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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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徳川家達(とくがわ いえさと)

1863년 8월 24일 출생, 1940년 6월 5일 사망. 도쿠가와 종가의 16대 당주. 또한 도쿠가와 고산쿄의 일원인 타야스(田安) 도쿠가와(도쿠가와 가문의 분가) 7대 당주이며 시즈오카번의 초대(初代) 번주였다. 작위는 종1위대훈위공작. '16대님'으로 불리었다고 한다.[1] 제4대에서 제8대 귀족원의장(약 30년간), 워싱턴 군축회의전권대사, 1940년 도쿄 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 제6대 일본적십자사 사장, 화족회관관장, 가쿠슈인 평의회의장, 일미(日美)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아명은 카메노스케.


2. 행적[편집]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3번째 정실 텐쇼인(아츠히메)이 자신의 아들처럼 키웠다. 14대 쇼군 이에모치는 차기 쇼군으로 이에사토를 지명했지만, 결국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15대 차기 쇼군이 되었다. 요시노부보다 이에사토가 이에모치와 훨씬 핏줄이 가까웠지만, 2차 조슈 정벌에서 패전하여 위기에 빠진 막부 입장에서는 고작 3살에 불과한 이에사토를 쇼군으로 내세우기 어려웠다.

아츠히메의 고향이 사츠마 번이었기 때문에 사츠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에사토의 부인 고노에 히로코는 고셋케 고노에 가문 출신으로, 히로코의 어머니가 사츠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수양딸이었던 등 고노에 가문은 사츠마 시마즈 가문과 깊은 관계를 가졌다. 아츠히메가 이에사다 시절부터 쇼군가에 막후 영향력을 가졌던 것이 더해져서, 아츠히메가 도쿠가와 쇼군가를 집어삼키려고 했다는 음모론이 생겼다.

쇼군 요시노부가 메이지 신정부에 대한 저항을 포기할 때 신정부측이 내세운 협상 조건 중 이에사토에게 도쿠가와 종가 가주를 넘기는 것이 있었다. 요시노부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와 후손들은 요시노부 가문으로 따로 독립, 이에사토가 도쿠가와 종가를 이어받아 공작위를 받았다. 요시노부는 한참 늦은 1902년 본가와는 따로 공작위를 받았다.

지멘스 사건으로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이 총사퇴한후 후임 총리의 물망에 올랐으나 본인이 고사하였던 적이 있다.

젊었을 때 영국 이튼 칼리지에서 유학생활을 보낸 것도 있어서 정치적 성향은 친서방 국제주의, 평화주의에 가까웠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일본 사절단을 이끌었고 조약의 10:10:6 비율을 지지하여 군부 내 우파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막부 멸망 이후 도쿠가와 종가의 첫 번째 가주라는 자부심이 강해 도쿠가와 종가 16대 가주로 불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가문을 멸망시킬 뻔 했지만 자신은 도쿠가와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자부하기도 했다. 요시노부가 공작가로 독립하기 전까지 이에사토는 종가 가주로서 요시노부 및 그 가족에게 강한 장악력을 가졌다.

동성애 성향이 있어서 화족회관의 급사와 성관계를 맺고, 그러한 일이 거듭되어 급사에게 문제가 발생해 1917년에, 이 추문에 대한 입막음료로 1만엔을 지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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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사토는 자신이 '메이지 이후 새로운 도쿠가와 가문의 초대 당주'이지 도쿠가와 쇼군 가문의 16대가 아니라고 공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