋은 할아버지라 가을에 날씨 좋은 날을 골라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서 운동회를 열고 과자를 나누어주었다."는 말도 있다. 후자의 경우 손녀인 도조 유코가 한 말이지만, 밑에 서술한 사병들에 대한 처우를 보면 이 부분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믿음직하거나 훌륭한 군인과는 3만 8천리 정도 떨어졌으며 정권을 잡는 정치적 능력은 제법 뛰어났으나,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정치가로서의 능력은 형편없었다. 그냥 권력 강화하고 자기 이득이나 챙기는 전형적인 악질 독재자였다. 사실상 그냥 막장. 그 유명한 무능의 대명사 무타구치 렌야를 심복으로 쓰고 직속 상관으로부터 "이놈은 쓰면 안 됨."이라고 평가받던 츠지 마사노부를 인재라고 격찬까지 하면서 등용할 안목이었으니 말 다했다. 파시스트라는 점을 빼고 봐도 그냥 개막장이다.
그의 수기에서 발췌
"싸움은 최후의 한순간에 결정되는 법인데 일본 제국이 가지고 있는 힘을 십분 발휘해보지도 않고[13]
적들의 선전책동에 휘말려 무릎을 꿇게 됐다.""적의 위협에 겁먹고 손을 들어버리는 내각 지도자와 국민의 얼빠진 정신을 믿고 전쟁에 나선 것은 개전 당시 책임자로서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
"신폭탄에 움츠러들고 소련의 참전에 움찔해 무조건 항복하면 국민의 전투 의사는 급속히 사그라진다. 이런 사태는 군의 통수 지휘에 지대한 혼란을 일으켜 전투력을 저하시킨다."
"동아시아와 일본의 보호를 위해 많은 군인과 국민이 희생했는데 끝을 보지 못하고 섣불리 화평을 맺는 것은 적에게 종속되는 길."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지도자라는 자가 자신 잘못이라는 말도 안하고 정작 남 탓을 하다가 죽었으니 지도자로써는 영 아니였던 양반임은 분명하다. 이쯤이면 태평양전쟁터로 가서 개죽음을 당한 일본인들이 불쌍하다.
히데키의 조카, 즉 남동생의 아들도 육군 장교였는데, 하루는 백부의 집을 방문했다가 하녀와 담소를 나누었다. 이 모습을 보고 갑자기 조카의 뺨을 때리면서 "이놈이 체면도 없이 여자한테 정신줄 놓고 뭐하냐?"라고 야단을 쳤다고... 그러나 진짜 이 하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건지 우습게도 나중에 도조 사후 이 조카는 그때 담소를 나누던 하녀와 결혼했다.
그래서 히데키의 남동생과 그의 아들(= 위 문단에 언급한 조카)은 도조와 의절하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남동생은 형의 사형 선고에 매우 고소해했고 야스쿠니 신사에도 일절 안 갔으며 그의 아들인 조카는 반(反) 극우 인사가 되었다. 게다가 부하들이 옥쇄를 준비하자 "안경 쓴 바보 두 마리[14] 들을 위해 아까운 니네 목숨을 날리지 마라"라고 했다. 바꿔 말하자면 천황에 대한 충성심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자기 집안과 악연이 있던 과거 조슈 번, 즉 야마구치 출신들을 싫어해서[15] 육군대학 면접관으로 재직시에 야마구치 출신 수험생들에게 "귀관이 면접 장소까지 걸어오는데 몇 보였나?", "본교 화장실의 변기는 모두 몇 개인가?" 등의 어이를 안드로메다로 관광시키는 질문을 하여 다 떨어뜨렸다. 그러나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의 일본 육군 내 분위기는 반초슈벌이었던지라 도조가 아니더라도 야마구치 현 출신들은 어차피 육대 입학이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두가 군 내에 강력한 파벌을 만들어버린 야마가타 아리토모 탓이지만. 위 주석에서 기술했듯 도조의 부친이 야마가타 총리에게 그렇게 간언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총리로 재임하던 시절 도쿄를 시찰하면서 사람들이 쌀을 낭비하는지 확인한답시고 하수구를 살펴보면서 쌀이 몇 알 떨어졌네, 낭비하네 떠들어서 사람들의 어이를 털었다는 일화도 있다고 한다. 그는 연대장 시절 부대 취사장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물 쓰레기가 나오자 음식이 맛없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렸다. 수상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뭐만 하면 시찰하면서 쓰레기나 하수구를 뒤지면서 뭔가 의미 부여하는 것을 좋아했다. 총리씩이나 되는 직위에 있는 이가 할 짓이 아니라는 지적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절대 국방권은 도서 지역 확보를 거친 비행장 건설로 할 뿐 삽으로는 이룰 수 없다며 도조의 전략을 대놓고 디스한 신문 수석기자를 자기 명령으로 일본 육군 이병으로 징집해 당시 격전이 벌어지던 이오지마에 보내서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중간에 일본 해군에서 이 기자를 육군 입대일 하루 전 날짜에 징병[16] 하는 식으로 데려가 버려서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연히, 해군은 그 기자를 말단 수병으로 죽게 냅두진 않았고, 종전시까지 정훈 업무에 종사시켜 종전 시까지 살아남게 해 줬다. 자세한 내용은 죽창사건 항목 참조.
이 연기로 실형을 면해 천수를 누렸고 1956년 사망했다. 죽을 때 연기였다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다만 죄질이 워낙 약해 실제 기소됐다 해도 중형이 나왔을 가능성은 없다.[17]
《불량지식의 창고》라는 책에 따르면 도조 히데키는 단 것을 좋아해서 그의 치아 상태는 군대 상태보다도 훨씬 나빴다고 한다. 체포 당시 치아 전체를 틀니로 바꿔야 했을 정도. 아돌프 히틀러도 단 것을 좋아해서 치아가 성치 않았다는데 나쁜 놈은 서로 닮아가는 듯. 실제로 히틀러와 도조는 둘 다 당분 덕후였다는 점뿐만 아니라 의외로 세세한 부분까지 닮았다.
* 집권 능력 우수[18]
* 효과적인 선제공격
* 과도한 전선 확장
또한 단순히 동맹 관계인 것을 넘어서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도 서로를 매우 좋게 평가했다. 실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히틀러는 도조를 환상의 파트너이자 든든한 동맹으로 여겼고, 도조 역시 히틀러를 '친구'라고 칭할 정도로 좋게 생각했다. 그야말로 천생연분...
미 육군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미 해군 치의관 조지 포스터(George Foster)와 잭 맬러리(Jack Mallory)는 도조의 틀니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이 유명한 환자에게 장난을 치기로 작당했다. 그들이 만든 틀니는 아주 잘 맞았지만 거기에는 모스 부호로 "진주만을 기억하라"는 문구를 새겼다.
도조 히데키는 1920년초에 독일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 독일에서 근무하면서 당시 독일군이 고안한 총력전을 준비하기 위한 전체주의적 베어슈타트(Wehrstaat, Defense State)개념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20] 또, 독일 근무 중 바덴바덴에서 다른 육군장교들과 인사쇄신과 군제개혁을 단행하여 군의 현대화와 국가총동원 체제의 확립, 마사키 진자부로·아라키 사다오·하야시 센주로 등의 옹립, 육군내 조슈벌 타도, 각 기의 유능한 동지 획득·결집 등 육군 개혁과 만몽문제의 조기해결, 혁신운동의 단행을 맹세했다고 한다. 이들은 훗날 육군 주류 파벌인 초슈, 사쓰마 파벌을 몰아내기로 맹세한다. 이것을 바덴바덴의 밀약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훗날 고급장교로 육군의 주류를 차지한 뒤에는 황도파와 통제파로 나뉘어서 격렬하게 대립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1922년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딱 한 번 미국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미국인에 대해 '돈, 성, 와인, 파티에만 찌든 물질주의에 물든 나약한 놈들'이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3.2.1. 부하[편집]
"병사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입대한다. 귀관들은 이들을 아버지처럼 자애롭게 대하고, 나이가 많은 병사들에게는 형으로 대하도록 명령해야 한다. 그리고 입대하는 자의 가정환경, 본인의 직업, 능력을 모두 알아두어야 한다. 귀관들은 전역하는 그날까지 중대의 신병의 이름을 기억하라. 왜 그래야 하는가. 병사는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는 날은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저승길을 갈 동료이기 때문이다."
1929년 4월 제1사단 보병 제1연대장으로 부임한 후 부하들에게 훈시한 내용.
일반 병사나 부사관, 하급 장교들에게는 부드럽고 자상한 아버지 같은 상관이었다. 도조는 신병이 들어오면 일일이 부모를 찾아 뵙고 "귀한 자식을 맡겨주셨으니 끝까지 보살피겠습니다."라며 부모와 입대하는 자식 모두를 안심시켰고 형편이 어려운 가장이 입대하면 동사무소를 통해 생계비를 받을 수 있도록 하여 불안을 해소해 주었다.
게다가 도조는 평등주의에 철저하여 식사도 사병과 같은 것을 먹었다. 이건 그 당시 일본군 장군들로써는 굉장히 이례적인 반응이다. 특히 같은 군국주의자 항목의 하나야 타다시와 비교해도 훨씬 나은 대접이다. 항목 참조하길 바란다. 부하들을 어찌나 사랑했는지 한 번이라도 다른 반찬이 나오면 병사들의 식단에도 그 반찬이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고는 만약 없을 경우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도조의 부대는 밥을 잘 주는 편이었다고.
게다가 부하에 대한 배려가 깊어 사단장 시절에는 병사들과 부사관들의 건강과 가족사항까지 세세하게 기록해 이름을 외웠고 부하인 부대장들에게도 병사들의 신상명세와 집안 사정 등을 꼼꼼하게 확인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그 부하들 중에 부모가 위독하다거나 집안에 큰 우환이 있을 경우 사단장의 권한으로 전역증도 발급했다고 한다.
부대 훈련 때도 도조는 군 생활이 병사들에겐 평생 남는 기억이 된다며 체력이나 전투 기술이 부족한 병사들에겐 핸디캡을 적용하여 훈련에 낙오하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심지어 시골 출신 병사가 도시 출신보다 면역력이 약해 결핵에 걸리기 쉽다는 군의관의 조언을 듣고 결핵 검진을 위해 당시(1920년대)로선 최신 기술인 X선 장비를 즉석에서 도입하기도 했다.[21]
또한 야전 부대장 때는 물론이고 총리 재임 시절에도 관저의 임원들과 수상관저를 지키는 병사들을 모아 식사를 대접하며 운동회와 보물찾기도 열었다고 한다. 심지어 도조의 운전기사 역시 "총리 각하만큼 훌륭하신 분은 진짜 처음 봤습니다."라고 증언했다.
만약 도조가 총리까지 지내지 않고 그냥 사단장 등 야전 지휘관이나 헌병사령관 정도에서 퇴역을 했더라면 후세에 욕 먹는 일 없이 부하를 생각하는 훌륭한 지휘관으로 기억됐었을 것이다.
3.3. 일본[편집]
도조가 화장된 후 그 유명한 고이소 구니아키의 전담 변호사를 지낸 산몬지 쇼헤이(三文字正平)[22] 라는 작자가 화장장에서 이 자를 비롯한 7개 인간 쓰레기들의 남은 유골을 모아서 이들의 무덤 겸 제단인 순국7사묘라는 네오 나치도 생각하지 못한 희대의 등신짓을 했다. 자세한 것은 순국7사묘 참조.
야스쿠니 신사에 이 사람도 합사했다. 일본 정부가 '몰래' 모셔놓았다고. 그리고 이 사람의 손녀인 도조 유코[23] 는 난징 대학살과 일본군 위안부를 부정하고 정치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촉구하며 미국의 원자탄 사용을 비난하는 성명을 낼 것을 촉구하는 등의 만행을 벌였다.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도 나왔으나 떨어졌다.
도조 유코는 KBS의 다큐멘터리에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한 징병 조선인/대만인의 유족들과의 대담에서 "당신이 당신 아버지의 진심을 아느냐?", "일본을 위해 싸워주신 당신의 아버지께 감사한다."는 둥의 막장 발언으로 한국인들의 혈압을 상승시키는데 지대한 공헌도 했었다.[24] 결혼하느라 성이 바뀌어서 도조란 성은 통명이다. 일본 우익들이 재일 한국인이나 재일 중국인들이 통명 쓴다고 까댐을 생각하면...
일본 우익들이야 이 인간이 그 당시 최고지휘관의 심복이라 어쩔 수 없이 미화하지만, 우익에서도 '일본군을 말아먹은 졸장'이라고 욕하는 이들도 꽤 있다. 우익들조차 거론하기 싫어하는 무타구치 렌야라든지 츠지 마사노부 같은 인간을 유능하다고 써먹었으니 오죽할까?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최악의 졸장이라 말할 정도로 일반적인 무능함을 넘어 세계 근현대사 최악의 졸장인[25] 도미나가 교지한테는 의형제까지 맺었다. 도조 유코는 "저런 멍청한 부하들을 등용하여 아군을 무수히 죽이며 패전에 기여한 점은 어떻게 생각하슈?"라는 질문에 그래도 다른 유능한 부하들도 등용했다고 넘어가면서 반론조차 못했다. 물론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멍청한 부하에 대한 후한 대우를 생각하면...
인도인 펄 판사의 회고록을 원작으로 하여 그를 영웅시한 영화 프라이드가 만들어져 흥행에 성공한 바 있지만, 극우 단체들의 반복적인 관람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뿐이지 대중적 흥행은 영 별로였다 한다. 심지어 개봉 첫날에는 극장에 교련복 입은 시커먼 사내놈들이 우글거려서 일반 관객은 접근도 못하는 분위기였다고... 그리고 이 영화 감수 및 제작에 이시하라 신타로와 가세 히데아키[26] 가 참여했다.
우익적 견해로 유명한 베츠미야 단로는 도조를 가리켜 "그 놈은 인사계원으로나 쓸모 있고 지휘관으로서는 중대장조차 위험하다."고 적시했다. 실제로 도조는 연대장 시절에 인사계 이상으로 사병들의 처우와 복장에 솔선수범한 군인으로 평가받았다.
일본군 제17사단장이자 자신의 부대에 위안부를 전면 금지시켰던 히라바야시 모리토는 도조가 총리였을 당시 부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평가했다.
이 발언은 부하들이 숨겨서 도조와 히라바야시 둘 다 고인이 된지 한참 지난 2009년에야 드러난 발언이다.그 놈은 헌병사령관 정도만 하고 예비역으로 물러나야지, 총리로는 안 어울린다.
일본의 동양 사학계 거장이자 전쟁을 겪은 세대인 미야자키 이치사다 (1901년 ~ 1995년)는 자신의 저서인《중국통사》226 ~ 227 페이지에서 조조를 비판하면서 간접적으로 도조 히데키를 깠다.
조조의 정치 방침은 몹시 위태로운 것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이민족이 많이 섞인 군대의 힘을 이용해 이민족을 제압하고 군대로 하여금 납입시킨 곡물을 배급함으로써 군대를 복종시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 운용에 차질이 생기면 곧 위험한 파탄이 일어날 듯하다. 그러므로 이 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극도로 엄중한 법령의 실시가 불가결하게 된다. 그것은 평상시에도 사회 전체를 계엄령 하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조조의 정책에서 보이듯이 중국 중세 역사의 추이는 이민족 대책과 토지 정책의 전개가 주축이 되어 진행된다. 더욱더 이 두 가지 문제의 이면에 공통된 요소를 탐색하면 그것은 다만 부양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필사적 투쟁이 거기에 있다. 이민족에게도, 빈민에게도 보다 잘 살고자 하는 따위의 한가로운 소망은 없다. 심각한 불경기가 침투한 시대에는 이민족은 이민족대로 식량을 구해 방황하고 빈민은 빈민대로 직업을 찾아 유랑해야만 했다. 그렇다 해도 이처럼 비참한 밑바닥 생활자를 토대로 해서 상류층에는 우아한 귀족 계급이 번영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이것도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 계엄령이란 것은 받는 자에게는 도탄의 고통이지만 시행하는 측에는 그만큼 고마운 것도 없다. 그것은 일본의 전시 중 생활을 뒤돌아봐도 바로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조조와 도조 히데키는 능력의 차이와 무관하게 자신과 최측근들의 이익을 위해 자국 민중들과 다른 민족들을 탄압하고 쥐어짜 빈부격차를 더욱 심화시키고 국가의 문제점들을 악화시킨 공통점이 있다는 독설이다.
3.4. 한국[편집]
일제강점기를 겪었던 한국의 입장에서는 일제 군국주의 및 제국주의를 앞세운 만악의 근원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식에만 근거한 것이다. 왜냐 하면 도조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건 1936년 이후, 즉 한국 침략은 예전에 일찌감치 완료되고 한국에 대한 통치가 무단통치, 문화통치까지 다 끝나고 민족말살정책으로 진입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은 도조 히데키 수상 취임 이전부터 이미 제정신이 아닌 나라였다. 도조 히데키가 만악의 근원 취급을 받는 건 수상 취임 이전 육군대신 시절 주전파 대표로서 저지른 전쟁 선동 행각과 태평양 전쟁 개전에 책임이 있고, 이전에는 식민지나 전장의 사람들이나 겪는 고통을 본토에서도 겪게 한 것과 메이지 헌법 이래 큰 틀에서 지켜진 권력 균형을 현저히 위협했기 때문이다. 이미 일본은 중일전쟁 당시 38년에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법적으로는 본토건 식민지건 얼마든지 전쟁 목적을 위해 쥐어짤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은 본토 정부와 별개로 총독부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다스리던 곳이었다. 하지만 1943년 조선인 대학생들을 일본군에 강제징집시킨 것은 도조 히데키의 성명으로 나온 게 맞다. 본토 일본인과 다르게 조선인 대학생들의 경우 특별지원병제라고 해서 자원입대형식으로 징집했는데, 사실 말이 지원병제였을 뿐 징집에 응하지 않으면 가족들을 괴롭히거나 경찰들을 보내서 억지로 입대를 강요하는 등 사실상의 강제징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한 술 더떠서 당시 교육을 총괄하던 일본 문부성 또한 이 분위기에 편승해서 일본의 각 대학에게 지원병에 응하지 않는 조선인 유학생들을 강제로 제적시키라는 통첩까지 보냈을 정도였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정작 도조 히데키 본인은 조선이나 대만 등 식민지 출신의 학생들 징집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는 것. 다만 날이 갈수록 물자 및 인적 자원이 부족해지면서 결국 식민지 출신 대학생들을 강제 징집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다만 한국 대중매체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계몽사에서 80년대 나온 한국사 책에는 야사로서 머리를 빡빡 깎고 망상에 찌들어 미국을 공격한 광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미친 짓한 증거로서 연설할 때마다 깔개로 성조기와 유니언 잭을 썼다는 이야기를 싣고 있다.
그런데 몇 국사 교과서나 세계사 교과서에선 일제강점기 부분의 이토 히로부미, 세계대전 부분의 쇼와는 언급되지만, 도조 히데키는 나오지 않는다. 때문에 따로 알아보지 않았다면 누군지 모르는 학생들도 꽤 있을 수 있다.
여담으로, 고려대학교 전 총장 김준엽의 학창 시절 절친이었던 최기일 박사는 본인의 회고록에 직접 도쿄 유학 시절에 도조 히데키를 본 적이 있다고 밝혔다. 육군성에서 가까웠던 전철역인 이치가야역[27] 에서 전철을 탈 때 종종 육군성으로 출퇴근하는 일본군 장성과 장교들을 많이 보았는데 도조 히데키도 이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최기일은 전철역에서 실제로 본 일본군 장성과 장교들은 대체로 카리스마가 있고 나름 멋있어보인다는 인상을 주었는데 정작 이들의 대장격이었던 도조는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게다가 해방 이후 미국으로 유학갔을 때 미국에서 제작된 기록영화에 이들이 나오는 걸 봤을 때 오히려 초라하고 우둔해보이는 느낌을 줬다고 한다.
2023년 서현역 칼부림 사건 을 저지른 범인 최원종은 평소 자신의 글에 욱일기와 도조 히데키와 같은 전범을 옹호하고 찬양하는 등의 행동을 보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2
4. 대중매체에서[편집]
- 일본에서 1998년 제작된 〈프라이드 ~운명의 순간~(Pride: The Fateful Moment, プライド ~運命の瞬間~)〉이란 영화는 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회부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도조 히데키가 교수형에 처해질 때까지의 순간을 다루고 있으며, 내용이 무려 전쟁의 책임을 패전국 일본에 모조리 떠넘기려고 하는 연합국에 대해 도조 히데키가 법정에서 국가와 자신의 명예를 걸고 오직 혼자 싸운다는 스토리로, A급 전범 도조 히데키를 감동 실화 인간 드라마로 미화하는 쓰레기 영화다. 영화 속에서도 도조 히데키는 사형 직전까지 전혀 참회하지 않는다.
- 마이클 베이의 진주만에선 이름이 따로 언급되진 않지만 누가 봐도 도조로 생긴 인물이[29] 미국에게 결정적인 한방을 날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에게 일본에 과연 그런 공격을 할 능력이 있냐고 되묻는다. 이에 잠시 침묵하던 야마모토가 진주만을 기습하여 단 한번의 공격으로 미국 태평양 함대를 격멸하면 가능하다고 답한다.
- 2008년, TBS에서 1부 다큐멘터리와 2부 드라마로 구성된 2부작 특집극 '그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일·미 개전과 도조 히데키'(あの戦争は何だったのか 日米開戦と東条英機)를 방영하였다. 도조 역은 비트 다케시가 대머리 분장을 하고 출연 하였다. 니시다 토시유키나 아베 히로시등 유명 배우도 제법 나온다. 육군대신이자 개전파인 도조는 빨리 개전 하라며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대신을 압박하고 있었고,이에 총리와 내각은 버티지 못하고 총사퇴를 해버린다. 천황은 그 후임으로 도조를 지명하여 육군 내부의 강경파를 제어하려고 한다.
- 2019년 테레비 도쿄의 특집극 '두개의 조국'(二つの祖国)이라는 드라마에서도 등장한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2차대전기 일본계 미국인의 상황을 보여주는데 주인공인 겐지가 극동군사재판에 모니터 요원으로 참석 하는 장면이 있어서 도조 히데키가 등장한다. 비트 다케시가 다시 한 번 도조 역을 맡았다. 유명한 머리 찰싹 장면도 나온다.
- 미드 높은 성의 사나이 시즌 4에서 그의 초상화가 잠시 나온다. 추축국이 승리한 세계관이니 자신 때문에 죽은 식민지인들과 일본의 청년들이 어찌 됐건 천수를 누렸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초상화가 나온 시점이 일본이 식민지 경영 능력을 거의 상실하고[30] 정복한 미국 땅에서 철수하던 때였다는 것, 때문에 초상화는 나오자마나 봉인되면서 일제의 몰락을 상징하는 요소가 됬다.
- 만화 지팡구에도 나오는데 초기 연재분에서는 악의 축 그 자체로 묘사하고[31] 단 한 장면 나온 도조의 모습은 세밀화로 그린 악의 축 그 자체. 후기에는 매리애나 결전[32] 직전에 학도병 출전식 장면에서 다시 나오는데 전반부의 악마적 카리스마와는 달리 어느 정도 이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를 구현한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대놓고 부하들이 디스함을 알지만 이미 미쳐버린 군을 나름대로 제한하려면 강화는 위험하다는 의견, 즉 군이 완전히 미치게 만든 일본보다는 차라리 화끈하게 져야 낫다는 의견을 독백으로 제시한다.
- 도라 도라 도라에도 한 장면 나온다. 우치다 아사오(内田朝雄)라는 배우가 삭발을 하기 싫어서인지 뽀글파마 백발로 나와서 압권.
- 중국 인민해방군의 훈련용 FPS 광영사명에서는 왠지 도조의 얼굴을 한 자위대 병사가 적성군 일반 보병으로 등장한다. 게임의 초기 버전에선 미군으로 보이는 군대가 적성군이었건만 개발 와중 센가쿠 열도 같은 중일 관계 악화로 중간에 바뀐 듯. 이것 말고도 민간용 온라인 버전의 2차 대전 상하이 일본군 웨이브 미션에서도 일본군 병사들이 죄다 도조의 면상으로 등장한다.
- 게임 Hearts of Iron IV 일본 육군참모총장중 육군사기 전문가로 등장해 경험치를 조금씩 주면서 보급 소비율을 낮춰준다. 모드 The Road to 56에서는 일본 제국이 입헌군주정이라는 것을 반영하여 고노에 후미마로 이후 일본의 지도자가 된다. 또한 종종 해군 랜덤 초상화로 등장해서 도조 히데키가 지휘하는 일본 해군이라는 기묘한 조합을 볼 수 있다.
- 2차대전 시기에 일본군을 일컫는 멸칭 중 도조 히데키에서 따 온 “Tojo”가 있었다. 그래서 2차대전을 다루는 작품 중 이 단어를 쓰는 인물이 가끔 나온다. 대표적으로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의 등장인물 설리번 하사. 훨씬 유명한 멸칭인 “Jap” 대신에 Tojo만 주구장창 사용한다.
5. 어록[편집]
내 친구는 병졸 출신이지만, 나는 장군이오. 걱정할 거 없소.
스기야마 하지메가 작전이 정치에 질질 끌려가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자 한 대답.
전력 비율은 삼분의 일이라 해도 일본에는 세계 그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황국정신이 있습니다!
1941년 9월 일본과 미국의 전력차 비교 결과 도무지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육군성 군사과의 보고에 대한 답변[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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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이 위협당할 때 민족 간에 다툼이 일어나고, 국가 간에 불행한 전쟁이 시작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언뜻 보면 국제 정세를 냉철히 꿰뚫는 것 처럼 보이지만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주도해 일본 제국을 붕괴로 이끈 최악의 실책을 저질렀다는 것을 감안하면 모순적인 발언이 아닐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