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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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제3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츠
徳川家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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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1604년 8월 12일 ~ 1651년 6월 8일 (46세)
신장
157cm[1]
재임기간
1623년 ~ 1651년
원호
다이유인(大猷院)

1. 개요
2. 쇼군이 되기까지
3. 쇼군으로서
4. 인물됨과 일화
5. 대중 매체에서
5.1. 드라마
5.2. 만화
5.3. 게임



1. 개요[편집]


에도 막부의 제3대 쇼군.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오에요(스겐인)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2] 센히메는 그의 큰누이가 되고 스겐인의 어머니인 오이치는 외조모(外祖母), 아자이 나가마사는 외조부, 스겐인의 둘째언니 조코인은 백모(伯母), 스겐인의 첫째 언니 요도도노이모였다. 이부 누이는 사다코였으며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사다코는 도요토미 히데카츠의 장녀였지만 도요토미씨 멸망 이후 스겐인의 부탁을 받아 히데타다의 양녀가 되었다. 사다코는 공가(公家)인 구조 가문에 시집갔으므로 이에미츠는 구조, 니조, 천황 가문에는 외숙이 되었다.

에도 막부쇼군 15명 중에서 아버지의 적자[3]인 쇼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미츠 및 마지막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 세 명이었는데 그나마 쇼군의 적자로서 쇼군직을 계승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나중에 제도를 정비, 완성하고 이에미츠가 "나는 날 때부터 쇼군이다! 이에 반발하는 자는 ~"처럼 자신감이 넘친 말이 나온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4]


2. 쇼군이 되기까지[편집]


히데타다의 적자이자 장남으로 유력한 후계자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장자가 반드시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룰은 없어 센고쿠 시대에는 다이묘에게 여러 아들이 있으면 그 가운데 우수한 인물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래서 이에미츠는 쇼군이 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어야했다. 어린 시절에는 병약하고 얼굴도 못생긴 데다가 말까지 더듬었다고 하는데 유모(乳母)인 카스가노츠보네로부터 젖먹이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핌을 받았다.

어머니인 오에요가 차남인 쿠니마츠[5]를 더 총애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6] 명확한 증거는 없다. 하여튼 후계자 자리가 쿠니마츠가 될 뻔했던 것은 맞지만, 후계 자리에서 탈락해 폐적될 것을 우려한 카스가노츠보네가 목숨을 걸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직접 이를 호소한 덕에 이에야스가 장유유서의 원칙을 명확히 해 후계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도 전한다. 일개 유모가 천하의 오고쇼 이에야스와 독대해서 직소가 가능했다는 점에서 실은 이에미츠가 이에야스와 카스가노츠보네사이의 자식이었다고 보는 설도 있긴 하다. 다만 친자식끼리도 편애는 가능하고 오에요의 신분이나 성격을 감안하면 역시 진위성에는 의심이 간다.

이에야스는 이즈음 스루가의 슨푸 성에 거처하며 유학자들에게서 유학을 배우고 있었고, 손자간의 후계자 다툼은 나중에 도쿠가와 집안의 분란과 후환이 될 것을 염려해 유학의 장유유서의 서열을 정착시키고자 장손인 이에미츠를 후계자로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쇼군에서 물러나 오고쇼가 되어 아들 히데타다와는 이원 정치를 하고 있었지만, 큰 정책은 이에야스가 결정하고 있었다.[7]

당시 에도 막부의 가신들은 장남인 타케치요파와 차남인 쿠니마츠파로 갈라져서 후대의 쇼군이 누가되느냐로 분열 상태에 있었다. 카스가노츠보네와 면담을 가진 뒤, 1611년 10월 24일, 할아버지 이에야스는 에도 성으로 찾아와서 아들인 히데타다가 지켜보는 앞에 두 손자를 불러 이에미츠가 후계자라는 것을 확실시했다.

기록에 의하면, 타케치요[8]에게 이리로 오라고 상석으로 불러 앞으로 나와 앉으라고 했는데, 쿠니마츠가 따라 앉으려고 하자 이에야스는 "쿠니는 거기 있거라."라며 하석에 앉게 했다. 또 두 아이에게 과자를 대접하면서, "먼저 타케치요가 먹어라, 쿠니마츠는 그 다음."이라고 말했다. 이로써 도쿠가와 가문의 후계자는 이에미츠이며, 둘 사이에는 넘어서는 안 되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에야스는 두 아이의 어머니인 오에요에게 편지를 보내 쿠니마츠만을 편애하는 것을 질책하기도 했다.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이에미츠가 후계자로 선택된 것은 아버지 히데타다보다 할아버지 이에야스의 의중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분명한 듯 하다.[9]


3. 쇼군으로서[편집]


어쨌든 여러 곡절 끝에 1623년 쇼군이 되었지만 아버지 히데타다는 오고쇼가 되어 물러앉아 실권을 휘둘렀다. 그러다 1632년 아버지가 죽자 실권을 되찾아 친정을 실시했다. 쇼군으로서의 업적은 주로 막부의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안정시키는 데 힘을 쏟았는데 다이묘의 처자를 에도에 살게 함으로써 다이묘가 1년마다 에도와 영지를 왕래하도록 하는 제도인 참근교대를 실시한 것도 이에미츠의 시대였으며, 《무가제법도》를 개정하여 다이묘들의 권한과 자유를 대폭 제한하는 규정들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쇼군의 허락없이는 다이묘 가문끼리의 결혼이 금지당하였고, 다이묘들은 성을 새로 세우지 못하고, 기존의 성을 보수하거나 개수할 때도 반드시 쇼군과 막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또한 천황의 권한과 자유를 대폭 축소하여[10] 막번 체제에 위협이 되는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고자 노력했다.[11] 결국 에도 막부쇼군의 위세는 절정에 달해서 이에미츠는 도쿠가와 막부의 초기에 공이 많아서 특별 대우를 받던 다이묘들을 불러다 놓고 나는 날 때부터 쇼군이라는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12][13]

내 조부 이에야스와 내 아버지 히데타다는 그대들의 친구였으며, 그대들의 힘을 얻어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대들이 에도에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예를 갖추어 맞이하였으며, 때로는 직접 마중나가셨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쇼군의 신분이었다.

앞으로는 그대들을 다른 다이묘들과 마찬가지로 대할 것이다.

만일 이것이 불만이거든, 돌아가서 3년 내에 막부에 대항하라, 그러면 미약하지만 이 이에미츠가 상대하겠다.

이어서 다테 마사무네는 다음과 말을 하게 된다.

이에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이 마사무네에게 토벌을 명해 주십시오.

별로일 거 같은데[14] [15]

대외적으로는 다이묘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제한하기 위해 쇄국정책을 실시했으며 기독교 탄압을 더 강화했는데 이 때문에 1637년 시마바라의 난이라는 대규모 반란을 겪기도 했다. 다만 이 시기에 청나라조선, 네덜란드와는 교역을 계속했으며, 특히 조선 통신사를 가장 많이 맞이한 쇼군이 되기도 했다.[16]

이렇듯 에도 시대의 정치체제인 막번 체제를 완성하고 정권을 공고히 다진 후 1651년 에도에서 사망했다. 향년 48세. 그의 치세에 도쿠가와 막부일본 열도 지배는 굳건히 다져졌기에 일반적으로는 막부의 지배를 안정시킨 명군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지만, 다른 평가로는 "이에미츠 휘하의 유능한 가신들이 다한 일이고 이에미츠는 한 게 없다."는 비판도 있다. 실제로 이에미츠 수하에는 유능한 행정관료들이 많아서 이들이 막부의 안정에 크게 공헌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에미츠의 이복동생이기도 한 호시나 마사유키였다. 하지만 유능한 가신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도 군주의 역량 중 하나이니만큼 쇼군으로서의 능력은 확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치세는 조선의 인조(1623~1649), 효종(1649~1659) 재위기와 일치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원가광'(源家光)[17]이란 이름으로 나타나 있다.[18] 조선 통신사를 가장 많이[19] 맞이한 쇼군이기도 한데, 쇼군이 새로 즉위하면 통신사가 파견되는 것으로 정해진 것이 1655년부터였으며 그 전까지는 이런저런 명분을 적당히 가져다 붙였기 때문이다.[20]인조실록》에는 사행을 마친 통신사가 인조에게 보고한 내용이 쓰여 있는데, 1624년 통신사는 그를 "성격이 날카롭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해서 많은 이들이 원망하며 괴로워했다"며 사뭇 부정적으로 평한 반면 1636년 신사는 "용렬한 사람은 아니며 흉년을 만났을 때는 힘껏 너그러운 정치를 행했고 재화를 좋아하지 않아 평수길(平秀吉)[21]보다 훌륭하다고들 하더라"며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했다.

그가 죽은 후에는 장남 도쿠가와 이에츠나(재임 1651~1680)와 4남 도쿠가와 츠나요시가(재임 1680~1709) 각각 4·5대 쇼군을 역임했다.

4. 인물됨과 일화[편집]


조선성종이나 숙종처럼 밤에 몰래 시장통에 나오는 미행을 좋아해서 이와 관련된 일화도 많이 남겼으며 무예와 풍류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22] 특히 당대의 유명한 검호인 야규 쥬베이와는 그럭저럭 친밀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위태로웠던 후계자 자리를 지켜줘서인지 몰라도 할아버지 이에야스를 대단히 존경하여 때마다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발언을 자주 하고, 유언도 "나는 죽어서도 할아버님을 모시고 싶으니, 닛코[23]에 나를 묻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에미츠의 무덤은 이에야스의 무덤 근처에 있다. 오죽하면 이에미츠가 쇼군이 된 후 "간밤에 할아버님을 꿈에서 뵈었다."면서 그리게 한 <영몽(霊夢)도>가 현재에도 여러 점 남아있다.

몸은 대체적으로 병약해서 몸이 아플 때마다 "이불을 5, 6겹이나 껴 입고 잤다."고까지 했을 정도. 거기다가 입도 짧아서 카스가노츠보네가 식사 때 일곱 가지 밥을 준비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기가 센 어머니에게 질린 나머지 여성들, 그중에서도 신분이 높은 여성들을 싫어하게 되어 미다이도코로였던 정실 다카쓰카사 타카코와는 신혼 초부터 거의 별거하다시피 했다. 거기다 남색가여서 유모 카스가노츠보네와 이모 조코인이 후계자를 얻기 위해 아름다운 여성을 소개시켜 이에미츠의 관심을 끌려 했다. 그러다 카스가노츠보네가 조카인 오후리노카타(お振の方)를 남장시켜 소개해주었고, 이게 통했는지 이에미츠는 오후리가 어른이 되자[24] 측실로 들였다. 오후리 사이에서 딸을 낳은 뒤 그렇게 자식들도 보고 여성혐오증도 가라앉게 되었다. 정실인 타카코와 다르게 측실들에게 잘해줬고, 특히 오만노카타를 가장 총애했다. 그러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들들 쪽 후손은 증손에서 허무하게 끝났다. 매체에서 오만노카타가 주인공이어서 이에미츠의 딸이 존재하지 않는 거 마냥 묘사되는 것과 다르게 딸 쪽 후손인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은 21세기 현재까지 남아있다.

전국시대에 살아남은 인물인 다테 마사무네, 도도 다카토라, 타치바나 무네시게 등을 존경했으며 그 당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마사무네에게 당시 지나치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대우를 해줬으며 "나는 날 때부터 쇼군이다!"이라는 말도 마사무네의 조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에미츠의 성인 이름을 골라준게 마사무네였다고 한다.


5. 대중 매체에서[편집]


막부를 번영시킨 명군이라는 위치에 있는 데다가 출생에 얽힌 비화나 쇼군직에 있을 때 남긴 많은 일화들과 맞몰려 지금까지도 일본시대극이나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만화게임 등 2차 창작물에도 자주 등장한다.


5.1. 드라마[편집]




5.2. 만화[편집]


요시나가 후미대체역사 만화 《오오쿠》에서는 유모 치마폭에 싸인 한심한 어리광쟁이 정도로 묘사된다. 이에미츠가 젊은 남자만 걸리는 전염병에 걸려 죽자, 카스가노츠보네는 이에미츠의 사생아 치에를 이에미츠의 손자를 낳는 씨받이로 만든다. 타다나가가 일년정도 더 버텄으면 그러나 치에가 낳은 아이는 전부 딸이였고 치에가 쇼군 대리로써 너무 온건하고(...)[25] 유능했기에 가스가노 츠보네가 죽자 치에는 다이묘들에게 진실을 밝히고 정식적으로 여소군 이에미츠로서 정책[26]을 펼친다. 그런데 그뒤로도 아이들[27]을 낳으며 살지만 요절한다. 진짜 이에미츠 딱히 한 일도 없는 걸로 보이는데 마사카츠는 치에 앞에서 진짜 이에미츠가 쇼군으로 훌륭했다며 닮았다고 구라말 같지도 않은 칭찬을 하지만, 이에미츠의 실제 업적은 여기서 치에가 다 했다. 진짜 이에미츠의 정실과 친누나들을 포함한 도쿠가와 사람들과 지인들은 치에가 진실을 알렸는데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시구루이》는 시대적으로 이에미츠의 치세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작품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스루가 성 어전시합의 주최자이자 제1화에서 미리 보여준 바와 같이 이후 할복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스루가의 암군 도쿠가와 타다나가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이에미츠의 동생 쿠니마츠다. 이에미츠는 타다나가와는 그간에 악연이 있었던 탓인지 할복이라는 형식으로 제거해 버렸지만, 이복동생인 호시나 마사유키를 매우 총애하였고, 그를 중신이면서도 아이즈 번의 다이묘로 발탁하였다.

스마일 프리큐어!》 16화에서 문제집과 융합한 아칸베큐어 마치와의 퀴즈 대결에서 역사문제로 등장. 그러나 역사에 약한 큐어 마치는 답으로 도쿠가와 이에난토카[28]로 대답해 아칸베에게 처절한 응징을 당했다. 이 분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뒤늦게 도착한 큐어 뷰티는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한 덕에 같은 문제가 나오자마자 바로 맞춰 역으로 아칸베를 털었다. 한국판에서는 [[태조(조선)|이성계],][29] 북미판에서는 13대 대통령인 밀러드 필모어로 로컬라이징 되었다.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애니메이션》 9화에서도 미무라 카나코가 맞춘 퀴즈의 정답으로도 나왔다. 프로그램 녹화 전에 카나코가 퀴즈 프로그램 예상문제의 답으로 에도시대 역대 쇼군들의 이름을 외웠는데,[30] 우연히 퀴즈에서 "도쿠가와 막부 3대 쇼군은 누구?"라는 문제가 나왔던 것.

가정교사 히트맨 REBORN!》의 등장인물 사와다 이에미츠 이름이 이 인물에게 따왔다.


5.3. 게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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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혁신 기준으로 지력 73, 정치 84만 좀 괜찮고 통솔과 무용은 5, 60대를 찍는 그저 그런 인남캐. 능력치가 자기 아버지 판박이다. 어차피 군웅집결 아니면 최후반대에 등장하니 볼 일도 얼마 없다.

Fate/Grand Order》의 도쿠가와 이에미츠(Fate 시리즈)는 해당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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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패로 추정한 키.[2] 사실 이에미츠 이전에 히데타다와 시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나가마루)이 하나 있었는데 2세때 요절했다.[3] 첩이 아닌 정실 소생[4] 드라마 《오오쿠》 제1장에서는 이에미츠가 "나는 타고난 쇼군이다!"라고 발언하는 장면으로 재현했다.[5] 도쿠가와 타다나가의 아명[6] 오에요가 차남을 편애한 것은 남편인 히데타다와 오후쿠(카스가노츠보네) 사이를 의심해서, 그 질투로 오후쿠가 기르다시피한 장남 이에미츠까지 싫어했다는 이 있다.[7] 사실 이에야스는 쇼군직을 단 2년만 했었다. 하지만 그 고생을 해서 거머쥔 천하를, 단 2년만 해먹고 은퇴하려겠는가.[8]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아명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부때부터 내려온 장자에게 내려지는 아명이다. 따라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어릴 적엔 마쓰다이라 타케치요라는 이름이었다.[9] 물론 히데타다 또한 이에야스 사후에도 후계자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대로 이에미츠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정한 것을 보면 히데타다 역시 최소한 이에미츠를 후계자로 삼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0] 이를 규정한 성문법이 《금중병공가제법도》인데 내용이 참 걸작이다. 대표적으로 "천자(천황)는 여러 업무 중에서도 학문이 제일이라(즉, 정치는 꿈꾸지 말고 학문이나 하란 뜻)", "섭관(섭정관백) 가(家) 출신이라 하더라도 무능한 자는 섭관에 임명되어선 안 된다. 하물며 그 외의 자야 오죽하랴"[11] 실상은 오고쇼도쿠가와 히데타다천황 권한이나 《무가제법도》 제정을 로쥬와 상의하여 처리한 것이었다. 반포만 쇼군의 이름으로 한 것이었다.[12] 이 말을 제공한 사람이 다테 마사무네이다.[13] 쇼군의 경우에는 관위는 관위에 해당하는 자리에 따라 바뀌지만 그래도 일단은 중앙에서 내리는 자리이고 그만큼 거의 원칙상으로는 혈통에 따라 갈리는 면이 많았다. 아니, 애초에 일본은 헤이안 시대부터 가문에 따라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정해졌고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세와 공헌이 뒤따라야 했으며 이것도 전국시대 같은 대혼란기에나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이에미츠의 "나는 날 때부터 쇼군이다!" 발언은 "우리 가문은 쇼군 집안이다!" 라는 의미인 셈. 도쿠가와 가문은 본래 마츠다이라 가문으로 시작했지만 이 마츠다이라 가문은 본디 지방 호족 출신이나 다름없는, 어찌보면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집안이었음에도 이런 발언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 에도 막부와 쇼군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말을 제공했다고 알려진 다테 마사무네의 다테 가문은 슈고 다이묘로 시작해 센고쿠 다이묘가 된 집안으로 그 격은 당연히 마츠다이라-도쿠가와 가문보다야 높았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자리에서 시작한 다케다 가문은 아예 아시카가 쇼군가의 분가출신이니 말 다했다.[14] 다테 마사무네는 행정은 좋은데 군사적 능력이 영 별로였다. 어찌나 군사적 능력이 별로였던지 한 일화로 우에스기 가의 나오에 카네츠구와 마주쳤을 때 신분상 다테가 위이기에 당연히 나오에가 인사를 해야 했음에도 인사도 않고 지나가려고 하자 다테가 나오에를 불러다 따지자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 몰라뵈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는데 사실 당연히 얼굴을 모를 리는 없었고 이는 "님이 전투 때마다 패하고 달아나는 것만 봐서 얼굴이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을 돌려 말한 것이다. 허나 어쨌든 겉으론 몰라뵈어서 못 알아봤다며 사과를 하였던 까닭에 다테는 화는 나지만 그냥 돌려보내야 했다고 한다.[15] 다만, 위의 사례는 이에미츠의 시대에 와서는 하찮은 일화에 지나지 않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이에미츠가 즉위하던 1623년 시점을 기준으로 마사무네의 맞수라 할 수 있을 만큼 군사적 경험을 쌓은 '대영주'는 쿠보타 번의 사타케 요시노부 정도가 있을 뿐이었고 그 이외에는 없다시피했다. 막부에서 마사무네를 막기 위해 동원할만한 경험 많은 '무장'은 호소카와 타다오키, 타치바나 무네시게, 와키자카 야스하루, 도도 다카토라 정도가 있었다. 마사무네의 군사적 능력을 폄하하는 일이 많지만, 현실적으로 마사무네 만큼 경험이 풍부하고 세력이 강력한 대영주가 그 시기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궁정에서 쇼군과 다이묘들 앞에서 마사무네가 한 발언은 허언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무게감 있는 것이었다.[16] 보통 통신사는 쇼군이 새로 취임할 때 파견되지만 그것은 6차 통신사인 1655년부터의 일이었고, 그 이전까지는 쇼군의 아들이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거나 태평성대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는 것을 축하한다는 등 갖가지 명목으로 보내졌다. 이에 이에미츠는 1624년(3차), 1636년(4차), 1643년(5차) 통신사를 맞았으며, 1636년에는 "통신사를 두 번 맞이하다니 이건 아버지나 할아버지도 못 하셨던 일이다."라며 기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7] 미나모토노 이에미츠[18] 도쿠가와씨는 미나모토씨, 즉 세이와 겐지 중의 카와치 겐지 계열 닛타씨의 후예를 자칭했는데 그 영향으로 보인다. 현대 일본에서는 '성씨'라고 하면 '묘지'(名字)밖에 없지만, 전근대에는 이미 고대부터 시행된 우지•카바네(氏姓) 제도에 의해서 우지(氏)와 묘지, 두 가지의 성씨가 따로 있었다. 즉 도쿠가와(마츠다이라) 가문의 경우, 우지는 미나모토(源), 묘지는 도쿠가와(마츠다이라)였던 것. 다만 천황에게라던지 하는 공식적인 자료나 장소에서는 우지를 썼다. 애초에 우지 • 카바네 제도가 시행될 때 우지는 천황이 내려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에도 시대 쇼군들은 바쿠후에서는 도쿠가와라는 성을 가진 다이묘들의 우두머리, 조정에서는 미나모토라는 성을 가지며 천황에게서 임명받은 쇼군 직을 맡고 있는 신하가 되는 것이다. 도쿠가와가 미나모토씨를 자칭했던 것은, (실은 거짓이지만) 관례상 미나모토씨만이 쇼군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19] 1624년, 1636년, 1643년[20] 정황상 외교적 수사일 가능성도 다분하며 대마도주가 통신사에게 전한 말이기에 이에미츠 본인의 말이 아닐 가능성조차 있으나, 이로 인해 "통신사를 이렇게 여러 번 맞이한 것은 아버지나 할아버지도 못 했던 일이다"고 했다고도 한다.[21] 도요토미 히데요시[22] 인물상은 조선성종과 닮은 점이 많다. 자신의 치세가 자기가 다스린 나라의 안정기였다는 것도 그렇고, 많은 일화를 남긴 것도 그렇고, 주변에 유능한 신하들이 보좌를 했다는 점 등... 특히 여자들과 얽힌 이야기가 많다는 것. 기가 센 어머니를 두었다는 것과 뒷바라지 해 준 여인의 덕을 봤다는 것도 공통점. 중국의 황제 중에서는 북송의 인종과도 비슷한 면이 많다.[23] 이에야스의 무덤인 동조궁이 있는 곳[24] 현대 성인인 20대가 아닌 그 당시 어른으로 대우받는 10대 초반.[25] 치에가 사형을 내리거나 유배를 보내지도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에츠나(치에 딸) 때 유배 보낸 사람이 있다고 나온다. 나쁜 짓은 전부 카스가노 츠보네나 가신들이 다 하는 걸로 나오는데 정황상 둘한데 보고도 하지 않고 묻히는 걸로 보인다.[26] 남자만 죽는 적면창포도 다이묘 가도 피해갈 수가 없어서 여식을 남장해 쇼군에게 인사드리는 판에 가문의 대와 영지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남/녀 가리지 않는 상황이 받아들이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27] 꽤 다산했지만 무사히 성인이 된 아이는 세 명 밖에 되지 않았다.[28] 직역하면 도쿠가와 이에뭐시기(...).[29] 사실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도쿠가와 막부 3대째 장군이라는 걸 생각하면 조선 3대째 왕인 이방원이 더 알맞았을 듯 하다.[30] 한국으로 치면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운 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