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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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32호
서울 독립문
서울 獨立門
Dongnimmun Arch,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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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941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역사사건
면적
1,644㎡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대한제국, 1896년 ~ 1898년
위치




파일:독립문2.jpg

독립문
1. 개요
2. 설립 배경과 과정
3. 편액 글씨에 관해
4. 사건사고
5. 독립문의 이름에서 따 온 것들
5.1. 의류 회사 P.A.T의 예전 브랜드
6.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독립문() 또는 서울 독립문은 대한민국의 사적 제32호로, 조선 말에서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1896년부터 1898년에 걸쳐 완공된 기념문이다.[1] 양식은 유럽식 개선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문의 기능을 수행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 기념비(monument)로서 만든 것이다. 크기는 높이 14.28m, 너비 11.48m이다.

청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로 독립협회가 건축한 건축물이다. 원래는 영은문이 있던 자리였는데 청나라가 유럽 열강에 식민지화 되자 독립협회가 영은문을 강제로 헐어버렸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독립군가에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라는 가사가 나오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독립문의 디자인은 서재필이 담당했다. 현재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립 당시의 위치는 아니다. 금화터널, 사직터널을 잇는 현저고가차도 공사를 위해 원래 위치보다 서북쪽으로 70미터 정도 들어 옮겼다. 원래의 위치는 현재의 독립문역 사거리 중심부이다.

2. 설립 배경과 과정[편집]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청은 이 전쟁에서 패전하고 말았다. 이듬해에 청일 간의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훼손하는 조공관계의 폐지를 선언하면서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했다. 이제 조선 내부에서도 동네북이 되어버린 청나라와의 관계를 재편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조선 국왕이 직접 나가 칙사를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이 철거되었다.

동시에 조선 조정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지면서 갑오개혁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친일 인사들은 모두 복권되고, 박영효는 같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한때의 동지인 서재필에게 조선으로 건너올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그 서재필이 1896년 1월에 조선으로 와서 중추원의 고문[2]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진행한 것이 독립문 건립 운동이었다. 그러나 2월에 아관파천이 벌어져 상당수 친일 관료들이 입지를 잃거나 숙청되었는데, 서재필은 미국인으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입지를 보존할 수 있었고, 이후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이 《독립신문》은 정부의 재정 지원금 4400원이 들어간 만큼 친정부적 어용신문이었고, 이 와중에 생성된 단체가 독립문 건립 추진위원회이다. 그리고 이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가 바로 이후의 독립협회의 모체가 된다. 즉,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쌓은게 아니라, 독립문을 쌓기 위해서 독립협회를 만든 것이다. 단적으로 이 독립문 추진 위원회 시기는 당시 정부 관료 중에서도 외교적 역할을 하던 정동구락부 출신 인사들이 많았다. 그리고 1896년 5월 일본러시아의 관계가 호전되고[3], 반면에 러시아와 조선 관계는 슬슬 틀어지기 시작했다. 때문에 대외적으로 독립을 밝힐 필요는 더 커졌다.

그래서 1896년 7월에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를 기반으로 해서 독립협회를 창설했고 회장에는 안경수, 위원장으로는 이완용을 정했다.[4] 서재필은 고문이었고, 동농 김가진, 월남 이상재 등의 고위 관료와 명사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는 독립협회건 《독립신문》이건 죄다 친정부 성향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서재필은 1896년 초부터 《독립신문》에 독립문 건설의 당위성을 계속 주장했다.

조선이 몇 해를 청나라의 속국으로 있다가 하나님 덕에 독립이 되어 조선 대군주 폐하께서 지금은 세계의 제일 높은 임금들과 동등이 되시고, 조선 인민이 세계에서 자유로운 백성이 되었으니, 이런 경사를 그저 보고 지내는 것이 도리가 아니요, 조선 독립된 것을 세계에 광고도 하며, 또 조선 후생들에게도 이때에 조선이 분명하게 독립된 것을 전하자는 표적이 있어야 할 터이요. 또 조선 인민이 양생을 하려면 맑은 공기를 마셔야 할 터이요, 경치 좋고 맑은 데서 운동도 하여야 할지라.

1896년 7월 4일, 《독립신문》

이를 위해 서재필은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을 토대로 기본 스케치를 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독일 공사관 출신 스위스인이 설계를 했으며, 시공은 한국인 건축가 심의석이 담당하였다.[5] 건설 비용은 독립 신문과 독립협회가 모금 운동을 벌여 얻은 성금과 왕실의 기증으로 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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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공 직후 독립문
이후 조선인 건축사 심의석이 건축을 맡아 1896년 11월 21일 영은문 부지에서 공사에 돌입했고,[6] 이후 고종이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해 동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했고,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충실하게 이를 지지했다. 그 후 1897년 11월에 완공된 독립문은 대한제국의 문이 되었다. 한글과 한문으로 적힌 현판 아래에는 대한 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이 새겨졌다. 태극기 또한 새겨져 있는데, 이 태극기가 소위 말하는 '독립문 태극기'이다.[7] 하지만 이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서재필이나 박영효와의 문제로 대한제국과 틀어지게 되었다.

그 후 대한제국의 국권을 피탈한 일본은 독립문 건설의 배경을 눈여겨보고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인들을 청나라의 지배로부터 독립시켜 주었다.'라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근거로 이용하려고 강점기 내내 독립문을 철거하지 않았다.



국방TV에서 다룬 독립문 영상

1979년, 구자춘 서울특별시장성산로[8]를 건설하는 건설하는 과정에서 현저고가차도와 금화터널 예정지가 독립문 부지와 간섭되자, 이를 이격시켜 고가도로를 놓기 위해 그냥 통째로 들어 옮겼다. 1979년에 성산로 공사로 인해 본래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미터 정도 이전했다. 이에 대해 코미디언 전유성"차라리 고가를 돌아가게 만들자는 마음이 관광 상품을 만드는 것"이라는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독립문 고가 차도를 철거하고 원래대로 복원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문제는 독립문 고가 차도가 일산, 운정, 행신, 가좌동, 연대앞을 비롯한 수도권 서북부 지역과 광화문 도심을 연결하는 메인 간선 도로라서 반발이 엄청날 게 뻔해서 복원이 어렵다. 일산, 운정을 기점으로 하는 대부분의 서울역행 광역 버스가 이 독립문 고가 차도를 지나갈 정도로 중요한 도로이다.

그런데 이전하기 전에는 순수한 석조물로 알고 있었으나, 뜯어 보니 내부는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것이었다. 돌 현판 글자는 당시에 지금과 달리 한글도 우에서 좌로 썼기에 '문립독'이라고 되어 있다.


3. 편액 글씨에 관해[편집]


현재 독립문의 편액 글씨를 누가 썼는가에 대해선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는 이완용이 썼다는 것과 둘째는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이 썼다는 것이다.


3.1. 이완용[편집]


이완용이 썼다는 근거의 기록은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에 게재된 〈내 동리 명물〉이란 고정 연재물에 실린 뿐이다.

《이완용 평전》을 쓴 윤덕한은 독립문의 글씨는 이완용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100% 이완용 글씨입니다. 정동파가 중심이 돼 창립한 독립협회지요. 외부 대신 이완용은 발기인 가운데 보조금도 가장 많이 냈고 위원장이 되어 독립문 건립을 주도했어요. 김가진도 발기인이긴 했지만 그는 친일파였어요. 정동파가 주도한 사업에 현판 글씨를 쓰겠다고 나설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이완용이 남긴 한문 자료는 서예, 자서전 등 지금도 많지만 한글로 쓴 자료는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필적 대조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3.2. 김가진[편집]


친일파 연구 전문가 정운현은 편액을 쓴 사람이 이완용이 아니라는 증거로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자서전인 《일당기사》에 따르면, 이완용이 66세 될 적인 1923년 1월 11일 직지사에 대웅전, 천왕문 등 두 개의 편액을 쓴 건 소상히 썼음에도 독립문 글씨와 관련된 것은 한 줄도 없다.

둘째.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 〈내 동리 명물〉에 실린 독립문 관련 글의 신뢰도에도 문제가 있는데, 이 글은 정식 취재 기사가 아닌 당시 교북동에 살던 한 주민의 이야기를 실은 것이라 근거가 부족한 면이 있다.

셋째. 독립문 편액은 한글, 한자 할 것 없이 이완용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완용의 친필 서체는 주로 해서체이고 획이 날카로운 반면, 독립문 편액은 글씨 획의 끝이 뭉텅하여 선이 굵고 힘찬 것이 특징이기 때문이다.


김가진의 손자인 김자동[9]은 2010년에 한겨레와 중앙선데이에서 김가진이 쓴 글이라고 주장했다.

독립협회 결성의 주역 중 한 사람이던 할아버지는 당대 명필로도 꼽혀 서대문 밖에 세운 ‘독립문’의 한자·한글 제자 모두 쓰셨다. 비원에 있는 현판도 대부분 할아버지 글씨다. 독립문의 제자가 ‘역적’ 이완용의 글씨로 일부 잘못 알려져 있는데, 육안으로 서체만 비교해도 틀린 주장임을 알 수 있다.

《한겨레》 2010년 1월 3일자 기사: 〈길을찾아서 - 일본 작위 내던지고 망명한 할아버지 / 김자동〉 중에서 #


우리 집안에서는 당연히 할아버님(동농 김가진·1846 ~ 1922) 글씨로 알고 있습니다. 강단이 남달랐던 어머니(정정화·1900 ~ 1991)의 회고록 장강일기에도 한문과 한글 현판을 정성 들여 쓰셨다고 나와 있고요. 어머니는 홀로 상하이에 건너가 시아버지를 모셨어요. 할아버님은 1903년 중추원 부의장으로 계셨을 때, 비원 감독직을 맡아 창덕궁 모든 현판 글씨들도 쓰셨습니다.

《중앙SUNDAY》 2010년 9월 18일자 기사:〈일제의 만행 증언하는 사형장 앞 ‘통곡의 미루나무’〉 중에서 #


제3자인 서예 전문가 김선원은 중앙SUNDAY 기사에서 독립문의 ‘문 문(門)자’와 ‘설 립(立)자’의 체형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이완용의 글이 아니라고 단언했으며 이완용 글씨로 알려진 경복궁 함원전 현판 글씨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완숙한 독립문 글씨와는 체형과 서법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 증거로 김가진이 1903년에 창덕궁 후원감독을 맡아 쓴 몽룡정, 부용정, 애련정, 희우정, 금마문, 폄우사, 운경거 등의 편액 역시 전부 글씨체가 뭉텅하며 예리하지 않은 스타일이다. 이는 독립문 편액 글씨체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미스테리를 풀 핵심인 독립문의 한글 현판은 현재 김가진이 쓴 한글 친필이 전무한 관계로 비교의 대상은 한문 편액밖에 남지 않는다.

독립협회는 출범 뒤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바꾸면서 현판을 내걸었는데, 현재 현판은 전해진 것이 없으나 1897년 5월 25일 《독립신문》 잡보에 따르면 태자 시절의 순종황제썼다. 또 1898년 1월 25일자 《독립신문》 잡보에선 당시 황해도 관찰사인 김가진이 독립문에 관심을 지녔을 것이라는 내용도 나온다.

황해도 관찰사 김가진 씨가 해주 먹판을 금번에 새로 만들어 먹에 박아서 전국에 반포했는데. 그 먹 전면에는 제국 독립문(帝國獨立門)이라 박아 도금 했고 후면에는 독립문을 온통 모본하여 박고 국기와 독립문에는 또한 도금을 했더라. 물건에 까지 이렇게 판각했으니 김씨의 마음에 독립이자 사랑하는 것을 깊이 치사하노라. 전국 인민이 일심으로 애국하여 독립이자 생각하기를 이 먹에다 각(刻)한 것과 같이 함을 우리는 바라노라.

1898년 1월 25일자 《독립신문》 잡보

독립문의 글씨를 누가, 언제 썼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므로 서체 고증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정운현은 위와 같은 견해들을 종합해 보아 김가진의 것이 맞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4. 사건사고[편집]


파일:인공치하 독립문.jpg
파일:북한군 독립문.jpg
북한군 서울 점령 당시 독립문에 걸린 선전 문구
1.4 후퇴 이후 서울을 재점령한 북한군이 영은문 주춧돌에 인공기를 부착하는 모습
  •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기간 동안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라는 현수막과 인공기와 함께 스탈린김일성의 초상화가 걸렸다. 이 밖에도 북한군이 영은문 주춧돌에도 인공기를 부착하기도 했고, 총탄 사례로 인해 난간이 떨어져나가고 영은문 주춧돌에도 총탄 자국이 남기도 했다. 이는 1958년 복원 공사때 복구되긴 했다.

  • 1993년 12월 13일에 전국 농업대학교 대표자 협의회(전농련. 한총련 소속.)가 독립문 옥상에 올라가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에 연행된 사건이 있었다.링크

  • 2004년 12월 20일에는 전농 소속 농민들이 쌀개방 반대를 외치며 독립문 위에 올라가 시위를 벌였지만, 역시 경찰에 연행됐다.링크

  • 2008년 1월 24일에는 인권단체들이 독립문을 점거해 시위를 열 계획이었지만 오르는 것에는 실패했다.링크


5. 독립문의 이름에서 따 온 것들[편집]



5.1. 의류 회사 P.A.T의 예전 브랜드[편집]


구 평안섬유공업, 현 평안엘앤씨에서 1971년에 PAT(Pyong-An Textile의 약어)로 이름을 바꾸기 전까지 사용한 내의 브랜드명이다. PAT로 바꾼 이후에도 한참 동안 독립문 PAT라고 친숙한 브랜드명을 함께 사용했다. 지금은 코뿔소 모양 상표를 쓰고 있다. 창업주 일가는 고향이 평안도독립운동에 투신한 경력이 있다. 평안섬유공업, 독립문이라는 이름도 이 경력으로 인해 쓰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초반 당시에 "여성용 빤쓰는 독립문표, 남성용 빤쓰는 쌍방울표"라는 화장실 유머도 있었다.


5.2. 대한민국 육군 제1공병여단 독립문부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1공병여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3. 1984년작 KBS 대하드라마[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독립문(드라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여담[편집]



  • 독립문 아치 좌측에는 작은 문이 있고 그 문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10] 과거에는 독립문 내부에 일본 귀신들이 산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안으로 들어가면 파리의 개선문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좁고 가파른 계단이 있는데, 꼭대기에 올라가면 콘크리트로 된 바닥이 나온다. 다만 평소에는 문이 잠겨 있는 듯 하다.

  • 근처에 있는 대신고등학교 정문이 독립문과 매우 흡사하다. 이름은 '旺熙門'(왕희문)[11]이다.

  • 서재필의 출생지인 보성군에 독립문 1:1 실사 모형이 있다. 문덕면 용암리에 있는 서재필 기념 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광주에서 벌교로 가는 시외 버스를 타고가다 보면 아주 잘 보이니 참고.

  • 대한민국 육군 공병해군 공병(구 시설) 병과 휘장이 독립문에 별이 들어간 형태였으며, 현재 육군은 서양성곽이 들어간 형태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육군의 공병가에도 독립문이 언급된다. 미합중국 육군이 서양식 성채 형태의 문양을 공병 병과휘장으로 쓰고 있어 이를 본뜨다 보니 얼추 분위기가 비슷한 독립문의 디자인을 쓴 것이라 추정된다. 해군은 형태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중이다.

  • 자음동화의 예시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독'의 종성 ㄱ과 '립'의 초성 ㄹ이 만나 '[동닙]'으로 발음되는 '상호 동화'에 이어, '[동닙]'의 종성인 ㅂ과 '문'의 초성인 ㅁ이 만나면 ㅁ 소리가 덧나 [동님문]으로 발음되는 '비음 동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몇 안 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 무한도전〉 세계 일주 특집에서 파리 개선문 대용으로 촬영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공사 중이었다.

  • 한때 인근 교통 표지판에 로마자 표기를 Dogribmun이라고 써 놓아서 조롱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12] 그대로 하면 '개(dog) 갈비뼈(rib) 문'이 된다.(…) 이후 로마자 표기법의 개정에 따라 Tongnimmun을 거쳐 현재는 Dongnimmun이 되었다. Dogok과 비슷한 경우.

  • 희망의 요소(영화)의 주요 촬영지로 나왔다. 독립문 뿐만 아니라 서재필 동상과 독립관도 나온다.

  • 한국의 시계 제조 업체 HARRIOT의 로고는 독립문에서 따온 것이다.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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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재청 공식 문화유적총람에 의하면 1898년 1월 건축이다[2] 이 시기의 중추원은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일본의 영향력을 피할 수 없었다.[3] 이 과정에서 로마노프 - 야마가타 의정서가 체결되었다.[4] 이 시기의 이완용은 고종에 의해 촉망받는 신진 관료로, 미국 공사관 주재 경험을 갖춰 친미파로 간주되었으며 춘생문 사건에도 개입해서 고종의 신임도 두터웠고 백성들 사이에서의 평판도 좋았다.[5] 사바틴, 사바찐 등으로 불리는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건축가가 독립문 설계에 참여하였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나 실제로 사바틴이 독립문의 설계자인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일치된 의견이 없다. 첫째로, 서재필의 구술 회고록에서 서재필은 사바틴이라는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 독일 공사관 출신의 스위스인이 설계한 것이고, 다만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뿐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둘째로, 독립문의 설계도나 공사허가증 등 어떤 1차적 공식사료에도 사바틴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사바틴이 독립문의 설계자라는 사료는 조선총독부가 한참 뒤에 간행한 경성역사서에 처음 등장할 뿐이며 그 사료가 사바틴을 독립문의 설계자로 특정한 근거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몇몇 친러 학자들이 독립문의 설계자는 사바틴이라고 주장하는 선전을 피운 사례가 있으나, 실제로 사바틴이 독립문의 설계자라는 어떤 구체적인 사료도 발견되지 않았고, 단지 사바틴이 '스위스 혈통일 수도 있으니' '서재필이 스위스계 혈통이 약간 섞인 사바틴을 스위스인으로 헷갈렸을 수도 있다'는 식의 영양가 없는 추측만이 발표되었을 뿐이다. 반면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사바틴이 독립문의 설계에 참여했다는 주장을 한 번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이 없다.[6] 독립문 앞에 있는 기묘한 돌기둥이 영은문의 주초로, 이후 이 주초는 사적 제 33호로 등록되게 된다.[7] '독립문 태극기'의 경우 3.1 운동 당시 민중들이 태극기의 정확한 모습을 몰라서 경성 주민들의 경우 독립문으로 가서 조각된 태극기를 보고 도안을 그렸다는 일화가 있다.[8] 이 때 성산대교모래내고가도로가 같이 건설되었다.[9]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10] 독립문 외형의 모티브가 된 프랑스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도 옆에 문이 있고 일반 관람객들이 계단으로 꼭대기에 올라 갈 수 있다.[11] 참고로 이 학교를 운영하는 법인의 이름이 '왕희학원'이다.[12] 사실 1959년 ~ 1984년의 공식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면 Dogribmun이 아니라 Doglibmun으로 쓰는 것이 맞았다.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받침 뒤의 ㄹ은 r이 아니라 l로 쓴다는 조항이 있다. 다만 저 조항이 현실적으로 잘 지켜지지 않아서 그랬는지 표지판에 Dogribmun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